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소년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들은 모두 소년이 세상에 나오면서 세상의 중심이 되는 이야기를 다룬다. 놀라운 것은 아니다. 어렸을 때는 모두 자신이 우주의 중심에 있을거라 생각하고, 모든 일들이 자신이 해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소년들의 욕망, 혹은 소년의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 자연스럽게 해소해주는 것이 소년만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더 오랜 과거로 올라간다면 이러한 소년만화의 이야기들은 영웅서사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황금가지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 다룬 담론들처럼, 대중 작품에서 다루는 서사의 상당수는 소년의 성장에 모티브를 두고 있으며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얻는 깨달음과 난관들을 서사의 구조로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들의 논의에서 눈여겨 봐야 하는 것은 ’성공하는 서사‘가 핵심이라는 것이다. 물론 전설이나 신화의 단계에서 본다면 영웅이 실패해서 몰락하는 이야기는 생각보다 많은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대중문화에서 소년이 실패하는 소년만화란 생각보다 정석적으로 풀어낸 것을 찾아보기 힘든 분야다. 애시당초에 사람들은 대중문화에서까지 실패를 찾고 싶지 않다. 하늘까지 올랐다가 뜨거운 태양에 날개가 추락해 떨어지는 이카로스의 깨달음은 모든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보고 싶고 열광하고 싶은 깨달음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는 사이버펑크 2077의 전일담을 다룬 작품이다. 주인공이 나이트 시티를 활보하는 용병이 되어 성공하고 몰락하는 이야기를 다루는 엣지러너는 트리거 특유의 강렬한 색감과 과감한 연출 방식으로 사이버펑크 2077의 세계를 확장한 애니메이션이라 할 수 있다. 엣지러너의 성공은 엄청났어서, 심지어 사이버펑크 2077의 엉망이었던 런칭을 덮어버리고 다시 사람들을 사이버펑크 2077을 하게 만드는 동력을 만들었다.

엣지러너의 핵심은 몰락 그 자체다. 어떻게 주인공인 데이빗 마르티네즈는 밑바닥에서 정상으로 올라가고, 그리고 추락하게 되었는지를 다룸으로써 태양에 너무 가까워진 이카로스의 추락 그 자체를 다루고자 한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들이 지극히 ‘소년만화’의 구조에 맞닿아있다는 것이 엣지러너의 훌륭한 점이다. 화려하게 비상한 만큼 모든 걸 잃으며 추락하는 모습조차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엣지러너에서 눈여겨 볼만한 점은 게임의 클리셰와 전제를 기묘하게 비틀었다는 점일 것이다. 게임을 오랫동안 한 사람들이라면 주인공이 몸에 부하가 걸리거나 위험이 있는 기술들을 어떤 제약이나 패널티 없이 잘 쓰는 것을 자주 본적이 있을 것이다. 사실 게임에서 이러한 제약사항은 어디까지나 플레이어에게 ‘금단의 힘’을 제공하고 금기를 넘어서는 쾌감을 제공해주는 일종의 내러티브를 제공해주는 방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네러티브적인 제한이 플레이어의 힘을 실제 제한하는 케이스들은 상당히 드물다. 하지만 엣지러너는 이러한 클리셰를 교묘하게 이용하다가 뒤틀어버린다.

주인공 데이빗은 크롬(인간을 강화시키는 인공 신체)에 대한 부하를 적게 받는 재능을 가진 인물이다. 사이버펑크 세계에서 크롬을 얼마나 많이 달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무력이 결정되는 것을 생각한다면, 데이빗은 사이버펑크의 세계에서 더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셈이다. 이는 엣지러너의 원작인 사이버펑크 2077에서 용병 V와 구도가 비슷한데 크롬에 대한 적응력이 뛰어난 V가 힘과 인연으로 나이트 시티의 최정상에 오르는 것이 원작 게임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V가 하늘 높이 날아올라 전설이 되었다면, 데이빗은 전설이 되지 못하고 추락하게 된다.

그리고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데이빗은 스스로 전설이자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크롬의 부작용으로 인해서 멈춰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을 때, 그는 자신이 남들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V가 아니었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달리는 자Edgerunner에 불과한 거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그는 경계의 저편으로 넘어가는 것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예외인 자신’ 클리셰를 무너뜨리긴 했어도, 주인공 데이빗의 몰락은 극에서 계속해서 예견되었다. 극 중 데이빗을 움직이는 모티브는 모두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한 것들이었다. 가장 큰 모티브는 1화에서 죽어버리는 데이빗의 어머니의 유언 아닌 유언이었다:‘아라사카의 정상에 오를 것’이라고 죽기전 데이빗과 싸우는 그 순간에서도 이야기했다. 그것이 데이빗을 주박처럼 옭아메고, 데이빗이 끝까지 자신을 밀어붙이다가 경계의 저편으로 넘어가게 만드는 근본 원인이 되었다. 마지막 화에서조차 데이빗이 루시를 구하기 위해서 사이버사이코 상태에서조차 ’아라사카 정상까지 가겠다‘ 라는 이야기하는 장면은 그가 여전히 1화의 주박에 사로 잡혀있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그에게 기회를 주고 성장할 가능성을 준 또래 집단들도 역설적이지만 그의 파멸을 앞당기는데 일조하고 있다. 그의 롤모델이 되었던 메인 역시 그의 사이버사이코 상태의 환상 속에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과도하게 크롬을 사용하고 자신을 밀어붙였던 강박적인 심리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메인이 망가지는 과정 자체는 데이빗의 몰락과 많은 부분 비슷한데, 자신을 끝까지 몰아붙이다가 주변인들을 내치고, 자신의 연인과 친구들을 모두 잃고 사이버 사이코가 되어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메인의 죽음은 데이빗에게 더 많은 신체를 크롬으로 대체하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고, 그의 몰락을 앞당기는 계기로 이어졌다. 

그렇기 떄문에 역설적이게도 시리즈가 끝나고 죽음을 맞이하는 그때까지 데이빗의 심리 상태는 강박과 죽은 자들의 주박에 사로잡힌 자기 자신이 없는 자기 파괴적인 상태였다. 이 때문에 그의 연인인 루시와의 관계 조차도 서로 바라보는 벡터가 달랐다. 첫 만남에서 루시는 데이빗의 꿈 이야기를 듣고는 ’그건 타인의 꿈이 아니냐‘라고 반문한다. 이는 데이빗의 동인을 분명하게 설명하는 동시에, 루시가 삶을 살아가는 관점인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동시에 드러낸다. 그렇기 때문에 데이빗과 루시는 일종의 상극에 서있는 관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서로 삶을 바라보는 관계가 다르더라도 데이빗과 루시의 관계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순수한 관계라는 점이다. 루시가 데이빗을 위해서 아라사카의 해커들을 제거하고 데이빗의 흔적을 숨기고자 했던 것은 그를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그녀의 안전을 지키고자 했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해주었던 것도 데이빗을 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데이빗은 루시를 사랑했지만, 그의 사랑은 루시의 그것과 상당히 달랐다:데이빗은 그녀에게 헌신했지만 동시에 루시의 소망을 이루는 것이 그의 사랑의 형태였다.

이로 인해서 엣지러너의 가장 큰 비극이 완성된다:루시와 데이빗은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방식과 벡터가 달랐기 때문에 이야기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도 감정이 닿았어도 서로의 소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루시는 자신이 죽더라도 데이빗이 죽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을 전했지만, 데이빗은 루시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고 자신의 꿈은 루시의 소망을 이루는 것이라 한다. 가장 마지막의 순간에서조차 두 연인의 소망은 닿을 듯 말듯 하며 교차해버리고 아련한 감정만을 남긴 채 장대한 파멸을 맞이한다.

트리거는 색체와 수직과 수평의 이미지, 그리고 추락과 상승의 동선 등을 통해 위에서 분석한 엣지러너의 이야기 구도를 훌륭하게 구성한다. 아라사카 타워와 달, 데이빗의 추락, 화려하지만 마치 병든 것 같은 채도 높은 노란색의 이미지, 네온 빛깔로 표현된 산데비스탄의 잔상들과 사이버펑크 도시의 느낌 등은 교과서적인 동시에 통일감을 제대로 구성하였다 할 수 있다. 서사의 완성도 뿐만 아니라, 이미지의 완성도가 높기 때문에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는 작품으로써 훌륭한 수준에 이를 수 있었다.

결론을 내리자면,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는 훌륭한 애니메이션이라 할 수 있다. 화려한 이미지와 다르게 본질적으로 엣지러너는 대중매체의 정석적인 흐름을 뒤집고 몰락의 아름다움과 애틋함, 안타까움을 잘 드러낸 탄탄한 작품이다. 기회가 된다면 꼭 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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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성이란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생각하는 '정형적인 모습'이자 '일반적인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지칭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가족의 형태는 부모가 모두 있는 4인 가족에 서울에 있는 자가 주택에, 아버지는 사무직, 어머니는 가정 주부이고...이런식의 요건들을 전제로 한다. 정상성에 대한 규범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사회 구성원에게 일종의 공감대와 무의식을 구성하는 영역이다:가령 우리가 머릿속으로 가족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린다면, 이러한 조건을 가진 가족이 곧바로 연상되는 것처럼 정상성은 일종의 사회적 공통 영역을 만들어낸다. 그렇기 때문에 설령 그 '정상성'으로부터 먼 범주에 속한 사회 구성원이라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논할 수 있는 영역을 가진다는 점에서 공통 담론의 영역을 제기한다.

흥미로운 점은 정상성에 정확히 부합하는 범주의 집단은 통계적으로 '극히 희귀한' 케이스에 가깝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가령 아무 조건 없이 5500만 한국인 중 한 사람을 찾아야 한다면, 그 어떠한 조건없이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가 이 사람의 성별을 특정지을 수 있다면, 5500만 중 절반인 2750만의 인원은 배제하고 사람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이 사람의 주소, 연령대, 직업 등등의 조건을 찾아서 점점 범위를 좁혀 나간다면 그 사람을 특정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프로파일링이라 불리는 영역이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사람의 경향성을 추론하거나 검색 범위를 좁히는 과정이라 할 수 있는데, 범죄학이나 마케팅에서 고객 프로파일링의 영역이 이러한 특징을 십분활용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결론을 도출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상성 집단, 혹은 정상성 가족에 대한 영역은 순수하게 그 조건에 부합하는 집단만 찾는다면 극소수에 가깝다. 누구는 부모중 한명이 이혼했을 것이고, 어느 부부는 자식이 없을 것이다. 누구는 아파트가 아니라 빌라에 살 것이고, 누구는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 외곽이나 천안이나 이런 곳에서 출퇴근을 할 수 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도 정상적인 가족이나 정상성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다. 정상성이란 좀 더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그저 우리 머릿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정상성, 특히 정상 가족에 대한 담론들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작품들이나 영화들이 많았던 것도 그렇게 놀랍진 않다. 모두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지만, 동시에 실존하지 않는 존재, 그리고 그 사이의 간극에서 느껴지는 괴리감에 집중하여 문제를 드러내어 그것을 풍자하거나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 이런 작품들의 주요 테마였다. 그리고 몇몇 작품들은 '정상성이라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비꼬아서 공포의 영역으로 끌고자 했다:실제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의 무의식에서 우리를 억압하고, 우리의 진짜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적 억압의 본질을 드러내려는 작업이었다.

영화 페어런츠는 그러한 정상성에 대한 공포를 드러내는 영화다. 부모가 사실은 식인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나중에는 그것이 진짜로 밝혀지지만) 소년의 어두운 성장기를 다루고 있는 영화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감과 정상성의 이미지를 비튼다.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의 시대 배경이 1950년대 미국이라는 점이다:1950년대 미국은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 이후로 사회 경제적으로 황금기를 맞이한 미국은 겉으로는 밝고 행복한, 그야말로 정상성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것이 무너졌고, 베트남전이라는 충격을 통해서 히피즘과 거대한 아노미를 겪었던 것이다.

페어런츠가 눈여겨 보는 것은 바로 이런 부분이다. 아노미를 겪기 전, 곪아터지기 전의 들끓어오르는 열과 통증 처럼, 그로테스크하게 퍼져나가는 부패의 에너지를 음식과 정상 가족에 빗대어서 공포 영화의 장르로 묶은 것이다. 또한 '먹을 것'이라는 이미지에 집착하는 부분도 강렬한 이미지를 생성하는 부분이다. 얀 츠방크마이어가 이야기했듯이, 입이란 인간의 기관 중에서 가장 야만적인 이미지를 가진 기관이고, 식사란 가장 야만적인 행위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식사는 정상성, 특히 가족과 관련된 이미지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기도 한다. 가족을 부르는 식구라는 표현이 같이 받을 먹는다라는 표현에 기반하듯이, 식사를 함께하는 가족, 식사를 준비하는 어머니라는 이미지와 식사를 주관하는 아버지라는 존재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하지만 페어런츠는 이러한 이미지를 뒤틀어버리고 식인이라는 이미지를 섞음으로써 정상성과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행위 자체를 크게 왜곡시킨다. 하지만 동시에 그 왜곡된 이미지가 뜬금없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섞였다고 느껴지는 부분도 이러한 식사의 이중적인 이미지와 본질을 잘 잡아냈기 때문이다.

사실 어떻게 본다면, 정상성이야말로 근현대 사회가 보고 있는 가장 신화화된 개념에 가까울 것이다. 차라리 중세 사회였다면 분절되어있는 무수히 많은 세계가 공존하였겠지만, 현대사회에서는 하나의 사회를 유지한다는 신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신화를 해체하는 작업을 수많은 작품들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시간이 흐른다면 1950년대의 정상성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정상성이나 다양한 형태의 정상성들을 발굴하게 될 것이고, 그것을 깨는 작품들이 등장할 것이다. 이러한 행위 자체는 현대사회라는 개념이 새롭게 재정의되는 한, 계속해서 반복될 행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게임 이야기



바이오하자드 4의 등장은 바이오하자드 시리즈의 큰 전환점이었다. 심지어 좀 더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현대적인 숄더뷰(어깨 너머로 바라보는) TPS의 등장은 바이오하자드 4와 함께 시작이 되었다고 해도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이오하자드 4는 프랜차이즈 전반에 있어서 하나의 ‘성배‘와 같은 물건이라 할 수 있었다. 바이오하자드 4에서 등장한 체술이나 숄더뷰 시점의 게임 플레이, 그리고 B급 액션 영화 같은 QTE와 연출 같은 부분들은 바이오하자드 5편, 6편, 리빌레이션, 심지어는 장르 변화가 일어난 7편의 DLC나 8편 전반에 나왔다. 또한 수많은 서바이벌 호러 게임들 역시 바이오하자드 4의 영향을 받았다. 멀리 갈 필요 없이 데드 스페이스의 게임 플레이가 바이오하자드 4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었다.
바이오하자드 4 RE(이하 4 리메이크)는 바이오하자드 4의 리메이크 작품이다. 바이오하자드 2 RE 이후로 3편을 리메이크한 캡콤이 4편을 리메이크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프랜차이즈에서 어떻게 보면 ‘불가침’ 영역이었던 4편을 리메이크한다는 것은 2편을 리메이크하는 것과 다른 경지였다. 특히나 2편과 같이 오래되서 게임에 대해서 재해석 될 여지가 많았던 것과 비교하면 4편은 현대적인 서바이벌 호러 장르의 게임 초석을 다진 작품이기 때문에, 오히려 장르 관점에서 본다면 재해석할 여지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도 사실이었다. 요약하자면, 바이오하자드 4는 그대로 옮기기에는 그동안 많은 장르의 발전이 이루어진 작품이라 더 나아질만한 요소를 추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바이오하자드 4 리메이크는 그런 점에서 보면 놀라울 정도로 성공한 게임이라 할 수 있다. 바이오하자드 4 리메이크의 핵심은 바이오하자드 4의 전투 시스템을 새롭게 양식화하는 영역이라 할 수 있다. 바이오하자드 프랜차이즈에서 4편의 존재는 체술의 추가였다. 기본 바이오하자드 시리즈가 서바이벌 호러의 문법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제한된 총알을 적절한 곳에 잘 사용하는 것이 중요했다. 체술은 이러한 총알을 아끼고  전투의 흐름을 좀 더 역동적으로 재정의하기 위한 시스템이었다. 가령, 적의 무릎을 쏴서 자세를 무너뜨리고 체술로 데미지를 입혀서 적을 쓰러뜨린다면, 그만큼 총알을 아낄 수 있었다. 동시에 상단 하단만 노릴 수 있었던 기존의 조준 시스템을 일신해서 다양한 적들의 부위를 노리게 만든 점도 바이오하자드 4에서 다듬은 부분이었다.
바이오하자드 4에서 체술의 등장은 몬스터 디자인이나 게임 디자인을 일신하게 만들었다. 일반적인 게임과 다르게 ‘머리를 노리면 적이 더 강해질 수 있다’라는 개념은 참신한 부분이었다. 또한 총격을 받고 쓰러진 적들이 더 강한 강화체로 등장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적들을 틈틈히 칼로 찔러 무력화 시키는 요소를 집어넣는 등 일반적인 슈터류 게임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시스템들이 등장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체술을 통해서 편해진 부분들을 다양한 새로운 요소들로 보완해나간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들의 대부분은 공격 시스템 부분에서 이루어진 변화였고, 바이오하자드 4의 정체성으로 자리매김 했다.
4 리메이크는 ‘방어적’인 부분을 요소를 개선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우선 4 리메이크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나이프로 할 수 있는 것이 늘어났다‘다. 본편에서 나이프는 누운 적들에게 추가타를 입히거나, 총알을 아끼는 용도로만 사용했다. 그러나 리메이크 버전에서는 나이프로 ‘패링’을 할 수 있게 되었다:적의 근접 공격을 처냄으로 빈틈을 만들어낼 수 있는데, 이것으로 적의 움직임을 막거나 타이밍을 정확하게 맞추면 근접공격으로까지 이어줄 수 있다. 막을 수 있는 공격의 범위가 상당히 넓은데, 4편 원작에서 닥터 살바도르의 즉사기도 리메이크에서는 칼 패링으로 막아낼 수 있다. 플레이어에게 전방위적인 방어 수단을 제공해준 대신 4 리메이크에서는 2 리메이크에서 했던 것처럼 칼에 내구도를 추가하여 소모품으로 사용하게끔 만들었다. 나이프를 다 쓰게 되면 패링이나 다양한 액션들이 막히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항상 나이프의 수량을 체크해야 한다.
패링 이외에도 패링이 불가능하지만 ‘앉아서 회피할 수 있는 공격‘ 요소를 추가한 부분도 눈여겨 볼만하다. 나이프 패링과 앉아서 회피 같은 요소가 추가되면서 플레이어가 방어적인 부분을 능동적으로 신경써야 하는 부분들이 늘어났다. 즉, 바이오하자드 4 리메이크는 공격과 함께 방어를 같이 추가하면서 공수 시스템을 모두 완성했다.
바이오하자드 4 리메이크는 마치 교과서처럼 내려온 게임에서 ‘더 나아질 부분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서 완성시켰다는 점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그리고 그 고민이 4편의 등장 이후, 거의 20년 동안 수많은 게임들이 고민하고 발전시킨 부분을 이어받아서 완성시켰다는 점은 기존의 게임들을 공부한 점도 그러하다. 최근 작에 비추어 본다면 총기와 근접전을 결합시킨 칼리스토 프로토콜 같은 게임들이 있을 것인데, 이런 작품보다 오히려 기존 게임의 강점을 살리며 여지껏 있었던 변화들을 모두 반영하였다는 점에서 캡콤의 개발 철학과 기술력을 집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론을 내리자면 바이오하자드 4 리메이크는 리메이크라기 보다는 거의 새로운 형태의 게임이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줄 수 있다. 물론 여전히 큰 흐름이나 게임 플레이가 4 원작에서 크게 변화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4 리메이크는 4의 연장선이고, 7과 같이 방향을 완전히 틀어버린 물건은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4의 리메이크는 7과 같이 새로운 바이오하자드의 가능성을 연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서바이벌 호러에서 공격과 방어를 하나로 엮어서 근접 총기 격투(?) 게임 플레이의 한 획을 그었다. 서바이벌 호러라는 장르에 거부감이 있는 것이 아니면 4편 리메이크는 꼭 해볼만한 작품이다.

게임 이야기

 

 

바이오하자드 7의 성공은 다른 바이오하자드 시리즈에 비해서는 작은 편이었지만, 6편의 거대한 실패 이후로 바이오하자드 시리즈에 대한 장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바이오하자드 7의 성공은 바이오하자드 시리즈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하나의 이정표를 제기한 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7의 형식을 취하면서 만들어진 바이오하자드 8의 모양새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이 쏠릴 수 밖에 없었다. 

바이오하자드 8은 바이오하자드 7을 골격으로 삼은 바이오하자드 넘버링 작품의 최신작이었다. 최근에 나온 리메이크 작들을 제외한다면, 바이오하자드 8은 바이오하자드 중 가장 '현대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후에 리뷰할 바이오하자드 4가 한 때 완벽한 게임을 한 단계 더 진일보 시키는 게임이었다면, 바이오하자드 8은 기존의 바이오하자드들을 7의 포멧으로 옮기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바이오하자드 8의 핵심 테마는 '7의 포맷으로 재탄생한 바이오하자드 테마파크'다. 바이오하자드는 시리즈의 오랜 역사 동안 수많은 테마들을 게임으로 옮겼고, 의외로 시리즈 내에서 많은 장르 포멧을 소화한 프랜차이즈였다. 전통적인 저택식 서바이벌 호러인 1편에서부터 대규모 재난 서바이벌이었던 3편, 5편과 6편,  액션 장르를 게임에 접합시킨 4편 등등 프랜차이즈는 하나의 틀에 얽메이기 보다는 다양한 시도와 변주를 만들어내었다. 바이오하자드 8은 7의 기반을 재활용하는 동시에, 7이라는 새로운 포멧(1~3편의 고정 시점의 게임 플레이, 4~6편의 TPS 게임 플레이, 7편의 FPS까지)을 어디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가를 테스트해보는 자리인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러한 확장을 이뤄내기에는 바이오하자드 7의 전투 시스템이 앙상한 뼈대에 가까운 물건이었다는 점이다. 7편에서 전투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플레이어가 A에서 B로 가는 것을 막기위한 길막의 요소이자, 플레이어가 혐오스럽고 역겨운 적들을 강제로 바라보고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이었다. 즉, 전투는 꼭 해야하는 것이 아닌 우회하거나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요소라 할 수 있는데, 서바이벌의 성격이 강했던 바이오하자드 초기 시리즈(1편이나 2편 같은)에서는 이렇게 좀비를 무시하고 달리는 그런 요소들이 어느정도 있었고 바이오하자드 7의 전투도 그러한 연장선에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바이오하자드 7편의 전투 자체가 바이오하자드 6편이나 레벨레이션즈 같은 현대적인 바이오하자드의 영향도 받았다는 점일 것이다. 1편부터 5편까지 이어지는 근 20년 간의 역사에서 무빙샷이 안된다는 플레이어들의 불만을 받아들인 것인지, 아니면 전투에 새로운 요소를 추가하려 했는지는 모르지만, 중요한점은 무빙샷이 추가되면서 상대방과 플레이어 사이의 미묘한 간극을 조정하는 요소가 추가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이오하자드 7편은 6편이나 레벨레이션즈 같은 바뀐 전투의 요소를 기본적으로 탑재하고 있고, 어느정도의 가능성을 갖고 있는 셈이었다.

그렇기에 8편의 전투는 7편의 흐름을 이어받으면서 좀 더 다듬은 케이스라 할 수 있다. 8편 역시 FPS 형태의 게임 구조를 취하고 있고, 이는 7편과 유사하다. 그러나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스케일'일 것이다:플레이어가 탐색하는 공간은 커졌고, 등장하는 적들도 늘어났으며, 공간도 이전에 비해서 훨씬 복잡해졌다. 그러나 8편의 규모가 거대해졌더라도, 본질적으로는 7편의 1대1 구조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적들이 여럿 존재하더라도 '한 번에 한 명씩'만 공격을 하고 좁고 긴 맵 구조에서 벌이는 전투나 이런 부분들은 7편과 이전 작품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바이오하자드 8편에서 재밌는 부분들은 1대1 상황에서 적들이 일종의 '격투 게임 장르'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적들은 플레이어와 싸울 때 좌우 스텝을 밟는 일종의 심리전을 걸면서 접근한다. 적이 총을 맞으면 뒤로 밀려나면서 심리전이 리셋이 되고, 적을 밀어내지 못하면 플레이어는 적에게 공격을 받는다. 이 때 공격 데미지를 줄이기 위해서 플레이어는 방어 자세를 취할 수 있는데 방어 자세를 취했을 경우 데미지를 경감시키는 동시에 상대와의 거리를 강제로 벌리는 밀치기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과정들을 반복하면서 적들을 한명 한명 격파해 나가는 것이 바이오하자드 8편의 전투 매커니즘이다.

이러한 시스템이 갖춰지면서 바이오하자드 8은 기존 시리즈들이 갖추고 있었던 다양한 기믹을 하나의 게임에 녹여낼 수 있었다. 우선 8편에서 4대 가주의 스테이지들은 과거 1편, 2편의 대저택(드미트리쿠스), 7편의 호러 기믹(베네비엔토), 5,6편의 대규모 재앙 액션(모로, 하이젠베르크) 같은 기믹들을 8편의 형태로 재해석해서 옮긴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드미트리쿠스의 저택일 건데, 드미트리쿠스의 저택은 바이오하자드 2 리메이크에서 보여주었던 미스터 X의 추적 기믹과 저택의 비밀을 풀어나가는 과거의 바이오하자드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8편은 일종의 '테마파크' 같은 게임이라 할 수 있는데, 바이오하자드의 가장 좋았던 부분들을 따와서 8편의 포멧으로 다양하게 즐기는 게 핵심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아쉬운 부분들도 생겨난다:각각 저택들의 가장 재밌는 부분이나 가장 좋았던 부분만 다루고 있는데, 그 부분이 감질나게 분량이 조절되어 있고, 통일되지 않아 하나의 게임이라기 보다는 모자이크화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모자이크화 되어서 완벽하게 따로 노는 몇몇 작품들과 다르게 바이오하자드 8편은 그래도 8편이라는 틀 안에 모든 테마들을 담아두고 있기 때문에 게임으로써는 완결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결론을 내리자면, 바이오하자드 8편은 바이오하자드 시리즈를 집대성한 작품인 동시에 7편의 포멧으로 할 수 있는 최대를 보여준 작품이다. 물론 각각 개별 테마가 너무 감질나기 때문에 아쉬운 부분들이 있지만, 동시에 하나 하나 잡고 보았을 때 완성도가 있어서 감질난다고 생각한다면 게임의 완성도가 그만큼 높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7편과 8편, 그리고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서 정점에 오른 캡콤의 개발력을 감안한다면, 바이오하자드 9편도 기대를 가져볼 수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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