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2000년대 이후 등장한 에일리언 삼부작은 과거 에일리언 4부작(1~4편까지)에 대한 일종의 거부이자 리들리 스콧의 오리지널리티를 강하게 선언하는 작품이었다. 프로메테우스 3부작은 제임스 카메론, 데이빗 핀처 등을 부정하는 것이었으며 심지어는 그 당시의 리들리 스콧 그 자신 조차도 부정하고 있어서 에일리언이 나온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같은 시리즈의 영화로 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품이었다. 오히려 프로메테우스는 리들리 스콧의 최근 프로젝트의 연장선에서 봐야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최근 종교라는 테마에 상당히 깊은 관심을 보인 리들리 스콧의 다수 작품의 연장선에서 볼수 있으며, 에일리언이 탄생한 과정을 일종의 구약과 신약, 그리고 신화적으로 재해석하면서 SF판 성서를 만들고자 한 야심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와 파괴(프로메테우스), 믿음, 신앙의 공동체(코버넌트), 그리고 건국 신화(로물루스)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뚜렷하고도 일관된 흐름을 보여준다.

먼저 프로메테우스부터 쭉 살펴보자. 프로메테우스는 창조주가 인간을 만들고, 또한 파괴하려한다는 대중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평이한 모티브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그러한 과정에서 '의도'가 불가해하다는 점일 것이다:어째서 창조주는 인간을 파괴하려 하는가? 그것은 대사나 서사로 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관객들은 어디까지나 창조주와 인간의 관계를 인간과 인조인간의 관계로 유추하여 알레고리를 구성해야 한다. 이러한 알레고리를 구성하기 위해서 크리처 영화라고 보기엔 다소 비정형적이고 장르 파괴적인 이야기를 관객들이 오래 봐야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종교적인 창조의 신비와 공포에 대한 알레고리를 무기질적인 마스크를 한 패스벤더의 데이빗이라는 캐릭터로 풀어낸 프로메테우스는 장르 서사가 아닌 묘한 컬트적인 인상이 강한 작품이었다. 그것은 종교를 SF로 은유(창조주 - 인간을 인간 - 인조인간의 관계로 은유하여 해석)함으로써 에일리언에 일종의 종교적 신화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에일리언 3편의 종교적 분위기와 다른 점은 에일리언 3편이 희생제의나 구원에 대한 논지였다면, 프로메테우스는 가족이라는 관계를 차갑고 무미건조한 톤으로 재해석하여 종교의 알레고리를 드라마로 바꾸는데 있었다.

그러나 코버넌트에서 이러한 분위기는 바뀌게 된다. 데이빗은 창조주들을 맥거핀으로 만들어버렸고, 더이상 부모의 유사 관계는 극에서 큰 힘을 잃는다. 대신 에일리언 시리즈 특유의 뒤틀린 '창조'의 이미지는 여기서 신앙이자 믿음의 형태로 변화한다. 프로메테우스에서는 동일하지 않지만 유사점을 갖는 두 관계를 병렬로 보여주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드라마의 영역을 통해 설명이 없는 신비한 영역을 이해할 수 있게끔 만들었다. 그러나 코버넌트에서는 다양한 믿음의 공동체('더 나은 세계, 식민지를 찾고자 하는 자들의 믿음의 공동체' 또는 '인조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월터의 믿음', 마지막으로 '위대해지기 위해서 부모를 살해하고 생명을 잉태하고자 하는 데이빗의 믿음')들이 등장하였고, 이 믿음의 공동체들이 서로 영향력을 주고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코버넌트의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믿음이 결국 데이빗의 뒤틀린 믿음(제노모프의 탄생과 창궐)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예정된 이야기들 때문에 다른 믿음이 상대적으로 묻힐 수 밖에 없는 문제가 있었다. 결국 제노모프의 탄생을 위해서 허무하게 코버넌트 호의 승무원들과 월터가 희생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피카레스크 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데, 피카레스크 적으로 느껴지기에는 데이빗의 주장은 단지 '여성기와 남성기 없는 자의 뒤틀린 욕망' 수준으로 밖에 안 읽히는 다소 식상하고 저급한 부분들이 있다. 프로메테우스의 무기질적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데이빗이 후속작에서는 쇼에게 유사 마운팅을 하면서 뒤틀린 자식에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은 결국 이 케릭터 조차도 자신 창조주보다 더 나은 야망을 가지지 않은 뒤틀린 놈이었다는 실망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로물루스는 프로메테우스나 코버넌트의 이질감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로물루스라는 제목에서부터 작품은 제목에서 많은 신화적인 관점에서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로마를 건국하였지만 역사적인(=실제 존재하는지) 인물인지 논란이 있는 로물루스를 제목으로 선정한 것에서부터 영화의 방향성이 '신화'에서 '역사'로 넘어가는 순간을 다루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로물루스라는 인물의 행적들과 의미들(건국의 과정에서 형제인 레무스를 죽인 점, 로물루스라는 이름이 언어학적으로는 '로마인'을 의미한다는 점 등)을 비추어 보았을 때,  데이빗이 만들어낸 뒤틀린 창조물들이 하나의 왕국을 만들고, 더 나아가서 에일리언 1에서 4까지 이어지는 서사의 중요한 연결고리를 만드는 과정이 된다고도 예측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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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대중문화에서 유행의 중요한 속성은 죽음과 일시성이다:죽지 않는 유행이란 결국은 상수로 자리잡기 때문에 어디에도 존재하여 모두가 향유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모두가 향유하는 상수로써 문화란 고유성과 개성이 없어지게 된다. 사람들이 유행을 따라서 즐긴다는 것은 문화를 향유하면서 자기 또는 집단만의 개성을 가지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대중문화에서 유행은 환경과 변수를 잘 만나면 화려하게 불타오르지만, 동시에 환경과 변수가 사라지게 되면 덧없이 사라지게 된다. 그런 점에서 유행을 잘 타서 흥행하는 작품은 가볍고 화려하며, 세태를 정확하게 찌르는 맛이 있다.

주술회전은 인터넷에서 논란이 되었듯이 주술회전은 흥행했던 유명한 작품들을 상당수 오마주 하거나 모티브를 따오는 등 다른 작품의 콜라주 같은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흥행작들을 배꼈다는 사람들의 인상 비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최근 1~2년 동안 인구에 회자될 정도로 대중문화 유행의 한 꼭지를 차지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독창성이 부족하더라도 그것을 엮는 작가의 역량이 뛰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성공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작가가 그 이상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혹은 '멋진 것은 멋진 것이야'라는 생각으로 작품을 접근 했기 때문에 한계가 생긴 작품이기도 하다.

주술회전의 핵심은 말이 안되는 이야기를 '멋지게 엮는 것'에 있다. 다양한 작품의 요소들과 모티브를(헌터 헌터, 블리치 같은 소년만화에서 호러만화의 연출 등등까지) 취하고 있지만, 그것을 배끼기만 했다면 이정도의 성공을 거둘 수 없다. 사람들이 의외로 무시하는 것은 대중문화가 서로 서로 모티브와 요소들을 주고 받는다는 점이다. 성공한 작품이든 실패한 작품이든 서로의 좋은 점은 배끼고 나쁜 점은 배제하는 일종의 수렴 진화와 거기에 자신만의 요소를 집어넣는 실험을 반복해나간다. 중요한 점은 배꼈다, 배끼지 않았다의 영역이 아닌 '그것을 어떻게 하나로 엮는가'라는 작가의 역량과 철학의 영역이다. 주술회전의 강점은 '어떻게 하면 멋지게 엮을 수 있는가'라는 점에서 작가가 좋은 센스를 발휘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가 고죠 사토루라는 인물이다. 작품 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인물이고, 세계의 법칙과 흐름을 바꿀 정도로 강하지만 강한만큼의 무게감이나 진중함, 사명감은 없고 가볍고 촐싹거리지만 동시에 멋쟁이인 고죠 사토루는 작품의 미학을 관통하는 부분들이 있다. 오히려 주인공인 이타도리 유지와 그 동료들이 성장하거나 겪는 모험보다 '고죠 사토루가 어떻게 되는가?'라는 이야기의 흐름을 구성하고 있고, 그만한 강렬한 연출과 설정을 구축하였기 때문에 팬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을 수 있다.

재밌는 점은 좀 매니악한 작품이긴 해도 고죠 사토루라는 케릭터의 조형 자체는 바키 시리즈의 한마 유지로와 맥이 닿아있다는 점이다. 한마 유지로 역시 세계관과 작품을 구성하는 강한 인물이고, 모든 인물과 이야기, 설정의 중심에 존재해서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동력을 제공해주는 인물이다. 하지만 바키 시리즈의 한마 유지로와 고죠 사토루의 큰 차이점이 있다면, 한마 유지로는 작가의 강함에 대한 철학과 미학에 의해서 과대포장된 인물이라면 고죠 사토루는 어디까지나 '팔릴만한 가벼움'으로 무장한 인물이라는 점이다:과격한 근육으로 무장을 한 한마 유지로와 달리 훤칠한 키와 미모, 잘 빼입는 패션 스타일로 포장된 고죠 사토루는 사람들의 호감을 사기 좋은 인물 조형이라 할 수 있다.

재밌는 점은 이러한 흐름들이 기존 작품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주술회전은 "일종의 엇박"을 통해서 정형성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데 주력한다. 이타도리 유지가 주술고전에 입학한 이후로 첫 죽음을 맞이하는 부분이나 마히토와의 첫 싸움, 시부야 사변에서 신주쿠 결전까지 이어지는 과정에서 작품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정형성을 벗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예측하기 힘들어서 사람들을 흡입하는 매력을 가졌다. 

그러나 주술회전의 문제는 감각적인데 너무 치중한 나머지 작품을 과한 것들로 채워넣었다는데 있다. 예를 들어 시부야 사변 같은 경우 고죠 사토루를 잡기 위해서 악역들이 꾸민 음모와 악행의 규모가 너무 커서 과연 '이 이후에 이야기를 제대로 끌고 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는 연출로 가득차 있다. 마허라와 스쿠나의 대결이 바로 그 예인데, 연출의 화려함과 강렬함과 별개로 '이후에 이걸 수습할 수 있나?', '이게 전개에서 꼭 필요했는가?' 라는 의문이 가득찰 수 밖에 없는 전개였고, 시부야 사변 이후 사멸회유에서 신주쿠 결전까지 이어지는 흐름에서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떨어지는 부분도 그런 구심점을 잡고 작품을 통제하지 않은 채 강렬함을 추구하다 보니 작품 전체 이야기의 균형이 깨지게 된 것이 크다고 볼 수 있다.

결론을 내리자면 주술회전 자체는 즐기기에 훌륭한 대중문화 작품이지만, 동시에 너무 가벼운 나머지 잊혀지기 쉬운 유행 그 자체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작가가 작품에 개똥철학을 갖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하는 일이 많지만, 역으로 작가가 작품에 개똥철학이라도 집어넣어 균형 맞추었으면 하는 기이한 작품이 바로 주술회전이다. 점점 뒤로 가면 갈수록 그 힘을 잃어가는게 느껴져 아쉽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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