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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의 도입부, 영화는 무수히 많은 전쟁들과 어린이 피해자들에 대한 통계를 담담하게 읊는다. 이를 통해 영화는 전쟁이라는 폭력을 가하는 어른, 그리고 그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피해자 어린이라는 도식적인 구도를 구축한다. 이 구도는 익숙한 클리셰이자 대중문화나 이야기를 넘어서 현대 사회의 도덕율을 관통하는 구도다. 그 도덕율이란 먼저 온 자들이 뒤에 올 세대들을 보호하고 더 나은 길로 나아갈 수 있게끔 배려하는 것이다. 이 도덕율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새로 사회로 들어온 자들이 사회를 채울 수 없을 것이고 사회는 점차 말라 시들어 죽을 수 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도덕적 딜레마가 현대적인 것이기도 하다:상대적으로 영아 생존율이 낮고, 노동하는 청장년 계층이 나이 어린 세대원보다 더 중시되는 근대 이전 시대에는 이러한 도덕율과 감수성이 일반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살기 어려운 시대라도 '부녀자'를 쉽게 죽이는 관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린이를 손쉽게 살육하는 것에 대해서 어느정도 거부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좀 더 정확하게 짚자면 아녀자를 죽이는 대신 노예로 삼는 일이 더 흔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의료기술의 발전과 수명의 연장, 생산력의 증대 등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게 되면서, 이러한 어린이라는 약자를 보호하는 도덕율이 틀을 갖추고 당위성을 강하게 갖게 된 것도 사실이다.

 

누가 어린이를 죽일 수 있는가는 위와 같은 현대적인 도덕율과 딜레마(실제로 어른 세대가 젊은 세대를 피해자로 만드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는 좀비물이라는 장르를 따르고 있다: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라는 전설적인 영화 이후, 많은 수의 좀비물들(모든 좀비물은 아니다, 몇몇 좀비물들에서 대중이 등장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은 산업 사회와 도시 문명의 도래 이후 등장한 '대중과 군중'에 대한 공포를 스펙타클로 다루었다. 대상화된 대중이자 주인공과 관객들로부터 유리된 존재인 좀비들은 그야말로 낯선 사회와 세상의 종말 그 자체다. 그리고 여기에서부터 모든 좀비물은 좀비(=대중과 현대사회)에 대한 각기 다른 해석을 가미하면서 다양한 맥락을 쌓아올려왔다.

 

영화는 이 좀비와 군중을 '어린이'로 채워넣으면서 좀비물 장르에 도덕적 딜레마를 뒤섞는다. 어린이 좀비의 존재는 더이상 내가 아닌 대중에 대한 공포가 아닌 '도덕적 딜레마 그 자체'가 된다. 미래세대, 사회의 희망, 그리고 약자 등등, 어린이를 죽이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상당한 터부이며, 심지어 몇몇 대중문화권에서는 자극적이라 여겨 쉽게 다루지 않는 요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누가 아이를 죽일 수 있는가? 라는 영화가 시작하는 지점은 그러한 현대적인 도덕율과 아이 살해의 터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현실 그 자체'다:이미 영화의 도입부에서 언급했듯이, 무수히 많은 전쟁들과 사회의 붕괴는 사회적인 약자인 어린이 피해자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즉, 누가 아이를 죽일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이미 아동살해라는 끔찍한 상태를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런 끔찍한 전제에서 출발하기에 영화는 '순수한 아이들이 충분히 도덕적이지 못한 어른을 심판하는' 소설과 영화 등의 클리셰를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직접적으로 에리히 케스트너가 쓴 동물들의 대회의나 5월 35일 같은 작품이나 좀 더 더 폭을 넓게 본다면 미하엘 엔더의 모모 같은 작품들이 이러한 클리셰를 따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초반에서 어른들의 악행의 가장 큰 피해자가 어린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처럼, 영화는 일견 피해자가 가해자를 심판하는 이야기로 보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절망은 그런 클리셰를 넘어 더 깊고 어두운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어린이들이 공동체를 구성하여 어른을 죽이는 괴현상에 대한 '트리거'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몇몇 추측과 감염에 대한 묘사, 마지막 엔딩의 대사를 통해서 우리는 그 원인을 유추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이러한 클리셰의 결론과 영화의 내용들이 대치된다는 것이다:피해자가 가해자를 심판하는 이러한 구도의 작품들은 결국 어린이들이 어른을 심판하는 동시에 용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이러한 작품들은 새로운 세대가 어른 세대를 용서하고 함께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희망'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어린이가 어른을 죽이는 시퀸스를 구성하는 히스테리컬한 컷과 신경을 긁는 음향 연출, 그 사실에 좌절하는 주인공의 절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어린이를 죽일 수 없는 주인공의 딜레마를 다루는 연출까지 영화는 그 어떠한 안전장치 없이 헐리웃에서 제작된 공포영화보다도 더욱 더 사람을 몰아붙이며, 심지어 마지막에는 그 모든 희망의 가능성조차 버리게 만든다.

 

이러한 극단적인 절망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깔려있다. 영화는 스페인 군부독재 말기에 제작되었고, 군부 독재와 억압에 대한 깊은 절망감이 영화에 깊이 깔려있다 할 수 있다. 영화 자체는 그러한 사회적 함의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이 절망감은 당시 스페인 영화계에 깔려있는 깊고도 강렬한 감정이었다. 대표적인 예는 스페인 시절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들일 것이다:종교는 자본가와 결탁하여 카드놀이나 하고, 성체는 모욕당하며, 희망은 없고 파시스트들이 데모하는 사람들을 쏴죽인다. 영화에는 이러한 것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당시 스페인 군부의 검열이 심했기 때문이다), 이 뜬금없는 좌절감과 절망감들은 극을 일반적인 장르 안전장치 바깥으로까지 밀어붙이는 동력이 된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한 절망감을 그저 감정에서 끝내지 않고 논리적인 구조로 안착시킨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전화 교환원의 죽음을 다루는 시퀸스일 것이다. 이 시퀸스는 교회라는 공간을 죽은 여자의 옷을 들고 춤을 추는 소녀들 - 시신을 성희롱하는 소년들 - 고해성사를 흉내내는 어린이들로 3등분한다. 영화 내내 보여지는 긴장감 넘치는 구조와 다르게 묘한 맥락을 가지는 이 장면은 추악한 인간의 행동을 초현실적으로 축약하는 부분이다. 교회라는 성스러운 장소 아래서 살해한 타인의 재물을 갈취하고(소녀들), 성에 대한 추잡한 욕망을 드러내며(소년들), 그것을 고해성사하여 퉁치는 모습(고해성사를 흉내내는 아이들)을 통해서 그들이 하는 행동 자체가 어른들이 하는 행동들, 인간 만마전의 축소판이라는 것을 논리적으로 구성한다.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에 어른을 살해하는 어린이의 입을 빌려서 이 모든 것이 '놀이'라고 이야기한다:놀이는 실제가 아니지만, 그 실제를 모방하는 사회적 행동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실제'를 모방한단 말인가? 그것은 바로 폭력 사용하는 어른들로부터 말이다. 영화는 어른과 아이의 관계가 일반적인 가해자-피해자의 이분법적인 구도가 아닌, 어른의 폭력이 아이의 폭력으로 대물림되는 구조라고 이야기한다. 사람을 죽고 죽이는 것을 즐기는 세대의 순환고리라 이야기하는 영화의 절망감은 많은 공포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밑바닥이 없는 절망감이다.

 

이러한 절망의 논리구조 아래서, 영화는 전개 내내 이렇게 빠져나갈 수 없는 절망감과 광기로 인물들을 몰아붙인다. 마치 '이래도 선(아동 살해)을 안넘을래?', '선을 넘어도 답이 있을거 같아?' 식으로 이야기를 몰아붙이는 영화는 많은 대중문화의 금기들을 뛰어넘는다. 주인공을 자신을 죽이려 하는 아이를 쏴죽이고, 주인공의 아내는 자신의 태아에 의해서 내부에서부터 내장이 찢겨져 나가 죽으며,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주인공은 변해버린 아이들을 향해서 기관총을 난사하고 자신만 살아남겠다고 달려나가고, 변해버린 아이들과 싸우며 절규하다 경찰의 총에 맞아죽는다. 이 모든 과정들에서 드러나는 절망감과 긴장감은 그 어떠한 희망도 없는 깊은 절망감이다.

 

결론적으로 누가 아이를 죽일 수 있는가는 정말로 훌륭한 호러영화라 할 수 있다.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공포를 넘어서 '절망감'을 사회적 도덕률과 터부를 이용해서 훌륭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호러 영화를 좋아하고 기회가 된다면 꼭 볼 것을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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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개인적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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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괴물 영화에서 괴물의 본질은 그로테스크함이다. 그리고 그 그로테스크함은 인간이 갖고 있는 어두운 속성과 맞닿아 있다. H.R.기거가 디자인하고 리들리 스콧이 감독한 에이리언의 제노모프가 성기와 삽입, 섹스, 생명의 재창조에 대한 기괴한 은유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 기괴한 은유는 필연적으로 고전적인 괴물에서 찾아볼 수 없는 현대적인 에너지의 폭발에 기반한다. 고전적인 괴물이 동물과 인간을 섞거나 동물을 재해석함으로써 동물이 갖고 있는 특수성에 주목하였다면, 현대 영화 매체의 괴물들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산업화되고 재생산된 기괴함,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욕망과 공포에 주목한다.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두 영화, 그들Them!(1954)과 그것은 살아있다It's Alive(1974)이다. 20년의 텀을 두고 세상에 나온 괴물 영화는 서로 다른 공포(방사능 오염과 유전자 변이에 대한 공포 vs 탈리도마이드와 기형 임신, 중산층의 사회적 위신을 둘러싼 불안과 공포)가 각각의 괴물(거대화된 거미와 살인 괴물 아기)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구현되었다. 서로 소재와 내용, 연출 톤에도 불구하고 이 두 영화는 클라이맥스에서 LA의 하수도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묘한 접점을 갖는다. 마치 거대한 도시의 아래 구불구불 꼬여 있는 내장과도 같은 하수도를 해매며, 두 영화에서 인물들은 가장 내밀한 공포와 마주한다.

 

먼저 그들Them!(1954)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영화는 명백히도 원자력 시대의 도래에 대한 공포를 드러낸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이 공포를 다루는 방식일 것이다. 핵실험이 있었던 뉴 맥시코의 사막에서 대서양으로, 그리고 LA의 하수도에 도착하기 까지, 영화는 논리적인 흐름과 판단에 따라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영화 내내 인물들은 감정이나 공포에 휘둘리지 않는다. 거대 개미를 추적하는 과정은 합리적인 추론이며, 정부는 핵실험의 실수를 숨기는데 전전긍긍하기 보다는 대중에게 정확하고 확실한 정보를 전달하며 계엄령을 통해서 질서를 유지하고자 한다. 

 

일반적인 공포 영화에서 공포의 대상이 괴물 그 자체였다면, 영화 그들에서 공포의 대상은 거대 개미가 아닌 다른 무언가이다. LA 하수도에서 마지막 여왕 개미의 알집을 태우면서 그들은 핵실험의 영향이 얼마나 클지, 어째서 개미만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되묻는다. 거대한 개미가 나올 수 있다면, 거대한 전갈도, 아니면 다른 이상한 무언가도 등장할 수 있다. 그렇다면 거대한 개미는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다. 즉, 영화에서 근본적인 공포는 마지막 박사의 표현대로 바로 새로운 시대인 원자력 시대에 대한 공포이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대처하더라도, 무엇이 일어날지 모르는 시대가 도래했다. 불타는 여왕 개미의 알집을 바라보는 인물들의 표정은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의 표정이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시대에 어떤 재앙이 올지 모르는 사람들의 막연한 절망감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그에 반해서 그것은 살아있다It's Alive는 좀 더 내밀하지만 사회적인 공포에 주목한다. 임산부 입덧을 막기 위해서 산모들이 먹었던 탈리도마이드가 기형아를 만들어냈었던 사건에 모티브를 얻은 영화는 무엇하나 부러울 것 없는 부유한 중산층 가정이 살인 기형아를 낳았을 때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가에 주목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살인 기형아를 둘러싼 이야기가 개개인의 드라마가 아닌 사회적인 욕망이라는 것이다:살인 기형아를 낳은 아버지는 자신의 사회적 위신을 생각해 기형아가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고 극구 부정하며 심지어 자신의 자식인 기형아를 직접 자기손으로 죽이려 한다. 중산층이 소비하는 다양한 약물을 만드는 제약회사는 기형아 아이가 자신들의 약물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게 밝혀지는게 두려워 살인 기형아를 완전히 박살내버릴 것을 경찰 반장에게 은밀하게 제안하기도 한다. 결국 살인 기형아라는 사건을 둘러싸고 다양한 사회적 욕망들이 충돌한다.

 

그것은 살아있다에서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과정 자체를 마치 사실을 다루는 듯한 '다큐멘터리'의 문법으로 다룬다는 점이다. 영화는 극적인 연출과 감정을 고조할만한 이야기와 극의 장치들을 최대한 억누른다. 그 결과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고요하지만 그 속에서는 휘몰아치는 다양한 사회적 욕망들의 소용돌이다. 객관적으로 연출되는 이들의 욕망은 관객에게 이입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그들과 달리 그것은 살아있다는 영화가 더 차분한 동시에 끓어오른다.

 

그러나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기형아의 아버지는 LA 하수도의 어둠 속에서 자신의 자식에게 자신의 사회적 위치 때문에 하지 못했었던 내밀한 고백을 한다. 기형아 역시도 자신의 가족이라는 것을 인정한 아버지는 자신의 자식을 안고 자식을 죽이려는 경찰을 피해 배배꼬인 하수도 통로를 해맨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 솔직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빠져나갈 수 있는 곳은 없고, 자식은 경찰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영화는 이러한 일이 시애틀에서도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끝을 낸다. 기형아에 대한 두려함, 중산층의 사회적 지위와 허영을 둘러싼 공포가 단순히 그들만의 것이 아닌 당시 미국사회가 공유하던 것임을 암시하면서 말이다.

 

영화 그들과 그것은 살아있다는 서로 다른 욕망과 공포, 연출 방식을 통해서 각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흥미로운 점은 그서로 다른 이야기가 클라이맥스를 맞이하면서 LA 하수도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비슷한 결과를 맞이한다는 것이다. 그들에서 하수도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내는 여정의 종착지로, 그것이 살아있다에서 하수도는 사회적 위신과 욕망을 뒤로한채 괴물이 된 자신의 자식 앞에서 솔직해질 수 있는 공간이 된다. 그 어두운 공간에서 인물들은 공포의 본질과 대면한다. 마치 다양한 욕망이 꿈틀거리는 도시의 거대한 창자 속에서 말이다. 두 영화는 모두 그런 점에서 훌륭한 괴물영화라 할 수 있다. 괴물과 인간의 공포, 그리고 그 그로테스크함이라는 본질을 정확하게 궤뚫어 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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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야기

 

젤다의 전설 시리즈에는 최초의 1편에서부터 야생의 숨결까지 이어지는 일관된 법칙이 있다. 플레이어는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른채 스테이지에 내던져진다. 그리고 그 스테이지 내에서 플레이어는 다양한 도구들을 이용해 수수깨끼를 풀어가면서 게임을 풀어나가야 한다. 스테이지와 수수깨끼, 그리고 도구를 통한 상호작용은 젤다의 전설을 유명하게 만든 요소이자, 후대 게임에 큰 영향을 끼친 원칙이었다. 심지어 야생의 숨결은 고정된 스테이지를 넘어서 오픈월드에서도 이러한 방법론이 통용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그렇기에 야생의 숨결을 기점으로 젤다의 전설은 큰 전환점을 맞이한 것으로 보여진다:과거의 방법론이 현대적인 장르(오픈월드/샌드박스/심리스 같은)에도 통용될 수 있다.

 

하지만 역으로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겨난다: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젤다의 전설 시리즈와 법칙이 생겨났다면, 과거의 젤다의 전설은 어떠한 가치를 지니게 될까? 꿈꾸는 섬(2019)은 어떻게 보면 이러한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이라 할 수 있다. 꿈꾸는 섬(2019)은 30년전 흑백 게임보이로 나온 젤다의 전설:꿈꾸는 섬을 리메이크한 게임이다. 3DS 젤다 이후, 스위치로 처음나오는 클래식(?) 젤다인 것이다. 

 

큰 틀에서 꿈꾸는 섬(2019)은 야생의 숨결 이전, 아니 그보다 더 이전(슈퍼패미컴으로 나온 신들의 트라이포스 정도까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몇몇 편의성과 그래픽은 일신되었지만 게임의 구조 자체를 바꾼 리메이크가 아니기 때문에 꿈꾸는 섬(2019)에 대한 평가는 전적으로 30년전의 원작에 기반한다. 그런데도 흥미로운 점은 어떤 웹진 리뷰에서는 "꿈꾸는 섬은 오픈 월드라는 단어가 있기 전의 단순했던 시절에 다시 귀기울이게끔 하는 작품이다."(Link’s Awakening harkens back to a simpler time, one before terms like “open world” even existed, 버지 리뷰)라는 표현을 썼다는 점이다. 오픈월드/샌드박스라는 장르가 정의되기 30년도 전의 작품에 대해서 어째서 오픈월드 장르란 표현을 쓰면서 평가를 내렸을까?

 

꿈꾸는 섬을 오픈월드 장르에 비교하기 위해서는 먼저 오픈월드/샌드박스 장르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나마 해야할 것이다. 오픈월드, 혹은 샌드박스라는 명칭이 병용되는 이 장르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거대하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필드형 스테이지가 존재하고(오픈월드), 그 안에서 다양한 방법론으로 게임을 풀어나갈 수 있다(샌드박스)라는 것이 이 장르에 대한 정의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꿈꾸는 섬은 거대한 필드형 스테이지(코호린트 섬)가 메인이 된다는 점에서 '오픈월드' 라는 속성에는 부합할 것이다. 하지만 현대적인 용례에서 오픈월드는 샌드박스의 속성을 함께 지니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어떤 점에서 꿈꾸는 섬은 샌드박스 장르 속성과 유사한 게임 경험을 제공하는가?'로 분석해야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젤다의 전설 시리즈가 스테이지와 수수깨끼를 배치하는 방식이다. 서두에서 언급하였듯이 젤다의 전설 시리즈들은 스테이지를 수수깨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론 자체는 이제 흔해서 이 큰 명제(스테이지를 수수깨끼로 구성하다)로는 젤다의 전설만의 특성을 설명하기 어렵다. 이 명제를 젤다의 전설만의 특수성으로 맞추어서 게임을 설명하자면 '합리적이지 않은Non-Sense 세계에서 합리성Sense을 찾아내다'가 될 것이다:젤다의 전설은 플레이어에게 어떠한 설명없이 수수깨끼만 덩그러니 던져놓는다. 스테이지들과 던전들은 수수깨끼를 갖고 있고, 여기에는 정답이 있다. 하지만 가이드가 없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할지 모른다. 젤다의 전설 게임 경험의 핵심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한다'라는 결과를 플레이어 스스로가 답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꿈꾸는 섬(2019)의 경험을 오픈월드에 비교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정확하게는 던전들을, 각 스테이지들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 어떠한 도구가 던전을 푸는데 도움이 되는지 같은 요소들을 플레이어가 직접 찾아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시도를 해야 하고 이 점이 오픈월드/샌드박스의 특성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즉, 합리적이지 않은 세계이지만, 그 속에 분명 답이 있고, 그 답을 찾아가는 중에 플레이어가 게임의 규칙을 내재화해서 받아들어야 하기 때문에 플레이어의 능동적인 행동이 중요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코호린트 섬이라는 스테이지는 플레이어가 어디로 갈지에 대해서 구체적인 지시(최근 게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경로 표지 같은)가 없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다음 던전에 들어가야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나'를 생각하게 만드는 요소도 존재한다.

 

물론 이러한 요소들이 '과한' 부분들도 있다. 인터넷이 발달하기 이전의 게임들이 게임 잡지와 공략을 연동하여 접근하였기에 '플레이어 혼자서 파악하기 힘든 파훼법'을 도입한 것들이 있는데, 가령 교환 이벤트라던가 마지막 던전에서 보스에게 도전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순서로 던전을 진행해야 하는 점(심지어 매번 게임을 시작할 때마다 무작위로 생성되며 상당히 길다.) 등은 지금 관점에서 다소 과하다 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꿈꾸는 섬(2019)의 경험은 샌드박스/오픈월드라는 장르 경험의 프로토 타입을 체험하는 것이며, 다소 어려운 부분이 있긴 하지만 스스로 생각하고 풀어나가는 재미가 충분하다. 무엇보다도 수수깨끼의 풀이법을 찾기 위해 게임 내적인 논리를 플레이어 스스로가 내재화 하는 과정에서 능동적인 경험을 하는 것은 지금이나 이전이나 게임에 있어서 핵심적인 재미라 할 수 있다.

 

꿈꾸는 섬(2019)에서 주목할 부분은 리메이크를 하면서 게임 전체를 장난감의 세계로 재구성하였다는 점이다. 물론 원작 자체가 기존 닌텐도 프랜차이즈들에 등장한 요소들을 한데 엮는 게임이었긴 했지만, 꿈꾸는 섬(2019)는 이러한 원작의 요소를 플라스틱 피규어와 같은 장난감으로 묘사하면서 원작의 감성을 추억 가득한 무언가로 바꾸는데 성공하였다.

 

결론적으로 꿈꾸는 섬(2019)은 과거의 게임도 지금 플레이할만한 가치가 있음을 증명한다. 다소 단순하기는 하지만,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든다라는 이 단순하고도 강력한 원칙이 꿈꾸는 섬(2019)을 재밌게 만드는 것이다. 30년전의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어를 생각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는 점에서 꿈꾸는 섬(2019)은 젤다의 전설이 갖고 있는 강점을 설명하는 게임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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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야기

 

*닌텐도 스위치로 플레이하였습니다.

 

보이드 바스타드의 로그라이크 슈터라는 발상은 전혀 놀랍지 않다. 로그라이크와 FPS는 트리플 A과 인디 게임계의 트렌드들을 이끌고 있는 거대 동력들이고, 이 둘의 결합은 이전에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장르 게임의 범람과 별개로 재밌는 로그라이크나 FPS의 결합을 찾기는 어렵다. 사실, 이는 상대적으로 다양한 트리플 A 게임을 통해서 문법이 확립된 FPS의 문제보다는 로그라이크의 문제라 할 수 있는데, 로그라이크는 탄탄한 기본 기제를 가진 게임이 아니면 오히려 게임에 독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는 로그라이크라는 장르와 기법이 하나의 거대한 속임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로그라이크는 무작위로 콘탠츠를 만들어내는 기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을 플래이하는 매번의 경험은 분절적일 수 밖에 없다:일반적인 게임에서 스테이지 구성은 짜임새가 있고 연속적이기 때문에 플레이어의 경험 역시 연속적이다. 그러나 로그라이크에서 플레이어의 사망은 모든 스테이지 구조를 초기화시키기 때문에 플레이어의 매번의 경험은 불연속적이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매번 게임을 플레이할 때마다 새로운 스테이지 구조가 된다 = 스테이지가 계속해서 생성되기 때문에 무한이 즐길 수 있다'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게임을 통해서 쌓아올리는 경험과 학습이 연속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좌절스러운 경험을 더 제공되는 때들이 많다.

 

이러한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서 로그라이크 게임은 '생존'과 '죽고 나서도 이어지는 업그레이드'라는 요소를 도입하였다. 이는 로그라이크 장르 게임의 특성에 많은 부분 부합한다. 한 번의 사이클을 끝내기 위해서 게임의 각가지 장애 요인으로부터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에 생존이라는 개념이 로그라이크와 부합한다. 그리고 매번의 분절적인 경험으로 게임 플레이 경험을 학습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수정하게끔 요소로 죽고 나서도 이어지는 업그레이드 개념도 로그라이크와 부합한다. 

 

하지만 이러한 로그라이크의 생존과 업그레이드 개념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다. 로그라이크의 핵심은 게임의 근간이 되는 플래이다. 오히려 로그라이크에서는 일반적인 스테이지 식의 게임보다 핵심적인 게임 플래이가 더 부각된다. 일반적인 스테이지 구성의 게임에서는 스테이지의 완급에 따라서 게임 플래이를 다양하게 구성할 수 있지만, 로그라이크에서 의도적으로 다양한 경험을 줄 수 있는 스테이지 구성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온전하게 게임 플레이만에 집중하여 게임을 구성해야한다.

 

보이드 바스타드는 이러한 점에서 게임 플레이의 기본이 잘 만들어진 로그라이크 게임이다. 보이드 바스타드는 무작위로 생성된 우주선에서 필요한 부품들을 찾고 빠져나오는 것이 기본적인 게임플레이다. 보이드 바스타드는 여타 로그라이크에서 찾아볼 수 있는 기본적인 요소들은 갖추고 있는데, 무작위로 생성되는 스테이지와 죽어서도 이어지는 업그레이드 요소, 살아남기 위해서 총알과 회복 아이템 등의 요소를 관리해야 하는 점 등이 그러하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로그라이크 장르 관점에서 보이드 바스타드가 눈에 띄는 부분은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보이드 바스타드에서 두드러지는 부분은 시스템 쇼크에서 이어져 내려와 바이오 쇼크나 프레이로 이어지는 FPS의 흐름이다.이들 게임들은 두가지 측면에서 일반적인 FPS와 차별화된다. 첫번째는 총과 능력을 활용하는 액션 시스템이다:일례로 바이오쇼크가 한 손으로 공격, 다른 한 손으로 초능력을 써서 적들과 싸우는 흐름을 보여준다. 이렇게 단순히 총을 쏴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을 넘어서 총과 능력을 모두 이용해서 전투를 벌이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의 게임은 플레이의 다양성을 늘렸다.

 

두번째로 이들 게임은 이러한 플레이의 폭을 늘려주는 대신, 플레이어가 쓸 수 있는 가용 자원을 제한함으로 플레이어가 총과 능력을 쓰며 게임을 풀어나갈 때 고민을 하게끔 만들었다. 대표적인 예로 바이오쇼크의 스테이지 디자인은 이러한 경향을 강하게 드러내는데, 게임이 스테이지로 일정한 구역을 설정하고 여기저기 뒤져가면서 총알과 자원을 획득하게 하였다. 플레이어는 자원을 획득하기 위해서 스테이지를 꼼꼼히 수색해야하는데, 적들의 배치나 다양한 장애 요인으로 인해서 역으로 자원을 소모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한다.

 

보이드 바스타드 역시 이러한 두가지 흐름을 모두 이어받고 있다:공격을 위한 무기들과 별개로 다양한 용도의 보조 무기군이 등장하여 게임을 풀어나갈 수 있다는 점(가장 기본적인 스턴건인 재퍼부터 적을 세뇌하는 스크램블러나 적의 위치를 뒤바꾸는 쉬프터까지)과 게임 스테이지 디자인이 적의 섬멸을 중심으로 한 아레나가 아닌 아이템을 찾는데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특히, 두번째 요소는 보이드 바스타드라는 게임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요소다. 보이드 바스타드에서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임무는 '특정 물건을 회수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 목표가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함선을 이잡듯이 뒤져야 하며, 목표를 확보하면 다시 함선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즉, 보이드 바스타드는 진입-탐색-탈출이라는 큰 구조를 가지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로그라이크의 무작위성이 보이드 바스타드의 진입 - 탐색 - 탈출 구조와 잘 어울린다는 점이다. 로그라이크의 가장 큰 문제점은 때때로 클리어 불가능한 조합을 만들어내거나 정합적이지 않는 공간을 만들어낸다는 점에 있다. 보이드 바스타드는 교묘하게 이 두가지 문제점을 회피한다. 첫번째 문제는 진입과 탐색 과정에서 플레이어가 판단을 내려서 목표를 찾지 않고 탈출할 수 있다는 방법론을 통해 해결한다. 보이드 바스타드에서 플레이어는 각 우주선의 큰 특징들(어떤 목표가 있는지,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지 등)을 파악할 수 있고, 자신이 갖고 있는 자원과 역량에 비추어보아서 그 우주선을 진입할지 넘길지를 판단할 수 있다. 또한 우주선에 진입했더라도 목표를 달성하지 않아도 탈출할 수도 있다. 물론 이동과 회복에 자원이 들어가기 때문에 진입하고 탈출하는 것이 좋은 선택은 아니지만, 스테이지를 선택하거나 진행할 때 플레이어가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자유롭게 플레이를 끊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여타 로그라이크의 무작위성이 갖는 문제를 잘 풀어내는 편이다.

 

또한 보이드 바스타드는 무작위로 스테이지가 만들어지더라도 '정합적'인 구성을 갖는다. 기본적으로 스테이지가 되는 각각의 우주선들은 게임 설정상 목적을 갖고 만들어진 특수선들이기 때문에, 주로 등장하는 목표물과 총알, 자원들이 각기 달라진다. 또한 우주선 내에서도 각 구역에 따라서 등장하는 아이템들이 경향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목표 이외에도 자신이 필요한 물품이 등장할만한 스팟들만 골라서 돌거나 심지어 목표물이 어디서 나올 것인지 맵을 보고 추리한 다음에 최단 루트로 목표물만 빼올 수도 있다. 게임의 난이도도 심도로 표현되며, 심도에 따라 조우하는 수정치나 적들, 목표물이 달라지며, 플레이어가 능동적으로 심도를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정합성과 합리적인 게임 플레이 양쪽 모두를 고려하였다 할 수 있다.

 

로그라이크 게임은 무작위성 때문에 정합성을 가진 스테이지 구조를 찾아보기 힘든데, 보이드 바스타드는 큰 틀에서 정합적인 흐름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는 정말로 훌륭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 덕분에 플레이어는 변화무쌍한 게임 속에서 빠르게 적응할 수 있다. 스테이지는 계속해서 변화하지만, 정합적이고 불합리한 부분은 플레이어 판단으로 제거할 수 있기 때문에 로그라이크 특유의 불합리함을 만날 일도 줄어든다. 

 

결론적으로 보이드 바스타드는 로그라이크 게임 중에서 찾아보기 힘든 훌륭한 게임이다. 클리어 이후에 챌린지 모드가 추가되는 것 이외에 별다른 추가적인 콘탠츠가 없다는 점은 아쉽지만, 구매한 돈값 그 이상은 하는 게임이라 할 수 있다. 스위치에서도 깔끔하게 돌아가는 편이기 때문에 스위치로 좋은 로그라이크 게임을 찾는 사람에게는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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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야기

 

* 스위치 버전을 기반으로 쓰여진 리뷰입니다.

 

북 오브 데몬은 상당히 독특한 지점에서 시작된 게임이다:북 오브 데몬은 디아블로 1편을 베이스로 만들어졌다. 게임의 스토리에서부터 직업 선택, NPC, 분위기, 스테이지 구성 등등 너무 충실하게 디아블로 1의 모티브를 차용하고 있다. 북 오브 데몬의 흥미로운 점은 지금껏 나왔던 많은 게임들이 디아블로 1이 아닌 디아블로 2를 벤치마킹의 모델로 삼았다는 점 때문이다. 디아블로 1편은 분명 잘 만들어진 게임이긴 했다. 하지만 1편의 강점들(무작위성, 케릭터 육성, 어두운 분위기, rpg와 액션의 결합 등)은 디아블로 2를 통해서 장르화되고 공식화되었기 때문에 지금의 관점에서 보자면 '미완성'된 게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장르적으로 더 나은 게임을 버리고 그 이전의 게임을 선택한  북 오브 데몬은 디아블로 2식의 게임(액션과 케릭터 육성, 그리고 아이템 파밍)보다도 디아블로 1의 노스텔지아에 더 기대하는 게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희안하게도 북 오브 데몬은 디아블로 1의 장점들을 모두 가져온 게임이 아니다. 디아블로 1은 마우스 클릭으로 플레이할 수 있다는 단순화된 액션 감각과 함께 마우스 클릭만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직관적인 이동이 결합된 작품이었다. 이후 수많은 게임들이 디아블로 1의 마우스 게임 플레이를 차용하였는데, 디아 3가 콘솔까지 시리즈가 이어지면서 디아블로의 탑뷰 arpg의 조작 방식은 장르의 특성(액션과 직관적이고 자유로운 이동)을 정립하였다. 그러나 북 오브 데몬은 플레이어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제한하고 '1자 통로'를 앞뒤로 오갈 수 밖에 없는 대단히 제한적인 맵 구조와 이동 기믹을 취하였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서 생기는 문제점들은 후술하겠지만 게임 경험 자체를 대단히 불편하게 만들었다.

 

북 오브 데몬의 가장 불합리한 점은 플레이어의 움직임이 1자 통로를 오가는 정도로 제한되어있는데,  적들은 맵 전체를 활용하면서 플레이어를 압박한다는 점이다. 덕분에 북 오브 데몬을 플레이하는 내내 플레이어는 적들 사이에 껴서 두드려맞는다. 일반적으로 기존 디아블로나 ARPG에서 이런 상황은 곧바로 죽음을 의미한다. 이 장르는 플레이어가 자유롭게 움직이고 적과 싸우기 때문에, 근접전 케릭터든 원거리 케릭터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싸우는 것은 장르의 핵심적 경험과 동떨어진 부분인 동시에, 게임 플레이 자체를 수동적으로 만든다. 하지만 북 오브 데몬은 자유로운 움직임 자체가 불가능하니 좁은 공간에서 서서 적들과 치고받고 하는 지구전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 하며, 게임 시스템이나 체력 회복 수단 등등을 통해서 이러한 게임 플레이 양상을 보조한다. 덕분에 게임은 적극적으로 적을 찾아 죽이기 보다는 체력이 치명적이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면서 적을 하나 하나 말려 죽이는 양태가 되었다.

 

하지만 북 오브 데몬은 시스템으로 보완하고 있긴 하지만, 게임의 플레이 양태가 만들어내는 문제점들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스턴과 관련된 게임 시스템일 것이다. 북 오브 데몬에서 플레이어가 스턴에 걸릴 시, 갑자기 화면이 흐려지며 허공에 떠있는 별들을 커서로 클릭하는 미니 게임으로 이어지는데, 게임 플레이 흐름과 완전히 다른 미니 게임이기 때문에 상당히 당혹스럽다. 이것은 위에서 이야기한 좁은 곳에서 스턴을 거는 적들과 부대낄 때 상당히 더 체감되는데, 연속으로 다섯번 여섯번 스턴 걸리는 상황을 경험하면 헛웃음만 나올 뿐이다.

 

위와 같은 문제도 있지만, 북 오브 데몬의 콘솔판은 몇몇 더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느린 이동 속도와 함께 일반 공격과 스킬의 사거리가 비상식적으로 긴(쉽게 이야기해서 근접 공격으로 한 5m 너머의 적을 공격할 수 있다고 보면 된다) 것에 대비해서 스킬은 한 개만 쓸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정확한 타겟팅이 힘들다는 점이 북 오브 데몬 콘솔판을 더 엉망으로 일조하고 있다. 콘솔판에서 스킬은 L, R 버튼으로 움직여서 선택하고 사용해야 하는데, 여러개의 아이템과 스킬을 다양하게 활용하는 것보다 패시브 스킬을 잔뜩 껴놓고 스킬 한 두개만 쓰는 것이 더 안정적이고 게임 플레이가 편하다. 또한 자세한 타게팅이 불가능하다는 점은 몇몇 적 스킬 차단이 어려워져서 게임 난이도를 올리는 주범이 되기도 한다.

 

북 오브 데몬에서 그나마 좋게 봐줄 수 있는 점은 종이 접기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 게임 그래픽 스타일일 것이다. 상당히 독특한 분위기에 화려한 그래픽이 아니더라도 상당한 눈요기를 제공해준다. 하지만 그래픽과 별개로 북 오브 데몬이 지향하는 게임의 스타일이 상당히 애매하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게임은 디아블로 1편의 호러와 1편을 패러디한 게임으로서의 패러디 게임 사이에서 상당히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호러가 되기에는 종이접기의 가벼움이 더 인상적이고, 패러디 게임으로 보기에는 개그나 이런 부분들이 부족하다.

 

결론적으로 북 오브 데몬은 그저 그런 로그라이크 게임이라 할 수 있다. 게임의 길이를 조절하는 요소나 죽지 않고 플레이할 시에 더 많은 혜택을 주는 시스템 등등 재기발랄한 아이디어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게임의 베이스가 되는 시스템은 그렇게까지 뛰어나지 않고 버벅거리는 요소들이 다소 있다. 물론 디아블로 1을 해보지 않았거나 ARPG에 대해서 큰 기대감을 가지지 않는 플레이어라면 이러한 게임 성향이 나름 맞을 수 있겠지만, 절대로 게임 플레이 영상을 보지 않고 구매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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