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롱레그스라는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감독인 오즈굿 퍼킨스의 가족사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오즈굿 퍼킨스의 아버지인 안소니 퍼킨스는 헐리웃에서 활동하는 유명배우였는데, 게이라는 사실을 숨긴채로 아내인 베리 배런슨과 결혼하였고, 이것이 감독의 유년시절을 관통하는 트라우마가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비밀을 자식이 알지 못하게 숨기는 어머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의 어두운 분위기의 영향을 받는 아들, 기억 속에서 어두운 트라우마처럼 들러붙어있는 아버지의 이미지까지, 롱레그스의 창작 모티브들은 여기에 기반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롱레그스는 '무서운' 공포 영화라기 보다는 '우울한' 공포 영화다. 영화는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주인공인 리 하커가 어머니가 숨긴 어두운 비밀과 자신의 트라우마를 파해쳐 올라가는 내용이다. 영화의 오프닝 시퀸스를 보자. 4대3 화면 프레임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소녀의 관점에서 그 사건이 있기 전날의 상황을 회상하는데, 트라우마를 안겨주는 롱레그스의 얼굴이 '프레임 바깥'에 있다가 불현듯 4대3 프레임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어린 시절 트라우마가 어떻게 해서 생기느냐를 보여주는 과정이다.

영화는 리 하커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구성한다. 그리고 그 세상의 주요 키워드는 강박과 반복이며, 강박은 대칭을 통해서 구성된다. 롱레그스 사건에 투입되기 전에 무의식적으로 용의자를 잡아내는 장면을 보자. 여기서 하커는 아무것도 없는 집을 응시하다가 거기에 용의자가 있다 라고 단정하는데, 계획도시마냥 정리된 미국의 교외 마을의 비슷 비슷한 집들의 모습에서 하커가 바라보는 것은 대칭된 집의 이미지다. 영화는 이와 같이 대칭되는 이미지와 그 가운데 주인공을 끊임없이 강박적으로 밀어 넣으며 주인공을 가둬둔다.

재밌는 점은 대칭이라는 관념일 것이다. 대칭이란 공간 내에서 어떠한 축을 기준으로 하여 동일한 이미지가 재생산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칭에 있어서 축과 공간이라는 개념일 것이다. 대칭은 어디까지나 제한된 공간과 중심되는 축이 존재해야만 성립될 수 있다. 영화의 첫 시퀸스처럼, 4대3의 공간에서 공간 바깥에서 등장하는 트라우마(롱레그스)가 하커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정의하고 그 세계 내에 갇혀있을 수 밖에 없게 만든다. 즉, 하커의 세계가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서 프레임에 갇혀있게 만들고, 그 갇힌 세계에서 남들은 인지하지 못하는 것들을 무의식적이고도 강박적으로 찾는 재능이 생긴 것이다. 

하커라는 인물 역시 어렸을 적의 트라우마에 사로잡혀있는 사람이다. 중요한 점은 영화의 반전이 등장하기 전까지 이 트라우마가 의식적으로 이해되기 보다는 무의식적으로 하커를 억압한다는 점이다. 하커의 소녀적인 모습(바닥에 증거 파일들을 늘어놓고 분석하는 모습은 전문가의 모습보다는 소녀의 소꿉장난처럼 보인다)이나 정상 가족에 끼지 못하는 모습(상사의 가족과 가상선을 두고 완벽하게 유리되고 분절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 등은 하커가 의식적으로 행하는 모습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억압되는 모습임을 암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반전은 씁쓸하고 우울하다. 하커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트라우마의 진실을 알게 되고, 어머니의 파괴적인 모성애(하커를 살리기 위해 악마와 계약하고, 하커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대신해서 가족을 죽여온 것)를 마주한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하커의 아버지가 없다는 점과 롱레그스가 어머니와 모의하여 가족들을 참살했다는 점이 결합하면서 롱레그스가 마치 '유사 아버지'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어떻게 보면 감독의 아버지에 대한 어두운 감정(화해할 수 없는)을 드러내는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어두운 사실로부터 어머니가 자식을 보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완벽한 보호가 아닌 '살아남는 것을 허락받았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자식의 기억에 알게 모르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는 점은 영화나 감독의 개인사에 있어서 매우 씁쓸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결론을 내리자면, 오즈굿 퍼킨스의 롱레그스는 감독의 개인사를 프레임과 미장센을 이용해 훌륭하게 우울함을 표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아쉬운 점은 감독의 개인사를 알지 못한다면 완벽하게 이해하기에는 뭔가 2%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점을 이해하고 본다면, 어린 시절 트라우마로 인해서 강박증과 불안, 우울을 갖게 된 수많은 어른들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사랑과 어긋남, 강박, 그리고 그 씁쓸함이 커버린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서브스턴스의 국내 흥행 성공은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지만(바디 호러 장르의 흥행이라니!), 영화를 자체만 놓고 본다면 사람들에게 어필을 할 수 있는 내용과 연출로 무장한 작품이었기 때문에 어느정도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영화는 젊음에 대한 이미지 소비와 착취, 자기 파괴 등이 데미 무어의 열연과 맞물리면서 좋은 시너지를 냈다. 그리고 바디 호러의 불쾌함과 함께 신체와 상징들을 이미지와 명확하게 연결지음으로써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만든 것도 영화의 흥행에 한 몫하였다. 요컨데 서브스턴스는 바디 호러 장르의 불쾌함과 이미지의 불분명함(몸과 상징의 구현)을 명확하게 만들어내어서 성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서브스턴스의 명징한 상징과 이미지들은 때로 이 작품의 앝은 구조를 너무 쉽게 드러내기도 한다. 마치 초반부 데니스 퀘이드가 새우를 까서 먹으며 새우를 마치 늘어진 남성기를 흔드는 것처럼 묘사하듯이 말이다. 어떻게 본다면 너무 직설적인 표현들인데, 이 너무 직설적인 표현과 구조들이 관객을 이입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이다:무언가 관객과 영화 내의 인물이나 장치들에 연결되어 일종의 공감각을 형성하여 관객을 뒤흔드는 것이 뛰어난 바디 호러의 강점이라 한다면, 서브스턴스는 관객을 스크린 바깥에 안전하게 놓고 쇼를 보여주는 것에 가깝다. 극 내에서 '캐릭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인물의 묘사나 구성이 된 것은 엘리자베스 밖에 없고, 하비와 같은 인물은 인간이라기 보다는 불쾌한 쇼 비즈니스 그 자체에 불과하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엘리자베스의 복제이자 이 영화의 중요한 한 축인 수 마저도 캐릭터라고 보기 힘들 정도의 묘사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와 수의 관계는 일견 보기에는 명료한 관계처럼 보인다. 늙어버린 엘리자베스가 젊음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세계에서 사랑받기 위해 수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영화의 주요 내용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명제가 맞다고 가정한다면 두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첫번째는 엘리자베스가 수를 만든 이유는 분명하지만, 어째서 수가 엘리자베스를 착취하고(=척수액을 뽑아서 자신을 유지하기) 엘리자베스는 척수액이 뽑힐 때마다 더 추하게 늙어가는가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착취라는 것은 착취하는 자가 착취 당하는 자로부터 얻을 것이 있기 때문에 행하는 것인데 수는 그 자체로 완벽하기 때문에 수는 엘리자베스를 착취할 이유가 명확하게는 없어 보인다.

두번째는 서브스턴스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자가 이야기하는 '균형'의 문제이다. 처음 설명할 때처럼, 둘을 하나이기 때문에 서로 균형을 맞추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서브스턴스를 통해 만들어진 복제체와 본인 사이의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핵심이라 한다. 그런데 겉보기에 젊음과 늙음이라는 관계에서 '균형'은 어떻게 찾아야 하는 것인가? 젊음은 이미 지나가버린 것이고, 늙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균형이라는 것은 양쪽에서 서로 주고받는 것이 있어서 유지를 해야하는 것인데, 지나간 것과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절대적 장벽 사이에서는 이들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서브스턴스를 젊음과 늙음의 육체에 대한 내용으로 보는 것은 일견 직관적이긴 하지만, 함정이 있는 해석이다. 이를 정확하게 설명하려면 미디어에서 소비되는 육체의 이미지와 실제 육체 간의 괴리에 대한 관점으로 봐야할 것이다. 그 관점에서 본다면 어째서 이미지의 육체(=수)가 실제의 육체(=엘리자베스)를 착취하는가가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미지의 육체는 실제 육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너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실제의 육체를 착취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의 육체가 우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의 육체는 이미지의 육체를 보면서 자신이 원본임에도 느낄 수 밖에 없는 열등감으로 자기 파괴적인 행위를 하는데 서브스턴스에서 그 자기 파괴적인 행위는 바로 '폭식'이다. 그리고 이미지의 육체가 자신을 파괴적으로 즐기는 행위가 '섹스'인 것도 눈여겨 볼만하다.

하지만 이 관계성은 영화의 배경에 의해서 의도치 않게 숨겨져 있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육체의 이중적인 이미지(이미지와 실제)는 이미 인스타그램이나 틱톡, 유튜브와 같은 매체에서 많이 보여진 현상이다. 수많은 보정 필터, 스테로이드, 호르몬, 성형 수술 등으로 인해 육체의 이미지들은 실제보다 더 과격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서브스턴스의 메타포는 그렇게까지 놀라운 경험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서브스턴스의 배경이 헐리웃과 LA 라는 쇼 시스템에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는 것이다. 처음 엘리자베스 스파클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던 것으로 영화는 시작되는데, 이 명예의 전당 헌액과 늙어버린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젊은 여배우가 어떻게 차츰 사라지는가 라는 '시간'의 벡터가 자연스럽게 개입하고 그것이 '젊음'과 '늙음'이라는 두 이미지의 대립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즉, 젊은 육체와 늙은 육체의 주도권 싸움이라는 잘못된 구도는 영화의 배경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문제였던 것이다.

서브스턴스의 치명적인 문제점은 구도 자체를 너무 명확하게 잡으려 하다가 오히려 불필요한 구성을 추가해서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차라리 SNS의 시대인만큼 헐리웃이라는 배경을 제거하고 SNS와 관심을 끌기 위해서 행하는 자기 파괴적인 행위들로 이야기를 재구성하였다면 서브스턴스의 이야기는 명확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갑이 지난 데미 무어의 연기는 인상적이었다. 젊어서는 섹스 심볼로 유명했었던 그녀가 늙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했었던 연기들은 어떻게 보면 자신의 삶에 대한 메소드 연기였을 수도 있다. 그녀의 연기가 있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라는 케릭터가 인물로 성립할 수 있었는데(수에 대한 애증, 자기 혐오와 파괴 등), 다른 인물들이 인물들로 성립되기에는 너무나 평면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데미 무어의 연기가 더더욱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결론을 내리자면 서브스턴스는 바디 호러 영화의 입문작으로는 나쁘지 않은 작품이다. 그러나 몇몇 부분에서 너무 얕고, 혼란이 있을만한 구도를 사용하고 있다는게 문제다. 차라리 헐리웃이라는 공간이 아닌 SNS와 같은 것들을 배경으로 사용했다면,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와 이미지에 더 부합했을텐데 그 부분은 안타깝다 할 수 있다.

잡담/개인적인 이야기

 

짧게 치는 글들 위주로 글을 쓰려 합니다(GTA6 트레일러 글은 그걸 위한 것)

트위터에서 쓰던 글을 이쪽으로 옮겨서 글로 정리해보고자 하네요.

블로그 활성화를 위한 작업이라 생각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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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야기

 

 우리는 비디오 게임의 시대에 살고 있고, 그 시대의 이름은 그랜드 테프트 오토다:GTA3의 등장 이후 GTA5에 이르기까지 GTA는 단순하게 하나의 게임으로 끝나지 않고 대중문화와 시대의 총합으로 설계된 야심찬 작품이었다. 실제 스탭롤만 1시간이 넘어가는 긴 스텝롤을 자랑하기도 하지만, GTA가 인용하고 있는 대중문화의 내용들은 결국 현재적Contemporary이기 때문이다. 서부극에 대한 애정으로 서부극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레드 데드 리뎀션 같은 작품이 창작자의 개인적 욕망에 근거한 작품이었다면(레데리 2에서 영화 원전을 고르는 폭을 보면 더더욱 그러하다), GTA 시리즈는 철저하게 산업화된 작품이고 그 자체로 자기 복제이자 자기 인용인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GTA6의 등장은 시대를 정의 내릴 것이고, 그 정의가 앞으로 10년을 결정할 것이다.

물론 이 블로그에 글을 쓰는 본인은 GTA 시리즈에 대해서 항상 호의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본인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게임 시장이라는 것은 트리플 A에서 B급, C급 까지 다양한 라인업의 게임들이 각자의 리그에서 다양하게 싸우는 상황이지, gta5가 나왔을 때 한때 커뮤니티를 휩쓸었던 '단 하나의 태양 gta5'라는 개념을 좋게 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커뮤니티라는 것의 극단적인 성향을 생각한다면, 본인의 불호의 감정은 엄밀하게 GTA를 향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커뮤니티를 향해야 한다(물론 본인은 게이밍 커뮤니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GTA5가 나오기 전 후, 커뮤니티나 SNS에서 느꼈던 찬사들은 본인의 이 불호의 감정의 대상을 혼동하게 만들기 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GTA 시리즈의 현재성은 상당히 독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미국사회에 대한 축소이자 미국 사회에 대한 자기 풍자이기도 한데, 메인 스토리를 통해서 풀리는 이야기와 별개로도 사이드 스토리나 게임 내의 다양한 요소들을 통해 미국 사회의 현 주소를 과장해서 드러낸다. 그러나 동시에 게임이 발매되는 텀(거의 12년 만의 신작 발매!)을 생각한다면, 이 현재성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이라는 동시대성과 과연 얼마나 맞닿아있을지도 상당한 관심사라 할 수 있다. 즉, 과연 GTA 개발사가 근 12년 동안 바라본 미국 사회에서 어떤 점들을 GTA6에 녹여내었는지, 그리고 그 녹여낸 내용이 과연 12년이라는 기간이 지난 지금 현재 우리가 느끼는 현실과 얼마나 맞닿아있을지가 관건인 것이다.

락스타는 이미 GTA4에서는 아메리칸 드림의 종말, GTA5에서 SNS나 중산층 가정의 위기, 스마트폰의 등장 등의 다양한 요소들을 게임에 녹여내었다면 과연 이번 GTA6에서는 어떠한 것들이 게임에 추가되고 이 시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남게 될 것인지과 관심사가 되는 것이다. 특히 GTA5 이후로 GTA는 그저 GTA만으로 끝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레데리 2가 보여주었던 야망이 GTA5의 스케일과 디테일이 맞물리게 된다면, 과연 락스타가 바라보는 미국이라는 세계가 어떻게 되는지는 대단히 흥미로운 지점들이 있다. 추가적으로 근 몇년간 격동하는 세계와 미국 정세가 미국 한정으로 풍자적아고도 정교한 미니어처 세계와 만나게 되면 과연 변할지 변하지 않을 지 그것이 흥미로운 지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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