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이야기



돌이켜 생각해본다면, 디아블로 2의 등장은 중요한 장르적 개념의 증명이었다:플레이어의 분신인 케릭터를 레벨을 올리면서 성장시키고, 각자 개성을 가진 기술들이나 적이 떨어뜨린 아이템으로 강해진다는 발상은 RPG의 장르의 등장과 태동, 그리고 전작인 디아블로 1편에서부터 형성되어 내려온 장르의 고유 맥락이었다. 하지만 그 맥락이 시스템과 문법을 만나게 되어 하나의 게임으로 정립이 된 것은 디아블로 2였다. 레벨을 올리면서 얻는 제한적인 자원(스탯과 스킬 포인트)들을 사용해 케릭터의 큰 얼개와 개념을 잡고, 그 과정에서 아이템들을 파밍하여 케릭터를 완성시키는 것은 디아블로 2에서 정립되었다. 또한 난이도 설정 방식과 반복 플레이, 랜덤으로 생성되는 맵, 래더 시스템이나 한 번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않는 하드코어 시스템 등도 이 작품에서 대중적으로 정립되었다. 물론 좀더 따지고 놓고 보면 넷핵과 같은 랜덤 생성식의 로그라이크 게임들이 이미 디아블로 1과 2의 베이스라 할 수 있었지만, ‘던전의 탐색’이 아닌 ’케릭터의 육성’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하나의 스타일로 굳게 된 것은 디아블로 2였다.

디아블로 2의 등장은 ‘파밍’과 ‘스킬’이라는 두가지 측면에서 케릭터의 개성을 구성하는 점에서 이후의 게임 장르에 큰 궤적을 그렸다. 당시 나왔던 수많은 실험작들(세이크리드 같은 마이너한 물건에서 헬게이트 런던 같은 실패한 프로토타입까지)의 등장 이후, 디아블로 3가 나오기 전후로 해서 디아블로 2의 스타일은 큰 전환점을 맞이한다. 타이탄 퀘스트, 패스 오브 엑자일이나 토치라이트, 그림 던 같이 디아블로 2를 받아들이되 자신만의 새로운 색체를 가미하여 성공한 작품들이 등장하면서 ‘디아블로 2를 그대로 따라하는 것을 넘어선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작품들이 상당히 과격한 변화를 추구한것처럼 보여도, 기본적으로는 디아블로 2에서 영감을 얻어서 게임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패스 오브 엑자일이나 그림 던 같은 게임에서는 아이템에 스킬이 붙는 ‘아이템 스킬’ 개념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특정한 룬 스톤들을 순서대로 삽입해서 룬 워드 아이템을 만드는 디아블로 2의 시스템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쉽게 이야기해서, 스킬과 스탯 배분과 별개로 아이템에 새로운 기능을 다는 개념이었던 것이다. 엄밀하게 이야기해서 디아블로 2 이후의 소위 핵앤슬래시 게임들은 디아블로 2의 아이디어들을 최대한 받아들여서 발전 시키는데 더 집중을 하였다.

오히려 디아블로 2의 장르적 개념적 발전은 소위 '폐지줍는 게임'이라 불리는 장르가 발전하면서 이루어졌다. 예를 들자면 총 쏘는 디아블로라 불렸던 보더랜드의 등장과 데스티니 같은 게임들의 등장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MMO든 패키지든 무엇이든 간에 디아블로 2의 등장은 반복 플레이와 스킬과 스텟을 배분하여 성장하고 아이템을 파밍해서 점점 강해진다라는 개념을 완성시켰다. 디비전 같은 게임이나 우리가 흔히들 이야기하는 루트 슈터류의 게임들이 이러한 디아블로 2의 방계 중 가장 성공한 케이스라 할 수 있다. 

물론 철저하게 혈통을 따지는 사람들 중에서는 '디아블로 2와 그 직계 후손들'과 루트 슈터 류의 게임들을 분리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자면 로스트 아크의 케이스처럼 '이것은 MMO지, 디아블로 2의 핵앤슬래시 류 장르가 아니다'라고 선을 긋기도 한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로스트 아크가 MMO의 큰 장르적인 특징들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그 뿌리를 디아블로 2 스타일의 핵앤슬래시와 파밍 게임에 두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로스트아크 이전 시대에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MMO의 뿌리가 다크 에이지 오브 카멜롯이나 에버퀘스트, 울티마 온라인 같은 류의 게임들이었던 걸 감안한다면 로스트아크가 디아블로 2의 베이스를 두고 더더욱 그러하다(물론 여기에 타겟팅 논 타겟팅 등등의 장르 양식까지 고려해서 이야기한다면 복잡해지겠지만, 일반적으로 여러 요소와 제반 상황을 볼때는 디아블로 2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엄격한 기준이 아니라면 디아블로 2의 방계이자 서자라 부를 수 있는 게임들은 무지막지하게 많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반복 플레이를 통해서 무작위로 생성되는 아이템을 주워나가고 레벨을 올리는 형태의 게임들은 상당수 디아블로 2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디아블로 4의 리뷰나 디아블로 2로 돌아가는 이야기에서 더 구체적으로 다루겠지만, 디아블로 2의 구시대적인 양식이 디아블로 3의 실패와 디아블로 4를 통해서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