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이야기

※ 3월 엑박 메거진에 기고한 글입니다.

사람들은 과거를 그리워한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과거를 그리워한다는 명제는 그리 놀랍지는 않다. 사람들이 오지 않은 미래에 막연한 희망을 갖고, 경험했던 과거들에 기억을 윤색하여 빛 바랜 추억으로 만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과거나 미래의 사실 자체가 정확히 기억되어 현재와 비교되기 보다는 시간이라는 차이에 의해서 사실은 희미해지거나 모호해지고, 그 희미해진 사실 사이에 사실 자체와는 다른 감수성이 들어차는 것도 그러하다. 그렇기에 우리가 지금이 아닌 과거와 미래를 이야기할 때, 다소 ‘편향성’이나 ‘재해석’이 들어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은 그리 놀랍지만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그 편향성과 재해석들이 반영된 의견을 사실이라 믿고 현재를 논하기도 한다. 존재했었던 사실과 우리가 채워넣었던 감수성 속에서 과거는 객관화되기 보다는 안경 렌즈의 바깥쪽처럼 왜곡된 상을 보여준다.


아마도 이러한 이야기가 가장 최근에 불거진 것이 디아블로4(2023, 이하 ‘D4’)에 대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이었을 것이다. D4가 나오고 나서 ‘디아블로2(2000, 이하 ‘D2’)’ 보다 못하다’느니, ‘핵 앤 슬래시 게임의 느낌이 나지 않는다’느니 하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었다. 기록적인 흥행에도 불구하고, 초기 콘텐츠 부실로 인해 사람들의 여론은 좋지 않았고, 그 여론은 추후에 시즌 3까지 콘텐츠 수정을 거쳤음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욕을 먹으면서도 흥행하는 게임’은 근 몇 년 동안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물론 D4가 전혀 문제가 없는 게임은 아니었다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콘텐츠 부족이나 여전히 구시대적인 게임 플레이, MMO 형태의 게임 구조 등등을 보면, 분명 사람들이 원했던 디아블로 시리즈 최신작의 형태와는 거리가 먼 상태로 출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으로 사람들의 기대가 모호했기 때문에 D4가 억울하게 저평가 당하는 부분들도 많았다. 그 중에서 가장 억울한 부분은 ‘핵 앤 슬래시 게임 답지 않다’라는 평가일 것이다. 애당초에 D3와 4의 간격에는 10년이 넘는 간격이 있고, 그 사이에 디아블로의 맥락은 커녕 탑뷰 형태의 핵 앤 슬래시 장르 자체가 메이저 스트림에서 밀려나는 일들도 있었다. 그 사이의 명맥을 이어줬던 토치라이트나 그림던, 패스 오브 엑자일 같은 게임들도 메이저 스트림에 있었다고 보기 힘든 게임이었다. 사실 핵 앤 슬래시 게임 답다, 라는 논의의 가장 갈피를 잡기 어려운 점은 ‘대체 핵 앤 슬래시 전통을 어디에 둬야 하는가’와 ‘우리가 모두 공감할 수 있는 핵 앤 슬래시의 전통이라는게 존재하는가?’의 측면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는 이 장르의 근원이자 시작인 D2로 거슬러 올라가야할 것이다. 블리자드의 디아블로 1은 로그류의 게임을 ‘그래픽화’시킨데 큰 의의가 있는 게임이다:로그라이크의 가장 원형이라 할 수 있는 로그 같은 게임들이 무작위로 생성되는 미로를 ‘문자열’의 형태로 구현하였다면, 디아블로 1은 그것을 그래픽의 형태로 구현하고 키보드와 마우스의 직관적인 조작으로 완성시켰다. 

D2의 등장은 디아블로 1에서 완성된 양식을 횡적으로 확장한 개념에 가깝다. 직업이 세분화되고 스킬과 육성이 중요한 개념으로 떠올랐으며, 더 나아가서 다양한 세팅과 옵션이 중요해진 게임이었다. 아마도 핵 앤 슬래시의 원류를 놓는다면 여기서부터 원류를 꼽아야 할 것이며, 후술할 다양한 형태의 핵 앤 슬래시의 변종들 역시 이 게임으로부터 유래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유념해야 하는 점은 D2가 지금와서 다시 플레이하면 상당히 답답한 게임이라는 것이다:플레이어가 들고 다닐 수 있는 아이템 수가 제한된 점이나 육성을 할 때 되돌리기 힘든 점들은 과거 게임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몇몇 부분에서는 요즘 게임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부분들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각 직업들이 공용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예를 들어서 소서리스가 방패를 끼고 한손 무기를 들고 싸운다던가, 바바리안이 활을 사용하며 싸운다던가 등 기존 직업의 콘셉에서는 벗어나지만 어떻게든 운영을 할 수 있게끔 구성되었다는 점이 그러하다. 이는 마나와 스탯 개념 자체가 각 직업별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마나와 스탯 시스템을 공통으로 두고 그 위에 스킬이라는 요소를 얹음으로 분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디아블로3(2012, 이하 ‘D3’)’는 D2를 좀 더 접근성이 높게 만들었다는데 의의가 있다:가장 큰 변화는 공용 자원 개념을 삭제한 것으로, 직업별로 마나를 쓰는 게 아니라 각자 고유의 자원을 쓰며 스킬 메카니즘을 돌리는 형태로 게임이 진행된다. 여기에 세트와 고유 아이템을 통해서 자원과 스킬 메카니즘을 다양한 방식으로 재활용하였다. 즉, 스킬 포인트와 스텟 포인트 배분을 배제하고 거기에 아이템 기반으로 게임이 돌아가게끔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이러한 시스템이 D3라는 게임의 한계를 명확하게 지어버리고 말았다:게임의 메커니즘에서 플레이어의 선택(스탯/스킬 배분)을 빼버리니 결국 남은 것은 아이템의 파밍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확장팩에서 카나이 함에서 고유 장비 능력을 지정할 수 있게 할 수 있게하는 등의 다소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세트템+전설 보석 말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게임이 되었다. D3가 확장팩이 개발되다 취소된 부분도 기본 시스템에서 이러한 한계가 뚜렷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그 외에 D3에서 눈여겨 봐야할 점은 몇백 마리 몬스터를 학살할 수 있는 ‘물량감’을 최대한 살린 게임이라는 것이다. 자원을 무한히 수급하면서 빠르게 게임을 진행시킨다는 점은 D3가 지향했던 점이긴 했다. 하지만 동시에 D3가 지루한 수면제 게임이라고 불렸던 부분들이 이 물량감과 어느정도 연결되어있다 볼 수 있다. 결국은 정해진 스킬셋을 무한히 반복하면서 괴물들을 학살하는, 단조롭고 쉬이 지루해지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D3의 성공과 별도로 D3는 명백히 D2보다도 그 한계가 명확한 게임이었다. 오히려 공용자원 시스템과 룬워드를 통해 다양한 형태의 육성을 지원했었던 D2의 게임 시스템을 생각한다면 D2의 잠재력은 20년이 넘은 지금도 엄청난 것이었다. D3의 문제는 가볍게 만들고 많은 양의 괴물들을 죽이는데 집중해서 오히려 D2가 갖고 있었던 가능성을 줄여버린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기억하는 핵 앤 슬래시의 느낌이란 본질적으로 D2와 3을 섞어버린 무언가에 가깝다. 자유로운 육성을 하면서 무한히 쏟아져나오는 적들을 죽이는 개념 자체는 2와 3에 동시에 등장하지 않는다. D4가 물량을 썰어내는 느낌이 부족해 핵 앤 슬래시의 느낌이안난다 라고 하는 것은 결국 어디에도 존재하지 경험에 근거하여 평가를 한 것에 가깝다
이것은 D3과 D4 사이의 공백이 컸기 때문의 문제라 할 수 있다. D3와 D4사이에는 11년이라는 긴 공백이 있었다. 즉 중간에 ‘디아블로2 의 적자’라 할 수 있는 게임들이 다양하게 나와서 사람들의 인상에 분명히 장르 공식을 심어줄 수 있었다면 이러한 혼재된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D3 이후로 D2의 후계자들(패스 오브 엑자일 같은)은 메인스트림 장르에서 벗어났다 할 수 있다. 또한 D3 이후로 파밍 중심의 게임들이 루트 슈터와 같은 형태로 변화하면서 D2나 D3의 게임 양식이 메인스트림에서 벗어난 것들도 큰 변화점이었다. 이제 더 이상 사람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핵 앤 슬래시의 장르적인 공감대는 파편화되어 ‘핵앤슬래시 장르는 이것이다’라는 개념을 명확하게 만들 수 없었다.


이 사이에 나온 ‘D2의 서자’라 부를 수 있는 게임들은 패스 오브 엑자일이나 그림던, 로스트 아크 같은 게임들이었다. 재밌는 점은 D2의 적장자인 D3와 다르게 이들은 모두 D2의 시스템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D4는 이들을 다시 벤치마킹하여 D2의 경험을 재구축하려고 시도하였다.


D4는 분명하게 2와 3을 섞은 무언가를 만들려 한다. 분명 처음에는 느리긴 하지만, 아이템과 정복자 문양, 전설 각인들이 갖춰지고 딜 메커니즘이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사냥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구조를 취한다. 비유하자면 D3가 자동 변속으로 엑셀만 쭉 밟고 있다면 기어가 계속해서 높은 기어로 올라가는 구조였다면, D4는 중간중간 의식해서 기어를 변경하는 행위를 하지 않으면 딜이 오르지 않는 구조인 것이다. 


이 점들 때문에 D4는 두 가지 단점을 갖게 되었다. 첫번째는 처음 전투가 진행될 때 예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두번째는 ‘문양’이 갖춰지기 전에는 재미가 현저히 떨어지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단점을 제외한다면 구조적으로 보았을 때 D4는 3편이 빠진 함정에 빠지지 않았고, 2편의 적장자라고 내세울 수 있을 만큼 개발자들의 고민이 반영된 게임이 되었다.

잡담/개인적인 이야기

 

아이고 이제 좀 정신좀 차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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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야기



용과 같이 시리즈는 ‘지역적’이고 ‘동시대적’인 특색이 강한 작품이었다. 원본이라 할 수 있는 쉔무에서부터 일본/홍콩의 마을과 거리를 구현하면서 거기서 소일과 활극을 즐긴다는 틀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용과 같이 시리즈도 카무로쵸, 소텐보리 같은 좁은 공간을 활용하여 플레이어가 그 지역의 특산물과 즐길 거리를 즐기는데 방점을 찍었다. 또한 야쿠자와 인협물이라는 시대에 동떨어진 장르와 다르게 게임 내에서 즐기는 소일거리들은 ‘동시대적’인 성격이 매우 강했는데, 제로의 물장사에서부터 전화 데이트, 캬바레 같은 일본식 성인 유흥에서부터 스마트폰을 이용한 만남어플 등과 같은 신식 문물까지 오랜 시리즈의 역사동안 다양한 동시대의 문화를 게임에 녹여내려 했다.  

흥미로운 점은 용과 같이라는 작품의 지향점일 것이다: 게임은 분명 GTA 같은 게임과 비슷한 소재(범죄자, 일탈의 즐거움)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정작 GTA와 전혀 다른 지향점을 보여준다. GTA식의 메트로폴리스 도시의 구현이었다면 용과 같이는 도시의 한 두 블록을 정밀하게 구현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GTA의 도시가 현대적인 대도시의 풍광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어느정도 기시감을 불러일으키고 크게 변하지 않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면(물론 발매텀이 매우 긴 것도 한몫할 것이다), 용과같이는 짧은 발매텀과 그때 그때의 유행들을 반영한 미니게임, 트렌드의 변화로 게임 내에 즉각적으로 반영된 게임이었다. 물론 용과 같이가 작은 규모의 게임으로 구현된 것은 에셋을 최대한 재활용한다는 기조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짧은 발매텀 동안 중복되는 미니 게임이나 기믹을 최대한 배제하는 과정에서 동시대의 요소들을 최대한 들고온다는 점은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어떻게 보면 GTA가 손에 넣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일탈을 구현하는게 핵심이었다면, 용과같이는 약간의 문턱을 넘으면 손에 얻을 수 있는 일탈을 구현하는 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그런 ‘손에 잡을듯한 일탈’의 개념은 역으로 용과 같이라는 프랜차이즈의 컨셉과는 크게 맞물리지 않는 문제도 있었다. 용과같이 시리즈의 시작은 인협물으로 한국식 조폭물의 일본판 장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식 조폭물의 문제답게 야쿠자물 역시 현실 범죄의 미화, 이해하기 어려운 그들만의 미학과 겉멋든 모습들, 폭력적이고 과격한 묘사 때문에 점차 메이저한 장르에서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또한 단순히 장르적으로 퇴색하는 것을 넘어서 현실에서도 야쿠자는 강력한 법적 제재와 단속에 의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중이었다.

그런 점에서 용과 같이 시리즈의 문제는 ‘동시대성’과 ‘장르적 베이스’가 상충된다는 문제가 있었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는 야쿠자를 멋지게 표현하는 모습과 야쿠자는 행복하면 안된다는 장르 법칙 간의 모순, 시대가 지날수록 야쿠자는 설 곳을 일어가고 있는데 근 20년 가까이 시리즈를 지속하면서 야쿠자 주인공으로 메인 스토리를 진행시키기 위해 무리하는 모습들 등등은 용과 같이 시리즈가 걸었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즉, 용과 같이의 강점은 구체적인 상상력과 지역에 기반한 상세한 요소들이었지만, 동시에 그 요소들을 게임으로 엮어 성립시키는 장르적 문법들이 역으로 게임 프랜차이즈를 옭아메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 멜로드라마나 소프 오페라 관점에서 본다면 완성도가 높아 세계적으로 팔릴 여지가 있는 시리즈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벗어나지 못한 이유도 이러한 부분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7편의 방향성 변화는 활로를 뚫기 위한 과감한 시도였다. 단순히 액션 게임에서JRPG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야쿠자’라는 장르적 문법에서 넘어서서 ‘손에 닿을듯한 일종의 어반 판타지’로 넘어갔다. 야쿠자와 불량배들은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잡몹이 되고, 하수구는 던전으로, 생활속 다양한 직업들은 판타지에 나올법한 전사, 도적, 마법사들로 치환된다. 사실 원래 용과 같이에서도 이러한 NPC들의 얼척없는 이야기들이나 황당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부분들도 많아서 이러한 변화점이 그렇게까지 이상하진 않았는데, 용과 같이 7은 아예 이를 하나의 지향점으로 잡아버린 것이다. 즉, 손에 잡을 듯한 일탈과 그 일탈을 뒷받침하는 상상력을 어반 판타지의 양식으로 재정립해 전면으로 끌어올리고, 야쿠자와 인협물이라는 요소 자체를 일반화된 대중문화 코드로 희석시키는 작업을 한 것이 용과 같이 7이었던 것이다.

용과 같이 7의 성공은 주인공을 키류 카즈마에서 카스가 이치반이라는 인물로 세대교체하는 주요한 변곡점이 되었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7편의 등장으로 지난 20년 동안 키류 카즈마란 인물이 쌓아온 용과 같이를 정리하는 것이 하나의 과제로 대두되었다. 그도 그럴것이 키류 카즈마의 존재는 용과 같이의 기반이 구세대적인 야쿠자 인협물에 기반하는 산 증거이며,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게임에 새로운 콘텐츠를 추가하기 어려워지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용과 같이 제로에서처럼 캬바레를 간다던가, 미니카 대전을 즐긴다던가, 당구를 친다던가 등의 소일거리들은 사실 우리 윗세대들이 주로 하는 소일거리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소일거리들은 아랫세대로 내려올수록 공감을 얻기 힘들거나 재미가 없게 느끼거나 하는데, 키류 카즈마란 인물이 표상하는 과거의 감수성을 넘어서 게임 콘텐츠를 과거의 영역으로 제약하는 한계가 된다.

용과 같이 7 외전은 키류 카즈마를 떠나보내주기 위한 작은 진혼곡이다. 용과 같이 제로의 시스템(돈으로 무엇이든지 해결하는)을 도입하면서, 용과 같이 시리즈의 콘텐츠들을 집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용과 같이 7 외전은 7이나 과거작들 같은 메인 시리즈와 같은 야망이나 힘을 준 작품은 아니라는 것이다. 보통 시리즈가 10장 이상의 볼륨을 자랑했다면, 용과 같이 7 외전은 6장 남짓의 분량에 이전 게임들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다채로운 반전이나 즐길거리 요소들을 빼고 오로지 구작의 미니게임이나 시스템들을 다듬고 재활용하는데 전념하고 있다. 

그리고 분량뿐만 아니라 용과 같이 7 외전은 의도적으로 작품의 포부를 줄여버린 케이스라 할 수 있다. 애당초에 7에서 ‘키류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을까?’ 라는 이야기의 곁가지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기도 하지만, 8편에서 마지막으로 출연하는 키류의 이야기를 정리하기 위해서 키류가 걸었던 길과 야쿠자를 다루는 이야기가 어째서 더 이어질 수 없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이야기에 큰 힘을 쏟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7 외전이 구시대적인 게임 플레이를 다듬기는 하지만 숨기지 않는 부분들은 보면 더더욱 심증은 확증으로 굳어진다:7편에서는 이미 잘려나간 캬바클럽과 같은 미니 게임 요소나 새로운 미니 게임 요소는 넣지 않고 상당수 구작의 미니 게임들을 가져온 점, 격투 스타일을 두가지로 줄여서 다듬어 버린 점들이 그러하다. 7이나 구작들, 특히 4나 5편, 제로 같은 작품에서는 플레이 케릭터 수를 늘려서 다양한 게임 플레이와 기믹을 보여주려 했었던 용과 같이 시리즈의 전통을 생각한다면 상당히 어깨에 힘을 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7 외전은 8편을 위한 구작의 앵콜에 가깝다. 애당초에 8편 발매 2개월 전에 게임패스를 통해서 풀린 점이나 풀 프라이스 가격보다 살짝 저렴한 가격으로 나온 점도 그러하고 무엇보다 키류 카즈마란 인물을 묘사하는 방식에 많은 변화가 생긴 점이 그러하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키류 카즈마에게서 ‘퇴물이 되어 늙어버린’ 자의 애환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기존 작품들에서는 키류 카즈마는 야쿠자 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묘사되었지만, 이번작에서는 스스로 이름을 지우고 조용히 살아가며 과거의 영광과 악명에서 거리를 둔 사람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 내에서 그의 행동에는 과거를 억누르는 연륜과 동시에, ‘자기는 아직 늙지 않았다’라는 묘한 호승심이 상충되어 드러난다. 예를 들어 캐슬 투기장에서 더 높은 등급을 향해 나아가려는 모습이나, 미니카 서킷에 도전을 한다던가 하는 등의 활동에서 과거를 추억하면서 ‘난 아직 늙지 않았다’와 ‘나는 아직도 강하다’라는걸 증명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드러낸다. 하지만 동시에 게임 이야기의 마지막에서는 우리 같은(=야쿠자) 사람들의 꿈이란 그저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비하면 쓰레기다 라고 일축하는 모습에서 그런 호승심과 거리를 짓는 성숙함도 보여준다. 

이러한 대비되는 두 감수성이 용과 같이 7 외전의 핵심이자, 동시에 플레이어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키류 카즈마의 모습이 기존 흰 양복의 붉은 셔츠를 입는 전형적인 야쿠자의 모습에서 검은 정복으로 바뀐 점이나 오프닝에서 담배를 태우면서 술을 마시거나 하는 장면, 그가 즐기는 미니게임이나 소일거리들이 대부분 용과 같이 제로 때부터 내려오는 40~50대의 추억과 소일거리에 기반한 점들은 그를 시대의 흐름에 뒤쳐지고 삶에 지쳐버린 사람으로 묘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뒤쳐지고 지치고 늙은 키류 카즈마가 하고자하는 것은 두가지다: 하나는 아직 자신이 늙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또다른 하나는 너무 늦기전에 뒷세대를 위해서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이 모순되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게임은 다양한 장치를 마련하였고, 용과 같이 7 외전은 분명 작은 스케일에 아주 훌륭한 완성도라 할수 없지만 전반적으로 잘 작동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부분에서 용과 같이 제작진들의 강점이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통속적이고 예측 가능한 개념이긴 해도 그러한 통속적인 개념들의 대비를 통해 플레이어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이미지와 스토리를 각인시키는 부분이 용과 같이 시리즈의 강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용과 같이 7 외전은 8편을 위한 기대감을 고취시키는 프롤로그의 관점과 키류 카즈마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에필로그의 관점에서 모두 좋은 작품이다. 물론 독자적인 작품이 아닌 ‘무언가’의 끝이자 시작으로 기능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큰 틀에서 본다면 7편이나 이전 작품에 비해서 다소 아쉬운 부분들이 많을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용과 같이 7 외전은 용과 같이 제작진들이 소프 오페라의 문법을 다루는 관점에서 완숙미를 갖추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7편의 변화나 저지먼트 아이즈 같은 외전들, 키와미 같은 작품들 등등을 통해서 다양한 시도를 하고 그 시도에서 일본 로컬 시장이 아닌 세계 시장에서도 먹힐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관점이 대단히 ‘구시대적’인 부분들은 있지만, 구시대의 사람이라도 꾸준히 노력하면 현시대 사람이 못되더라도 적어도 현시대에 발맞추어 나갈 수 있는 것을 용과 같이 시리즈와 용과 같이 제작진은 증명해냈다.

잡담/개인적인 이야기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었습니다.
23년은 진짜 엉망진창이었는데 새해는 뭔가 달랐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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