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이야기

 

* 스위치 2 버전으로 플레이한 리뷰입니다.

* 스토리 리뷰는 별도로 뺍니다.

 

사이버펑크 2077은 발매 당시에는 게임 업계가 소비자에게 약속한 과대광고의 표본이었다. 정말로 많은 것들을 약속하였지만 제대로 이루어진 것은 없고 버그는 산재하여서 게임을 제대로 클리어하기 힘들 정도였기 때문이다. 너무나 문제가 산재한 나머지 게임이 더 나아질거란 보장이 없어 보였고, 무엇보다 마케팅으로 쌓아올린 기대감을 완성도로 무너뜨린 게임들(EA의 앤썸 같은)이 그 명성을 복구한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 사이버펑크 2077은 그정도 수준으로 엉망인 게임은 아니다. 그 동안 수많은 업데이트와 패치, 팬텀 리버티의 발매 등을 통해서 기존의 게임을 뜯어고치는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는 흔치 않지만 노맨즈 스카이와 같은 사례가 있었다는 걸 생각한다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이버펑크 2077 엣지러너라는 걸작 애니메이션으로 인하여 게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가 올라간 것도 한 몫했다.

그러나 유념해야하는 점은 사이버펑크 2077이 5년 간의 노력과 팬텀 리버티로 얼마나 좋아졌던 간에, 게임의 본질 자체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게임이 튕기거나 진행 불가능한 버그는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버그가 많으며(체감상 베데즈다 오픈월드 게임의 버그보다도 더 많다고 느껴진다), 설계나 구성 측면에서 아쉽다고 느껴질 수 밖에 없는 부분들이 많다. 즉, 사이버펑크 2077이 5년 동안 한 업데이트와 노력은 더 재밌어지기 위한 노력이었다기 보다는 게임으로 부족했던 게임이 그나마 게임답게 바뀌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이버펑크 2077의 지향점은 이머시브 심이라 불리는 게임 장르를 오픈월드 액션 RPG에 접합하는 것이었다. 플레이어의 취향과 스타일에 맞춰서 다양한 방식으로 게임을 풀어나가고, 그것이 플레이스타일과 게임 내용에 유의미한 변화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 사이버펑크 2077의 지향점이었다. 실제 게임 플레이도 플레이어의 스탯에 따라서 뚫리는 숏컷, 암살 미션을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존재하거나, 잠입 플레이를 위한 루트와 전투광을 위한 게임 루트가 공존하는 모습 등등 다채로운 게임 방식을 보여주려 하였다.

이머시브 심 장르의 핵심은 다양함, 유연함, 그리고 디테일이다.  이런 류의 게임들의 예로는 히트맨 암살의 세계나 데이어스 엑스 리부트 시리즈, 디스아너드 시리즈, 프레이 리부트가 있다. 이런 이머시브 심의 게임 내의 각각 요소들을 스크립트가 아니라 각자의 독립적인 규칙에 따라서 자율적으로 작동하고, 플레이어는 그 규칙들을 관찰하고 개입하여 게임을 풀어나가기 위한 행위를 수행하여야 한다. 중요한 점은 단순히 게임의 스테이지가 정해놓은 다양한 루트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플레이어가 창의적이거나 임기응변으로 게임을 풀어나갈 수 있게끔 게임의 각 요소들이 맞물려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히트맨의 예를 들어보자면 플레이어가 게임 플레이 초창기에는 사고사 등의 정해놓은 스크립트를 따라가지만, 게임에 익숙해질수록 총이라는 도구로 소음을 낸 다음에 주의를 분산시켜서 타겟을 기상천외한 속도로 암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단순히 게임이 깔아놓은 루트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플레이어가 도구를 활용해서 게임을 유연하게 플레이할 수 있는게 이머시브 심의 핵심인 것이다.

이머시브 심을 오픈월드 액션 RPG에 섞겠다는 점에서 사이버펑크는 매우 야심차기도 했지만, CD 프로젝트 관점에서는 위험한 도전이기도 했다. CD 프로젝트가 개발한 위처 3와 사이버펑크 2077의 게임 플레이 지향점이 워낙 상이한 부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를 만들던 제작자들이 갑자기 발더스 게이트 3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사이버펑크 2077의 테마는 사이버펑크라는 SF 였음에 비해서, 위처 3는 판타지였다는 점에서도 큰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걱정은 사이버펑크 2077에서 결국 현실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사이버펑크 2077은 구조로 보았을 때는 아쉬운 부분이 너무나 많다. 이머시브 심 관점에서 본다면, 분명 유연함의 구색을 갖추었다 할 수 있는데 그 구색을 갖춘 부분들이 전문적인 장르에 비교하면 한없이 떨어지고, 그래도 좀 구색을 갖추었다고 판단이 되는 비슷한 작품(스카이림 같은)과 비교해도 어딘가 나사 빠졌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기 때문이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잠입과 관련한 부분들인데, 이머시브 심 장르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고도화된 맵 디자인이나 시스템과 달리 사이버펑크 2077의 맵 구조는 어딘가 성기고 나사가 빠져있다. 

그에 반해서 액션 관점에서 사이버펑크를 보자면 기본적인 구색을 갖춘 채로 게임 플레이는 탄탄한 편이라 할 수 있다. 총기류에서부터 근접전투, 퀵 핵(마법)까지 다양한 전투 수단을 갖고 있으면서 초근접 전투에서 치고 빠지는 플레이, 은신을 이용한 전투, 총기류 싸움까지 다양한 액션을 소화하고 있다. 초기 세팅들(총기를 쓸거냐, 근접을 할거냐, 아니면 마법을 쓸거냐)이 끝나고 난 뒤에는 각자 케릭터 컨셉에 맞게 ‘강하다’를 분명하게 체감할 수 있어서 이 부분의 구성을 잘 다듬어진 편이다.

그러나 이러한 액션을 뒷받침하기 위한 파밍이나 사이버웨어 강화요소는 반복 파밍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은 다소 마이너스 요소다. 액션 자체는 분명 재밌는 점이 있지만, 등장하는 적들이나 전투, 상황 등이 단조로운 편이고 이것은 반복 미션 등에서 자주 경험할 수 있다. 그런데도 사이버웨어나 아이템을 강화하기 위해서 부품들을 끊임없이 파밍하게 만들어서 플레이어가 게임 플레이에 지치게 만든 점은 다소 마이너스 요소다. 팬텀 리버티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동차를 이용한 서브미션 반복이나 도그타운 공중 드랍 같은 요소들을 집어넣었지만, 게임의 70~80%를 차지하는 본편에서는 여전히 반복 플레이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아쉬운 부분이 있다.

미션 구조도 마이너스인 부분들이 있다. 대부분의 미션들은 픽서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반복이라 느껴질 반복적인 부분들이 많은데, 단순히 특정 지역에 들어가서 문제를 해결하고 나오라는 구조의 미션이 워낙 많고, 미션이 1회성으로 끝나서 RPG의 퀘스트 라인을 즐긴다기 보다는 뭔가 못만들어진 이머시브 심 게임을 계속해서 재탕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게 만들어버렸다. 

미션 뿐만 아니라 콘텐츠 구성에서도 미래의 도시라는 공간을 제대로 못살리고 있다는 아쉬움이 있다. 오픈월드의 핵심은 비어있는 공간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라는 측면에서 위처 3와 같은 게임의 감각과는 뒤떨어진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스토리 파트 글에서 별도로 이야기하긴 하겠지만, 단순히 중세 판타지를 미래로 옮긴 것이 아닌 미래-현대라는 사이버펑크를 무대로 할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는 게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라는 풍광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위 내용을 1차적으로 정리하자면 사이버펑크 2077의 문제는 전반적으로 목표를 너무 높게 잡았다는 것이다. 적어도 스카이림과 같은 수준의 게임을 만들려고 한 것이 CD 프로젝트의 목표였던 것인데, 스카이림이 거기까지 도달하는데 엘더스크롤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기나긴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너무 무모한 도전이었다. 차라리 몇몇 요소들을 과감하게 처버리고 액션과 플레이어가 강해지는 요소에만 집중해서 게임을 재구성했다면 이정도로까지 해매진 않았을 것이다. 

정말로 아쉬운 부분은 사이버펑크 2077이 못만들어졌다고 이야기하기에는 노력을 안했다던가 고민을 안했다던가 등의 문제가 아니라 꿈을 너무 높게 잡았다는 문제가 더 컸다. 자동생성형 콘텐츠나 전화의 존재, 메인 퀘스트 라인의 배분, 빠른 이동의 존재 등등을 넣었을 때 분명 위처 3와 다르게 미래 도시라는 배경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있었지만, 정작 비어있는 것을 어떻게 채워넣을까에 대한 노하우가 부족했던 것이 너무 확연했다. 위처 3를 예로 들어보자면 몬스터를 사냥하기 위해서 몬스터가 무엇인지 조사하고 추적하고 사냥하는 과정이 하나의 퀘스트 라인으로 묶였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즉, 위처 3에는 테마와 게임 구성이 유기적인 결합이 있었다면, 사이버펑크 2077에는 그러한 것이 매우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런 부분에서 선택과 집중을 통해 사이버펑크 2077의 테마에 맞는 세계와 스테이지 구성이 이루어졌더라면 게임은 지금보다 더 훌륭한 게임이 되었을 것이다.

본 리뷰는 스위치 2 판을 기준으로 이루어졌으며, 많은 부분 칼질당하긴 했지만 사이버펑크 2077은 스위치 2로 즐길만한 수준이다. 물론 도그타운 같은 곳에서는 30프레임 방어가 안되서 들쭉날쭉할 때도 있지만 이는 모든 콘솔 버전들이 겪는 문제고, 다른 곳들을 감안한다면 휴대나 거치 모드 모두 그래픽이나 성능 양쪽 측면에서 만족스럽다고 할 수 있다.

결론을 내리자면 사이버펑크 2077은 CD 프로젝트의 위처 3와 같은 고점과 비교하기에는 아쉽고 부족한 것이 많은 게임이다.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너무 거칠고 투박하고 덜컹거리는 부분들이 너무 많다. 목표가 더 낮게 잡혔으면 더 훌륭한 게임이 되었을 것이란 아쉬움이 있지만, 다음 작품에서는 부디 좀 더 잘 다듬어진 작품을 만들었으면 하는 일말의 기대감도 준다고 볼 수 있다.

게임 이야기

 

- 전반적인 인상은 스팀덱의 강화 버전. 즉, 스팀덱이 스위치에 대해서 가졌던 컨셉들(강화된 스펙을 지닌 휴대용 게임기기)을 강화한 버전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역으로 이야기한다면 '스팀덱'의 강화버전이기 때문에 스펙적으로는 분명 아쉬운 부분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위치의 기믹에서 본다고 한다면 그 연장선에서 건실한 모습을 보여주는 기기라고 할 수 있다.

- 사이버펑크 2077을 돌렸을 때(10시간 정도 플레이), 상당히 인상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이후에 프레임 드랍이 일어나는 구간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30프레임을 칼 방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신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NPC 수가 줄어들었다고는 하는데 그게 그정도로 티가 나는가 하면 그정도는 아니었던거 같다. 전반적으로 그래픽의 수준을 본다면 플4~플4프로 수준의 깡스펙을 DLSS라는 기술을 이용해서 디테일을 살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스트리트 파이터 6의 경우, 싱글 컨텐츠는 30프레임으로 돌아서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멀티 플레이나 대전 환경에서는 칼같이 60프레임을 유지하고 있고, 또 눈여겨 봐야하는 부분은 그 디테일이 엑박 시리즈 S와 거의 유사하다는 점이다. 생각보다 완성도가 높아서 만족도가 높은 케이스라 할 수 있다.

-마리오 카트 월드는 오픈월드+24인 멀티라는 점에서 게임기의 스펙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는 케이스로 보여진다. 

-싸펑이나 마리오 카트 월드는 리뷰를 쓰긴 쓸건데 언제 어떻게 쓸지는 좀 고민해보고 써야할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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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롱레그스라는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감독인 오즈굿 퍼킨스의 가족사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오즈굿 퍼킨스의 아버지인 안소니 퍼킨스는 헐리웃에서 활동하는 유명배우였는데, 게이라는 사실을 숨긴채로 아내인 베리 배런슨과 결혼하였고, 이것이 감독의 유년시절을 관통하는 트라우마가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비밀을 자식이 알지 못하게 숨기는 어머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의 어두운 분위기의 영향을 받는 아들, 기억 속에서 어두운 트라우마처럼 들러붙어있는 아버지의 이미지까지, 롱레그스의 창작 모티브들은 여기에 기반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롱레그스는 '무서운' 공포 영화라기 보다는 '우울한' 공포 영화다. 영화는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주인공인 리 하커가 어머니가 숨긴 어두운 비밀과 자신의 트라우마를 파해쳐 올라가는 내용이다. 영화의 오프닝 시퀸스를 보자. 4대3 화면 프레임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소녀의 관점에서 그 사건이 있기 전날의 상황을 회상하는데, 트라우마를 안겨주는 롱레그스의 얼굴이 '프레임 바깥'에 있다가 불현듯 4대3 프레임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어린 시절 트라우마가 어떻게 해서 생기느냐를 보여주는 과정이다.

영화는 리 하커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구성한다. 그리고 그 세상의 주요 키워드는 강박과 반복이며, 강박은 대칭을 통해서 구성된다. 롱레그스 사건에 투입되기 전에 무의식적으로 용의자를 잡아내는 장면을 보자. 여기서 하커는 아무것도 없는 집을 응시하다가 거기에 용의자가 있다 라고 단정하는데, 계획도시마냥 정리된 미국의 교외 마을의 비슷 비슷한 집들의 모습에서 하커가 바라보는 것은 대칭된 집의 이미지다. 영화는 이와 같이 대칭되는 이미지와 그 가운데 주인공을 끊임없이 강박적으로 밀어 넣으며 주인공을 가둬둔다.

재밌는 점은 대칭이라는 관념일 것이다. 대칭이란 공간 내에서 어떠한 축을 기준으로 하여 동일한 이미지가 재생산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칭에 있어서 축과 공간이라는 개념일 것이다. 대칭은 어디까지나 제한된 공간과 중심되는 축이 존재해야만 성립될 수 있다. 영화의 첫 시퀸스처럼, 4대3의 공간에서 공간 바깥에서 등장하는 트라우마(롱레그스)가 하커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정의하고 그 세계 내에 갇혀있을 수 밖에 없게 만든다. 즉, 하커의 세계가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서 프레임에 갇혀있게 만들고, 그 갇힌 세계에서 남들은 인지하지 못하는 것들을 무의식적이고도 강박적으로 찾는 재능이 생긴 것이다. 

하커라는 인물 역시 어렸을 적의 트라우마에 사로잡혀있는 사람이다. 중요한 점은 영화의 반전이 등장하기 전까지 이 트라우마가 의식적으로 이해되기 보다는 무의식적으로 하커를 억압한다는 점이다. 하커의 소녀적인 모습(바닥에 증거 파일들을 늘어놓고 분석하는 모습은 전문가의 모습보다는 소녀의 소꿉장난처럼 보인다)이나 정상 가족에 끼지 못하는 모습(상사의 가족과 가상선을 두고 완벽하게 유리되고 분절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 등은 하커가 의식적으로 행하는 모습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억압되는 모습임을 암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반전은 씁쓸하고 우울하다. 하커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트라우마의 진실을 알게 되고, 어머니의 파괴적인 모성애(하커를 살리기 위해 악마와 계약하고, 하커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대신해서 가족을 죽여온 것)를 마주한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하커의 아버지가 없다는 점과 롱레그스가 어머니와 모의하여 가족들을 참살했다는 점이 결합하면서 롱레그스가 마치 '유사 아버지'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어떻게 보면 감독의 아버지에 대한 어두운 감정(화해할 수 없는)을 드러내는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어두운 사실로부터 어머니가 자식을 보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완벽한 보호가 아닌 '살아남는 것을 허락받았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자식의 기억에 알게 모르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는 점은 영화나 감독의 개인사에 있어서 매우 씁쓸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결론을 내리자면, 오즈굿 퍼킨스의 롱레그스는 감독의 개인사를 프레임과 미장센을 이용해 훌륭하게 우울함을 표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아쉬운 점은 감독의 개인사를 알지 못한다면 완벽하게 이해하기에는 뭔가 2%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점을 이해하고 본다면, 어린 시절 트라우마로 인해서 강박증과 불안, 우울을 갖게 된 수많은 어른들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사랑과 어긋남, 강박, 그리고 그 씁쓸함이 커버린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서브스턴스의 국내 흥행 성공은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지만(바디 호러 장르의 흥행이라니!), 영화를 자체만 놓고 본다면 사람들에게 어필을 할 수 있는 내용과 연출로 무장한 작품이었기 때문에 어느정도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영화는 젊음에 대한 이미지 소비와 착취, 자기 파괴 등이 데미 무어의 열연과 맞물리면서 좋은 시너지를 냈다. 그리고 바디 호러의 불쾌함과 함께 신체와 상징들을 이미지와 명확하게 연결지음으로써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만든 것도 영화의 흥행에 한 몫하였다. 요컨데 서브스턴스는 바디 호러 장르의 불쾌함과 이미지의 불분명함(몸과 상징의 구현)을 명확하게 만들어내어서 성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서브스턴스의 명징한 상징과 이미지들은 때로 이 작품의 앝은 구조를 너무 쉽게 드러내기도 한다. 마치 초반부 데니스 퀘이드가 새우를 까서 먹으며 새우를 마치 늘어진 남성기를 흔드는 것처럼 묘사하듯이 말이다. 어떻게 본다면 너무 직설적인 표현들인데, 이 너무 직설적인 표현과 구조들이 관객을 이입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이다:무언가 관객과 영화 내의 인물이나 장치들에 연결되어 일종의 공감각을 형성하여 관객을 뒤흔드는 것이 뛰어난 바디 호러의 강점이라 한다면, 서브스턴스는 관객을 스크린 바깥에 안전하게 놓고 쇼를 보여주는 것에 가깝다. 극 내에서 '캐릭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인물의 묘사나 구성이 된 것은 엘리자베스 밖에 없고, 하비와 같은 인물은 인간이라기 보다는 불쾌한 쇼 비즈니스 그 자체에 불과하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엘리자베스의 복제이자 이 영화의 중요한 한 축인 수 마저도 캐릭터라고 보기 힘들 정도의 묘사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와 수의 관계는 일견 보기에는 명료한 관계처럼 보인다. 늙어버린 엘리자베스가 젊음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세계에서 사랑받기 위해 수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영화의 주요 내용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명제가 맞다고 가정한다면 두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첫번째는 엘리자베스가 수를 만든 이유는 분명하지만, 어째서 수가 엘리자베스를 착취하고(=척수액을 뽑아서 자신을 유지하기) 엘리자베스는 척수액이 뽑힐 때마다 더 추하게 늙어가는가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착취라는 것은 착취하는 자가 착취 당하는 자로부터 얻을 것이 있기 때문에 행하는 것인데 수는 그 자체로 완벽하기 때문에 수는 엘리자베스를 착취할 이유가 명확하게는 없어 보인다.

두번째는 서브스턴스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자가 이야기하는 '균형'의 문제이다. 처음 설명할 때처럼, 둘을 하나이기 때문에 서로 균형을 맞추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서브스턴스를 통해 만들어진 복제체와 본인 사이의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핵심이라 한다. 그런데 겉보기에 젊음과 늙음이라는 관계에서 '균형'은 어떻게 찾아야 하는 것인가? 젊음은 이미 지나가버린 것이고, 늙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균형이라는 것은 양쪽에서 서로 주고받는 것이 있어서 유지를 해야하는 것인데, 지나간 것과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절대적 장벽 사이에서는 이들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서브스턴스를 젊음과 늙음의 육체에 대한 내용으로 보는 것은 일견 직관적이긴 하지만, 함정이 있는 해석이다. 이를 정확하게 설명하려면 미디어에서 소비되는 육체의 이미지와 실제 육체 간의 괴리에 대한 관점으로 봐야할 것이다. 그 관점에서 본다면 어째서 이미지의 육체(=수)가 실제의 육체(=엘리자베스)를 착취하는가가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미지의 육체는 실제 육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너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실제의 육체를 착취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의 육체가 우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의 육체는 이미지의 육체를 보면서 자신이 원본임에도 느낄 수 밖에 없는 열등감으로 자기 파괴적인 행위를 하는데 서브스턴스에서 그 자기 파괴적인 행위는 바로 '폭식'이다. 그리고 이미지의 육체가 자신을 파괴적으로 즐기는 행위가 '섹스'인 것도 눈여겨 볼만하다.

하지만 이 관계성은 영화의 배경에 의해서 의도치 않게 숨겨져 있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육체의 이중적인 이미지(이미지와 실제)는 이미 인스타그램이나 틱톡, 유튜브와 같은 매체에서 많이 보여진 현상이다. 수많은 보정 필터, 스테로이드, 호르몬, 성형 수술 등으로 인해 육체의 이미지들은 실제보다 더 과격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서브스턴스의 메타포는 그렇게까지 놀라운 경험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서브스턴스의 배경이 헐리웃과 LA 라는 쇼 시스템에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는 것이다. 처음 엘리자베스 스파클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던 것으로 영화는 시작되는데, 이 명예의 전당 헌액과 늙어버린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젊은 여배우가 어떻게 차츰 사라지는가 라는 '시간'의 벡터가 자연스럽게 개입하고 그것이 '젊음'과 '늙음'이라는 두 이미지의 대립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즉, 젊은 육체와 늙은 육체의 주도권 싸움이라는 잘못된 구도는 영화의 배경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문제였던 것이다.

서브스턴스의 치명적인 문제점은 구도 자체를 너무 명확하게 잡으려 하다가 오히려 불필요한 구성을 추가해서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차라리 SNS의 시대인만큼 헐리웃이라는 배경을 제거하고 SNS와 관심을 끌기 위해서 행하는 자기 파괴적인 행위들로 이야기를 재구성하였다면 서브스턴스의 이야기는 명확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갑이 지난 데미 무어의 연기는 인상적이었다. 젊어서는 섹스 심볼로 유명했었던 그녀가 늙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했었던 연기들은 어떻게 보면 자신의 삶에 대한 메소드 연기였을 수도 있다. 그녀의 연기가 있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라는 케릭터가 인물로 성립할 수 있었는데(수에 대한 애증, 자기 혐오와 파괴 등), 다른 인물들이 인물들로 성립되기에는 너무나 평면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데미 무어의 연기가 더더욱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결론을 내리자면 서브스턴스는 바디 호러 영화의 입문작으로는 나쁘지 않은 작품이다. 그러나 몇몇 부분에서 너무 얕고, 혼란이 있을만한 구도를 사용하고 있다는게 문제다. 차라리 헐리웃이라는 공간이 아닌 SNS와 같은 것들을 배경으로 사용했다면,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와 이미지에 더 부합했을텐데 그 부분은 안타깝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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