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영화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매우 혼란스러운 영화다. 어떻게 보면 장르적 문법이나 레퍼런스가 분명하게 있었던 유전이나 미드소마와 다르게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철저하게 '아리 에스터의 영화다:아리 에스터가 유전이나 미드소마에서 장르적인 재미나 문법을 따르려는 시도를 보여주었다면, 보 이즈 어프레이드에서는 장르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보다 아리 에스터가 갖고 있던 주제의식이나 테마에 집중해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장르적으로 영화를 이해하려고 하면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역설적이게도 아리 에스터가 가장 하고 싶었고 그의 가장 큰 강점이 나오는 영화이긴 하지만, 동시에 그 강점에 빠져서 자신만의 언어에 갇혀있다는 인상을 준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를 이해하려면 우선 아리 에스터의 영화들이 '자폐'라는 테마에 천착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자폐란 스스로 가두다 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면서,  공감 기능 결여, 의사 소통의 어려움과 제한적이고 반복적인 행동을 특징으로 하는 발달 장애의 일종으로 본다. 정신병적인 현상 뿐만이 아니라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것을 자폐로 할 수 있는데, 이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있는 상황 자체가 아리 에스터 영화에서 주요한 테마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리 에스터는 그것을 미니어처라는 방식으로 표현함으로써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구축한다.

유전과 미드소마를 보자. 영화 유전에서 주인공은 미니어처를 만드는 예술가다. 미니어처를 만드는 과정에서 그녀는 미래에 일어난 일 또는 과거에 일어난 일을 미니어처의 형태로 구현하는데, 영화는 이를 통해 단순히 미니어처가 미니어처가 아닌 세상의 축소판이자 일어나고 벗어날 수 없는 운명들을 암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직접적으로 미니어처가 등장한 유전과 달리 미드소마는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미니어처가 나오지 않지만, 첫 시퀸스에서 영화의 모든 내용을 미리 알려주는 모습을 통해서 '세계 안의 작은 세계'를 보여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미드소마에서 보여주는 것은 닫힌 세계와 그 닫힌 세계에 매료되는 주인공, 그리고 정신병과 공진하는 공동체라는 이미지들을 통해서 반복과 빠져나올 수 없음이라는 독특한 미학을 구축한다.

아리 에스터의 자폐의 핵심은 바로 미니어처를 이용한 반복과 빠져나올 수 없음이다. 반복과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은 자폐의 단어 뜻 그대로 스스로 갇혀있다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스스로 만들어놓은 완벽한 논리의 세계 속에 갇혀서 끝없이 똑같은 말과 단어들을 곱씹다 파멸하는 것이다. 영화 유전과 보 이즈 어프레이드에서 직접적으로 보여주었던 것 처럼 주인공들이 그 이미지와 논리에 갇혀있다가 피하지 못하고 파멸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외부의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파멸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유전에서는 그것이 일종의 그리스 비극 처럼 묘사되었고, 미드소마에서는 작은 커뮤니티에 사로잡혀 갇혀버린 이미지로 끝났다면,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어떻게 보면 더 원류인, 정신병 특유의 자폐적인 이미지의 원본에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 영화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 정신병자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정신병자의 핵심은 바로 머리 내의 어떠한 생각이나 망상에 빠져서 객관화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허황되고 말도 안되는 망상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근원적인 감정이나 경험(망상이나 불안 같은)에 맞물려서 보았을 때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 정신 질환의 핵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서 외부의 도움을 받는 것이 현대적인 정신병리학과 심리학의 개념이라 한다면, 보 이즈 어프레이드를 통해서 아리 에스터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그런 정신병자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맞춰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이야기는 합리적이나 장르적 정합성에 맞는 것이 아니라 정신병자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로 생각해야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재밌는 점은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이야기가 어떻게 보면 뒤틀린 버전의 트루먼 쇼라는 점인데, 그것이 실제로 트루먼 쇼처럼 모든 것을 보 하나를 괴롭히기 위한 몰래카메라였다고 이해한다기 보다는 보가 상상하는 불안과 공포가 세상 전체가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망상이 영화의 서사로 발현된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적확할 것이다. 영화 극초반에 보여주었던 복선과(물없이 항불안제를 먹지 말라는 의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냥 알약을 씹어삼키는 모습) 보 이즈 어프레이드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정합적이지 않고 한 사람을 향한 무수한 불합리와 불안의 구현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즉, 부모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불안과 관계에 대한 방어 기제, 공포들이 만들어낸 환영이란 것을 이해한다면 영화가 좀 더 '정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정신병자의 단순한 읊조림과 공포라는 측면에서 이해한다면 이 영화의 모든 것을 이해했다 할 수 없다. 영화의 중반부 주인공은 고아들의 극단들을 만나서 자신의 인생을 형상화한 독특한 연극을 보게 된다. 하지만 이는 특이하게도 영화를 지배하는 '자폐적'인 이미지로 해석할 수 없는 이질적인 분위기로 구성되어 있다. 마치 연극을 하듯이 담담하게 자기가 살고 싶었던 인생과 살지 못했던 인생, 마지막에는 그것이 허구인 것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통해서 영화는 빠져나가지 못하는 이미지가 아닌 '일종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여기서 아리 에스터의 가장 특이한 점이자 이런 미학에 사로잡힌 사람들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점을 찾아볼 수 있다:그것은 바로 '자기 객관화'이다. 정신병자가 스스로 살고 싶었던 인생을 망상하면서 그 과정을 돌아보다가 자신이 여성과 관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스스로 현실로 돌아오는 모습은 모든 정신병자들이 갖고 있는 소양인 동시에 정신병자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요소다. 자신이 빠져나갈 수 없는 이유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 이유를 고치지 못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살 수 밖에 없는 모습을 통해서 자폐의 세계를 더욱 강렬하게 묘사하면서, 그 너머의 세계를 인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폐적인 세계를 다루는 예술가들은 많았지만 아리 에스터가 독특한 이유는 바로 자폐 너머의 세계를 인지하고 그것 역시 영화의 미학의 범주에 넣는다는 점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 에스터의 영화에서 미니어처의 미학은 상당히 중요하고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그것은 세상의 축소판이고 반복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세상 그 자체'는 아니다. 미니어처 자체가 세상의 축소판이긴 하지만 동시에 그 작은걸 바라보는 자신이라는 시선을 인지할 수 밖에 없듯이, 미니어처의 미학은 일종의 자기 객관화를 담보한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에서 이를 본다면 중간에 자신의 미래를 보여주는 TV속 영상 처럼 말이다:주인공은 거기 도달하기 전까지는 그것이 갇혀있는 폐곡선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다. 미니어처를 통해서 세상의 축소판처럼 갇혀서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부딪히기 전까지는 확정된 사실이라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은 그 끝까지 나가서 파멸할 때까지 나가고 반복한다. 마치 불길한 징조처럼 세계의 곳곳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견하고 있지만, 그것은 주인공들이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도달해서야 완성이 되는 폐곡선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특이하게도 자기 객관화와 '바깥'의 가능성을 인지하지만 동시에 다시 미니어처의 세계에 사로잡히는 독특한 미학과 논리 구성이라 할 수 있는데 많은 창작자들이 틀릴 수 있더라도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을 생각한다면 아리 에스터는 독특하게도 바깥을 인지하면서도 바깥으로 향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아리 에스터의 강점이 묻어나온 동시에 아리 에스터가 더이상 일반적인 장르 문법과 타협하지 않고 더 먼길을 떠났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분명 영화적 재미나 즐거움은 없는 영화라 할 수 있지만, 아리 에스터라는 감독을 이해하고 그의 원류를 느끼고 싶다면 이 영화는 꼭 보기를 추천한다.

잡담/개인적인 이야기

 

거의 3주에 가까운 야근 러쉬가 막 끝나고 휴일에 숨돌리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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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야기

 

옛날에 쉔무라는 게임이 있었다. 이 게임은 어떻게 보면 지금 있는 오픈월드 샌드박스 장르의 효시라 할 수 있는 게임이었다. 이 게임이 끼친 영향은 어마무시 했다. 플레이어의 움직임과 별개로 살아움직이는 세계를 구현한 쉔무는 GTA나 레드 데드 리뎀션 같은 기라성 같은 대작들에게까지 영향을 주며 우리와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레드 데드 리뎀션 2를 보자. 복잡한 상호작용과 조작 버튼들,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방식 등은 근래 오픈월드 게임들이 간소화되는 과정을 밟는것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오히려 쉔무에 근접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본다면 쉔무의 망령은 지금에서까지 사람들을 현혹시킨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쉔무의 망령과 달리, 남겨진 세가 제작자들에게 있어서 쉔무는 어떻게 보면 극복해야하는 대상이자 넘어서야 할 과제, 그리고 일종의 멍에이자 족쇄였을 것이다. 쉔무의 제작비와 스케일이 한 때 게임계의 한 축을 주름잡았던 세가에게 큰 타격을 입힌 것도 사실이었고, 쉔무 1&2의 야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어딘가 나사빠진 작품이라는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쉔무의 아이디어를 차용하면서 동시에 쉔무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게끔 하는, 어떻게 본다면 레드 데드 리뎀션 2나 GTA와 같은 게임과 완전히 다른 게임을 만드는 것이 세가 제작자들의 목표가 되었다. 그 결과, 야쿠자 액션 활극이라는 용과 같이가 탄생하게 되었다.

용과 같이는 기본적으로 쉔무의 영향에 놓인것 처럼 보인다. 플레이어는 카무로쵸를 돌아다니면서 시비를 거는 양아치를 패서 돈을 벌고, 다양한 어른의 유희를 즐긴다. GTA나 레드 데드 리뎀션과 다른 점은 용과 같이는 철저하게 카무로쵸라는 한정된 공간을 배경으로 게임이 전개된다는 것인데, 대신 그 공간에 유흥가를 지나다니는 행인의 관점에서 세계를 오밀조밀하게 구축한 점에서 공간에 대한 밀도와 구성이 다르다. 요컨데 여타 오픈월드 게임이 '세계'의 구축이었다면, 용과 같이는 '거리'의 구축이라는 점에서 맥락과 방향성이 다르다는 것이다. 카무로쵸라는 공간의 디테일을 올려놓은 대신에 공간을 줄이고, 그 공간을 재활용하면서 시리즈를 구축해나간다. 이는 현대적인 게임 개발의 전략과 유사한 동시에 쉔무의 개발 전략과 동일한 부분들이 있다.

재밌는 점은 용과 같이의 방향성일 것이다. 용과 같이는 쉔무나 여타 오픈월드 게임이 갖고 있는 '규모'와 '재현'이라는 측면에서는 상당히 이질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용과 같이는 규모와 재현을 축소하였다:단순하지만 다양한 미니 게임들을 작고 오밀조밀한 공간에 모아두고 플레이어가 다양한 액티비티를 즐기는 것을 강조한다. 오픈월드 게임에 미니게임이 다양하게 들어가지만, 오픈월드 게임들이 세계와 상호작용한다는데 집중한다면 용과 같이는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방식이 미니 게임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어른의 놀이'라는 감각을 살리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카무로쵸라는 유흥가를 배경으로 다양한 놀거리들을 두고 그 유흥을 즐기는 것을 모티브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른의 유희를 한군데 모으고 사실적인 배경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게임의 구심점을 만들 수 없다. 미니 게임만으로 게임을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을 하나로 엮는 것은 또다른 컨셉이 필요하다. 용과 같이는 여기서 야쿠자 인협물 장르 클리셰를 들고 온다. 재밌는 점은 쉔무가 일본식 무협물을 스케일을 키웠다고 한다면, 용과 같이는 인협물의 클리셰를 투박한 형태로 구현한다. 투박하다는 평가를 여기에 쓰는 것은 용과 같이 초기작들의 스토리가 '빈말로도 좋다'라고 이야기 힘든 부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부분 이야기들을 끌고 가는 동력을 장르적 클리셰(인의에 충실한 야쿠자, 그에 비해 모자라서 열등감을 느낀 친우이자 라이벌, 기억을 잃은 여주인공 등)에서 끌고 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초기 용과 같이 시리즈들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1편과 2편 자체가 엄청난 흥행을 의식하고 만들어지지는 않고, 아직 전반적인 방향성이 설정된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극 1편과 같은 작품에서는 이야기를 보완하는 추가 컷씬을 집어넣었는데, 추가 컷씬이 있어도 개연성 부분에서 다소 모자란 부분이 있었다는걸 생각한다면 좋은 평가를 주기는 힘들다.

그러나 용과 같이 시리즈와 극의 스토리의 강점은 그러한 스토리의 개연성이나 정합성, 감동에 있다기 보다는 '그래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데?'를 궁금하게 만드는 부분에 있다. 그리고 게임은 여기에 도시전설이나 도시 풍광에서 볼 수 있는 상상력들, 그리고 자극적인 전개들을 통해서 사람들이 스토리에 몰입하게 만든다. 용과 같이가 빛나는 부분들은 이 부분들이다. 우리가 미시하게 바라보는 유흥가의 풍광들로부터 이야기를 쌓아올려서 거대한 음모와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이끌어간다. 그것이 용과 같이 극에서는 다소 투박하기는 했지만, 그 투박함 속에서도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힘과 재미를 갖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용과 같이 극은 용과 같이 시리즈의 첫 작품의 리메이크로 용과 같이 시리즈들 중에서 가장 거칠고 투박한 모습을 자랑하지만(물론 극을 통해서 다듬어지긴 했어도), 그래도 이 작품이 어째서 지금까지 사랑받는지를 알려주는 매력을 가진 게임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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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 챗 지피티가 마음대로 상상한 영화의 이미지입니다.

 

오즈 퍼킨스 감독의 영화 더 몽키는 유명했던 시리즈 공포 영화 데스티네이션을 연상케 한다:그 누구도 죽음으로부터 피할 수 없으며, 인물들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데스티네이션이 황당한 죽음이 가져다 주는 긴장감(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비롯되는)과 영화의 양식에 기반한 일종의 카타르시스(죽을 사람은 결국은 죽는다)에 기반한 양식적인 재미가 있었다면, 더 몽키는 다른 곳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전에 리뷰했던 롱레그스처럼(https://leviathan.tistory.com/2661) 영화는 감독의 가장 내밀한 경험(게이였던 아버지와 그걸 숨긴 어머니라는 그의 가족사)에 기반하고 있지만, '살아남는 것을 허락받은 것'이 아닌 독특한 결론으로 이끈다는 것이 인상 깊은 영화다.

오즈 퍼킨스 감독의 가장 큰 모티브는 '어떻게 어린시절의 경험이 다 자란 성인을 지배하고 고통받게 만드는가'이다. 더 몽키도 비슷하다:아버지의 부재, 어머니만 존재하는 편모 가정에서 자란 쌍둥이 중 동생인 주인공은 죽음을 불러오는 원숭이 인형에 의해서 어머니와 친척들을 잃는다. 그러고 나서 갑자기 영화는 결혼에 실패하고 자식과 아내, 심지어는 아내의 재혼 상대에게도 무시당하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넘어간다. 재밌는 점은 여기서 주인공이 가족을 꾸리고 실패하는 과정 자체가 완전히 통으로 생략이 되었다는 점이다:이는 어떻게 보면 유년기 트라우마를 가진 자들의 숙명이라 할 수 있는데, 영화 내내 그가 과거의 망령인 원숭이 인형에게 쫒기는 것 뿐만 아니라 그 망령에게 언제고 뒤를 잡힐것이라는 강박 때문에 자신의 인생마저 즐기지 못하고 자식마저도 밀쳐낸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주인공을 쫒아오는 그 망령은 바로 '죽음' 그 자체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분명 데스티네이션 시리즈와 더 몽키는 닮은 부분이 있지만, 고어의 미학에서 본다면 사뭇 다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데스티네이션 시리즈의 죽음 기본적으로 '사고'다.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일어나는 사고가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면서 아무리 준비가 잘 되어 있어도 죽음으로부터 피할 수 없다라는 양식미를 구축한다. 하지만 더 몽키에서 죽음은 부조리함이다. 우연에 우연이 겹쳐져서 만들어지는 사고와 사뭇 다른 점은, 더 몽키의 죽음은 '말이 되지 않는다'인 것이다. 그것은 일상 생활에서는 생각조차 못하는 현상에 가깝다. 단순히 기막힌 우연의 확률로 뇌동맥류가 터져서 죽은 어머니 뿐만 아니라, 야외에서 캠핑하다가 야생마들에게 짓밟혀서 다진 곤죽이 된 외삼촌, 머리에 불붙은 채로 뛰어다니다가 표지판에 머리가 관통 당해 죽은 외숙모, 심지어 수천마리의 벌이 입안에 들어가서 죽어버린 인물까지 더 몽키에서 죽음은 초자연적인 현상에 가까울 정도로 기이하지만, 동시에 중요한 것은 확률적으로 불가능한 현상은 아니라는 점이다.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데스티네이션에서는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 우연에 우연을 거듭한 끝에 사람을 죽이는 치명적인 상황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면, 더 몽키에서는 돌이켜 생각하면 받아들일 수 있지만 말도 안되는 사건으로 인해서 삶이 불현듯 끝나버리는 것에 가깝다. 즉, 더 몽키는 사람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이라는 것이 대단히 일상적이면서도 바람을 불면 훅하고 날아가듯이 아주 가느다라고 위태로운 실 위에 지탱되는 곡예사의 곡예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부조리한 죽음(원숭이 인형)을 만난 주인공은 그 경험의 포로가 된다. 원숭이 인형이 북채를 치고 북을 칠때마다 사람이 죽어나간다. 그러한 법칙을 알게 된 주인공은 자신을 괴롭히는 쌍둥이 형이 죽기를 바라면서 원숭이의 태엽을 감는다. 그러나 그 결과 어머니와 외삼촌이 죽게 되자, 주인공과 쌍둥이 형은 그 인형을 토막내서 우물에 던져버린다. 하지만 그것은 그 경험의 극복은 아니다:죽음은 피할 수 없다는 것, 비록 자신이 원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태엽을 돌려서 어머니의 죽음을 불러일으켰다는 것 등이다. 이 와중에 재밌는 점은 원숭이 인형의 작동 방식인데, 태엽을 감아서 작동하는 것도 원숭이의 마음대로이고 죽이는 대상도 원숭이의 마음대로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태엽을 감아서 누군가를 죽인다는 발상은 어떻게 보면 주인공의 죄책감과 무관하게 허구의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박스 포장지에 적힌 실물의 삶처럼Like a Life 이라는 문구처럼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을 은연중에 보여준다. 즉, 주인공은 어떻게 보면 자신이 통제하지도 못하는 것에 휘말렸음에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는 착각, 유년기에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이 갇히는 함정에 갇힌 것이다.

재밌는 점이자 이 영화의 가장 거친 부분은 바로 쌍둥이 형의 존재다:주인공의 쌍둥이 형은 주인공이 자신을 죽이려고 인형의 태엽을 감았다는 사실을 알고, 주인공을 죽이기 위해서 계속해서 인형의 태엽을 감아 사건을 일으킨다. 하지만 막상 주인공과 어색한 화해 장면에서 어색하게 장난을 치는 모습을 보이다가 인형이 북을 치는 바람에 죽어버리고 마는데, 이 시퀸스는 어색하고 불편하고 찝찝한 기류가 계속 흐르는 영화의 결과 맞지 않는 이상한 장면이다. 영화 전체는 주인공이 자신의 편집증과 강박으로 인해서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두고 그 과정에서 주변사람과 자식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면, 이 장면에서는 그 화해하는 장면을 대단히 어색하게 희화화 함으로써 대체 이 둘의 관계는 무엇인가? 라는 의문을 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실 쌍둥이 형의 존재는 이 영화의 인물들과 맥을 달리하는 부분들이 있다. 롱레그스나 더 몽키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자면, 다들 평면적이긴 하지만 어떤 충격적인 사건에 의해서 뒤틀려버린, 강한 유압프레스에 눌려버린 시체처럼 그로테스크하게 짓눌려버린 모습을 하고 있다. 즉, 그들이 그러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는 강렬한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모습에 집착할 수 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다양한 면모들을 캐치하는 것이 오즈 퍼킨스 감독의 강점이었다. 그러나 주인공의 쌍둥이 형은 살아있는 인물이라기 보다는 어딘가 케릭터가 '비어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하나의 인물로 보기에는 인물과 서사가 비어있다는 인상을 받는데, 이는 쌍둥이 형이 처음부터 인물이었다기 보다는 동생인 주인공의 인격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린 시절 활발하고 잘 놀았지만, 동시에 그 어린 시절의 유치함에 사로잡힌 존재, 그리고 똑같이 죽음이라는 강렬한 경험을 했지만 죽음에 다른 방식으로 집착한 존재,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 혐오와 체벌을 하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이라 한다면 앞뒤가 맞게 된다. 즉, 쌍둥이 형이 화해를 하는 척 하면서 어설픈 장난을 치는 모습이나 쌍둥이 형과 끝끝내 화해를 하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장면은 자신의 유년 시절과 작별을 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쌍둥이 형이 죽고, 인형을 다시 찾은 주인공은 앞으로 이제 어떡해야하냐는 아들의 질문에 가족의 의무니 뭐니 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그것은 자신이 겪었었던 강박과 편집의 대물림이기도 하다. 하지만 차 앞을 지나가는 죽음(흰 말을 타고다니는 창백한 기수)을 보고서 주인공은 생각을 바꾸고 이야기를 한다. 춤추러 가자고. 그것은 죽음을 대하는 주인공의 태도가 바뀐 것을 의미한다. 주인공이 이전까지는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모든 것과 거리를 두고 스스로 고립시켰다면, 이제는 죽음이 있음을 담담이 받아들이고(더불어 자신의 유치했고 죽음에 집착했던 자신의 모습도 버리고) 삶을 최대한 즐기겠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오즈 퍼킨스의 더 몽키는 공포영화 사상 최고의 걸작이라 부를 수는 없다. 영화는 어딘가 삐걱거리고 비약으로 차있으며, 쌍둥이 형과의 화해 장면은 기괴하다할 수 있을 정도로 어색하다. 그러나 오즈 퍼킨스 영화에는 진정성이 있다. 그것은 카메라나 플롯에서 자신이 겪었던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부터 어떻게 자신이란 인간이 만들어졌는지를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 이상을 더 나아가려고 한다. 공포 영화 감독으로 최고라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사랑스러운 매력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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