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예르카가 정말 원한 건 움직이는 그들을 보는 거였다.
그래서, 그는 지구 중심으로 가서 태고의 괴물들을 만나는 쥘 베른 (Jules Verne)의 책을 읽고
우리도 똑같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쥘 베른 책 속의 거의 모든 게 실제로 이루어졌기에 우린 가기로 결심했다.

- 태초로의 여행

 

Science Fiction, 과학 소설이나 공상과학으로 불려지는 이 용어는 과학이 만들어내는 가능성에 주목하여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이 장르는 오랜 전통을 자랑한다. 그도 그럴것이 과학이라고 하는 가능성의 영역이 인간이 꿈꾸던 영역들을 하나 둘 실현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초창기 SF 작가였던 쥘 베른이 썼던 소설들을 보자. 쥘 베른이 썼던 소설들 중에서 상당수는 이제 현실로 이루어졌다:달으로의 여행(달나라 탐험)이나 해저로의 여행(해저 2만리), 80일만에 세계를 일주한다던가(80일간의 세계 일주) 등의 다양한 이야기들은 이미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왔다. 이것들은 우리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손이 닿지 않는 영역에 대한 동경이 과학을 통해 언젠가 이루어질 수 있는 염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의 반증일 것이다.

 

그렇기에 과학은, 어떤 의미에서 현대 인류에게 '낭만'으로 다가왔다. 물론, 시대가 바뀌면서 과학이 불러올 재앙과 그것을 휘두르는 인류의 문제 등에 대한 다양한 문제 제기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과학이 만들어낼 미래에 대한 희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과학은 인류가 갖고 있던 '근원적인 호기심'에 대한 발현과 동경이라는 점에서 과학에 대한 인류의 낭만은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어째서 새들은 날 수 있는가? 새들이 날 수 있는 원리를 이해하면 인류도 날 수 있을까? 어째서 태양은 불타오르는가? 우리도 그런 태양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현실을 벗어나,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것에 대해 몽상을 하는 것이야 말로 과학을 시작케 만든 근원이었다. 그렇기에 다양한 면모를 가지게 된 지금에 와서도 과학은 '낭만'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카렐 제만의 영화들은 그런 의미에서 '낭만'으로써의 과학을 다루고 있는 SF 영화라 할 수 있다:과학이 만들어낸 무서운 무기를 다루고 있는 영화(죽음의 발명품)에서조차, 인류는 과학에 대한 희망찬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카렐 제만의 영화들은 단순히 과학이 가져다 줄 미래를 다루고 있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SF 영화들과 다르다 할 수 있다. 죽음의 발명품은 19세기를,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은 근대 귀족사회를, 태초로의 여행은 현대의 아이들이 '과거의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에서 그의 SF 영화 관점은 '과거'에 베이스를 둔다.

 

카렐 제만이 낭만적인 SF를 다루는데 있어서, 주요한 모티브는 쥘 베른이다.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작품을 만들기도 했지만(죽음의 발명품), 카렐 제만이 쥘 베른의 소설들을 인용하는 주요한 모티브는 그것이 '과거의 SF'였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상상은 지금 현실이 되었다. 그렇다면 제만의 영화에서 SF는 더이상 과학이 만들어낼 가능성이 아닌, 일종의 확정된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카렐 제만의 영화들은 어딘가 우스꽝 스럽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스타일이 구현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카렐 제만 영화에서의 세트와 애니메이션 스타일일 것이다:19세기 사람들이 20세기와 21세기를 상상하면서 만들어낸 동판화 스타일의 일러스트들을 기반으로 카렐 제만은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내는데, 그 세밀함과 동시에 시대착오적인 부분들은 관객에게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쥘 베른으로 대표되는 과거의 SF를 통해서 카렐 제만은 과학이 가져다 줄 미래적인 가능성이 아닌, 과거인이 갖고 있는 과학에 대한 낭만과 자세가 현재가 맞닿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리고 그의 영화 속에서 과학의 핵심적인 속성은 여전히 과거나 현재나 맞닿아 있다. 태초로의 여행에서 아이들은 일지를 기록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탐사는 영광이나 모험이 아닌, 과학적인 자세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그들이 태초의 삼엽충을 목격하기 위해서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을 했던 것처럼, 과학적인 자세는 호기심과 그 호기심을 인류 모두에게 공유하기 위해서 정확한 측정과 공유된 명칭을 부르는 것, 이를 통해서 우리만의 지식을 넘어서 인류 전체가 함께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지는 것이 과학의 본질이라 그는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들 중 허풍선이 남작은 SF의 낭만을 가장 훌륭하게 체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의 시작에서 우주 비행사는 달에 도착해서 거기 먼저 도착한 근대의 시인들과 모험가들을 만난다. 그리고 모험가 허풍선이 남작은 그에게 과거의 모험들을 체험하게 한다. 술탄의 왕궁, 생선의 뱃속, 요새 등등을 탐험하면서 허풍선이 남작이 보여주는 모험들은 과거 낭만 소설에서 보여준 허풍 넘치는 모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공주를 가운데 두고 우주 비행사와 허풍선이 남작 둘이서 삼각관계를 구성하는 모습도 그러하다.

 

하지만 우주비행사와 삼각관계로 대립각을 세우던 허풍선이 남작도 결국 그를 인정하고 그가 위험에 처할 때, 그를 도와준다. 허풍선이 남작(근대의 낭만소설)도 우주 비행사가 꿈꾸던 세계(SF의 세계)가 '낭만'이라는 측면에서 자신과 맞닿아있음을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근대에서 현대로, 현대에서 다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속에서 서로 다른 삶을 살았지만 '낭만'이라는 꿈 하나로 이어진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은 SF와 과학이 새로운 시대의 낭만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달은 아직까지 시인들과 몽상가 들의 것이고,
과감한 공상가들과 흰 가발의 모험가들 것이지.
긴 코트 입은 공상가들과 최신 소설에 나오는 이상한 헬멧을 쓴 자들의 것
그리고, 물론 연인들의 것!

그들에게 달은 언제나 가장 사랑스러웠지!
그리하여, 난 유쾌하게 모자를 벗어 던지네 별들에게 날아 가도록!

우리를 대신해, 모든 용감한 친구들을 맞이하라고 
그들은 이미 우주의 반기는 품속으로 길을 떠났으니!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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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야기

 

 

-백 4 블러드는 레프트 4 데드와 이볼브의 제작자들(터틀락 스튜디오)이 이름도 비슷하게 만든 작품이다. 현재 엑박 시리즈 엑스 기반으로 오픈 베타를 진행 중인데, 해당 오븐베타를 기반으로 감상을 정리하였다.

 

-레프드 4 데드 1편과 2편이 지금 게임 장르에 큰 영향을 준 점은 1) 4인 코옵이라는 구조를 구축한 것, 2) 좀비 장르를 게임에 훌륭하게 접합시켰다는 점 덕분이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레프트 4 데드 시리즈는 1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상당히 잘 짜여져 있는 게임 구조라고 할 수 있는데, 게임에서 복잡한 부분을 빼고 최대한 단순하게 구성하였으며 게임을 진행할 때마다 달라지는 구조를 통해서 최대한 반복되는 느낌을 지우게 만들려고 하였다. 사실 지금 와서도 사람들이 꾸준하게 레프트 4 데드 2를 계속 하는 것은 그런 단순하지만 탄탄한 게임 플레이에 매료되어서 계속해서 게임을 하는 것이다. 

 

-백 4 블러드는 전반적으로 레프트 4 데드를 너무 의식해서 게임을 만든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이 의식하는 것이 그대로 배끼겠다, 혹은 좋은 점에 집중하겠다 이런 쪽이라기 보다는 '의도적으로 원작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원작이라 할 수 있는 게임에서 단순함이 가지던 미덕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최대한 게임을 복잡다단하게 구성하기 위해서 이것저것 추가한 부분들이 있다. 이런 부분들이 결국 상당히 원작의 미덕들에 대치되어 백 4 블러드와 레프트 4 데드를 비교하게 만들 수 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

 

- 그러나 그런 새로운 부분들이 딱히 잘 작동하는 부분이란 느낌이 전혀 없다.

 

- 가장 큰 부분은 덱 시스템. 카드를 뽑아서 자기에게 유리한 효과를 적용하거나, 게임 중에 각 라운드 별로 주는 특수효과하는 등의 시스템이 있다. 레프트 4 데드 시리즈는 AI 감독이라 하여 플레이어의 상황과 진행 상황에 따라서 좀비 호드를 불러오거나 특수 좀비를 배치하거나, 아이템을 배치하는 등의 무작위 생성 시스템을 갖고 있다. 지금으로 따지면 로그라이트 류의 선조격이라 할 수 있는 요소인데, 백 4 블러드의 경우에는 이걸 야심차게 더 복잡한 형태로 구성하였다:플레이어도 AI 감독이 게임 전체에 영향을 주는 변수를 추가하는 대신, 역으로 플레이어도 덱을 구성하고 등장하는 변수에 대응하여 카드를 뽑아 대응하는 형태가 된다. 즉, 게임 자체의 변형이 늘어나고 거기에 맞춰서 플레이어가 선택을 자유롭게 하는 유연성을 갖고자 한 것이다.

 

- 추가적으로 게임 플레이에서 협동을 '의무적'으로 강제하는 부분들이 생겼다. 레프트 4 데드에 비해서 백 4 블러드의 경우 탄약을 더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데(적 체력이 상대적으로 올라갔고, 권총이 무한 탄약이 아니게 되었으며, 근접전 제한이 걸리게 되었다), 그 결과 산탄총/저격총/돌격소총 등의 총 구분을 각자 정해놓고 무기를 필수적으로 나눠 써야 탄약을 아끼면서 싸울 수 있다. 

 

- 위와 같은 두가지 특징(1. 스스로 통제하는 변수들, 2. 반강제적인 코옵)이 결합하면서 백 4 블러드 자체는 게임을 레프트 4 데드의 아케이드 같이 빠르고 호쾌한 흐름을 가지면서 플레이어가 생각하고 정교한 전략을 가진 게임이 되고자 하는데, 문제는 이 두가지 상반된 특징이 같이 결합한다고 해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단, 플레이어가 갖고 있는 자원이 제한되어 있고 플레이어들이 다양한 전략을 이용할 수 있도록 좀더 신중한 플레이를 게임이 강제하는 부분이 있는데 레프트 4 데드가 갖고 있는 빠르고 호쾌한 플레이와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비단 전작의 미덕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백 4 블러드의 게임 플레이는 그렇게까지 썩 괜찮지 않다는 인상을 주는데, 기본적으로 레프트 4 데드와 같이 큰 복도+성긴 스테이지 구조를 보이면서도 플레이어가 게임을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맵 구석구석을 탐사해야 해서 전반적으로 게임 플레이가 느리고 답답하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차라리 협력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최대한 플레이어를 옥죄는 듯한 게임 플레이를 만들고 싶었다면 GTFO를 참조하면 되었을 건데, 전작이라는 후광을 어떻게든 얻어보려고 전작을 무리하게 끌고 오려다가 서로 어울리지 않은 것을 섞은 느낌이다.

 

- 문제는 이러한 경향성이 이볼브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었는데, 게임 플레이와 시스템 자체가 이질적인 것들을 죄다 섞어서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문제를 일으키는 패턴이 백 4 블러드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볼브에 이어서 백 4 블러드까지 보니 대체 어떻게 레프트 4 데드를 만들었는지 좀 의구심이 들 정도다.

 

- 게임 패스에 공짜로 들어있으니 하긴 하겠지만, 전반적으로 레프트 4 데드 보다는 끌리진 않는 게임이다. 재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뭔가 잘 만들어졌다는 느낌은 절대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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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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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색 취미가 생겨서 요즘 워해머 모델도 구매하고 이것저것 시도 중인데, 그중에 새롭게 시도중인 인피니티. 스페인 미니어처 게임 회사인 코르부스 벨리의 모델들인데, 워해머 같은 큰 게임은 아니지만 희안하게도 국내에서는 상당히 활발한 커뮤니티를 갖고 있고 게임도 꽤나 잘 돌아가는 편이라 입문을 결정했다. 주석 모델의 끝판왕이라고 하는 것도 상당히 끌리는 부분이었고, 스커미셔 게임이었다는 점도 상당히 끌리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구매를 결정.

 

- 모델이 작다. 기본적으로 25mm 베이스를 사용하고 있는데, 워해머 40K의 표준이라 할 수 있는 스페이스 마린이 32mm인걸 감안하면 약 75% 정도 크기다. 그 덕분에 칠할 때도 상당히 고생하기 했다. 정밀한 디테일들이 많아서 얇은 붓을 필요로 할 때도 많은데, 스페이스 마린 얼굴 칠할 때도 안쓴 콜리브리 세필을 써서 얼굴을 칠하기도 했다. 대신 모형이 작은 만큼 색 올리는 속도도 빨라서 겜퀄 기준으로는 하루에 여러 개 완성하는 것도 일이 아니다.

 

- 크기가 작아졌지만, 디테일이 상당히 오밀조밀하게 올라간 편. 색분할만 제대로 해서 올리기만 해도 상당히 만족스럽게 색을 올릴수가 있는데, 문제는 너무 작다 보니까 색분할을 할때 어떤 요소에 어떤 색을 올릴 것인지 좀 고민스러운 부분도 있다. 도색 했을 때의 만족도는 꽤 높은 편이긴 한데, 도색 시작을 이걸로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지 않나 싶은 느낌.

 

- 점점 희안한 포즈 덕분에 도색 난이도가 올라가고 워해머에 비해서 상당히 깔끔하고 안정적인 포즈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고 동일한 포즈 일변도도 아니고, 모델 조형들이 같은 유닛이라도 서로 다른 조형을 갖고 있어서 상당히 개성 넘친다. 

 

- 하지만 작아진 모델, 디테일한 조형보다 더 난이도 높은게 있다면 '주석'이라는 것. 일단 탈크 벗기는 것부터 시작해서 키트 게이트 다듬기, 조립하기, 프라이밍, 구부러진 부품 펴기 등의 다양한 사전 작업들이 필요한데 플라스틱에 비해서 손이 많이 가고 까다롭다. 주석이라는 물건이 결국 재도색 난이도가 낮다는 점 빼고는 좋은 점이 딱히 없는데, 심지어 전처리 과정이 두개가 더 추가(탈크 제거, 피막 강화를 위한 메탈 프라이머 밑작업)되는게 상당히 까다롭다. 일단 인피니티 모델로 입문을 한다면 워해머 입문보다 더 준비를 철저히 해야할 것이다.

 

- 주석 최악의 단점은 피막 정착이 힘들다는 것. 그 때문에 도색이 진짜 잘 까진다는 것. 손이 쓸리는 부위들이 쉽게 까지는데 까질때 마다 마음이 꺾이는걸 경험할 수 있다. 메탈 프라이머를 쓰면 이런 문제를 좀 회피할 수 있다는데, 지금 도색한 분량에는 적용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마감재 부분만 신경쓰고 있는 중.

 

- 에폭시 퍼티가 준 필수인 모델. 베이스에 접착시키는데 일단 필요하고(몇몇 모델은 순접으로 세우기 너무 힘들다), 모델 조립 시 순접+자세 잡아주는 용도로 쓴다. 메탈 프라이머도 필수지만, 자세를 잡기 위해서 에폭시 퍼티는 함께 구매하는 것을 권장한다.

 

- 게임은 아직 못해봤지만, 수집을 위한 모델러들에게도 상당히 추천할만한 제품군. 모델들 자체가 전반적으로 예쁘고, 모델을 뒷받침하는 설정이나 일러스트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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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잭 스나이더가 만든 새벽의 저주는 훌륭한 오락영화였다. 1978년 동명의 전설적인 영화를 리메이크한(국내에서는 시체들의 새벽 - 새벽의 저주로 이름이 달라지긴 했다) 이 영화는 달리는 좀비와 생존, 좀비와의 근접하여 싸우는 야만적인 총싸움, 대중화된 고어까지. 20년이 다되어가는 지금에 와서도 대중문화와 좀비를 논한다 하면 새벽의 저주를 빼놓고 이야기를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조지 로메로가 이 영화를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유명한 사실이다(링크) 그리고 잭 스나이더 판의 리메이크 판에 대해서 좋지 않게 평가하는 평론이나 칼럼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사례 링크)

 

이러한 비판적 평론들의 근저에는 시체들의 새벽이 갖고 있는 특수성이 내재되어 있다. 물론 새벽의 저주와 시체들의 새벽에서 공통적인 부분들은 존재한다:좀비들과 쇼핑몰, 좀비보다 더 무서운 인간들 내부의 갈등. 새벽의 저주는 시체들의 새벽 원판에서 주요한 모티브들에 집중하여 영화를 재구성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주요 모티브들을 하나로 엮는 영화의 시선이 새벽의 저주에서는 완전히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대체 잭 스나이더가 원작의 무엇을 보고 리메이크를 했는지 모르겠다' 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새벽의 저주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지 로메로라는 감독을 이야기해야할 것이다:전설적인 좀비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만든 감독으로 알려져있긴 하지만, 로메로의 필모그래피는 좀비 3부작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놀이공원이나 마틴 같은 영화를 만들기도 한 조지 로메로는 아마도 미국 영화감독 중에서 '분명하게' 좌파적이라 이야기할 수 있는 감독이었다. 놀이공원 자체가 노인 복지와 계급 사회, 착취에 대해서 정면으로 비판한 작품이었고, 마틴은 미국 중산층의 교외 문화와 삶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작품이었다. 잘 알려진 좀비 3부작 역시 좀비와 인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시체들의 낮이나, 인종 문제의 우화로도 읽힐 수 있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엔딩도 그러한 요소들이 산재했다.

 

그리고 시체들의 새벽의 테마는 '죽어버린 미국 사회'였다. 영화의 시작, 전세계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되살아나는 일들이 일어나고, 주인공은 그 상황을 방송으로 정리하여 보도를 한다. 하지만 이런 중요한 사태를 보도를 하는 와중에 사람들은 세상이 망했음을 직감하고 하나 둘 자신의 자리에서 이탈을 하고 주인공 역시 도로교통국 소속인 연인과 함께 방송국을 버리고 도망친다. 영화의 시작점이 바로 의무의 방기인 셈이다. 그 다음 시퀸스는 더욱 더 노골적인데, 군대가 건물로 진입하여 산자와 죽은자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죽여버리고, 거기서 다른 두 주인공들이 피로감을 느끼고 탈출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이것은 생존은 아니다:분명 이 시점까지 영화 속의 미국 사회와 정부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는 것, 이제 더이상 정상적으로 이 이후 살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이 직시하고 자신의 의무와 직무를 내던지는 것으로부터 영화가 시작하는 셈이다. 영화의 시작은 바로 '미국이라는 국가가 죽어가는 상황'이었던 셈이다.

 

위와 같은 점에서 시체들의 새벽의 시작은 몇몇 아포칼립스 장르에서 보여지는 무너지는 세계에서 아나키적인 자유와 능력에 따라 생존하는,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신자유주의적인 자유 가치'와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좀비랜드 같은 영화를 보자. 거기서 좀비 사태는 주인공들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일종의 해방구로 작용한다. 물론 이것만으로 좀비랜드가 신자유주의적인 가치를 옹호한다고 볼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얼마나 이러한 좀비 아포칼립스,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에서 신자유주의적 판타지가 깔려있는지를 반증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체들의 새벽에서 보여주는 죽어가는 세계 역시도 가치와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무너짐은 개인이 자유로운 세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헬기를 타고 지나가듯이 사람들은 무표정하게 지나가는 좀비들을 즐겁게 사냥한다. 하지만 동시에 쇼핑몰을 떠도는 좀비들이 실제 사람과 등치됨을 보여줌으로 좀비가 인간과 은연중에 다를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것들을 즐겁게 죽여버리는 인간은 무엇이 되는 것일까? 그리고 역으로 정부와 사회가 그렇게 좀비들을 죽여버리는 세계 자체를 등져버리고 도망치는 사람들은? 시체들의 새벽에서 보여주는 사회가 무너지는 것은 단순히 '좀비'라는 외적인 위협에 의해서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사회와 조직은 더이상 공공의 선과 가치를 지키지 못하고, 내재된 폭력성과 광기(초반 시퀸스의 경찰중 하나가 미쳐 날뛰며 아무 관계없는 민간인들을 사살하듯이)을 표출하며 스스로 망가져간다. 그리고 멀쩡한 사람들은 그러한 광기에 정면으로 맞서 마지막까지 싸우는 것이 아닌, 책임과 의무를 방기하고 멀리 도망칠 뿐이다. 말하자면 체제와 구조, 가치의 종말과 죽음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체들의 새벽은 해방구의 세계가 아니다. 모든 가치가 무너진 사회를 전제하고, 멀쩡한 사람들이 사회를 등지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 사람들이 죽어버린 소비 문화인 쇼핑몰에 갇혀버리는 이야기이기도 하다:헬기를 타고 도망치던 주인공 일행은 물자가 풍족하게 쌓여있는 쇼핑몰을 발견하고 점거한다. 흥미로운 점들은 좀비들이 마치 살아생전 쇼핑몰에서 쇼핑을 하듯이 쇼핑몰을 돌아다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회가 무너지고, 세상이 미쳐돌아가도 쇼핑몰에는 물건이 그득이 쌓여있고 소비자들(좀비들이지만)이 영원히 돌아다니고 있다는 점에서, 시체들의 새벽의 쇼핑몰은 생존을 위한 공간보다도 '죽어버린 자본주의 소비 사회 그 축소판'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생존자들이 캐나다로 도망가다가 쇼핑몰에 사로잡혀서 머무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제는 더이상 의미없는 물질들에 사로잡혀 있다가 다른 생존자들과 무의미한 물질들(폭주족들이 쇼핑몰을 강탈할 때, 마치 '블랙 프라이데이' 할인을 두고 경쟁하는 소비자들처럼 보여준 것은 그러한 부분을 잘 드러낸다)을 두고 싸우다가 공멸하는 것은 소비사회에 대한 음울한 경종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시체들의 새벽은 반 체제, 반 구조적인 동시에 더 나아가서 '반 장르적'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좀비 영화들이 좀비들에 맞서서 싸우고, 살아남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데 반해 시체들의 새벽은 죽어버린 물질들에 집착하다 다른 생존자들과 싸우다 공멸하는 쪽에 가깝기 때문이다. 물론 이후 영화들이 후자의 요소(생존자들과의 자멸적인 경쟁)에 초점을 맞추기는 했지만, 이후 영화들이 생존이라는 중요한 요소를 두고 경쟁한 것과 시체들의 새벽이 보여주는 결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시체들의 새벽은 어떤 의미에서 장르의 시조였지만 동시에 반 체제적이고 반 장르적인 영화였다. 이는 로메로의 영화 세계와 크게 맞닿아있다. 그의 다른 영화인 마틴을 보자. 거기서 주인공은 흡혈귀이지만 동시에 흡혈귀가 아니다. 처음에는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의 피만 마실 수 있었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그 피를 마시는 규칙은 무너지고 주인공은 혼란을 경험한다. 황폐하고 늙어버린 교외를 배경으로 중산층 문화에 대해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조지 로메로는 통상적인 관념을 거부하는 사람이었다. 이는 그가 영화에서 좀비를 다루는 방법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그들은 뻣뻣하기는 하지만 생전의 삶의 기억에 매달려 계속해서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있는 존재들이다. 어딘가 우스꽝스럽게 분장한 그들은 루치오 풀치의 좀비(썩어문드러진 존재들)들에 비해서 덜 '좀비'스럽지만, 그 덕분에 다양한 인종과 계급의 사람들이 나온다는 점에서 호러 영화에서 좀비의 모티브인 '대중'에 더 가깝다. 

 

좀비를 '우리와 닮았다, 아니 우리일지도 모른다'라는 발상은 좀비 영화의 '죽여도 되는 존재'와 완전히 상반된 개념이다. 조지 로메로는 쇼핑몰과 그곳을 배회하는 좀비들을 통해서 소비사회 그 자체를 풍자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대중을 몰아내고 그것을 차지하는 주인공들과, 아무런 의미없는 사치재와 물질들을 두고 싸우는 폭주족들의 모습을 통해서 세상이 망해도 여전히 물질에 얽메여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판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로메로가 이후 좀비 영화를 두고 좋지 않게 본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링크) 좀비들은 타자화되었지만, 동시에 '우리들 모습' 그 자체였다. 좀비들을 쉽게 죽여버리는 자유를 논하는 것은 역으로 우리가 '타자를 어떻게 보는가'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로메로는 이러한 명제를 정확히 간파하였고, 그런 통찰력은 시체들의 새벽에 전반적으로 잘 녹아있다.(이러한 통찰력에 대한 오마주는 숀 오브 더 데드에서 잘 드러나는데 

 

결론을 내리자면, 시체들의 새벽은 전설 그 자체인 동시에 장르를 넘어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장르적인 모티브인 동시에 장르가 가질 수 있는 정치적 위험성과 그에 대한 통찰력도 함께 들어 있다. 시간이 된다면 꼭 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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