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스턴스의 국내 흥행 성공은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지만(바디 호러 장르의 흥행이라니!), 영화를 자체만 놓고 본다면 사람들에게 어필을 할 수 있는 내용과 연출로 무장한 작품이었기 때문에 어느정도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영화는 젊음에 대한 이미지 소비와 착취, 자기 파괴 등이 데미 무어의 열연과 맞물리면서 좋은 시너지를 냈다. 그리고 바디 호러의 불쾌함과 함께 신체와 상징들을 이미지와 명확하게 연결지음으로써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만든 것도 영화의 흥행에 한 몫하였다. 요컨데 서브스턴스는 바디 호러 장르의 불쾌함과 이미지의 불분명함(몸과 상징의 구현)을 명확하게 만들어내어서 성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서브스턴스의 명징한 상징과 이미지들은 때로 이 작품의 앝은 구조를 너무 쉽게 드러내기도 한다. 마치 초반부 데니스 퀘이드가 새우를 까서 먹으며 새우를 마치 늘어진 남성기를 흔드는 것처럼 묘사하듯이 말이다. 어떻게 본다면 너무 직설적인 표현들인데, 이 너무 직설적인 표현과 구조들이 관객을 이입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이다:무언가 관객과 영화 내의 인물이나 장치들에 연결되어 일종의 공감각을 형성하여 관객을 뒤흔드는 것이 뛰어난 바디 호러의 강점이라 한다면, 서브스턴스는 관객을 스크린 바깥에 안전하게 놓고 쇼를 보여주는 것에 가깝다. 극 내에서 '캐릭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인물의 묘사나 구성이 된 것은 엘리자베스 밖에 없고, 하비와 같은 인물은 인간이라기 보다는 불쾌한 쇼 비즈니스 그 자체에 불과하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엘리자베스의 복제이자 이 영화의 중요한 한 축인 수 마저도 캐릭터라고 보기 힘들 정도의 묘사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와 수의 관계는 일견 보기에는 명료한 관계처럼 보인다. 늙어버린 엘리자베스가 젊음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세계에서 사랑받기 위해 수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영화의 주요 내용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명제가 맞다고 가정한다면 두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첫번째는 엘리자베스가 수를 만든 이유는 분명하지만, 어째서 수가 엘리자베스를 착취하고(=척수액을 뽑아서 자신을 유지하기) 엘리자베스는 척수액이 뽑힐 때마다 더 추하게 늙어가는가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착취라는 것은 착취하는 자가 착취 당하는 자로부터 얻을 것이 있기 때문에 행하는 것인데 수는 그 자체로 완벽하기 때문에 수는 엘리자베스를 착취할 이유가 명확하게는 없어 보인다.
두번째는 서브스턴스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자가 이야기하는 '균형'의 문제이다. 처음 설명할 때처럼, 둘을 하나이기 때문에 서로 균형을 맞추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서브스턴스를 통해 만들어진 복제체와 본인 사이의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핵심이라 한다. 그런데 겉보기에 젊음과 늙음이라는 관계에서 '균형'은 어떻게 찾아야 하는 것인가? 젊음은 이미 지나가버린 것이고, 늙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균형이라는 것은 양쪽에서 서로 주고받는 것이 있어서 유지를 해야하는 것인데, 지나간 것과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절대적 장벽 사이에서는 이들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서브스턴스를 젊음과 늙음의 육체에 대한 내용으로 보는 것은 일견 직관적이긴 하지만, 함정이 있는 해석이다. 이를 정확하게 설명하려면 미디어에서 소비되는 육체의 이미지와 실제 육체 간의 괴리에 대한 관점으로 봐야할 것이다. 그 관점에서 본다면 어째서 이미지의 육체(=수)가 실제의 육체(=엘리자베스)를 착취하는가가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미지의 육체는 실제 육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너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실제의 육체를 착취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의 육체가 우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의 육체는 이미지의 육체를 보면서 자신이 원본임에도 느낄 수 밖에 없는 열등감으로 자기 파괴적인 행위를 하는데 서브스턴스에서 그 자기 파괴적인 행위는 바로 '폭식'이다. 그리고 이미지의 육체가 자신을 파괴적으로 즐기는 행위가 '섹스'인 것도 눈여겨 볼만하다.
하지만 이 관계성은 영화의 배경에 의해서 의도치 않게 숨겨져 있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육체의 이중적인 이미지(이미지와 실제)는 이미 인스타그램이나 틱톡, 유튜브와 같은 매체에서 많이 보여진 현상이다. 수많은 보정 필터, 스테로이드, 호르몬, 성형 수술 등으로 인해 육체의 이미지들은 실제보다 더 과격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서브스턴스의 메타포는 그렇게까지 놀라운 경험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서브스턴스의 배경이 헐리웃과 LA 라는 쇼 시스템에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는 것이다. 처음 엘리자베스 스파클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던 것으로 영화는 시작되는데, 이 명예의 전당 헌액과 늙어버린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젊은 여배우가 어떻게 차츰 사라지는가 라는 '시간'의 벡터가 자연스럽게 개입하고 그것이 '젊음'과 '늙음'이라는 두 이미지의 대립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즉, 젊은 육체와 늙은 육체의 주도권 싸움이라는 잘못된 구도는 영화의 배경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문제였던 것이다.
서브스턴스의 치명적인 문제점은 구도 자체를 너무 명확하게 잡으려 하다가 오히려 불필요한 구성을 추가해서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차라리 SNS의 시대인만큼 헐리웃이라는 배경을 제거하고 SNS와 관심을 끌기 위해서 행하는 자기 파괴적인 행위들로 이야기를 재구성하였다면 서브스턴스의 이야기는 명확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갑이 지난 데미 무어의 연기는 인상적이었다. 젊어서는 섹스 심볼로 유명했었던 그녀가 늙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했었던 연기들은 어떻게 보면 자신의 삶에 대한 메소드 연기였을 수도 있다. 그녀의 연기가 있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라는 케릭터가 인물로 성립할 수 있었는데(수에 대한 애증, 자기 혐오와 파괴 등), 다른 인물들이 인물들로 성립되기에는 너무나 평면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데미 무어의 연기가 더더욱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결론을 내리자면 서브스턴스는 바디 호러 영화의 입문작으로는 나쁘지 않은 작품이다. 그러나 몇몇 부분에서 너무 얕고, 혼란이 있을만한 구도를 사용하고 있다는게 문제다. 차라리 헐리웃이라는 공간이 아닌 SNS와 같은 것들을 배경으로 사용했다면,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와 이미지에 더 부합했을텐데 그 부분은 안타깝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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