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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영화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매우 혼란스러운 영화다. 어떻게 보면 장르적 문법이나 레퍼런스가 분명하게 있었던 유전이나 미드소마와 다르게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철저하게 '아리 에스터의 영화다:아리 에스터가 유전이나 미드소마에서 장르적인 재미나 문법을 따르려는 시도를 보여주었다면, 보 이즈 어프레이드에서는 장르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보다 아리 에스터가 갖고 있던 주제의식이나 테마에 집중해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장르적으로 영화를 이해하려고 하면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역설적이게도 아리 에스터가 가장 하고 싶었고 그의 가장 큰 강점이 나오는 영화이긴 하지만, 동시에 그 강점에 빠져서 자신만의 언어에 갇혀있다는 인상을 준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를 이해하려면 우선 아리 에스터의 영화들이 '자폐'라는 테마에 천착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자폐란 스스로 가두다 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면서,  공감 기능 결여, 의사 소통의 어려움과 제한적이고 반복적인 행동을 특징으로 하는 발달 장애의 일종으로 본다. 정신병적인 현상 뿐만이 아니라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것을 자폐로 할 수 있는데, 이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있는 상황 자체가 아리 에스터 영화에서 주요한 테마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리 에스터는 그것을 미니어처라는 방식으로 표현함으로써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구축한다.

유전과 미드소마를 보자. 영화 유전에서 주인공은 미니어처를 만드는 예술가다. 미니어처를 만드는 과정에서 그녀는 미래에 일어난 일 또는 과거에 일어난 일을 미니어처의 형태로 구현하는데, 영화는 이를 통해 단순히 미니어처가 미니어처가 아닌 세상의 축소판이자 일어나고 벗어날 수 없는 운명들을 암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직접적으로 미니어처가 등장한 유전과 달리 미드소마는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미니어처가 나오지 않지만, 첫 시퀸스에서 영화의 모든 내용을 미리 알려주는 모습을 통해서 '세계 안의 작은 세계'를 보여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미드소마에서 보여주는 것은 닫힌 세계와 그 닫힌 세계에 매료되는 주인공, 그리고 정신병과 공진하는 공동체라는 이미지들을 통해서 반복과 빠져나올 수 없음이라는 독특한 미학을 구축한다.

아리 에스터의 자폐의 핵심은 바로 미니어처를 이용한 반복과 빠져나올 수 없음이다. 반복과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은 자폐의 단어 뜻 그대로 스스로 갇혀있다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스스로 만들어놓은 완벽한 논리의 세계 속에 갇혀서 끝없이 똑같은 말과 단어들을 곱씹다 파멸하는 것이다. 영화 유전과 보 이즈 어프레이드에서 직접적으로 보여주었던 것 처럼 주인공들이 그 이미지와 논리에 갇혀있다가 피하지 못하고 파멸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외부의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파멸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유전에서는 그것이 일종의 그리스 비극 처럼 묘사되었고, 미드소마에서는 작은 커뮤니티에 사로잡혀 갇혀버린 이미지로 끝났다면,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어떻게 보면 더 원류인, 정신병 특유의 자폐적인 이미지의 원본에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 영화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 정신병자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정신병자의 핵심은 바로 머리 내의 어떠한 생각이나 망상에 빠져서 객관화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허황되고 말도 안되는 망상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근원적인 감정이나 경험(망상이나 불안 같은)에 맞물려서 보았을 때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 정신 질환의 핵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서 외부의 도움을 받는 것이 현대적인 정신병리학과 심리학의 개념이라 한다면, 보 이즈 어프레이드를 통해서 아리 에스터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그런 정신병자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맞춰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이야기는 합리적이나 장르적 정합성에 맞는 것이 아니라 정신병자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로 생각해야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재밌는 점은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이야기가 어떻게 보면 뒤틀린 버전의 트루먼 쇼라는 점인데, 그것이 실제로 트루먼 쇼처럼 모든 것을 보 하나를 괴롭히기 위한 몰래카메라였다고 이해한다기 보다는 보가 상상하는 불안과 공포가 세상 전체가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망상이 영화의 서사로 발현된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적확할 것이다. 영화 극초반에 보여주었던 복선과(물없이 항불안제를 먹지 말라는 의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냥 알약을 씹어삼키는 모습) 보 이즈 어프레이드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정합적이지 않고 한 사람을 향한 무수한 불합리와 불안의 구현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즉, 부모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불안과 관계에 대한 방어 기제, 공포들이 만들어낸 환영이란 것을 이해한다면 영화가 좀 더 '정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정신병자의 단순한 읊조림과 공포라는 측면에서 이해한다면 이 영화의 모든 것을 이해했다 할 수 없다. 영화의 중반부 주인공은 고아들의 극단들을 만나서 자신의 인생을 형상화한 독특한 연극을 보게 된다. 하지만 이는 특이하게도 영화를 지배하는 '자폐적'인 이미지로 해석할 수 없는 이질적인 분위기로 구성되어 있다. 마치 연극을 하듯이 담담하게 자기가 살고 싶었던 인생과 살지 못했던 인생, 마지막에는 그것이 허구인 것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통해서 영화는 빠져나가지 못하는 이미지가 아닌 '일종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여기서 아리 에스터의 가장 특이한 점이자 이런 미학에 사로잡힌 사람들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점을 찾아볼 수 있다:그것은 바로 '자기 객관화'이다. 정신병자가 스스로 살고 싶었던 인생을 망상하면서 그 과정을 돌아보다가 자신이 여성과 관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스스로 현실로 돌아오는 모습은 모든 정신병자들이 갖고 있는 소양인 동시에 정신병자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요소다. 자신이 빠져나갈 수 없는 이유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 이유를 고치지 못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살 수 밖에 없는 모습을 통해서 자폐의 세계를 더욱 강렬하게 묘사하면서, 그 너머의 세계를 인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폐적인 세계를 다루는 예술가들은 많았지만 아리 에스터가 독특한 이유는 바로 자폐 너머의 세계를 인지하고 그것 역시 영화의 미학의 범주에 넣는다는 점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 에스터의 영화에서 미니어처의 미학은 상당히 중요하고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그것은 세상의 축소판이고 반복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세상 그 자체'는 아니다. 미니어처 자체가 세상의 축소판이긴 하지만 동시에 그 작은걸 바라보는 자신이라는 시선을 인지할 수 밖에 없듯이, 미니어처의 미학은 일종의 자기 객관화를 담보한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에서 이를 본다면 중간에 자신의 미래를 보여주는 TV속 영상 처럼 말이다:주인공은 거기 도달하기 전까지는 그것이 갇혀있는 폐곡선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다. 미니어처를 통해서 세상의 축소판처럼 갇혀서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부딪히기 전까지는 확정된 사실이라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은 그 끝까지 나가서 파멸할 때까지 나가고 반복한다. 마치 불길한 징조처럼 세계의 곳곳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견하고 있지만, 그것은 주인공들이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도달해서야 완성이 되는 폐곡선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특이하게도 자기 객관화와 '바깥'의 가능성을 인지하지만 동시에 다시 미니어처의 세계에 사로잡히는 독특한 미학과 논리 구성이라 할 수 있는데 많은 창작자들이 틀릴 수 있더라도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을 생각한다면 아리 에스터는 독특하게도 바깥을 인지하면서도 바깥으로 향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아리 에스터의 강점이 묻어나온 동시에 아리 에스터가 더이상 일반적인 장르 문법과 타협하지 않고 더 먼길을 떠났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분명 영화적 재미나 즐거움은 없는 영화라 할 수 있지만, 아리 에스터라는 감독을 이해하고 그의 원류를 느끼고 싶다면 이 영화는 꼭 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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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챗 지피티가 마음대로 상상한 영화의 이미지입니다.

 

오즈 퍼킨스 감독의 영화 더 몽키는 유명했던 시리즈 공포 영화 데스티네이션을 연상케 한다:그 누구도 죽음으로부터 피할 수 없으며, 인물들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데스티네이션이 황당한 죽음이 가져다 주는 긴장감(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비롯되는)과 영화의 양식에 기반한 일종의 카타르시스(죽을 사람은 결국은 죽는다)에 기반한 양식적인 재미가 있었다면, 더 몽키는 다른 곳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전에 리뷰했던 롱레그스처럼(https://leviathan.tistory.com/2661) 영화는 감독의 가장 내밀한 경험(게이였던 아버지와 그걸 숨긴 어머니라는 그의 가족사)에 기반하고 있지만, '살아남는 것을 허락받은 것'이 아닌 독특한 결론으로 이끈다는 것이 인상 깊은 영화다.

오즈 퍼킨스 감독의 가장 큰 모티브는 '어떻게 어린시절의 경험이 다 자란 성인을 지배하고 고통받게 만드는가'이다. 더 몽키도 비슷하다:아버지의 부재, 어머니만 존재하는 편모 가정에서 자란 쌍둥이 중 동생인 주인공은 죽음을 불러오는 원숭이 인형에 의해서 어머니와 친척들을 잃는다. 그러고 나서 갑자기 영화는 결혼에 실패하고 자식과 아내, 심지어는 아내의 재혼 상대에게도 무시당하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넘어간다. 재밌는 점은 여기서 주인공이 가족을 꾸리고 실패하는 과정 자체가 완전히 통으로 생략이 되었다는 점이다:이는 어떻게 보면 유년기 트라우마를 가진 자들의 숙명이라 할 수 있는데, 영화 내내 그가 과거의 망령인 원숭이 인형에게 쫒기는 것 뿐만 아니라 그 망령에게 언제고 뒤를 잡힐것이라는 강박 때문에 자신의 인생마저 즐기지 못하고 자식마저도 밀쳐낸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주인공을 쫒아오는 그 망령은 바로 '죽음' 그 자체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분명 데스티네이션 시리즈와 더 몽키는 닮은 부분이 있지만, 고어의 미학에서 본다면 사뭇 다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데스티네이션 시리즈의 죽음 기본적으로 '사고'다.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일어나는 사고가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면서 아무리 준비가 잘 되어 있어도 죽음으로부터 피할 수 없다라는 양식미를 구축한다. 하지만 더 몽키에서 죽음은 부조리함이다. 우연에 우연이 겹쳐져서 만들어지는 사고와 사뭇 다른 점은, 더 몽키의 죽음은 '말이 되지 않는다'인 것이다. 그것은 일상 생활에서는 생각조차 못하는 현상에 가깝다. 단순히 기막힌 우연의 확률로 뇌동맥류가 터져서 죽은 어머니 뿐만 아니라, 야외에서 캠핑하다가 야생마들에게 짓밟혀서 다진 곤죽이 된 외삼촌, 머리에 불붙은 채로 뛰어다니다가 표지판에 머리가 관통 당해 죽은 외숙모, 심지어 수천마리의 벌이 입안에 들어가서 죽어버린 인물까지 더 몽키에서 죽음은 초자연적인 현상에 가까울 정도로 기이하지만, 동시에 중요한 것은 확률적으로 불가능한 현상은 아니라는 점이다.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데스티네이션에서는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 우연에 우연을 거듭한 끝에 사람을 죽이는 치명적인 상황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면, 더 몽키에서는 돌이켜 생각하면 받아들일 수 있지만 말도 안되는 사건으로 인해서 삶이 불현듯 끝나버리는 것에 가깝다. 즉, 더 몽키는 사람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이라는 것이 대단히 일상적이면서도 바람을 불면 훅하고 날아가듯이 아주 가느다라고 위태로운 실 위에 지탱되는 곡예사의 곡예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부조리한 죽음(원숭이 인형)을 만난 주인공은 그 경험의 포로가 된다. 원숭이 인형이 북채를 치고 북을 칠때마다 사람이 죽어나간다. 그러한 법칙을 알게 된 주인공은 자신을 괴롭히는 쌍둥이 형이 죽기를 바라면서 원숭이의 태엽을 감는다. 그러나 그 결과 어머니와 외삼촌이 죽게 되자, 주인공과 쌍둥이 형은 그 인형을 토막내서 우물에 던져버린다. 하지만 그것은 그 경험의 극복은 아니다:죽음은 피할 수 없다는 것, 비록 자신이 원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태엽을 돌려서 어머니의 죽음을 불러일으켰다는 것 등이다. 이 와중에 재밌는 점은 원숭이 인형의 작동 방식인데, 태엽을 감아서 작동하는 것도 원숭이의 마음대로이고 죽이는 대상도 원숭이의 마음대로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태엽을 감아서 누군가를 죽인다는 발상은 어떻게 보면 주인공의 죄책감과 무관하게 허구의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박스 포장지에 적힌 실물의 삶처럼Like a Life 이라는 문구처럼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을 은연중에 보여준다. 즉, 주인공은 어떻게 보면 자신이 통제하지도 못하는 것에 휘말렸음에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는 착각, 유년기에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이 갇히는 함정에 갇힌 것이다.

재밌는 점이자 이 영화의 가장 거친 부분은 바로 쌍둥이 형의 존재다:주인공의 쌍둥이 형은 주인공이 자신을 죽이려고 인형의 태엽을 감았다는 사실을 알고, 주인공을 죽이기 위해서 계속해서 인형의 태엽을 감아 사건을 일으킨다. 하지만 막상 주인공과 어색한 화해 장면에서 어색하게 장난을 치는 모습을 보이다가 인형이 북을 치는 바람에 죽어버리고 마는데, 이 시퀸스는 어색하고 불편하고 찝찝한 기류가 계속 흐르는 영화의 결과 맞지 않는 이상한 장면이다. 영화 전체는 주인공이 자신의 편집증과 강박으로 인해서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두고 그 과정에서 주변사람과 자식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면, 이 장면에서는 그 화해하는 장면을 대단히 어색하게 희화화 함으로써 대체 이 둘의 관계는 무엇인가? 라는 의문을 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실 쌍둥이 형의 존재는 이 영화의 인물들과 맥을 달리하는 부분들이 있다. 롱레그스나 더 몽키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자면, 다들 평면적이긴 하지만 어떤 충격적인 사건에 의해서 뒤틀려버린, 강한 유압프레스에 눌려버린 시체처럼 그로테스크하게 짓눌려버린 모습을 하고 있다. 즉, 그들이 그러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는 강렬한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모습에 집착할 수 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다양한 면모들을 캐치하는 것이 오즈 퍼킨스 감독의 강점이었다. 그러나 주인공의 쌍둥이 형은 살아있는 인물이라기 보다는 어딘가 케릭터가 '비어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하나의 인물로 보기에는 인물과 서사가 비어있다는 인상을 받는데, 이는 쌍둥이 형이 처음부터 인물이었다기 보다는 동생인 주인공의 인격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린 시절 활발하고 잘 놀았지만, 동시에 그 어린 시절의 유치함에 사로잡힌 존재, 그리고 똑같이 죽음이라는 강렬한 경험을 했지만 죽음에 다른 방식으로 집착한 존재,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 혐오와 체벌을 하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이라 한다면 앞뒤가 맞게 된다. 즉, 쌍둥이 형이 화해를 하는 척 하면서 어설픈 장난을 치는 모습이나 쌍둥이 형과 끝끝내 화해를 하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장면은 자신의 유년 시절과 작별을 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쌍둥이 형이 죽고, 인형을 다시 찾은 주인공은 앞으로 이제 어떡해야하냐는 아들의 질문에 가족의 의무니 뭐니 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그것은 자신이 겪었었던 강박과 편집의 대물림이기도 하다. 하지만 차 앞을 지나가는 죽음(흰 말을 타고다니는 창백한 기수)을 보고서 주인공은 생각을 바꾸고 이야기를 한다. 춤추러 가자고. 그것은 죽음을 대하는 주인공의 태도가 바뀐 것을 의미한다. 주인공이 이전까지는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모든 것과 거리를 두고 스스로 고립시켰다면, 이제는 죽음이 있음을 담담이 받아들이고(더불어 자신의 유치했고 죽음에 집착했던 자신의 모습도 버리고) 삶을 최대한 즐기겠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오즈 퍼킨스의 더 몽키는 공포영화 사상 최고의 걸작이라 부를 수는 없다. 영화는 어딘가 삐걱거리고 비약으로 차있으며, 쌍둥이 형과의 화해 장면은 기괴하다할 수 있을 정도로 어색하다. 그러나 오즈 퍼킨스 영화에는 진정성이 있다. 그것은 카메라나 플롯에서 자신이 겪었던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부터 어떻게 자신이란 인간이 만들어졌는지를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 이상을 더 나아가려고 한다. 공포 영화 감독으로 최고라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사랑스러운 매력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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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레그스라는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감독인 오즈굿 퍼킨스의 가족사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오즈굿 퍼킨스의 아버지인 안소니 퍼킨스는 헐리웃에서 활동하는 유명배우였는데, 게이라는 사실을 숨긴채로 아내인 베리 배런슨과 결혼하였고, 이것이 감독의 유년시절을 관통하는 트라우마가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비밀을 자식이 알지 못하게 숨기는 어머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의 어두운 분위기의 영향을 받는 아들, 기억 속에서 어두운 트라우마처럼 들러붙어있는 아버지의 이미지까지, 롱레그스의 창작 모티브들은 여기에 기반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롱레그스는 '무서운' 공포 영화라기 보다는 '우울한' 공포 영화다. 영화는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주인공인 리 하커가 어머니가 숨긴 어두운 비밀과 자신의 트라우마를 파해쳐 올라가는 내용이다. 영화의 오프닝 시퀸스를 보자. 4대3 화면 프레임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소녀의 관점에서 그 사건이 있기 전날의 상황을 회상하는데, 트라우마를 안겨주는 롱레그스의 얼굴이 '프레임 바깥'에 있다가 불현듯 4대3 프레임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어린 시절 트라우마가 어떻게 해서 생기느냐를 보여주는 과정이다.

영화는 리 하커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구성한다. 그리고 그 세상의 주요 키워드는 강박과 반복이며, 강박은 대칭을 통해서 구성된다. 롱레그스 사건에 투입되기 전에 무의식적으로 용의자를 잡아내는 장면을 보자. 여기서 하커는 아무것도 없는 집을 응시하다가 거기에 용의자가 있다 라고 단정하는데, 계획도시마냥 정리된 미국의 교외 마을의 비슷 비슷한 집들의 모습에서 하커가 바라보는 것은 대칭된 집의 이미지다. 영화는 이와 같이 대칭되는 이미지와 그 가운데 주인공을 끊임없이 강박적으로 밀어 넣으며 주인공을 가둬둔다.

재밌는 점은 대칭이라는 관념일 것이다. 대칭이란 공간 내에서 어떠한 축을 기준으로 하여 동일한 이미지가 재생산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칭에 있어서 축과 공간이라는 개념일 것이다. 대칭은 어디까지나 제한된 공간과 중심되는 축이 존재해야만 성립될 수 있다. 영화의 첫 시퀸스처럼, 4대3의 공간에서 공간 바깥에서 등장하는 트라우마(롱레그스)가 하커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정의하고 그 세계 내에 갇혀있을 수 밖에 없게 만든다. 즉, 하커의 세계가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서 프레임에 갇혀있게 만들고, 그 갇힌 세계에서 남들은 인지하지 못하는 것들을 무의식적이고도 강박적으로 찾는 재능이 생긴 것이다. 

하커라는 인물 역시 어렸을 적의 트라우마에 사로잡혀있는 사람이다. 중요한 점은 영화의 반전이 등장하기 전까지 이 트라우마가 의식적으로 이해되기 보다는 무의식적으로 하커를 억압한다는 점이다. 하커의 소녀적인 모습(바닥에 증거 파일들을 늘어놓고 분석하는 모습은 전문가의 모습보다는 소녀의 소꿉장난처럼 보인다)이나 정상 가족에 끼지 못하는 모습(상사의 가족과 가상선을 두고 완벽하게 유리되고 분절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 등은 하커가 의식적으로 행하는 모습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억압되는 모습임을 암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반전은 씁쓸하고 우울하다. 하커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트라우마의 진실을 알게 되고, 어머니의 파괴적인 모성애(하커를 살리기 위해 악마와 계약하고, 하커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대신해서 가족을 죽여온 것)를 마주한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하커의 아버지가 없다는 점과 롱레그스가 어머니와 모의하여 가족들을 참살했다는 점이 결합하면서 롱레그스가 마치 '유사 아버지'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어떻게 보면 감독의 아버지에 대한 어두운 감정(화해할 수 없는)을 드러내는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어두운 사실로부터 어머니가 자식을 보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완벽한 보호가 아닌 '살아남는 것을 허락받았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자식의 기억에 알게 모르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는 점은 영화나 감독의 개인사에 있어서 매우 씁쓸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결론을 내리자면, 오즈굿 퍼킨스의 롱레그스는 감독의 개인사를 프레임과 미장센을 이용해 훌륭하게 우울함을 표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아쉬운 점은 감독의 개인사를 알지 못한다면 완벽하게 이해하기에는 뭔가 2%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점을 이해하고 본다면, 어린 시절 트라우마로 인해서 강박증과 불안, 우울을 갖게 된 수많은 어른들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사랑과 어긋남, 강박, 그리고 그 씁쓸함이 커버린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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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스턴스의 국내 흥행 성공은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지만(바디 호러 장르의 흥행이라니!), 영화를 자체만 놓고 본다면 사람들에게 어필을 할 수 있는 내용과 연출로 무장한 작품이었기 때문에 어느정도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영화는 젊음에 대한 이미지 소비와 착취, 자기 파괴 등이 데미 무어의 열연과 맞물리면서 좋은 시너지를 냈다. 그리고 바디 호러의 불쾌함과 함께 신체와 상징들을 이미지와 명확하게 연결지음으로써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만든 것도 영화의 흥행에 한 몫하였다. 요컨데 서브스턴스는 바디 호러 장르의 불쾌함과 이미지의 불분명함(몸과 상징의 구현)을 명확하게 만들어내어서 성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서브스턴스의 명징한 상징과 이미지들은 때로 이 작품의 앝은 구조를 너무 쉽게 드러내기도 한다. 마치 초반부 데니스 퀘이드가 새우를 까서 먹으며 새우를 마치 늘어진 남성기를 흔드는 것처럼 묘사하듯이 말이다. 어떻게 본다면 너무 직설적인 표현들인데, 이 너무 직설적인 표현과 구조들이 관객을 이입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이다:무언가 관객과 영화 내의 인물이나 장치들에 연결되어 일종의 공감각을 형성하여 관객을 뒤흔드는 것이 뛰어난 바디 호러의 강점이라 한다면, 서브스턴스는 관객을 스크린 바깥에 안전하게 놓고 쇼를 보여주는 것에 가깝다. 극 내에서 '캐릭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인물의 묘사나 구성이 된 것은 엘리자베스 밖에 없고, 하비와 같은 인물은 인간이라기 보다는 불쾌한 쇼 비즈니스 그 자체에 불과하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엘리자베스의 복제이자 이 영화의 중요한 한 축인 수 마저도 캐릭터라고 보기 힘들 정도의 묘사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와 수의 관계는 일견 보기에는 명료한 관계처럼 보인다. 늙어버린 엘리자베스가 젊음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세계에서 사랑받기 위해 수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영화의 주요 내용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명제가 맞다고 가정한다면 두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첫번째는 엘리자베스가 수를 만든 이유는 분명하지만, 어째서 수가 엘리자베스를 착취하고(=척수액을 뽑아서 자신을 유지하기) 엘리자베스는 척수액이 뽑힐 때마다 더 추하게 늙어가는가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착취라는 것은 착취하는 자가 착취 당하는 자로부터 얻을 것이 있기 때문에 행하는 것인데 수는 그 자체로 완벽하기 때문에 수는 엘리자베스를 착취할 이유가 명확하게는 없어 보인다.

두번째는 서브스턴스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자가 이야기하는 '균형'의 문제이다. 처음 설명할 때처럼, 둘을 하나이기 때문에 서로 균형을 맞추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서브스턴스를 통해 만들어진 복제체와 본인 사이의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핵심이라 한다. 그런데 겉보기에 젊음과 늙음이라는 관계에서 '균형'은 어떻게 찾아야 하는 것인가? 젊음은 이미 지나가버린 것이고, 늙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균형이라는 것은 양쪽에서 서로 주고받는 것이 있어서 유지를 해야하는 것인데, 지나간 것과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절대적 장벽 사이에서는 이들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서브스턴스를 젊음과 늙음의 육체에 대한 내용으로 보는 것은 일견 직관적이긴 하지만, 함정이 있는 해석이다. 이를 정확하게 설명하려면 미디어에서 소비되는 육체의 이미지와 실제 육체 간의 괴리에 대한 관점으로 봐야할 것이다. 그 관점에서 본다면 어째서 이미지의 육체(=수)가 실제의 육체(=엘리자베스)를 착취하는가가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미지의 육체는 실제 육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너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실제의 육체를 착취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의 육체가 우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의 육체는 이미지의 육체를 보면서 자신이 원본임에도 느낄 수 밖에 없는 열등감으로 자기 파괴적인 행위를 하는데 서브스턴스에서 그 자기 파괴적인 행위는 바로 '폭식'이다. 그리고 이미지의 육체가 자신을 파괴적으로 즐기는 행위가 '섹스'인 것도 눈여겨 볼만하다.

하지만 이 관계성은 영화의 배경에 의해서 의도치 않게 숨겨져 있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육체의 이중적인 이미지(이미지와 실제)는 이미 인스타그램이나 틱톡, 유튜브와 같은 매체에서 많이 보여진 현상이다. 수많은 보정 필터, 스테로이드, 호르몬, 성형 수술 등으로 인해 육체의 이미지들은 실제보다 더 과격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서브스턴스의 메타포는 그렇게까지 놀라운 경험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서브스턴스의 배경이 헐리웃과 LA 라는 쇼 시스템에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는 것이다. 처음 엘리자베스 스파클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던 것으로 영화는 시작되는데, 이 명예의 전당 헌액과 늙어버린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젊은 여배우가 어떻게 차츰 사라지는가 라는 '시간'의 벡터가 자연스럽게 개입하고 그것이 '젊음'과 '늙음'이라는 두 이미지의 대립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즉, 젊은 육체와 늙은 육체의 주도권 싸움이라는 잘못된 구도는 영화의 배경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문제였던 것이다.

서브스턴스의 치명적인 문제점은 구도 자체를 너무 명확하게 잡으려 하다가 오히려 불필요한 구성을 추가해서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차라리 SNS의 시대인만큼 헐리웃이라는 배경을 제거하고 SNS와 관심을 끌기 위해서 행하는 자기 파괴적인 행위들로 이야기를 재구성하였다면 서브스턴스의 이야기는 명확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갑이 지난 데미 무어의 연기는 인상적이었다. 젊어서는 섹스 심볼로 유명했었던 그녀가 늙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했었던 연기들은 어떻게 보면 자신의 삶에 대한 메소드 연기였을 수도 있다. 그녀의 연기가 있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라는 케릭터가 인물로 성립할 수 있었는데(수에 대한 애증, 자기 혐오와 파괴 등), 다른 인물들이 인물들로 성립되기에는 너무나 평면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데미 무어의 연기가 더더욱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결론을 내리자면 서브스턴스는 바디 호러 영화의 입문작으로는 나쁘지 않은 작품이다. 그러나 몇몇 부분에서 너무 얕고, 혼란이 있을만한 구도를 사용하고 있다는게 문제다. 차라리 헐리웃이라는 공간이 아닌 SNS와 같은 것들을 배경으로 사용했다면,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와 이미지에 더 부합했을텐데 그 부분은 안타깝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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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의 에반게리온 극장판들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인구에 회자된 물건이라 할 수 있다. 거의 20년에 걸쳐서 펼쳐진 장대한 이야기는 마지막에 도달했을 때 끝낸 결론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을 화나게 만든 부분이 있었다. 도돌이표에서 안노가 했었던 것은 에반게리온이라고 하는 작품의 팬덤을 ‘강제로’ 성불시키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은 소년의 이야기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다루는 것이 에반게리온 극장판의 핵심인데 이러한 과정이 대사에 너무 의존한 나머지 졸업에 과정에서 인물들이 납득하기 힘든 부분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런 아쉬운 점들에서 미묘한 지점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에반게리온 극장판들의 큰 흐름들이 생각보다 짜임새가 있다는 것이다. 기나긴 기간 동안 스토리가 바뀌고 방향성이 바뀐 부분들이 있지만 서-파-Q-도돌이표 로 이어지는 흐름을 ‘에반게리온의 졸업‘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부분들이 많다. 서에서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면서 더 나아가고자 하는 신지의 모습, 파에서 스스로의 행복을 구하기 위해서 서드 임팩트를 일으키며, 큐에서는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책임과 여진을 바라보며 혼란에 사로잡힌 모습, 그리고 마지막 도돌이표에서는 그러한 것들을 딛고 한 단계 성숙해지며 아버지를 긍정하는 모습까지 보이는 신지의 모습까지, 한 작품을 졸업이라는 테마로 엮어서 본다면 오히려 말이 되는 구성을 보여준다. 실제로 성장의 과정에서 있을 법한 고난과 깨달음의 과정이 작품별로 테마가 존재하고 있었고, 4작품이 아닌 하나의 작품으로만 판단한다면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괜찮은 부분들이 있었다.

극장판의 가장 큰 문제는 각 작품별로 테마가 바뀌었다는 것이 아니라 극장판이 발매된 각각의 기간이 너무나 길다는게 가장 컸다. 개봉 텀이 너무 길다보니까 사람들은 서가 에반게리온의 새로운 테마인 것으로, 그리고 파가 에반게리온의 새로운 테마인 것으로, 큐가 에반게리온의 테마인 것으로 오해를 한 것이다. 각각이 한 작품의 일부에서 과정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라는 걸 사람들이 잊어버릴 정도로 긴 텀을 들여서 이야기를 전개하다 보니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에반게리온 특유의 현학적인 대사와 말로만 풀어서 이야기를 진행시키려는 전개 방법도 큰 문제가 있었다. 분명 납득이 가능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에반게리온 특유의 화법으로 풀어내게 되니 일단 이해가 안되는 부분들도 많을 뿐더러 이야기가 관객들의 기억에 남지 않는다는 부분도 많았다. 

그러나 에반게리온 극장판 4부작에서 좋게 평가할 수 있는 부분들은 에반게리온이 단순하게 맥거핀이나 설정 등을 성장의 과정을 통해서 다시 재포장 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기존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이 에반게리온의 자극적인 점들만 모아서 만들어낸 내용이었다면, 에반게리온 극장판 4부작은 성장과 졸업이라는 측면에서 ‘어른이 된다’라는 것을 어떻게 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특히나 도돌이표 부분의 귀농(?) 파트는 안노의 완숙미가 드러나는 부분으로 일부러 템포를 쉬어가면서 신지라는 케릭터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성인이라면 납득가능하게 표현했다는 점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이러한 완급의 조절은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자극적인 내용과 연출에서 느낄 수 없는 완숙미가 있었던 부분인데, 창작자가 나이가 듬에 따라서 생각이나 표현법이 달라지는 부분들이 있고 그런 부분들이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여지없이 증명한 것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에반게리온이 장장 15년에 가깝게 여러번 테마를 바꾸면서 관객들을 혼란으로 몰았다는 점에 있다. 어디까지가 감독이 의도한 바인지, 아니면 컨셉이 바뀐 것인지 우리는 지금에 와서 알기 힘들다. 그러나 우리가 각각의 극장판을 보았을 때는 '그 극장판이 에반게리온 극장판 4부작의 전체 테마가 된다'라고 믿을만한 합당한 근거들이 있었다. 만약 우리가 끝을 알고 있었다면, 도돌이표에 대한 사람들의 엇갈린 평가는 다소 사그라들 수 있었던 것이다.

감독이 에반게리온으로부터 관객들을 강제로 졸업시키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에 대한 부분은 차치하더라도, 에반게리온에는 여러가지 문제들이 있다. 우선 액션의 규모를 키워서 연출을 큼지막하게 하려 했지만, 정작 무게감이나 연출의 강렬함이 부족하여 허공에 허우적 거리는 듯한 인상이 있는데 특히 대단원을 장식하는 도돌이 표에서는 이런 부분들이 대단히 강하게 드러난다. 어이가 없는 점은 역으로 군함이 나오는 쪽의 연출은 너무 힘이 들어가서 이것이 과연 에반게리온이 주제인 영화인지 아니면 군함이 주제인 영화인지 햇갈리는 촌극이 생기기도 한다. 또한 영화 내내 이어졌던 스토리들이나 설정들의 변화도 다소 어색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에반게리온 극장판 4부작, 특히 마지막 도돌이표의 미덕은 에반게리온을 졸업시켰다라는 개념보다도 '에반게리온으로 대표되는 유년 시절을 긍정한다'에 가깝고 거기서 느껴지는 관록은 나름 인상적인 부분들도 있다. 특히 절대적인 타자였던 이카리 겐도를 극 중으로 끌어들인 부분은 보기에 따라서는 다소 억지스러울수도 있겠지만, 에반게리온의 이야기가 겐도, 즉 아내에게 집착한 미성숙한 어른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도 감안한다면 인상적인 부분이 있다.

결국 에반게리온 극장판 4부작은 짧은 기간(4~5년)에서 이어져서 만들어지고 소비되거나, 혹은 더 나아가서 TVA 같은 형태로 제작되었다면 이정도로 논란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너무 긴시간에 들여서 뜸을 들이고 더 나아가서 극의 톤이나 설정들이 바뀐 부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정도로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안노이기 때문에 에반게리온을 어떻게 끝내야 한다라는 관점과 성숙함을 추구할 수 있었다는 점은 극장판 4부작, 특히 도돌이 표의 미덕이라 할 수 있다. 기회가 된다면 짧은 텀에 몰아서 보는 것을 추천하는 바이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그리스 비극의 핵심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난다 이다. 대표적인 그리스 비극인 오이디푸스왕의 비극을 보자. 어렸을 적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할 것이라는 예언을 받아 발 뒷굼치에 못이 박힌채로 산에 버려졌다가 극적으로 구조되어 자라났다. 그 후에 길에서 시비가 붙어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되어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하고 동침하게 되는데 그는 이런 비극적인 사건을 일으킬 어떠한 의도들도 없었지만, 결국 그 모든 비극을 자신의 손으로 일으킨 것에 충격을 받고 스스로 두 눈을 뽑고 유랑을 하게 된다. 

오이디푸스를 통해서 볼 때, 그리스 비극의 인과 관계는 필연적으로 장르적인 속성에 기반하고 있다. 물론 아무리 뛰어난 영웅이라도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그리스 비극이지만, 현대의 장르 관점에서 보자면 어떤 의미에서 오이디푸스가 이런 일을 겪는 것은 '그리스 비극'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장르의 형식이 일종의 양식미를 구축하는 것인데, 이러한 형식미로 인해서 인물들이나 이야기는 그 어떠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한 운명을 맞이한다. 마치 현대 미국 코믹스처럼, 영웅들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빌런들은 다시 돌아오고 똑같은 문제를 다시 경험하고, 무한히 확장하는 다중 우주에서조차 그러한 양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즉, 어떤 장르적 양식들은 이야기의 인과관계보다 더 상위에 존재하고, 그 상위에 존재하는 양식들은 이야기와 극을 지배하고 극을 기묘한 방향으로 끌고 간다.

지금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나홍진 영화들이 이러한 장르적 인과관게에 사로잡혀있다고 이야기한다면, 처음에는 많은 의문이 들 것이다. 물론 후술할 곡성이나 각본을 맡은 랑종 같은 영화가 공포영화 장르의 필연성에 기대고 있는 작품이라 할 지라도, 초기 영화인 추적자나 황해 같은 작품들이 그러한가? 라는 부분에서는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자세하게 잘 뜯어본다면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파멸이라는 측면에서 곡성 이전의 나홍진 영화는 많은 부분 그리스 비극적인 속성을 띄고 있다. 그러한 불가피한 파멸이란 추적자에선 연쇄 살인마였고, 그리고 황해에서는 면정학과 조선적 킬러들이었다. 이들은 케릭터로 보기에는 그 정체와 배경이 모호하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고, 인물들에게 필연적인 파멸을 선사하고 극을 파국으로 이끈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가까운 존재들이다. 즉, 추적자에서는 연쇄살인마는 저열하게 살았던 한 남자가 속죄를 위해서 슬럼을 필사적으로 질주하며 내달리게 만들기 위한 장치였고, 황해에서 조선적 갱단은 일확천금과 성욕, 질투 등이 뒤섞여 흘러가는 욕망의 탁한 흐름이 도달하는 필연적인 파국과 진흙탕(=황해)였다. 

이러한 요소들이 극단적으로 드러났던 것이 곡성이었다. 곡성이 처음 나왔을 때, 수많은 사람들은 무엇이 진실인지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진실을 다루는 장르적 껍질이었다:공포영화의 관점에서 보자면, 범속한 사람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공포영화의 장르적 운명(금기를 어기고 더 큰 재앙을 불러일으킨다)을 거스를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디테일에 근거하여 진실을 찾기 보다는 그 디테일들이 쌓아올린 방향성과 결과에 초점을 맞춰 본다면, 영화가 이야기하고 싶은 결론 다소 싱거울 수 있다:영화는 공포영화였기 때문에 모두가 죽고, 모두가 죽기 위한 근거는 어떻게 보면 사람들이 찾아보는 디테일에 근거하여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결국 도달하는 길은 여럿이라도 도달하고자 하는 결론은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곡성은 디테일들로 필연적으로 도달해야하는 결론까지 가는 결과가 한국 영화 특유의 끈적한 정서로 포장되어 있어서, 디테일을 다소 뭉그러뜨린다는 인상을 준다. 마치 아주 조밀한 디오라마 위에 끈적한 점액질을 뒤덮어 놓은 인상의 곡성은 나홍진 영화가 갖고 있었던 끈적하지만 강렬한 결론까지 도달하는 동력을 하나로 정제하지 못하고 어그러뜨리는데 영화의 마지막 황정민이 떨어뜨리는 사진처럼 구질구질하게 물에 젖어버린 디테일들은 어떠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는 인상을 심어준다. 결국 엑소시즘에서 좀비물, 고어물 등등이 합쳐진 이 혼종 공포 영화를 깔끔하게 끝내려 했다면 주인공 가족의 죽음으로 끝내었어도 훌륭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물에 젖은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기존에 보여주었던 디테일들에 상충되는 디테일을 집어넣어 사람들을 혼란으로 몰고 가고 전국적인 곡성 논쟁을 불러일으킨 점은 어떻게 보면 영화가 던진 미끼를 물었다기 보다는 영화가 갖고 있는 한계를 명확하게 드러낸 부분이라 할 수 있다:공포영화 였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간단한 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렸기에 2시간 영화에 대한 강렬함에 대한 해답을 사람들이 찾고자 자신이 본 디테일에 집착하게 만든 것이다. 

곡성의 전작인 황해 역시도 그러한 문제들이 있었지만, 여기서는 도달하고자 하는 결론이 명확했고 거기까지 도달하기 위한 동력이 강렬했기 때문에 '과하긴 했어도 이해가능한' 범주에 속하였다. 그러나 곡성은 서로 상반되는 믿음과 공포 영화적 장치의 긴장감(누구를 믿을 것인가?)을 너무 남용한 나머지 사람들에게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이는 논쟁적이라기 보다는 혼란스럽다 라는 표현이 맞는데, 사람들이 같은 것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무엇을 봤다는 믿음에 따라서 해석을 전개하기 때문에 결국은 어떠한 결론에도 도달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이 나홍진이 의도했다면 모르겠지만, 추적자나 황해를 좋게 본 사람으로 이야기하자면 이는 너무 과도하고 단순한 해답에도 사람들을 혼란으로 몰고간 부분이 너무 많다.

결국 그렇기에 랑종은 좀 더 심드렁해질 수 밖에 없는 부분들이 있다. 기본적으로 랑종은 태국만이 갖고 있는 디테일이나 동남아시아 특유의 공포영화 장르에서 찾아볼 수 있는 끈적함이 일품인 영화다. 일반적인 공포영화에서 혼령이나 유령이 나온다면 정신을 지배하거나 뭔가 좀더 '차갑고 정갈한' 느낌을 주는 쪽에 가깝다면, 동남아시아 공포영화에서는 습기와 열기, 그리고 영혼이 육화되어 피와 육신, 그리고 벌레 등등으로 화하는 인상적인 표현 방법을 갖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표현 방법들은 이미 나홍진의 전매 특허이고, 여러 동남아시아 공포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기도 하고 좋았던 부분은 거기까지이기도 하다. 

랑종의 가장 큰 문제점은 페이크 다큐멘터리라는 무리수를 두고 있다는 점인데, 페이크 다큐멘터리가 현실감과 기시감을 주는데 특화된 공포영화의 하위 장르이지만 나홍진이 랑종이나 곡성에서 추구하고자 하였던 일종의 장르적 양식미(망할 것은 결국은 망한다)와는 상극이기 때문이다. 장르적 양식미는 기본적으로 '이성적'이지 않다. 또한 많은 페이크 다큐들이 빠지는 함정이 있다면, 페이크 다큐라는 명목하에 현실적인 내용을 넣다가 결국 공포영화의 문법을 따라야 하는 순간이 오면 후자로 갈아타면서 생기는 카메라의 움직임이나 이야기의 괴리를 커버하지 못하고 나자빠지는 것들인데, 랑종 역시도 '금기를 어기는 것'에 대해서 인물들이 너무 답답하게 구는 것들이 많고 페이크 다큐라는 장르 문법 때문에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일들이 너무 자주 발생을 한다.   

또한 페이크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적인 양식미에서도 랑종은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다큐멘터리란 정보와 사실을 전달하는 일종의 학술적인 영화 장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영화 장르가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거나 혹은 거짓을 다루는 요소로 다양하게 분화되긴 하였지만, 기본적으로 다큐멘터리 장르에는 일종의 보도 윤리와 편집이 아닌 사실의 전달이 우선되는 양식미가 존재한다. 하지만 랑종은 중요한 순간에 이러한 것들을 너무 쉽게 무시하고 어긴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랑종은 페이크 다큐멘터리인척 하지만 페이크 다큐멘터리일 이유가 전혀 없는 영화다. 영화 내에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신화나 무속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고, 대부분 강렬하고 자극적인 컷들을 잡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구성하고 편집한 장면들이 대부분이다. 한 때 페이크 다큐멘터리, 파운드 푸티지 장르를 풍미하였던 파라노말 액티비티나 블레어 위치 같은 작품들에 비교하여 본다면, 랑종은 그저 핸드핼드 형태의 강렬한 샷을 찍고 싶기 때문에 페이크 다큐멘터리라는 양식을 취한 것으로도 보인다.

랑종이나 곡성 양쪽 모두 결국은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라는 공포영화 장르적 문법으로 범속한 인간이 파멸을 맞이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특화된 작품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두영화 모두 그 이상인것처럼 포장하기 위해서 디테일과 디테일 간의 연관관계를 넣는데, 이것이 한국 영화 특유의 끈적함과 맞물리면서 과도하거나 혼란스럽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 문제다. 나홍진이 관여한 이 두 영화는 서로 다른 관점의 담론이 충돌하여 논쟁을 일으킨다기 보다는 그냥 정돈되지 않고 혼란스럽기 때문에 사람들의 설왕설래를 일으킨다는 점에서 혼란스러운 영화들인데, 영화 전반에 깔려있는 그 강렬함을 걷어내고 본다면(물론 그것이 영화의 핵심이긴 하지만) 명약관화한 부분들을 가려버린다. 그것을 매력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렇게 부를 수 있겠지만, 추적자나 황해에서 보여준 그 강렬함이 도달하는 결론에 비해서는 두 세 발자국 퇴보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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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이후 등장한 에일리언 삼부작은 과거 에일리언 4부작(1~4편까지)에 대한 일종의 거부이자 리들리 스콧의 오리지널리티를 강하게 선언하는 작품이었다. 프로메테우스 3부작은 제임스 카메론, 데이빗 핀처 등을 부정하는 것이었으며 심지어는 그 당시의 리들리 스콧 그 자신 조차도 부정하고 있어서 에일리언이 나온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같은 시리즈의 영화로 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품이었다. 오히려 프로메테우스는 리들리 스콧의 최근 프로젝트의 연장선에서 봐야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최근 종교라는 테마에 상당히 깊은 관심을 보인 리들리 스콧의 다수 작품의 연장선에서 볼수 있으며, 에일리언이 탄생한 과정을 일종의 구약과 신약, 그리고 신화적으로 재해석하면서 SF판 성서를 만들고자 한 야심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와 파괴(프로메테우스), 믿음, 신앙의 공동체(코버넌트), 그리고 건국 신화(로물루스)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뚜렷하고도 일관된 흐름을 보여준다.

먼저 프로메테우스부터 쭉 살펴보자. 프로메테우스는 창조주가 인간을 만들고, 또한 파괴하려한다는 대중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평이한 모티브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그러한 과정에서 '의도'가 불가해하다는 점일 것이다:어째서 창조주는 인간을 파괴하려 하는가? 그것은 대사나 서사로 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관객들은 어디까지나 창조주와 인간의 관계를 인간과 인조인간의 관계로 유추하여 알레고리를 구성해야 한다. 이러한 알레고리를 구성하기 위해서 크리처 영화라고 보기엔 다소 비정형적이고 장르 파괴적인 이야기를 관객들이 오래 봐야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종교적인 창조의 신비와 공포에 대한 알레고리를 무기질적인 마스크를 한 패스벤더의 데이빗이라는 캐릭터로 풀어낸 프로메테우스는 장르 서사가 아닌 묘한 컬트적인 인상이 강한 작품이었다. 그것은 종교를 SF로 은유(창조주 - 인간을 인간 - 인조인간의 관계로 은유하여 해석)함으로써 에일리언에 일종의 종교적 신화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에일리언 3편의 종교적 분위기와 다른 점은 에일리언 3편이 희생제의나 구원에 대한 논지였다면, 프로메테우스는 가족이라는 관계를 차갑고 무미건조한 톤으로 재해석하여 종교의 알레고리를 드라마로 바꾸는데 있었다.

그러나 코버넌트에서 이러한 분위기는 바뀌게 된다. 데이빗은 창조주들을 맥거핀으로 만들어버렸고, 더이상 부모의 유사 관계는 극에서 큰 힘을 잃는다. 대신 에일리언 시리즈 특유의 뒤틀린 '창조'의 이미지는 여기서 신앙이자 믿음의 형태로 변화한다. 프로메테우스에서는 동일하지 않지만 유사점을 갖는 두 관계를 병렬로 보여주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드라마의 영역을 통해 설명이 없는 신비한 영역을 이해할 수 있게끔 만들었다. 그러나 코버넌트에서는 다양한 믿음의 공동체('더 나은 세계, 식민지를 찾고자 하는 자들의 믿음의 공동체' 또는 '인조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월터의 믿음', 마지막으로 '위대해지기 위해서 부모를 살해하고 생명을 잉태하고자 하는 데이빗의 믿음')들이 등장하였고, 이 믿음의 공동체들이 서로 영향력을 주고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코버넌트의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믿음이 결국 데이빗의 뒤틀린 믿음(제노모프의 탄생과 창궐)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예정된 이야기들 때문에 다른 믿음이 상대적으로 묻힐 수 밖에 없는 문제가 있었다. 결국 제노모프의 탄생을 위해서 허무하게 코버넌트 호의 승무원들과 월터가 희생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피카레스크 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데, 피카레스크 적으로 느껴지기에는 데이빗의 주장은 단지 '여성기와 남성기 없는 자의 뒤틀린 욕망' 수준으로 밖에 안 읽히는 다소 식상하고 저급한 부분들이 있다. 프로메테우스의 무기질적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데이빗이 후속작에서는 쇼에게 유사 마운팅을 하면서 뒤틀린 자식에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은 결국 이 케릭터 조차도 자신 창조주보다 더 나은 야망을 가지지 않은 뒤틀린 놈이었다는 실망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로물루스는 프로메테우스나 코버넌트의 이질감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로물루스라는 제목에서부터 작품은 제목에서 많은 신화적인 관점에서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로마를 건국하였지만 역사적인(=실제 존재하는지) 인물인지 논란이 있는 로물루스를 제목으로 선정한 것에서부터 영화의 방향성이 '신화'에서 '역사'로 넘어가는 순간을 다루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로물루스라는 인물의 행적들과 의미들(건국의 과정에서 형제인 레무스를 죽인 점, 로물루스라는 이름이 언어학적으로는 '로마인'을 의미한다는 점 등)을 비추어 보았을 때,  데이빗이 만들어낸 뒤틀린 창조물들이 하나의 왕국을 만들고, 더 나아가서 에일리언 1에서 4까지 이어지는 서사의 중요한 연결고리를 만드는 과정이 된다고도 예측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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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에서 유행의 중요한 속성은 죽음과 일시성이다:죽지 않는 유행이란 결국은 상수로 자리잡기 때문에 어디에도 존재하여 모두가 향유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모두가 향유하는 상수로써 문화란 고유성과 개성이 없어지게 된다. 사람들이 유행을 따라서 즐긴다는 것은 문화를 향유하면서 자기 또는 집단만의 개성을 가지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대중문화에서 유행은 환경과 변수를 잘 만나면 화려하게 불타오르지만, 동시에 환경과 변수가 사라지게 되면 덧없이 사라지게 된다. 그런 점에서 유행을 잘 타서 흥행하는 작품은 가볍고 화려하며, 세태를 정확하게 찌르는 맛이 있다.

주술회전은 인터넷에서 논란이 되었듯이 주술회전은 흥행했던 유명한 작품들을 상당수 오마주 하거나 모티브를 따오는 등 다른 작품의 콜라주 같은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흥행작들을 배꼈다는 사람들의 인상 비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최근 1~2년 동안 인구에 회자될 정도로 대중문화 유행의 한 꼭지를 차지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독창성이 부족하더라도 그것을 엮는 작가의 역량이 뛰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성공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작가가 그 이상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혹은 '멋진 것은 멋진 것이야'라는 생각으로 작품을 접근 했기 때문에 한계가 생긴 작품이기도 하다.

주술회전의 핵심은 말이 안되는 이야기를 '멋지게 엮는 것'에 있다. 다양한 작품의 요소들과 모티브를(헌터 헌터, 블리치 같은 소년만화에서 호러만화의 연출 등등까지) 취하고 있지만, 그것을 배끼기만 했다면 이정도의 성공을 거둘 수 없다. 사람들이 의외로 무시하는 것은 대중문화가 서로 서로 모티브와 요소들을 주고 받는다는 점이다. 성공한 작품이든 실패한 작품이든 서로의 좋은 점은 배끼고 나쁜 점은 배제하는 일종의 수렴 진화와 거기에 자신만의 요소를 집어넣는 실험을 반복해나간다. 중요한 점은 배꼈다, 배끼지 않았다의 영역이 아닌 '그것을 어떻게 하나로 엮는가'라는 작가의 역량과 철학의 영역이다. 주술회전의 강점은 '어떻게 하면 멋지게 엮을 수 있는가'라는 점에서 작가가 좋은 센스를 발휘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가 고죠 사토루라는 인물이다. 작품 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인물이고, 세계의 법칙과 흐름을 바꿀 정도로 강하지만 강한만큼의 무게감이나 진중함, 사명감은 없고 가볍고 촐싹거리지만 동시에 멋쟁이인 고죠 사토루는 작품의 미학을 관통하는 부분들이 있다. 오히려 주인공인 이타도리 유지와 그 동료들이 성장하거나 겪는 모험보다 '고죠 사토루가 어떻게 되는가?'라는 이야기의 흐름을 구성하고 있고, 그만한 강렬한 연출과 설정을 구축하였기 때문에 팬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을 수 있다.

재밌는 점은 좀 매니악한 작품이긴 해도 고죠 사토루라는 케릭터의 조형 자체는 바키 시리즈의 한마 유지로와 맥이 닿아있다는 점이다. 한마 유지로 역시 세계관과 작품을 구성하는 강한 인물이고, 모든 인물과 이야기, 설정의 중심에 존재해서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동력을 제공해주는 인물이다. 하지만 바키 시리즈의 한마 유지로와 고죠 사토루의 큰 차이점이 있다면, 한마 유지로는 작가의 강함에 대한 철학과 미학에 의해서 과대포장된 인물이라면 고죠 사토루는 어디까지나 '팔릴만한 가벼움'으로 무장한 인물이라는 점이다:과격한 근육으로 무장을 한 한마 유지로와 달리 훤칠한 키와 미모, 잘 빼입는 패션 스타일로 포장된 고죠 사토루는 사람들의 호감을 사기 좋은 인물 조형이라 할 수 있다.

재밌는 점은 이러한 흐름들이 기존 작품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주술회전은 "일종의 엇박"을 통해서 정형성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데 주력한다. 이타도리 유지가 주술고전에 입학한 이후로 첫 죽음을 맞이하는 부분이나 마히토와의 첫 싸움, 시부야 사변에서 신주쿠 결전까지 이어지는 과정에서 작품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정형성을 벗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예측하기 힘들어서 사람들을 흡입하는 매력을 가졌다. 

그러나 주술회전의 문제는 감각적인데 너무 치중한 나머지 작품을 과한 것들로 채워넣었다는데 있다. 예를 들어 시부야 사변 같은 경우 고죠 사토루를 잡기 위해서 악역들이 꾸민 음모와 악행의 규모가 너무 커서 과연 '이 이후에 이야기를 제대로 끌고 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는 연출로 가득차 있다. 마허라와 스쿠나의 대결이 바로 그 예인데, 연출의 화려함과 강렬함과 별개로 '이후에 이걸 수습할 수 있나?', '이게 전개에서 꼭 필요했는가?' 라는 의문이 가득찰 수 밖에 없는 전개였고, 시부야 사변 이후 사멸회유에서 신주쿠 결전까지 이어지는 흐름에서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떨어지는 부분도 그런 구심점을 잡고 작품을 통제하지 않은 채 강렬함을 추구하다 보니 작품 전체 이야기의 균형이 깨지게 된 것이 크다고 볼 수 있다.

결론을 내리자면 주술회전 자체는 즐기기에 훌륭한 대중문화 작품이지만, 동시에 너무 가벼운 나머지 잊혀지기 쉬운 유행 그 자체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작가가 작품에 개똥철학을 갖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하는 일이 많지만, 역으로 작가가 작품에 개똥철학이라도 집어넣어 균형 맞추었으면 하는 기이한 작품이 바로 주술회전이다. 점점 뒤로 가면 갈수록 그 힘을 잃어가는게 느껴져 아쉽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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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리치 립스키의 해피엔드는 한 사형수가 사형당하는 장면에서 자신의 생애를 거슬러올라가는 것을 역재생의 문법으로 이야기를 구성한 블랙 코미디 영화다. 사형은 탄생으로, 감옥은 학교가 되고, 결혼의 과정은 역으로 이혼을 위한 과정이 된다. 역재생의 논리는 이미 고전적인 흑백영화나 영화의 테크닉에서 꽤나 많이 사용되었던 테크닉이자 문법이라 할 수 있다.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에서 보았을 때, 역재생은 ‘기존의 것을 낯설게 한다’ 라는 측면에서 사람들을 즐겁게 만드는 코미디의 문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러나 역재생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왜냐면 역재생의 변칙적인 흐름은 어디까지나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라는 개념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흐름에 사람들이 익숙해지고 더 나아가서 흐름을 예측하게 된다. 흐름을 예측한다는 것은 코미디에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문제다. 상식으로 예측 불가능한 엉뚱함과 논센스야말로 코미디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예측 가능해지는 순간 논센스가 상식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해피엔드의 강점은 역재생과 시간을 역으로 구성하는 것에만 의존하지 않고, 역재생의 변주에 정의 흐름으로 진행되는 흐름을 섞어넣는 것이다. 한 시퀸스를 예로 들어보자:주인공의 아내가 남편 몰래 바람을 피기 위해서 외간 남자를 불러놓고 티타임을 갖는 이 장면에서 아내와 남자는 음료를 마시면서 과자를 계속해서 먹어치운다. 이것이 역재생으로 진행되는만큼 이 둘이 과자를 계속해서 뱉어내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중요한 점은 과자를 뱉어내는 것이 아니라 ‘차를 마시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원래대로라면 차를 뱉어내는 과정을 보여줘야 하지만, 불투명한 찻잔 때문에 차를 마시는 듯한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차를 마신다‘라는 정방향의 흐름과 ’과자를 뱉어낸다’라는 역방향의 흐름이 공존하게 되면서 예측불가능한 논센스들을 만들어낸다.

해피엔드는 장면 장면을 이렇게 정방향과 역방향의 흐름을 엮어서 묘사하는 것 외에도 역순으로 진행되는 인물의 대사나 큰 이야기의 흐름에서도 말이 되면서 말이 안되는 모순된 흐름을 같이 구성하고 있다. 해피엔드의 시작은 치정살인을 한 주인공의 사형에서 시작되서 주인공의 출산을 끝으로 해서 이야기를 구성한다. 치정살인의 대상이었던 두번째 사랑이자 아내가 주인공의 첫 사랑이자 벗어나야 하는 대상으로 묘사가 되고, 첫번째 사랑이 주인공이 되찾아야 하는 사랑으로 묘사한다. 해피앤드는 큰 틀에서 첫 사랑에서 느끼는 불완전함을 두번째 사랑을 통해서 극복하고자 하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갈등을 치정극의 구조로 표현한다. 중요한 점은, 정방향과 역방향 모두 이야기가 상식적인 흐름에서 말이 되게끔 구성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재생의 기묘함과 비교되는 정방향의 논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역재생에서 나오는 코미디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해피엔드는 그런 의미에서 훌륭한 코미디 영화이자, 코미디 영화의 교보재 같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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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들은 모두 소년이 세상에 나오면서 세상의 중심이 되는 이야기를 다룬다. 놀라운 것은 아니다. 어렸을 때는 모두 자신이 우주의 중심에 있을거라 생각하고, 모든 일들이 자신이 해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소년들의 욕망, 혹은 소년의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 자연스럽게 해소해주는 것이 소년만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더 오랜 과거로 올라간다면 이러한 소년만화의 이야기들은 영웅서사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황금가지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 다룬 담론들처럼, 대중 작품에서 다루는 서사의 상당수는 소년의 성장에 모티브를 두고 있으며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얻는 깨달음과 난관들을 서사의 구조로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들의 논의에서 눈여겨 봐야 하는 것은 ’성공하는 서사‘가 핵심이라는 것이다. 물론 전설이나 신화의 단계에서 본다면 영웅이 실패해서 몰락하는 이야기는 생각보다 많은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대중문화에서 소년이 실패하는 소년만화란 생각보다 정석적으로 풀어낸 것을 찾아보기 힘든 분야다. 애시당초에 사람들은 대중문화에서까지 실패를 찾고 싶지 않다. 하늘까지 올랐다가 뜨거운 태양에 날개가 추락해 떨어지는 이카로스의 깨달음은 모든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보고 싶고 열광하고 싶은 깨달음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는 사이버펑크 2077의 전일담을 다룬 작품이다. 주인공이 나이트 시티를 활보하는 용병이 되어 성공하고 몰락하는 이야기를 다루는 엣지러너는 트리거 특유의 강렬한 색감과 과감한 연출 방식으로 사이버펑크 2077의 세계를 확장한 애니메이션이라 할 수 있다. 엣지러너의 성공은 엄청났어서, 심지어 사이버펑크 2077의 엉망이었던 런칭을 덮어버리고 다시 사람들을 사이버펑크 2077을 하게 만드는 동력을 만들었다.

엣지러너의 핵심은 몰락 그 자체다. 어떻게 주인공인 데이빗 마르티네즈는 밑바닥에서 정상으로 올라가고, 그리고 추락하게 되었는지를 다룸으로써 태양에 너무 가까워진 이카로스의 추락 그 자체를 다루고자 한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들이 지극히 ‘소년만화’의 구조에 맞닿아있다는 것이 엣지러너의 훌륭한 점이다. 화려하게 비상한 만큼 모든 걸 잃으며 추락하는 모습조차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엣지러너에서 눈여겨 볼만한 점은 게임의 클리셰와 전제를 기묘하게 비틀었다는 점일 것이다. 게임을 오랫동안 한 사람들이라면 주인공이 몸에 부하가 걸리거나 위험이 있는 기술들을 어떤 제약이나 패널티 없이 잘 쓰는 것을 자주 본적이 있을 것이다. 사실 게임에서 이러한 제약사항은 어디까지나 플레이어에게 ‘금단의 힘’을 제공하고 금기를 넘어서는 쾌감을 제공해주는 일종의 내러티브를 제공해주는 방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네러티브적인 제한이 플레이어의 힘을 실제 제한하는 케이스들은 상당히 드물다. 하지만 엣지러너는 이러한 클리셰를 교묘하게 이용하다가 뒤틀어버린다.

주인공 데이빗은 크롬(인간을 강화시키는 인공 신체)에 대한 부하를 적게 받는 재능을 가진 인물이다. 사이버펑크 세계에서 크롬을 얼마나 많이 달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무력이 결정되는 것을 생각한다면, 데이빗은 사이버펑크의 세계에서 더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셈이다. 이는 엣지러너의 원작인 사이버펑크 2077에서 용병 V와 구도가 비슷한데 크롬에 대한 적응력이 뛰어난 V가 힘과 인연으로 나이트 시티의 최정상에 오르는 것이 원작 게임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V가 하늘 높이 날아올라 전설이 되었다면, 데이빗은 전설이 되지 못하고 추락하게 된다.

그리고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데이빗은 스스로 전설이자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크롬의 부작용으로 인해서 멈춰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을 때, 그는 자신이 남들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V가 아니었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달리는 자Edgerunner에 불과한 거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그는 경계의 저편으로 넘어가는 것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예외인 자신’ 클리셰를 무너뜨리긴 했어도, 주인공 데이빗의 몰락은 극에서 계속해서 예견되었다. 극 중 데이빗을 움직이는 모티브는 모두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한 것들이었다. 가장 큰 모티브는 1화에서 죽어버리는 데이빗의 어머니의 유언 아닌 유언이었다:‘아라사카의 정상에 오를 것’이라고 죽기전 데이빗과 싸우는 그 순간에서도 이야기했다. 그것이 데이빗을 주박처럼 옭아메고, 데이빗이 끝까지 자신을 밀어붙이다가 경계의 저편으로 넘어가게 만드는 근본 원인이 되었다. 마지막 화에서조차 데이빗이 루시를 구하기 위해서 사이버사이코 상태에서조차 ’아라사카 정상까지 가겠다‘ 라는 이야기하는 장면은 그가 여전히 1화의 주박에 사로 잡혀있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그에게 기회를 주고 성장할 가능성을 준 또래 집단들도 역설적이지만 그의 파멸을 앞당기는데 일조하고 있다. 그의 롤모델이 되었던 메인 역시 그의 사이버사이코 상태의 환상 속에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과도하게 크롬을 사용하고 자신을 밀어붙였던 강박적인 심리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메인이 망가지는 과정 자체는 데이빗의 몰락과 많은 부분 비슷한데, 자신을 끝까지 몰아붙이다가 주변인들을 내치고, 자신의 연인과 친구들을 모두 잃고 사이버 사이코가 되어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메인의 죽음은 데이빗에게 더 많은 신체를 크롬으로 대체하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고, 그의 몰락을 앞당기는 계기로 이어졌다. 

그렇기 떄문에 역설적이게도 시리즈가 끝나고 죽음을 맞이하는 그때까지 데이빗의 심리 상태는 강박과 죽은 자들의 주박에 사로잡힌 자기 자신이 없는 자기 파괴적인 상태였다. 이 때문에 그의 연인인 루시와의 관계 조차도 서로 바라보는 벡터가 달랐다. 첫 만남에서 루시는 데이빗의 꿈 이야기를 듣고는 ’그건 타인의 꿈이 아니냐‘라고 반문한다. 이는 데이빗의 동인을 분명하게 설명하는 동시에, 루시가 삶을 살아가는 관점인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동시에 드러낸다. 그렇기 때문에 데이빗과 루시는 일종의 상극에 서있는 관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서로 삶을 바라보는 관계가 다르더라도 데이빗과 루시의 관계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순수한 관계라는 점이다. 루시가 데이빗을 위해서 아라사카의 해커들을 제거하고 데이빗의 흔적을 숨기고자 했던 것은 그를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그녀의 안전을 지키고자 했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해주었던 것도 데이빗을 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데이빗은 루시를 사랑했지만, 그의 사랑은 루시의 그것과 상당히 달랐다:데이빗은 그녀에게 헌신했지만 동시에 루시의 소망을 이루는 것이 그의 사랑의 형태였다.

이로 인해서 엣지러너의 가장 큰 비극이 완성된다:루시와 데이빗은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방식과 벡터가 달랐기 때문에 이야기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도 감정이 닿았어도 서로의 소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루시는 자신이 죽더라도 데이빗이 죽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을 전했지만, 데이빗은 루시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고 자신의 꿈은 루시의 소망을 이루는 것이라 한다. 가장 마지막의 순간에서조차 두 연인의 소망은 닿을 듯 말듯 하며 교차해버리고 아련한 감정만을 남긴 채 장대한 파멸을 맞이한다.

트리거는 색체와 수직과 수평의 이미지, 그리고 추락과 상승의 동선 등을 통해 위에서 분석한 엣지러너의 이야기 구도를 훌륭하게 구성한다. 아라사카 타워와 달, 데이빗의 추락, 화려하지만 마치 병든 것 같은 채도 높은 노란색의 이미지, 네온 빛깔로 표현된 산데비스탄의 잔상들과 사이버펑크 도시의 느낌 등은 교과서적인 동시에 통일감을 제대로 구성하였다 할 수 있다. 서사의 완성도 뿐만 아니라, 이미지의 완성도가 높기 때문에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는 작품으로써 훌륭한 수준에 이를 수 있었다.

결론을 내리자면,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는 훌륭한 애니메이션이라 할 수 있다. 화려한 이미지와 다르게 본질적으로 엣지러너는 대중매체의 정석적인 흐름을 뒤집고 몰락의 아름다움과 애틋함, 안타까움을 잘 드러낸 탄탄한 작품이다. 기회가 된다면 꼭 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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