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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범죄도시 2편은 흔히들 마동석 영화와 장르 영화의 전형이라 부를 수 있는 작품이다. 기존의 장르 영화들과 비교하였을 때 특출나게 뛰어난 부분이나 새로운 부분들은 없지만, 그렇다고 흠잡을 부분들도 없는 모범적인 장르 영화의 표본이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에는 '전지전능한 마동석이 나와서 모든 것을 정리한다'라는 단순한 플롯을 따라갈 것 같은 범죄도시 2는 의외로 플롯이 탄탄하여 긴장감을 부여하는데, '나쁜놈들이 얼마나 나쁜가?'와 '나쁜놈들이 어떻게 개연성 있게 데우스 엑스 마키나인 마동석을 피해가는가?' 라는 부분을 깔끔하게 잘 정리하여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더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사악한 악이 나름 유능하게 정의를 피해가다가 피할 수 없는 정의를 만났을 때의 카타르시스를 범죄도시 2는 잘 정리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재밌는 영화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비단 범죄도시 2뿐만이 아니라, 최근 한국식 장르영화라 할 수 있는 다른 영화들에서도 보여지는 특징들이다. 각자 영화가 추구하는 장르 개념들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거기에 자신의 색체라고 할 수 있는 조미료들을 섞어서 장르의 소재를 더 두드러지게 만드는 것이다. 한국식 케이퍼물이라 할 수 있는 도둑들이나 꾼 같은 작품을 보면 도둑질이나 사기의 계획, 그 밑에 깔려있는 인물들의 복잡한 관계,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마지막 결론으로 이어지는지들에 대한 분명한 공식들이 정해져 있다. 여기에 꾼은 믿을 수 없는 주인공과 사악한 검사 조력자, 그리고 유명했던 사기 사건에 모티브를 두고 이야기를 전개했고, 도둑들은 중화 문화권과 한국을 오가면서 '국제적인 스케일'로 이야기를 넓혔다. 각각 개성들이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장르 영화에서 기대할만한 재밌는 요소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 영화들은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장르적인 특성들과 개성에도 불구하고, 이들 영화에는 다른 세계 장르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끈적함'이 존재한다. 한국식 좀비 장르 영화의 한 획을 그은 부산행의 예를 보자:열차 칸을 통과하기 위해서 주인공 일행이 트로트 음악을 배경으로 좀비와 몸싸움을 벌이며 싸우는 장면은 여타 좀비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좀비 영화에서 고어의 질척거리는 끈적함이나 축축함과 다른 부산행의 질감은 마치 습기찬 곳에서 살과 물체가 쩍쩍 들러붙는듯한 불쾌함에 가깝다. 마치 살과 물체가 하나가 되는 듯한 묘한 끈적함과 페이소스가 한국식 장르 영화의 질감에 묻어나오는데, 이러한 장르적 특수성 때문에 한국 장르 영화들은 세계 영화계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였다. 

한국 영화의 장르적 특수성들은 2000년대 초반의 장르 영화를 만들던 거장들의 영향력이 크다:박찬욱, 봉준호, 나홍진 등과 같은 지금은 세계 영화계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감독들이 2000년대 초반 감독 특성과 대중성이 같이 섞인 영화를 만들었다. 그 중에 가장 큰 획을 그은 것은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이다:과거로의 회귀, 사회를 꿰뚫어 보는 통찰, 장르적 긴장감, 한국 사회의 독특한 분위기들이 그 영화에 묻어있었다. 한국형 블록버스터 100만 관객 시대를 열었던 쉬리와 같은 영화들이 몇년전에 나왔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 궤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이는 CJ나 대기업들이 기존 충무로 자본과 다른 길을 걷기 위해서 새로운 감독들과 소재에 기회를 준 것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한국 영화의 장르적 완숙도는 2000년대 초반의 거장 감독들의 실험과 성공, 그 실험을 베이스로 하여서 어떻게 하면 장르적인 재미를 줄 수 있는가에 대한 탐구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한 소재의 자가복제(물론 이런 영화들도 있지만)에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새로운 변주를 진행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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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명작의 조건은 마지막화에 조지는 거라고!"

-호에로 펜 中

 

우리는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것이 일상생활에서 좋은 습관이 아니라고 배운다:사람이 질문을 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무언가에 대한 해답을 듣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다시 질문으로 이어나가는 것은 바람직한 소통 방식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창작물들, 특히 장기연재작에서 하나의 사건과 질문이 다른 질문으로 이어지며,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 경우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어째서 그런것일까? 장기연재물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극에 집중하게끔 만들어야 극을 유지해나갈 수 있다. 하나의 질문이 하나의 대답으로 일대일 대응이 된다면, 모든 극과 갈등, 의문은 마무리되고 더이상 이야기는 진행될 여지가 생기지 않는다. 그렇기에 연재, 방영되는 상영작들에서 질문은 계속해서 질문을 만들어야 하고, 그래야만 사람들은 그것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극의 전체 구조를 심각하게 무너뜨릴 소지가 있다. 우리가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지 말라 라는 격언을 배우는 것을 생각해보자. 질문을 통해서 우리가 구하고자 하는 것은 답이다. 질문에 새로운 질문이 등장하는 것은 이야기의 크기를 키우고, 사람들의 관심과 흥미를 유발하여 계속 극에 몰입하게 하는 동력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동시에 답 없은 질문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극이 한순간에 무너질 가능성도 같이 커진다. 위 호에로 펜의 대사처럼, '마지막에 조져버리는 것'은 그러한 질문들이 쌓이고 쌓여서 무너질 때, 답변없이 작가가 극에서 도망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호에로 펜이 이야기한 '마지막에 극적으로 조져버리는' 케이스는 생각외로 적다. 샤먼킹 처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프린세스 하오 같은 말도 안되는 엔딩을 내고 도망친 뒤에, 다시 졸렬하게 돌아와서 재연재를 하는 그런 작품은 창작물 역사를 통털어 봐도 그렇게 많지 않다. 오히려 '마지막에 극적으로 조져버리고 튀는' 케이스보다도 '천천히 추하게 지저분해지며 망하는' 케이스가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엑스파일의 예로 들어보자: 엑스파일은 외계인이 2012년 지구를 식민지화 하고 인류를 노예화 한다는 거대한 음모가 메인 플롯으로 정해놓고, 그에 맞춰서 큰 이야기를 전개했었다. 하지만 인기가 식지않고, 계속해서 드라마가 계속되면서 작가들은 점점 거대해지는 이야기에 끝을 내지 못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질문과 이야기를 붙여나가서 이야기의 몸집을 불려나갔다. 그 결과, 실제 외계인 음모가 실현되는 2012년이 도래하고, 스컬리와 멀더의 자식이 생기고, 주요 악역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끝을 맺지 못하고 어중간한 상태에서 제작이 중단되어 버렸다.

결국 극이 무수히 많은 질문들을 꼬리에 꼬리를 물어 던지더라도, 그 질문들은 이미 답을 내놓은 상태에서 짜임새 있게 진행을 해야 이런 상황에 봉착하지 않는다. 극단적으로는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전개들에 대한 질문과 답 쌍을 편집증적으로 정해놓고 진행한 진격의 거인 같은 작품이 있지만, 여기서 간략하게 다룰 작품은 용과 같이 7:빛과 어둠의 행방이다. 처음 전혀 이야기와 관련없어 보이는 용과 같이 7은 장장 2시간 가까이에 걸친 오프닝 시퀸스 이후 본격적인 게임으로 이어진다. 파이널 판타지 13 같이 배경 설정을 길게 풀어놓는 타입의 서사라 할 수 있는데,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긴 오프닝 시퀸스가 생각외로 사람의 관심을 끈다는데 있다.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은 과거 요코하마의 이야기 - 과거 감옥에 들어가기 전 카스가 이치반의 이야기 - 감옥에 들어가고 나서 배신당한 카스가 이치반 - 카스가 이치반이 자신의 두목을 찾아가 대면하는 점 - 배신할거 같지 않은 두목이 자신을 배신하는 사건 - 갑자기 요코하마에 떨어짐 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이야기들이 폭풍같이 몰아치면서 플레이어들에게 '다음에 무슨일이 일어날까?' 라는 궁금증을 계속 들게 만든다.

하지만 용과 같이 7이 좋은 서사를 보여주는 게임인 이유는 그러한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에 적절한 답들을 다 제공한다는 것이다:어째서 첫 과거 요코하마 이야기가 맨 앞에 배치되었는가? 어째서 두목은 카스가 이치반을 배신했는가? 어째서 눈을 떴는데 카무로쵸에서 요코하마로 갔는가? 놀랍게도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모든 질문들에 게임은 적절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고, 그것이 질문과 대답이 쌍으로 맞물려 문제 해결/질문 제시가 되면서 게임에 집중할 수 있는 주요한 동력이 된다.

결국 핵심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더라도, 그 끝에는 모든 것에 대한 대답을 제시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질문과 대답은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하게 던져져야 한다. 용과 같이 7이 소프 드라마 관점에서 좋은 구성을 보여주었던 것은 계속되는 질문과 대답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훌륭한 완급을 보여준다는 점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질문과 대답의 쌍들이 구조화 되어서 끝에 이루어지는 결론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납득 가능하게 다가왔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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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 약혼자가 아닌 여자는 뭐라고 불렀소? 하워드?
- 아뇨, 약혼자가 아닌 여자는 하워드라고 부르지 않고...
  아내가 아닌 여자가 하워드라고 부르지 않아요
  제 약혼자가 아닌 여자는 제 아내도 아니죠
  제 아내가 아닌 약혼자는 스티브라고 부르지 않고...
  하워드라고 부르죠 아시겠어요?

- What's Up Doc?, 1972

하워드 혹스의 걸작 코미디 베이비 길들이기는 현재의 관점에서 봐도 광기넘치는 코미디 영화다:범생이 샌님이 지금식으로 이야기하면 천연계라 할 수 있는 여자의 페이스에 휩쓸려서 자신이 원치않는 상황을 마주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과 전혀 맞지 않는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의 베이비 길들이기는 당시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지금에서는 코미디의 장르에 큰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분류된다. 베이비 길들이기의 전위성은 각본과 펀치라인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계속해서 휘몰아친다는데 있다. 그리고 그렇게 휘몰아치는 대사와 상황이 물흐르듯이 이어진다는 점에서 베이비 길들이기는 각본이 대단히 훌륭하게 짜여진 작품이다.  

 

베이비 길들이기에서 코미디의 핵심은 바로 '이어지지 않는 것들이 이어지는 것'에 있다. 우선 영화의 제목에 등장하는 베이비는 길들여진 '표범'의 이름이다. 시작부터 길들여진 애완동물과 표범이라는 두가지 어울리지 않는 개념을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영화의 코미디 컨셉은 이어지지 않는 것들이 서로 이어지면서 생기는 오해와 어색함에서 생기는 웃음에 기반한다. 이러한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높은 위치에 놓여있는 것들(권위 있는 존재나 존경 받는 존재 같은)이 낮은 위치로 떨어지는 수직적인 낙차에서 발생되는 웃음이 아닌 대등한 위치에 놓여있거나 서로 다른 개념을 연결짓는 것인데, 영화는 서로 맞지 않는 어색한 것들의 연결을 넘어서 상반된 개념을 연결시키는 것까지 능숙하게 연결 짓고, 속도감 있게 다루면서 영화의 재미를 더한다.

 

이것을 속도감 있게 재현할 수 있는 동력이 되는 것은 바로 관계대명사이다. 이것과 저것, 그것으로 구성되어있는 관계 대명사는 사물의 실제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발화자의 거리에 따라서 발화 대상을 편리하게 부르기 위해서 존재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는데, 베이비 길들이기는 대화하는 쌍방의 상황이 전혀 다르고 그 거리와 지칭 대상이 완전히 다른 상황을 연속해서 설정함으로 능숙하게 오해를 살만한 상황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극의 중간에 살인 표범과 애완용 표범이 둘이 동시에 등장해서 서로 오해를 사는 상황을 만들어내고, 더 나아가서 여주인공이 살인 표범을 베이비라 착각하고 실제 포획해서 경찰서로 끌고 들어오는 장면 등은 영화 내내 오해에 오해를 쌓아올리며 만들어낸 훌륭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혼란 속의 중심에 서있는 것이 바로 샌님 같은 남주인공과 자유로운 여주인공이다:베이비 길들이기에서는 건장한 이미지인 캐리 그랜트가 지적인 남주인공 박사의 이미지를 연기하였는데, 이러한 불균형한 모습과 함께 그 어떤 상황에서도 예의범절을 지키는 모습에서 영화가 유지하는 '오해와 어울리지 않는 것'의 맥락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남주인공이 그런 예의범절을 지키는 모습을 통해서 자칫 무례하거나 폭력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에서 선을 유지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여주인공은 남주인공과 대척되어 온갖 광기와 카오스를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맡는데, 남주인공과 상극인 여주인공은 상극이라 할 수 있지만 영화는 이 상극이 자석의 S와 N극 처럼 들러붙는 과정을 쉴세없이 주고받는 펀치 라인의 빠른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여냄으로 로맨틱 코미디 장르로서 성립한다.

 

그리고 피터 보그다노비치의 왓츠 업 닥은 베이비 길들이기의 리메이크 작이다. 리메이크 작인만큼 큰 개념이나 매력적인 부분들을 따오기는 했지만, 흥미롭게도 왓츠 업 닥은 시대가 흐르면서 바뀐 부분과 새로운 장르적 특성들을 함께 녹여낸 작품이었기에 리메이크 이상의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우선 왓츠 업 닥에서 눈여겨 봐야할 점은 작품 자체가 워너브라더스에서 만든 1930년부터 만들어온 단편 만화영화인 '루니 툰'의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일 것이다:애시당초에 제목 자체가 루니 툰의 간판 케릭터인 벅스 버니의 입 버릇(뭔 일이쇼What's Up, Doc?)에서 따온 제목인 거에서부터 시작해서, 여주인공인 바바라 스트라이샌드의 이미지가 묘하게 롤라 버니를 연상케 한다는 점, 극 중 내에 오마주 형태로 루니툰이 영상이 들어갔다는 점들이 그러하다.

 

 

 

루니 툰의 코미디 스타일은 기본적으로 베이비 길들이기 보다 좀 더 '포괄적'이라 할 수 있는데, 루니 툰은 1920~30년대 유명한 코미디언이었던 막스 브라더스가 출연했던 고전 코미디 영화에 베이스를 두고 있고 이 스타일은 단순히 관계 대명사의 오해 외에도 다양한 코미디 요소들을 섞고 있기 때문이다. 막스 브라더스의 영화는 기본적으로 비상식이 상식처럼 묘사되는 점이나 강박적으로 어떤 행동 하나에 집착하여서 영화 속 인물들을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몰아넣는 점에서 웃음을 유발한다. 루니 툰의 코미디 스타일에서 드러나는 폭력성이나 상대 케릭터를 능숙하게 엿먹이는 각본과 펀치라인 등은 전반적으로 막스 브라더스의 코미디 영화 스타일에 기반하고 있다. 다만, 강박적으로 하나의 상황에 집착하는 모습은 루니 툰과 베이비 길들이기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부분이긴 하고, 왓츠 업 닥에서는 양쪽의 전통과 특징들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왓츠 업 닥이 리메이크를 하면서 베이비 길들이기와 달라진 점은 크게 두가지다:첫번째는 과격해진 슬랩스틱과 스턴트들이다. 베이비 길들이기가 30년대 영화에서 보여주는 슬랩스틱이라는 점에서 고전적이긴 하지만 동시에 '점잖은' 모습을 보여주긴 한다. 하지만 왓츠 업 닥은 루니 툰이 1970년대까지 이어지면서 보여준 과격한 슬랩스틱이나 액션 장면들을 영화에 두 장면으로 녹여내는데, 첫번째는 리셉션이 끝나고 난 다음에 일어나는 일련의 슬랩스틱들, 그리고 두번째는 대단원에서 서로가 원하는 가방을 쫒아 추격전을 벌이는 슬랩스틱 시퀸스가 있다. 무심하게 컷을 잡고 그 속에서 과격한 슬랩스틱을 이어가는 과정은 감독인 피터 보그다노비치의 특징과 루니툰의 특징이 함께 들어간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두번째는 성에 대한 묘사일 것이다:기존의 베이비 길들이기에서 보여주는 것과 달리 왓츠 업 닥은 성에 대해서 상당히 자유롭게 보여주는데, 바바라 스트라이샌드의 목욕 장면이나 피아노 위에서 키스하는 장면하는 등은 시대가 변화했음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베이비 길들이기와 다르게 여주인공이 성에 대한 자유로운 묘사를 함으로 단순히 말괄량이나 천연임을 넘어서 그것이 성적인 에너지와 자유분방함, 그리고 더 나아가서 새로운 시대의 인물형(다양한 학문을 전공하면서 박학다식한 모습을 보여주는)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왓츠 업 닥은 단순한 리메이크를 넘어선 리메이크라 할 수 있다. 원작의 쉴세없는 상황 변화와 펀치라인을 유지하면서, 변화한 시대상과 영화가 발전하면서 쌓아올려진 장르적 특징들, 무엇보다도 그것을 하나로 통제하고 자신의 색체를 넣는 감독의 능력까지 모두가 반영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본다면 양쪽 모두 함께 보기를 강력하게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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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고어Gore란 무엇인가. 고어란 영어의 오래된 표현 중, 엉겨붙은 피, 선혈을 표현하는 단어로부터 유래되었다. 피의 카니발 이후, 고어라는 장르는 B급 호러영화에서 일반 영화 전반으로 퍼져나갔다. 이제 인체 훼손과 파괴는 특정 서브컬처의 점유물은 아니다. 인간이라는 존엄성을 가진 인격체가 폭력이라는 프로세스를 통해 피와 근육, 뼈의 파편으로 분해되고 쪼게지는 그 모독의 미학은 대중에게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폭력이 존재하는 곳에는 그 증거물로 고어가 존재할 것이고, 대중매체가 폭력을 다룬다면 고어의 표현방법론은 계속해서 발전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좀 더 나아가보자:인간의 인격을 해체하고 모독하는데 있어서 폭력이란 '물리적'인 방법만이 존재하는 것일까. 한 인간이 인간 미만의 존재로 모독당하는 과정, 더 나아가서 그 과정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불쾌함이란 단지 물리적 고통을 넘어서, 사회 경제적인 빈곤이나 정신적인 질병, 인간과의 관계 등에서 다양하게 드러날 수 있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고어의 미학 범주에 넣진 않겠지만, 이러한 모독과 부패의 과정 역시 광의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고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광의의 고어, 인격체가 주변 환경에 의해서 찌그러 들고 부패하는 과정은 대중적이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폭력과 그 표현 방법론으로 고어는 일종의 '해방감'을 선사한다:현실에서 이루어지기 힘든 비현실적인 욕망(폭력적 욕망)의 실현을 위해 고어의 미학은 발전했다. 터져나가는 머리, 흘러나온 내장, 박살난 신체들은 인간의 어두운 욕망들을 충족하기 위한 미학으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한 인간이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박살나는 과정에서 대중이 일반적인 고어의 미학에서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없다. 이러한 모독과 파괴의 과정은 비일상적인 축제라고 이야기하기에는 현실의 재현에 가깝기 때문이다. 가난, 정신병, 사회적 차별 등은 여전히 현실이다. 그런 실제의 모독을 재현하는 것은 재미와 해방과 거리가 멀다. 

 

물론 이런 인간 모독의 과정을 다루는 작품들이 존재하기는 한다. 아트하우스 계열의 영화들이 그렇고, 여기서 간략하게 다루고자 하는 클린 쉐이븐 같은 작품들이 그러하다. 흥미롭게도 아트하우스 영화에서 사회적인 차별이나 정신병 같은 소재들이 벗어나고자 하는, 벡터가 있는 작품이었다면 클린 쉐이븐 같은 작품들은 가난과 정신병과 같은 것들이 '날 것 그 자체'로 묘사된다는 점에서 특징적인 작품이다.

 

클린 쉐이븐은 망가져버리고 낮게 짖눌려버린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다:클린 쉐이븐의 주인공은 조현병을 앓는 환자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입양된 자신의 딸을 찾기 위해서 머나먼 여정을 떠난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은 일반적인 맬로 드라마 같진 않다. 주인공은 계속해서 환청을 듣고, 편집증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가리기 위해 유리를 가리거나 뒤집으며, 더 나아가서는 실제 자신이 했는지 안했는지 조차 불분명한 상황들(아이를 살해하는 장면이라던가)의 환상에 시달린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서 영화는 밑바닥 삶을 메마른 시선으로 바라본다.

 

클린 쉐이븐의 미학은 쓰레기의 미학이다. 그리고 그 쓰레기들이란 인간 인격의 파괴된 잔여물, 광범위한 의미의 고어라 할 수 있다. 영화 속 세계는 주인공의 머릿속 마냥 난잡하고 무가치하며 흩어져있다. 그가 훔친 차, 도서관에서 흐트려놓은 책들, 잠시 들렀던 그의 부모의 집과 싸구려 모텔 등처럼 그의 주변 모든 것들은 지저분하게 눌어붙은 자국마냥 빛을 바라고 어지럽게 흐트러져있다. 이러한 어지럽고 지저분한 광경들은 인물들이 처해 있는 광경들이 그들이 어찌할 수 없는 환경에 놓여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는 여기에 어떤 감상조차 담지 않고 메마른 감수성으로 보여줌으로 마치 파괴되어버린 인간들의 모든걸 마치 로드킬 당한 고양이의 시체마냥 무덤덤하게 드러낸다.

 

흥미로운 점은 클린 쉐이븐에서 육체의 파괴와 정신의 파괴가 서로 교차되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일 것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몸에 도청장치가 삽입되었다고 믿고, 스스로 머리 가죽을 뜯어내거나 손톱을 파내고 그 밑에 있는 살점을 칼로 후벼 판다. 상당히 고통스러운 이 장면에서 보여주는 주인공의 태도는 흥미로운데, 자신의 조현병적인 집착에 그 행위가 주는 고통에 대해서 어떠한 반응을 하지도 않은채 차갑고 덤덤한 시선으로 자신의 행위를 응시한다. 자신을 파괴하는 과정, 자신의 신체조차 조현병적인 망상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쓰레기처럼 다룬다는 점에서 그의 정신은 파괴되고 부패되어 분해되어간다.

 

하지만 그런 그가 딸 앞에서 어떻게든 정상임을 유지하려 하는 모습을 영화는 극적으로 다루지 않지만, 동시에 영화 내내 보여준 부패되고 망가져버린 그의 삶과 정신 속에서 어떻게든 딸 앞에서 논리와 이성을 지키고 딸을 되찾으려 하는 시도 자체는 영화의 미학에 대비되어 더 극명하게 두드러진다. 하지만 바로 그 다음, 딸을 죽였다고 오해한 형사에 의해서 버려지는 쓰레기처럼 죽어버린다.

 

클린 쉐이븐은 인간과 쓰레기가 같이 뒹굴면서 그것이 결국은 '신뢰할 수 없는 주인공=쓰레기=박살난 인격'이라는 미학을 완성시키지만, 그러한 미학에도 불구하고 딸을 찾아나서는 그 과정에서 일말의 가능성과 그것이 부정되는 순간을 메마르게 다뤄낸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어떤 드라마보다도 특이한 감수성이 충만한 영화라 할 수 있는데, 쓰레기와 같은 풍경과 메마른 감상주의 사이에서 줄다리기 하면서 불쾌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묘한 인상을 준다. 마지막 딸이 아버지가 죽은 과정을 모두 목격하고도 죽어버린 아버지를 추억하며 무전을 하는 장면은 기분 나쁘게 메마른 영화에 남겨진 오아시스 같은 장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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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예르카가 정말 원한 건 움직이는 그들을 보는 거였다.
그래서, 그는 지구 중심으로 가서 태고의 괴물들을 만나는 쥘 베른 (Jules Verne)의 책을 읽고
우리도 똑같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쥘 베른 책 속의 거의 모든 게 실제로 이루어졌기에 우린 가기로 결심했다.

- 태초로의 여행

 

Science Fiction, 과학 소설이나 공상과학으로 불려지는 이 용어는 과학이 만들어내는 가능성에 주목하여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이 장르는 오랜 전통을 자랑한다. 그도 그럴것이 과학이라고 하는 가능성의 영역이 인간이 꿈꾸던 영역들을 하나 둘 실현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초창기 SF 작가였던 쥘 베른이 썼던 소설들을 보자. 쥘 베른이 썼던 소설들 중에서 상당수는 이제 현실로 이루어졌다:달으로의 여행(달나라 탐험)이나 해저로의 여행(해저 2만리), 80일만에 세계를 일주한다던가(80일간의 세계 일주) 등의 다양한 이야기들은 이미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왔다. 이것들은 우리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손이 닿지 않는 영역에 대한 동경이 과학을 통해 언젠가 이루어질 수 있는 염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의 반증일 것이다.

 

그렇기에 과학은, 어떤 의미에서 현대 인류에게 '낭만'으로 다가왔다. 물론, 시대가 바뀌면서 과학이 불러올 재앙과 그것을 휘두르는 인류의 문제 등에 대한 다양한 문제 제기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과학이 만들어낼 미래에 대한 희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과학은 인류가 갖고 있던 '근원적인 호기심'에 대한 발현과 동경이라는 점에서 과학에 대한 인류의 낭만은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어째서 새들은 날 수 있는가? 새들이 날 수 있는 원리를 이해하면 인류도 날 수 있을까? 어째서 태양은 불타오르는가? 우리도 그런 태양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현실을 벗어나,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것에 대해 몽상을 하는 것이야 말로 과학을 시작케 만든 근원이었다. 그렇기에 다양한 면모를 가지게 된 지금에 와서도 과학은 '낭만'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카렐 제만의 영화들은 그런 의미에서 '낭만'으로써의 과학을 다루고 있는 SF 영화라 할 수 있다:과학이 만들어낸 무서운 무기를 다루고 있는 영화(죽음의 발명품)에서조차, 인류는 과학에 대한 희망찬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카렐 제만의 영화들은 단순히 과학이 가져다 줄 미래를 다루고 있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SF 영화들과 다르다 할 수 있다. 죽음의 발명품은 19세기를,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은 근대 귀족사회를, 태초로의 여행은 현대의 아이들이 '과거의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에서 그의 SF 영화 관점은 '과거'에 베이스를 둔다.

 

카렐 제만이 낭만적인 SF를 다루는데 있어서, 주요한 모티브는 쥘 베른이다.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작품을 만들기도 했지만(죽음의 발명품), 카렐 제만이 쥘 베른의 소설들을 인용하는 주요한 모티브는 그것이 '과거의 SF'였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상상은 지금 현실이 되었다. 그렇다면 제만의 영화에서 SF는 더이상 과학이 만들어낼 가능성이 아닌, 일종의 확정된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카렐 제만의 영화들은 어딘가 우스꽝 스럽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스타일이 구현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카렐 제만 영화에서의 세트와 애니메이션 스타일일 것이다:19세기 사람들이 20세기와 21세기를 상상하면서 만들어낸 동판화 스타일의 일러스트들을 기반으로 카렐 제만은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내는데, 그 세밀함과 동시에 시대착오적인 부분들은 관객에게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쥘 베른으로 대표되는 과거의 SF를 통해서 카렐 제만은 과학이 가져다 줄 미래적인 가능성이 아닌, 과거인이 갖고 있는 과학에 대한 낭만과 자세가 현재가 맞닿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리고 그의 영화 속에서 과학의 핵심적인 속성은 여전히 과거나 현재나 맞닿아 있다. 태초로의 여행에서 아이들은 일지를 기록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탐사는 영광이나 모험이 아닌, 과학적인 자세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그들이 태초의 삼엽충을 목격하기 위해서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을 했던 것처럼, 과학적인 자세는 호기심과 그 호기심을 인류 모두에게 공유하기 위해서 정확한 측정과 공유된 명칭을 부르는 것, 이를 통해서 우리만의 지식을 넘어서 인류 전체가 함께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지는 것이 과학의 본질이라 그는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들 중 허풍선이 남작은 SF의 낭만을 가장 훌륭하게 체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의 시작에서 우주 비행사는 달에 도착해서 거기 먼저 도착한 근대의 시인들과 모험가들을 만난다. 그리고 모험가 허풍선이 남작은 그에게 과거의 모험들을 체험하게 한다. 술탄의 왕궁, 생선의 뱃속, 요새 등등을 탐험하면서 허풍선이 남작이 보여주는 모험들은 과거 낭만 소설에서 보여준 허풍 넘치는 모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공주를 가운데 두고 우주 비행사와 허풍선이 남작 둘이서 삼각관계를 구성하는 모습도 그러하다.

 

하지만 우주비행사와 삼각관계로 대립각을 세우던 허풍선이 남작도 결국 그를 인정하고 그가 위험에 처할 때, 그를 도와준다. 허풍선이 남작(근대의 낭만소설)도 우주 비행사가 꿈꾸던 세계(SF의 세계)가 '낭만'이라는 측면에서 자신과 맞닿아있음을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근대에서 현대로, 현대에서 다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속에서 서로 다른 삶을 살았지만 '낭만'이라는 꿈 하나로 이어진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은 SF와 과학이 새로운 시대의 낭만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달은 아직까지 시인들과 몽상가 들의 것이고,
과감한 공상가들과 흰 가발의 모험가들 것이지.
긴 코트 입은 공상가들과 최신 소설에 나오는 이상한 헬멧을 쓴 자들의 것
그리고, 물론 연인들의 것!

그들에게 달은 언제나 가장 사랑스러웠지!
그리하여, 난 유쾌하게 모자를 벗어 던지네 별들에게 날아 가도록!

우리를 대신해, 모든 용감한 친구들을 맞이하라고 
그들은 이미 우주의 반기는 품속으로 길을 떠났으니!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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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잭 스나이더가 만든 새벽의 저주는 훌륭한 오락영화였다. 1978년 동명의 전설적인 영화를 리메이크한(국내에서는 시체들의 새벽 - 새벽의 저주로 이름이 달라지긴 했다) 이 영화는 달리는 좀비와 생존, 좀비와의 근접하여 싸우는 야만적인 총싸움, 대중화된 고어까지. 20년이 다되어가는 지금에 와서도 대중문화와 좀비를 논한다 하면 새벽의 저주를 빼놓고 이야기를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조지 로메로가 이 영화를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유명한 사실이다(링크) 그리고 잭 스나이더 판의 리메이크 판에 대해서 좋지 않게 평가하는 평론이나 칼럼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사례 링크)

 

이러한 비판적 평론들의 근저에는 시체들의 새벽이 갖고 있는 특수성이 내재되어 있다. 물론 새벽의 저주와 시체들의 새벽에서 공통적인 부분들은 존재한다:좀비들과 쇼핑몰, 좀비보다 더 무서운 인간들 내부의 갈등. 새벽의 저주는 시체들의 새벽 원판에서 주요한 모티브들에 집중하여 영화를 재구성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주요 모티브들을 하나로 엮는 영화의 시선이 새벽의 저주에서는 완전히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대체 잭 스나이더가 원작의 무엇을 보고 리메이크를 했는지 모르겠다' 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새벽의 저주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지 로메로라는 감독을 이야기해야할 것이다:전설적인 좀비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만든 감독으로 알려져있긴 하지만, 로메로의 필모그래피는 좀비 3부작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놀이공원이나 마틴 같은 영화를 만들기도 한 조지 로메로는 아마도 미국 영화감독 중에서 '분명하게' 좌파적이라 이야기할 수 있는 감독이었다. 놀이공원 자체가 노인 복지와 계급 사회, 착취에 대해서 정면으로 비판한 작품이었고, 마틴은 미국 중산층의 교외 문화와 삶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작품이었다. 잘 알려진 좀비 3부작 역시 좀비와 인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시체들의 낮이나, 인종 문제의 우화로도 읽힐 수 있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엔딩도 그러한 요소들이 산재했다.

 

그리고 시체들의 새벽의 테마는 '죽어버린 미국 사회'였다. 영화의 시작, 전세계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되살아나는 일들이 일어나고, 주인공은 그 상황을 방송으로 정리하여 보도를 한다. 하지만 이런 중요한 사태를 보도를 하는 와중에 사람들은 세상이 망했음을 직감하고 하나 둘 자신의 자리에서 이탈을 하고 주인공 역시 도로교통국 소속인 연인과 함께 방송국을 버리고 도망친다. 영화의 시작점이 바로 의무의 방기인 셈이다. 그 다음 시퀸스는 더욱 더 노골적인데, 군대가 건물로 진입하여 산자와 죽은자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죽여버리고, 거기서 다른 두 주인공들이 피로감을 느끼고 탈출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이것은 생존은 아니다:분명 이 시점까지 영화 속의 미국 사회와 정부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는 것, 이제 더이상 정상적으로 이 이후 살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이 직시하고 자신의 의무와 직무를 내던지는 것으로부터 영화가 시작하는 셈이다. 영화의 시작은 바로 '미국이라는 국가가 죽어가는 상황'이었던 셈이다.

 

위와 같은 점에서 시체들의 새벽의 시작은 몇몇 아포칼립스 장르에서 보여지는 무너지는 세계에서 아나키적인 자유와 능력에 따라 생존하는,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신자유주의적인 자유 가치'와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좀비랜드 같은 영화를 보자. 거기서 좀비 사태는 주인공들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일종의 해방구로 작용한다. 물론 이것만으로 좀비랜드가 신자유주의적인 가치를 옹호한다고 볼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얼마나 이러한 좀비 아포칼립스,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에서 신자유주의적 판타지가 깔려있는지를 반증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체들의 새벽에서 보여주는 죽어가는 세계 역시도 가치와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무너짐은 개인이 자유로운 세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헬기를 타고 지나가듯이 사람들은 무표정하게 지나가는 좀비들을 즐겁게 사냥한다. 하지만 동시에 쇼핑몰을 떠도는 좀비들이 실제 사람과 등치됨을 보여줌으로 좀비가 인간과 은연중에 다를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것들을 즐겁게 죽여버리는 인간은 무엇이 되는 것일까? 그리고 역으로 정부와 사회가 그렇게 좀비들을 죽여버리는 세계 자체를 등져버리고 도망치는 사람들은? 시체들의 새벽에서 보여주는 사회가 무너지는 것은 단순히 '좀비'라는 외적인 위협에 의해서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사회와 조직은 더이상 공공의 선과 가치를 지키지 못하고, 내재된 폭력성과 광기(초반 시퀸스의 경찰중 하나가 미쳐 날뛰며 아무 관계없는 민간인들을 사살하듯이)을 표출하며 스스로 망가져간다. 그리고 멀쩡한 사람들은 그러한 광기에 정면으로 맞서 마지막까지 싸우는 것이 아닌, 책임과 의무를 방기하고 멀리 도망칠 뿐이다. 말하자면 체제와 구조, 가치의 종말과 죽음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체들의 새벽은 해방구의 세계가 아니다. 모든 가치가 무너진 사회를 전제하고, 멀쩡한 사람들이 사회를 등지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 사람들이 죽어버린 소비 문화인 쇼핑몰에 갇혀버리는 이야기이기도 하다:헬기를 타고 도망치던 주인공 일행은 물자가 풍족하게 쌓여있는 쇼핑몰을 발견하고 점거한다. 흥미로운 점들은 좀비들이 마치 살아생전 쇼핑몰에서 쇼핑을 하듯이 쇼핑몰을 돌아다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회가 무너지고, 세상이 미쳐돌아가도 쇼핑몰에는 물건이 그득이 쌓여있고 소비자들(좀비들이지만)이 영원히 돌아다니고 있다는 점에서, 시체들의 새벽의 쇼핑몰은 생존을 위한 공간보다도 '죽어버린 자본주의 소비 사회 그 축소판'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생존자들이 캐나다로 도망가다가 쇼핑몰에 사로잡혀서 머무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제는 더이상 의미없는 물질들에 사로잡혀 있다가 다른 생존자들과 무의미한 물질들(폭주족들이 쇼핑몰을 강탈할 때, 마치 '블랙 프라이데이' 할인을 두고 경쟁하는 소비자들처럼 보여준 것은 그러한 부분을 잘 드러낸다)을 두고 싸우다가 공멸하는 것은 소비사회에 대한 음울한 경종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시체들의 새벽은 반 체제, 반 구조적인 동시에 더 나아가서 '반 장르적'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좀비 영화들이 좀비들에 맞서서 싸우고, 살아남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데 반해 시체들의 새벽은 죽어버린 물질들에 집착하다 다른 생존자들과 싸우다 공멸하는 쪽에 가깝기 때문이다. 물론 이후 영화들이 후자의 요소(생존자들과의 자멸적인 경쟁)에 초점을 맞추기는 했지만, 이후 영화들이 생존이라는 중요한 요소를 두고 경쟁한 것과 시체들의 새벽이 보여주는 결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시체들의 새벽은 어떤 의미에서 장르의 시조였지만 동시에 반 체제적이고 반 장르적인 영화였다. 이는 로메로의 영화 세계와 크게 맞닿아있다. 그의 다른 영화인 마틴을 보자. 거기서 주인공은 흡혈귀이지만 동시에 흡혈귀가 아니다. 처음에는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의 피만 마실 수 있었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그 피를 마시는 규칙은 무너지고 주인공은 혼란을 경험한다. 황폐하고 늙어버린 교외를 배경으로 중산층 문화에 대해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조지 로메로는 통상적인 관념을 거부하는 사람이었다. 이는 그가 영화에서 좀비를 다루는 방법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그들은 뻣뻣하기는 하지만 생전의 삶의 기억에 매달려 계속해서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있는 존재들이다. 어딘가 우스꽝스럽게 분장한 그들은 루치오 풀치의 좀비(썩어문드러진 존재들)들에 비해서 덜 '좀비'스럽지만, 그 덕분에 다양한 인종과 계급의 사람들이 나온다는 점에서 호러 영화에서 좀비의 모티브인 '대중'에 더 가깝다. 

 

좀비를 '우리와 닮았다, 아니 우리일지도 모른다'라는 발상은 좀비 영화의 '죽여도 되는 존재'와 완전히 상반된 개념이다. 조지 로메로는 쇼핑몰과 그곳을 배회하는 좀비들을 통해서 소비사회 그 자체를 풍자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대중을 몰아내고 그것을 차지하는 주인공들과, 아무런 의미없는 사치재와 물질들을 두고 싸우는 폭주족들의 모습을 통해서 세상이 망해도 여전히 물질에 얽메여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판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로메로가 이후 좀비 영화를 두고 좋지 않게 본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링크) 좀비들은 타자화되었지만, 동시에 '우리들 모습' 그 자체였다. 좀비들을 쉽게 죽여버리는 자유를 논하는 것은 역으로 우리가 '타자를 어떻게 보는가'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로메로는 이러한 명제를 정확히 간파하였고, 그런 통찰력은 시체들의 새벽에 전반적으로 잘 녹아있다.(이러한 통찰력에 대한 오마주는 숀 오브 더 데드에서 잘 드러나는데 

 

결론을 내리자면, 시체들의 새벽은 전설 그 자체인 동시에 장르를 넘어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장르적인 모티브인 동시에 장르가 가질 수 있는 정치적 위험성과 그에 대한 통찰력도 함께 들어 있다. 시간이 된다면 꼭 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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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SF, 과학 소설Science Fiction이라는 장르적 특성을 무엇을 잡아야 하나, 라고 했을 때 여러가지 기준이 나올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 가정하였을 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라고 할 수 있다. 고질라 싱귤러 포인트(정확하게는 특이점이라 하는게 적절하겠지만)는 그러한 장르적 특성에 잘 부합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인 특이점, 물리법칙을 넘어선 물질들, 존재하지 않는 동물들이 실존한다고 하면, 그것을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파국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기본적으로 고질라:싱귤러 포인트의 이야기는 시간 여행과 고차원 존재를 상정했을 때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룬다. 흥미로운 점은 기존의 괴수물의 장르를 뒤틀어서, 생태계의 새로운 존재가 등장하여 문명을 부수는 기존의 괴수물이 아닌 세계의 법칙이 뒤틀리고 다양한 아젠다를 가진 고차원의 존재들(괴수)이 경쟁하여 우주 자체가 멈추는 파국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러한 고차원의 존재들이 결국 갈등과 파괴를 이루어내는 것과 별개로 윤이 만들어낸 AI들이 시간의 루프(과거로 향한 계산, 그리고 수많은 AI로 분화되고 하나로 합의되는 모습 등)을 통해서 특이점의 파국을 막아냄으로 인간과 자연 흐름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으로 끝을 낸다.

 

이러한 전개를 작품은 전제로부터 논리적이고 연역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취한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논리를 연역적으로 세우는 것이 가능할까? 이에 대해 작품은 방대한 양의 지식과 정보를 교차해서 다른 영역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귀납적으로 추론해낸다. 컴퓨터 공학, AI,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의 다양한 분야의 소재들이 쉼없이 등장하고, 그것을 엮어서 그렇다면 존재하지 않는 영역에서는 이렇게 동작한다는 것을 상정한다고 보면 어떨까? 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다. 상당 수의 SF 작품들이 하나의 대원칙에 근거해서 많은 것들을 설명하는 것과 비교해서 본다면 지적인 만족감이 가득한 작품이다.

 

이는 각본가 엔조 토우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그가 쓴 소설 중에 죽은 자의 제국이란 작품이 있다. 이토 케이카쿠가 죽은 이후, 그가 쓴 프롤로그와 생전에 남긴 시놉시스를 토대로 엔조 토우가 완성한 이 작품은 시체들로 산업혁명을 이루어낸 후, 세계가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리적인 흐름을 잘 구축한 작품이다. 이러한 흐름이 고질라 싱귤러 포인트에도 존재하며 SF적으로 재미를 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이 오히려 좀 아쉽게 다가오기도 하는데, 정보량이 풍부하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영상이라는 매체와 어울리지 않다는 느낌이 있다:극에서 다양한 트라비아들과 학문들을 연결하여 이야기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은 전작에서 보여준 흐름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소설이기 때문에 다양한 이야기를 찬찬히 시간을 들여서 소화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전개였다. 그러나 고질라 싱귤러 포인트는 20분, 13화라는 짧은 러닝 타임 내에서 이를 풀어내야 하는데, 극의 전개와 별개로 너무 많은 정보를 풀어내서 따라가기 힘든 부분들이 있다. 소설로 보았다면 괜찮을지도 모르겠지만, 영상으로 보기엔 너무 정보 밀도가 높은 작품이다.

 

결론적으로 고질라 싱귤러 포인트는 훌륭한 SF작품이지만, 안에 들은 정보량이 너무 많아서 모두가 즐겁게 보기에는 난이도가 높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작품 자체가 메카 고지라를 보여주며 뒷 이야기가 진행할만한 여지를 남겨주었기 때문에, 2기를 기대해볼만 하다. SF 작품을 좋아한다면, 보는 것을 고려해볼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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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그렇다면 그에게 정치는 무엇일까? 랑시에르는 “정치는 언제나 발생하는 일이 아니다. 실로 정치는 매우 적게 혹은 드물게 발생한다”(<불화>)고 말했다. 정치는 그저 존재하는 무언가가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던 ‘인간의 가장 탁월하고 고귀한 활동’ 같은 것도 아니다. 정치는 언제나 중단, 개입, 혹은 효력을 수반한다. 정치는 불일치이며, 무언가를 파열시키는 것이다. 체임버스는 “정치는 치안질서에 도전하고 방해하면서 그 질서를 파열시키거나 전치시키며, 어쩌면 결국에는 치안질서를 변화시키게 될지도 모른다. 이것이 정치가 수행하는 일의 전부”라고 말한다.

원문보기 :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900614.html

 

7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존 포드의 영화는 극도로 '반동적'이다. 그의 영화에는 공동체가 있고, 각각의 공동체에서 사람들이 수행하는 역할들이 있다. 공동체에서 노동하는 남자의 역할, 남성을 포옹하는 여성, 이들이 서로 화합하여 공동체를 구성한다. 그리고 그 공동체에서 서부는 공동체를 펼치기 위한 가능성이 공간이 된다. 이 모든 과정 자체가 미국의 이상향American Dream을 구현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 존 포드 영화의 이러한 경향성은 '반동적'이라 할 수 있다:이러한 미국의 이상향이란 이미 오래전 무너져버렸고(굳이 멀리 내려가지 않더라도 트럼프의 당선과 연결지어 생각해봐도 될 것이다), 공동체의 조화로운 삶이란 이상향은 커녕 이제 웃음거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존 포드의 영화가 지금까지 회자되고, 위대한 감독으로 칭송받는 이유는 이러한 반동적인 부분 때문만은 아니다. 70년대 뉴 웨이브 영화 감독 중 몇몇 감독들은 그들의 정치적 성향(좌파적이라 할 수 있는)에도 불구하고 존경하는 감독으로 존 포드를 꼽았다는 이야기는 꽤나 유명하다. 존 포드의 세계관(보수적 공동체)과 좌파적 지향성이란 전혀 맞닿아보이지 않지만, 존 포드의 영화를 좀 더 세부적으로 뜯어보면 정치적 성향을 막론하고 존 포드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존 포드의 영화에서 공동체는 이미 완성된 형태가 아니고 '만들어져가는 과정'에 놓여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공동체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넘어서야 하는 것들은 외부의 위험과 함께 공동체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어둠'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존 포드 영화의 통찰은 공동체 내부의 어둠을 들여다 보는 동시에 숭고한 가치와 믿음을 제시한다는 점에 기반한다. 존 포드의 영화에 자리잡은 공동체의 어둠은 언뜻언뜻 드러난다:수색자에서는 조카 딸이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영향을 받았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이야기하는 전직 기병대원이 등장하고,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에서는 어둠 속에서 비겁하게 무법자를 향해 총을 쏘는 주인공이 등장하며, 역마차에서는 약한 여성을 향해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려는 남성도 같이 등장한다. 조금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황색 리본에서는 아메리카 원주민들과의 전쟁을 막기 위해서 추장과 교류하고, 더 나아가서 아무도 죽지않게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도 이 사례에 들어갈 것이다. 순간이지만 이렇게 잊을 수 없는 광경을 통해서 존 포드는 공동체를 만들어나가는 과정 자체가 단순히 외압을 벗어나는 것만이 아닌 내부의 모순과 어둠을 극복하고 함께해야한다는 것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청년 링컨은 존 포드의 대표작으로 이런 통찰력이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가 선택하고 있는 시점이다:젊은 링컨은 남북전쟁 이전, 링컨이 초짜 변호사인 시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링컨의 가장 위대한 업적인 노예 해방선언과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업적을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위대한 업적에서 빗겨나서, 소박한 인간이 어째서 위대한 업적을 거둘 수 있게 되었는지, (존 포드가 생각하는)미국적인 가치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영화 청년 링컨에서 링컨은 위대한 리더가 아닌 '한량'의 이미지에 가깝다. 그는 마을 축제에 참여하여 파이 맛 컨테스트 심사자를 맡고, 줄다리기 대회에서 참여해서 마차 뒤에 끈을 달아 반칙을 쓰는가 하면, 사무실 창가에 앉아 다리를 꼬고 유대인 하프를 치기도 한다. 그의 모습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지도자의 거룩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링컨은 공동체에서 찾아볼 수 있는 흔한 사람, 그리고 모든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편한 사람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공동체의 어둠을 꿰뚫어보고 나름대로 그에 대처해 나간다:마을 축재 때, 사람들이 살인사건이 일어나자 전후 관계를 따지지 않고 용의자 형제를 린치하려 한다. 밝고 활기찼던 낮의 축제와 다르게 밤은 공동체의 히스테리와 집단 광기에 사로잡혀 있고, 용의자 형제와 군중 그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젊은 링컨 하나 뿐이다. 흥미롭게도 넉살맞게 군중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그의 모습은 공동체의 어둠을 정면으로 비판하지 않는다. 단지 그들의 히스테리를 풀어주고, 집으로 보내주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그들을 정면으로 비판하지 않되, 그들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것이다. 링컨은 공동체 내부의 문제를 공동체의 방법론(사람과의 유대, 관계론에 따라)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위태로운 방법론을 취하고, 이러한 방법론은 그를 영화 내내 여러번 시험에 들게 한다.

 

이러한 방법론에 대척되는 것은 법정에서 검사가 취하는 방법론일 것이다:그는 이기기 위해서 대중의 감정을 선동하고, 용의자 형제의 어머니를 감정적으로 학대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전적으로 그 공동체의 대다수 구성원과 유리되어 있는 입장을 고수한다. 이러한 것이 어떤 점에서 보았을 때는 영화가 엘리트와 사회 지배 계급에 대해서 취하고 있는 관점과 맞닿아있다 할 수 있다:마을의 축제를 보는 자리에서 동료 변호사는 다른 다수의 대중과 다르게 의자에 앉아서 축제를 관람한다. 그리고 링컨은 자연스럽게 그 의자 옆에 다른 대중과 앉는다. 이러한 '공동체와 동화되지 않음'과 '대중을 지배계급이 원하는 방향으로 조작한다'라는 점을 부각함으로 링컨과 다른 지배층이 다른 부분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구분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적, 그 자체라 할 수 있다:랑시에르가 그러했듯이, 정치가 '드물게 발생하며 현재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불화라 할 수 있다면, 링컨은 공동체의 어둠과 지배계급의 조작이 극대로 발휘되는 시점에서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하는 그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선택을 한다고 볼 수 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점에서 존 포드와 링컨이 바라보는 지향점은 대단히 단순하지만 원칙적이라 할 수 있다. 

 

존 포드 영화에서 그러하듯, 젊은 링컨에서도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자연이다. 그가 변호사가 되기로 선택하는 순간, 혹은 부자들이 주최한 무도장에서 나와서 멀리 바라보는 장면, 강을 따라 용의자 형제의 어머니를 찾아 올라가는 장면 등등에서 자연과 강의 풍광은 중요한 미학을 구성한다. 거기서 링컨은 남들과 다르게, 더 먼 곳을 동경하는 표정으로 강을 바라본다. 가장 힘들고 어려운 순간, 그가 뭘 해야하는지를, 자신이 어디로 나아가야하는지를 찾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이 장면들은 미국의 광활한 자연풍광을 통해서 미국적 가치에 대한 믿음을 보여준다.

 

영화의 결론에서 링컨은 용의자 형제가 쓴 억울한 누명을 벗기고, 사람들의 환대를 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환대를 받는 링컨을 영화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처럼 묘사한다:마치 그가 훗날 책임져야 했었던 막대한 책임들에 대한 중압감을 표현하는 듯한 이 장면들은 그가 가야할 길이 쉽지 않은 것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젊은 링컨은 존 포드가 어째서 시대가 지나도 다양한 사람들에게 사랑받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공동체의 어둠을 꿰뚫어보고, 그것을 변칙적으로 영화에 녹여냄으로서 공동체와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는 단순한 공동체 찬가가 아닌, 공동체에 대한 믿음과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숭고한 믿음이 드러나기 때문에 고전으로서 가치를 지닌다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젊은 링컨은 존 포드의 가치관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기회가 된다면 꼭 보기를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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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흑백 무성영화 시기에 영화 매체를 정의내린 영화와 인물들을 꼽자면, 거기에는 항상 버스터 키튼과 그가 만든 영화들이들어갈  이다. 성룡이 스스로 버스터 키튼을 가리켜 자신의 우상이라 했고, 로저 이버트 같은 평론가나 영화 감독들도버스터 키튼을 위대한 배우이자 감독이라 칭송할 정도로 버스터 키튼의 영향력은 대단히 크다. 그리고 지금 관점에서 보았을 때도 버스터 키튼의 영화들은 놀라움의 연속이다.

 

버스터 키튼의 영화들의 핵심은 영화 매체 특징에 근거한다고   있다. 서부로 가다를 예로 들어보자:여기서 키튼은 기차에서 홀로 내려서 수천마리의 소를 끌고 우시장으로 향하려 한다. 문제는 그들이 거쳐야 하는 것이 LA 대도시의 풍경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키튼은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서 좌충우돌하고, 수많은 소들이 등장해서 도시의 대중들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과정에서 버스터 키튼은 카메라와 상황을 역동적으로 구성한다:빨간 악마옷을 입고 달리는 키튼과 그의 꼬리에 꼬리를 잡고 달리는 수많은 경관들, 끊임없이 움직이는 소들과 다채로운 상황들까지. 영화 클라이맥스의 다채로운 스턴트들은 지금의 관점에서도 훌륭하다. 그리고 이러한 동적인 흐름이야말로 '영화적'이라   있다.

 

버스터 키튼 영화의 동적인 흐름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려면 동시대의 코미디 영화 감독이자 배우인 찰리 체플린과 비교하는 것이 좋다. 찰리 체플린의 경우, 영화의 코미디와 흐름이 고전적인 코미디 쇼에 가깝다   있다. 체플린 영화에서시퀸스와 코미디는 하나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꽁트라   있다. 제한적인 공간에서 제한된 인물만으로 웃음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키튼의 영화들은 상황과 공간을 다채롭게 구성하는데, 이러한 상황들이 세트나 제한된 공간이 아닌 열린공간과 롱테이크를 이용해서 경이롭고 끊임없는 흐름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키튼의 영화들의 특징은 그의 삶의 이력과 맞닿아있다:그는 영화인으로 살기 , 곡예나 스턴트 등으로  비즈니스에서 명성을 쌓았던 사람이었고 이러한 그의 경험은 영화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영화적인 트릭을 배제하고 스턴트와 곡예를 통해서 영화 전체를 경이로 승화시킨다. 그러한 현장감과 이를 목격하는 관객의 모습들이 키튼의 영화의 특징이라  있다. 이는 비슷한 스턴트를 보여주지만 시각 트릭을 이용한 헤롤드 로이드 영화와 상당히 다른데, 카메라의 프레임내에서 위험한 상황을 안전하게 연출하는 로이드 영화와 달리 키튼의 영화들은  순간의 아슬아슬함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키튼의 영화가 단순하게 스턴트만으로 구성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훌륭한 무성영화 배우인데, 그것이 영화의 테마와 스턴트와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버스터 키튼 영화에서 키튼의 인물들은 항상 외톨이고 사회의 메이저에서 벗어나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 키튼의 케릭터들은 항상 주류에 편입되고자 노력하거나  열심히 노력하는데, 키튼 영화서의 스턴트들은 이러한 노력의 절절한 결과물이다. 하지만 이러한 스턴트를 키튼은 항상 무표정한 표정으로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이 연기를 계속해서 이어나간다. 목숨이 위험한 순간에도, 절박한 순간에도, 비참한 순간에도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데, 이러한 포커페이스가 상황과 대비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삶의 희로애락을 승화시킨다.

 

버스터 키튼 영화는 드라마와 스턴트, 코미디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훌륭한 영화들이다. 기회가 된다면 한번 보는 것을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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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브랜든 크로넨버그(아들)와 데이빗 크로넨버그(아버지)는 유사하지만 서로 다르다:신체 손괴, 정신과 육체의 결합, 섹스의 묘사 등등은 많은 테마를 공유한다. 하지만 아버지 크로넨버그가 근대적인 유물론과 소재를 써서 영화를 만들었다면, 아들 크로넨버그는 좀 더 현대적이고 즉물적인 감성의 영화를 만든다. 아버지의 비디오드롬, 그리고 아들의 안티바이럴을 예로 들어서 비교해보겠다. 비디오드롬에서 아버지 크로넨버그는 미디어를 수용하기 위해서 새로운 감각기가 자라나고, 무비판적으로 미디어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다. 아버지 크로넨버그의 비디오드롬은 현대의 미디어 관점에서 '고전적'이라 할 수 있는데, '비디오'나 텔레비전, 방송국 같은 물건들을 활용하는 모습 등에서 이미 지금의 시대에도 통용되지만 현대적Up-To-Date이진 않는 물건이다. 하지만, 여전히 의미가 통용된다는 점에서 고전적Classical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브랜든 크로넨버그는 다르다. 안티바이럴에서 아들 크로넨버그는 연예인에 대한 현대인들의 병리학적인 집착과 심리에 집중한다. 아들 크로넨버그는 아버지 크로넨버그와 달리 욱체적인 변형을 좀더 '즉물적'인 형태로 표현하는데, B급 호러 영화나 고어영화에 기반을 두고 있는 아버지 크로넨버그와 달리 아들 크로넨버그는 사진을 한 경력 덕분에 좀 더 이미지를 구현했다. 차가운 질감이나 강박적인 구도, 인공적인 미장센과 컷 분할 등의 요소는 아버지 크로넨버그와 차별화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두번째 영화 포제서(2020)가 등장했다. 포제서Possessor는 빙의하는 자라는 의미로, 빙의하다Possess라는 단어에서 따온 단어다. 이는 영화에서 타인의 인격에 빙의하여 타겟을 암살하는 자인 주인공을 일컫는 말인데, 이 단어의 선택부터 영화는 현대인의 '인격'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함을 암시한다:빙의라는 개념의 출발은 전근대적인 개념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는데, 고대나 중세 기독교, 혹은 동양 샤머니즘의 개념에 기반한다. 악마나 악령은 사람의 나약한 영혼을 파고들어 그의 영혼과 인격을 지배하고, 그것을 가리켜 고대인들은 '빙의'라 하였다. 하나의 육체, 두개의 영혼, 하나의 육체를 두고 선과 악이 갈등하며 싸우는 것이야말로 빙의의 본질이다. 핵심은 두 개의 공존할 수 없는 개념의 하나의 바탕 위에서 공존하면서 갈등하는 것, 그것을 내쫒기 위해서 다른 한 존재를 바깥으로 내쫒는 엑소시즘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고전 호러 영화인 엑소시스트를 보라. 아버지가 부재한 가정에 악마가 어린 소녀의 영혼을 파고 들고, 아버지를 대신하여 신부가 가정에 들어와 어린 소녀의 몸에 들어간 악령을 내쫒는다. 

 

포제서는 이러한 전근대적인 빙의의 개념을 부정하는 곳에서 출발한다:포제서에서 빙의자와 빙의당하는 자는 유기적으로 결합한다. 선과 악의 구분이 아니며, 한 인간의 빈틈을 파고 드는 것이 아닌, 빙의자와 빙의 당하는 자의 융합이 포제서의 핵심인 것이다. 이는 암살 시나리오의 개연성으로 드러난다:영화는 암살 타겟이 죽는 개연성을 빙의 당하는 자의 주변 상황과 밀접하게 연결시켜서 암살이 대단히 자연스러운 사건인 것처럼 포장을 한다. 타겟의 살해는 빙의당하는 자에 있어서 개연성이 있는 행동이다. 빙의자는 그저 그러한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약간 밀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빙의자와 빙의당하는 자는 일종의 공생 관계가 된다. 이를 영화는 일종의 욕망과 삶의 데칼코마니의 형태로 풀어내는데, 서사적인 관점에서 주인공의 삶과 빙의당하는 자가 묘하게 겹쳐보이게끔 만든 것, 성교의 이미지가 거울을 통해서 서로 구분되게끔 만들어진 부분, 반사된 이미지로 동일한 이미지를 여러개로 컷을 나누는 등 모든 것들이 반복되고 유사하다는 이미지를 관객에게 각인시킨다. 죽이는 자나, 죽는 자, 그들의 주변환경이나 그들이 공유하는 욕망 이런 것들이 모두 결국은 현대인들이 공유하는 의식이자 양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무엇이, 현대인의 의식 아래에 무의식으로 자리잡고 있을까. 영화의 초반 시퀸스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여기서 영화는 주인공이 원래 시나리오와 다르게 암살 타겟을 아주 너저분하고 끔찍한 방식으로 처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왜 주인공은 굳이 그를 그렇게 너저분하게 죽였는가? 그리고 왜 그 후에 자살을 하지 못한 것일까? 넘쳐흐르는 끈적거리는 피, 피를 만지는 질감, 그리고 자살할 때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는 주인공, 이 모든 것들이 앞서 이야기한 이미지와 대칭되는 모습을 보인다. 깔끔하지 않고, 정돈되지 않았으며, 불현듯 터져올라서 끔찍한 결과를 남기고 사라지는 것. 암살 시나리오가 암살 하는 자의 주변 환경을 두고 개연성 있는 시나리오를 이루었다는 점에 비추어 본다면, 이러한 끈적함이야말로 현대인의 무의식과 은밀한 욕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주인공과 빙의당하는 자를 통해서 이 둘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면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첫 암살 시퀸스가 끝난 후, 아버지의 유품을 만지면서 죄책감을 언급하고 가족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장면을 보자. 주인공은 집앞에 서서 정상적인 부모와 아내를 연기하는 것을 연습한다. 마치 그러한 것이 부자연스러운 것처럼 말이다. 사회적 페르소나와 욕망 사이에서 주인공은 방황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정 내에서도, 직장에서도 끊임없이 정체성이 흔들리는 주인공의 모습은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처럼 보인다. 동시에 빙의당하는 자도 그러한 모습을 보여준다:연인의 마약 딜러인 남자는 연인에게 마약을 공급하면서 연인의 아버지 회사에 취직한다. 하지만 거기서 그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겉도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몰리고 폭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의 정체성은 주변 상황에 의해서 계속해서 위협받고 흔들리지만, 빙의된 과정에서 이들은 서로의 욕망과 삶을 훔쳐보게 된다. 탈출에 실패한 이후, 빙의 당한 자는 주인공의 삶을 역으로 훔쳐보게 되는데 정신세계 주인공의 가죽을 뒤집어 쓰고 주인공의 삶과 욕망을 들여다 보고 주인공의 삶을 파괴하고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상당히 흥미로운 점은 그러한 행동이 역으로 주인공의 행동과 겹쳐 보인다는 점인데(주인공의 집 앞에서 주인공이 했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한다는 점에서), 이는 동시에 빙의 당한 자가 빙의한 자를 역빙의하는 일종의 융합 단계에 들어선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정체성이 불안정한 두 현대인의 결합과 이해는 빙의 당한 자의 '착각'으로 이어진다. 그는 주인공의 가장 소중한 것이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욕망을 들여다 봄으로 그녀를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주인공의 가정을 파괴하려 한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그녀의 가족 역시 그저 또다른 하나의 가면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난다.(사실 이는 어느정도 복선이 깔려있었는데, 빙의 당하는 자가 주인공의 시선으로 보는 것이 아닌 '주인공의 가죽을 뒤집어 쓴 시점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어느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오히려, 자신의 자식을 감정적으로 총으로 쏴죽이는 장면에서 그녀가 가족에게 감정이 정형적이 아닌, 끈쩍하고 파괴적인 감수성이 숨어있었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똑같은 아버지의 유품을 들여다보면서 주인공은 초반 시퀸스와 동일한 이야기를 하지만 죄책감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드러낸다. 결국 그녀의 가족이라는 페르소나 역시 쉽게 내던질 수 있는 가면과도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과연 무엇이고 누구일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역설적이게도 그녀가 행해왔던 끈적한 살인 장면들의 연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결국 현대인의 화려하고 다양한 가면들 속에서, 오롯이 현대인이라 할 수 있는 것은 파괴적이고 충동적인 욕망 뿐이었다는 것이다.

 

영화 포제서는 아들 크로넨버그가 아버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색체를 갖고 있음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SF 작품으로도 훌륭한 작품이고, 현대적이다. 크로넨버그를 좋아했고, 안티바이럴을 좋게 보았다면 기회가 되었을 때 꼭 한번 보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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