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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예르카가 정말 원한 건 움직이는 그들을 보는 거였다.
그래서, 그는 지구 중심으로 가서 태고의 괴물들을 만나는 쥘 베른 (Jules Verne)의 책을 읽고
우리도 똑같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쥘 베른 책 속의 거의 모든 게 실제로 이루어졌기에 우린 가기로 결심했다.

- 태초로의 여행

 

Science Fiction, 과학 소설이나 공상과학으로 불려지는 이 용어는 과학이 만들어내는 가능성에 주목하여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이 장르는 오랜 전통을 자랑한다. 그도 그럴것이 과학이라고 하는 가능성의 영역이 인간이 꿈꾸던 영역들을 하나 둘 실현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초창기 SF 작가였던 쥘 베른이 썼던 소설들을 보자. 쥘 베른이 썼던 소설들 중에서 상당수는 이제 현실로 이루어졌다:달으로의 여행(달나라 탐험)이나 해저로의 여행(해저 2만리), 80일만에 세계를 일주한다던가(80일간의 세계 일주) 등의 다양한 이야기들은 이미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왔다. 이것들은 우리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손이 닿지 않는 영역에 대한 동경이 과학을 통해 언젠가 이루어질 수 있는 염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의 반증일 것이다.

 

그렇기에 과학은, 어떤 의미에서 현대 인류에게 '낭만'으로 다가왔다. 물론, 시대가 바뀌면서 과학이 불러올 재앙과 그것을 휘두르는 인류의 문제 등에 대한 다양한 문제 제기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과학이 만들어낼 미래에 대한 희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과학은 인류가 갖고 있던 '근원적인 호기심'에 대한 발현과 동경이라는 점에서 과학에 대한 인류의 낭만은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어째서 새들은 날 수 있는가? 새들이 날 수 있는 원리를 이해하면 인류도 날 수 있을까? 어째서 태양은 불타오르는가? 우리도 그런 태양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현실을 벗어나,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것에 대해 몽상을 하는 것이야 말로 과학을 시작케 만든 근원이었다. 그렇기에 다양한 면모를 가지게 된 지금에 와서도 과학은 '낭만'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카렐 제만의 영화들은 그런 의미에서 '낭만'으로써의 과학을 다루고 있는 SF 영화라 할 수 있다:과학이 만들어낸 무서운 무기를 다루고 있는 영화(죽음의 발명품)에서조차, 인류는 과학에 대한 희망찬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카렐 제만의 영화들은 단순히 과학이 가져다 줄 미래를 다루고 있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SF 영화들과 다르다 할 수 있다. 죽음의 발명품은 19세기를,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은 근대 귀족사회를, 태초로의 여행은 현대의 아이들이 '과거의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에서 그의 SF 영화 관점은 '과거'에 베이스를 둔다.

 

카렐 제만이 낭만적인 SF를 다루는데 있어서, 주요한 모티브는 쥘 베른이다.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작품을 만들기도 했지만(죽음의 발명품), 카렐 제만이 쥘 베른의 소설들을 인용하는 주요한 모티브는 그것이 '과거의 SF'였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상상은 지금 현실이 되었다. 그렇다면 제만의 영화에서 SF는 더이상 과학이 만들어낼 가능성이 아닌, 일종의 확정된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카렐 제만의 영화들은 어딘가 우스꽝 스럽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스타일이 구현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카렐 제만 영화에서의 세트와 애니메이션 스타일일 것이다:19세기 사람들이 20세기와 21세기를 상상하면서 만들어낸 동판화 스타일의 일러스트들을 기반으로 카렐 제만은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내는데, 그 세밀함과 동시에 시대착오적인 부분들은 관객에게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쥘 베른으로 대표되는 과거의 SF를 통해서 카렐 제만은 과학이 가져다 줄 미래적인 가능성이 아닌, 과거인이 갖고 있는 과학에 대한 낭만과 자세가 현재가 맞닿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리고 그의 영화 속에서 과학의 핵심적인 속성은 여전히 과거나 현재나 맞닿아 있다. 태초로의 여행에서 아이들은 일지를 기록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탐사는 영광이나 모험이 아닌, 과학적인 자세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그들이 태초의 삼엽충을 목격하기 위해서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을 했던 것처럼, 과학적인 자세는 호기심과 그 호기심을 인류 모두에게 공유하기 위해서 정확한 측정과 공유된 명칭을 부르는 것, 이를 통해서 우리만의 지식을 넘어서 인류 전체가 함께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지는 것이 과학의 본질이라 그는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들 중 허풍선이 남작은 SF의 낭만을 가장 훌륭하게 체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의 시작에서 우주 비행사는 달에 도착해서 거기 먼저 도착한 근대의 시인들과 모험가들을 만난다. 그리고 모험가 허풍선이 남작은 그에게 과거의 모험들을 체험하게 한다. 술탄의 왕궁, 생선의 뱃속, 요새 등등을 탐험하면서 허풍선이 남작이 보여주는 모험들은 과거 낭만 소설에서 보여준 허풍 넘치는 모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공주를 가운데 두고 우주 비행사와 허풍선이 남작 둘이서 삼각관계를 구성하는 모습도 그러하다.

 

하지만 우주비행사와 삼각관계로 대립각을 세우던 허풍선이 남작도 결국 그를 인정하고 그가 위험에 처할 때, 그를 도와준다. 허풍선이 남작(근대의 낭만소설)도 우주 비행사가 꿈꾸던 세계(SF의 세계)가 '낭만'이라는 측면에서 자신과 맞닿아있음을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근대에서 현대로, 현대에서 다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속에서 서로 다른 삶을 살았지만 '낭만'이라는 꿈 하나로 이어진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은 SF와 과학이 새로운 시대의 낭만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달은 아직까지 시인들과 몽상가 들의 것이고,
과감한 공상가들과 흰 가발의 모험가들 것이지.
긴 코트 입은 공상가들과 최신 소설에 나오는 이상한 헬멧을 쓴 자들의 것
그리고, 물론 연인들의 것!

그들에게 달은 언제나 가장 사랑스러웠지!
그리하여, 난 유쾌하게 모자를 벗어 던지네 별들에게 날아 가도록!

우리를 대신해, 모든 용감한 친구들을 맞이하라고 
그들은 이미 우주의 반기는 품속으로 길을 떠났으니!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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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잭 스나이더가 만든 새벽의 저주는 훌륭한 오락영화였다. 1978년 동명의 전설적인 영화를 리메이크한(국내에서는 시체들의 새벽 - 새벽의 저주로 이름이 달라지긴 했다) 이 영화는 달리는 좀비와 생존, 좀비와의 근접하여 싸우는 야만적인 총싸움, 대중화된 고어까지. 20년이 다되어가는 지금에 와서도 대중문화와 좀비를 논한다 하면 새벽의 저주를 빼놓고 이야기를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조지 로메로가 이 영화를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유명한 사실이다(링크) 그리고 잭 스나이더 판의 리메이크 판에 대해서 좋지 않게 평가하는 평론이나 칼럼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사례 링크)

 

이러한 비판적 평론들의 근저에는 시체들의 새벽이 갖고 있는 특수성이 내재되어 있다. 물론 새벽의 저주와 시체들의 새벽에서 공통적인 부분들은 존재한다:좀비들과 쇼핑몰, 좀비보다 더 무서운 인간들 내부의 갈등. 새벽의 저주는 시체들의 새벽 원판에서 주요한 모티브들에 집중하여 영화를 재구성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주요 모티브들을 하나로 엮는 영화의 시선이 새벽의 저주에서는 완전히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대체 잭 스나이더가 원작의 무엇을 보고 리메이크를 했는지 모르겠다' 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새벽의 저주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지 로메로라는 감독을 이야기해야할 것이다:전설적인 좀비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만든 감독으로 알려져있긴 하지만, 로메로의 필모그래피는 좀비 3부작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놀이공원이나 마틴 같은 영화를 만들기도 한 조지 로메로는 아마도 미국 영화감독 중에서 '분명하게' 좌파적이라 이야기할 수 있는 감독이었다. 놀이공원 자체가 노인 복지와 계급 사회, 착취에 대해서 정면으로 비판한 작품이었고, 마틴은 미국 중산층의 교외 문화와 삶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작품이었다. 잘 알려진 좀비 3부작 역시 좀비와 인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시체들의 낮이나, 인종 문제의 우화로도 읽힐 수 있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엔딩도 그러한 요소들이 산재했다.

 

그리고 시체들의 새벽의 테마는 '죽어버린 미국 사회'였다. 영화의 시작, 전세계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되살아나는 일들이 일어나고, 주인공은 그 상황을 방송으로 정리하여 보도를 한다. 하지만 이런 중요한 사태를 보도를 하는 와중에 사람들은 세상이 망했음을 직감하고 하나 둘 자신의 자리에서 이탈을 하고 주인공 역시 도로교통국 소속인 연인과 함께 방송국을 버리고 도망친다. 영화의 시작점이 바로 의무의 방기인 셈이다. 그 다음 시퀸스는 더욱 더 노골적인데, 군대가 건물로 진입하여 산자와 죽은자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죽여버리고, 거기서 다른 두 주인공들이 피로감을 느끼고 탈출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이것은 생존은 아니다:분명 이 시점까지 영화 속의 미국 사회와 정부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는 것, 이제 더이상 정상적으로 이 이후 살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이 직시하고 자신의 의무와 직무를 내던지는 것으로부터 영화가 시작하는 셈이다. 영화의 시작은 바로 '미국이라는 국가가 죽어가는 상황'이었던 셈이다.

 

위와 같은 점에서 시체들의 새벽의 시작은 몇몇 아포칼립스 장르에서 보여지는 무너지는 세계에서 아나키적인 자유와 능력에 따라 생존하는,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신자유주의적인 자유 가치'와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좀비랜드 같은 영화를 보자. 거기서 좀비 사태는 주인공들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일종의 해방구로 작용한다. 물론 이것만으로 좀비랜드가 신자유주의적인 가치를 옹호한다고 볼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얼마나 이러한 좀비 아포칼립스,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에서 신자유주의적 판타지가 깔려있는지를 반증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체들의 새벽에서 보여주는 죽어가는 세계 역시도 가치와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무너짐은 개인이 자유로운 세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헬기를 타고 지나가듯이 사람들은 무표정하게 지나가는 좀비들을 즐겁게 사냥한다. 하지만 동시에 쇼핑몰을 떠도는 좀비들이 실제 사람과 등치됨을 보여줌으로 좀비가 인간과 은연중에 다를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것들을 즐겁게 죽여버리는 인간은 무엇이 되는 것일까? 그리고 역으로 정부와 사회가 그렇게 좀비들을 죽여버리는 세계 자체를 등져버리고 도망치는 사람들은? 시체들의 새벽에서 보여주는 사회가 무너지는 것은 단순히 '좀비'라는 외적인 위협에 의해서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사회와 조직은 더이상 공공의 선과 가치를 지키지 못하고, 내재된 폭력성과 광기(초반 시퀸스의 경찰중 하나가 미쳐 날뛰며 아무 관계없는 민간인들을 사살하듯이)을 표출하며 스스로 망가져간다. 그리고 멀쩡한 사람들은 그러한 광기에 정면으로 맞서 마지막까지 싸우는 것이 아닌, 책임과 의무를 방기하고 멀리 도망칠 뿐이다. 말하자면 체제와 구조, 가치의 종말과 죽음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체들의 새벽은 해방구의 세계가 아니다. 모든 가치가 무너진 사회를 전제하고, 멀쩡한 사람들이 사회를 등지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 사람들이 죽어버린 소비 문화인 쇼핑몰에 갇혀버리는 이야기이기도 하다:헬기를 타고 도망치던 주인공 일행은 물자가 풍족하게 쌓여있는 쇼핑몰을 발견하고 점거한다. 흥미로운 점들은 좀비들이 마치 살아생전 쇼핑몰에서 쇼핑을 하듯이 쇼핑몰을 돌아다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회가 무너지고, 세상이 미쳐돌아가도 쇼핑몰에는 물건이 그득이 쌓여있고 소비자들(좀비들이지만)이 영원히 돌아다니고 있다는 점에서, 시체들의 새벽의 쇼핑몰은 생존을 위한 공간보다도 '죽어버린 자본주의 소비 사회 그 축소판'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생존자들이 캐나다로 도망가다가 쇼핑몰에 사로잡혀서 머무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제는 더이상 의미없는 물질들에 사로잡혀 있다가 다른 생존자들과 무의미한 물질들(폭주족들이 쇼핑몰을 강탈할 때, 마치 '블랙 프라이데이' 할인을 두고 경쟁하는 소비자들처럼 보여준 것은 그러한 부분을 잘 드러낸다)을 두고 싸우다가 공멸하는 것은 소비사회에 대한 음울한 경종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시체들의 새벽은 반 체제, 반 구조적인 동시에 더 나아가서 '반 장르적'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좀비 영화들이 좀비들에 맞서서 싸우고, 살아남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데 반해 시체들의 새벽은 죽어버린 물질들에 집착하다 다른 생존자들과 싸우다 공멸하는 쪽에 가깝기 때문이다. 물론 이후 영화들이 후자의 요소(생존자들과의 자멸적인 경쟁)에 초점을 맞추기는 했지만, 이후 영화들이 생존이라는 중요한 요소를 두고 경쟁한 것과 시체들의 새벽이 보여주는 결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시체들의 새벽은 어떤 의미에서 장르의 시조였지만 동시에 반 체제적이고 반 장르적인 영화였다. 이는 로메로의 영화 세계와 크게 맞닿아있다. 그의 다른 영화인 마틴을 보자. 거기서 주인공은 흡혈귀이지만 동시에 흡혈귀가 아니다. 처음에는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의 피만 마실 수 있었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그 피를 마시는 규칙은 무너지고 주인공은 혼란을 경험한다. 황폐하고 늙어버린 교외를 배경으로 중산층 문화에 대해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조지 로메로는 통상적인 관념을 거부하는 사람이었다. 이는 그가 영화에서 좀비를 다루는 방법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그들은 뻣뻣하기는 하지만 생전의 삶의 기억에 매달려 계속해서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있는 존재들이다. 어딘가 우스꽝스럽게 분장한 그들은 루치오 풀치의 좀비(썩어문드러진 존재들)들에 비해서 덜 '좀비'스럽지만, 그 덕분에 다양한 인종과 계급의 사람들이 나온다는 점에서 호러 영화에서 좀비의 모티브인 '대중'에 더 가깝다. 

 

좀비를 '우리와 닮았다, 아니 우리일지도 모른다'라는 발상은 좀비 영화의 '죽여도 되는 존재'와 완전히 상반된 개념이다. 조지 로메로는 쇼핑몰과 그곳을 배회하는 좀비들을 통해서 소비사회 그 자체를 풍자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대중을 몰아내고 그것을 차지하는 주인공들과, 아무런 의미없는 사치재와 물질들을 두고 싸우는 폭주족들의 모습을 통해서 세상이 망해도 여전히 물질에 얽메여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판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로메로가 이후 좀비 영화를 두고 좋지 않게 본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링크) 좀비들은 타자화되었지만, 동시에 '우리들 모습' 그 자체였다. 좀비들을 쉽게 죽여버리는 자유를 논하는 것은 역으로 우리가 '타자를 어떻게 보는가'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로메로는 이러한 명제를 정확히 간파하였고, 그런 통찰력은 시체들의 새벽에 전반적으로 잘 녹아있다.(이러한 통찰력에 대한 오마주는 숀 오브 더 데드에서 잘 드러나는데 

 

결론을 내리자면, 시체들의 새벽은 전설 그 자체인 동시에 장르를 넘어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장르적인 모티브인 동시에 장르가 가질 수 있는 정치적 위험성과 그에 대한 통찰력도 함께 들어 있다. 시간이 된다면 꼭 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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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SF, 과학 소설Science Fiction이라는 장르적 특성을 무엇을 잡아야 하나, 라고 했을 때 여러가지 기준이 나올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 가정하였을 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라고 할 수 있다. 고질라 싱귤러 포인트(정확하게는 특이점이라 하는게 적절하겠지만)는 그러한 장르적 특성에 잘 부합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인 특이점, 물리법칙을 넘어선 물질들, 존재하지 않는 동물들이 실존한다고 하면, 그것을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파국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기본적으로 고질라:싱귤러 포인트의 이야기는 시간 여행과 고차원 존재를 상정했을 때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룬다. 흥미로운 점은 기존의 괴수물의 장르를 뒤틀어서, 생태계의 새로운 존재가 등장하여 문명을 부수는 기존의 괴수물이 아닌 세계의 법칙이 뒤틀리고 다양한 아젠다를 가진 고차원의 존재들(괴수)이 경쟁하여 우주 자체가 멈추는 파국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러한 고차원의 존재들이 결국 갈등과 파괴를 이루어내는 것과 별개로 윤이 만들어낸 AI들이 시간의 루프(과거로 향한 계산, 그리고 수많은 AI로 분화되고 하나로 합의되는 모습 등)을 통해서 특이점의 파국을 막아냄으로 인간과 자연 흐름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으로 끝을 낸다.

 

이러한 전개를 작품은 전제로부터 논리적이고 연역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취한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논리를 연역적으로 세우는 것이 가능할까? 이에 대해 작품은 방대한 양의 지식과 정보를 교차해서 다른 영역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귀납적으로 추론해낸다. 컴퓨터 공학, AI,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의 다양한 분야의 소재들이 쉼없이 등장하고, 그것을 엮어서 그렇다면 존재하지 않는 영역에서는 이렇게 동작한다는 것을 상정한다고 보면 어떨까? 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다. 상당 수의 SF 작품들이 하나의 대원칙에 근거해서 많은 것들을 설명하는 것과 비교해서 본다면 지적인 만족감이 가득한 작품이다.

 

이는 각본가 엔조 토우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그가 쓴 소설 중에 죽은 자의 제국이란 작품이 있다. 이토 케이카쿠가 죽은 이후, 그가 쓴 프롤로그와 생전에 남긴 시놉시스를 토대로 엔조 토우가 완성한 이 작품은 시체들로 산업혁명을 이루어낸 후, 세계가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리적인 흐름을 잘 구축한 작품이다. 이러한 흐름이 고질라 싱귤러 포인트에도 존재하며 SF적으로 재미를 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이 오히려 좀 아쉽게 다가오기도 하는데, 정보량이 풍부하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영상이라는 매체와 어울리지 않다는 느낌이 있다:극에서 다양한 트라비아들과 학문들을 연결하여 이야기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은 전작에서 보여준 흐름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소설이기 때문에 다양한 이야기를 찬찬히 시간을 들여서 소화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전개였다. 그러나 고질라 싱귤러 포인트는 20분, 13화라는 짧은 러닝 타임 내에서 이를 풀어내야 하는데, 극의 전개와 별개로 너무 많은 정보를 풀어내서 따라가기 힘든 부분들이 있다. 소설로 보았다면 괜찮을지도 모르겠지만, 영상으로 보기엔 너무 정보 밀도가 높은 작품이다.

 

결론적으로 고질라 싱귤러 포인트는 훌륭한 SF작품이지만, 안에 들은 정보량이 너무 많아서 모두가 즐겁게 보기에는 난이도가 높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작품 자체가 메카 고지라를 보여주며 뒷 이야기가 진행할만한 여지를 남겨주었기 때문에, 2기를 기대해볼만 하다. SF 작품을 좋아한다면, 보는 것을 고려해볼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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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그렇다면 그에게 정치는 무엇일까? 랑시에르는 “정치는 언제나 발생하는 일이 아니다. 실로 정치는 매우 적게 혹은 드물게 발생한다”(<불화>)고 말했다. 정치는 그저 존재하는 무언가가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던 ‘인간의 가장 탁월하고 고귀한 활동’ 같은 것도 아니다. 정치는 언제나 중단, 개입, 혹은 효력을 수반한다. 정치는 불일치이며, 무언가를 파열시키는 것이다. 체임버스는 “정치는 치안질서에 도전하고 방해하면서 그 질서를 파열시키거나 전치시키며, 어쩌면 결국에는 치안질서를 변화시키게 될지도 모른다. 이것이 정치가 수행하는 일의 전부”라고 말한다.

원문보기 :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900614.html

 

7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존 포드의 영화는 극도로 '반동적'이다. 그의 영화에는 공동체가 있고, 각각의 공동체에서 사람들이 수행하는 역할들이 있다. 공동체에서 노동하는 남자의 역할, 남성을 포옹하는 여성, 이들이 서로 화합하여 공동체를 구성한다. 그리고 그 공동체에서 서부는 공동체를 펼치기 위한 가능성이 공간이 된다. 이 모든 과정 자체가 미국의 이상향American Dream을 구현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 존 포드 영화의 이러한 경향성은 '반동적'이라 할 수 있다:이러한 미국의 이상향이란 이미 오래전 무너져버렸고(굳이 멀리 내려가지 않더라도 트럼프의 당선과 연결지어 생각해봐도 될 것이다), 공동체의 조화로운 삶이란 이상향은 커녕 이제 웃음거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존 포드의 영화가 지금까지 회자되고, 위대한 감독으로 칭송받는 이유는 이러한 반동적인 부분 때문만은 아니다. 70년대 뉴 웨이브 영화 감독 중 몇몇 감독들은 그들의 정치적 성향(좌파적이라 할 수 있는)에도 불구하고 존경하는 감독으로 존 포드를 꼽았다는 이야기는 꽤나 유명하다. 존 포드의 세계관(보수적 공동체)과 좌파적 지향성이란 전혀 맞닿아보이지 않지만, 존 포드의 영화를 좀 더 세부적으로 뜯어보면 정치적 성향을 막론하고 존 포드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존 포드의 영화에서 공동체는 이미 완성된 형태가 아니고 '만들어져가는 과정'에 놓여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공동체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넘어서야 하는 것들은 외부의 위험과 함께 공동체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어둠'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존 포드 영화의 통찰은 공동체 내부의 어둠을 들여다 보는 동시에 숭고한 가치와 믿음을 제시한다는 점에 기반한다. 존 포드의 영화에 자리잡은 공동체의 어둠은 언뜻언뜻 드러난다:수색자에서는 조카 딸이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영향을 받았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이야기하는 전직 기병대원이 등장하고,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에서는 어둠 속에서 비겁하게 무법자를 향해 총을 쏘는 주인공이 등장하며, 역마차에서는 약한 여성을 향해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려는 남성도 같이 등장한다. 조금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황색 리본에서는 아메리카 원주민들과의 전쟁을 막기 위해서 추장과 교류하고, 더 나아가서 아무도 죽지않게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도 이 사례에 들어갈 것이다. 순간이지만 이렇게 잊을 수 없는 광경을 통해서 존 포드는 공동체를 만들어나가는 과정 자체가 단순히 외압을 벗어나는 것만이 아닌 내부의 모순과 어둠을 극복하고 함께해야한다는 것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청년 링컨은 존 포드의 대표작으로 이런 통찰력이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가 선택하고 있는 시점이다:젊은 링컨은 남북전쟁 이전, 링컨이 초짜 변호사인 시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링컨의 가장 위대한 업적인 노예 해방선언과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업적을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위대한 업적에서 빗겨나서, 소박한 인간이 어째서 위대한 업적을 거둘 수 있게 되었는지, (존 포드가 생각하는)미국적인 가치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영화 청년 링컨에서 링컨은 위대한 리더가 아닌 '한량'의 이미지에 가깝다. 그는 마을 축제에 참여하여 파이 맛 컨테스트 심사자를 맡고, 줄다리기 대회에서 참여해서 마차 뒤에 끈을 달아 반칙을 쓰는가 하면, 사무실 창가에 앉아 다리를 꼬고 유대인 하프를 치기도 한다. 그의 모습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지도자의 거룩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링컨은 공동체에서 찾아볼 수 있는 흔한 사람, 그리고 모든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편한 사람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공동체의 어둠을 꿰뚫어보고 나름대로 그에 대처해 나간다:마을 축재 때, 사람들이 살인사건이 일어나자 전후 관계를 따지지 않고 용의자 형제를 린치하려 한다. 밝고 활기찼던 낮의 축제와 다르게 밤은 공동체의 히스테리와 집단 광기에 사로잡혀 있고, 용의자 형제와 군중 그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젊은 링컨 하나 뿐이다. 흥미롭게도 넉살맞게 군중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그의 모습은 공동체의 어둠을 정면으로 비판하지 않는다. 단지 그들의 히스테리를 풀어주고, 집으로 보내주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그들을 정면으로 비판하지 않되, 그들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것이다. 링컨은 공동체 내부의 문제를 공동체의 방법론(사람과의 유대, 관계론에 따라)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위태로운 방법론을 취하고, 이러한 방법론은 그를 영화 내내 여러번 시험에 들게 한다.

 

이러한 방법론에 대척되는 것은 법정에서 검사가 취하는 방법론일 것이다:그는 이기기 위해서 대중의 감정을 선동하고, 용의자 형제의 어머니를 감정적으로 학대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전적으로 그 공동체의 대다수 구성원과 유리되어 있는 입장을 고수한다. 이러한 것이 어떤 점에서 보았을 때는 영화가 엘리트와 사회 지배 계급에 대해서 취하고 있는 관점과 맞닿아있다 할 수 있다:마을의 축제를 보는 자리에서 동료 변호사는 다른 다수의 대중과 다르게 의자에 앉아서 축제를 관람한다. 그리고 링컨은 자연스럽게 그 의자 옆에 다른 대중과 앉는다. 이러한 '공동체와 동화되지 않음'과 '대중을 지배계급이 원하는 방향으로 조작한다'라는 점을 부각함으로 링컨과 다른 지배층이 다른 부분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구분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적, 그 자체라 할 수 있다:랑시에르가 그러했듯이, 정치가 '드물게 발생하며 현재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불화라 할 수 있다면, 링컨은 공동체의 어둠과 지배계급의 조작이 극대로 발휘되는 시점에서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하는 그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선택을 한다고 볼 수 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점에서 존 포드와 링컨이 바라보는 지향점은 대단히 단순하지만 원칙적이라 할 수 있다. 

 

존 포드 영화에서 그러하듯, 젊은 링컨에서도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자연이다. 그가 변호사가 되기로 선택하는 순간, 혹은 부자들이 주최한 무도장에서 나와서 멀리 바라보는 장면, 강을 따라 용의자 형제의 어머니를 찾아 올라가는 장면 등등에서 자연과 강의 풍광은 중요한 미학을 구성한다. 거기서 링컨은 남들과 다르게, 더 먼 곳을 동경하는 표정으로 강을 바라본다. 가장 힘들고 어려운 순간, 그가 뭘 해야하는지를, 자신이 어디로 나아가야하는지를 찾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이 장면들은 미국의 광활한 자연풍광을 통해서 미국적 가치에 대한 믿음을 보여준다.

 

영화의 결론에서 링컨은 용의자 형제가 쓴 억울한 누명을 벗기고, 사람들의 환대를 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환대를 받는 링컨을 영화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처럼 묘사한다:마치 그가 훗날 책임져야 했었던 막대한 책임들에 대한 중압감을 표현하는 듯한 이 장면들은 그가 가야할 길이 쉽지 않은 것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젊은 링컨은 존 포드가 어째서 시대가 지나도 다양한 사람들에게 사랑받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공동체의 어둠을 꿰뚫어보고, 그것을 변칙적으로 영화에 녹여냄으로서 공동체와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는 단순한 공동체 찬가가 아닌, 공동체에 대한 믿음과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숭고한 믿음이 드러나기 때문에 고전으로서 가치를 지닌다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젊은 링컨은 존 포드의 가치관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기회가 된다면 꼭 보기를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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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흑백 무성영화 시기에 영화 매체를 정의내린 영화와 인물들을 꼽자면, 거기에는 항상 버스터 키튼과 그가 만든 영화들이들어갈  이다. 성룡이 스스로 버스터 키튼을 가리켜 자신의 우상이라 했고, 로저 이버트 같은 평론가나 영화 감독들도버스터 키튼을 위대한 배우이자 감독이라 칭송할 정도로 버스터 키튼의 영향력은 대단히 크다. 그리고 지금 관점에서 보았을 때도 버스터 키튼의 영화들은 놀라움의 연속이다.

 

버스터 키튼의 영화들의 핵심은 영화 매체 특징에 근거한다고   있다. 서부로 가다를 예로 들어보자:여기서 키튼은 기차에서 홀로 내려서 수천마리의 소를 끌고 우시장으로 향하려 한다. 문제는 그들이 거쳐야 하는 것이 LA 대도시의 풍경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키튼은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서 좌충우돌하고, 수많은 소들이 등장해서 도시의 대중들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과정에서 버스터 키튼은 카메라와 상황을 역동적으로 구성한다:빨간 악마옷을 입고 달리는 키튼과 그의 꼬리에 꼬리를 잡고 달리는 수많은 경관들, 끊임없이 움직이는 소들과 다채로운 상황들까지. 영화 클라이맥스의 다채로운 스턴트들은 지금의 관점에서도 훌륭하다. 그리고 이러한 동적인 흐름이야말로 '영화적'이라   있다.

 

버스터 키튼 영화의 동적인 흐름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려면 동시대의 코미디 영화 감독이자 배우인 찰리 체플린과 비교하는 것이 좋다. 찰리 체플린의 경우, 영화의 코미디와 흐름이 고전적인 코미디 쇼에 가깝다   있다. 체플린 영화에서시퀸스와 코미디는 하나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꽁트라   있다. 제한적인 공간에서 제한된 인물만으로 웃음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키튼의 영화들은 상황과 공간을 다채롭게 구성하는데, 이러한 상황들이 세트나 제한된 공간이 아닌 열린공간과 롱테이크를 이용해서 경이롭고 끊임없는 흐름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키튼의 영화들의 특징은 그의 삶의 이력과 맞닿아있다:그는 영화인으로 살기 , 곡예나 스턴트 등으로  비즈니스에서 명성을 쌓았던 사람이었고 이러한 그의 경험은 영화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영화적인 트릭을 배제하고 스턴트와 곡예를 통해서 영화 전체를 경이로 승화시킨다. 그러한 현장감과 이를 목격하는 관객의 모습들이 키튼의 영화의 특징이라  있다. 이는 비슷한 스턴트를 보여주지만 시각 트릭을 이용한 헤롤드 로이드 영화와 상당히 다른데, 카메라의 프레임내에서 위험한 상황을 안전하게 연출하는 로이드 영화와 달리 키튼의 영화들은  순간의 아슬아슬함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키튼의 영화가 단순하게 스턴트만으로 구성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훌륭한 무성영화 배우인데, 그것이 영화의 테마와 스턴트와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버스터 키튼 영화에서 키튼의 인물들은 항상 외톨이고 사회의 메이저에서 벗어나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 키튼의 케릭터들은 항상 주류에 편입되고자 노력하거나  열심히 노력하는데, 키튼 영화서의 스턴트들은 이러한 노력의 절절한 결과물이다. 하지만 이러한 스턴트를 키튼은 항상 무표정한 표정으로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이 연기를 계속해서 이어나간다. 목숨이 위험한 순간에도, 절박한 순간에도, 비참한 순간에도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데, 이러한 포커페이스가 상황과 대비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삶의 희로애락을 승화시킨다.

 

버스터 키튼 영화는 드라마와 스턴트, 코미디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훌륭한 영화들이다. 기회가 된다면 한번 보는 것을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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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브랜든 크로넨버그(아들)와 데이빗 크로넨버그(아버지)는 유사하지만 서로 다르다:신체 손괴, 정신과 육체의 결합, 섹스의 묘사 등등은 많은 테마를 공유한다. 하지만 아버지 크로넨버그가 근대적인 유물론과 소재를 써서 영화를 만들었다면, 아들 크로넨버그는 좀 더 현대적이고 즉물적인 감성의 영화를 만든다. 아버지의 비디오드롬, 그리고 아들의 안티바이럴을 예로 들어서 비교해보겠다. 비디오드롬에서 아버지 크로넨버그는 미디어를 수용하기 위해서 새로운 감각기가 자라나고, 무비판적으로 미디어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다. 아버지 크로넨버그의 비디오드롬은 현대의 미디어 관점에서 '고전적'이라 할 수 있는데, '비디오'나 텔레비전, 방송국 같은 물건들을 활용하는 모습 등에서 이미 지금의 시대에도 통용되지만 현대적Up-To-Date이진 않는 물건이다. 하지만, 여전히 의미가 통용된다는 점에서 고전적Classical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브랜든 크로넨버그는 다르다. 안티바이럴에서 아들 크로넨버그는 연예인에 대한 현대인들의 병리학적인 집착과 심리에 집중한다. 아들 크로넨버그는 아버지 크로넨버그와 달리 욱체적인 변형을 좀더 '즉물적'인 형태로 표현하는데, B급 호러 영화나 고어영화에 기반을 두고 있는 아버지 크로넨버그와 달리 아들 크로넨버그는 사진을 한 경력 덕분에 좀 더 이미지를 구현했다. 차가운 질감이나 강박적인 구도, 인공적인 미장센과 컷 분할 등의 요소는 아버지 크로넨버그와 차별화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두번째 영화 포제서(2020)가 등장했다. 포제서Possessor는 빙의하는 자라는 의미로, 빙의하다Possess라는 단어에서 따온 단어다. 이는 영화에서 타인의 인격에 빙의하여 타겟을 암살하는 자인 주인공을 일컫는 말인데, 이 단어의 선택부터 영화는 현대인의 '인격'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함을 암시한다:빙의라는 개념의 출발은 전근대적인 개념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는데, 고대나 중세 기독교, 혹은 동양 샤머니즘의 개념에 기반한다. 악마나 악령은 사람의 나약한 영혼을 파고들어 그의 영혼과 인격을 지배하고, 그것을 가리켜 고대인들은 '빙의'라 하였다. 하나의 육체, 두개의 영혼, 하나의 육체를 두고 선과 악이 갈등하며 싸우는 것이야말로 빙의의 본질이다. 핵심은 두 개의 공존할 수 없는 개념의 하나의 바탕 위에서 공존하면서 갈등하는 것, 그것을 내쫒기 위해서 다른 한 존재를 바깥으로 내쫒는 엑소시즘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고전 호러 영화인 엑소시스트를 보라. 아버지가 부재한 가정에 악마가 어린 소녀의 영혼을 파고 들고, 아버지를 대신하여 신부가 가정에 들어와 어린 소녀의 몸에 들어간 악령을 내쫒는다. 

 

포제서는 이러한 전근대적인 빙의의 개념을 부정하는 곳에서 출발한다:포제서에서 빙의자와 빙의당하는 자는 유기적으로 결합한다. 선과 악의 구분이 아니며, 한 인간의 빈틈을 파고 드는 것이 아닌, 빙의자와 빙의 당하는 자의 융합이 포제서의 핵심인 것이다. 이는 암살 시나리오의 개연성으로 드러난다:영화는 암살 타겟이 죽는 개연성을 빙의 당하는 자의 주변 상황과 밀접하게 연결시켜서 암살이 대단히 자연스러운 사건인 것처럼 포장을 한다. 타겟의 살해는 빙의당하는 자에 있어서 개연성이 있는 행동이다. 빙의자는 그저 그러한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약간 밀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빙의자와 빙의당하는 자는 일종의 공생 관계가 된다. 이를 영화는 일종의 욕망과 삶의 데칼코마니의 형태로 풀어내는데, 서사적인 관점에서 주인공의 삶과 빙의당하는 자가 묘하게 겹쳐보이게끔 만든 것, 성교의 이미지가 거울을 통해서 서로 구분되게끔 만들어진 부분, 반사된 이미지로 동일한 이미지를 여러개로 컷을 나누는 등 모든 것들이 반복되고 유사하다는 이미지를 관객에게 각인시킨다. 죽이는 자나, 죽는 자, 그들의 주변환경이나 그들이 공유하는 욕망 이런 것들이 모두 결국은 현대인들이 공유하는 의식이자 양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무엇이, 현대인의 의식 아래에 무의식으로 자리잡고 있을까. 영화의 초반 시퀸스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여기서 영화는 주인공이 원래 시나리오와 다르게 암살 타겟을 아주 너저분하고 끔찍한 방식으로 처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왜 주인공은 굳이 그를 그렇게 너저분하게 죽였는가? 그리고 왜 그 후에 자살을 하지 못한 것일까? 넘쳐흐르는 끈적거리는 피, 피를 만지는 질감, 그리고 자살할 때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는 주인공, 이 모든 것들이 앞서 이야기한 이미지와 대칭되는 모습을 보인다. 깔끔하지 않고, 정돈되지 않았으며, 불현듯 터져올라서 끔찍한 결과를 남기고 사라지는 것. 암살 시나리오가 암살 하는 자의 주변 환경을 두고 개연성 있는 시나리오를 이루었다는 점에 비추어 본다면, 이러한 끈적함이야말로 현대인의 무의식과 은밀한 욕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주인공과 빙의당하는 자를 통해서 이 둘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면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첫 암살 시퀸스가 끝난 후, 아버지의 유품을 만지면서 죄책감을 언급하고 가족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장면을 보자. 주인공은 집앞에 서서 정상적인 부모와 아내를 연기하는 것을 연습한다. 마치 그러한 것이 부자연스러운 것처럼 말이다. 사회적 페르소나와 욕망 사이에서 주인공은 방황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정 내에서도, 직장에서도 끊임없이 정체성이 흔들리는 주인공의 모습은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처럼 보인다. 동시에 빙의당하는 자도 그러한 모습을 보여준다:연인의 마약 딜러인 남자는 연인에게 마약을 공급하면서 연인의 아버지 회사에 취직한다. 하지만 거기서 그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겉도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몰리고 폭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의 정체성은 주변 상황에 의해서 계속해서 위협받고 흔들리지만, 빙의된 과정에서 이들은 서로의 욕망과 삶을 훔쳐보게 된다. 탈출에 실패한 이후, 빙의 당한 자는 주인공의 삶을 역으로 훔쳐보게 되는데 정신세계 주인공의 가죽을 뒤집어 쓰고 주인공의 삶과 욕망을 들여다 보고 주인공의 삶을 파괴하고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상당히 흥미로운 점은 그러한 행동이 역으로 주인공의 행동과 겹쳐 보인다는 점인데(주인공의 집 앞에서 주인공이 했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한다는 점에서), 이는 동시에 빙의 당한 자가 빙의한 자를 역빙의하는 일종의 융합 단계에 들어선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정체성이 불안정한 두 현대인의 결합과 이해는 빙의 당한 자의 '착각'으로 이어진다. 그는 주인공의 가장 소중한 것이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욕망을 들여다 봄으로 그녀를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주인공의 가정을 파괴하려 한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그녀의 가족 역시 그저 또다른 하나의 가면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난다.(사실 이는 어느정도 복선이 깔려있었는데, 빙의 당하는 자가 주인공의 시선으로 보는 것이 아닌 '주인공의 가죽을 뒤집어 쓴 시점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어느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오히려, 자신의 자식을 감정적으로 총으로 쏴죽이는 장면에서 그녀가 가족에게 감정이 정형적이 아닌, 끈쩍하고 파괴적인 감수성이 숨어있었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똑같은 아버지의 유품을 들여다보면서 주인공은 초반 시퀸스와 동일한 이야기를 하지만 죄책감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드러낸다. 결국 그녀의 가족이라는 페르소나 역시 쉽게 내던질 수 있는 가면과도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과연 무엇이고 누구일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역설적이게도 그녀가 행해왔던 끈적한 살인 장면들의 연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결국 현대인의 화려하고 다양한 가면들 속에서, 오롯이 현대인이라 할 수 있는 것은 파괴적이고 충동적인 욕망 뿐이었다는 것이다.

 

영화 포제서는 아들 크로넨버그가 아버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색체를 갖고 있음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SF 작품으로도 훌륭한 작품이고, 현대적이다. 크로넨버그를 좋아했고, 안티바이럴을 좋게 보았다면 기회가 되었을 때 꼭 한번 보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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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애니메이션(~무한열차 전까지)을 감상한 내용입니다.

*이후 전개에 대한 다소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대중의 사랑을 받는 작품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항상 바뀐다. 사회의 조류에 따라, 많은 흥행작들은 뜨고 지고 사라진다. 마치 패션이나 트렌드와 같은 유행처럼 말이다. 벤야민은 그렇기에 유행의 본질은 죽는 것이라 보았다:결국 유행하는 것들의 핵심은 대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몇 작품들은 유행의 흐름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몇몇은 너무나 성공해서 그 작품을 빼놓고 다른 작품을 논하는게 힘들게 되고, 몇몇은 흥행과 관계없이 다른 작품들이 보지 못한 선구자적인 혜안을 드러내서 죽지 않는다. 그런 작품들은 더이상 유행의 흐름을 타는 것이 아닌, 그 사회에 하나의 '상수'로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작품은 시대를 대표하는 하나의 아이콘이 된다:건담이나 드래곤볼, 원피스, 진격의 거인 같은 작품들처럼, 10년이 지나도 다시금 회자될 작품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간단하게 다루고자 하는 귀멸의 칼날은 그런 작품의 문턱에 올라와있는 작품처럼 보인다. 작년 여름쯤에 이미 연재가 마무리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애니화의 광풍 이후 귀멸의 칼날의 인기는 식지 않고 오히려 더 치솟고 있는 중이다:무한열차는 코로나 시국임에도 일본 영화 관람 인원 '2,000만'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달성 중이고, 앞으로 2기 애니와 완결까지의 내용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광풍은 몇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귀멸의 칼날이 애니화의 수혜를 엄청나게 받은 것은 확실하다:몇몇 초반 부분의 늘어지는 전개가 정리 되고, 무한열차 이후 정립된 연출이나 이런 부분들을 애니화에서는 전반적으로 재해석하여 강화시켰기 때문이다. 몇년간 애니메이션 보는 것을 손 놓긴 했지만, 확실한 것은 귀멸의 칼날은 오랫동안 애니메이션을 봤던 경험에 비추어보아도 눈요기할만한 요소가 많은 물건이란 것이다:우키요에 풍으로 그려진 호흡과 필살기 연출 등은 확실히 애니를 보지 않는 사람들도 뒤흔들만할 정도로 강렬하다. 대표적인 예가 루이와의 싸움에서 일륜도로 목을 배는 장면의 연출이다:루이의 실을 뚫고 나가 히노카미 카구라로 루이의 목을 치는 장면은 이미 애니와 만화를 비교하는 분석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장관이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전적으로 귀멸의 칼날이 애니의 수혜만 받은 작품이라 볼 수는 없다:애시당초에 원작 만화에서 그러한 연출과 미학(우키요에를 연상케하는 화려한 색체와 굵은 붓 필치)을 정립하지 않았다면, 애니에서 재해석할만한 요소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극의 구성이나 묘사, 연출, 설정의 구성 등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귀멸의 칼날은 최근 몇년간 보였던 소년 만화의 공식에서 다소 빗겨나가는 독특한 감성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귀멸의 칼날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인물의 감정 묘사나 이런 부분들이 소년만화 답지 않게 섬세하다는 점이다. 젠이츠와 이노스케와 처음 만나고 장구 도깨비와 싸우는 초반 에피소드를 보자:여기서 탄지로는 이전 도깨비와 싸움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고전하는데, 작가는 그 부상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장남으로서의 자신의 역할, 하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 그러한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는 과정을 논리적이고 자연스럽게 전개한다. 부상 때문에 아프고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하지 않고 맞서는 것은 소년 만화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이야기들이지만, 귀멸의 칼날은 그런 난관을 더 큰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이 아닌 자신의 고난을 긍정하는 동시에 극복할 수 있는 모습에서 보통 소년만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모습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주인공인 탄지로가 갖는 미덕이 '그 나이 또래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고 구체적인 수준'의 무엇이라는 것이다. 탄지로의 주요 모티브인 장남이기 때문에 아픔을 참고 견뎌야한다는 것이나 이제는 가장이니까 남은 네즈코를 지키고 인간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것, 사람을 잡아먹는 도깨비에게 공감하고 자비를 보이는 따뜻함 등은 여타 소년 만화에서는 스케일이 커지면서 금방 희석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귀멸의 칼날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공감할 수 있는 수준의 소소한 미덕'에 집중하고 극을 이끌고 있기 때문에, 애니를 소비하는 주 소비자층에게 크게 어필할만한 부분들이 있다.

 

귀멸의 칼날은 여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서 구조 측면에서 상당히 탄탄한 모습을 보인다:마음을 잇는 자들(귀살대)와 이기심으로 살아가는 자들(도깨비들)을 서로 대립하게 두고, 그 둘 사이에서 인물과 극의 긴장감을 조성한다. 단순하지만 이러한 구조는 대단히 효과적인데, 요즘 같은 시대에 키부즈치 무잔 같은 미형 악역이 인기를 크게 못 끄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무잔은 '이기적인' + '그러면서 아전인수격으로 헛소리를 논리적으로 하려고 하는' 인물인데, 극에서 그 어떤 이입의 여지를 주지 않는 극단적인 이기심을 보여주기 때문에 오히려 이입하기보다 '생긴것과 다르게 추하기 짝이 없다' 라는 감상자의 평을 이끌어낸다.

 

결국 이러한 이기심을 극복하고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 귀살대와 마음을 잇는 자들인 것이다. 극이 전개되면 될수록 탄지로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마음을 이어나가면서 성장하고 결국에는 무잔을 쓰러뜨리는 게 된다: 자신의 동기들, 무한열차의 렌고쿠, 죽은 자신의 가족들 등등 탄지로가 이들의 마음을 잇고자 하고 그들 역시 탄지로를 이끌기 때문에 탄지로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위업들을 달성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가장 극단적인 예가 애니에서는 나오지 않았지만, 귀멸의 칼날 이후 전개에서 희대의 메리수로 불릴 수 있는 요리이치일 것이다. '그' 키부츠지 무잔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붙였지만, 정작 무잔을 죽이지 못한 점에서 전개에 구멍이라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요리이치 라도 무잔을 죽이지 못했지만 결국 그의 마음을 잇는 호흡의 계승자들에 의해서 무잔이 죽게 된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탄지로 혼자만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에 기반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은 극의 테마를 더욱 분명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결론적으로 귀멸의 칼날은 3가지 측면(섬세한 묘사, 공감 가능한 미덕과 인물들, 대칭적이고 분명한 구조)에서 미덕을 갖고 있고, 이 덕분에 일본 대중의 큰 호응을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장기연재작들이 테마나 구조에서 흔들리는 부분을 많이 보여준것과 달리, 귀멸의 칼날은 상당히 깔끔한 마무리와 구조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런 부분들은 대중적인 작품치고 호평할 부분이 많다. 애니화 되는걸 따라서 쭉 정주행해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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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은밀한 한 탕을 설계한 범죄 조직원 ‘카세’ 야쿠자와 손을 잡은 부패 경찰 ‘오토모’ 그리고, 시한부 선고를 받은 복서 ‘레오’  잃을 것 없는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바로 그날 밤 예상치 못한 유일한 변수 ‘모니카’가 나타나고 완벽했던 그들의 계획은 걷잡을 수 없이 뒤틀리기 시작하는데…(네이버 영화)

 

감독 미이케 다케시는 참으로 독특한 감독이다:빠른 제작 속도, 똘끼넘치는 연출들과 B급 감수성들, 엄청난 폭의 장르를 소화하는 모습 등등. 오디션이나 비지터 Q 같은 작품에서 역전재판이나 용과 같이 영화판 같은 작품들까지 그의 행보는 종잡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러한 종잡을 수 없는 작품의 연속에서도 미이케 다케시가 거장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그만의 뚜렷한 세계관이 있기 때문이다. 퍼스트 러브도 그러한 관점에서 미이케 다케시의 영화 세계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퍼스트 러브는 기본적으로 부조리극의 양식을 취한다:완전 범죄를 위해 세운 계획은 제 3의 변수(레오의 개입)에 의해서 무너지고, 계획의 붕괴와 함께 다양한 이해 관계를 가진 인간 군상들이 예정된 파멸을 향해 달려나가기 시작한다. 이러한 는 코엔 형제의 영화들이나 몬테 헬만의 영화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구도다. 그들의 작품들처럼 퍼스트 러브는 이러한 상황에서 극을 기묘한 긴장감으로 채워넣는다: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낀 사람들의 어색함과 계획 외의 요소가 개입하였을 때의 당혹감 사이에서 인물들은 자신의 욕망대로 튀어 다닌다. 

 

하지만 퍼스트 러브는 코엔 형제의 무덤덤하고 냉소적인 유머감각이나 몬테 헬만의 광기와 독기하고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퍼스트 러브는 레오와 유리(=모니카)가 만나면서 생기는 첫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오프닝 타이틀이 뜨기 전까지, 그들의 인생은 희망없고 생기없는 답답함의 연속이었다. 레오는 재능있는 복서였지만 태어날 떄부터 부모로부터 버림 받았고, 승리나 삶에 있어서 어떠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유리는 아버지에게 성적으로 학대당하는 환상과 마약 금단 증상 속에 갇혀서 고통받고 있다. 이 둘을 지배하는 감각은 '무력감'이다:어찌할 수 없는 환경과 상황에 대한 무력감들로 그들은 자기 자신에 갇혀서 사는 것이 아닌 삶을 연명할 뿐이다.

 

이러한 무력감은 좀 더 확대해서 본다면 일본이나 전세계 젊은 세대가 경험하는 무력감과 맞닿아있다. 그리고 무력한 젊은이들의 첫 만남은 벼랑 끝에서 이루어진다:부모로부터 버림 받은 레오는 뇌종양 진단을 받고 시한부 선고를 받았으며, 유리는 부모의 빚 때문에 조건만남을 강요당하고 몸을 팔다가 범죄 계획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개입되면서 죽을 위험에 처한다. 그들의 만남은 부조리한 동시에, 어쩌면 필연적이다:자신의 책임도 아닌 사건과 파국의 끝에서 서로를 만났기 때문이다. 같은 상황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마지막 벼랑 끝에서 서로를 만남으로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결말을 향해 나아가간다.

 

레오와 유리를 둘러싼 인간들의 다양한 욕망들과 충돌이라는 점,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휘말린다는 점에서 부조리하지만 흥미롭게도 미이케 다케시는 이 부조리를 재해석한다. 레오는 뇌종양 때문에 상대가 어이없게 뻗은 럭키 펀치에 쓰러졌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상황을 부합하는 가장 합리적인 설명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길거리 점쟁이가 의사가 확진해준 뇌종양 판정과 다르게 인생 앞으로 시작이고, 대단히 건강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에 레오가 화를 내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 뇌종양은 오진이었고 점쟁이 말이 맞았다는 사실이 나오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은 맞이한다. 당연하다 생각하는 일들(의사의 말이나, 앞날이 보이지 않는 미래, KO에 대한 적당한 설명인 뇌종양 같은)은 전복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럭키 펀치는 진짜로 '럭키 펀치'(레오의 삶에 대한)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 부조리함은 일종의 '기적'과도 같은 상황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기적은 상황을 새로운 국면으로 이어나가게 한다:신주쿠 한 복판에서 유리가 약과 트라우마 때문에 환각을 보지 않았다면 레오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레오가 뇌종양이라 진단받지 않았다면, 상대가 운좋게 휘두른 럭키 펀치를 맞지 않았다면 유리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의 어찌할 수 없는 삶에서 만났던 기적과도 같은 부조리함이 레오의 첫사랑First Love을 만나게 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미이케 다케시의 센스는 여기서부터 빛을 발한다:애시당초에 삶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갈 수 밖에 없는 것이라 한다면, 그것이 조리에 맞고 이치에 맞는 것이 좋을 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황당하고 어이없는 부조리한 상황들을 대단히 유쾌한 무언가로 표현한다:예를 들어 카세가 주리를 기절시키고 아파트에 데려다 주는 시퀸스를 보자. 침대에 주리를 내려놓고 아파트를 나가려는 순간에서 갑자기 주리의 어머니가 튀어나온다. 카세가 '보통은 혼자 사는거 아니냐고'라고 불평하는 장면과 주먹 한방에 죽어버린 주리의 어머니, 카세가 화재로 주리와 범죄현장을 은폐하려 하지만 '앗뜨거'하면서 튀어나와서 살아남는 주리까지, 이 모든 것들이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부조리의 연속'이다. 하지만 이 말도 안되는 부조리들이 이어지면서 주리는 카세를 뒤쫒을 방법을 야쿠자에게 알려주고, 이야기는 흘러가게 된다. 극 중반 이후부터의 모든 이야기들이 이런 '부조리함'의 연속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것이 가장 빛나는 순간이 바로 카세와 레오, 유리, 그리고 오토모가 처음으로 만나 차에 타고 서로 뭐하는 인간들인지를 물어보는 시퀸스일 것이다:쉴세없이 카메라를 한 인물에게서 다른 인물로 핑퐁하듯이 빠르게 넘기는 이 장면에서 미이케 다케시는 이 부조리한 상황을 유쾌한 코미디로 승화시킨다. 분명 피가 튀고 사람이 죽는 심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묘하게 희망찬(?) 탈출구를 보여준다는 점과 황당할 정도로 웃기다는 점에서 퍼스트 러브는 미이케 다케시 식의 '멋진 인생'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배경은 크리스마스가 아니지만 말이다.

 

또 눈여겨 봐야할 점은 미이케 다케시가 바라보는 영화속 공간들이다. 일본의 현대적인 풍경과 달리, 퍼스트 러브의 세계는 쇠락하고 우울하며 시대착오적이다. 뒷골목의 쓰러져가는 중국집, 복싱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스포츠, 유리가 살았던 무너져 가는 판잣집들, 일본의 밤거리, 그리고 마지막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공구 쇼핑몰들이 그러하다. 인물들 역시 풍경의 연장선에 존재한다:더 나아가서 시대착오적으로 행동하는 야쿠자와 중국 마피아들, 복서인 레오 등등. 미이케 다케시는 멋지고 아름다운 세계가 아닌 구질구질하고 버려진 세계에 집중한다. 

 

이러한 기적과도 같은 일들이 끝나고, 레오와 유리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분명 어제와 다르지 않은 상황이지만, 이 둘은 서로를 의지하며 무엇보다도 살아있다는 에너지로 충만하게 된다(재활치료를 하는 유리의 모습이나 레오가 권투 시합에서 이기고 환호하는 모습을 보라) 젋은이가 서로를 의지하고 지탱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희망과 미래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미이케 다케시의 퍼스트 러브는 재기발랄하고 독특하지만, 동시에 희망과 따스함을 잃지 않은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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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코미디라는 장르는 웃음이라는 감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장르다. 하지만 웃음이라는 감정이 어떤 감정인 것일까? 웃음이라는 감정을 정의하는 것은 여러 것이 있지만,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웃음의 특수성은 '위치의 변화'일 것이다:웃음은 어떤 소재의 높낮이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만약 높은 위치를 점하는, 예를 들면 고상하거나, 위대하거나, 아름답거나 한 것들이 추하거나, 하찮거나, 비루한 것이 되었을 때, 그 '높이의 차이'에서 우리는 웃음이라는 감정을 느낀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몬티 파이썬의 코미디들(비행 서커스나, 성배나, 브라이언의 생애 같은)일 것이다. 몬티 파이썬의 코미디들은 기본적으로 70년대의 영국의 엄숙주의에 기반한다. 위대한 영국, 성과 예절에 엄격했던 영국의 사회 분위기는 성과 권위에 대하여 대단히 엄격하였다. 몬티 파이썬이 파고드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이들은 성과 권위의 단단하고 높은 위치들을 '추락'시킨다. 엄숙한 초상화들은 외설적인 그림과 사진들과 콜라주 되어서 뛰어놀고, 높은 권위를 가진 자들(판사나, 음악가 같은)은 이상한 개념에 집착하여 촌극을 빚어낸다. 부조리하면서 떄로는 초현실적인 개념의 연결을 통해 웃음을 만들어내는 몬티 파이썬의 코미디는 이후 많은 코미디 장르에 영향을 끼쳤다.

 

몬티 파이썬의 코미디가 지금까지 회자되는 부분은 몬티 파이썬의 코미디가 단순한 스탠드업 코미디의 말장난이나 좌충우돌의 슬랩스틱식 코미디를 벗어나서 '영상매체'의 특수성을 십분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콜라주되는 이미지들도 그렇고, 각종 편집을 이용한 컷과 시퀸스의 배치와 배분, 연결들을 통해서 권위를 추락시키거나 생소하고 낯선 상황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사용한다. 물론 TV 코미디 프로그램 스러운 '웃음'을 삽입하여 웃음 포인트를 명확하게 잡는 부분들은 TV 프로그램 스러운 부분들이고, 각각의 에피소드들이 옴니버스 방식으로 따로 논다는 점에서 TV 코미디 프로그램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영화의 경우, 몬티 파이썬의 코미디의 특성이 영화적으로 드러났을 때 어떻게 보여지는지를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브라이언의 생애다:이 영화는 예수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브라이언이라는 남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종교와 정치에 대한 풍자를 이어나간다. 꽁트적인 성격이 드러나는 성배와 다르게 기승전결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브라이언의 생애는 '영화'라는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 드러난다. 기독교에 대한 강도 높은 비꼬기(메시아와 종교, 그를 따르는 사람들까지)를 보여주는 영화는 십자가에 메달린 사람들이 브라이언에게 삶이란 부조리 하며, 그걸 있는대로 받아들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끝을 낸다:이러한 장면에서 영화는 코미디의 핵심이 '부조리함'과 '높은 권위를 추락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흥미로운 점은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들(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이나 세브린느, 비리디아나, 욕망의 모호한 대상 같은)도 이러한 특성(부조리함과 권위를 추락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루이스 부뉴엘은 초현실주의 사조를 이끈 감독으로 유명한데, 영화 내에서 부르주아의 문화들과 관음증들을 상징과 교차하여 배치하고, 지배계급에 대한 차가운 경멸을 쏟아낸 것으로 유명하다. 루이스 부뉴엘이 이러한 경멸을 표현한 방식도 몬티 파이썬이 이용한 코미디의 방식과도 유사하다. 자유의 환상을 예로 들어 보자:자유의 환상에서 부르주아들은 응접실에 설치된 화장실 변기에 앉아 배설하면서 대화를 나누고, 화장실에 설치된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한다. 이렇게 교양을 차리는 식사와 은밀하게 용변을 보는 것을 서로 뒤섞어 놓음으로 부르주아가 갖고 있는 권위를 추락시키는 것이 부뉴엘의 방법론이다.

 

하지만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들은 코미디의 방법론을 따르는 것과 별개로 전혀 '웃기지' 않는다. 이를 이해하려면 몬티 파이썬의 코미디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몬티 파이썬의 코미디들에서 권위는 추락하여 특정한 '위치'에 도달한다. 예를 들어 동성애에 대한 르포를 쥐 옷을 입는 사람들로 치환시켜서 만든 꽁트에서는 동성애라는 당시 무거운 주제가 쥐 옷을 입는 사람들이라는 사소하고 엉뚱한 것으로 치환되어 사소한 것에 대해 엄숙함과 이상함을 느끼는 사람들의 세태를 비꼬는 것으로 바꾼다. 혹은 브라이언의 생애에서는 메시아의 삶은 평범한 젊은이의 삶으로 추락하는 것도 이러한 방법론이라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코미디의 방법론에서 추락은 결국 '어느 일정한 위치' 까지 떨어뜨리는 것이다.

 

하지만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에서 추락은 '어느 일정한 위치'에 도달하지 않는다. 오히려,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에서 추락은 무한한 상태다. 자유의 환상에서 한 에피소드를 보자:옥상에 올라서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총을 난사하던 남자는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사형을 언도 받는다. 그러고 나서 남자는 담배를 한까치 태우고, 변호사와 검사와 악수를 한 뒤에 재판정에서 나와 사람들 사이로 유유히 사라진다. 이 에피소드에서 보여지는 것은 법정과 법에 대한 권위의 추락이다. 하지만 그들이 도달하고 치환되는 지점은 과연 어디인가? 이 에피소드에서 법과 제도는 추락하고 기능을 상실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웃고 즐길 수 있을 만큼 '안전한' 위치에 도착하지 않는다.

 

이는 부뉴엘이 겪었던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한 것일지도 모른다:스페인 인이었던 부뉴엘은 프랑코 정부 수립 후 망명하며 전세계를 떠돌면서 살았던 사람이다. 그가 바라봤던 세계는 절망으로 가득찼을 것이다:혁명은 실패하고, 학살은 묵인되며, 시위는 무자비하게 탄압당했다. 실제 그의 영화들에서 실제의 사건에 모티브를 둔 부분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절멸의 천사는 실제 학살을 방조한 지배계급에 대한 비판이며, 자유의 환상의 엔딩은 당시 시위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의미하는 부분이었다. 신성모독으로 유명한 비리디아나의 경우에는 가톨릭 성찬식을 빈민들의 만찬과 섹스로 치환시켜 종교의 권위를 무너트렸고, 어느 하녀의 일기는 아동 성추행 살인범이 파시스트가 되는 결론으로 이끈다.

 

그렇기 떄문에 부뉴엘의 영화는 부조리 코미디 장르를 따르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전혀 웃기지 않고 싸늘하다. 어디에도 희망은 없고, 절망의 끝은 없다. 희망이 없는 곳에서는 웃음도 없는 법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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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소설과 영화, 이야기라는 구조는 기본적으로 허구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이들이 허구라는 것이 아니라 '실제하는 것으로 믿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영화는 가장 이 이상에 가까울 것이다:실제하는 것들(사람, 풍경과 같은)을 가상을 연기하기 때문에, 실제하는 것이라 사람들이 쉽게 믿을 수 있는 요소가 있다. 벤야민이 언급한 배우의 거짓된 아우라가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는 가장 비슷한 개념일 것이다:영화의 이미지를 실제 배우에 이입하여 배우를 숭배하는 것이야 말로 실제와 영화의 가상을 서로 혼동하는 사례라는 것이 벤야민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들(살인의 낙인, 동경 방랑자, 야수의 청춘 등등)은 이러한 대전제를 정면으로 뒤집는다. 기본적으로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들은 장르 영화의 공식을 따르는 동시에 'B급 싸구려' 테이스트가 강하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이 'B급 싸구려'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B급 영화들은 기본적으로 목적성(특정 대상의 관객을 만족시킨다, 특정 장르의 문법을 충족한다)을 갖고 있는 동시에, 제한된 예산과 연출들로 영화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소위 B급 영화의 연출 같은 것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는 이러한 B급 영화의 테이스트와 일반적으로 다르다. 기본적으로 B급 영화들은 이러한 흐름들을 속이려 한다:마치 아무리 그것이 속임수를 쓴다 하더라도 그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뻔뻔하게 영화의 흐름에 녹여내려 한다. B급 영화의 미덕이라 할 수 있는 이 부분은 아무리 속임수를 진실처럼 믿고 할 수 있는 최대한을 보여주려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는 이 거짓을 '진짜'라 생각하지 못하게끔 만든다. 살인의 낙인 같은 작품에서 종이 연극을 이용해서 연출을 하거나 하는 등에서 이러한 부분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연출이나 미장센들은 스즈키 세이준이 웃기려고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방증한다. 코미디 영화에서 웃기는 부분들은 기본적으로 웃기려는 의도들을 내재하였지만,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들은 '원래 그러한 것(장르 영화의 공식)을 거짓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구성의 핵심은 강박적인 공간의 구성과 연출이라 할 수있다.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는 의도적으로 작위적인 구성을 보여준다. 야수의 청춘에서 한 컷에서 두 공간이 서로 다른 원색으로 구성하거나, 하나의 공간에 투명 유리를 배치해두고 서로 다른 일이 일어나게끔 하여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하지만 이러한 연출들이 실수가 아닌 전적으로 '의도된 것'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B급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강박적인 흐름일 것이다. 장르 영화 공식에서 찾아볼 수 없는 쓸모 없거나 의미없는 설정들을 강박적으로 추구함으로 영화 전반에 불협화음을 만드는 것이 스즈키 세이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강박증과 불협화음이 아름다움으로 두드러지는 부분들이 바로 공간의 구성일 것이다:스즈키 세이준 영화들은 기본적으로 현실에서 찾아볼 수 없는 구성의 공간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구성된 '스튜디오'들을 활용한다. 동경 방랑자의 마지막 시퀸스의 컷구성이나 황량한 바람이 불어오는 창밖에서 여성을 채찍질하는 시퀸스의 구성 등등은 작위적인 미학으로 차 있다.

 

물론 이러한 구성이 벤야민이 지적한 거짓된 아우라를 비판하기 위함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스즈키 세이준이 추구한 것인 어린아이가 추구하는 '전복적인 재미'라 할 수 있다. 장르와 마초이즘, 야쿠자에 대한 환상을 전복하여 강박적이고 바보같이 보이게 만드는 것, 그 속에서 일반적인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연출을 추구하는 것이 스즈키 세이준 영화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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