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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야기

 

사람들이 종종 간과하는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은 정치적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홀로 사는 동물이 아니고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고,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생기는 다양한 관계성과 위계들이 다양한 맥락들을 만들어가며 우리가 다양한 것과 정치적 상호작용을 이끌어내게 만든다. 정치란 것을 단순히 어떤 슬로건이나 계파성, 당파성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표면적인 흐름이다. 더 깊게 살펴본다면 당파나 계파로 대표되는 정치가 아닌 우리 삶의 가장 깊숙한 곳에 뿌리내리고 있는 정체성이나 생각, 무의식에 의한 정치도 가능하며, 그것에 의해서 종종 우리는 무의식적인 정치에 지배되기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헬블레이드 2는 정치적인 게임이다:전작은 신화에 대한 재해석이자 깨져버린 정신이 어떻게 회복되고 치유될 수 있는지, 트라우마의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조셉 캠벨의 뒤틀린 버전의 신화학이었다. 헬블레이드 1은 그 자체로 깔끔하게 완결된 작품이었는데, 신화와 현실의 경계가 개인의 트라우마와 깨진 정신에 의해서 모호하게 바뀌고 재해석 되는 과정을 조현병 환자의 병증과 신화적인 모티브들을 연결지어놓고 신화와 개인적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다뤄냈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완결된 작품이었다. 즉, 헬블레이드 1편에서 이미 개인과 신화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완결되었기 때문에, 1편과 같은 테마로 이야기를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편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좋아했던 작품의 2편이 나온다는 소식에 흥분하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걱정이 들었던 부분이 바로 이부분이기도 하였다.

헬블레이드 2는 신화가 어떻게 정치가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헬블레이드2는 신화를 더이상 세누아의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닌 사실로 만들어야 했다. 헬블레이드 1편과 2편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다른 사람’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1편에서 모든 인물들이 세누아의 머릿속과 기억, 환상에서만 존재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외부의 인원이 등장한다는 것은 1편의 대전제를 흔드는(개인의 트라우마와 신화와의 혼동, 그리고 그것의 극복) 구조다. 하지만 1편이 마무리되었기 때문에(=트라우마는 극복하고 치유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깨달음을 토대로 타인과 교류한다는 점에서 2편의 이야기는 실제 살아있는 인물과의 관계성을 중요시하는, 1편과 다른 양상을 띌 수 밖에 없었다.

헬블레이드 2의 메인 플롯이 일종의 ‘정치적인 해방서사’라는 점에서 헬블레이드 2의 정치성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헬블레이드 2에서 바이킹이 지배하는 땅은 거인들에 의해서 황폐화 되고, 거인들을 달래기 위해서 바이킹들은 픽트족 노예를 잡아다 바친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무적으로 보였던 거인들은 각자 사연이 있는 인간들이 크나큰 원한으로 변한 신화적인 존재며, 세누아는 이들의 진명을 불러 화해함으로 거인을 잠재우고 더이상 노예와 희생없는 세상이 온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 과정에서 노예상이었던 자와 현자, 여전사와 같은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그 사람들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는 구조는 희망에 근거한 연대가 이루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세누아의 역할일 것이다. 재밌는 점은 조현병에 대한 표현이 1편과 사뭇 달라졌다는 점인데, 1편에서 조현병은 깨져버린 정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분열된 음성을 집어넣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다면, 2편에서의 조현병은 세누아의 다양한 모습을(약한 모습에서 강한 모습까지) 드러낸다. 1편에서 세누아의 정신이 트라우마에 의해서 없는 환상을 만들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과정이었다면, 2편에서는 그러한 트라우마를 극복하였기 때문에 그녀의 장애는 오히려 세상을 달리 보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자리잡는다. 재밌는 점은 머릿속의 목소리들이 약한 소리를 내거나 잘못된 선택을 유도하는 이야기를 하더라도(유일한 무기인 칼을 건내주는 시퀸스라던가) 세누아가 종종 거기에 거스르고 앞으로 나서는 모습은 그녀가 더이상 트라우마나 자신의 장애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닌 그것을 뛰어넘는 사람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부분인데 이러한 점이 그녀를 다른 인물들보다 더 멀리 보고 이끌어줄 수 있는 위치에 놓는 사람으로 만든다.

세누아가 그녀의 독특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신화의 세계는 신화가 아버지로 대변되는 잔인하고 냉혹한 질서의 세계가 아닌 각자 사연이 있는 사람들의 비극과 연대에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세계다. 그리고 아버지로 대변되는 압제가 어떻게 신화를 이용해 공동체를 억압하고 탄압하는지를 게임 초반에 이를 중요하게 다룬다. 신이 떠난 세계에 아버지로 대변되는 억압자들이 만들어낸 신화의 세계에 똑같이 파괴와 억압으로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신화의 희생자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화해함으로써 그들이 이 세상에 있었음을 인정하는 구도는 1편의 논의를 적절하게 확장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점에서 마지막 거인이 압제자 자신이었다는 점은 어느정도 예측되는 반전이었다. 압제자가 자신의 압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 거인을 만들고, 거인을 통해서 자신의 압제를 정당화하는 과정은 여러 작품에서도 볼 수 있는 모티브다. 그러나 재밌는 점은 헬블레이드 2는 아비저를 따르는 압제자의 아들인 노예상이 세누아와 여행을 하면서 점차 변하는 과정도 함께 집어넣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노예상의 케릭터는 세누아와 여러가지 점에서 대비되게 만들어두었다(남자와 여자, 억압자와 해방자 등) 그렇기에 그것은 억압 받는 자와 해방하는 자 사이 뿐만 아니라 억압하는 자의 각성과 연대를 촉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야기는 성숙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여기서 논하는 것은 헬블레이드 2가 정치적으로 첨예한 논리와 논쟁을 다루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헬블레이드 2는 신화에 근거하여 가장 오래된 형태의 정치, 사람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단순한 형태의 상징과 정치에 대한 논의를 하려고 한다. 물론 완성도 측면에서는 헬블레이드 1이 더 높지만(다양한 신화적 맥락을 엮어서 새로운 신화적 맥락으로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헬블레이드 2는 이야기와 세계관을 확장시켜서 고민할 거리를 늘렸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다만 게임 플레이 관점에서 보면, 헬블레이드 1편의 퍼즐보다 더 단순해지고 전투도 단조로워져서 이걸 게임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싶을 정도로 워킹 시뮬레이터에 가까워진 부분이 있다. 물론 게임의 스토리나 연출, 그리고 플레이어가 경험한다는 측면에서 게임이라는 장르적 특징은 갖고 있는 작품이긴 하지만(=그래도 게임으로 냈어야 제대로 이야기 전달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재미의 측면에서 본다면 오히려 몇몇 부분은 전작보다 후퇴한(퍼즐 푸는 재미나 이런 점에서) 게임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헬블레이드 2는 1편의 담론을 이어받아 확장시킨 작품이고, 고민이나 생각을 많이 한 작품이다. 경험하기로는 좋은 작품이긴 하지만, 모두에게 추천할 수는 없는 것이 게임으로 아쉬운 부분들이 많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1편 자체도 이미 호불호가 너무 심하게 갈리는 작품이라 모두에게 추천하기에는 좀 그런 작품이라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다면, 게임 패스를 통해서 경험해보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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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피곤하네요

게임 이야기

 

미니어처 워게임과 보드게임 장르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이야기한다면 대단히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릴 것이다. 이미 이름에서 차이가 나듯이 장르적으로 이 두 게임들은 자신만의 독자적인 문법을 구축하였고, 팬층도 다르고 소비하는 문화도 다르다. 물론 이 둘은 공통적인 요소들을 갖고 있다:물리적인 컴포넌트와 규칙을 통해서 상호작용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을 유사한 가족으로 분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이 과연 이 둘을 나누는 중요한 분수령이 되는가이다:분명 문법의 관점에서 본다면 미니어처 워게임과 보드게임은 정말로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 둘을 구분하는 그 얇지만 선명한 기준에 대해서는 잘 다뤄지지 않는다.

미니어처 워게임과 보드게임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측정measuring이라고 하는 부분이다. 자를 이용한 측정을 통해서 플레이어들은 작게 축소된 세계miniature에서 거리를 판단하고 행동을 수행해나간다. 물론 각각의 개별 미니어처 게임들이나 보드게임들을 따지면 반례들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가령 옵시디언 프로토콜 같은 게임은 미니어처 게임의 장르로 분류되면서도 행동과 이동을 그리드 단위로 구분짓는다. 그러나 단순히 실제의 거리를 측정하는가 아니면 그리드 단위로 하느냐의 행동 문제보다는 미니어처 워게임에서 중요한 것은 측정이 갖는 행위의 추상적인 의미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맥락의 연계성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미니어처 워게임은 미니어처의 세계, 즉 세계의 축소를 다룬다. 28mm 스케일, 32mm 스케일 등등 세계를 작게 축소하여 바라본다는 점에서 게임의 핵심적인 철학과 문법을 구축한다:세계의 축소이기 때문에 미니어처 워게임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이 세계의 규칙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라는 것이다. 가령 게임 내에서 하나의 모델이 존재한다면 그 모델이 다른 모델과 상호작용하는 요소들이 아무리 단순화되어 있어도 주사위나 그외의 요소들을 이용해서 상호작용할 수 있게끔 설정한다. 이러한 법칙의 가장 극단적인 예가 미니어처 워게임 인피니티다:인피니티는 미니어처 워게임으로 하는 TRPG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자세한 규칙과 시스템들을 자랑하는데, 단순히 공격과 이동에 대한 규칙 외에도 TRPG에서 볼 수 있는 스킬체크 등의 요소들도 충실히 구현되어 있어 단순히 싸움을 잘하는 것 외에 얼마나 지적으로 유능한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수치들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TRPG와 미니어처 워게임의 서로 비슷한 요소들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핵심적으로 차이가 나는 부분들이 있다면 이 바로 축소라는 내용일 것이다. TRPG는 세계 자체가 스킬 체크 형태로 추상화 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추상화된 행위로 모든 것을 스킬 체크의 형태로 등치시켜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과 세계 그 자체인 마스터의 존재 때문에 게임 문법이 세계 전체를 다룬다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TRPG에서 중요한 것은 플레이어와 마스터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협상의 영역도 중요하다. 하지만 미니어처 게임에서는 규칙을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거나 세계를 대변하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규칙의 관점에서 본다면 추상화된 TRPG보다는 좀 더 단순하고 직관적인 구조를 띈다.

미니어처 워게임에서 중요한 점은 당연하게도 미니어처라는 요소다:축소된 세계에서 플레이어는 미니어처라는 컴포넌트를 통해서 세계와 상호작용 한다. 이 상호작용이라는 요소는 위에서 설명한 TRPG 적 요소와 맞물리면서 작은 시뮬레이션 효과를 불러일으킨다:세계는 축소되었고 나름의 규칙이 있다. 이 규칙이 존재함으로써 그 세계에 맞게 축소된 미니어처들은 그 나름의 규칙에 따라서 다른 컴포넌트와 상호작용을 하면서, 맥락을 만들어내고 상상속의 치열한 전투와 드라마들을 만들어낸다. 즉, 작아진 세계와 단순화된 규칙이 미니어처라는 매게를 만나서 맞물리면서 다른 게임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특성을 갖게 만드는 것이 미니어처 게임의 장르적 특수성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측정한다는 행위는 단순히 거리를 재는 것이 아닌 시뮬레이션을 하기 위한 중요한 행위 단위로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선측정이라는 개념도 중요하다:선측정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측정을 통한 행동을 하기 전에 먼저 측정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몇몇 게임에서는 선측정Pre-Measuring 자체를 엄격하게 금지하기도 하는데, 이는 어떻게 본다면 철저하게 플레이어라 하는 게임 외부의 존재가 아닌, 축소된 세계 속의 미니어처 모델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게 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모든 미니어처 게임이 선측정을 금지하는 것은 아니지만(일례로 인피니티가 선측정 자체를 막지 않는다), 측정과 모델, 그리고 그 둘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해서 다루는 규칙을 이해하는 것으로 미니어처 게임들이 세계를 어떻게 구성하는지 알아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보드게임과 미니어처 워게임은 분명하게 구분되는 기준이 있다. 보드게임들의 목적은 축소된 세계를 구현하는 것이 아닌 분명한 규칙의 흐름에 근거한 게임들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설명할 필요도, 규칙간의 충돌도, 플레이어가 측정을 통해 규칙을 판단하거나 하는 등의 요소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미니어처 워게임의 경우, TRPG와 보드게임 사이의 경계에 놓여있다. TRPG와 달리 물리적인 규칙과 시스템의 간소화를 분명하게 요구하지만, 동시에 시뮬레이션이라는 측면에서는 기존의 보드게임에서 보여줄 수 없는 드라마틱한 상황들이 미니어처 게임에서는 일어난다. 

물론 좀 더 논의를 확장하여 본다면 이러한 점들 때문에 미니어처 워게임과 보드게임, 혹은 다른 게임 장르 사이의 장르적 구분을 모호하게 만드는 게임들도 꽤 등장하기도 한다. 옵시디언 프로토콜과 같은 게임이나, 언더월드 같이 TCG와 보드게임 사이를 오가는 게임들이 그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르적인 구분이란 철저하게 어떠한 정의를 따라간다기 보다는 비트겐슈타인이 이야기했던 가족 유사성의 관계를 띈다고 하는 것이 더욱 적절할 것이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4편의 에반게리온 극장판들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인구에 회자된 물건이라 할 수 있다. 거의 20년에 걸쳐서 펼쳐진 장대한 이야기는 마지막에 도달했을 때 끝낸 결론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을 화나게 만든 부분이 있었다. 도돌이표에서 안노가 했었던 것은 에반게리온이라고 하는 작품의 팬덤을 ‘강제로’ 성불시키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은 소년의 이야기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다루는 것이 에반게리온 극장판의 핵심인데 이러한 과정이 대사에 너무 의존한 나머지 졸업에 과정에서 인물들이 납득하기 힘든 부분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런 아쉬운 점들에서 미묘한 지점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에반게리온 극장판들의 큰 흐름들이 생각보다 짜임새가 있다는 것이다. 기나긴 기간 동안 스토리가 바뀌고 방향성이 바뀐 부분들이 있지만 서-파-Q-도돌이표 로 이어지는 흐름을 ‘에반게리온의 졸업‘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부분들이 많다. 서에서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면서 더 나아가고자 하는 신지의 모습, 파에서 스스로의 행복을 구하기 위해서 서드 임팩트를 일으키며, 큐에서는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책임과 여진을 바라보며 혼란에 사로잡힌 모습, 그리고 마지막 도돌이표에서는 그러한 것들을 딛고 한 단계 성숙해지며 아버지를 긍정하는 모습까지 보이는 신지의 모습까지, 한 작품을 졸업이라는 테마로 엮어서 본다면 오히려 말이 되는 구성을 보여준다. 실제로 성장의 과정에서 있을 법한 고난과 깨달음의 과정이 작품별로 테마가 존재하고 있었고, 4작품이 아닌 하나의 작품으로만 판단한다면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괜찮은 부분들이 있었다.

극장판의 가장 큰 문제는 각 작품별로 테마가 바뀌었다는 것이 아니라 극장판이 발매된 각각의 기간이 너무나 길다는게 가장 컸다. 개봉 텀이 너무 길다보니까 사람들은 서가 에반게리온의 새로운 테마인 것으로, 그리고 파가 에반게리온의 새로운 테마인 것으로, 큐가 에반게리온의 테마인 것으로 오해를 한 것이다. 각각이 한 작품의 일부에서 과정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라는 걸 사람들이 잊어버릴 정도로 긴 텀을 들여서 이야기를 전개하다 보니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에반게리온 특유의 현학적인 대사와 말로만 풀어서 이야기를 진행시키려는 전개 방법도 큰 문제가 있었다. 분명 납득이 가능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에반게리온 특유의 화법으로 풀어내게 되니 일단 이해가 안되는 부분들도 많을 뿐더러 이야기가 관객들의 기억에 남지 않는다는 부분도 많았다. 

그러나 에반게리온 극장판 4부작에서 좋게 평가할 수 있는 부분들은 에반게리온이 단순하게 맥거핀이나 설정 등을 성장의 과정을 통해서 다시 재포장 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기존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이 에반게리온의 자극적인 점들만 모아서 만들어낸 내용이었다면, 에반게리온 극장판 4부작은 성장과 졸업이라는 측면에서 ‘어른이 된다’라는 것을 어떻게 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특히나 도돌이표 부분의 귀농(?) 파트는 안노의 완숙미가 드러나는 부분으로 일부러 템포를 쉬어가면서 신지라는 케릭터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성인이라면 납득가능하게 표현했다는 점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이러한 완급의 조절은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자극적인 내용과 연출에서 느낄 수 없는 완숙미가 있었던 부분인데, 창작자가 나이가 듬에 따라서 생각이나 표현법이 달라지는 부분들이 있고 그런 부분들이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여지없이 증명한 것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에반게리온이 장장 15년에 가깝게 여러번 테마를 바꾸면서 관객들을 혼란으로 몰았다는 점에 있다. 어디까지가 감독이 의도한 바인지, 아니면 컨셉이 바뀐 것인지 우리는 지금에 와서 알기 힘들다. 그러나 우리가 각각의 극장판을 보았을 때는 '그 극장판이 에반게리온 극장판 4부작의 전체 테마가 된다'라고 믿을만한 합당한 근거들이 있었다. 만약 우리가 끝을 알고 있었다면, 도돌이표에 대한 사람들의 엇갈린 평가는 다소 사그라들 수 있었던 것이다.

감독이 에반게리온으로부터 관객들을 강제로 졸업시키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에 대한 부분은 차치하더라도, 에반게리온에는 여러가지 문제들이 있다. 우선 액션의 규모를 키워서 연출을 큼지막하게 하려 했지만, 정작 무게감이나 연출의 강렬함이 부족하여 허공에 허우적 거리는 듯한 인상이 있는데 특히 대단원을 장식하는 도돌이 표에서는 이런 부분들이 대단히 강하게 드러난다. 어이가 없는 점은 역으로 군함이 나오는 쪽의 연출은 너무 힘이 들어가서 이것이 과연 에반게리온이 주제인 영화인지 아니면 군함이 주제인 영화인지 햇갈리는 촌극이 생기기도 한다. 또한 영화 내내 이어졌던 스토리들이나 설정들의 변화도 다소 어색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에반게리온 극장판 4부작, 특히 마지막 도돌이표의 미덕은 에반게리온을 졸업시켰다라는 개념보다도 '에반게리온으로 대표되는 유년 시절을 긍정한다'에 가깝고 거기서 느껴지는 관록은 나름 인상적인 부분들도 있다. 특히 절대적인 타자였던 이카리 겐도를 극 중으로 끌어들인 부분은 보기에 따라서는 다소 억지스러울수도 있겠지만, 에반게리온의 이야기가 겐도, 즉 아내에게 집착한 미성숙한 어른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도 감안한다면 인상적인 부분이 있다.

결국 에반게리온 극장판 4부작은 짧은 기간(4~5년)에서 이어져서 만들어지고 소비되거나, 혹은 더 나아가서 TVA 같은 형태로 제작되었다면 이정도로 논란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너무 긴시간에 들여서 뜸을 들이고 더 나아가서 극의 톤이나 설정들이 바뀐 부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정도로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안노이기 때문에 에반게리온을 어떻게 끝내야 한다라는 관점과 성숙함을 추구할 수 있었다는 점은 극장판 4부작, 특히 도돌이 표의 미덕이라 할 수 있다. 기회가 된다면 짧은 텀에 몰아서 보는 것을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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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이번달은 안쉬고 글 씁니다 흑흑....

게임 이야기



처음 오큘러스 퀘스트 2(현 메타 퀘스트 2)를 구매하였을 때의 인상은 기기 자체는 완성되어 있지만, 소프트웨어가 그만큼 따라오기 힘들다 였었다. 하프라이프 알릭스와 같은 이레귤러 작품들을 제외한다면, VR 게임들의 기믹은 너무 얕고 반복적인 부분들이 많거나 혹은 게임 플레이에 집중한 나머지 VR이라는 요소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문제들이 있었다. 이는 VR 게임이 플레이 되는 환경에 기반한다:하드웨어 조작의 특수성으로 일반적인 패드/키보드+마우스 기반의 게임 플레이와 차이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는 점, 그리고 서서 플레이를 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어느정도 운동을 수반하여 체력소모가 심하다는 점, VR 기기 특성상 필연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점 등으로 인해서 기존 콘솔 게임의 게임 플레이를 재현하지 못하고 완전히 새로운 영역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하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30년 가까이 되는 게임의 역사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걸음마의 단계를 다시 거치는 것이 VR 게임의 현상황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메타 퀘스트 3로 넘어오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정확하게는 기기가 바뀌었다기 보다는 약 2~3년 간의 소프트웨어의 트랜드들이 바뀌고 노하우가 쌓여서 바뀌었다는게 정확할 것이다. 몇몇 가지 게임들을 예로 들어보자:거대한 메카닉에 타고 권투를 하는 게임 언더독의 경우, 첫 인상은 메카닉을 타고 주먹을 휘두르는 일반적인 VR 권투 게임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전 2~3년전 vr 게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창적인 방법으로 이동의 문제를 해결함으로 공간을 넓게 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움직일 때 실제 공간에서 움직이거나 스틱을 이용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닌 두 팔로 땅을 찍어서 마치 고릴라가 팔을 이용해서 움직이는 것처럼 이동을 표현하였다.

두 다리나 스틱을 이동 수단으로 쓰는 조작법은 관념적으로 직관적이지만, 실제로는 많은 한계를 갖고 있는 조작방식이었다. 우리가 실제 움직이는 공간과 게임을 하는 공간이 일치한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두 다리와 스틱을 쓰는 이동 방식은 인식되는 공간과 실제 공간 사이의 괴리 때문에 미끄러지는 듯한 움직임으로 3D 멀미를 유발하거나 제한적인 공간 때문에 한정적인 움직임을 보장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두 다리를 바닥에 접지시킨채로 두 팔만 이용한 이동 조작의 등장은 많은 것을 바꾸게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다리를 접지시킨다는 점이다.  스웜이라는 게임을 예로 들어보자. 이 게임은 플레이어가 360도 상하좌우로 날아다니면서 마치 스파이더맨처럼 파쿠르를 하며 총을 쏘는 게임인데 신기하게도 카메라를 이리저리 뒤흔드는데도 3D 멀미를 크게 유발하지 않는다. 이는 카메라 자체를 미세하게 흔들다기보다는 카메라를 움직이는 폭이 시원시원하고 크기 때문에 사람이 인식하고 멀미를 느끼지 않게끔 해준다. 

즉, 카메라와 조작에서 신체의 중요한 기준점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며, 그것이 다리가 된다는 점, 그리고 그 다리가 기준이 되기 때문에 팔이 조작의 연장이 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조작은 어디까지나 과도기 적이다. VR 트레드밀이나 신경 조작, 더 나은 조작 방법 등이 등장하게 되면 이러한 연장 방법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과도기의 방법이다. 그러나 VR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민한 방식이나 연구한 방식은 앞으로도 연구할 가치가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게임 이야기

 

* 현재 알파~베타 테스트 중인 게임으로 앞으로 많은 것이 바뀔 수 있는 점 유의 바랍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게임들이나 콘셉들은 이미 누군가 시도했거나 테스트의 형태로 구현해본적이 있는 것들이다. 둠이나 울펜슈타인 이전에 1인칭 슈터 게임들이 있었지만 사람들이 그 모든 것들을 기억해주지 않는다. 그것은 둠 이전의 작품들은 둠과 같은 디테일과 완성도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구현을 했다 라는 사실이 아니라 구현을 어떻게 하였는가라는 영역일 것이다. 최초라는 타이틀은 의미가 없다. 최초가 아니더라도 어떻게 잘 구현했는가가 더 중요하다. 

데드락은 벨브에서 나온 게임으로 AOS와 소위 세간에서 이야기하는 히어로 슈터를 섞어놓은 작품이다. 플레이어는 라인을 따라 움직이는 미니언들과 함께 적의 본진을 파괴하는 것이 목표다. 그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상대 미니언들을 사냥하면서 레벨을 올리고 장비를 맞춰서 더 강해진다. 이러한 과정들은 이미 리그 오브 레전드나 도타 2에서 봤었던 기본적인 AOS의 흐름이고 데드락 역시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심지어는 데드락이 구현하려고 하는 게임의 흐름은 이미 다른 게임들에서 구현하려고 노력한 역사가 있다. 데드락이 대단한 이유는 이런 게임이 처음이라서가 아니라 그동안 다양한 게임들이 시도했었던 것들을 얼마나 잘 만들도록 끌어올렸냐가 핵심이었다.

앞서 이야기하였듯이 데드락이 구현하려고 하는 게임의 아이디어는 다른 게임에서 많이 시도한 부분들이 있다. 국내 게임으로는 사이퍼즈 같은 게임이 있을 것이고, 해외의 게임을 사례로 든다면 파라곤이나 스마이트 같은 게임들이 있다. 이러한 게임들이 갖고 있는 특징은 3인칭 액션/슈팅 게임들을 AOS의 운영과 한 타로 대표되는 협동을 섞고자 하는 점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시도들이 항상 성공적이었다던가, 혹은 메이저한 성공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이미 서비스를 종료한 파라곤의 예를 들어보자. 파라곤의 가장 큰 문제는 매우 느린 호흡이었다. 플레이어는 미니언을 하나 잡기 위해서 많은 평타를 쳐야 했었고, 필연적으로 라인전이 느려지니 한 판 게임 플레이가 한 시간 가까이 걸리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그 한 시간이 강렬한 경험으로 가득차있기 보다는 그저 느리고 지루한 내용으로 찾다는 것이 문제였다.

전반적으로 데드락은 슈터를 AOS에 섞는 과거의 시도를 따라하면서도, 속도가 빠르고 경쾌하게, 소위 요즘 언어로 이야기하자면 '하이퍼'한 흐름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오버워치와 같은 게임과도 비교가 많이 되는 게임이긴 한데, 본질적으로 협동해서 싸우는 전투가 여러번 일어나는 오버워치와 다르게 데드락은 AOS 처럼 라인전이라는 운영 요소를 베이스로 깔면서도 그 운영의 결과물로 나오는 레벨링이나 아이템 파밍 등을 이용해서 협동 전투를 풀어나기 때문이다. 다만 게임이 속도감을 중요시하고 플레이어들의 유기적인 협동 전투를 요구하는 점에서 오버워치와 유사한 부분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재밌는 점은 속도감이나 공간을 쓰는 감각(맵의 높낮이 배치나 파쿠르 같은 부분들)은 분명 오버워치보다도 더 하이퍼한 부분들이 있다는 것이다.

AOS의 부분에서 본다면 데드락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겠지만, 도타 2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우선 미니언 파밍에 있어서 디나이 개념이 존재하고, 아이템 트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케릭터의 잠재력이 다르게 드러나는 등 탑-미드-바텀-정글-서폿이라는 틀에 잡혀 있는 리그 오브 레전드 같은 게임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 특히 눈여겨 보아야하는 점은 디나이의 개념일 것이다: 플레이어 편 미니언이 상대에 의해서 죽었을 때, 상대가 흡수할 영혼의 절반이 허공으로 날아가는데 이걸 상대가 사격해서 획득할 수 있고, 역으로 플레이어가 사격해서 상대가 못먹게 방해할 수도 있다. 이러한 요소는 이미 도타 2에서 구현된 적이 있는데, 플레이어가 높은 숙련도를 가지고 있으면 상대가 미니언을 파밍하지 못하게하는 동시에 상대에게 돌아갈 일부 영혼을 자신이 먹는 시스템이다.

디나이 시스템의 존재는 데드락에서 다른 게임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라인전 개념을 성립시킨다. 도타 2에서 디나이는 크립의 체력과 내 공격력등을 계산해서 해야하는 행위이다 보니까 게임이 매우 어려운 테크닉이었는데, 데드락에서 디나이는 그럴 필요 없이 허공으로 올라가는 영혼만 총으로 쏘면 되다보니까 이런 부분에서는 매우 쉬워진 부분이 있다. 그러나 데드락에서 재장전은 느린편이고, 탄창을 상대 플레이어에게 배분할 지, 미니언에게 배분할 지 등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탄창을 배분한다는 느낌으로 의식적으로 디나이와 파밍을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

디나이와 파밍 시스템의 경우, 데드락 만의 새로운 시스템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미 도타의 개념을 들고 온 것도 있고, AOS의 양식을 적극 차용하고 있으며, 이러한 사례들이 슈퍼 먼데이 나이트 컴벳 같은 게임들을 통해서 우선 구현된 것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드락이 대단한 이유는 새로운 장르와 플레이를 개척한 것이 아니라 사소한 디테일들을 잘 다듬어서 창발적인 플레이를 장려하고 '내가 생각한대로 움직이고 운영하는 게임'을 만든 점이 가장 크다.

다양한 부분들이 있겠지만, 데드락에서 자유로운 부분은 크게 두가지 정도로 꼽을 수 있다. 첫번째는 맵과 움직임이다. 데드락이 의외로 '하이퍼'하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있는데, 이는 캐릭터들의 속도감도 있긴 하지만 더블 점프, 대시, 파쿠르 등의 다양한 요소들과 이를 잘 활용하는 맵의 디자인도 큰 공헌을 하고 있다. 그 때문에 게임을 겉으로 볼 때보다 실제 할 때 느껴지는 감각이 다른데, 겉으로 볼 때는 매우 가볍지만 실제 할 때는 내가 생각한대로 자유롭게 움직인다는 점에서 매우 좋은 평가를 줄 수 있다. 그리고 맵 디자인 역시 옥상에서부터 지하까지 다양한 층위와 높낮이를 가진 맵을 만들고 플레이어가 이를 창발적으로 쓸 수 있게 만드는 등(갱킹 루트의 다양화 같은) 눈에 뚜렷하게 띄진 않아도 잘 만들어진 부분들이 많다.

두번째는 케릭터들의 역할군에 한계를 잡아두지 않고, 아이템과 활용에 따라서 다양한 포지션을 잡을 수 있게 설정한 점이다. 롤과 같은 AOS에서는 스킬 자체에 영향을 주지 않고 영향력 계수(AD, AP 같은)에만 영향을 주는 경우가 많은데, 데드락은 장비들이 계수뿐만 아니라 도타와 같이 액티브 스킬로 기능하거나 스킬의 범위, 쿨타운, 부가 효과 등에 영향을 끼치게끔 구성을 하였기 때문에 아이템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서 스킬의 운영이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예를 들어 캘빈과 같은 케릭터는 스킬 범위, 쿨다운 등의 모든 아이템 강화를 아크틱 빔에 밀어주게 되면 6초에 한번 씩 상대를 80%까지 느려지게 만드는 광역 슬로우 요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 다만 이 경우 데미지를 어느정도 포기해야하는데 구성과 운용에 따라서는 다른 느낌으로 움직일 수 있는 케릭터들도 많을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대로 잘 만들어지긴 했지만, 데드락은 베타 단계이기 때문에 많은 부분들이 아쉬운 부분들이 있긴 하다. 가장 큰 부분은 랜덤 픽 구성일 것이다:플레이어는 자기가 하고 싶은 케릭터를 할 수 있는게 아니고 케릭터 풀을 지정하고 게임이 무작위로 그 풀내에서 플레이어의 케릭터를 지정해준다. 이 때문에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조합이 나온다던가 하는 등의 문제가 있는데 이런 부분들은 꼭 베타 이후 해결해야할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자잘한 부분들이 문제가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데드락의 문제들은 '베타'이기 때문에 납득되는 부분들이 많다.

결론을 내리자면, 데드락은 오랜만에 벨브에서 만든 게임 중 가장 포텐셜이 높고 잘만들어진 게임이라 할 수 있다. 벨브는 여전히 게임을 만드는 감각이 있는 회사이기 때문에 데드락은 앞으로도 완성된 모습이 더 기대되는 게임이다.

 

 

잡담/개인적인 이야기

 

데드락 리뷰 작성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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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그리스 비극의 핵심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난다 이다. 대표적인 그리스 비극인 오이디푸스왕의 비극을 보자. 어렸을 적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할 것이라는 예언을 받아 발 뒷굼치에 못이 박힌채로 산에 버려졌다가 극적으로 구조되어 자라났다. 그 후에 길에서 시비가 붙어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되어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하고 동침하게 되는데 그는 이런 비극적인 사건을 일으킬 어떠한 의도들도 없었지만, 결국 그 모든 비극을 자신의 손으로 일으킨 것에 충격을 받고 스스로 두 눈을 뽑고 유랑을 하게 된다. 

오이디푸스를 통해서 볼 때, 그리스 비극의 인과 관계는 필연적으로 장르적인 속성에 기반하고 있다. 물론 아무리 뛰어난 영웅이라도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그리스 비극이지만, 현대의 장르 관점에서 보자면 어떤 의미에서 오이디푸스가 이런 일을 겪는 것은 '그리스 비극'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장르의 형식이 일종의 양식미를 구축하는 것인데, 이러한 형식미로 인해서 인물들이나 이야기는 그 어떠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한 운명을 맞이한다. 마치 현대 미국 코믹스처럼, 영웅들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빌런들은 다시 돌아오고 똑같은 문제를 다시 경험하고, 무한히 확장하는 다중 우주에서조차 그러한 양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즉, 어떤 장르적 양식들은 이야기의 인과관계보다 더 상위에 존재하고, 그 상위에 존재하는 양식들은 이야기와 극을 지배하고 극을 기묘한 방향으로 끌고 간다.

지금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나홍진 영화들이 이러한 장르적 인과관게에 사로잡혀있다고 이야기한다면, 처음에는 많은 의문이 들 것이다. 물론 후술할 곡성이나 각본을 맡은 랑종 같은 영화가 공포영화 장르의 필연성에 기대고 있는 작품이라 할 지라도, 초기 영화인 추적자나 황해 같은 작품들이 그러한가? 라는 부분에서는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자세하게 잘 뜯어본다면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파멸이라는 측면에서 곡성 이전의 나홍진 영화는 많은 부분 그리스 비극적인 속성을 띄고 있다. 그러한 불가피한 파멸이란 추적자에선 연쇄 살인마였고, 그리고 황해에서는 면정학과 조선적 킬러들이었다. 이들은 케릭터로 보기에는 그 정체와 배경이 모호하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고, 인물들에게 필연적인 파멸을 선사하고 극을 파국으로 이끈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가까운 존재들이다. 즉, 추적자에서는 연쇄살인마는 저열하게 살았던 한 남자가 속죄를 위해서 슬럼을 필사적으로 질주하며 내달리게 만들기 위한 장치였고, 황해에서 조선적 갱단은 일확천금과 성욕, 질투 등이 뒤섞여 흘러가는 욕망의 탁한 흐름이 도달하는 필연적인 파국과 진흙탕(=황해)였다. 

이러한 요소들이 극단적으로 드러났던 것이 곡성이었다. 곡성이 처음 나왔을 때, 수많은 사람들은 무엇이 진실인지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진실을 다루는 장르적 껍질이었다:공포영화의 관점에서 보자면, 범속한 사람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공포영화의 장르적 운명(금기를 어기고 더 큰 재앙을 불러일으킨다)을 거스를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디테일에 근거하여 진실을 찾기 보다는 그 디테일들이 쌓아올린 방향성과 결과에 초점을 맞춰 본다면, 영화가 이야기하고 싶은 결론 다소 싱거울 수 있다:영화는 공포영화였기 때문에 모두가 죽고, 모두가 죽기 위한 근거는 어떻게 보면 사람들이 찾아보는 디테일에 근거하여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결국 도달하는 길은 여럿이라도 도달하고자 하는 결론은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곡성은 디테일들로 필연적으로 도달해야하는 결론까지 가는 결과가 한국 영화 특유의 끈적한 정서로 포장되어 있어서, 디테일을 다소 뭉그러뜨린다는 인상을 준다. 마치 아주 조밀한 디오라마 위에 끈적한 점액질을 뒤덮어 놓은 인상의 곡성은 나홍진 영화가 갖고 있었던 끈적하지만 강렬한 결론까지 도달하는 동력을 하나로 정제하지 못하고 어그러뜨리는데 영화의 마지막 황정민이 떨어뜨리는 사진처럼 구질구질하게 물에 젖어버린 디테일들은 어떠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는 인상을 심어준다. 결국 엑소시즘에서 좀비물, 고어물 등등이 합쳐진 이 혼종 공포 영화를 깔끔하게 끝내려 했다면 주인공 가족의 죽음으로 끝내었어도 훌륭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물에 젖은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기존에 보여주었던 디테일들에 상충되는 디테일을 집어넣어 사람들을 혼란으로 몰고 가고 전국적인 곡성 논쟁을 불러일으킨 점은 어떻게 보면 영화가 던진 미끼를 물었다기 보다는 영화가 갖고 있는 한계를 명확하게 드러낸 부분이라 할 수 있다:공포영화 였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간단한 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렸기에 2시간 영화에 대한 강렬함에 대한 해답을 사람들이 찾고자 자신이 본 디테일에 집착하게 만든 것이다. 

곡성의 전작인 황해 역시도 그러한 문제들이 있었지만, 여기서는 도달하고자 하는 결론이 명확했고 거기까지 도달하기 위한 동력이 강렬했기 때문에 '과하긴 했어도 이해가능한' 범주에 속하였다. 그러나 곡성은 서로 상반되는 믿음과 공포 영화적 장치의 긴장감(누구를 믿을 것인가?)을 너무 남용한 나머지 사람들에게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이는 논쟁적이라기 보다는 혼란스럽다 라는 표현이 맞는데, 사람들이 같은 것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무엇을 봤다는 믿음에 따라서 해석을 전개하기 때문에 결국은 어떠한 결론에도 도달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이 나홍진이 의도했다면 모르겠지만, 추적자나 황해를 좋게 본 사람으로 이야기하자면 이는 너무 과도하고 단순한 해답에도 사람들을 혼란으로 몰고간 부분이 너무 많다.

결국 그렇기에 랑종은 좀 더 심드렁해질 수 밖에 없는 부분들이 있다. 기본적으로 랑종은 태국만이 갖고 있는 디테일이나 동남아시아 특유의 공포영화 장르에서 찾아볼 수 있는 끈적함이 일품인 영화다. 일반적인 공포영화에서 혼령이나 유령이 나온다면 정신을 지배하거나 뭔가 좀더 '차갑고 정갈한' 느낌을 주는 쪽에 가깝다면, 동남아시아 공포영화에서는 습기와 열기, 그리고 영혼이 육화되어 피와 육신, 그리고 벌레 등등으로 화하는 인상적인 표현 방법을 갖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표현 방법들은 이미 나홍진의 전매 특허이고, 여러 동남아시아 공포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기도 하고 좋았던 부분은 거기까지이기도 하다. 

랑종의 가장 큰 문제점은 페이크 다큐멘터리라는 무리수를 두고 있다는 점인데, 페이크 다큐멘터리가 현실감과 기시감을 주는데 특화된 공포영화의 하위 장르이지만 나홍진이 랑종이나 곡성에서 추구하고자 하였던 일종의 장르적 양식미(망할 것은 결국은 망한다)와는 상극이기 때문이다. 장르적 양식미는 기본적으로 '이성적'이지 않다. 또한 많은 페이크 다큐들이 빠지는 함정이 있다면, 페이크 다큐라는 명목하에 현실적인 내용을 넣다가 결국 공포영화의 문법을 따라야 하는 순간이 오면 후자로 갈아타면서 생기는 카메라의 움직임이나 이야기의 괴리를 커버하지 못하고 나자빠지는 것들인데, 랑종 역시도 '금기를 어기는 것'에 대해서 인물들이 너무 답답하게 구는 것들이 많고 페이크 다큐라는 장르 문법 때문에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일들이 너무 자주 발생을 한다.   

또한 페이크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적인 양식미에서도 랑종은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다큐멘터리란 정보와 사실을 전달하는 일종의 학술적인 영화 장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영화 장르가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거나 혹은 거짓을 다루는 요소로 다양하게 분화되긴 하였지만, 기본적으로 다큐멘터리 장르에는 일종의 보도 윤리와 편집이 아닌 사실의 전달이 우선되는 양식미가 존재한다. 하지만 랑종은 중요한 순간에 이러한 것들을 너무 쉽게 무시하고 어긴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랑종은 페이크 다큐멘터리인척 하지만 페이크 다큐멘터리일 이유가 전혀 없는 영화다. 영화 내에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신화나 무속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고, 대부분 강렬하고 자극적인 컷들을 잡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구성하고 편집한 장면들이 대부분이다. 한 때 페이크 다큐멘터리, 파운드 푸티지 장르를 풍미하였던 파라노말 액티비티나 블레어 위치 같은 작품들에 비교하여 본다면, 랑종은 그저 핸드핼드 형태의 강렬한 샷을 찍고 싶기 때문에 페이크 다큐멘터리라는 양식을 취한 것으로도 보인다.

랑종이나 곡성 양쪽 모두 결국은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라는 공포영화 장르적 문법으로 범속한 인간이 파멸을 맞이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특화된 작품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두영화 모두 그 이상인것처럼 포장하기 위해서 디테일과 디테일 간의 연관관계를 넣는데, 이것이 한국 영화 특유의 끈적함과 맞물리면서 과도하거나 혼란스럽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 문제다. 나홍진이 관여한 이 두 영화는 서로 다른 관점의 담론이 충돌하여 논쟁을 일으킨다기 보다는 그냥 정돈되지 않고 혼란스럽기 때문에 사람들의 설왕설래를 일으킨다는 점에서 혼란스러운 영화들인데, 영화 전반에 깔려있는 그 강렬함을 걷어내고 본다면(물론 그것이 영화의 핵심이긴 하지만) 명약관화한 부분들을 가려버린다. 그것을 매력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렇게 부를 수 있겠지만, 추적자나 황해에서 보여준 그 강렬함이 도달하는 결론에 비해서는 두 세 발자국 퇴보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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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이후 등장한 에일리언 삼부작은 과거 에일리언 4부작(1~4편까지)에 대한 일종의 거부이자 리들리 스콧의 오리지널리티를 강하게 선언하는 작품이었다. 프로메테우스 3부작은 제임스 카메론, 데이빗 핀처 등을 부정하는 것이었으며 심지어는 그 당시의 리들리 스콧 그 자신 조차도 부정하고 있어서 에일리언이 나온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같은 시리즈의 영화로 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품이었다. 오히려 프로메테우스는 리들리 스콧의 최근 프로젝트의 연장선에서 봐야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최근 종교라는 테마에 상당히 깊은 관심을 보인 리들리 스콧의 다수 작품의 연장선에서 볼수 있으며, 에일리언이 탄생한 과정을 일종의 구약과 신약, 그리고 신화적으로 재해석하면서 SF판 성서를 만들고자 한 야심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와 파괴(프로메테우스), 믿음, 신앙의 공동체(코버넌트), 그리고 건국 신화(로물루스)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뚜렷하고도 일관된 흐름을 보여준다.

먼저 프로메테우스부터 쭉 살펴보자. 프로메테우스는 창조주가 인간을 만들고, 또한 파괴하려한다는 대중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평이한 모티브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그러한 과정에서 '의도'가 불가해하다는 점일 것이다:어째서 창조주는 인간을 파괴하려 하는가? 그것은 대사나 서사로 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관객들은 어디까지나 창조주와 인간의 관계를 인간과 인조인간의 관계로 유추하여 알레고리를 구성해야 한다. 이러한 알레고리를 구성하기 위해서 크리처 영화라고 보기엔 다소 비정형적이고 장르 파괴적인 이야기를 관객들이 오래 봐야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종교적인 창조의 신비와 공포에 대한 알레고리를 무기질적인 마스크를 한 패스벤더의 데이빗이라는 캐릭터로 풀어낸 프로메테우스는 장르 서사가 아닌 묘한 컬트적인 인상이 강한 작품이었다. 그것은 종교를 SF로 은유(창조주 - 인간을 인간 - 인조인간의 관계로 은유하여 해석)함으로써 에일리언에 일종의 종교적 신화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에일리언 3편의 종교적 분위기와 다른 점은 에일리언 3편이 희생제의나 구원에 대한 논지였다면, 프로메테우스는 가족이라는 관계를 차갑고 무미건조한 톤으로 재해석하여 종교의 알레고리를 드라마로 바꾸는데 있었다.

그러나 코버넌트에서 이러한 분위기는 바뀌게 된다. 데이빗은 창조주들을 맥거핀으로 만들어버렸고, 더이상 부모의 유사 관계는 극에서 큰 힘을 잃는다. 대신 에일리언 시리즈 특유의 뒤틀린 '창조'의 이미지는 여기서 신앙이자 믿음의 형태로 변화한다. 프로메테우스에서는 동일하지 않지만 유사점을 갖는 두 관계를 병렬로 보여주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드라마의 영역을 통해 설명이 없는 신비한 영역을 이해할 수 있게끔 만들었다. 그러나 코버넌트에서는 다양한 믿음의 공동체('더 나은 세계, 식민지를 찾고자 하는 자들의 믿음의 공동체' 또는 '인조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월터의 믿음', 마지막으로 '위대해지기 위해서 부모를 살해하고 생명을 잉태하고자 하는 데이빗의 믿음')들이 등장하였고, 이 믿음의 공동체들이 서로 영향력을 주고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코버넌트의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믿음이 결국 데이빗의 뒤틀린 믿음(제노모프의 탄생과 창궐)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예정된 이야기들 때문에 다른 믿음이 상대적으로 묻힐 수 밖에 없는 문제가 있었다. 결국 제노모프의 탄생을 위해서 허무하게 코버넌트 호의 승무원들과 월터가 희생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피카레스크 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데, 피카레스크 적으로 느껴지기에는 데이빗의 주장은 단지 '여성기와 남성기 없는 자의 뒤틀린 욕망' 수준으로 밖에 안 읽히는 다소 식상하고 저급한 부분들이 있다. 프로메테우스의 무기질적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데이빗이 후속작에서는 쇼에게 유사 마운팅을 하면서 뒤틀린 자식에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은 결국 이 케릭터 조차도 자신 창조주보다 더 나은 야망을 가지지 않은 뒤틀린 놈이었다는 실망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로물루스는 프로메테우스나 코버넌트의 이질감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로물루스라는 제목에서부터 작품은 제목에서 많은 신화적인 관점에서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로마를 건국하였지만 역사적인(=실제 존재하는지) 인물인지 논란이 있는 로물루스를 제목으로 선정한 것에서부터 영화의 방향성이 '신화'에서 '역사'로 넘어가는 순간을 다루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로물루스라는 인물의 행적들과 의미들(건국의 과정에서 형제인 레무스를 죽인 점, 로물루스라는 이름이 언어학적으로는 '로마인'을 의미한다는 점 등)을 비추어 보았을 때,  데이빗이 만들어낸 뒤틀린 창조물들이 하나의 왕국을 만들고, 더 나아가서 에일리언 1에서 4까지 이어지는 서사의 중요한 연결고리를 만드는 과정이 된다고도 예측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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