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그리스 비극의 핵심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난다 이다. 대표적인 그리스 비극인 오이디푸스왕의 비극을 보자. 어렸을 적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할 것이라는 예언을 받아 발 뒷굼치에 못이 박힌채로 산에 버려졌다가 극적으로 구조되어 자라났다. 그 후에 길에서 시비가 붙어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되어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하고 동침하게 되는데 그는 이런 비극적인 사건을 일으킬 어떠한 의도들도 없었지만, 결국 그 모든 비극을 자신의 손으로 일으킨 것에 충격을 받고 스스로 두 눈을 뽑고 유랑을 하게 된다. 

오이디푸스를 통해서 볼 때, 그리스 비극의 인과 관계는 필연적으로 장르적인 속성에 기반하고 있다. 물론 아무리 뛰어난 영웅이라도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그리스 비극이지만, 현대의 장르 관점에서 보자면 어떤 의미에서 오이디푸스가 이런 일을 겪는 것은 '그리스 비극'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장르의 형식이 일종의 양식미를 구축하는 것인데, 이러한 형식미로 인해서 인물들이나 이야기는 그 어떠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한 운명을 맞이한다. 마치 현대 미국 코믹스처럼, 영웅들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빌런들은 다시 돌아오고 똑같은 문제를 다시 경험하고, 무한히 확장하는 다중 우주에서조차 그러한 양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즉, 어떤 장르적 양식들은 이야기의 인과관계보다 더 상위에 존재하고, 그 상위에 존재하는 양식들은 이야기와 극을 지배하고 극을 기묘한 방향으로 끌고 간다.

지금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나홍진 영화들이 이러한 장르적 인과관게에 사로잡혀있다고 이야기한다면, 처음에는 많은 의문이 들 것이다. 물론 후술할 곡성이나 각본을 맡은 랑종 같은 영화가 공포영화 장르의 필연성에 기대고 있는 작품이라 할 지라도, 초기 영화인 추적자나 황해 같은 작품들이 그러한가? 라는 부분에서는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자세하게 잘 뜯어본다면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파멸이라는 측면에서 곡성 이전의 나홍진 영화는 많은 부분 그리스 비극적인 속성을 띄고 있다. 그러한 불가피한 파멸이란 추적자에선 연쇄 살인마였고, 그리고 황해에서는 면정학과 조선적 킬러들이었다. 이들은 케릭터로 보기에는 그 정체와 배경이 모호하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고, 인물들에게 필연적인 파멸을 선사하고 극을 파국으로 이끈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가까운 존재들이다. 즉, 추적자에서는 연쇄살인마는 저열하게 살았던 한 남자가 속죄를 위해서 슬럼을 필사적으로 질주하며 내달리게 만들기 위한 장치였고, 황해에서 조선적 갱단은 일확천금과 성욕, 질투 등이 뒤섞여 흘러가는 욕망의 탁한 흐름이 도달하는 필연적인 파국과 진흙탕(=황해)였다. 

이러한 요소들이 극단적으로 드러났던 것이 곡성이었다. 곡성이 처음 나왔을 때, 수많은 사람들은 무엇이 진실인지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진실을 다루는 장르적 껍질이었다:공포영화의 관점에서 보자면, 범속한 사람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공포영화의 장르적 운명(금기를 어기고 더 큰 재앙을 불러일으킨다)을 거스를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디테일에 근거하여 진실을 찾기 보다는 그 디테일들이 쌓아올린 방향성과 결과에 초점을 맞춰 본다면, 영화가 이야기하고 싶은 결론 다소 싱거울 수 있다:영화는 공포영화였기 때문에 모두가 죽고, 모두가 죽기 위한 근거는 어떻게 보면 사람들이 찾아보는 디테일에 근거하여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결국 도달하는 길은 여럿이라도 도달하고자 하는 결론은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곡성은 디테일들로 필연적으로 도달해야하는 결론까지 가는 결과가 한국 영화 특유의 끈적한 정서로 포장되어 있어서, 디테일을 다소 뭉그러뜨린다는 인상을 준다. 마치 아주 조밀한 디오라마 위에 끈적한 점액질을 뒤덮어 놓은 인상의 곡성은 나홍진 영화가 갖고 있었던 끈적하지만 강렬한 결론까지 도달하는 동력을 하나로 정제하지 못하고 어그러뜨리는데 영화의 마지막 황정민이 떨어뜨리는 사진처럼 구질구질하게 물에 젖어버린 디테일들은 어떠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는 인상을 심어준다. 결국 엑소시즘에서 좀비물, 고어물 등등이 합쳐진 이 혼종 공포 영화를 깔끔하게 끝내려 했다면 주인공 가족의 죽음으로 끝내었어도 훌륭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물에 젖은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기존에 보여주었던 디테일들에 상충되는 디테일을 집어넣어 사람들을 혼란으로 몰고 가고 전국적인 곡성 논쟁을 불러일으킨 점은 어떻게 보면 영화가 던진 미끼를 물었다기 보다는 영화가 갖고 있는 한계를 명확하게 드러낸 부분이라 할 수 있다:공포영화 였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간단한 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렸기에 2시간 영화에 대한 강렬함에 대한 해답을 사람들이 찾고자 자신이 본 디테일에 집착하게 만든 것이다. 

곡성의 전작인 황해 역시도 그러한 문제들이 있었지만, 여기서는 도달하고자 하는 결론이 명확했고 거기까지 도달하기 위한 동력이 강렬했기 때문에 '과하긴 했어도 이해가능한' 범주에 속하였다. 그러나 곡성은 서로 상반되는 믿음과 공포 영화적 장치의 긴장감(누구를 믿을 것인가?)을 너무 남용한 나머지 사람들에게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이는 논쟁적이라기 보다는 혼란스럽다 라는 표현이 맞는데, 사람들이 같은 것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무엇을 봤다는 믿음에 따라서 해석을 전개하기 때문에 결국은 어떠한 결론에도 도달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이 나홍진이 의도했다면 모르겠지만, 추적자나 황해를 좋게 본 사람으로 이야기하자면 이는 너무 과도하고 단순한 해답에도 사람들을 혼란으로 몰고간 부분이 너무 많다.

결국 그렇기에 랑종은 좀 더 심드렁해질 수 밖에 없는 부분들이 있다. 기본적으로 랑종은 태국만이 갖고 있는 디테일이나 동남아시아 특유의 공포영화 장르에서 찾아볼 수 있는 끈적함이 일품인 영화다. 일반적인 공포영화에서 혼령이나 유령이 나온다면 정신을 지배하거나 뭔가 좀더 '차갑고 정갈한' 느낌을 주는 쪽에 가깝다면, 동남아시아 공포영화에서는 습기와 열기, 그리고 영혼이 육화되어 피와 육신, 그리고 벌레 등등으로 화하는 인상적인 표현 방법을 갖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표현 방법들은 이미 나홍진의 전매 특허이고, 여러 동남아시아 공포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기도 하고 좋았던 부분은 거기까지이기도 하다. 

랑종의 가장 큰 문제점은 페이크 다큐멘터리라는 무리수를 두고 있다는 점인데, 페이크 다큐멘터리가 현실감과 기시감을 주는데 특화된 공포영화의 하위 장르이지만 나홍진이 랑종이나 곡성에서 추구하고자 하였던 일종의 장르적 양식미(망할 것은 결국은 망한다)와는 상극이기 때문이다. 장르적 양식미는 기본적으로 '이성적'이지 않다. 또한 많은 페이크 다큐들이 빠지는 함정이 있다면, 페이크 다큐라는 명목하에 현실적인 내용을 넣다가 결국 공포영화의 문법을 따라야 하는 순간이 오면 후자로 갈아타면서 생기는 카메라의 움직임이나 이야기의 괴리를 커버하지 못하고 나자빠지는 것들인데, 랑종 역시도 '금기를 어기는 것'에 대해서 인물들이 너무 답답하게 구는 것들이 많고 페이크 다큐라는 장르 문법 때문에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일들이 너무 자주 발생을 한다.   

또한 페이크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적인 양식미에서도 랑종은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다큐멘터리란 정보와 사실을 전달하는 일종의 학술적인 영화 장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영화 장르가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거나 혹은 거짓을 다루는 요소로 다양하게 분화되긴 하였지만, 기본적으로 다큐멘터리 장르에는 일종의 보도 윤리와 편집이 아닌 사실의 전달이 우선되는 양식미가 존재한다. 하지만 랑종은 중요한 순간에 이러한 것들을 너무 쉽게 무시하고 어긴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랑종은 페이크 다큐멘터리인척 하지만 페이크 다큐멘터리일 이유가 전혀 없는 영화다. 영화 내에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신화나 무속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고, 대부분 강렬하고 자극적인 컷들을 잡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구성하고 편집한 장면들이 대부분이다. 한 때 페이크 다큐멘터리, 파운드 푸티지 장르를 풍미하였던 파라노말 액티비티나 블레어 위치 같은 작품들에 비교하여 본다면, 랑종은 그저 핸드핼드 형태의 강렬한 샷을 찍고 싶기 때문에 페이크 다큐멘터리라는 양식을 취한 것으로도 보인다.

랑종이나 곡성 양쪽 모두 결국은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라는 공포영화 장르적 문법으로 범속한 인간이 파멸을 맞이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특화된 작품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두영화 모두 그 이상인것처럼 포장하기 위해서 디테일과 디테일 간의 연관관계를 넣는데, 이것이 한국 영화 특유의 끈적함과 맞물리면서 과도하거나 혼란스럽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 문제다. 나홍진이 관여한 이 두 영화는 서로 다른 관점의 담론이 충돌하여 논쟁을 일으킨다기 보다는 그냥 정돈되지 않고 혼란스럽기 때문에 사람들의 설왕설래를 일으킨다는 점에서 혼란스러운 영화들인데, 영화 전반에 깔려있는 그 강렬함을 걷어내고 본다면(물론 그것이 영화의 핵심이긴 하지만) 명약관화한 부분들을 가려버린다. 그것을 매력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렇게 부를 수 있겠지만, 추적자나 황해에서 보여준 그 강렬함이 도달하는 결론에 비해서는 두 세 발자국 퇴보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