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그렇다면 그에게 정치는 무엇일까? 랑시에르는 “정치는 언제나 발생하는 일이 아니다. 실로 정치는 매우 적게 혹은 드물게 발생한다”(<불화>)고 말했다. 정치는 그저 존재하는 무언가가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던 ‘인간의 가장 탁월하고 고귀한 활동’ 같은 것도 아니다. 정치는 언제나 중단, 개입, 혹은 효력을 수반한다. 정치는 불일치이며, 무언가를 파열시키는 것이다. 체임버스는 “정치는 치안질서에 도전하고 방해하면서 그 질서를 파열시키거나 전치시키며, 어쩌면 결국에는 치안질서를 변화시키게 될지도 모른다. 이것이 정치가 수행하는 일의 전부”라고 말한다.

원문보기 :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900614.html

 

7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존 포드의 영화는 극도로 '반동적'이다. 그의 영화에는 공동체가 있고, 각각의 공동체에서 사람들이 수행하는 역할들이 있다. 공동체에서 노동하는 남자의 역할, 남성을 포옹하는 여성, 이들이 서로 화합하여 공동체를 구성한다. 그리고 그 공동체에서 서부는 공동체를 펼치기 위한 가능성이 공간이 된다. 이 모든 과정 자체가 미국의 이상향American Dream을 구현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 존 포드 영화의 이러한 경향성은 '반동적'이라 할 수 있다:이러한 미국의 이상향이란 이미 오래전 무너져버렸고(굳이 멀리 내려가지 않더라도 트럼프의 당선과 연결지어 생각해봐도 될 것이다), 공동체의 조화로운 삶이란 이상향은 커녕 이제 웃음거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존 포드의 영화가 지금까지 회자되고, 위대한 감독으로 칭송받는 이유는 이러한 반동적인 부분 때문만은 아니다. 70년대 뉴 웨이브 영화 감독 중 몇몇 감독들은 그들의 정치적 성향(좌파적이라 할 수 있는)에도 불구하고 존경하는 감독으로 존 포드를 꼽았다는 이야기는 꽤나 유명하다. 존 포드의 세계관(보수적 공동체)과 좌파적 지향성이란 전혀 맞닿아보이지 않지만, 존 포드의 영화를 좀 더 세부적으로 뜯어보면 정치적 성향을 막론하고 존 포드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존 포드의 영화에서 공동체는 이미 완성된 형태가 아니고 '만들어져가는 과정'에 놓여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공동체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넘어서야 하는 것들은 외부의 위험과 함께 공동체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어둠'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존 포드 영화의 통찰은 공동체 내부의 어둠을 들여다 보는 동시에 숭고한 가치와 믿음을 제시한다는 점에 기반한다. 존 포드의 영화에 자리잡은 공동체의 어둠은 언뜻언뜻 드러난다:수색자에서는 조카 딸이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영향을 받았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이야기하는 전직 기병대원이 등장하고,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에서는 어둠 속에서 비겁하게 무법자를 향해 총을 쏘는 주인공이 등장하며, 역마차에서는 약한 여성을 향해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려는 남성도 같이 등장한다. 조금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황색 리본에서는 아메리카 원주민들과의 전쟁을 막기 위해서 추장과 교류하고, 더 나아가서 아무도 죽지않게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도 이 사례에 들어갈 것이다. 순간이지만 이렇게 잊을 수 없는 광경을 통해서 존 포드는 공동체를 만들어나가는 과정 자체가 단순히 외압을 벗어나는 것만이 아닌 내부의 모순과 어둠을 극복하고 함께해야한다는 것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청년 링컨은 존 포드의 대표작으로 이런 통찰력이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가 선택하고 있는 시점이다:젊은 링컨은 남북전쟁 이전, 링컨이 초짜 변호사인 시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링컨의 가장 위대한 업적인 노예 해방선언과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업적을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위대한 업적에서 빗겨나서, 소박한 인간이 어째서 위대한 업적을 거둘 수 있게 되었는지, (존 포드가 생각하는)미국적인 가치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영화 청년 링컨에서 링컨은 위대한 리더가 아닌 '한량'의 이미지에 가깝다. 그는 마을 축제에 참여하여 파이 맛 컨테스트 심사자를 맡고, 줄다리기 대회에서 참여해서 마차 뒤에 끈을 달아 반칙을 쓰는가 하면, 사무실 창가에 앉아 다리를 꼬고 유대인 하프를 치기도 한다. 그의 모습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지도자의 거룩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링컨은 공동체에서 찾아볼 수 있는 흔한 사람, 그리고 모든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편한 사람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공동체의 어둠을 꿰뚫어보고 나름대로 그에 대처해 나간다:마을 축재 때, 사람들이 살인사건이 일어나자 전후 관계를 따지지 않고 용의자 형제를 린치하려 한다. 밝고 활기찼던 낮의 축제와 다르게 밤은 공동체의 히스테리와 집단 광기에 사로잡혀 있고, 용의자 형제와 군중 그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젊은 링컨 하나 뿐이다. 흥미롭게도 넉살맞게 군중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그의 모습은 공동체의 어둠을 정면으로 비판하지 않는다. 단지 그들의 히스테리를 풀어주고, 집으로 보내주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그들을 정면으로 비판하지 않되, 그들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것이다. 링컨은 공동체 내부의 문제를 공동체의 방법론(사람과의 유대, 관계론에 따라)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위태로운 방법론을 취하고, 이러한 방법론은 그를 영화 내내 여러번 시험에 들게 한다.

 

이러한 방법론에 대척되는 것은 법정에서 검사가 취하는 방법론일 것이다:그는 이기기 위해서 대중의 감정을 선동하고, 용의자 형제의 어머니를 감정적으로 학대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전적으로 그 공동체의 대다수 구성원과 유리되어 있는 입장을 고수한다. 이러한 것이 어떤 점에서 보았을 때는 영화가 엘리트와 사회 지배 계급에 대해서 취하고 있는 관점과 맞닿아있다 할 수 있다:마을의 축제를 보는 자리에서 동료 변호사는 다른 다수의 대중과 다르게 의자에 앉아서 축제를 관람한다. 그리고 링컨은 자연스럽게 그 의자 옆에 다른 대중과 앉는다. 이러한 '공동체와 동화되지 않음'과 '대중을 지배계급이 원하는 방향으로 조작한다'라는 점을 부각함으로 링컨과 다른 지배층이 다른 부분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구분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적, 그 자체라 할 수 있다:랑시에르가 그러했듯이, 정치가 '드물게 발생하며 현재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불화라 할 수 있다면, 링컨은 공동체의 어둠과 지배계급의 조작이 극대로 발휘되는 시점에서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하는 그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선택을 한다고 볼 수 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점에서 존 포드와 링컨이 바라보는 지향점은 대단히 단순하지만 원칙적이라 할 수 있다. 

 

존 포드 영화에서 그러하듯, 젊은 링컨에서도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자연이다. 그가 변호사가 되기로 선택하는 순간, 혹은 부자들이 주최한 무도장에서 나와서 멀리 바라보는 장면, 강을 따라 용의자 형제의 어머니를 찾아 올라가는 장면 등등에서 자연과 강의 풍광은 중요한 미학을 구성한다. 거기서 링컨은 남들과 다르게, 더 먼 곳을 동경하는 표정으로 강을 바라본다. 가장 힘들고 어려운 순간, 그가 뭘 해야하는지를, 자신이 어디로 나아가야하는지를 찾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이 장면들은 미국의 광활한 자연풍광을 통해서 미국적 가치에 대한 믿음을 보여준다.

 

영화의 결론에서 링컨은 용의자 형제가 쓴 억울한 누명을 벗기고, 사람들의 환대를 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환대를 받는 링컨을 영화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처럼 묘사한다:마치 그가 훗날 책임져야 했었던 막대한 책임들에 대한 중압감을 표현하는 듯한 이 장면들은 그가 가야할 길이 쉽지 않은 것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젊은 링컨은 존 포드가 어째서 시대가 지나도 다양한 사람들에게 사랑받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공동체의 어둠을 꿰뚫어보고, 그것을 변칙적으로 영화에 녹여냄으로서 공동체와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는 단순한 공동체 찬가가 아닌, 공동체에 대한 믿음과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숭고한 믿음이 드러나기 때문에 고전으로서 가치를 지닌다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젊은 링컨은 존 포드의 가치관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기회가 된다면 꼭 보기를 추천하는 바이다.

게임 이야기

 

데메오는 VR 보드게임이다. 일반적으로 VR, 더 넓게보면 비디오 게임과 '보드게임'의 조합은 상당히 어색하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다. VR 게임들 상당수가 체험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데, 이러한 경험들 상당수는 플레이어의 시점에 맞춰서 카메라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가상현실 게임 중에 대표작이러 할 수 있는 하프라이프 알릭스나 비트 세이버 같은 게임들 역시 플레이어의 시점에서 액션을 구성한다. 일반적인 디스플레이의 시점과 다르게 하여 독자적인 경험을 구성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드게임을 VR 게임으로 옮기는 것은 이러한 경향성과는 다소 빗겨나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사람이 직접 계산을 하여 조작해야 해서 비디오 게임보다 더 작은 스케일로 즐길 수 밖에 없는 보드게임을 비디오 게임으로 만드는 것도 별로 포인트가 없어보인다.

 

하지만 의외로 보드게임을 비디오 게임으로 옮기려는 시도나, 보드게임에 비디오 게임의 프로그램을 이식하려는 교차 시도는 꽤 많았고 성공한 케이스도 많았다. 하스스톤이나 쉐도우버스 같이 TCG를 게임의 형태로 옮겨서 성공한 케이스들도 꽤 많았고, FFG에서는 광기의 저택 2판이나 디센트 2판 앱 같은 게임들에서 가상의 마스터+게임을 트래킹하는 툴로 컴퓨터나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적이 있었다. 요는 보드게임과 비디오 게임의 결합은 포인트만 제대로 짚어내면 상당히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이들 게임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특징은 1.보드게임에서 사람이 직접 룰을 소화하고 다루는 부분을 통제하고, 2.스스로 생각해서 이들을 다루게 한 것이다. 즉, 기존 게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의도된 불편함/번거로움'을 통해서 플레이어가 능동적인 경험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데메오의 게임 구성은 심플하고 단순하며, 직관적이다.  플레이어는 로그라이크 게임처럼 랜덤으로 생성된 3개의 던전을 해쳐나가면서 내려가야 한다. 최대 4명까지 함께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에서 플레이어들은 각자 맡은 케릭터들을 조작해서 던전을 탐험하고 몬스터들과 전투를 해야 한다. 게임에서 나오는 물량은 단순히 공격만으로 풀어내기에는 많기 때문에, 각 직업별로 이용할 수 있는 스킬 카드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이러한 스킬 카드는 몬스터를 죽여서 경험치를 획득하거나 상자를 루팅하거나 돈을 모아서 얻을 수가 있다. 

 

데메오는 보드게임을 비디오 게임으로 옮기려는 시도 답게 상당히 보드게임에서 몇몇 요소들을 편하게 정리한다:플레이어가 경험치를 얻어서 받는 카드는 자동으로 핸드로 들어오게 되고, 적의 체력 계산이나 사소한 계산들을 컴퓨터가 대신해주는 등의 편한 부분들이 많다. 대신, 다른 요소들은 '실제 보드게임을 하듯이' 구성을 했다는 것이 독특하다. 진짜 케릭터 말을 집어서 움직이듯이 배치하고, 왼손을 뒤집어서 카드 패를 확인하는 등, 조작 체계를 실제 보드게임을 하듯이 구성한 점이 매력적이다. 그리고 실제 조작이나 이런 부분들이 직관적이기 때문에 원하는데 편리하게 게임을 풀어나갈 수 있다는 점도 훌륭한 부분이다.

 

데메오의 핵심 재미는 바로 협업이다:데메오의 게임 플레이는 복잡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쉬운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나오는 몬스터 수가 엄청나게 많기 때문에 같이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협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과 능동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게임을 풀어나가는 것이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혹은 다른 사람과 무엇을 해야하는지, 언제 어떤 카드를 써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해야한다. 게임은 기본적으로 보이스 채팅을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키보드를 이용한 채팅이나 별도의 채팅 프로그램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소소한 이점이다.

 

VR 관점에서 데메오는 상당히 흥미로운 경험을 제공해준다:기존의 게임들은 현실에서 할 수 없는 행위들을 경험해주게 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다면, 데메오는 보드게임의 귀찮은 부분들을 제거하고 재밌는 부분만 잘라내서 즐기게 한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다. 현실에서 보드게임은 분명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수많은 카드와 주사위, 컴포넌트 등의 요소들을 배치하고, 정리하고, 룰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등의 요소들은 분명 보드게임을 하는데 큰 방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데메오는 그러한 과정을 단순화 시키고, 실제 말을 조작하고 움직이는 요소들을 추가하여 마치 진짜 보드게임을 하는 듯한 경험을 주는데 성공한다.

 

결론적으로 데메오는 무언가 새로운 경험을 제공해주는 게임은 아니다:실제 보드게임을 찾아보면 이런 류의 게임들은 꽤 많은 편이고, 게임을 플레이하는 과정이나 경험도 그렇게 다르진 않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데메오가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요소를 정확하게 파고들고 깔끔하게 구성했다는 점에서 이점이 있을 것이다. 많은 VR 게임이 꽤나 높은 곳(트리플 A게임이나 기존 비디오 게임 장르)을 바라보고 게임을 구성하는데 집중한다면, 데메오는 틈새를 파고들어서 VR 게임의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 셈이다. 개인적으로 VR 게임의 가능성을 보고 싶다면, 함께할 친구들을 모아 데메오를 해보는 것을 추천하는 바이다.

 

 

 

 

 

 

게임 이야기

 

 

최근 오큘러스 퀘스트 2를 구매하면서 VR을 경험할 기회가 생겼다. 가격이 여타 VR 기기에 비해 적절하다는 점(40만원 대), 기존 기기들이 다르게 스탠드 얼론으로 작동한다는 점 등은 오큘러스 퀘스트2를 최고의 입문 기기로 만들어주었다. 좋은 디스플레이와 조작계가 함께 결합하였던 HTC Vive의 구버전과 사실상 성능이 엇비슷한 수준인데, Vive가 대략 100만원 정도의 가격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상당한 코스트 다운이 이루어진 셈이다. 이 덕분에 본인은 VR을 처음으로 접할 수 있게 되었다.

 

VR이 여타 스크린이나 모니터 기반의 영상매체와 다른 점은 카메라의 시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점일 것이다. 영화를 예로 들어보자. 영화는 카메라로 피사체를 찍어서 세계를 구축한다. 컷과 시퀸스, 모든 것들은 카메라의 내부에 존재하며 카메라의 바깥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세계와 그 세계를 의도를 갖고 구성하는 '시선'의 존재는 전통적인 영상 매체를 규정하는 핵심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하지만 VR은 다르다. 물론 VR 역시도 세계를 찍는 카메라가 존재하며, 이를 통해서 다양한 영상을 찍어서 올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분명히 해야하는 점은 VR에서 시선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촬영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VR 체험을 하는 사람에게 존재한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VR은 화면을 카메라의 프레임에 국한시키는 것이 아닌, 화면 안에 공간이 존재한다고 착각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시야각을 제공한다. 그리고 양쪽 눈에 서로 다른 위치의 영상을 송출하면서, 마치 '깊이가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을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한 요소다. 이러한 두 요소와 함께 플레이어의 머리와 시선의 맞춤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시선의 움직임을 구현하는 것이야말로 VR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시선의  움직임에 따라서 그 시야각 내의 물체나 요소들을 바라보는 구조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마치 자신이 체험하는 것 같은 몰입감을 제공해준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플레이어가 시선을 결정한다'라는 요소는 현 단계의 VR에 있어서 상당히 흥미로운 요소인 동시에, 제한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분명 시선을 움직이는 점은 이전과 다른 몰입감을 제공해주는 부분이지만, 기존 영상과 다르게 시선을 강제할 수 없어서 영상의 집중도를 높일 수 없다는게 큰 문제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VR 영상 중에 테슬라의 자동 운전을 체험하는 VR 영상이 있다. 이 영상의 핵심은 테슬라 자동 운전을 체험하게끔 하는 것이지만, 본인이 신경쓰였던 부분은 차의 시트 부분에 지저분하게 떨어져있는 부스러기들이었다. 이와 같이 기존의 경험과 경험이 아닌 다른 사소한 정보들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기존의 영상 매체보다 더 산만하고 집중이 안된다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부분은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영상 문법의 변화'를 통해서 극복할 수 있는 부분이라 보여진다. 기존의 영상 매체에서도 미장센 등을 통해 프레임 내에 다양한 정보를 배치하는 방법론이 있었다. VR은 그것이 그저 카메라의 시선 바깥의 넓은 공간으로 변화했을 뿐이다. 다만 이러한 공간의 배치 부분에서 VR의 방법론은 공간을 의도된 '부분'이 아닌 완결된 하나의 '전체'로 구성해야 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많은 노력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부분은 게임에 있어서 VR 진입 장벽을 높이는 주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영화적 컷씬이나 3인칭, 1인칭 카메라 움직임이 기존 영상 매체에 근거하고 있었던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게임도 갑자기 VR로 옮겨가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많을 것이다. 추가적으로 조작 관점에서도 많은 이슈가 있다:키보드나 패드를 그대로 이용하기 힘들고, 특유의 모션 트래킹을 게임에 접합시켜 VR 고유의 경험을 만들려는 시도는 쉽지 않아 보인다. 예를 들어 테이블 탑 시뮬레이터의 경우, 보드 게임 말을 집거나 내리는 것은 마우스와 비슷하게 할 수 있지만, 시점을 옮기는 부분에서 많은 어려움(특히 양쪽 손을 이용해야 한다는 점에서)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카메라와 조작, 이 두 부분 때문에 기존의 게임을 그대로 VR로 옮길 수 없다는 점은 VR 게임이 흥할 수 없는 주된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하프라이프 알릭스의 성공은 상당히 눈여겨 볼만하다:벨브는 이전부터 컷씬을 이용하기 보다는 체험형으로 플레이어가 직접 이벤트를 바라보게 만든다던가,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 그것을 플레이어가 자연스럽게 바라보게 만드는 시선처리가 능한 회사였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VR의 장점이자 난점이 벨브에게는 VR 게임의 강점으로 다가온 편이라 할 수 있는데, 아직 제대로 플레이해보진 못했지만 충분히 기대감이 느껴지게 만드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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