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브랜든 크로넨버그(아들)와 데이빗 크로넨버그(아버지)는 유사하지만 서로 다르다:신체 손괴, 정신과 육체의 결합, 섹스의 묘사 등등은 많은 테마를 공유한다. 하지만 아버지 크로넨버그가 근대적인 유물론과 소재를 써서 영화를 만들었다면, 아들 크로넨버그는 좀 더 현대적이고 즉물적인 감성의 영화를 만든다. 아버지의 비디오드롬, 그리고 아들의 안티바이럴을 예로 들어서 비교해보겠다. 비디오드롬에서 아버지 크로넨버그는 미디어를 수용하기 위해서 새로운 감각기가 자라나고, 무비판적으로 미디어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다. 아버지 크로넨버그의 비디오드롬은 현대의 미디어 관점에서 '고전적'이라 할 수 있는데, '비디오'나 텔레비전, 방송국 같은 물건들을 활용하는 모습 등에서 이미 지금의 시대에도 통용되지만 현대적Up-To-Date이진 않는 물건이다. 하지만, 여전히 의미가 통용된다는 점에서 고전적Classical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브랜든 크로넨버그는 다르다. 안티바이럴에서 아들 크로넨버그는 연예인에 대한 현대인들의 병리학적인 집착과 심리에 집중한다. 아들 크로넨버그는 아버지 크로넨버그와 달리 욱체적인 변형을 좀더 '즉물적'인 형태로 표현하는데, B급 호러 영화나 고어영화에 기반을 두고 있는 아버지 크로넨버그와 달리 아들 크로넨버그는 사진을 한 경력 덕분에 좀 더 이미지를 구현했다. 차가운 질감이나 강박적인 구도, 인공적인 미장센과 컷 분할 등의 요소는 아버지 크로넨버그와 차별화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두번째 영화 포제서(2020)가 등장했다. 포제서Possessor는 빙의하는 자라는 의미로, 빙의하다Possess라는 단어에서 따온 단어다. 이는 영화에서 타인의 인격에 빙의하여 타겟을 암살하는 자인 주인공을 일컫는 말인데, 이 단어의 선택부터 영화는 현대인의 '인격'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함을 암시한다:빙의라는 개념의 출발은 전근대적인 개념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는데, 고대나 중세 기독교, 혹은 동양 샤머니즘의 개념에 기반한다. 악마나 악령은 사람의 나약한 영혼을 파고들어 그의 영혼과 인격을 지배하고, 그것을 가리켜 고대인들은 '빙의'라 하였다. 하나의 육체, 두개의 영혼, 하나의 육체를 두고 선과 악이 갈등하며 싸우는 것이야말로 빙의의 본질이다. 핵심은 두 개의 공존할 수 없는 개념의 하나의 바탕 위에서 공존하면서 갈등하는 것, 그것을 내쫒기 위해서 다른 한 존재를 바깥으로 내쫒는 엑소시즘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고전 호러 영화인 엑소시스트를 보라. 아버지가 부재한 가정에 악마가 어린 소녀의 영혼을 파고 들고, 아버지를 대신하여 신부가 가정에 들어와 어린 소녀의 몸에 들어간 악령을 내쫒는다. 

 

포제서는 이러한 전근대적인 빙의의 개념을 부정하는 곳에서 출발한다:포제서에서 빙의자와 빙의당하는 자는 유기적으로 결합한다. 선과 악의 구분이 아니며, 한 인간의 빈틈을 파고 드는 것이 아닌, 빙의자와 빙의 당하는 자의 융합이 포제서의 핵심인 것이다. 이는 암살 시나리오의 개연성으로 드러난다:영화는 암살 타겟이 죽는 개연성을 빙의 당하는 자의 주변 상황과 밀접하게 연결시켜서 암살이 대단히 자연스러운 사건인 것처럼 포장을 한다. 타겟의 살해는 빙의당하는 자에 있어서 개연성이 있는 행동이다. 빙의자는 그저 그러한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약간 밀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빙의자와 빙의당하는 자는 일종의 공생 관계가 된다. 이를 영화는 일종의 욕망과 삶의 데칼코마니의 형태로 풀어내는데, 서사적인 관점에서 주인공의 삶과 빙의당하는 자가 묘하게 겹쳐보이게끔 만든 것, 성교의 이미지가 거울을 통해서 서로 구분되게끔 만들어진 부분, 반사된 이미지로 동일한 이미지를 여러개로 컷을 나누는 등 모든 것들이 반복되고 유사하다는 이미지를 관객에게 각인시킨다. 죽이는 자나, 죽는 자, 그들의 주변환경이나 그들이 공유하는 욕망 이런 것들이 모두 결국은 현대인들이 공유하는 의식이자 양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무엇이, 현대인의 의식 아래에 무의식으로 자리잡고 있을까. 영화의 초반 시퀸스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여기서 영화는 주인공이 원래 시나리오와 다르게 암살 타겟을 아주 너저분하고 끔찍한 방식으로 처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왜 주인공은 굳이 그를 그렇게 너저분하게 죽였는가? 그리고 왜 그 후에 자살을 하지 못한 것일까? 넘쳐흐르는 끈적거리는 피, 피를 만지는 질감, 그리고 자살할 때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는 주인공, 이 모든 것들이 앞서 이야기한 이미지와 대칭되는 모습을 보인다. 깔끔하지 않고, 정돈되지 않았으며, 불현듯 터져올라서 끔찍한 결과를 남기고 사라지는 것. 암살 시나리오가 암살 하는 자의 주변 환경을 두고 개연성 있는 시나리오를 이루었다는 점에 비추어 본다면, 이러한 끈적함이야말로 현대인의 무의식과 은밀한 욕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주인공과 빙의당하는 자를 통해서 이 둘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면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첫 암살 시퀸스가 끝난 후, 아버지의 유품을 만지면서 죄책감을 언급하고 가족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장면을 보자. 주인공은 집앞에 서서 정상적인 부모와 아내를 연기하는 것을 연습한다. 마치 그러한 것이 부자연스러운 것처럼 말이다. 사회적 페르소나와 욕망 사이에서 주인공은 방황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정 내에서도, 직장에서도 끊임없이 정체성이 흔들리는 주인공의 모습은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처럼 보인다. 동시에 빙의당하는 자도 그러한 모습을 보여준다:연인의 마약 딜러인 남자는 연인에게 마약을 공급하면서 연인의 아버지 회사에 취직한다. 하지만 거기서 그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겉도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몰리고 폭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의 정체성은 주변 상황에 의해서 계속해서 위협받고 흔들리지만, 빙의된 과정에서 이들은 서로의 욕망과 삶을 훔쳐보게 된다. 탈출에 실패한 이후, 빙의 당한 자는 주인공의 삶을 역으로 훔쳐보게 되는데 정신세계 주인공의 가죽을 뒤집어 쓰고 주인공의 삶과 욕망을 들여다 보고 주인공의 삶을 파괴하고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상당히 흥미로운 점은 그러한 행동이 역으로 주인공의 행동과 겹쳐 보인다는 점인데(주인공의 집 앞에서 주인공이 했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한다는 점에서), 이는 동시에 빙의 당한 자가 빙의한 자를 역빙의하는 일종의 융합 단계에 들어선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정체성이 불안정한 두 현대인의 결합과 이해는 빙의 당한 자의 '착각'으로 이어진다. 그는 주인공의 가장 소중한 것이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욕망을 들여다 봄으로 그녀를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주인공의 가정을 파괴하려 한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그녀의 가족 역시 그저 또다른 하나의 가면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난다.(사실 이는 어느정도 복선이 깔려있었는데, 빙의 당하는 자가 주인공의 시선으로 보는 것이 아닌 '주인공의 가죽을 뒤집어 쓴 시점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어느정도 유추할 수 있었다) 오히려, 자신의 자식을 감정적으로 총으로 쏴죽이는 장면에서 그녀가 가족에게 감정이 정형적이 아닌, 끈쩍하고 파괴적인 감수성이 숨어있었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똑같은 아버지의 유품을 들여다보면서 주인공은 초반 시퀸스와 동일한 이야기를 하지만 죄책감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드러낸다. 결국 그녀의 가족이라는 페르소나 역시 쉽게 내던질 수 있는 가면과도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과연 무엇이고 누구일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역설적이게도 그녀가 행해왔던 끈적한 살인 장면들의 연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결국 현대인의 화려하고 다양한 가면들 속에서, 오롯이 현대인이라 할 수 있는 것은 파괴적이고 충동적인 욕망 뿐이었다는 것이다.

 

영화 포제서는 아들 크로넨버그가 아버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색체를 갖고 있음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SF 작품으로도 훌륭한 작품이고, 현대적이다. 크로넨버그를 좋아했고, 안티바이럴을 좋게 보았다면 기회가 되었을 때 꼭 한번 보는 것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