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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클라이브 바커는 스티븐 킹과 더불어서 세계적인 호러소설의 대가로 알려져있죠. 개인적으로 스티븐 킹과 클라이브 바커 둘다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둘의 전문 분야는 극명하게 갈린다고 생각합니다. 스티븐 킹의 소설들은 하나의 대명제(예를 들어, 살렘스 롯 같은 경우에는 우리 마을에 흡혈귀가 왔어요 라든가, 셀 같은 경우에는 휴대폰 전화로 사람을 미치게 한다든가)에 기초한 리얼리즘 소설쪽에 가깝습니다. 즉, 현실 그대로의 상황에 판타지적인 요소를 추가하고 보통의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는가가 이야기의 핵심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클라이브 바커는 특이하게도 그런 점에서 스티븐 킹의 대척점에 있는 작가입니다.


클라이브 바커의 소설에 있어서 공포란 피의 책 리뷰(http://leviathan.tistory.com/search/%ED%81%B4%EB%9D%BC%EC%9D%B4%EB%B8%8C%20%EB%B0%94%EC%BB%A4)에서도 다룬 것 처럼 일종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본질적으로 파고들면(제가 본 작품들에 의거하자면), 그의 소설에 있어 이야기 구조는 상당히 단순하고 쉬운 구조에 기초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예를 들어, '로헤드 렉스'의 경우 모성을 두려워하는 파괴적인 남자 괴물과 자식을 잃은 아버지 사이의 대결이라는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또, '별빛, 섹스, 그리고 죽음'의 경우 죽은자들이 돌아와서 연극을 공연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기초해서 제가 추론한 것은, 클라이브 바커 소설의 특징은 '동화적'이라는 것입니다. 클라이브 바커가 소설이든 영화든 간에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이야기 전반에 상당히 노골적으로 드러나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노골적인 이야기를 클라이브 바커 특유의 지저분하면서도 원초적인 필체와 표현 안에 담아냄으로서 다른 호러 소설가들이 넘볼 수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죠.


헬레이저도 이러한 클라이브 바커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난 작품입니다. 소설 자체는 한국에 들어오지 않아서 원판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영화 자체가 클라이브 바커가 직접 연출을 맡았으니(?!) 원작과는 크게 차이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헬레이저의 이야기는 단순 합니다. 쾌락주의자인 남자가 극상의 쾌락을 추구하려다가 지옥에 떨어진 뒤, 지옥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한때 내연의 관계였던 형의 아내이자 주인공의 양어머니를 꼬드기고....사실 이게 다입니다. 헬레이저 3부작 모두가 상당히 단순한 스토리 라인을 자랑하는데, 각각의 작품을 3줄 스토리로 요약하는 것이 가능한 정도니까요. 


그러나 헬레이저 삼부작의 특징(그리고 클라이브 바커 특징이기도 한)은 바로 묘사와 설정에 있습니다. 헬레이저의 간판 스타이자 80년대 호러 영화를 풍미한 핀헤드와 수도사란 케릭터들과 극상의 쾌락과 고통으로 가득찬 지옥이라는 특이한 설정들은 스티븐 킹 원작,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샤이닝과 더불어서 호러 장르 수준을 한단계 올렸다는 평가를 듣습니다. 헬레이저의 세계관에서 지옥이란 기존의 지옥의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른 이미지입니다. 1편 초반, 프랭크가 상자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장면이나 영화 내의 프랭크의 묘사를 보면 프랭크가 지옥에 가게 된 것은 그의 악행 때문이 아니라 그의 쾌락에 대한 '탐닉' 때문으로 보여집니다. 1편에서 수도사들이나 지옥에 다녀온 프랭크는 지옥을 '극상의 쾌락과 고통이 함께 공존하는' 공간으로 묘사를 하는데, 보통 악한 자를 벌하는 공간으로서 지옥을 묘사하는 기존 서브 컬처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헬레이저의 지옥관은 선악의 개념보다는 인간다움의 개념에 의해서 정의됩니다(제가 생각하기에는, 말이죠) 고통과 쾌락, 이 두가지 상반된 개념은 한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집착'이라는 것이죠. 가령, 극심한 고통은 사람을 그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에 대한 것에만 집착하게 만듭니다. 또한 극심한 쾌락은 그 쾌락 자체에만 빠지게 만들죠. 양쪽 다 인간으로부터 인간다움을 뺏어갑니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그것에 몰입하기 위해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하게 만들죠. 특히 지옥에 직접 내려가는 2편의 경우, 이러한 지옥관을 제대로 보여주는 몇몇 장면이 있습니다. 2편에서 핵심 인물로 나온 의사가 수술용 드릴을 머리에 꽂고 쾌락과 고통을 동시에 느끼는 수도사가 되는 장면이나, 크리스티가 수도사들에게 그들이 예전에 사람이었다는 것을 설파하자 그들이 인간처럼 행동하는 부분, 그리고 3편 자체에서 잡은 대결 구도인 인간 핀헤드 vs 수도사 핀헤드 등에서도 추론할 수 있죠. 


이러한 독특한 세계관을 영화는 클라이브 바커의 전매 특허인 연출과 표현으로 완성됩니다. 특히 '수도사'라는 케릭터들은 호러 영화 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중 하나입니다. 이제는 지옥에서 온 수도사나 헬레이저의 수도사 이미지를 딴 컨셉들을 주변에서 꽤 찾아볼 수 있습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어요. 베르세르크의 고드 헨드가 헬레이저의 수도사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죠. 이제는 연중되어 끝날 기미가 안보이는(.....) 프리스트 역시 수도사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작가가 직접 언급했구요. 하드코어 SM 포르노에나 나올법한 가죽 옷에 머리에 대못을 갖다 쳐박은 핀헤드의 이미지는 평론가 허지웅의 표현을 빌리자면 '20년이 지난 지금도 충격적'입니다. 뭐 개인적으로 50년이 지나도 핀헤드의 이미지는 충격적일것 같지만요. 


수도사의 이미지 뿐만 아니라, 직접 지옥에 내려가는 2편의 경우 회색빛 콘트리트 미로로 표현되는 지옥의 음울한 모습, 프랭크의 지옥에서 보여준 고깃덩어리들의 에로티시즘 등은 지금 보아도 놀라운 이미지의 향연입니다. 물론 80년대말 관점에서 상당히 진지한 특수효과였겠지만,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상상력을 특수효과가 따라오지 못한다'라는 생각이 자꾸 들더군요. 특히 2편의 경우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결론적으로 헬레이저 삼부작(4편 이후부터는 클라이브 바커가 참여 안해서 무효)은 대단한 작품입니다. 호러 영화의 팬이라면 꼭 보고 지나가야하는 성서 같은 작품이라 저는 단언 할 수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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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영화광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인생을 바꾼 영화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는 합니다만, 제게 있어서 제 인생을 바꾼 영화는 아주 어렸을 적에 SBS에서 틀어준 명화극장, 그것도 삭제된 버전의 1970년대 리들리 스콧 감독작인 에일리언입니다. 말그대로 숨이 막힐듯한 폐쇄공포증이 느껴지는 공간과 한명 한명씩 사라지는 승무원들, 그리고 흰색 영양액을 뿜어가며 죽는 사이보그 박사, 리플리, 마지막으로 검은색 유선형의 새끈한 머리와 기이한 디자인을 보여준 제노모프의 디자인. 사실 이후 제 인생에 있어서 괴물=제노모프, 제노모프=에일리언, 외계인 이라는 공식을 세워준 작품이었고, 훗날 프레데터 같은 괴물영화의 대부 같은 작품에서부터 귀여운 고슴도치 모양의 B급 영화 크리쳐스, 끔찍한 네크로모프 사냥극이었던 데드 스페이스 시리즈, 존 카펜터의 괴수 종말극인 더 씽, 색마 외계인 스피시즈, 우주버전 지옥을 보았다인 이벤트 호라이즌 등등 다양한 작품을 찾아보는데 영감(?)을 제공한 작품이기도 하니까요.

 최초의 1편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독특한(?) 작품인데, HR 기거의 괴이한 디자인과 더불어서 B급 괴수물의 공식을 뒤엎는 페미니즘적인 스토리 라인과 구성은 훗날 영화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죠. 물론, 제임스 카메론이 만든 에일리언 2(ALIEN "S") 같은 경우, 기본적인 코스믹 호러 베이스 장르의 영화를 현재의 외계인 액션 블록버스터로 바꾸는데 영향을 주었고 지금의 에일리언의 이미지는 사실상 2편의 카메론이 다 만들었지만, 팬들은 1편의 그 음습한 이미지를 전혀 잊을 수 없었죠(그렇다고 2편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원래 프로메테우스는 1편을 베이스로 한 프리퀼이었습니다만, 점점 설정이 붙고 커지더니...아예 1편의 프리퀼의 탈을 쓴 '무언가'가가 되었다고는 주장합니다. 리들리 스콧 스스로도 프리퀼 보다는 독립된 작품 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웃기게도 리들리 스콧과 영화 트레일러 전반에서 보이는 이미지(HR 기거의 이미지, 1편의 그 우주선, 그리고 팬들이라면 잊을 수 없는 스페이스 죠키의 등장)는 에일리언 1편 기반이며, 심지어 리들리 스콧 역시 이 작품을 설명할 때 1편을 베이스로 하여 설명을 하였다는 점은 어쩔 수 없는 '확신범'(?)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만듭니다.

2012년 6월 개봉인 프로메테우스는 제가 올해 기대하는 최고의 SF 호러 블록버스터가 되었습니다. 과연 옛날의 그 느낌을 제대로 재현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제는 거의 40년 가까이 되어가며 자신이 만들어낸 위대한 SF 괴수 영화 원작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덧붙일 것인지,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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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고 라고 읽어야 할지, 안고라고 읽어야 할지, 아니면 그냥 운고라고 읽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한(.....) 제목의 작품인 Un-Go입니다. 그냥 이하 안고라고 통칭하죠. 어차피 애니메이션의 기본 모티브가 사카구치 안고의 탐정 소설에서 모티브를 따온거니까, 거기에 맞춰서 읽어주는게 맞는거겠죠.

-기본적으로는 탐정물입니다. 솔직히 추리물이라고 이야기하기에는 트릭이나 이야기를 풀어내는 구조가 좀 허술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과의 사기스러운 능력-인과가 하는 한가지 질문에 무조건 대답할 수 밖에 한다-덕분에 추리파트는 약할수 밖에 없더군요. 그렇기에 작품도 이를 인정했는지 트릭보다는 진실을 추구하는 '패전'탐정과 항상 진실을 거짓으로 가려버리는 자들의 묘한 관계를 중심으로 진실과 거짓의 역학관계를 다룹니다. 사실 구조나 소재는 상당히 참신합니다. 전후에 대한 이야기나 보도통제, 진실을 왜곡하는 거짓,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는 일본 애니메이션이란 장르에서 그다지 비중있는 부분은 아니었으니까요. 또한 여태까지 일본 문화나 사회 전반에 흐르는 묘한 극우주의적인 성격을 고려한다면, 이는 상당히 인상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를 풀어내는 장치로 미즈시마 감독의 전매특허인 말로 때우기(.....)를 쓰더군요. 상당히 형이상학적이면서 도식적인 구조를 자주 사용하는데, 감독의 주제의식이나 이야기 구조는 상당히 마음에 들지만 굳이 그걸 꼭 죄다 말로 풀었어야 했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조금 아쉬운 부분이더군요.  

-지금 반정도 보았는데, 지금까지의 결론은 반정도의 성공이라 칭하고 싶습니다. 이야기 구조 등에서 드러나는 하드 보일드한 분위기, 진실이나 전쟁이라는 소재를 놓고 끊임없이 파고드는 모습 등등은 상당히 높게 쳐주고 싶습니다. 작품은 분명하게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성도 갖고 있고, 이를 감상자에게 계속 어필하는 점도 높게 평가할만 합니다. 하지만, 작품이 1쿨 밖에 되지 않다 보니 설정이나 케릭터에 있어서 상당히 거친 부분이 많습니다. 작중에서 이야기하는 전쟁이 무엇이고, 인과는 누구이며, 도대체 카이쇼 린로쿠와 유우키 신쥬로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지 등등 무언가 이야깃거리가 있는데 작중에서 분명하게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습니다. 인과와 유우키가 만나는 이야기를 다루는 프리퀼 극장판이 나온다고는 하는데, 그럴바에는 그냥 2쿨로 만들어서 깔끔하게 끝내지-_-라는 생각밖에 안 드네요.

-사카구치 안고의 소설들이 상당히 전후 일본 사회에 있어 도발적인 작품인 것은 압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안고가 어떤 의미에서는 더 도발적인게 소설은 개인의 창작물이지만, 애니메이션은 자본이 들어가는 집단 창작물이라는 점이죠.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높으신 분이나 스폰서 신경을 박박 긁을 수 밖에 없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그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이런 작품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본즈가 얼마나 골때리는 집단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코우가 윤의 뾰쪽하면서 긴 그림체가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진짜 주인공인 유우키는 무슨 이쑤시개를 보는거 같아요(......) 하지만 인과(남자와 여자버전 둘 다)나 코마모리는 둘다 케릭터가 마음에 드네요. 

-끝까지 보고 리뷰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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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람이 총에 맞아서 구멍 뚫리거나 잘려나가거나 피가 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표현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뭐,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요. 물론 폭력 영화라는 분야가 처음부터 이렇게 잔인하지는 않았습니다. 각 시대별로 폭력성의 단계를 한층 고조시키거나 인상적인 결과물을 남긴 일종의 문턱(?)같은 영화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실제 총을 맞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 더티 해리라던가, 정교한 고문/가학적 장치를 통해 고통을 엔터테인먼트화 시킨 쏘우 시리즈, 인정하기는 싫지만 사실적인 폭력과 이해불가능한 목적을 결합시켜 인간을 파멸시키는 것을 보여준 마터스 등등이 대표적이죠. 샘 패킨파 감독의 와일드 번치는 이런 영화들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영화입니다. 아마 이렇게 독기가 어린 작품은 영화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일 겁니다.

기본적으로 와일드 번치는 서부극의 끝자락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동차가 등장하고, 자동 권총에, 기관총 등등 서부시대가 끝나는 전환기의 마지막 무장강도들의 이야기입니다. 극중 주인공인 파이크가 이야기하죠. 더이상 (강도)기술이 늘지 않고 있어. 이미 파이크와 그들은 절정의 시기를 지났죠. 이제는 내려갈 때입니다. 그렇기에 파이크와 그의 일당들은 마지막 큰 한탕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그 마지막이 문자의미 그대로의 '마지막'이 되어버리지만요.

와일드 번치란 영화는 그 내리막을 아주 독기어리게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아무리 허무주의적인 냄새를 강하게 풍겼던 서부영화 장르조차도 와일드 번치가 보여준 이 독기어린 세계관에 비할 바가 못됩니다. 와일드 번치의 세계는 선과 악은 존재하지 않으며, 거기에 덧붙여서 '미'나 '의리', '미덕'이라는 개념조차 없는 세계입니다. 철저하게 '인과율'과 허무주의에 의해서 지배되는 세계죠. 초반 기병대 복장으로 은행을 턴 후에 은행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무고한 마을 주민 절반 이상을 총격전에 휩싸이게 한 파이크 일당은 결국 자신의 동료였던 엔젤을 구하기 위해서 200명이나 되는 마파치 반군들과 싸우다 장렬하게 죽습니다. 이 첫번째 총격전과 마지막 총격전이 수미쌍관의 구조(군인의 복장으로 총질을 한 뒤에, 군인들에게 둘러싸여 숨을 거두다)를 이루고 있죠. 게다가 어처구니 없게 위대한 악당 파이크는 어린아이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둡니다. 또한 엔젤은 자신을 배신했던 연인을 죽이고, 그 연인의 어머니에 의해서 고발당하고 파이크 일당을 쫒던 조무래기들은 결국 원하던 파이크의 시체를 손에 넣지만 결국 그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죠. 한마디로 처음부터 끝까지 허무주의와 인과의 법칙으로 점철된 썩은 맛이 줄줄 흐르는 영화라는 겁니다.

이 극단적일 정도로 허무하고 잔혹한 세계에서 샘 패킨파가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폭력으로 흥한 자들의 최후'가 아닐까 싶습니다. 창녀와 한판하고 술병을 비운 파이크와 그의 일당들은 분명 자신의 몫을 챙겨서 도망갈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200명이나 되는 군인들을 향해서 총질을 하고 장렬하게 모두 죽어버렸죠.(물론 그 과정에서 200명의 거의 대부분을 장렬하게 죽여버렸지만) 파이크가 동료들과 함께 엔젤을 구하기 위해서 총을 들고 나란히 반군의 수장 앞으로 행진하는(그리고 그와 대비되게 그들을 미친 놈 보듯이 멍하게 바라보는 반군들) 장면은 영화가 보여주고자 한 것들을 그대로 압축해서 보여줍니다. 폭력으로 흥한 자, 폭력으로 망한다. 라는 것을요.

와일드 번치란 영화가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잔인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 당시 기준으로 엄청나게 잔인했지만요. 오히려 샘 패킨파 감독과 와일드 번치가 영화사적으로 갖는 의미는 폭력의 정수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현재의 액션영화나 폭력 영화와 비교할 수 없는 경지를 달성했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덧.다 쓰고 보니까, 음....마음에 안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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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지 못한 자는 여러가지 의미에서 존경받을만한 작품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배우가 어떤 길을 걸어왔고, 어떻게 감독이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말이죠.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60~70년대를 풍미했던 더티 해리와 전통적인 서부극의 변종인 스파게티 웨스턴의 전설적인 아이콘이었죠. 스파게티 웨스턴은 전통적인 서부극과 대척점입니다. 흔히 존 웨인과 그의 대표작 하이눈에서 등장하는 정의로운 보안관, 영웅적인 무법자 등의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스파게티 웨스턴은 어딘가 썩어 빠져버린 인간군상이 서로 총질하는 것이 주요한 내용이었고,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바로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사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을 하기 전까지의 커리어는 거의 대부분 '무법자형 히어로'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가 감독을 하자 많은 사람들이 비웃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는 대단히 아이러니한데 지금 현시점에서 우리가 기억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더이상 황야의 무법자가 아닌 위대한 감독입니다. 사실, 제가 제 자신을 열렬한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의 팬으로 자처하는 바이지만, 저 역시도 88년작 버드 이후의 '감독' 작품들만을 보았을 뿐 60-70년대의 무법자 류의 영화는 하나도 보지 못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보았을 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인생에서 위대한 배우에서 위대한 감독으로 변모하는 극적인 반전의 계기는 '용서받지 못한 자'(Unforgiven, 1993)라고 생각합니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작품의 핵심적인 특징들이 고스란히 드러나면서 동시에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여태까지 무법자 전문 배우로서 걸어왔던 자신의 영화 인생의 한 부분을 스스로 끝내는 상징적인 작품이니까요.

영화는 윌리엄 머니가 자신의 아내를 묻는 장면을 배경으로 그가 어떻게 정착하였는지에 대한 자막을 짤막하게 올리면서 시작합니다. 사실, 일반적인 영화라면 그 지점이 바로 엔딩 지점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모두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답니다...? 하지만 용서받지 못한 자는 바로 그 지점에서 물음표를 던지면서 시작하죠. 그리고 동시에 영화는 서부 영화에 전반적으로 깔린 클리셰들을 담담하면서 현실적인 시선으로 재조명하고 이를 영화 내에 담아냅니다.

영화 내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한 윌리엄 머니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분신 그 자체입니다. 젊었을 때는 악명 높은 무법자였으며, 수틀리면 사람 죽이고, 물보다 술을 더 마시고, 애도 어른이고 할 것없이 다 쏴죽이는 냉혹한 살인마였습니다. 60-70년대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에 나올법한 전형적인 무법자 케릭터, 즉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했던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전형이었죠. 하지만 이제 그는 나이가 들어서 가정을 꾸리고, 술도 끊고, 홀아비의 몸으로 자식들과 살아남기 위해서 병걸린 돼지들하고 돼지 우리에서 뒹구는 전형적인 농부가 되었죠. 그가 가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현상금을 쫒아 집을 떠난 뒤에도, 그는 영화의 절정 부분 직전까지 계속해서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합니다. 오한에 몸을 떨면서도 몸을 데우기 위한 술을 한방울도 안마시거나, 현상금을 건 창녀들의 공짜 서비스를 받지 않는 점 등에서 여실히 드러나죠.

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자아성찰이자 고백입니다. 젊었을 때 자신의 페르소나 그 자체였던 스파게티 웨스턴과 그 케릭터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폭력은 결코 아름답거나 멋있을 수 없다-을 지속적으로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하는 윌리엄 머니를 통해서 드러내는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자아성찰은 비단 윌리엄 머니 뿐만이 아니라 영화 전반에 깔려있습니다. 그 단적인 예로 영화 내에서 나오는 총격전 장면에 대한 묘사가 있죠.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는 구질구질한 의미에서 총격전을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배에 총을 맞고 죽어가면서 울부짖는 사람,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다 총을 맞아 죽는 사람 등등 영화에서는 총격전에 대한 묘사에 대해서 구질구질하게 묘사합니다. 오히려 총격전의 장면보다 영화가 더 비중을 두는 부분은 바로 사람을 죽인 뒤의 살인자들의 심리입니다. 윌리엄 머니가 네드와 키드와 함께 첫번째 카우보이를 죽일 때, 카우보이가 죽어가면서 울부짖는 모습, 동료들이 머니 일행을 욕하면서 저주하는 모습, 그리고 자신이 쏜 카우보이를 보는 윌리엄과 옆에서 촐랑거리는 키드, 그리고 그 장면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네드의 모습을 교차시켜가면서 '살인'이라는 폭력의 무게를 담담하게 묘사합니다. 두번째 살인이 일어나고 난 뒤, 한번도 살인을 하지 않았다면서 울먹거리는 키드의 모습에서 화려하고 쿨하게 보였던 살인을 한 사람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길 수 있음을 보여주죠.

아마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노년에 들어서 다시 생각한 서부시대의 본질이란 '멋지지도 않은 비이성적인 폭력이 지배하는 세계' 그 자체인 듯 합니다. 극중에서 이런 대화가 있습니다. 키드가 살인할 때의 기분을 묻자 윌리엄은 '잘 모르겠군, 대부분 취해있었으니까'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영화 내에서 대부분의 인물들은 살인이나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 죄책감을 갖고 고뇌하죠. 인간성 자체를 날려버려야 살인, 폭행 등의 극단적인 행위를 할 수 있고, 이러한 인간성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술이나 외부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윌리엄이 자신의 친구인 네드가 아무런 죄도 없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때까지 마시지 않았던 술을 마시고 리틀 빌 일당을 처리했다는 점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또한 이 영화의 악역(?)이라 할 수 있는 리틀 빌이 마을의 치안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도 이런 부분이 드러납니다. 리틀 빌이 당시 서부시대 관점에서는 상당히 유능한(?) 보안관이긴 하지만, 동시에 그가 마을의 치안을 다루는 방식은 대단히 폭력적입니다. 이 영화의 모든 사건의 계기가 된 창녀의 얼굴에 칼질을 한 카우보이들에 대한 처분(강자-포주-편에서 일을 처리한 점)에서부터 잉글리쉬 밥과 윌리엄 머니에 대한 폭행,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무도 죽이지 않은 네드를 때려 죽였다는 점에서 이미 리틀 빌은 '정의'와는 거리가 먼 보안관입니다. 오히려 마을의 치안을 지키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폭력을 쓰고 있다는 점, 이 점에서 법을 등뒤에 놓고 있을 뿐 과거의 윌리엄 머니나 무법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와 부보안관들 역시 마지막에 윌리엄 머니에 의해서 처단당하게 되는 것이죠.

영화의 제목인 용서받지 못한 자(Unforgiven)의 의미는 바로 여기서 옵니다. 폭력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폭력으로 무언가를 행하는 자는 그 자신을 용서할 수 없고(스스로 과거로부터 벗어나려고 지속적으로 단절을 선언하는 윌리엄 머니), 죄값을 치룰 수 밖에 없다(폭력으로 마을 평화를 지켰던 리틀 빌의 최후), 라는 것을 말이죠. 그렇기에 마지막 리틀 빌과 윌리엄 머니의 대화는 의미심장 합니다.

리틀 빌:I don't deserve this...to die like this. I was building the house. 
윌리엄 머니:Deserve got nothing to do with it. 

Deserve 자체에 '자격', '~할 자격이 있다'라는 의미가 있죠. 끝까지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다고 생각한 리틀 빌이 자신이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고 이야기하자, 윌리엄 머니가 '자격은 아무 관계가 없다'라고 하죠. 이와같이 폭력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용서받지 못한 자일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영화 자체로도 대단하지만,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서부극으로 흥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 대단하다고 할 수 있는 영화입니다. 자신의 영화적 정체성이자 한계(?)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을 승화시켜서 예술적인 경지로 끌어올렸으니까요. 그리고 또한 이후 클린트 이스트우드 표 영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이 영화에서 드러납니다. 느릿하고 담담한 카메라 움직임과 담백한 스토리라인, 관조적인 분위기 등등 그랜 토리노나 체인즐링 등에서도 볼 수 있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만의 분위기가 여기서도 잘 드러나죠. 

결론적으로 용서받지 못한 자는 정말 대단한 영화입니다. 서부극을 좋아하든 안 좋아하든, 영화를 좋아한다면 꼭 한번정도 보셔도 좋을 작품입니다.

 


덧.과거와 끊임없는 단절을 선언하는 전직 무법자...어디서 들어본것 같지 않나요? 정답:레드 데드 리뎀션, 존 마스턴.

레데리를 하고 나서 영화를 본거지만, 확실한 것은 레데리의 상당히 많은 스토리 요소들이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재밌는 점은 지금 현재 보고 있는 샘 패킨파 감독의 와일드 번치도 레데리에 많은 영향을 준거 같은데, 정작 영화가 지향하는 지향점은 둘이 정 반대라는게 포인트입니다. 와일드 번치도 조만간 다루도록 하죠.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약한 스포가 있습니다


소녀혁명 우테나 감독인 이쿠하라 감독의 신작 돌아가는 펭귄드럼(2011)은 진짜 빈말로라도 잘 만들었다고 할 수 없는 작품입니다. 제가 이 작품에 빠져서 3편 씩이나 되는 특집 리뷰를 쓸 생각을 하게 만들었어도 말이죠. 저는 이런 펭귄드럼 같은 작품들을 여럿 알고 있죠. 영화쪽에서 본다면 나홍진 감독의 황해라든가, 박찬욱 감독의 박쥐라든가, 아니면 이준익 감독의 평양성이라든가. 만화나 애니 쪽에서 본다면 케모노즈메 등을 사례로 꼽을 수 있겠네요. 하나같이 작가나 감독의 의도한 바가 너무 원대한 나머지 작품에 담을 수 있는 이상의 이야기를 만들려다 망한 케이스들이죠.

하지만 객관적으로 부족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펭귄드럼이 인상적일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 안에 존재하는 이미지들이나 이야기들이 너무나 인상적이기 때문입니다. 실패했다고 묻어버리기에는 아까운 부분이 너무 많고, 그렇다고 추켜세우기에는 여러부분에서 부족한 점이 눈에 띄는 미묘한 작품이죠.

제가 이쿠하라 쿠니히코 감독의 전작들을 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의 특기에 대해서는 알고 있죠. 우테나 당시 때만 하더라도 금기시되는 소재를 생뚱맞게 밝은 연출로 커버하는 등의 상당히 파격적인(?) 구조를 선보였고, 이러한 모습은 펭귄드럼에서도 똑같습니다. 1화에서부터 드러나는 근친상간을 묘사하는 듯한 위험한 장면에서부터, 스토커, 임신드립, 레즈비언, 약드립 등등 소재만 놓고 따졌을 때는 이미 18세 이상 관람가를 받아도 할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쿠하라 감독은 이러한 과격한 소재와 내용을 상당히 온순한(그리고 여러가지 의미에서 파격적인) 연출로 커버합니다. 소녀만화에서나 나올법한 섬세한 연출이라든가, 서로 맞지 않는 소재와 연출의 접목 등(어린이 브로일러, 메리 씨의 세마리 양 이야기 등)을 통해서 소재가 갖는 파괴력을 중화하고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기묘한 분위기를 형성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연출 방식 덕분에 이야기 자체가 묻혀버리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보통 펭귄드럼을 끝까지 감상한 사람들의 평들은 '무슨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감동적이었다'라는 점에서 공통적이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펭귄드럼에 이야기 구조가 없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이야기 자체가 불친절하다는 것이 맞는 표현입니다. 펭귄드럼의 이야기는 구조상의 비약이 너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초반 링고의 스토킹과 16년전 사건과의 연관성,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사건 사이의 연관성 등은 암시나 복선이 지나치게 불친절하여서 감상하는 이로 하여금 당혹하게 만드는 부분이 많습니다. 작중에서 암시나 복선을 짤막짤막한 이미지의 형태로 대부분 처리하기 때문이죠. 또한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구조와 주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마저도 이야기로 다루기 보다는 이 부분 역시 이미지를 이용해서 암시하는 걸 자주 사용하는 덕택에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작품이 꼬여버립니다.

사실 이는 감독의 욕심이 너무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쿠하라 감독은 이야기의 인과관계 보다도 작품 내에 드러나는 이미지와 그 상징성에 초점을 맞추고 작품을 만든것 같더군요. 그덕분에 작품의 구조상 논리적인 설명으로 불가능한 '초현실적'이라 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습니다.(몇몇 예시를 들 수 있지만, 강력 스포이니 생략) 그렇기에 펭귄드럼을 보는 사람들에게 작품은 마치 1000피스 짜리 직소 퍼즐의 전체 그림을 한두개의 퍼즐 조각만으로 유추하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드는 작품이 되어버렸죠.

그렇지만, 이런 저런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돌아가는 펭귄드럼은 아예 실패한 작품은 아닙니다. 엄청나게 뿌려댄 떡밥중 상당수를 회수하는데 성공하니까요. 게다가 떡밥과 이미지를 통해서 드러나는 주제의식이나 상징구조가 그냥 단순한 실패작으로 치부하기에는 아까운 부분이 너무나 많다는 점 역시 그렇습니다.

펭귄드럼의 주제는 '사랑' 그 자체입니다만, 여타 지금까지의 애니메이션과 다른 형태의 사랑을 다룹니다. 펭귄드럼에서 다루는 사랑이란 김춘수의 꽃을 위한 서시나 기독교적인 박애론과 유사한 '존재론적'인 의미에서의 사랑입니다. 또다른 의미에서는 에반게리온 이후로 애니메이션에 종종 나오는 '나-너'의 간극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구요. 이를 운명과 가족이라는 키워드로 묶어내었다는 점, 그리고 결말까지의 결과물을 놓고 보았을 때 상당한 완성도로 나왔다는 점에서 펭귄드럼의 시도는 높이 평가할만 합니다.

자세한 내용의 분석은 중편, 하편으로 넒기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이 작품 자체가 모르고 본 상태에서 느껴야 감동받을 수 있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상편에서는 간단하게 전반적인 특징들만을 다루었으며, 중편 하편에서는 제가 분석한(물론 이제 공식 자료집이나 감독 언급에 따라서 부정될 수도 있지만) 내용들을 최대한 논리에 맞춰서 내놓을 생각입니다. 일단 보실 분들은 상편 부분만 참조하시고, 중-하편 부분은 감상 이후에 보시는게 바람직하리라 생각합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오랫만에 다시 애니보는 중입니다. 보는 애니는 무려 돌아가는 펭귄 드럼!

-지금 11화까지 보았습니다만, 동생놈 때문에 이미 24화까지 네타 다 당했습니다(......) 저는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다 종합하여 보았을 때, 빠심 보정까지 다 넣어도 그렇게까지 '잘 만들었다'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스토리의 구성, 플룻 등등 솔직히 좋지 않습니다. 스토리는 논리적이라기 보다는 그때 그때 당시의 케릭터의 생각을 다루고, 떡밥은 너무 많이 던져대며, 뜬금없이 나오는 이미지의 향연은 사람을 지치게 만듭니다. 제가 보았을 때는 이쿠하라 감독이 '내가 여태까지 구상한최고의 작품을 만들겠다!'라는 느낌으로 만든 작품 같더군요. 보통 이런 작품들은 걸작이 되던가, 괴작이 되던가 둘중 하나가 되는데 펭귄드럼의 경우에는 괴작쪽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펭귄드럼은 괴작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아쉬운 작품입니다. 분명하게 욕심이나 노리는 점은 보이는데, 그 욕심을 덜냈으면 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는게 뻔히 보이는 작품이죠. 일단 아쉬운 부분을 제외하고 논하자면, 펭귄드럼의 미덕은 정밀하게 짜여진 이미지의 향연입니다. 운명과 정해진 선로를 달리는 지하철 등의 메타포, 성적인 이미지들을 다루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밀함, 심각함과 개그의 미묘한 벨런스 등등 펭귄드럼은 여러측면에서 상당히 공을 들인 모습이 보입니다.

물론 이야기가 상당히 비논리적이면서 이해하기 힘들다는 점을 빼면 말이죠.

-이야기는 결말까지 알고 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서 떡밥 자체는 '나름대로' 회수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보고 있는 11화 시점에서는 상당히 '?'스러운 부분이 많습니다. 보통 제가 싫어하는 케릭터들이 '설정'이 앞서고 그 케릭터의 자라온 과정이나 환경이 뒤로 밀리는 케이스(대표적으로 마마마의 경우, 설정을 먼저 만들어놓고 거기에 케릭터를 짜맞춘 분위기가 역력하죠)인데, 팽귄드럼은 미묘하게 그런 케릭터들에 접근해있습니다. 특히 오기노메 링고의 경우 거의 편집증 사이코 수준에 가까울 정도를 보여주는데, 다행히 11화 시점에서는 나름대로 정신차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같은 경우 11화 시점에서 케릭터 성격이 변화하지 않았다면(물론 점점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애니 하차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외에도 감상분까지는 떡밥을 뿌려놓는 양이 너무 많아서 참 그렇더군요. 진짜 이거 다 회수할 수는 있을지...라는 생각이 들정도로요.

-간략한 픽토그램, 지하철 등의 메타포는 팽귄드럼의 인상적인 부분입니다. 엑스트라를 따로 그리지 않고 지하철 관련 표지에 나올법한 인간 모형으로 대체한점(아마도 주인공/주변인의 감정적인 분리 및 케릭터에만 집중하기 위한?), 회상을 지하철/전철의 전차가 들어오는 형식으로 묘사한 점 등은 여태까지 그 어떤 애니에서도 볼 수 없었던 독특한 비유입니다. 게다가 각 사건별로 심각한 상황과 이를 상쇄하는 가벼운 상황을 동시에 보여주거나, 뜬금없는 조합을 보여줌으로서 미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도 팽귄드럼의 미덕이더군요.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성묘사. 분명히 자극적이 될수도 있는 메타포도 적절한 배합으로 기묘한 분위기를 만드는데 성공하더군요. 특히 크리스탈 공주의 역탈의 장면은 누가 뭐래도 작년 최고의 명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끝까지 보면 또 달라지겠지만...아마도 결말만 봐서는 대단히 마음에 드는 작품이 될수도 있겠군요. 물론 지금까지는 '?'스러운 작품이기는 합니다만, 동생이 밀어주는걸 봐서는 또 뭔가 바뀌는 부분이 많을지도...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어느정도 스포가 있습니다)

1.

어느날 아침에 일어났더니 모든게 끝나있었다. 삶이란 사람에 따라서 단순 복잡 미묘한 것인지라 뭐라 정의 내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는 삶이란 공통적으로 '더럽게 빨리지나가는' 속성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발을 헛디뎌서 추락할 때 '시-'라고 말하고 '-발!'이라고 하는 순간 나는 벌써 26을 찍고 내일 모레면 30을 내다보는 나이가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 지점에서, 나의 청춘도 끝나고 말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가장 꽃답다는 청춘이란 시간에 나는 못해본 것만 잔뜩있어서(예를 들어 연애라던가, 연애라던가, 연애라던가...), 삶이란 불만과 후회의 얼룩으로 가득차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 누가 '만족스러운' 청춘을 보내겠는가? 그 누가 하늘과 땅에 맹새코 한점 후회없는 청춘, 대학생활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결국은 청춘 역시 인생의 지나가는 지점에 불과한지라 사람은 자신의 청춘에 있어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후회할 수 밖에 없다.

2.

다다미 넉장반 세계일주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여기 가련한 한 대학생이 있다. 그리고 이 대학생은 자신의 대학 2년을 허투로 보낸다. 그리고 절규한다. 나 다시 돌아갈래-! 그러고 다음 에피소드로 넘어가면 대학 1학년으로 돌아가있다. 다시 삽질한다. 이하 무한 반복. 포인트는 이거다:아무리 주인공이 발버둥을 쳐도, 결국은 주인공은 만족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주인공이 멍청한 것도, 어디 아내의 유혹에나 나올법한 막장 비극의 주인공이라서도 아니다. 해답은 단순하다. 그것이 바로 삶이니까.

다다미 넉장반이 보여주는 세계는 희화화 되어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대학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현실적인, 그리고 가장 보편적인 판타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세계적인 공통이라고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동북아시아 문화권에서 대학교란 의미심장한 상징을 드러내는 공간이다. 학생들에게 자신의 삶을 적어도 자신의 의지대로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바로 대학교뿐이다.(그마저도 취업 및 고시 준비 때문에 점점 없어지고 있지만) 그런 학생들이 갖는 판타지란 무엇인가?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활동을 동아리 사람들과 공유하면서, 동시에 동아리에서 청순가련한 퀸카 만나서 연애를 하는 것.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학생이 갖는 판타지의 기본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현실은? 현실은 어떤가? 현실은 이미 작품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어차피 여친은 생길놈은 생기는데, 근데 그건 이 글을 보고 있는 너한테 해당 안되는 사항. 오즈 같은 친구는 덤. 동아리나 대학 생활도 생각과 다르게 고난과 역경의 연속인지라(다행이 나는 해당사항 없지만), 후배들이나 신입은 이해할 수 없는 선배들의 알력다툼, 동아리 회장의 1인 독재체제, 대학을 뒤에서 지배하는 비밀 서클(다른데는 모르지만 우리 대학은 실제 존재한다. 나도 가입권유 전화 오기전에 소주 한병만 덜먹었으면 지금쯤 KKK두건 쓰고 하일 히드라-! 이러고 있었겠지.) 등등 산넘어 산이요, 물넘어 물이로다. 결국 동아리나 대학생활 역시 자기 뜻대로 생각대로 생기지 않는지라 대학 졸업까지 늘어나는 것은 한숨이요, 후회뿐이며, 미래에 대한 걱정뿐이다.

3.

그렇기에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판단한다:어차피 뭘해도 실망할 바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만의 세계-다다미 넉장반의 자취방-에 틀어박히는 것이 현명하다고.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역시 하나의 선택지가 될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각 에피소드마다 나오는 늙은 점쟁이는 주인공에게 이야기한다:호기는 눈앞에 있으니 놓치지 말라고(그리고 1화에서부터 마지막화까지 받는 복체도 점점 올라간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각 에피소드들의 주인공은 각기 다른 의미로 이 점괘를 해석한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빛을 발하는 것은 마지막 에피소드, 무한한 다다미 넉장반 평행세계에 주인공이 빠지게 되었을 때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박히겠다는 선택을 한 주인공에게 내려진 형벌은 바로 자신만의 세계로 만들어진 감옥에 빠지는 것이었다. 언뜻 보았을 때는 이는 그의 선택에 부합하는 완벽한 '해답'일수도 있다. 완벽하게 '자신'만 존재하는 세계이니까.

 4.

주인공은 그리고 이 다다미 넉장반 은하계를 탐험한다. 옆에 붙어있는 자신의 방의 카스테라를 먹고, 먹고, 또 먹으면서, 그리고 어딘가에 짱박혀 있었던 돈을 줍고, 줍고, 또 주으면서, 읽은 책을 읽고, 읽고, 또 읽으면서. 하지만 그런 생활을 지속할수록, 역설적으로 주인공은 무한한 평행세계의 다른 주인공들을 동경하게 된다. 왜일까? 해답은 명확하다. 無선택이란 선택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선택의 유보에 불과하며, 거기에는 '나'라는 존재는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선택을 통해서 자신을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완벽한 자신의 세계에 도착한 주인공은 그저 다른 주인공들의 삶을 훔쳐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주인공들은 어떤가? 동아리 독재체제를 유지하던 선배를 골탕먹인 주인공 1, 선배들 사이의 이상한 알력 다툼에 낀 주인공 2, 단백질 인형을 사랑한 주인공 3, 다단계 종교행사에 참여한 주인공 4 등등...물론 모든 주인공들은 스스로의 선택에 후회한다. 하지만 여기서 마지막 주인공과 나머지 평행세계의 주인공들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그들은 스스로 의지로 청춘을 살았다는 점이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라는 축복이자 저주를 내렸다. 인간은 스스로 끊임없이 선택하지만, 동시에 그 선택에 끊임없이 시달릴수 밖에 없으니까. 각 주인공들 역시 자신의 삶을 선택했고, 스스로의 선택에 실망할수 밖에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스스로 선택했고 그 선택이 성공했든 실패했든 그 선택에 따라 인생을 살았다. 인생에 있어서 '호기', '좋은 때'란 그런 것이다.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어쩌면 감독은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은걸지도 모르겠다. 청춘이란 결국 인생에 있어서 자신이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 선택해서 살 수 있는 최초의 시기고, 스스로를 누구의 간섭 없이 정의내릴 수 있는 축복의 시기라고. 그렇기에 자신이 어떤 선택을 했든, 결과에 상관 없이 그 선택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5.

무한한 다다미 넉장반의 우주를 해매던 마지막 주인공은 그 의미를 깨닫고 결국 대오각성하여서 무한한 다다미 넉장반의 방 밖으로 뛰쳐나온다. 청춘이란 그렇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이런 개소리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산다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고, 그것이 청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존중받아야 한다. 어떤 독일놈이 쓴 시가 있다. '가지 못한 길은 왜 나는 가지 못했는가'. 이건 그저 개소리에 불과하다. 내가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충실했다면 결과가 어찌되든 그 삶은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

그러므로 젊은이들이여, 청춘이란 시기는 돌이켜봤을 때 결국 후회할 수 밖에 없는 시기다. 하지만 슬퍼하거나 시간을 낭비했다고 좌절하지마라. 그렇다고 청춘을 살았던 시기의 자신의 선택까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니까. 자신이 부정하든 긍정하든, 청춘은 빛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6.

2년전에 나온 이 작품을 지금 리뷰를 쓴다는 것은, 아니 2년 가까이 미루었다가 리뷰를 썼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의미심장한 의미를 지닌다. 나는 이 리뷰를 내 청춘에 끝을 맺는 의미로 쓰고자 했다. 재작년에도 그랬고, 작년에도 그랬듯이 쓸 기회가 날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이 리뷰를 뒤로 미루었다. 왜일까. 마음한편에서는 내 청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고 싶은 것일까. 하지만 분명한 점은 어느 시점에서든 질질 끄는 것은 멈춰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나는 이 글로서 내 청춘에 종말을 고한다.

이 글은 내 청춘에 받치는 장송곡이며, 마지막 조화다.

청춘이여 안녕.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생존전략", 이 애니를 간단하게 정리하는 한 마디

-제가 애니를 근 5년 가까이 보면서 여러가지 작품들을 보았습니다만, 올해는 정말이지 풍년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재작년이었던가, 3년전의 오리지널 애니들이 대거 몰려오면서 명작들의 해를 만들었던 것처럼, 올해역시 훌륭한 애니들이 많습니다. 마마마에서부터, 타이거 앤 버니, C, 아노하나 등등 전혀 기대하지 않은 작품들이 불쑥 불쑥 치고 올라오는, 한마디로 예상외의 즐거움이 많은 해입니다. 펭귄 드럼은 그러한 흐름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제가 소녀 혁명 우테나를 안봤기 때문에 뭐라 평할 수는 없습니다만, 대부분 사람들의 평가가 '우테나 때와 비슷한 탠션과 흐름이다' 라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펭귄 드럼은 불가해한 측면과 부조리한 스토리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부모가 없지만, 3남매의 행복한 모습, 그리고 찾아오는 동생의 죽음과 기적같은 부활. 그리고 동생의 부활을 담보로 주인공들에게 무언가 요구를 하는 팽귄 여왕. 이 모든 것들이 뜬금 없이, 갑작스럽게 진행됩니다. 어떠한 사전정보도 주지 않고요. 또한 작품은 천연덕 스럽게 밝은 분위기로 정신나간 케릭터들(여왕에서부터, 동생을 '사랑'하는 오빠, 자기가 사랑하는 선생을 스토킹 하는 여학생 등등)이 작품의 중심에서 이야기를 진행해나갑니다. 

어떻게 보면 그냥 단순한 카오스계 애니메이션이라고 가볍게 판단할수도 있죠.

-하지만 이와 같은 정신 나간 분위기에서 이야기가 조금씩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것은 펭귄드럼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오기우에 링고의 운명일기, 그리고 핑드럼, 이야기를 다루는 연출, 표현 방식이 정해진 트랙을 따라 정해진 시간에 움직이는 지하철을 모델로 하고 있다는 점, 탈의하는 여왕의 변신장면과 묘한 성적 긴장감, 이 모든 것들이 맞물려 떨어지면서 도는 펭귄 드럼이라는 작품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 어느 누구도 앞으로의 전개를 예측 할 수는 없죠. 하지만 애니 내에서 사소한 것들마저도 중요한 단서로 부각되는 상황에서 도는 펭귄 드럼은 보는 사람을 계속 긴장하게 만들며, 그 기대에 부응하여 애니를 예측불능의 상황으로 몰고 갑니다. 그런 점에서는 대단히 훌륭한 작품입니다.

-펭귄 여왕의 역탈의 장면은 올해 애니메이션 명장면중 하나로 뽑힐 것입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백조의 호수는 고전 명작 발레입니다. 이건 누구라도 다 아는 사실이죠. 마법에 빠진 백조가 진정한 사랑을 만나면 마법이 풀려 본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지만, 잘못된 사랑에 빠져서 결국 자살하게 된다는 애절한 스토리의 이 발레는 어찌보면 남녀차별적인 요소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왜 여자는 순수한 존재로 나오는 거죠? 그리고 왜 여자는 순수를 잃으면 죽어야 하는거죠? 물론 옛날의 작품에 이런 식의 기준으로 평가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블랙 스완은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순수한 인간과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 그 두 상극이 하나의 인물에 녹아들면 어떻게 될까 말이죠.

블랙 스완은 백조의 호수를 재해석하는 곳에서부터 시작합니다
. 인간은 순수한 부분도 있는 동시에, 사악하고 욕정에 사로잡힌 모습도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백조와 흑조를 한 발레리나가 동시에 표현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로 인해서 백조의 호수는 의미심장해집니다. 순수한 사랑과, 강렬한 욕망의 유혹. 결국 유혹에 굴복하여 순수성이 소멸하죠. 이렇게 보면, 두 역을 하나의 발레리나가 연기하면, 순수한 소녀의 사랑과 비극에 대한 이야기가 인생과 사랑에 대한 묘한 메타포로 변화하게 됩니다.

하지만
,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은 다면적인 존재지만, 다면적으로 극단적인 존재는 아닙니다. 순수하면서 욕정에 사로잡힐 수는 없고, 남자를 유혹하면서 소녀적인 수줍음, 순수함의 감성을 지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것을 하나로 통일시킨다면, 그것은 예술적인 완전함의 경지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완전함, 이것이 블랙 스완의 영화 내내 나오는 중요한 소제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그 완전함이라는 것은 하나의 편집증적인 광기며, 자기 파괴적일 수 밖에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 니나는 훌륭한 발레리나이기는 하지만, 위대한 발레리나는 아닙니다. 훌륭하기는 하지만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어 자신을 풀어주지를 못하고, 끝없이 연습하지만, 중요한 역할을 맡지 못하고 항상 조역을 맴돌죠. 그러한 그녀가 기회를 잡아 여왕 백조와 백조의 역을 동시에 맡게 됩니다. 하지만, 두 역을 동시에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왕 백조 역할, 그녀의 욕정과 갈망, 욕망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죠. 그렇기에 그녀는 여왕 백조 역을 드러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강박관념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그리고 자신을 끝까지 몰아붙이다 결국은 자살에 가까운 자학을 하게 됩니다.

재밌는 점은 니나 자신 역시 어두운 부분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 영화의 곳곳에서 드러나죠. 단장이 기습적으로 키스를 하자 깨무는 부분, 동료 단원의 물건을 훔치는 부분 등에서 말이죠. 하지만, 본인은 스스로 자각을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러한 자신의 내밀한 욕망에 대해서조차도 그녀는 강박적으로 대처하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그녀의 욕망이 드러나는 장면들에서 드러나는데(동료단원과의 동성애 장면, 햘퀴기 장면 등등), 그녀의 욕망이 실현되는 순간(망상의 장면)에서도 그녀는 그녀의 욕망의 주체가 아니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 니나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순수한 존재-욕정에 사로잡힌 존재로 이분하여 자아분열을 일으키지만, 그 미쳐가는 과정조차도 자신일 수 없는 비참한 존재로 묘사된다는 것입니다. 예술가가 완벽함에 집착하여 자신을 잃고 미치는 것, 블랙스완이 보여주는 것은 그러한 자기 파괴적인 모습에 대한 탐미적인 해석입니다.

니나 역을 맡은 나탈리 포트만은 이러한 붕괴의 과정을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화 전반적으로 니나는 소녀와도 같은 분위기를 풍기죠. 하지만 가끔씩 튀어나오는 그녀의 히스테리컬한 발작이나 파괴적인 행동은 다른 사람이 아닌, 니나 자신의 어두운 일면, 또는 그녀의 소녀적인 모습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니나 자신은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녀의 행동 자체는 그녀라는 존재에 비추어봤을 때 대단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러한 복잡 오묘한 케릭터를 훌륭하게 재현한 데는 나탈리 포트만의 공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로 데런 아르노프스키 감독은 기존의 정형적인 주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레슬러, 레퀴엠) 비판을 벗어나서 한 차원 높은 자신만의 세계관을 구축했습니다. 그 점에서도 의의가 깊은 영화죠. 또한 영화 자체가 그가 여태까지 감독했던 영화 스타일들의 집결체인 만큼, 영화적인 편집이나 카메라워크 등의 완성도도 뛰어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블랙 스완은 훌륭한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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