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조의 호수는 고전 명작 발레입니다. 이건 누구라도 다 아는 사실이죠. 마법에 빠진 백조가 진정한 사랑을 만나면 마법이 풀려 본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지만, 잘못된 사랑에 빠져서 결국 자살하게 된다는 애절한 스토리의 이 발레는 어찌보면 남녀차별적인 요소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왜 여자는 순수한 존재로 나오는 거죠? 그리고 왜 여자는 순수를 잃으면 죽어야 하는거죠? 물론 옛날의 작품에 이런 식의 기준으로 평가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블랙 스완은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순수한 인간과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 그 두 상극이 하나의 인물에 녹아들면 어떻게 될까 말이죠.
블랙 스완은 백조의 호수를 재해석하는 곳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인간은 순수한 부분도 있는 동시에, 사악하고 욕정에 사로잡힌 모습도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백조와 흑조를 한 발레리나가 동시에 표현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로 인해서 백조의 호수는 의미심장해집니다. 순수한 사랑과, 강렬한 욕망의 유혹. 결국 유혹에 굴복하여 순수성이 소멸하죠. 이렇게 보면, 두 역을 하나의 발레리나가 연기하면, 순수한 소녀의 사랑과 비극에 대한 이야기가 인생과 사랑에 대한 묘한 메타포로 변화하게 됩니다.
하지만,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은 다면적인 존재지만, 다면적으로 극단적인 존재는 아닙니다. 순수하면서 욕정에 사로잡힐 수는 없고, 남자를 유혹하면서 소녀적인 수줍음, 순수함의 감성을 지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것을 하나로 통일시킨다면, 그것은 예술적인 완전함의 경지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완전함, 이것이 블랙 스완의 영화 내내 나오는 중요한 소제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그 완전함이라는 것은 하나의 편집증적인 광기며, 자기 파괴적일 수 밖에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 니나는 훌륭한 발레리나이기는 하지만, 위대한 발레리나는 아닙니다. 훌륭하기는 하지만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어 자신을 풀어주지를 못하고, 끝없이 연습하지만, 중요한 역할을 맡지 못하고 항상 조역을 맴돌죠. 그러한 그녀가 기회를 잡아 여왕 백조와 백조의 역을 동시에 맡게 됩니다. 하지만, 두 역을 동시에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왕 백조 역할, 그녀의 욕정과 갈망, 욕망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죠. 그렇기에 그녀는 여왕 백조 역을 드러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강박관념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그리고 자신을 끝까지 몰아붙이다 결국은 자살에 가까운 자학을 하게 됩니다.
재밌는 점은 니나 자신 역시 어두운 부분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영화의 곳곳에서 드러나죠. 단장이 기습적으로 키스를 하자 깨무는 부분, 동료 단원의 물건을 훔치는 부분 등에서 말이죠. 하지만, 본인은 스스로 자각을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러한 자신의 내밀한 욕망에 대해서조차도 그녀는 강박적으로 대처하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그녀의 욕망이 드러나는 장면들에서 드러나는데(동료단원과의 동성애 장면, 햘퀴기 장면 등등), 그녀의 욕망이 실현되는 순간(망상의 장면)에서도 그녀는 그녀의 욕망의 주체가 아니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즉, 니나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순수한 존재-욕정에 사로잡힌 존재로 이분하여 자아분열을 일으키지만, 그 미쳐가는 과정조차도 ‘자신’일 수 없는 비참한 존재로 묘사된다는 것입니다. 예술가가 완벽함에 집착하여 자신을 잃고 미치는 것, 블랙스완이 보여주는 것은 그러한 자기 파괴적인 모습에 대한 탐미적인 해석입니다.
니나 역을 맡은 나탈리 포트만은 이러한 붕괴의 과정을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화 전반적으로 니나는 소녀와도 같은 분위기를 풍기죠. 하지만 가끔씩 튀어나오는 그녀의 히스테리컬한 발작이나 파괴적인 행동은 다른 사람이 아닌, 니나 자신의 어두운 일면, 또는 그녀의 소녀적인 모습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니나 자신은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녀의 행동 자체는 그녀라는 존재에 비추어봤을 때 대단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러한 복잡 오묘한 케릭터를 훌륭하게 재현한 데는 나탈리 포트만의 공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로 데런 아르노프스키 감독은 기존의 정형적인 주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레슬러, 레퀴엠) 비판을 벗어나서 한 차원 높은 자신만의 세계관을 구축했습니다. 그 점에서도 의의가 깊은 영화죠. 또한 영화 자체가 그가 여태까지 감독했던 영화 스타일들의 집결체인 만큼, 영화적인 편집이나 카메라워크 등의 완성도도 뛰어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블랙 스완은 훌륭한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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