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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실물 보다 큰'은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건 이 영화에서 어떠한 의미도 갖지 않는다. 흔히들 'Based on Real Story'라고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하면, 우리는 실화같지 않은 실화의 이야기를 통해서 세상은 밝고 아름답고 살만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실물 보다 큰 은 그런 일반적인 실화극과는 다르다. 만약 실물 보다 큰이 실화극으로서 의미를 가지려면, 적어도 에드가 아들을 죽이려고 시도하고 병원에 끌려난 뒤, 코티즌 중독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에드의 모습을 눈물겹게 보여줬어야 했을테니까. 오히려, '실물 보다 큰'은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이미지를 차용하고, '중독' 상태의 에드에 초점을 맞추면서 기묘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영화를 분석하기 앞서서 우리는 1950년대 미국이 어떤 곳이었는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세계는 두 강대국에 의해서 양분된다. 소련과 미국,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사이의 냉전. 그와 별개로 미국은 2차세계대전 이후로 유래없는 부흥기를 맞이한다. 한 때, 이민자들의 2류 국가였던 미국은 이제 마샬 플랜을 통해 한때 세계의 중심이었던 유럽의 부흥을 지원하며, 자유의 수호자이자 세계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했다. 세계는 평화로웠고, 정의로웠으며, 미국에 의한 평화, 즉 팍스 아메리카가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영화가 만들어진 1958년은 이제 그 팍스 아메리카의 끝자락이었다. 1960년대가 어떤지는 모두 알지 않는가? 약쟁이 히피들과 반전, 그리고 더러운 전쟁인 배트남전까지.


'실물 보다 큰'은 바로 이 지점, 팍스 아메리카의 종말 직전에서 시작한다. 가장인 에드는 학교 선생과 택시 회사 접수원일을 동시에 하는 평범한 미국 중산층 가장이다. 그런 그가 심각한 희귀 불치질환에 걸려서 고통 받게 되고, 살아남기 위해서 평생 코티즌을 복용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하지만 이 약에는 정신질환을 유발하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다. 영화의 대부분은 에드가 코티즌을 복용한 이후의 심리상태를 묘사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과대망상증에 빠져서 학부모들 앞에서 위대한 미국의 이상향을 설파하지 않나, 직장을 때려치우고 위대한 미국의 미래를 위해 논문을 내겠다고 하지 않나, 심지어 영화의 종반에는 구약의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를 들먹이면서 아들을 죽이려한다.


에드라는 인물은 미국을 그대로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미국의 가족 경제를 책임지는 가장이며, 미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한 명의 시민이고, 가족을 사랑하며, 신앙에 충실한 남자다. 문제는 이런 모습들을 영화는 그가 정상일 때 보여주는 것이 아닌, 그가 코티즌으로 정신이 훼까닥 돌아버린 이후에 보여준다. 그는 처음에는 가족을 위해 쓰러질 수 없다는 일념으로 코티즌을 복용하지만, 점차 약을 맹신하며 약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약에 취했을 때 그는 스스로를 거물로 생각한다. 하지만 웃기는 건, 실제 그는 그의 동료인 윌리에 비해서 왜소하게 묘사되며, 주변 사람들과 관객들은 이미 그가 약에 취해서 맛이 간 것을 알고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그의 아들마저도 '아버지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그저 보결선수 뿐이었다구요!'라고 아버지를 대놓고 까버리며, '이런(약에 취한) 아버지 따위는 그냥 죽어버리는게 더 나아요!'라고 선언하고, 그의 부인은 영화의 말미까지 그의 광증을 알아채지만 어떠한 제제도 가하지 못하고 그저 끌려다닐 뿐이다. 


제임슨 메이슨의 과장되고 위압적인 연기는 에드라는 케릭터를 단순한 미치광이 그 이상으로 만든다. 1950년대식의 촌스럽고 과장된 연기를 뛰어넘어 신념에 가득찬 선지자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제임슨 메이슨의 연기는 웅장하며 거대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논리와 신뢰성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약빨 좀 받은 약쟁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실물 보다 큰은 이런식으로 요즘 영화 같이 대놓고 이야기 하지만 않을 뿐, 그 속에 1950년대 미국 사회와 시대상에 대한 격렬한 악의를 드러낸다. 에드가 설파하는 전통적인 미국의 가치관이란 한낮 약쟁이의 약빤 소리에 불과하며, 심지어 주변 사람들도 모두 그것을 알고 있다. 다만 아무도 입으로 말을 꺼내지 않을 뿐. 게다가 이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영화의 결론은 '그(미국)는 불치병을 갖고 평생 약(임시방편)이나 빨고 살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종말론적이기 까지 하다. 


영화가 만들어내는 1950년대는 우리가 대중매체에서 접하는 기묘한 이미지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1950년대는 다시 오지 않는 미국의 황금기로 평가받고 있고, 많은 매체들은 미국의 밝은 이미지(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를 묘사할 때 많이 차용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폴아웃 3와 베가스의 아름답고 바람직하지만 어딘가 망가지고 뒤틀려버린 듯한 이미지들이다. 놀랍게도, 실물 보다 큰 은 바로 그 시대가 현재였던 그 시점에서 이 뒤틀려버린 미국의 이상향을 보여준다. 영화는 시종일관 어딘가 나사빠지고 불연속적인 대화의 연속이며, 가족의 행복한 모습과 이미지의 이면에는 폭탄과도 같은 긴장감을 깔아둔다. 2.35 대 1의 시네마스코프 기법은 1950년대의 사회를 아름답게도 묘사하지만, 수평적 구도와 수직적 구도를 혼합해서 인물과 인물 사이의 묘한 거리감과 수직적인 위계질서(특히 위의 포스터에서 나온 그림자를 통한 묘사 장면에서 압도적으로)를 구축한다.


영화의 독기를 제쳐두더라도, 영화가 보여주는 선견지명은 엄청나다. 교사인 에드가 이야기한 전통적인 미국의 가치와 이상은 1960년대를 거쳐서 이제 완벽하게 붕괴되었다. 그리고 '공립학교 교사'가 이야기한 '미국의 이상향'은 미국의 공교육 시스템의 붕괴로 이미 설자리를 잃어버린지 오래다. 물론, 영화가 이야기 한대로 미국은 종말을 맞이한 것은 아니며, 미국의 가치관은 변화하여 지금까지 존속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국가의 이상적인 인재상을 배출하는 공교육 시스템의 붕괴와 '교사' 에드가 영화를 통해 드러내는 미국의 문제점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실물 보다 큰 은 미학적으로든, 이야기로든 간에 이미 1958년에 찍었다고 생각하기 힘든 영화다. 영화가 만들어내는 1950년대의 유토피아적인 분위기, 그리고 그 속에서 썩어들어가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제임슨 메이슨의 웅장한 연기로 비꼬는 모습은 시대를 앞서가도 한참 앞서나갔다. 기회가 된다면 꼭 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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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인간을 통해 그 분의 뜻과 의지를 드러내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악한 인간들이 있으며, 부조리와 모순이 넘쳐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선하면서 완벽한 신의 존재를 증명하면서 어떻게 인간의 악이라는 존재를 이 체계 안에 집어넣을 수 있을까? 영화 '사냥꾼의 밤'은 이에 대한 기묘한 대답을 제시한다. 연쇄 살인마 '해리 파월'은 미망인과 결혼한 뒤, 이들을 죽이는 연쇄살인마다. 그런 그가 자신의 감방 동료가 숨긴 만달러의 존재를 알게 되고, 출소 후 감방동료의 미망인과 결혼해서 그 돈을 가로채고자 한다.


해리 파월은 이제는 흔하디 흔한 연쇄살인마 케릭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당시 나왔을 때는 충격적이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해리 파월이라는 케릭터가 영화사상 가장 인상적인 연쇄살인마 케릭터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의 '하나님에 대한 헌신'(?)이다. 해리 파월의 가면은 바로 전도사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하는 사람이 연쇄살인마라니! 그러나 해리 파월은 전도사라는 역할을 단순히 연기하는 것이 아닌, 그 안에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시도때도 없이 하나님에게 신앙 간증아닌 간증을 하고, 찬송가를 부르며, 심지어 설교까지 한다! 


설교라는 말이 나와서 말인데, 해리는 양손에 사랑(L.O.V.E)과 증오(H.A.T.E)를 세겨놓았다. 그런데 이 문신은 오로지 주먹을 쥐었을 때만 그 형체를 드러낸다. 그리고 해리는 이 주먹의 문신을 두고, 기묘한 설교를 한다. 아벨의 사랑과 카인의 증오의 알레고리에 대해서 말이다. 카인과 아벨의 싸움을 깍지낀 형상으로 표현하는 해리는 어떻게 주님의 사랑이 승리하는가를 설교한다. 하지만, 여자에 대한 증오를 불태우는 해리야 말로 아담을 타락시킨 이브와 여자에 대한 기독교적인 증오와 스스로 묘사했던 카인의 증오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해리는 자신의 증오를 숨긴다. 성실한 전도사 같지만 능글맞은데다 보는 사람 속을 느글거리게 만드는 로버트 미첨의 연기는 해리 파월이라는 악역을 복합적인 이미지로 만든다. 그는 매력적인데다가 사람을 어떻게 속이는지 않다. 마치 창세기 선악과 이야기에서나 나올법한 뱀처럼 말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본모습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에게 쫒기는 어린 아이들만이 그의 괴물같은 본모습을 볼 뿐이다.


영화는 이 모든 이야기를 동화나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알레고리로 풀어낸다. 자매인 벤과 펄의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는 어머니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제대로 못하고 있다. 그녀는 만난지 며칠 안되는 전도사 해리와 결혼하면서, 자식을 지키지 못하고 허무하게 해리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다. 부모 없이 세계에 내던져진 아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계부인 해리에게서 탈출한다. 마치 출애굽기의 모세의 에피소드와 예수가 예루살렘을 떠난 이야기를 반반씩 섞은 듯한 이 이야기를 영화는 동화나 성경의 삽화처럼 정교한 구도가 아닌 거대하고 정적인 풍경속의 작은 인물들의 형태로 많이 묘사한다. 해리가 그의 아내를 살인할 때의 장면, 지하실에서 해리의 손길을 피해 도망치는 아이들, 마굿간에서 잠을 자는 아이들을 쫒아오는 지평선 너머 해리의 실루엣 등등에서 이를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강을 따라 내려간 아이들은 그들의 어머니의 대체자라 할 수 있는 쿠퍼 부인을 만난다. 그녀는 해리의 완벽한 대척점에 서있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인데, 기독교적인 사랑과 자비를 대표하듯이 부모가 없는(혹은 부모가 맞벌이를 해서 부재한) 아이들에게 부모 역할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쿠퍼 부인과 해리, 한쪽 편만을 드는 것이 아닌 양측 모두 신을 대변한다고 설파한다. 영화의 절정 부에서 해리와 쿠퍼 부인이 대치 상태를 이룰 때, 그 기묘한 긴장 속에서 해리가 부르는 찬송가에 쿠퍼 부인이 화답한다. 카인의 증오와 아벨의 사랑이 서로 만나 하나의 완벽한 알레고리를 형성한다.


결론적으로 영화 사냥꾼의 밤은 기묘한 영화다. 성경과 동화의 구조 속에 아이들의 세계를 침범하는 어른들의 음험한 이야기를 다룸으로서 기묘한 느와르 영화를 만들어냈다. 영화 개봉 당시에는 실패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시대를 뛰어넘어 살아남은 영화다. 기회가 된다면 꼭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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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의 낙인이라는 영화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그에 가깝게 시도라도 해본다면 기괴함, 비논리성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컷들의 구성은 무의미하고 정합성 없이 뚝뚝 끊어진 구성을 보여주며, 이야기들은 리얼리즘은 커녕 현실에서 수백만 광년정도 떨어져있는 듯한 기기묘묘함을 보여준다. 게다가 인물들은 정신줄을 죄다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렸는데, 밥냄새 환장하는 넘버 3 킬러, 수만마리의 박제 나비들을 벽에다 꽂아놓고 살며 자신의 희망은 죽음이라 이야기하는 넘버 2 킬러, 그리고 바지에다 오줌을 지리면서 준엄하게 자신의 타겟을 꾸짖는 넘버 1 킬러까지 감독한테 약이라도 빨고 영화를 만들었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내용은 간단하다. 한 킬러가 있다. 서열 넘버 3. 영화는 이 남자가 일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한순간의 실수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진 남자가 살아남기 위한 투쟁의 과정을 보여준다. 언뜻 보기에는 그저그런 느와르 물이라 할 수 있지만, 스즈키 세이준은 이 이야기를 기묘한 이미지와 구조로 비틀어서 한 남자의 강박관념에 대한 이야기로 빚어낸다.


하지만 영화는 에드 우드나 우베볼 같은 정신나간 저퀄리티의 영화가 아니다. 스즈키 세이쥰은 그러한 정신나간 이미지 속에서도 정확하게 자신이 해야할 일을 알고 있었으며, 그 속에 교묘한 알레고리를 배치하여 한 남자의 강박관념과 광기를 표현하고자 했다. 여태까지 많은 영화들이 인물의 감정을 묘사하기 위해서 차분하게/폭력적으로, 정적으로/동적으로 등의 다양하고 상반된 방법을 보여주었지만, 살인의 낙인처럼 '진짜 싼티나게'(.....) 묘사하지는 않았다. 어찌보면 상상력이나 표현력의 싼티, 그리고 개그 요소 등의 B급 요소에 있어서는 주성치와 비교할 수 있으나, 스즈키 세이쥰은 이 B급 요소를 예술적인 표현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이는 B급 정서만이 가질 수 있는 파격성과 그리고 허를 찌르는 장치를 이용해서 스즈키 세이쥰이 현실과 영화의 괴리를 통한 웃음을 뛰어넘어 강박관념과 집착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사실 스즈키 세이쥰의 영화는 직접 보기 전까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편린의 투성이이다. 다음은 그 편린의 단편을 분석하고자 노력했던 나의 실패작 리뷰의 일부이다.


영화는 3가지 파트로 나뉘어진다. 첫번째 파트는 주인공 하나다가 공항에서 도착해서 실수로 민간인을 쏘기까지의 이야기, 두번째 파트는 조직에게 쫒기는 하나다가 미사코의 아파트에서 숨어살면서 생기는 에피소드, 그리고 마지막 파트는 하나다와 넘버 1 킬러 사이의 기묘한 동거(?)에 대한 이야기다. 첫번째 파트에서 하나다라는 케릭터는 자신의 원칙을 갖고 살아가는, 범죄영화에서 볼 수 있는 흔한 프로페셔널 킬러라 할 수 있다. 그와 대비되는 것이 한때 조직의 랭크안에 들었다고 주장하던 퇴물 킬러다. 그는 입에 술을 달고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에 대해 하나다는 이렇게 이야기한다:킬러가 술과 여자에 빠지면 그걸로 끝장이라고. 실제 하나다와 그 퇴물 킬러가 같이 임무를 수행할 때, 하나다가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였다면 퇴물 킬러는 한때 순위권에 들었다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허접한 모습을 보여주고,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재밌는 점은, 이야기가 두번째 파트로 접어들면서 부터 하나다 역시 그 퇴물 킬러가 했던 행동양식을 똑같이 따라한다. 민간인을 쏜 이후로, 하나다는 술을 입에 달고 사며, 미사코를 범하기 위해서 찌질한 모습을 보이는데다가 미사코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의 원칙과 프로페셔널리즘이 깨졌을 때, 그에게 남은 것은 '강박관념'이었다. 사실 그의 쿨하고 프로페셔널했던 세계는 그의 부인이 그를 총으로 쏘면서 깨지는데, 그의 프로 의식에 대한 강박관념이 여자와 술, 그리고 생존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진다. 영화의 명장면이라 할 수 있는 필름위에 조잡한 종이 새를 붙여서 펄럭이게 만드는(.....) 장면은 하나다의 강박관념을 참으로도 B급스럽게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두번째 파트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미사코'라는 케릭터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인도-일본인의 혼혈인 배우이기도 하지만, 영화 내내 다른 인물들과는 한 차원 정도 붕 뜬거 같은 페이스를 유지하는 미사코는 이 영화의 이미지를 대표한다 할 수 있을 정도다. 첫만남에서부터 미사코는 관객에게 기묘한 포스를 내보이는데, 비오는날 오픈카를 몰면서 차 장식으로 목에 바늘을 꽂은 새 시체를 갖다 박아넣는 이 정신나간 센스는 이루어말할 수 없을정도다. 게다가 하나다가 미사코의 아파트에 들어섰을 때, 수만 마리의 나비 박제들이 벽에 꽂힌 모습은 미사코의 정신상태가 하나다 보다 더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다의 강박관념이 미사코의 경우에는 '죽음'에 대한 집착으로 발현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영화는 이러한 미사코의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을 박제라는 이미지를 통해서 압도적으로 구현한다.


하지만 하나다는 미사코의 납치와 죽음, 그리고 조직에서 보낸 킬러들을 하나다가 처리하면서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을 극복(?)한 것처럼 보이나, 그런 하나다 앞에 최대의 강적 '넘버원'(심지어 이름조차 없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넘버원과 하나다의 대결이 영화의 후반과 클라이맥스를 장식한다. 영화는 이 넘버원이라는 케릭터를 통해서 원칙과 타이틀에 대한 강박관념을 희화화 시킨다. 미사코의 아파트에 하나다를 몰아넣고 하나다에게 친절하게 전화를 걸어서 압박하는가 한편, 하나다와 동거할 때는 하나다를 감시하기 위해 화장실도 안가고 바지에 소변을 지린다. 그러고 이를 비웃는 하나다에게 준엄하게 꾸짖는 넘버원의 모습은 웃기다 못해 아연이 질색할 정도다. 재밌는 점은 넘버 원이라는 케릭터 자체는 자신의 '원칙'에 대단히 충실한 케릭터라는 점이다. 어찌보면 하나다의 원칙에 대한 강박관념이 완전하게 발현되었을 때의 모습을 넘버원이 묘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넘버원은 하나다에 의해서 패하게 되는데, 이는 그의 원칙에 대한 '강박관념'을 하나다가 꿰뚫었기 때문이다. 사실 완벽한 존재라고 할 수 있는 넘버 원은 이마 정중앙에 총알을 박아넣는 습관을 갖고 있는데, 하나다는 그런 넘버원의 습관을 역으로 이용해 미사코의 헤어밴드로 이마를 커버해서 넘버원의 공격을 방어한 것이다. 어찌보면 영화는 자신의 원칙에 의해 스스로 당해버린, 원칙과 그에 대한 강박관념을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는 결국은 '내가 넘버원이다!!'로 귀결된다. 끝은 그냥 직접봐라. 백문이 불여일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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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영화는 이게 처음이 아닙니다. '나쁜 남자'가 제 첫 김기덕 영화였죠. 아마도 한국 대중들에게는 가장 잘 알려진(피에타 이전에는) 작품일텐데, '여대생이 창녀가 되는' 이라는 센세이셔널함(그리고 거기에 페미니스트들의 김기덕 물어 뜯기까지) 덕분에 각광을 받은 케이스죠. 나쁜 남자 자체는 김기덕 영화의 가장 근원적인 테마인 '평범한 중산층의 인식 비틀기'에 기반하고 있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로맨스물을 아주 뒤집어 엎어버립니다. 관음하는 사랑, 창녀-포주의 무언가 알 수 없는 로맨스, 그리고 충격적인 엔딩까지...사실 이후 김기덕 영화는 본적이 없지만 제 머릿속의 김기덕은 가죽 팬티와 마스크를 쓰지 않고 채찍을 들지 않았을 뿐인 초 S 변태감독이었습니다. 

근데 이번 피에타로 황금사자상 받고 나서 '이제 산에서 내려와도 되려나...'라는 드립을 치는걸 보면서 의외로 자연과 노을을 사랑하고 베지밀 Q를 즐겨마시는 이 시대에는 흔하디 흔한, 평범하고도 순수한 변태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피에타의 기본 줄거리는 단순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도 진짜 나쁜 남자 이강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청계천에서 사채업자의 돈을 수금하는 이 주인공에게 한 여성 미선이 찾아옵니다. 미선이 말합니다. 자기가 예전에 남자를 버린 엄마라고...영화는 주인공 강도가 엄마를 만나면서 변하는 것이 주된 스토리라인입니다. 사실, 영화 보고나서 다시 회상하면서 놀랐던 것이 김기덕 영화 같은 그런 썩은(?) 맛, 아니면 뒤통수를 깨는 반전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오히려 김기덕 감독은 피에타에서 대단히 정석적인 스토리 라인을 따라갑니다. 하지만 그 스토리라인을 따라가는 과정 자체는 김기덕 특유의 썩은맛이 철철 넘치죠.

-영화에서 '엄마와 모성애'가 가장 눈에 띄는 핵심 테마이기는 합니다만, 간과해서는 안되는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바로 '돈'이라는 존재죠. 주인공 강도는 사채업자입니다. 영화 초반부에서부터 영화 중후반부까지의 주된 이야기는 바로 강도가 수금하러 다니는 사건이 주가 됩니다. 사채업자 답게, 말도 안되는 이자율로 돈이 불어나고 그 돈을 강도는 인간 백정마냥 뜯어냅니다. 이 인간백정이라는 말이 무색하지도 않게, 사람을 병신으로 만들죠(손가락, 팔 절단에, 다리병신 만들기 등등...) 여기서 강도는 악업을 쌓고, 후에 자신의 엄마를 납치했을 만한 채무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악행을 되돌아보는(불구가 되서 증오를 불태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죠.


하지만 여기서 조심해야할 점은 영화는 강도'만' 나쁜 놈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겁니다. 강도가 수금하러 왔을 때, '지깟게 설마 진짜 병신으로 만들겠어'하면서 자기 부인이랑 정사를 나누는 남편, 그리고 갚아야할 돈이 너무 많다면서 돈을 못갚겠다고 하는 남자, 자신을 병신으로 만든 강도를 증오한 나머지 자신의 아들에게 그 증오를 대물림하는 아버지까지, 영화의 포커스를 살짝 강도에게서 벗어나서 본다면 뭔가 단순히 '피해자'로만 보기에는 미묘한 케릭터들이 대다수입니다. 이건 김기덕 감독 영화에서 흔히 보이는 시각인데, '상식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이 유리한대로만 사는 사람들(특히 중산층)의 모순점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거죠. 재밌는 점은 강도가 무자비하지 않게 대하는 두 사람은 변제의 의지가 뚜렷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식을 위해 한손이 아닌 두손을 잘라달라고 이야기하는 청년에게 기타를 돌려주는 모습(하지만 결국은 스스로 손을 자르죠...), 자살하려고 건물 위로 올라가는 노인에게 존댓말을 쓰는 모습, 그리고 자살하면 보험금이 복잡해진다고 하면서도 그를 막지 않는 모습 등은 '의외로' 강도에게 인간적인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오히려 이렇게 본다면 강도는 자신의 업무(수금)를 기계적으로 수행하는 '충실한 사회의 일원'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업무에 있어서 방법 자체가 무자비할 뿐이죠. 그리고 그의 업무 수행 방법이 잔혹한 것은 사실 그의 사랑을 받아본 경험이 없는 것에서 오는 문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문제는 미선의 엄마노릇을 통해서 해결됩니다. 자신의 엄마가 위험에 처해지리라 생각한 강도는 스스로 수금업도 때려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사실, 영화 후반부로 갈 수록 드러나는 강도의 모습은 사랑을 받지 못한 어린아이의 모습과 많이 유사하죠.


-하지만 미선 역시 강도의 무자비한 수금업의 피해자였고, 사실은 강도에게 가장 잔혹한 복수(자신의 엄마가 눈앞에서 죽어서 영혼까지 죽여버리는)를 하기 위해 접근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뛰어내리기 전의 독백을 통해서 강도에게 묘한 동질감과 모성애를 느끼고 있음을 드러내죠. 하지만 그녀는 마지막에 뛰어내립니다. 왜 뛰어내릴까요? 저는 이것이 영화 전반에 흐르는 돈으로 인해 만들어진 죄악의 순환고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선의 아들이 자살한 것도 돈 때문이었고, 자식을 위해 손을 자른 이유도 돈 때문이었고, 사람 병신 만든것도 돈 때문이었죠. 하지만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외면하고 강도에게 모든 책임을 돌립니다. 채무자에서부터 심지어 자신의 고용인인 사채업자까지, 모든 사람들이 강도를 나쁜놈, 근본 없는 놈이라 하죠. 


영화 전반의 가장 큰 문제는 돈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이를 언급하지 않아요. 죄다 서로 비난의 화살을 구체적인 누군가에게로만 돌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 돈에 의한 악의 순환고리는 아무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너무 거대하고 확고한 나머지 영화 전반을 굴러가게 만드는 핵심 동력입니다. 


-결국 미선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강도는 엄마와 함께 심은 소나무 밑에 자신의 엄마를 묻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 소나무 밑에는 이미 미선의 아들이 묻혀있었죠. 모든 것을 이해한 강도는 자신의 피해자 트럭에 스스로 몸을 메달고 트럭에 끌려서 죽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어찌보면 미선의 말대로 '아무것도 남지 않고 빈껍데기가 되서 죽은 것'일 수도 있지만, 영화에서 보여주는 강렬한 이미지로 봤을 때 강도의 피로 이 죄악의 흐름을 끊고자 하는 것을 은연중에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카메라 워킹이나 미장센 등에서 이미 김기덕 감독은 자기 스타일을 확립했습니다. 담담하면서 동시에 무자비한 모습을 보여주는 카메라는 김기덕 영화의 코드와 일치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죠. 그와 별개로 매번 이런 영화볼때마다 신기한거지만...도대체 감독들은 어디서 저런 한국같지 않지만 한국 같은 곳을 찾아내는 걸까요?


-근데, 대사 수준이 영...영화가 좋은 건 맞는데, 영화에 쓰이는 대사들이 무슨 국어책 읽기에서나 볼법한 대사들이 대부분입니다. 연기와 대사가 매치가 안되요. 치명적인 문제라면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자막으로 감상한 외국인들에게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 부분이었겠죠, 음...


-끝으로, 요즘 김기덕 감독 추켜올리기가 한창 유행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진짜 역겨운 광경이 따로 없습니다. 그거 아세요? 불과 몇년전까지만 하더라도 김기덕이 '아 나 한국에서 영화 못찍겠음요 'ㅅ' '라는 발언을 하자 상당수의 사람들이 '지랄을 해라 미친ㅋㅋㅋㅋㅋ'이라는 반응을 보였었고, 사람들에게는 해외영화제 출품/수상 소식보다는 '여배우하고 응응 했다더라'로 더 잘 알려진 감독이었죠. 팬들과 비판론자들이 그의 영화를 보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는 것과 무관하게 말이죠. 하지만 웃기는건 순식간에 피에타가 베니스 황금사자상을 받으면서 '오오 김감독님 오오', '한국 영화의 선두주자 오오' 이러고 있고, 심지어는 '김기덕 감독님의 바람에 힘입어서 우리 영화가 어떻게 해외에서 잘나가게 할 수 있을까' 이딴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조금만 더 지나면 저기 한예종 대공분실 위에다가 '친애하는 김기덕 감독 수령님 반자이!'라고 제목 달고 동상이라도 세워줄 판이에요...


사실, 김기덕 감독은 김기덕 감독입니다. 나쁜남자 때도 그랬고, 베니스 영화제 감독상(무려 '은'사자상)을 받은 빈집 때도 그랬고, 피에타도 그랬습니다. 변한건 김기덕 감독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웃기지도 않는 띄워주기는 그만했으면 좋겠네요.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이름이 불린 사람은 하늘색 리본을 달게 될 것이다.

그것이 지닌 의미는 무엇인지 상상할 수 있겠지."


-파울로 파졸리니 감독, 살로 소돔의 120일에서




미하일 하케네 감독은 동생(giantroot)의 표현을 빌려 이야기하자면, '도덕적인' 새디스트입니다. 미하일 하케네 영화는 사람을 견딜 수 없게 고문합니다. 퍼니 게임에서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반전을 보여주고, 히든에서는 사람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엔딩을 보여주죠. 하지만, 미하일 하케네 감독이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러한 상황이 보여주고 있는 인간의 추악함과 그로부터 인간이 각성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목적의식을 가지고 사람을 고문한다는(?) 측면에서 미하일 하케네는 도덕적 새디스트라 불릴만 합니다. 사실, 하얀 리본이라는 영화 자체도 이러한 미하일 하케네 식 새디즘이 여지 없이 발현된 영화입니다. 하지만 독특한 표현양식과 연출, 미장센 덕분에 놀라운 경지에 이른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화는 주인공인 교사가 마을 의사가 낙마사고를 당하는 것을 회상하면서 시작합니다. 마을 의사의 낙마사고에서부터 1919년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까지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마을에서의 일상과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사건들을 통해서 인간의 추악함을 낱낱이 까발리죠. 사실, 하얀 리본의 플룻은 낙마사고 이후 일어난 이상한 사건의 진실을 찾아가는 것이 주된 내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실을 찾아나가는 노력이나 과정보다는 사건에 대처하는 인간 군상들의 반응과 상황을 보여줌으로서 사건의 본질에 접근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영화는 진행될 수록 평범해 보이는 마을이 사실은 광기와 뒤틀림으로 가득차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죽었는데도 자신의 책임을 나몰라라 하는 남작, 자신의 딸을 범하는 의사, 자신의 아이들에게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목사 등등 겉으로는 멀쩡해보이지만 속은 모두 썩어있죠. 이러한 세계를 미하일 하케네는 고전 예술 사진의 프레임을 그대로 본따서 짜냅니다. 아름답고 정물화를 보는 듯한 정교한 미장센 위에 인간들의 추악한 이야기를 덧칠함으로서 하얀 리본은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미칠듯한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하얀 리본을 지배하고 있는 코드는 바로 '침묵'입니다. 마을을 지배하는 역겨운 기운에도 불구하고 그 아무도 문제를 소리내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의사와 그 조수의 불륜 후의 대화, 남작의 수확제 연설, 목사의 예배, 아버지의 자살을 목격한 아들, 목사가 가족에게 하는 이야기 등등 영화 내에서 침묵은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영화 내에서 모든 대화는 공허합니다. 대화 내에 살아있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탈을 쓴 인형들이 서로 알 수 없는 외계어로 말하는 듯한 낯섬까지 느껴집니다. 이는 주인공과 주인공의 아내, 그리고 그 가족 사이의 대화와 대칭된다고 할 수 있죠. 하케네는 이러한 침묵을 정적인 카메라 워크와 롱태이크로 잡아냅니다. 앞서 이야기한 정교한 미장센, 정적인 카메라워크와 롱테이크가 서로 얼기고 섥히면서 보는 사람이 견딜 수 없는 수준으로 끌어올립니다.


하얀 리본에서 중요한 소재는 바로 아이들입니다. 보통 아이들이란 어른들의 추함과는 거리를 둔 모습을 보여주죠. 하지만 영화 하얀 리본에서는 마을이 만들어낸 타락의 핵심이자 정점이 바로 아이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영화는 영화 내에서 일어난 기이한 사건들을 아이들이 일으킨 것으로 암시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아이들에게 진실을 이야기할 것을 요구하는 교사에게 침묵합니다. 또한 아이들의 부모인 목사도 교사에게 침묵할 것을 강요하죠.


재밌는 점은, 다른 영화들과 다르게 미하일 하케네는 영화 내에서 아이들이란 존재를 순수하거나 어른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 존재가 아닌 어른 사회의 충실한 반영이자 카피로 묘사합니다. 실제로 아이들이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은 묘사하지는 않고 은연중에 이를 암시하면서 아이들이 이에 대해 침묵하는 모습은 어른들 역시 악을 보면서 침묵하는 모습과 똑같습니다. 게다가 어른들, 특히 목사가 아이들에게 하얀 리본을 메어주는 장면은 이 영화를 지배하는 허위와 가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얀 리본은 놀라운 영화이며, 20세기 유럽 사회의 문제점을 잘 짚어낸 역작입니다. 기회가 되시면 꼭 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덧.이번 리뷰는 망했네요...그냥 적당히 봐주세요(....)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스포일러 대량 함유되었습니다.


전작 배트맨 다크나이트는 영화사에 한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훌륭한 영화였습니다. 영웅을 벗어나고 싶은 영웅과 그 발버둥, 영웅조차 감당할 수 없는 혼돈, 그리고 마지막 영웅으로서의 비극적인 숙명을 받아들이고 어둠속으로 사라져버리는 영웅의 비장한 모습은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입고 한철 장사하는 히어로 영화의 틀을 바꿔버렸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다크나이트에서 배트맨이 간절히 원한 테제, '히어로가 필요없는 세계'는 약간의 시니컬한 관점과 비장미가 섞인 복잡 미묘한 엔딩에 의해서 부정되었죠. 3편, 다크나이트 라이즈는 그러한 명제에 대한 반대 명제입니다. 어떻게 히어로가 대체되고, 세계가 히어로 없이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죠.


다크나이트 라이즈는 전작들보다도 더욱 인간적인 배트맨을 그리고자 합니다. 2편 이후, 브루스 웨인은 8년동안 폐인처럼 살았습니다. 알프레드는 떠나고, 웨인 기업은 적들 손에 넘어가며, 베인에게 허리는 부러지고 서아프리카 어딘지도 모르는 구덩이 감옥에 갇혀서 라이브로 고담시가 망하는 장면을 TV로 보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으로 다시 한번끔 일어납니다(Rise) 더이상 잃을 게 없기에 죽어도 좋다는 막무가내식으로 싸웠지만,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살아남는다 라는 새로운 각오를 다지고 일어난 배트맨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물론 표면적으로) 고담 시를 다시 지켜냅니다. 그리고, 그가 바란대로 그는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정의를 불러일으키는 상징으로, 영원히 남게 되죠.


영화는 배트맨 보다, 배트맨 주변 인물들이 고담시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 노력하는 장면에 초점을 맞춥니다. 사실, 이번 라이즈는 배트맨이라는 존재에 대한 의미의 고찰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비긴즈에서는 범죄자에게 공포를 주는 상징으로, 다크나이트에서는 영웅을 옭아메는 동시에 거역할 수 없는 비장미를 부여하는 장치로, 라이즈에서는 모든 이들의 사람의 마음속에 살아숨쉬는 정의의 상징으로 말이죠. 상당히 일반론적이고 상식적인 선에서의 배트맨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사실 여기서 비틀기에 들어가면 무한히 비틀 수 밖에 없는 어려운 질문이기 때문에 놀란 감독은 상당히 안전한 길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히어로가 필요없는 히어로 영화'라는 점에서, 영화는 '도대체 그러면 그것이 어떻게 히어로 영화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역설적인 지점에 도달합니다. 영화는 그렇기에 영화내의 모든 장치들을 배트맨의 '과거 청산'에 초점을 맞춥니다. 사실, 영화 대부분의 장치나 플룻은 배트맨의 과거나 오판, 실수로부터 비롯됩니다. 브루스 웨인, 배트맨이 방심하고 있었기에 텀블러 같은 배트맨의 주요한 장비들이 빼았겼으며, 베인과 탈리아 알굴이라는 메인 빌런은 비긴즈부터 비롯된 배트맨의 업보입니다. 결국 히어로가 없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히어로 스스로의 과거 자체를 청산해야 하는거죠. 


여기까지만 적어놓고 본다면, 상당히 괜찮은 영화입니다. 솔직히 다크나이트에는 못 미치지만, 나름대로 포인트도 있고 재미도 있어요. 그러나 문제는 전체 플룻이나 장치에서 오는 것이 아닌, 아주 사소하고 미묘한 부분에서 비롯됩니다. 한마디로 부분부분을 놓고 보면 훌륭하나, 그 부분을 연결시키는 연결고리가 감히 허접스럽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사실, 사소한 빈틈들이 자꾸 쌓이고 쌓이다 보니, 결국 마지막 영화 끝나기 15분 전 탈리아 알 굴이 등장하는 시점에서 뻥하고 터져버립니다.


첫번째로, 왜 다크나이트 이후 8년 동안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다 버린걸까요? 그렇게 비장한 엔딩을 거쳤는데, 결과적으로 라이즈 시작부터 나온 결과물은 히키코모리 였습니다. 뭐, 이것도 어느정도 봐줄만 해요. 사실 놀란의 배트맨은 영웅과 인간의 그 중간점에서 고뇌하는 백만장자의 이미지가 강하니까요. 그건 그렇다고 칩시다. 브루스 웨인이 8년의 공백을 벗어던지고 다시 배트맨이 되기를 선언할 때, 뭐랄까 미묘한 어중간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알프레드가 지적했듯이 베인이라는 적을 살짝 깔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죠. 결국 베인한테 영혼까지 털려버리고 허리가 부러지는데다가 자기 무기고까지 털립니다. 하지만 베인이라는 적이 워낙이 강적이니, 이렇게 개털리는 모습이 그다지 어색하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8년동안 놀았으니 그럴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죠.


두번째 미묘함은 바로 감옥 시퀸스와 전체 플룻 사이의 관계입니다. 감옥 시퀸스에서 브루스 웨인은 다시금 영웅으로 일어나기 위한(Rise) 죽음-재생-부활의 과정을 거칩니다. 그런데, 영웅이 필요 없는 세계라는 명제와 영웅이 고난을 거쳐 다시 영웅으로 부활하는 것, 이 두가지의 명제 사이에서 플룻은 미묘한 마찰을 일으킵니다. 차라리 배트맨이 없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장면이 더 인상적이었고, 전체 이야기의 핵심축을 형성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놀란은 영웅이 필요없는 영웅영화에서 감옥 시퀸스와 부활의 장면은 너무 쓸데 없이 길고 중요하게 잡습니다. 차라리 베인이 만들어낸 '고담 시민들에 의한' 고담시라는 상당히 의미있고 심도있는 상황을 연출하고, 아무리 일반인들이 정의감과 희생으로 막을 수 없는 임계점의 상황에서 배트맨이라는 영웅이 마지막으로 일어나 고담을 지킨다고 한다면 그 나름대로 감동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 부분에서 비율을 이상하게 배트맨쪽에 무게를 실으면서 '영웅이 필요없는 세계에서 영웅 뺀 나머지 인간들은 쩌리임'이라는 이상한 뉘앙스를 만들어냅니다. 그것이 감독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요.


마지막 미묘함은 바로 탈리아 알 굴의 등장입니다. 사실 라스 알굴의 '자식'이라는 떡밥은 탈리아 알굴의 등장을 시사하고는 있었으나, 사실 영화 내에서 사전 지식없이 본다면 옆구리 찔린 배트맨 마냥 충격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베인이라는 악역을 지적이고 사악한 아나키스트에서 지고지순한 순정 로리콘(.....)으로 만들어버리며, 라스 알굴은 간지 악역에서 순식간에 가면 쓴 변태에게 딸을 뺏길수 없다! 고 외치는 딸바보가 됩니다. 탈리아 알굴이 그만큼의 가치가 있었냐고 물으면요? 10분만에 교각에서 떨어진 트럭에서 충격을 받고 어이없게 죽습니다. 웃긴건, 고든 청장은 뒤에서 중성자 폭탄이랑 구르고 있었는데도 멀쩡하게 기어나오는데 말이죠.


사실 베인이라는 악역은 조커 급으로 인상적인 악역입니다. 배트맨이 대처하지 못하는 악이라는 의미에서의 조커와는 달리, 배트맨과 정면에서 맞붙어도 배트맨을 압도할 수 있는 악역이라는 측면에서 베인은 인상적인 악역입니다. 게다가, 마치 시민들에게 권력을 모두 이양한것 마냥 속이고는 시민들 스스로가 혼돈과 악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상황을 교묘하게 연출하는 지능적인 악역이기도 하구요. 조커가 그 기상천외함에서 배트맨을 압도하고 있다면, 베인은 지적이고 인내심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톰 하디의 인상적인 목소리 연기도 좋았구요. 그런데 이 모든게 영화 끝나기 15분 전에 그의 지적인 아나키스트적인 이미지는 단지 탈리아 알굴을 향한 지고지순한 키잡+로리콘+페도필리아 수준으로 격하되며, 2분 정도 뒤에 캣우먼의 바이크 캐논 공격(사실 옆구리를 내주고 캐논으로 공격하는 전략이었어!) 어이없게 리타이어 당해버립니다. 


이 순간부터 영화는 모라토리엄을 선언합니다. 베인이라는 악역이 어떤 큰 목적이나 깊이를 알 수 없는 악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배트맨이 죽인 라스 알굴이라는 거대한 업보(라 쓰고 거대합 삽질, 또는 빅똥으로 읽는다)때문이라는 것은 영화내에서 고담 시민들이 겪었던 고초가 한순간에 배트맨이 쌓은 업보(라 쓰고 싼 똥이라 읽는다)에 쓸데없이 다같이 고생하는 어이없는 상황으로 격하됩니다. 게다가 고담 시민들이 겪은 고초에 대해서, 그리고 베인이 만들어낸 아나키즘이 지배하는 고담에 대한 묘사가 대단히 적기에 고담시민들의 겪었던 고통은 사실 베인의 연정에 의한 것이라는 이상한 상황에 봉착하죠. 사실, 베인이 어둠의 리그에서 파문당했다는 설정만 그대로 유지하고 라스 알굴과 탈리아 알굴만 없었어도 영화의 평가는 이정도로 까지 떨어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탈리아 알굴의 등장과 함께, 영화는 배트맨이 스스로 싼 똥을 치우는 결자해지의 영화로 격하됩니다. 결국 자기 업보를 치우기 위해서 배트맨이 핵과 함께 자폭을 했는데,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동상까지 세워주고 정의의 아이콘으로서 영원히 상징화합니다.


솔직히 영화 끝나기 15분전까지 저도 나름대로 괜찮은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놀란은 이상한 부분에서 완급조절을 잘못한데다가, 탈리아 알굴의 등장으로 이 모든 영화의 장점을 죄다 씹어먹어버려요. 만약 놀란이 크게 욕심을 부리지 않고 시리즈를 끝내려 했었다면, 탈리아 알굴이나 베인을 동시에 등장시키지만 않았더라면 이정도로 망했다는 느낌은 안들었을 겁니다. 결국 욕심이 영화를 망쳤다고 밖에 말 못하겠네요.



 덧.뭐랄까, 점점 시리즈 뒤로 가면 갈수록 배트맨의 정체를 몰라주는

고담시민들의 친절함에 눈물이 나려합니다(.....)



덧.아무리 빈말로도 전작에 비해서 액션 시퀸스가 좋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야생의 소녀의 편을 들어주는 남자, 스파이다-마-



-샘 래이미의 스파이더맨 영화판이 제작사와 샘 레이미 사이의 불화로 막을 내리고 곧바로 500일의 썸머의 마크 웹 감독을 영입해서 만든 스파이더맨 영화판 리부트인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입니다. 저야 뭐 스파이더맨을 KBS에서 해준 TVA와 샘 래이미가 만든 영화판으로 정도만 설정을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나온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자체가 원래 만화판 스파이더맨에 더 가깝다고는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나름 햇갈리는 부분이 많았지만, 이런저런 정보를 찾아보니 이쪽이 원작에 더 가깝더군요. 일단, 나름대로 재미있게 본 작품이기는 합니다만 역시 전작(2002년 버전)에 비해서는 영...


-어메이징 스파이더맨과 2002년버전 스파이더맨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피터 파커의 케릭터. 전작에서는 진짜 재수없게(?) 거미한테 물린 뒤에 힘을 얻고 그 나이 또래 애들이나 할 수 있는 치기어린 짓을 했다가 트라우마를 얻고 영웅으로 각성하는 케릭터였죠. 하지만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에서는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는 존재로 급부상하는데, 먼저 영웅적인 출생 배경(이종 교배의 선두주자였던 아버지, 그리고 그 이종교배의 결과물인 아들)을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메인 빌런인 리자드의 탄생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고(이종교배 알고리즘을 풀어서 리자드의 탄생을 도움), 자신이 알고리즘을 푸는 행위로 인해서 삼촌이 죽는 점 등은 아예 대놓고 영화 내의 세계관에서 피터 파커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장치라 할 수 있죠.


사실 히어로 영화이기도 하고, 주인공이 세계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 하는 영화적 구조는 흔히 보아왔지만, 문제는 원작의 피터 파커는 서민적인 케릭터가 강한 인물이었다는 겁니다. 물론 2002년판 스파이더맨이 스파이더맨의 찌질함만 확대 재생산한 경향이 있지만, 영화 자체는 '영웅과는 거리가 먼 소시민적 영웅'의 컨셉을 잘 살렸습니다. 가면 갈수록 영웅의 마음가짐을 잡아가는 모습도 좋았구요. 하지만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의 피터 파커는 '영웅이 될 운명을 타고난 영웅'이라는 느낌이 강합니다. 그게 나쁘냐고 묻는다면 글쌔요...하지만 전작의 가장 큰 강점이었던 부분이 사라져서 아쉽더군요. 물론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의 피터 파커 역시 미숙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기도 하고 레벨업 하는 부분도 많지만, 영화 자체만 놓고 본다면 자신의 힘이 주는 책임보다는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10대 히어로의 성격이 더 강하다는 겁니다(특히 마지막 약속 드립은-_-)


-이야기 장치에서 별로인 부분이 많습니다. 사실 '별로'라는 것은 전작 2002년 판과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지만...일단 영화 내에서 중요하다 할 수 있는 사건들이나 대사들은 상당히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강한데, 예를 들어서 스파이더맨의 명대사인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라는 대사는 삼촌이 피터를 혼내면서 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극장에서 보고 있는 관객들에게 한 이야기에 가까우며, 숙모가 늦게 돌아오는 피터에게 '비밀은 언젠가 밝혀지기 마련이란다'라는 대사는 그 당시 할 수 있는 대사기는 하지만, 그걸 왜 지금 이야기하지? 라는 의문이 들게 만드는 대사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스파이더맨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스파이더맨을 돕기 위해 타워 크레인을 오스코프 타워까지 정렬시키는 장면은 좀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전작 2002년 버전은 케이블 카와 메리 제인을 구하려고 노력하는 스파이더맨을 돕는 시민들의 모습도 작위적이라면 작위적이라 할 수 있지만,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에서는 작위적인 부분에서 인과관계를 너무 분명하게 드러내서 의외성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볼 수 없게 만듭니다. 


마치 뭐랄까,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니까 주의할 것'이라고 경고문을 크게 써서 붙여넣은 것 같은 느낌? 하지만 요즘 관객들은 그리 멍청하지 않기 때문에 굳이 이럴 필요가 있었나 싶더군요.


-스토리 부분을 제외하고 볼거리로 따지면 전작보다는 뛰어난 작품. 물론 시간이 흘렀기에 가능한 장면들이 많기는 많았지만, 드라마 보다는 이쪽에 더 초점을 맞춘듯 하더군요. 2002년 판은 스파이더맨과 그린 고블린이 서로 간보기만 하다가 막판에 겁탈 드립을 친 그린 고블린을 복날의 개패듯이 두드려 팬(.....) 스파이더맨의 압승으로 끝났지만, 이번작은 리자드나 스파이더맨 모두 막상 막하의 적수라는 느낌을 많이 연출합니다. 그리고 전작에 비해서 스파이더맨의 동물적인 움직임도 상당히 인상적이었구요. 뭐, 저는 손목에서 거미줄이 나오는 전작의 설정을 선호하지만, 친구는 원작의 웹슈터 설정을 영화가 연출 등의 장면에서 잘 살려냈다고 평가하더군요.


-그리고 떡밥, 떡밥, 떡밥...사실 그냥 대놓고 '나 후속편 나옴 ㅇㅇ 깝치지 마삼' 이런 느낌으로 진행됩니다. 그린 고블린인 노만 오스본은 대화에서만 간략간략하게 언급되고, 피터 파커의 부모님 드립, 벤 파커를 죽인 범죄자 등등 대놓고 떡밥을 뿌리더군요. 이번작이 얼마나 흥행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 모르죠 이미 후속작을 열심히 만들고 있을지(.....) 물론 배트맨과의 정면대결은 힘들지만, 배트맨 개봉 전까지 어느정도 수익을 내는데는 성공할 거 같습니다.


-재미는 기본적으로 보장된 작품. 물론 2002년 판하고 완성도를 비교하기 시작하면 심히 골룸해지지만, 그렇다고 재미가 없다는 건 아니고, 괜시리 2002년판 밴치마킹 했다가는 샘 레이미 파쿠리 소리를 들을 위험성을 고려하면 감독 나름대로 안정적인 시도를 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워낙 떡밥이 많은 관계로 영화의 전체적인 완성도를 판단하려면 후속작들도 고려해야하겠더군요.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최근 프린지 4기와 더불어서 보고 있는 멘탈리스트입니다. 


-대 수사물 시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미드 분야에서 수사물이 흥하고 있는데요, 거의 대부분이 CSI 짝퉁 또는 쓸데없이 수위가 높은데 반해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작품들은 그들과 다르게 나름대로의 컨셉을 확실히 잡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몽크는 결벽증 환자의 개그가 볼만한 작품이며, 본즈 같은 경우에는 그냥 토막난 시체가 나오는 로멘틱 코미디고, 크리미널 마인드는 다른 수사물들과 다른 템포로 흥하고 있으며, 프린지의 경우 수사물은 개뿔 그냥 떡밥물 ㅇㅇ 로 밀고 있으니까요. 멘탈리스트도 컨셉을 잘 잡은 수사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무려 사기 수사극(...)이라는 독특한 컨셉으로 밀고 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잘 나가던 영매였던 주인공 패트릭 제인이 토크쇼에서 연쇄살인마를 도발했다가 가족을 잃고, 레드 존을 잡기 위해서 CBI(켈리포니아 수사국)에 사건 자문을 해주게 됩니다. 수사 자문을 하면서 이런저런 사건들을 해결하는 것이 주요 내용. 보통 수사극이 '사건이 일어남->증거가 나옴->증거를 확대한다->증거를 더더욱 확대한다->???->범인을 검거한다.' 라는 뻔한 패턴을 보여주는데 반해서 멘탈리스트는 극중 특이한 상황을 하나 던져놓고, 주인공 제인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을 이리저리 굴리는(쉽게 이야기하면 사기극) 그런 모습을 중점적으로 보여줍니다. 미세한 부분에서 단서를 잡고 사건을 해결하는 점은 몽크와 유사한데, 몽크와 다르게 패트릭 제인이라는 케릭터 자체가 다른 인물들 머리 위에서 내려다 보는 전지적 작가 시점의 케릭터 이기 때문에 상당히 독특한 상황이 많이 연출됩니다.


가령 누군가 제인을 속이려하고, 제인이 그 속임수에 넘어가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면 그건 제인이 진짜 속아넘어간게 아니라, 그 인물의 뒤통수를 후려칠 계획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전'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제인이 계속 이런식으로 범인 머리 꼭대기에 앉아서 뒤통수를 후려치는 전개를 항상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는 최소한의 개연성(과학적이라기 보다는 상식선에서의 이유들)을 보장하고 있는데, 덕분에 덜 억지스럽습니다. 게다가 패트릭 제인이라는 케릭터의 매력 덕분에 사건 사이의 약한 인과 관계의 연결고리도 비교적 말이 된다는 느낌을 받구요.


-패트릭 제인이라는 케릭터는 근래 미드에서 찾아보기 힘든 케릭터인데, 농담이 아니라 각본가의 입장에서 전체 사건과 사물을 바라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패트릭 제인 역을 맡은 사이먼 베이커의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 덕분에 온갖 상황에서 자기 페이스를 잃지 않고 능청스럽게 자신이 원하는 결과와 상황을 이끌어내는 독특한 케릭터를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신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케릭터이나, 자신의 능력을 믿고 만용을 부리다 자신의 가족을 잃은 트라우마가 있다는 점, 자신의 복수에 대해서는 대단히 사적이고 인간적으로 변한다는 점이 바로 패트릭 제인이라는 케릭터가 가지는 핵심 포인트죠. 이러한 모순된 케릭터성 덕분에 패트릭 제인이라는 케릭터가 인간적이면서 동시에 전지전능함을 동시에 지닐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역으로 주인공인 패트릭 제인의 전지전능한 능력 덕분에 그의 적수라 할 수 있는 레드 존의 케릭터성이 이상해지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패트릭 제인이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데 능란하다면, 그의 적수인 레드 존 역시 그런 능력을 갖고 있다 봐도 무방하죠. 문제는, 패트릭 제인의 능력이 워낙이 뛰어나다 보니 레드 존이 제인한테 잡히지 않으려면 제인보다 몇 수 앞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덕분에, 레드 존이 나오는 에피소드들은 하나같이 코스믹 호러물을 보는거 같아요. 드디어 레드 존의 덜미를 잡으려 하면, 레드 존은 아주 여유롭게 제인의 손아귀를 빠져나오고 제인의 신경을 박박 긁습니다. 게다가 사람 정신을 붕괴시켜서 자신을 죽은 사람이라고 믿게 한다던가, 주 정부 컴퓨터를 해킹해서 제인을 감시한다던가, 아무 흔적도 없이 멕시코로 도망간 배신자를 살인한다던가, 멀쩡한 사람을 연쇄 살인마로 만드는 등 이쯤 되면 초자연적 존재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사실 이 모든게 자기 능력을 믿고 깝치던 제인을 계도하기 위해서 하느님이 레드 존이라는 탈을 쓰고 내려오셔서 친히 제인을 단죄하신 거였다 라고 해도 저는 믿겠습니다(.....)


-드라마의 완성도는 특이하게 1기에 비해 2기나 3기로 갈수록 좋아지는 편. 1기는 '심령술사이기를 그만둔 심령술사로 무슨 이야기를 만들까? 아 그래, 심령술 비스무리한 소재를 쓰면 되겠구나' 이런 느낌이었다면, 2기 이후로는 '전지적 제인 시점에서 보는 사기 수사극'이라는 컨셉이 확립이 된 듯 합니다. 물론 레드존이 나오면 갑자기 코스믹 호러물이 되는 건 참 미묘하지만 말이죠.


-요즘 애니보다 미드가 끌리는게, 역시 케릭터라는 측면에서는 애니보다는 미드가 훨씬 나은거 같습니다. 일본 애니의 케릭터와 미드의 케릭터를 비교하는 것도 나름 방법일 듯.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델라모레 델라모테는 과거 제가 리뷰했던 작품, 아쿠아리스(리뷰는 여기로  http://leviathan.tistory.com/966 )의 감독인 미쉘 소아비가 만든 좀비영화입니다. 북미 쪽 제목으로 Cemetery Man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이 제목보다는 원제인 델라모레 델라모테(Dellamorte Dellamore)라는 제목이 훨씬 더 영화의 본질적인 의미를 살린다고 생각합니다. 밑에서 정확하게 분석하겠지만, 이 영화는 미쉘 소아비가 나름대로의 야심, 혹은 노림수가 다분히 깔려있는 작품입니다. 그냥 웃으면서 넘기기에는 무언가 찝찝한 구석이 많은 작품입니다. 사실, 툭까놓고 이야기해서 완벽한 작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시하기에는 뭔가 미묘한 부분이 많은 작품이기도 하죠.

본격적인 리뷰에 들어가기 앞서서, 확실하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영화 자체가 함축적인 이야기가 상당히 많다는 것이고, 그에 비해서 자막은 뭔가...부족하더군요. 귀에 들리는 영어하고 자막하고 일치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느정도 히어링이 된다면 자막 없이 보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비선형적입니다. 오히려 상황극에 가까운 영화죠. 상황은 간단합니다. 마을 공동묘지에 사람을 묻으면 며칠이 지나서 사람이 다시 살아납니다. 좀비로요. 그리고 묘지기 프란체스코 델라모테는 매일 밤 살아나는 좀비들과 투닥거립니다. 이렇게 투닥거리는 와중에 주인공인 프란체스코의 사랑을 만나고, 해어지고, 그 속에서 자신의 묘지기로서의 역할과 어딘가 불현듯 떠나고 싶다는 욕망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그가 사랑했던 여자들은 안좋은 형태로 결말을 맞이하고, 더이상 현실을 참을 수 없는 그는 묘지 밖으로 탈출합니다.


영화 내에서 공간의 개념은 이원적입니다. 죽은 자들이 살아돌아오는 공간인 묘지,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 델라모테 델라모레의 독특한 분위기와 컨셉 여기서 나오는데, 일반적인 좀비 영화에서의 관념, '비일상적인 개념으로서의 좀비'가 무너진 기묘한 공간 구도를 보여줍니다. 영화 오프닝 시퀸스, 집을 찾아온 좀비를 대수롭지 않은듯이 보고 총으로 쏴 죽이는 주인공 델라토레의 모습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나며, 사실 마을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을 뿐 대부분 마을 공동묘지에 사람을 묻으면 뭔가 안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 정도는 눈치채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이야기를 밖으로 꺼내지 않으고 쉬쉬하며, 묘지를 관리하는 주인공과 그 조수를 불길하게 생각하고 경멸하죠.  


전반적으로 영화는 죽은자들의 공간에서 사는 기묘한 묘지기, 델라모테의 관점에서 진행됩니다. 그의 시점에서 본 산 자들의 세계는 경멸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경박한 젊은이들, 죽은 딸을 이용해서 시장 선거에 재선되려고 하는 시장, 부패한 관료들, 돈으로 사랑을 파는 여자 등등...델라모테의 입장에서는 경멸받고 외면받아야 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과 세상 그 자체입니다.  

죽음과 삶의 이원론은 많은 영화에서 사용한 장치입니다만, 델라모테 델라모레의 관점은 여지껏 등장한 영화들과 많은 부분에서 다릅니다. 이를 드러내는 단적인 장치가 바로 주인공, 프란체스코 델라모테라는 이름의 유래와 그의 기원입니다. 죽음의 성인인 '프렌체스코'에 성인 Dellamorte에서 Morte, 이탈리아 어로 '죽음' 자체를 의미합니다. 사실, 그의 산자들보다 죽은자들과 더 가까이 지내는 모습이나, 살아있는 사람들로 무시당하고 경멸당하는, 심지어는 '부정'당하는 모습에서 그의 존재가 '죽음'그 자체를 의미한다고도 추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재밌는 점은 자식에게 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준 그의 어머니는 이름이 Dellamore, 즉 Amore(사랑)의 화신이라는 것이죠. 감독은 죽음의 어머니는 사랑이라고 설정함으로서 '사랑과 죽음은 하나이다'라는 독특한 주제의식을 만들어냅니다.


뭐, 사람들이 종종 잊는 이야기기는 하지만, 어떤 생명이든 사랑의 결실로 태어나 죽음으로 끝을 맺죠. 시종(始終)은 여일(如一)하니, 이 두 관념을 분리해서 보지 말자는 것이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특히 영화 전반의 핵심적인 사건들은 델라모테의 사랑과 본질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단적으로 그는 자신이 사랑한 미망인과 납골당에서 섹스를 하고, 미망인은 섹스 후에 좀비에게 물려서 죽음을 맞이하고(엄밀하게는 좀비로 변했다고 생각한 주인공이 실수로 죽인거지만), 다시 좀비로 변한 미망인과 주인공이 키스를 하는 등 죽음과 사랑의 이미지가 교차반복되어 드러납니다. 그 후로도 델라모테는 계속해서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그 모든 시도는 실패하죠. 


그리고 영화의 후반으로 갈수록 계속해서 부정당하는 현실에 지친 델라모테는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을 죽여서 스스로의 존재를 입증하고자 한 것이죠.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매번 그가 누구를 죽일 때마다 누군가 그의 죄를 뒤집어 씁니다. 심지어 백주대낮에 병원에서 의사와 간호사를 쏴죽였음에도 그의 살인은 온전히 그의 것이 되지 못하죠. 그리고 영화가 거의 끝에 다다를 무렵, 그는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죽음의 문턱에서 그를 부정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본업을 포기하고 묘지를 떠납니다. 하지만, 그 일탈의 끝은 낭떠러지였고 결국 그는 그를 기다리는 묘지로 회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죽음이 있어야 할 곳은 묘지뿐이라는 것이죠.


델라모레 델라모테는 좀비영화의 탈을 쓴 예술영화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보통의 좀비영화가 시체를 갖고 장난질을 하는 것이 주요한 이야기의 도구라면, 델라모레 델라모테는 좀비란 단지 상황에 불과한 특이한 작품이죠. 죽음을 부정하는 세계를 향한 블랙코미디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만 합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존 카펜터는 공포 영화팬들이면 적어도 이름은 들어보았을 법한 감독입니다. 모르시는 분들이라면 살인마 영화의 프로토타입이자 살인마 영화 붐의 시발점, 할로윈이란 영화의 감독이 바로 존 카펜터라는 사실만 아시면 됩니다. 엄밀하게는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감독이기는 하지만, 사실 그의 걸작들은 옛날에 많이 나왔습니다. 개인적으로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존 카펜터의 영화는 '매드니스'(In the Mouse of Madness, 1994)였죠.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쥬라기 공원의 샘 닐(박사 있잖아요, 그)[각주:1]이 나와서 세상의 종말을 예언하는 소설을 쓴 소설가의 이야기였는데, 나중에 나이들어 찾아보니 존 카펜터 영화 치고는 별로였다 라고 하시는 분들이 많더군요. 저는 어렸을 때, 쫄면서 봤는데 말이죠.[각주:2] 하지만 요즘은 마스터즈 오브 호러에 단편 영화를 두편 냈는데[각주:3] 상당히 괜찮은 평가를 듣고 있더군요. 


각설하고, 존 카펜터의 The Thing[각주:4]은 소위 인구에 회자되는 비운의 명작입니다. 사실, 저래 보여도 상당히 돈이 많이 들어간 작품이었죠. 대략 1500만불(?!) 정도 들어간 작품[각주:5]이니까요. 다 합쳐서 이득을 보기는 했는데, 이 괴물 영화의 걸작은 아쉽게도 인지도 면에서는 좀 묻혀있는 감이 없지않아 있습니다. 왜냐면 같은 연도에 ET 가 개봉을 했거든요!(.....) 한 쪽은 정신교감을 하는 외계인과의 드라마였다면, 다른 한쪽은 그로테스크한 신체강탈자 이야기라니! 물론 ET를 폄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솔직히 ET에 묻힐만한 그런 존재감 없는 작품은 아니었어요. 개인적인 사견을 좀 덧붙이자면 존 카펜터의 괴물은 아마 이 장르를 모두 통틀어서 최고의 작품 중 하나일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The Thing의 이야기와 장르는 '신체강탈자'라는 공포영화의 하위 장르를 모태로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재밌게도, 기존의 신체강탈자 류와 다른 관점으로 공포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 The Thing입니다. 기존의 신체강탈자(Body Snatcher물)이란 1950년대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미국 사회에 대한 공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비밀스럽게 자신들끼리 모여서 사회를 전복시킬 음모를 꾸미고, 다른 사람들을 자신들 부류로 개종시키고, 그리고 아무도 그 위협에 대해서 인지하지 못하고 있죠.[각주:6] 하지만, The Thing은 상당히 다른 각도에서 신체강탈자에 대해서 접근합니다. 첫번째로, The Thing의 그것은 절대로 사교적이지 않습니다. 어딘가 어두운 골방에 자기들끼리 모여서 붉은 글씨로 '위대하신 김일성-김정일 수령 아바이 동지 만세!' 이딴 기치를 걸어놓지도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The Thing의 그것은 포식자입니다. 그들은 먹잇감을 사냥하고, 복제해서, 그 안에 숨어들어갑니다. 그리고 이를 끝없이 반복하죠. 오로지 그들만 남을때까지요. 그리고 그것들은 생겨먹은 구조자체가 인간과 다르게 생겼으며, 개종은 전혀 우아하지도 유쾌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단순한 접촉만으로도 그것들은 전염될 수 있으며, 아무도 자신안의 그것이 깨어나지 않는한 누가 그것이고 누가 우리편인지 모릅니다.


일반적인 영화라면 이러한 상황에서 '누가 무엇을 했고, 어떤 동선을 취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넌 괴물이다!' 이런 식의 머릿싸움과 눈치싸움이 서스펜스를 형성하는 주된 장치가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존 카펜터는 이러한 장치를 모두 제거합니다. 영화는 중반까지 괴물의 존재를 암시로만 드러냅니다. 폐쇄된 환경, 불안감을 조성하는 조성하는 카메라 워크, 신경을 긁는 효과음을 통해서 사건이 터질듯 말듯 한 분위기를 만듭니다. 그리고 괴물의 정체와 특징을 모두가 알게 된 순간, 그 장면에서 모든 인물들이 깨닫습니다:때는 너무 늦었다 라구요. 원판 버전 The Thing은 이 장면과 마지막 장면[각주:7]이 영화의 특징을 압축적으로 드러냅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바로 괴물일 수 있다는 것. 심지어는 자신이 괴물인지 아닌지, 그조차도 모르는 끔찍하고도 끝이없는 불신과 종말론적인 분위기가 영화를 지배합니다. 


존 카펜터는 영화 내에서 완벽하게 서로 믿지 못하는 상황을 만듭니다. 도대체 누가 괴물인가? 그로테스트한 괴물의 이미지와 인물들 사이에 흐르는 불신과 절망감은 놀라운 경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살아남기 위해서 발악하는 주인공과 그 일행의 사투 때문에 더욱 처절합니다. 그에 비해서 2011년도 The Thing은 상당히 온건한 노선을 걷습니다. 물론 온건하다는 것은 '원작에 비해서' 이지만요. 기본적으로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원판 The Thing과 달리, 이번작에서는 믿을 수 있는 '주인공'이라는 중심축이 생기면서 절망과 공포의 이야기는 상당히 완화된 느낌이 듭니다. 사실, 2011년판 The Thing은 상당히 온건한 노선을 취하고 있는 것이, 기존의 1982년 원판 그대로의 이야기 구조를 따르고 있으니까요. 오히려 2011년 판은 원판에 대한 오마주라고 할 수 있는데, 1982년 판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서 그 때 당시 사용했던 소품이나 분위기를 그대로 사용하려 하죠. 심지어 괴물의 디자인도 1982년판의 이미지를 그대로 차용합니다. 애시당초에 2011년판 The Thing은 원판을 충실하게 재현하기 위한 작품입니다. 게다가 마지막의 깜짝 보너스 장면은 원작 팬들이라면 좋아할만 합니다.[각주:8]


결론적으로 The Thing은 1982년판, 2011년 판 모두 훌륭한 작품입니다. 물론 괴물 영화와 호러영화, 그리고 그로테스크한 비주얼을 쉽게 참아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말이죠.





  1. 가끔식 유명배우들이 특이한 필모그래피를 갖고 있는걸 많이 볼 수 있는데, 리암 니슨이 다크맨(샘 레이미 감독)에 나왔다던가, 샘 닐이랑 로렌스 피셔번(매트릭스의 모피어스) 이벤트 호라이즌에 나왔다던가 등등... [본문으로]
  2. 아주 어렸을 때, 비디오에 녹화해놓고 내용을 외울때까지 본게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플라이의 후속작 플라이 2...역시 호러 꿈나무는 조기교육부터 틀렸군요. [본문으로]
  3. '담배자국' 리뷰는 http://www.typemoon.net/bbs/board.php?bo_table=review&wr_id=31099&sfl=&stx=&sst=wr_hit&sod=asc&sop=and&page=13 이걸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상하게 거기에만 쓰고, 여기에는 안 옮겨놨네요. 프로라이프는 구해는 놨는데, 아직 보지는 못했습니다. [본문으로]
  4. 한국 제목은 '괴물'로 알려져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괴물은 뭔가 어감이 살지 않고..그냥 리뷰에서는 The Thing으로 통일하겠습니다. [본문으로]
  5. http://www.imdb.com/title/tt0084787/business [본문으로]
  6. 이렇게 적고 보니까, 진짜 우리나라 빨갱이 혐오증과 똑같군요(.....) [본문으로]
  7. 기지를 폭파하고 살아남은 주인공 멕크레디가 괴물일지 아닐지 모르는 동료와 함께 앉아서 조용히 아침을 기다립니다. [본문으로]
  8. 스포일러! 살아남은 라스가 헬기를 타고 개의 모습을 한 괴물을 추격하는데...명백한 1982년 판 오프닝 시퀸스로 이어지는 부분. 즉 2011년 판은 '프리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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