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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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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유명한 과학자 커플 ‘클라이브’(애드리안 브로디)와 ‘엘사’(사라 폴리)는 난치병 치료용 단백질을 만드는 연구를 진행하던 중, 조류, 어류, 파충류, 갑각류 등의 다종(多種) DNA 결합체인 ‘프레드’ 와 ‘진저’를 탄생시켜 동물용 의약 단백질 생산을 가능케 한다.실험을 거듭하면서 유전자 재조합 기술은 발전하고, 다종 DNA 결합체와 인간 유전자의 결합이 가능한 수준에 이르자 과학계와 의학계에 놀라움을 선사하고 싶었던 두 커플은 위험한 실험을 시도한다.  제약회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다종의 결합체와 인간 여성의 DNA를 결합시키는 금기의 실험을 강행하여 인간도, 동물도 아닌 전혀 새로운 생명체인 ‘드렌’을 탄생시킨다. 하지만 이들의 실험은 점점 통제할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큐브의 빈센조 나탈리 감독이 만들고 기예모르 델 토로가 제작을 맡은 스플라이스는 고전적인 SF 스릴러라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냈을 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고전적인 질문을 정석적인 방법으로 풀어내고 있는 작품이다. 문제는 이 정석적인 작품이 요즘 시대에는 맞지않을 정도로 너무나 정석적으로 기분 나쁘기 때문에(일면 데이빗 크로넨버그 영화들, 특히 플라이가 연상되는 부분이 있다) 흥행에서도 참패를 겪었으며 대중적인 평에서도 썩 좋지못한 평가를 들었다. 하지만 스플라이스는 SF적인 설정과 기괴한 창조물 드렌의 모습, 그리고 충격적인 결말까지 기분나쁜 SF 스릴러를 훌륭하게 재현해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생명의 창조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플라이스는 이러한 생명의 창조와 윤리적인 문제를 현학적인 이야기로 끌어가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가 없는 부부 과학자가 자신들이 만든 새로운 생명체를 기르면서 생기는 긴장과 갈등을 일종의 '대안 가족물'(?)의 형식으로 풀이하고 있다는 점에서 스플라이스는 자신의 드라마를 구체적이고 확고한 범위로 좁히는데 성공한다. 특히 완벽하게 새로운 생명을 창조했지만, 이들 부부가 드렌을 숨기면서 기르는 에피소드들은 과학적인 접근인척 하지만 본질은 아이를 한번도 기른 경험이 없는 부부의 좌충우돌에 가깝다는 인상을 주며(무엇을 먹여야 하는가 등등에 대해서), 드렌은 부모에게 있어서 자식의 '이해할 수 없는 타자성'(내가 만들었지만/잉태했지만, 도대체 누구인지 알 수 없는)의 SF식 확대 재생산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스플라이스는 그런 훈훈한 가족드라마를 다루거나 서로를 이해하는 지점에 서있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가족 '판타지'를 차가운 질감으로 도륙내는 지점에서 영화를 풀어나간다. 먼저, 어디까지나 클라이브의 시점은과학적인 관점에서 드렌을 관찰하며 어떤식으로든 드렌과의 거리를 떨어뜨리려는 시도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내었다는 윤리적인 죄책감을 느낀다. 하지만 드렌에 대해서 애정 비슷한 감정을 보였던 엘자의 경우에는 자신의 어머니로 인해서 상처받았던 유년시절의 보상으로서 자신의 유전자를 기증한 것처럼 위장해서 드렌을 만들어내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클라이브-엘자-드렌의 관계가 단순한 과학적 호기심이나 애정 또는 자신의 아이를 원했던 부부의 대안이 아닌(왜냐면 유전자로 보았을 때, 드렌은 엘자의 클론? 이기 때문이다), 가족이면서 동시에 기묘한 삼각관계, 엘자는 자신이자 동시에 딸인 존재로서 드렌을 원했으며, 클라이브는 과학적인 호기심과 윤리적인 죄책감에서 드렌을 바라보며, 그리고 드렌은 자신의 유사 부모를 후술할 유사 근친상간적인 관점에서 접근한다.


그렇기에 기존 대중매체에서 자주 등장했던 '세상의 악으로부터 동떨어진 순수하고 선한 인간의 피조물'이라는 공식은 영화속에서 깨진다, 클라이브(부)-엘자(모)-드렌(자식)이라는 대안 가족의 구조에서 비추어 봤을 때, 드렌은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에 대한 타자로서의 모습을 확대 재생산된 모습 그 자체가 드렌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에서 드렌은 끝까지 이해불가능한 존재다. 포유류, 조류, 어류, 파충류 등등의 유전자를 섞어서 만들었다는 이 신종 생명체는 어느 지점에서는 아름다운 여성의 옆모습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어딘가 부조화스러운 이미지를 지울 수 없다. 사실 이는 신종 생명체의 원형인 프레드와 진저의 이미지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이 둘의 이미지는 전적으로 남성기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다. 심지어 드렌의 태아의 모습-정자-에서부터 인간과 점점 닮아가면서도 이러한 이미지의 원형에서 벗어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순진무구한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언뜻언뜻 변화하는 표정속에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광기와 동물적인 야성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이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장치가 드렌의 꼬리와 꼬리속에 숨겨진 독침이다. 영화 내내 드렌의 독침은 드렌의 순진한 존재로서의 이미지와 대비되는 지점이자 위협으로서 작용된다.(클라이브와 정사를 나누는 장면에서 독침을 드러내는 드렌의 이미지가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엘자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드렌이 엘자의 정신병의 가족력(특히 어머니)이 유전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지적하는 클라이브나 자식세대의 반항심을 정신병적이고 야수적인 파괴로 표현하는 드렌(특히 엘자가 키우도록 허락한 고양이를 엘자가 보는 앞에서 독침으로 쏴죽인다던가), 그리고 점점 자신의 어머니처럼 드렌을 편집증적으로 통제하려는 엘자의 모습까지, 영화는 이 유사 가족이 점점 파국으로 치달으며 이 절정에 있는 것이 바로 '유사 근친상간'이다. 클라이브와 엘자가 드렌이 자고 있는 동안 정사를 나누는 장면을 드렌이 훔쳐보는 듯한 뉘앙스를 보여주는 장면이나 드렌이 클라이브를 유혹하는 장면, 마지막으로 성전환해서 엘자를 겁탈하는 남성 드렌의 모습을 통해서 이들 관계가 완전한 파국을 맞이한다.(동시에 관객들의 정신도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버린다)


스플라이스의 미덕은 생명 창조라는 무거운 주제를 현학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이 아닌 유사 가족 막장드라마를 이용해서 결국은 피조물에게 지나친 집착을 드러낸 창조주가 자신을 모델로한 피조물에 의해서 파멸하는 과정을 잘 드러내었다. 하지만 스플라이스가 잘만든 것은 이런 창조의 이야기를 불쾌함 하나만을 완성하는데 훌륭한 퀄리티로 이루어냈기 때문이지, 그것이 어떤 카타르시스나 미학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명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초기 크로넨버그 영화들, 특히 브루드나 플라이 같은 크로넨버그 미학의 제시 및 일관된 주제의식을 가진 작품들에 비하면 스플라이스의 미학은 아쉬운 부분이 있다. 하지만, 오랜만에 나온,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너무 잘만들어서 기분 나쁜 B급 SF라는 점에서 스플라이스는 SF 영화 팬이라면 꼭 봐야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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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이란 무엇일까? 영원히 저주받은 존재? 어쩌면 순간의 고통...죽은 것도 어떤건 산 것처럼 보인다. 조만간 감정이 정지된다. 빛바랜 사진처럼. 호박 안의 벌레처럼.




주인공 소년이 스페인 내전 중 고아원에 들어가는 것을 시작으로 이 고아원에서 지내던 소년인 '산티'의 유령을 보게 되면서 산티의 죽음의 원인을 밝혀내고 그 친구들과 힘을 합해 그 복수한다는 이야기. 1936년 프랑코 장군의 쿠데타로 인한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스페인. 공화주의자를 부모로 둔 10살의 카를로스는 산타루치아의 고아원으로 보내진다. 유년 시절에 누구나 가졌던 무서운 기억들이 커서도 반복된다는 호러 드라마.(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블레이드 2, 퍼시픽 림, 헬보이 1과 2로 대중들에게 유명한 기예모르 델 토로의 커리어는 어떤 의미에서 상당히 극단적이다. 그는 헐리웃에서 서브컬처적 망상이 가득한 창작물들(거대 괴수 vs 거대 로봇, 크리처물, 온갖 요정과 악마가 현대사회에서 활개치는 이야기라던가)이었다면 그가 헐리우드 바깥에서 찍은 영화들은 그런 그의 망상의 실현에서부터 뭔가 벗어나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벰파이어와 영생의 이야기를 노인의 젊음에 대한 욕망으로 치환하여 만들어낸 기괴한 판타지 영화 크로노스라던가, 스페인 내전의 경험과 한 여자아이의 환상을 모자이크처럼 짜집기 해서 슬프고도 아름다우며 잔혹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판의 미로라던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영화 악마의 등뼈까지. 


유념해야할 것은, 악마의 등뼈는 전통적인 호러영화의 공식에서 벗어나있다는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 무서운 장면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의 초점은 카를로스가 도착한 이후 고아원 내부에서 일어나는 드라마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산티의 유령은 사람을 해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호러영화라기 보다는 유령이 나오는 판타지 영화라고 이해하고 영화를 접근하는 것이 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적절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스페인 내전과 소녀의 환상 사이에서 명확한 알레고리를 보여주었던 판의 미로와 다르게, 악마의 등뼈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은 스페인 내전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전쟁을 목격하면서 동시에 환상을 구축하였던 판의 미로와 다르게, 악마의 등뼈는 전쟁에서 멀리 떨어진 인간군상들과 고아원에서 음울하게 떠도는 망령에 초점을 맞춘다. 악마의 등뼈에 있어서 스페인 내전이란 하나의 풍경, 영화 내의 고아원 마당에 떨어진 불발탄과 같은 위치다. 그것은 영화 내에서 어떠한 사건도 일으키지 않지만(체호프의 총과 다르게 불발탄은 끝까지 터지지 않는다), 동시에 주위 사람들을 압박한다. 아이들은 그 폭탄이 살아있다고 믿으며 동시에 불발탄이 떨어진 그 날 밤, 산티가 죽었다는 사실은 스페인 내전과 산티의 죽음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없더라도 일종의 묘한 복선과 은유가 깔려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악마의 등뼈는 작고 고립된 인간군상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하지만 영화는 스페인 내전 바깥에서, 스페인 내전의 축소판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정념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카사레스와 카르멘, 그리고 하킨토 사이의 삼각관계(플라토닉적 사랑과 에로스적인 육욕의 관계), 고아원에서 자라서 고아원을 떠나고 싶어하는 하킨토, 카를로스와 하이메가 서로 친해지는 과정, 산티의 유령에 대한 소문을 다루는 방식 등등 영화는 조근조근하게 드라마를 풀어나간다. 영화는 이들의 '인간적인' 이야기와 케릭터를 묘사하는데 초점을 맞추는데, 심지어 이 영화에 있어서 모든 원흉이자 만악의 근원인 하킨토 마저도 그냥 미워할 수만은 없는 씁쓸한 케릭터로(고아원이 불탄 폐허 속에서 자신의 사진을 찾아내고는 공모자들에게 그 추억을 이야기하는 모습이라던가) 묘사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인간적인 드라마 속에서 과연 '유령'의 존재는 어떤 의미일까? 영화 중, 카를로스가 고아원에서 유령을 본것 같다고 하자 카사레스가 자신은 과학적인 사람이며 스페인은 미신에 가득차있고 유럽은 영혼의 공포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카를로스에게 이야기한다. 결국 괴물(=유령)이란 그런 공포에서 보게되고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카사레스는 사산된 아이로 만든 럼주 '악마의 등뼈'를 보여주면서 이런 괴물의 진실이란, 결국은 빈곤, 질병들처럼 현실적인 것들이 깔려있다 라고 이야기를 마무리짓는다.(그리고 카사레스는 이게 정력에 좋다고 하면서 그걸 마신다. 으...) 즉, 카사레스의 견해에 따르면 유령이란 인간의 공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고아원에 산티라는 유령은 실존하며, 카사레스가 마지막에 발기부전에 좋다면서 악마의 등뼈를 마시는 장면은 역설적이게도 그 역시도 그런 민간요법적인 '미신'을 믿고 있음을 시사한다.


영화는 산티의 유령을 묘사하는 모습에서 유령의 존재의의를 규정한다. 산티는 다른 영화의 유령들처럼 적극적으로 희생자를 찾아 돌아다니거나 자신이 죽은 원한을 애꿎은 다른 사람들에게 풀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고아원 내에 존재하는 풍경처럼(마치 마당의 불발탄 같이) 고아원을 떠돌 뿐이다. 불발탄과 함께 고아원에 나타난 풍경인 산티의 유령은 스페인 내전이 남긴 상흔이자 잊혀져버린 진실(하킨토에 의해서 살해당한)에 대한 고발의 시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 이야기를 들어주기 전까지, 그리고 누군가 자신의 원한을 풀어주기전까지 그들은 거기 하나의 풍경처럼 음울하게 떠돌뿐이다. 첫 인트로이자 마지막 엔딩에서 유령이 된 카사레스의 고백처럼, 스페인 내전 속에서 죽어버린 사람들, 빛바렌 사진처럼 감정이 정지되고 떠돌 수 밖에 없어진 기억들이 유령이 되어 산 자들을 마주한다. 이는 산티의 유령의 이미지에서도 두드러지는데, 기존의 소복입고 창백하게 돌아다니는 유령이 아닌 물 속에서 흐느적거리는 질감(산티는 살해당한 뒤 물에 수장되었다)과 창백하다기 보다는 빛바렌 사진과도 같은 색감은 공포스럽다기 보다는 음울한 이미지라고 보는게 더 적합하다.


금괴를 노린 하킨토가 고아원에 불을 지르고, 그 결과 카르멘과 카사레스가 죽자 남은 아이들은 힘을 모아 하킨토를 물리치고 산티에게 하킨토를 건내준다(정확하게는 하킨토가 산티를 수장한 웅덩이에 하킨토를 빠뜨린다) 이는 유령을 향한 일종의 장례제의라고 볼 수 있다. 스페인 내전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배경인 고아원(동시에 불발탄이라는 스페인 내전이 풍경으로서 고아원을 지배하고 있는)에서 스페인 내전과 함께 생겨난 상흔들(불발탄과 함꼐 나타난 유령), 그리고 전쟁의 거대담론에 매몰된 이야기가 아닌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인간들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통해서 영화는 거대한 이야기들로 인해서 사라진 소소한 이야기들을 복권시키고 그들에게 정당한 복수를 할 기회를 제공하고 유령과 화해하기를 희망한다.


영화 악마의 등뼈는 그런 의미에서 시적인 작품이다. 영화는 애잔한 동시에 음울하며 아름답다. 그리고 단 한명의 케릭터도 무의미하게 낭비되거나 소비되지 않으며, 이야기는 조밀하게 구성되어 잔잔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끝까지 흡입력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떤 의미에서는 기예모르 델 토로가 헐리웃 바깥에서 찍은 영화들이야말로 델 토로를 대표하는 대표작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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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까놓고 이야기하자면, 덤불 속의 검은 고양이의 이야기 자체만 놓고 따질 때 우리나라 납량 특선 '전설의 고향'의 단편 시나리오 수준에 불과하다. 전국시대, 무사들에게 겁탈 당하고 죽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귀신에게 복수를 다짐하고 요괴가 되어서 무사들을 물어 죽인다. 그리고 무사로 출세한 아들은 무사를 물어죽이는 요괴를 처치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고, 요괴가 된 어머니와 아내를 만나게 되는데...영화의 감독인 신도 카네코는 이런 단순한 이야기를 아름다우면서도 기묘한 필치로 표현하여 다른 호러영화들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경지를 만들어낸다.


먼저 지적해야 하는 점은 영화에는 아무도 지적하지도 않지만 영화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구조들이 존재한다. 무사와 폭력이 지배하는 시대, 주인공에게 명령을 내리는 천박한 대장 무사, 어머니와 며느리가 귀신과 맺은 계약의 구체적인 내용 등등. 영화는 아들-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를 중요시하고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정작 이들의 관계를 정립 하는 것은 바로 이 외부적인 '구조'들이다. 영화는 이 '구조'에 대한 언급과 묘사를 배제함으로서, 이들을 둘러싼 어찌할 수 없는 족쇄와도 같은 환경을 만드는데 주력한다.


충격적인 초반 시퀸스와 어머니-며느리 요괴가 무사를 물어죽여서 아들이 이들을 잡으러 오기전까지, 영화는 아주 간단명료하게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토대를 형성한다. 평화로운 농가에 갑자기 들이닥친 무사들, 이들의 야만적인 눈길, 그리고 이어지는 폭행과 방화, 어머니와 며느리의 시체 위에서 우는 검은 고양이. 영화는 한마디의 대사도 없이 이들이 겪은 고통을 야만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갑자기 씬은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나생문에서 무사를 낚아서 목을 물어죽이는 요괴가 된 어머니와 며느리를 보여준다. 처음 한명, 두명, 세명...영화는 모녀의 죽음에서 요괴가 뒨 뒤에 벌이는 살육행각까지의 이야기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이야기 전개와 묘사로 무게 있는 전설을 깔끔하게 만들어낸다.


이후 아들은 무사가 되서 금의환향한다. 하지만, 그를 반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남은 것은 오로지 잿더미 뿐. 그런 그에게 새롭게 주어진 임무는 바로 요괴 어머니와 아내를 사냥하는 것. 재밌는 점은 자신의 가족과 조우한 아들은 그들을 아예 알아차리지 못한다. 심지어 자기 아내하고 섹스를 하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무사는 자신의 임무와 가족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영화 속 주요한 긴장은 돌아온 아들-요괴가 된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재밌는 점은 죽음이 이들을 갈라놓았어도 이들은 서로에 대해서 가족으로서 애틋한 애정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옭아메는 것은 그들의 애증이 아닌, 그 외부의 것들이다. 아내와 어머니는 무사를 원망해서 '무언가'(재밌는 점은 영화 내에서 이것의 존재는 한번도 언급되지 않는다)와 계약을 맺어서 자신의 비밀을 말하지도 못하고, 여기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 도망가는 것은 꿈도 못꾸는 상황이고. 거기에 무사가 된 아들은 천박하고 속물적인 상급 무사의 명령에 굴복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이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무사가 된 아들의 엄청난 둔감함(눈 앞에 자기 마누라와 자기 어머니를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다니!)과 함께 영화는 이 비극적인 알레고리를 빛과 어둠, 그리고 안개를 이용한 독특한 표현방식과 배우들의 명연으로 완성된다. 덤불 속의 검은 고양이의 미학은 전적으로 '흑백영화가 아니면 불가능한' 미학에 기초하고 있는데, 인물들과 일부 배경을 제외하면 컷과 영상의 대부분을 컬러 영화에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압도적이고 강렬한 칠흑같은 어둠으로 채워넣는다. 이 어둠들은 관객들에게 묘한 공포를 심어주는 동시에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내는데 일조한다. 마치 극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인 저택은 안개와 함꼐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난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요괴 모자의 역을 맡은 배우들의 연기는 이에 화룡점정을 가한다. 이들의 모습은 삶의 희로애락이 거세되고 뒤틀려버린 요괴의 모습 그 자체다. 하지만, 전적으로 요괴가 갖는 그로테스크함을 강조하기 보다는 이들 모녀 요괴는 자신의 한과 감정을 폭발시키기 보다는 응축하여 함열(안으로 붕괴하여 쪼그라 들어감)하는쪽으로 가닥을 잡는다. 이들 모녀가 무사들을 유혹할 때, 살짝 짓는 섬뜩한 미소와 아내 요괴가 무사를 유혹하는 장면의 에로티시즘과 살해 장면의 사이의 기묘한 긴장,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반복될 때 뒤에서 절제된 동작의 춤을 추면서 일련의 사건이 반복됨을 암시하는 어머니 요괴의 춤 장면들은 이미지를 폭발시키지않고 응축한다. 그리고 장면 장면마다 등장하는 이들 모녀의 인간이 아닌듯한 요괴의 이미지와 거대한 구조와 그 사이에 끼인 개인들이라는 네러티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긴장은 어찌보면 별 긴장관계가 성립하지 않는(특히 자신의 가족과 재회하는 장면이라던가) 부분에서조차 관객을 사로잡는 마력을 보여준다.


이것이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이 바로 요괴가 된 부인과 무사가 된 남편이 섹스를 하는 장면인데, 이 부분에서 무사를 죽여야하는 부인의 요괴로서의 숙명과 오랜만에 만난 부인과 남편 사이의 애정이 서로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장면은 죽음과 에로티시즘이 서로 공존하면서 다른 영화들은 쉽게 넘볼 수 없는 아름다우면서 소름끼치는 경지에 도달한다.


덤불 속의 검은 고양이는 아름다우면서 소름끼치는 영화다. 영화의 이야기는 비록 많은 전설이나 설화에서 볼 수 있는 구조를 차용하고 있지만, 신도 카네코는 이러한 이야기를 이용해서 극도로 절제되고 아름다우며 슬픈 공포영화를 만들어냈다.(솔직히 이 영화가 공포영화인가는 이쯤되면 좀 의문이긴 하지만...) 덤불 속의 검은 고양이는 공포영화의 팬이라면 필히 관람해야 하는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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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여자가 살해당한다. 그리고 형사 요시오카는 사건을 수사하던 중에 사건과 자신이 관련된 증거들을 찾아내고 당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자의 유령이 나와서 요시오카를 비난하기 시작한다:네녀석이 날 죽였어...그리고 요시오카의 세계는 점점 뒤틀리기 시작한다. 과연 자신이 이 여자를 죽인걸까? 이 여자와 나의 관계는 어떤걸까? 그리고 차례로 여자가 살해된 방법과 유사한 방법으로 연속살인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과연 이 신원미상의 여인 살인사건과 다른 살인사건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리고 요시오카는 진짜로 이 여인을 죽인것일까?


구로사와 기요시의 절규는 현재로써는 그의 마지막 호러 영화이다. 기요시는 절규 이후로 도쿄 소나타나 올해 일본에서 개봉한 SF 신작 리얼 완전한 수장룡의 날 등등 호러영화를 벗어난 영화들을 만들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기요시의 절규는 마치 자신의 호러 영화에 대한 모든 것을 총집대성하기 위해서 자신의 영화의 각종 요소들을 총합한다. 기존의 기요시 영화들처럼, 절규의 이야기는 전적으로 '도시인이 느끼는 묵시록'에 기반한다. 하지만 살인을 통한 억눌린 인간의 감정 해방(큐어)이나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통해 인간을 절대고독으로 몰아넣는 세계파멸의 이야기(회로)와 다르게, 절규는 추상적이나마 사회적 함의를 집어넣고 통칭 J 호러로 이야기 되는 일본 귀신영화(특히 사다코와 그녀의 클론들)의 이야기를 비틈으로서 자신이 여태까지 만든 호러 영화들을 정리한다.


절규의 초반 시퀸스에 있어서 특이한 점들은 '과거의 거세'와 '사건의 불연속성'이다. 영화는 처음에 빨간 옷을 입은 여인을 간척지 뻘창에 파묻어서 수장시켜 죽이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그 다음 장면들에서 마치 요시오카가 범인인듯한 암시들을 툭툭 던지는데(뜯어진 단추, 손을 묶는데 사용한 전선 등등), 이러한 암시들은 요시오카가 '과거'를 회상하면 곧바로 해결되는 간단한 문제다. 하지만, 요시오카는 과거를 회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내가 그걸 했나?'라고 반신반의하면서 자신을 지목하는 듯한 증거들을 따라 진실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와 함께, 범인은 각기 다르지만 바닷물에 사람을 익사시켜 죽이는 연속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이런 식으로 극 내에서 사건들은 불연속적이며 서로 연결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치 불길한 징조들과 같이 서로가 서로를 느슨하게 연결한다.


그리고 여기에 귀신이 등장한다. 하지만, 일본 호러영화들이 만들어낸 사다코와 그 클론들이 재수없게 걸린 희생자들을 우주 끝까지 따라붙어서 죽이려고 하는 것과 다르게, 절규의 귀신은 극 중에서 철저하게 요시오카 하나만을 고발한다. 또한 극중에서 귀신의 이미지를 하나 뿐인 진실을 고발하는 절규의 이미지로 해석을 하면서, 이야기의 핵심은 이 요시오카를 살인으로 고발하는 귀신의 기원과 그와의 관계로 설정된다. 그리고 요시오카는 자신의 문득문득 떠오르는 이미지에 기초해서 과거를 더듬어 올라가게 되고, 거기서 과거와 귀신의 진실을 찾아낸다. 그것은 바로 15년전 폐허에서 페리를 타고 통근하던 사람들을 지켜보던 여인이 자신이 거기 있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 중 아무도 자신을 찾아와주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극단의 고독속에서 쓸쓸히 죽어갔기에 자신을 방치한 사람들을 향한 저주를 내렸다는 것이다. 기존의 자신의 호러 영화들(큐어, 회로)과 다르게 구체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인(그러나 '정치적'이지는 않은) 기원을 설정한 점에서 절규는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애시당초에 첫번째 살인의 진범은 따로 있었고, 요시오카와 첫살인의 관계는 우연이 겹친것에 불과했다. 물론 과거의 진실을 대면한 그에게 충격적인 진실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렇다면 세건의 서로 연관성이 없는 연속살인사건은 무엇일까? 절규의 이야기는 전적으로 '도시'라는 풍경에 기초한다. 그리고 이 도시라는 풍경은 영원히 파괴와 탄생을 반복하며 끝없이 '미래'로 나아가는 이미지다. 그리고 이 '미래'의 이미지는 밝고 화려한 이미지로 묘사가 되지만, 동시에 '과거'를 거세하고 제거하는(건물의 철거, 세번째 피해자가 직접적으로 미래를 언급하며 내연녀의 의견은 묻지않고 자기 이야기만 한 점 등등)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세 건의 연속살인사건의 가해자들은 피해자들을(첫번째 피해자는 혼약을 거부함으로서 가해자를 버렸다. 두번쨰 피해자는 아버지를 협박함으로서 아버지를 버렸다.) 더이상 감당할 수 없어서 '이를 무로 되돌리고자' 하기 위해서 그들을 해수에 빠뜨려죽였다. 


그렇다면 왜 해수에 빠뜨려 죽인 것일까? 물론 거기에는 초자연적인 기원(귀신이 살았던 정신병원은 해수가 담긴 양동이에 머리를 담그는 채벌이 있었다고 한다)이 존재한다. 하지만 영화는 파괴와 창조가 동시에, 그리고 무한히 반복되어 일어나는 도시의 풍경에 기초하고 있으나, 동시에 그 도시의 풍경 저변에 '간척지'라는 아슬아슬한 배경이 기초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극중 내내 간헐적으로 사시나무가 바람에 떨듯이 일어나는 지진을 배경으로, 간척지는 이 곳이 과거에는 바다였던 공간이라는 것을 강조하듯이 해수웅덩이를 만들어낸다. 이는 영원히 미래로 나아가는 도시의 이미지 속에서 그 내부에 그 근원을 무너뜨릴 수 있는 과거(바닷물)의 이미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가해자들 모두 15년전의 페리에서 요시오카와 같이 여인을 목격했다는 사실과 요시오카와 똑같이 귀신에게 고발당했다는 사실은, 과거의 진실이 그들 모두를 고발하고 있다는 것, 과거가 그들에게 자신을 봐달라고 절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요시오카가 진실을 찾아서 시간이 멈춰버린 폐허로 회귀했을 때(극중에서 여인이 살았던 정신병원의 폐허를 누군가는 '영원히 거기 있을거 같은 건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나머지 인간들은 정확히 바라보아야할 시각을 잃어버린다. 그들이 봐야하는 것은 미래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 바로 자신들이 외면하고 있는 과거의 진실인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전혀 관계가 없는 불연속적인 인물들의 연속으로 묶여있으며 귀신에게서 고발당했던, 15년전 페리를 타고 통근하는 대중들은 이제 각기 자신의 문제들로 침잠해서 극단적으로 폐쇄된 군중속의 고독을 체험할 뿐이다. 그렇기에 이들이 도달하는 장소는 미래를 무화시킴으로서 과거도 미래도 없는 무의 세계로 회귀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영원히 파괴되고 창조되는 도시의 풍경의 바탕에 깔린 해수에 머리를 처박음으로서 도달하는 도시 문명의 종말인 것이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기요시는 요시오카를 이 대중들이 추구해야하는 롤모델이나 이들보다 뛰어난 안간형으로 설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도 연속살인사건의 가해자와 같은 살인범이다:극중 요시오카와 함께 지내던 하루에는 이미 요시오카 손에 죽은 유령이었다. 요시오카 스스로가 귀신의 기원을 찾아서 진실을 보게 되자, 자기 눈앞에 숨어있던 진실이 떠올랐다는 것이며, 가장 소름끼치는 사실은 그전까지는 전혀 그러한 낌새를 눈치챌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요시오카가 과거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눈을 돌리고 은폐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로도 볼 수 있으며, 극의 서술트릭이라고도 볼 수 있다.(어쩌면 주제의식일지도...) 물론 영화가 과거의 구체적 이야기를 거세한 덕분에 왜 요시오카가 하루에를 죽였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찾아낼 수는 없으나, 그녀의 옆에 있었던 여행 케리지와 하루에가 가끔씩 화제로 꺼내던 여행의 이미지에서 볼 때, 그녀 역시도 다른 피해자들과 같았다고 볼 수 있다. 영화는 요시오카마저 살인자로 만들고, 하루에를 붙잡고 앞으로 미래만 보고 같이 살자 라고 절규하는 요시오카의 모습을 통해서 종말의 이미지를 완성한다. 다른 사람과 진실을 공유할 수 없으며, 대중에서 자기 내부로 침잠하는 인간들은 설령 진실을 목도하고 화해의 손을 내민다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바뀔 수 없다. 그렇다면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진실의 절규 속에서 개개인의 내부로 침잠해서 들어가는 파멸뿐이다. 물론 요시오카는 두 피해자(귀신과 하루에)의 유골을 보듬음으로서 과거를 잊지 않기를 희망하지만, 엔딩의 거리의 풍경은 문명의 종말 그 자체다.


절규는 일본 호러 장르에서 자주 나오는, 소위 '사다코'의 분신들을 의도적으로 비꼰다. 기본적으로 절규에 나오는 귀신은 고발자이다. 그녀는 이제는 일본호러에 만연한 의무감과 사명감으로 가득찬 스파이더 워킹이나 관절 비틀기 등을 행하지 않으며, 심지어 불쑥불쑥 등장하는 몇몇 장면을 제외하면 그녀의 이미지는 어딘가 우스꽝스럽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날 죽였잖아요'라고 고발하는 그녀의 모습은 전혀 우스꽝스럽지 않은데, 이는 귀신역을 맡은 여배우분의 연기도 좋았지만(의도적으로 스테레오 타입-진실을 고발하는 귀신-이자 반 스테레오 타입-묘하게 뻣뻣하며 감정을 폭발시키기 보다는 절제하는 쪽으로 가는-을 연기하는 다소 상반된 이미지...) 동시에 기요시의 페르소나라 할 수 있는 야쿠쇼 고지의 편집증적이며 발광에 가까운 과거부정의 연기가 시너지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또한 기존의 귀신들과 다르게, 절규의 귀신은 기존의 호러장르에서의 유령가 파고드는 공포의 법칙을 부숴버린다. 일본호러의 귀신들이 방에서, 이불, 그리고 심지어는 옷속의 어둠속까지 극단적으로 내밀한 공간을 파고들었다면, 절규는 집밖으로 뛰쳐나온 요시오카를 따라서 어두침침한 대낮을 활보한다. 그리고 다소 우스꽝스러운 '슈퍼맨' 장면을 통해서, 이제 내밀한 개인 공간뿐만 아니라 더이상 바깥세계에는 안전한 곳이란 없으며, 귀신(=진실)이 날아다니면서 세계를 괴롭힐것이라는 종말의 법칙을 구축한다.


"나는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죽어주세요"라는 귀신의 반복적인 저주와 함께, 영화는 막이 내린다. 현대의 창조-파괴의 무한한 반복과 그속에 묻힌 진실이 문명을 집어삼킬 것이라고 영원히 저주하는 '절규'는 기요시 영화의 총정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터넷의 절대고독을 아무도 없는 텅빈 도시의 이미지로 구축한 회로나, 야쿠쇼 고지의 신경증 연기가 빛을 발했던 큐어 등과 비교해보면 절규는 너무나도 복잡하고 섬세한 이미지 위에 세워져있다. 하지만, 기요시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감상할 것을 추천드린다. 어찌보면 기요시가 호러영화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모두 여기에 있는걸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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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대단히 강력한 스포일러 있습니다. 영화를 보실 분들은 피해주시길.


쌍둥이 남매인 잔느와 시몽은 어머니 나왈의 유언을 전해 듣고 혼란에 빠진다. 유언의 내용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생부와 존재조차 몰랐던 형제를 찾아 자신이 남긴 편지를 전해달라는 것. 또한 편지를 전하기 전까지는 절대 장례를 치르지 말라는 당부도 함께 담겨있다. 어머니의 흔적을 따라 중동으로 떠난 남매는 베일에 싸여 있던 그녀의 과거와 마주한다. 그리고 그 과거의 끝에는 충격적인 진실이 기다리고 있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드니 빌뇌브 감독의 그을린 사랑은 동명의 연극을 원작으로 하고 있으며, 폭력의 악순환과 이를 극복하는 것에 대한 영화다. 어머니의 비밀과 자신들의 기원을 찾아올라가는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는 끝나기 20분전까지는 상당히 평범한 전개와 살짝 느슨한 이야기 구성을 보여주지만, 마지막 반전 하나로 영화는 다른 드라마들이 보여주지 못했었던 경지에 도달한다. 영화는 이 '반전'에 대한 극의 의존도가 상당하다는 문제(그리고 어느정도는 예측 가능하다)가 있지만, 이야기를 세세하게 다듬고 이야기의 느슨했던 부분을 반전과 세세하게 엮어서 관객들에게 숙연해질 수 밖에 없는 충격과 무게감을 안겨주는데 성공한다.


그을린 사랑의 이야기는 어머니의 인생의 발자취를 더듬어 올라가면서 자신의 기원을 찾는 행위에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기원찾기에 대해서 '당연하다'는 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부분에 있어서 영화는 객관적이다. 영화 초반부, "(이론 수학에서는)해결 불가능한 문제들이 또 다른 해결 불가능한 문제를 불러오게 되죠. 사람들은 여러분이 파고드는 일이 시간 낭비라고 하겠죠. 여러분은 그들을 설득할 수도 없어요. 그것은 엄청나게 복잡한 일이 될 거니까요." 라고 선언하는 영화는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고통스럽고, 어찌보면 더 어려운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진술한다. 또한 영화 내내, 주인공 남매가 목격하는 어머니의 인생역정은 중동을 배경으로(기독교 민병대가 나오는걸 봐서는 레바논 같이 보인다) 증오와 폭력이 햘퀴고 지나간 상흔들의 연속이며, 자신들의 기원이 사랑이 아닌 폭력(강간)에 기초하고 있다는 불쾌한 진실과도 마주함으로서 해묵은 상처와 진실을 들추는 일이 더 고통스럽다 라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는 남매 어머니의 인생역정을 따라올라가면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영화는 중동-레바논이라 추측은 하고 있지만-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동시에 정확하게 어느 나라라던가, 어느 전쟁이라던가 등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거세함으로서 모호한 배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폭력과 증오의 알레고리를 형성한다. 극중 '그 당시는 엄격한 보복의 논리가 있었다'라는 표현과 함께 영화에서 다루어지는 남매 어머니의 인생은 바로 폭력의 알레고리 사이에서 희생당하는 인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과거회상 첫 등장에서부터 소수민족인 남편을 잃어버리고 명예살인(가문의 명예를 위해서 여성을 죽이는 행위)의 대상이 될뻔하며, 자식은 태어나자마자 고아원에 보내진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그녀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지식을 얻는 것이었다. 대학을 나가고, 삼촌과 함께 신문 기사를 써서 세상을 바꾸길 희망했던 그녀는 자신의 고향과 자식이 있었던 고아원이 내전에 휩싸였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낙향을 결심한다. 하지만, 고아원은 이미 공격을 받아 불타버리고, 그녀는 기독교 민병대가 이슬람 교도들을 학살하는 과정중에 휩싸여서 죽을뻔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더이상 지식으로 세계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테러활동에 가담하여 기독교 민병대의 간부를 총으로 쏴서 죽이고 정치범 수용소에서 13년 동안 감금 당한다. 지식으로 해결을 할 수 없으니, 나도 너희에게 증오와 폭력으로 대응하겠다 라는 그녀의 행동은, 그녀를 단순하게 폭력의 희생자로 설정하는 것이 아닌 폭력의 알레고리에 의해서 희생자도 되었다가 가해자도 되는 복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녀는 13년 간의 고문과 감금, 마지막으로 강간과 그로 인한 임신까지 겪지만, 13년 간의 감금에서도 끝까지 노래를 불렀던 그녀, 72번 방의 죄수이자 노래하는 여인은 폭력에 있어 굴하지 않고자 했었다.


여기까지만 보았을 때 영화는 이런 류의 영화치고는 다소 '평이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영화는 이 과정을 극도로 담담한 카메라와 배우들의 명연기를 통해서 쉽게 소비되는 멜로드라마의 수준으로 전락하지는 않지만, 동시에 어딘가 부족한 느낌도 지울수가 없다. 하지만 마지막 반전과 함께 그을린 사랑은 폭력의 순환고리의 가장 끔찍한 형태를 완성하면서 동시에 이를 깨고 나오는 사랑의 위대함을 역설한다.


이 이하는 강력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다. 진짜로 보실분은 넘겨주시길. 마지막 경고이다.









영화 그을린 사랑은 놀라운 이야기이다. 물론 반전에 이야기를 많은 부분 기대고 있기에, 모든 퍼즐 조각이 맞춰지기 전까지는 극이 느슨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진실이 밝혀지고 반전에 의해서 극이 그 전체 윤곽을 드러내었을 때, 관객은 그 충격적인 진실 앞에서 입을 다물고 침묵할 수 밖에 없다. 그을린 사랑이라는 영화는 그정도의 힘을 갖고 있는 영화며, 이야기와 극의 장치들을 세세하게 여기저기 설치해놓고 반전과 함께 재조립될 수 있게끔 만들어놓은 감독의 재능과 자칫 신파성 멜로드라마로 빠질 수 있는 이야기를 훌륭한 연기로 담담하게 그려낸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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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습니다.


살인 청부업자 제프(Jef Costello: 알랑 드롱 분)는 돈을 받고 나이트클럽 주인을 살해한다. 그러나 경찰의 신속한 수배망에 걸려 수 많은 용의자 가운데 하나가 된다. 살인을 하기 전 애인 잔(Jane Lagrange: 나탈리 드롱 분)과 치밀한 알리바이를 짜놓았기 때문에 문제는 없으나, 유일한 목격자인 클럽 피아니스트 발레리(Valerie: 캐시 로지어 분)가 그에겐 가장 위험한 증인이다. 그러나 증인으로 불려나온 발레리는 뜻밖에도 제프를 처음 보는 사람이라고 증언해 준다. 증거가 없어 제프를 놓아주면서도 서장은 너무 완벽한 알리바이에 의심을 품고 그를 미행하게 한다.(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사무라이보다 더 고독한 자는 없다. 정글의 호랑이만 예외일 것이다...-부시도(사무라이 서전)"라는 문구를 인용하면서 시작하는 한밤의 암살자는(사실 원제는 '사무라이'이기는 하지만, 번역한 제목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시적인 작품이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조차 감이 안오는 이 제프 코스텔로라는 인물을 통해서 영화는 고독하고 완벽한 남자의 판타지를 쌓아올리는데 성공한다. 멜빌의 한밤의 암살자는 어찌보면 니콜라스 윈딩레픈 감독의 드라이브의 원형을 연상케 만드는 부분이 있지만(세상과 소통하지 않는 고독한 프로페셔널의 이미지 등등), 멜빌의 느와르적 감수성과 드라이브의 감수성은 서로 차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핵심은 주인공인 제프 코스텔로라는 살인 청부업자이다. 기원을 알 수 없는 이 사내는 자신이 하는 일에 있어서 철두철미한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의 초반부에서부터 중반부까지 제프는 암살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데, 훔친 자동차와 번호판을 이용해서 추적당할 가능성을 줄이며 애인을 만나서 알리바이를 세우고 애인의 남자 앞에서 자신을 노출시켜서 목격자를 확보하며 그 후에는 카드 게임을 하는 등등 경찰에 잡히지 않게 치밀하게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이러한 치밀한 계획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바로 제프 코스텔로라는 인물의 기계적이고 차가운 이미지 그 자체이다. 불심검문에 잡혀서 경찰서에 끌려가고, 제 1 용의자로 지목되는 상황이 오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 내내 보여주는 제프의 모습은 자신의 알리바이에 자만하지도 않으며, 알리바이가 깨지는 것에 대해서 걱정하지도 않는다. 다른 범죄물이나 느와르물과 다르게, 이 제프 코스텔로라는 케릭터는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인간'을 초탈한 것처럼 보이는 프로의 모습을 보이는게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을 초탈했다는 점에서 어딘가 붕뜰 수도 있는 제프라는 케릭터는 감독인 멜빌은 '고독함'이라는 이미지를 이용해서 이해불가능한 케릭터에서 인상적인 케릭터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한밤의 암살자에 있어서 '고독'을 완성시키는 가장 중요한 기제는 바로 '복장'이다. 물론 영화 전반에 깔려있는 미니멀리즘적인 배경들(특히 나이트클럽이나 경찰서라던가)도 이러한 고독을 배가시키는 삭막함을 만드는데 일조하지만, 제프 코스텔로라는 케릭터가 양복과 모자, 코트를 입는 그 '이미지'는 제프라는 케릭터가 타인과 거리를 두게 만드는 분위기를 만드는 주된 기제라고 할 수 있다. 앞을 잠그고 타이트하게 입은 트랜치 코트라던가, 모자를 다듬는 제프의 모습, 그리고 양복이 몸에 딱 맞는듯한 이미지들은 완벽주의자면서 동시에 타인의 접근을 불허하는 철옹성 같은 이미지를 구축한다. 그렇기에 제프 코스텔로는 매력적이면서 멋있다. 이는 제프가 멋을 내려고 코트와 양복을 자신의 몸에 맞게 입어서가 아니라,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단절시키는 철벽 같은 이미지와 고독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그러한 멋이다. 그리고 알랑 드롱의 명연기와 패션 센스가 이를 뒷받침 해주었기에 가능한 멋이기도 하다.


제프의 고독은 극의 갈등 구조에 의해서 더욱 극대화된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제프를 잡으려 하는 경감과 제프가 경찰의 조사를 받자 그가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그를 제거하려는 의뢰인 사이에서 제프는 자신의 원칙에 맞게 홀로 문제를 해결한다. 그에게 있어서 조력자는 그의 여자(연인) 잔과 나이트클럽의 여 피아니스트 발레리 뿐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잔은 그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으며, 발레리는 제프와 묘한 공범관계를 풍긴다. 그리고 영화는 처음 나이트클럽의 사장을 죽이라고 의뢰한 오레이가 발레리와 자신과의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서 제프에게 발레리의 암살을 의뢰하면서 결말을 향해서 달려간다.


하지만 고용된 총잡이라는 클리셰와 다르게, 제프의 문제의 해결방식은 상당히 특이하다. 먼저, 그는 오레이를 쏴죽인다:왜냐면 돈의 여부와 상관없이 오레이는 계약을 먼저 어겼으니까. 그리고 빈 총을 들고 발레리를 쏘려고 하다 최후를 맞이한다. 이러한 과정은 철저하게 자기 완결적인 제프의 원칙에 기초한다. 계약은 완수한다. 하지만 계약을 어기면 위협으로 간주하고 제거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과정에서 제프는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되는데, 제프가 일련의 꼬여버린 상황을 깔끔하게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자살을 하는 것'이다. 영화는 이 자살 자체를 미학적으로 완성하기 위해서 제프의 압박감(초반의 자동차 강탈씬과 다르게 후반의 자동차 강탈씬에서 제프의 흐트러진 모습에 주목하라. 또한 그의 무기와 자동차 번호판 교환책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못박기도 한다)과 마지막을 정리하는 제프의 모습(잔을 만나러 가서 더이상 이러한 일이 없으리라 이야기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발레리 암살을 의뢰 받았으면서도 동시에 발레리를 암살하려고 시도하다가 죽는 장면에서, 그의 자기 완결성(계약을 시행하려는)을 보여준다.


영화 한밤의 암살자는 아름다운 느와르 영화다. 황량한 아파트에 새장 하나 놓고 새를 키우는 고독하고 완벽한 암살자와 스스로를 마무리 짓는 자기완결의 미학까지 보이는 멜빌의 한밤의 암살자는 남자의 고독을 옷과 패션으로부터 승화시키는, 대단히 감성적인 영화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멜로드라마적으로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극단적으로 응축하고 절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한밤의 암살자는 다른 영화들과 다른 독특한 경지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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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습니다.



나치 점령기의 프랑스, 레지스탕스 대장인 필립 제르비에는 동료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포로수용소로 보내진다. 가까스로 탈출한 필립은 마르세이유에서 펠릭스, 르 비종 등의 동료들과 합류하여 자신을 밀고한 배신자를 처형한다. 레지스탕스 활동을 계속하던 중 필립과 동료 뤽은 런던에서 드골 장군을 만나 훈장을 받는다. 리용에서 펠릭스가 체포되자 프랑스로 돌아온 필립은 동지들과 함께 펠릭스 구출작전을 벌인다. 하지만 철통같은 경비의 감옥에 접근하기는 쉽지 않은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장 피에르 멜빌의 대표작이자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그림자 군단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치하에 있었던 프랑스를 배경으로 반나치 활동을 벌였던 레지스탕스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멜빌이 나치 압제 하에서 레지스탕스를 했던 경험도 들어갔다고 하는 영화는 레지스탕스 행위이 아닌 인물의 구체적인 행동과 미묘한 감정묘사에 초점을 맞추면서 멜빌 특유의 느와르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렇기에 새벽의 7인 등의 레지스탕스 활동에 초점을 맞췄던 기존의 영화와 다른 방향성을 지니며, 영화는 레지스탕스들 목숨을 바치면서 부르짖었던 대의와 정의가 아닌 더 '깊숙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누군가는 그림자 군단을 이렇게 표현했다:그림자 군단은 레지스탕스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그림자 군단은 갱스터 영화다. 이것만큼 그림자 군단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명제는 없을 것이다. 영화는 구체적으로 레지스탕스들이 어떤식으로 나치에 대항하는가를 다루지 않는다. 아니, 영화는 그들에게서 '정의'를 빼았는다. 물론 우리는 역사적으로 그들이 나치에 대항했던 열사들이었고, 나치의 압제라는 시대의 어둠 속에서 빛났던 자유의 상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림자 군단의 레지스탕스들은 객관적으로 봤을때, 그리고 그들의 적이 나치라는 점을 제외하면, 그들은 '음모자'들이며 범죄자들이다. 그들은 숨어서 비밀스러운 대화를 주고 받는다. 그들은 음모를 꾸미고, 실행하며, 자신의 선택에 고뇌하고 법과 제도의 탄압을 피해 숨는다. 이렇게 써놓으니 그림자 군단의 레지스탕스의 모습은 악당이자 음모자 쪽에 가깝고, 실제로도 그러하다.


멜빌은 그들에게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대의를 빼앗는 대신에, 그들에게 실존적 '고독'을 선물한다. 그들이 하는 일은 정의롭지만, 세상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며, 심지어는 죽이려 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들의 대의명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림자 군단에서 주인공들은 빛(대의명분)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속(고독)으로 침잠한다. 인물들의 잔잔한 독백과 감정을 억누른 조근조근한 대화들 등등을 통해서 영화는 영화 자체의 고독을 심화시킨다. 또한 영화 초반부 집단 수용소에서 도미노 게임을 한가롭게 하던 잡범들(?)의 모습이나 런던으로 건너갔을 때 야간 폭격이 빗발치는 가운데서 춤을 추던 영국군인들의 모습, 그리고 그들 바깥에서 외부자로 남던 제르비에의 대비되는 모습은 고독 그 자체이다. 심지어 제르비에를 밀고한 배신자를 처단할 때의 레지스탕스들의 모습에서조차 그들은 한 사람을 죽이는 공동의 행위자이자 공범들이 아니라, 각자의 고독 속으로 떨어지는 침통한 모습을 각기 다른 컷을 통해서 묘사한다.


레지스탕스라는 정치적 함의와 구체적인 행동을 제거한 자리에 들어차는 그들의 '고독'을 멜빌과 배우들은 이러한 고독을 예술적인 경지로까지 승화시킨다. 멜빌의 다른 영화인 한밤의 암살자에서 보여준 알랑 드롱의 극단적인 양복과 트랜치 코트 미학과 다르게, 그림자 군단의 이미지는 전적으로 생과 사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자들의 피로와 우수에 가득차 있다. 영화 내내 그들은 음모를 꾸미고 실행을 할 때의 긴장감, 그리고 슬픔과 '어찌할 수 없는' 그 미묘한 감정들(동료들이 한명 한명 죽어나가고 누군가 배신을 할때 느끼는 상실감과 고통 등등)에 조용한 몸부림을 친다. 심지어 고문을 당하고 엉망진창이 된 인물들의 모습에서조차 고통이 아닌 피로감과 슬픔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멜로드라마 적인 요소들을 극단적으로 억제하고 터뜨리지 않고 다듬으로써 다른 영화들이 가지못한 경지에 도달한다.


이러한 고독과 몸부림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것은 바로 레지스탕스 '동지애'이다. 같은 속에서 같은 문제로 고민하는 동류의 인간들 사이의 이 희미한 동지애는 인물들 간의 극단적인 고독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해주는 유일한 기제이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에서조차도 멜로드라마적인 이야기를 거부한다. 동지를 구하기 위해서 자신을 고발하고 고문 당한 뒤, 동지와 같은 감방에 들어온 레지스탕스가 조용히 동지에게 청산가리를 권하는 장면은 각자의 고통과 피로속에 사로잡힌 존재들이 겨우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들이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하는 장면조차 보여주지 않음으로서 이러한 죽음을 미화하지 않는다. 그리고 제르비에가 불시검문에 잡혀서 총살당하기 직전에 마지막 담배를 수감자들과 같이 태우는 장면에서는 서로가 발목에 족쇄가 채워진 체로 담배를 던지면서 담배를 나누어갖는다. 묶여있는 상태에서 간신히 담배를 나눠가지는 이 장면에서, 인물들은 각기 개별의 컷으로 나뉘어지거나 서로 거리를 유지한다.(족쇄 때문에)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의 공포와 고독감 속에서 타자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제르비에가 나누어준 담배 뿐이다.


그림자 군단은 좀 색다른 부분에서는 샘 페킨파의 폭력 영화를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다. 샘 패킨파의 영화들이 사라질 수 밖에 없는 것들의 마지막 장엄함(와일드 번치나 철십자 훈장 같이)을 보여주었고, 멜빌의 그림자 군단 역시 죽음과 파멸을 곁에 둔 레지스탕스들의 미학을 다루고 있다는 측면에서 비슷한 미학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패킨파의 영화가 죽음을 앞둔 존재들이 사라지기 전에 자신을 불태우며 총을 맞으며 모두가 평등하게 하늘로 승천하는 미학(탄도 발레로 명명된 패킨파 특유의 연출 방식은 아이러니 하게도 엑스트라들이 총맞고 죽을때 가장 빛나는 연출이기도 하다)이라면, 그림자 군단은 자신의 신념과 행동을 끝까지 관철한 인간이 무저갱 속으로 끌려들어가며 '난 그럼에도 인간으로 죽고 싶다!' 라고 소리없이 외치는 미학이다. 총살을 당하기 전에 '내가 죽지 않는다고 믿으면, 난 죽지 않는 것이다'라고 읇조리는 제르비에의 모습이나, 나치 장교의 유혹(내가 신호하면 총을 쏠건데, 만약 총에 맞기전에 벙커 저편 벽까지 뛰어가는데 성공하면 총살은 뒤로 미루겠다)에도 뛰지 않기를 바랐던 제르비에의 모습은 끝까지 인간답게 당당하게 살기를 바랐던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미학은 마지막 엔딩의 한 문장 '1944년 1월 13일, 제르비에는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기로 결심했다'라는 문장으로 완성된다.


영화 그림자 군단은 레지스탕스가 왜 그런 활동을 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러한 활동의 의의가 무엇인가라는 정치적인 이야기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지만, 동시에 레지스탕스들이 갖고 있었던 고독감을 극대화시키고 그들을 끝까지 인간답게 싸우고 살기를 희망했던 사람들로 묘사함으로서 오히려 레지스탕스들을 더 아름답게 빛내는데 성공한 영화이다. 그렇기에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의 에센셜 킬링처럼, 전혀 정치적이거나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추상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더 정치적일 수 있는(그러한 조건속에서도 인간으로서 투쟁하고자 했었던 레지스탕스들) 영화기도 하다. 기회가 된다면 꼭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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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스포일러 있습니다.


기상 이변으로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지구. 살아남은 사람들을 태운 기차 한 대가 끝없이 궤도를 달리고 있다.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 바글대는 빈민굴 같은 맨 뒤쪽의 꼬리칸, 그리고 선택된 사람들이 술과 마약까지 즐기며 호화로운 객실을 뒹굴고 있는 앞쪽칸. 열차 안의 세상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기차가 달리기 시작한 17년 째, 꼬리칸의 젊은 지도자 커티스는 긴 세월 준비해 온 폭동을 일으킨다. 기차의 심장인 엔진을 장악, 꼬리칸을 해방시키고 마침내 기차 전체를 해방 시키기 위해 절대권력자 윌포드가 도사리고 있는 맨 앞쪽 엔진칸을 향해 질주하는 커티스와 꼬리칸 사람들. 그들 앞에 예기치 못한 상황들이 기다리고 있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최근 김지운(라스트 스탠드)과 박찬욱(스토커)에 이어서 해외영화계로 진출(?)한 세번째 한국 감독인 봉준호는 제게 있어서는 저 앞의 두 감독들보다는 기대치가 높았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자신의 독특한 영화세계 내로 침잠하는 중인 박찬욱이나 김지운과 달리 봉준호의 영화 세계는 세세하게 짜여져있는 세계 내에서 독특하고도 인상적인 알레고리와 비유를 통해서 자신만의 영화를 공고하게 구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설국 열차는 상당히 기묘한 영화입니다. 봉준호가 한국에서 찍었던 괴물이나 살인의 추억과 같은 영화들은 한국 사회에서 시대와 상황이 갖는 세세한 디테일과 비유들을 살려서 관객들(적어도 한국인이라면)을 몰입하게 만드는 영화를 만들었다면, 설국열차는 그러한 봉준호 특유의 장점들을 포기한 평범한 SF 영화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설국열차의 세계관이나 설정, 스토리는 사실상 SF 장르에 있어서는 대단히 익숙한 이야기들입니다. 세상이 대충 멸망하고,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작은 사회를 꾸려나갑니다. 오로지 '생존'이라는 목표아래서 재구축된 사회는 철저한 계급 사회에 무자비한 사회로 묘사되는데, 흔히 주인공이나 하류 계층의 인물들은 이 질서를 타도하고 사람 살만한 세상을 만들기를 꿈꾸고 음모하죠. 사실, 설국열차의 기저에 깔려있는 이야기들은 평범하기 그지 없는 SF 장르의 이야기이며, 심지어 이 모든 이야기들의 반전에서 결말까지 모두 뻔합니다. 꼬리칸의 인구 조절을 하기 위해서 꼬리칸의 정신적 리더와 기차 엔진의 윌포드가 서로 공모하고 있었고, 반란에서부터 모든 행위들이 기차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통제기제였다는 것은 SF 장르에서는 클리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흔합니다.(심지어 단백질 블록이라고 하는 그 음식의 정체조차!)


하지만, 설국열차의 미덕은 뻔하디 뻔한 이야기들을 기존의 SF 장르가 보여주지 않은 다른 형식으로 보여준 점에 있습니다.(물론 원작이 있고, 완벽하게 새로운 이미지와 구도라고는 할 수 없지만) 설국열차의 세계는 기존의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의 사회와는 다릅니다. 지구를 1년에 한번 주행하는 끝없이 달리는 열차가 인류 사회의 전체를 의미하게 된 설국열차의 세계관은, '기차'라는 이미지와 멸망 이후의 인류 세계를 독특한 이미지로 엮어냅니다. 달리는 기차라는 역동적인 세계와 별개로, 열차 안을 지배하고 있는 질서는 전적으로 '정지'되어 있으며 극도로 통제되어 있습니다. 세계를 1년에 한바퀴 도는 '정시성'과 함께, 반란을 이용해서 인구수를 조절하고, 각자의 기차칸에서 벗어나지 않는(이를 벗어난 사람들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다른 열차칸의 승객들) 등, 설국열차의 세계는 열차의 위용과 동적인 이미지와는 다르게 각각의 폐쇄적이고 정적인 소우주들의 연속(열차칸들과 그 집합인 열차)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소우주들은 전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각자에게 맡은 역할을 벗어나지 않을 것을 강압하죠.


봉준호 감독은 이러한 열차칸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극단적으로 응축된 소우주로 표현합니다. 꼬리칸에서부터 학교, 수족관, 단백질 블록 공장, 물처리 시설, 그리고 마지막 엔진까지, 개개의 열차칸들은 전체 열차의 유지를 위해서 필요한 기능을 수행합니다. 평범한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장르물의 사회와 다르게, 설국열차의 세계는 기차라는 공간으로 한정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자칫 세트 규모의 한계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인류 최후의 빈민들의 반란이 아니라 선상 반란 수준으로 격하될 수 있었으나 영화는 각 칸을 세계에서 필요한 기능이자 상징으로 응축해서 표현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윌포드와 길리엄의 공모와 세계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란을 조장해서 인구수를 통제해야한다는 발상, 동적으로 보이지만 정숙한 엔진칸의 이미지, 정해진 레일을 달리는 기차의 은유가 결합하여서 이 얼마 안되는 세계의 모든 것(지배자서부터 피지배자까지)이 끊임없이 변하려고 하는 인류를 정적인 질서에 우겨넣으려 시도하는 강압적인 폭력의 공간으로 변합니다.


그렇기에 커티스의 꼬리칸에서부터 엔진까지의 행진은 전세계를 돌아보는 행위라고 할 수 있는데, 윌포드의 열변처럼 말이죠:'열차가 달린 뒤로 그 누구도 열차의 끝부터 시작까지 지나쳐본적이 없다' 하지만, 엔진을 지배해서 꼬리칸을 질서라는 이름의 폭정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커티스의 노력은 길리엄과 윌포드의 음모와 별개로 애시당초에 핀트가 어긋나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커티스의 오딧세이는 전적으로 기차칸을 따라서 엔진까지 도달하는, 일종의 질서의 재확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커티스가 엔진칸에 도달해서 윌포드에게서 사실을 듣자 절망하는 것은, '기차'와 '엔진'이라는 세계의 질서이자 동력에 집착해서 생기는 문제이며 세계는 '지배자'가 바뀐다고 해서 바뀔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재밌는 점은, 영화는 그렇기에 앞으로 나가는 것이 아닌 '옆으로 빠져나갈 것'을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남궁민수의 이야기처럼, 기차에 집착하지말고 문을 열고 나가야한다는 것이죠. 어차피 레일 위에서 달리는 열차에서 앞으로 나아가봤자 레일과 열차라는 질서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이 레일과 기차로부터 이탈하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순간 인류는 생존과 질서에 집착해서 질서에 인간을 끼워맞추는 것이 아닌 새로운 가능성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기묘하게 이 부분에 있어서 남궁민수의 비중을 '묘하게' 쳐냅니다. 옆으로 나가는 것, 기존의 질서로부터 이탈하는 가능성을 남궁민수를 통해서 보여주었으나, 문제는 옆으로 나가고자 하는 그의 동기, 그와 딸과의 관계(어머니가 존재하지 않는데, 왜 이 이야기는 하지 않는가?-극 내에서 6인의 반란을 주도한 에스키모인 청소부가 어머니가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보는 겁니다. 그러면 부족한 동기가 채워진다고 할 수 있을듯...) 등등에서 비중을 적게 주는 바람에 헛소리로만 끝났어야 했던 윌포드의 장황 연설이 관객들에게 진실되게 다가오는 문제가 생긴 것이죠.


영화 설국열차는 솔직하게 봉준호의 모든 역량이 다 발휘된 영화는 아닙니다. 그가 한국에서 찍었던 복잡미묘했던 이야기들, 그리고 섬세하지만서도 한국 정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관객들에게 페이소스를 제공하는 영화들에 비하면 그의 장기들이 많이 죽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영화의 내용조차도 평이하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국열차는 독특한 알레고리와 묘사를 보여주고, 이런 점에서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SF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한번 보셔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호불호가 극히 갈린다는 점은 인정을 해야하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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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젊은이들은 각자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나지만 프레디 퀠 (호아킨 피닉스 분)은 여전히 방황하며 백화점의 사진기사로 살아가고 있다. 자신이 제조한 술에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는 프레디는 술에 취해 유람선의 한 파티장에서 난동을 부리게 되고 다음날 그 자리에 있었던 랭케스터(필립 세이모어 호프만분)를 만나게 된다. 몇 마디 나누지 않았음에도 서로에게 이끌리게 된 두 남자. 프레디는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는 ‘코즈’ 연합회를 이끌고 있는 마스터, 랭케스터의 실험대상이자, 조력자이자, 친구로서 그의 가족들과 함께 머물게 된다. 하지만 프레디는 진정한 마스터라 믿었던 랭케스터 역시 자신과 다르지 않은 불완전한 인간임을 깨닫고, 랭케스터 역시 가족들로부터 프레디를 멀리하라는 경고를 받게 된다. 두 남자 사이에 균열은 점점 커져가고 아슬아슬한 관계는 점점 파국에 치닫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마스터는 참으로 기묘한 영화다. 감독인 폴 토마스 엔더슨은 이 영화의 각본을 사이언톨로지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토로했으며, 구상에서 완성까지 장장 12년의 세월이 걸린 소위 '라이프 워크'라 칭할 수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감독의 전작인 데어 윌 비 블러드의 강렬한 이미지(석유)와 달리, 마스터는 상당히 복잡하고 관점을 쉽게 파악하기 힘들며 대단히 섬세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사이언톨로지를 모델로 한 유사과학 종교집단인 코즈를 다루는 영화의 시각은 사이비 종교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하지도 않으며, 유사과학의 헛소리 속에도 매몰되지 않는다. 재밌는 점은 영화가 그러한 유사종교의 헛소리와 진실(프레디의 변화)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시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프레디 퀠이 랭케스터 도드라는 멘토이자 마스터를 만나서 어떻게 교화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 둘이 갈라설 수 밖에 없는지를 보여주고 이를 통해서 '인간의 변화'(또는 교화)를 다룬다.


주인공인 프레디 퀠은 2차 세계대전 수병으로 복무하고 전역한 참전용사다. 그러나, 프레디는 PTSD를 지니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참전용사의 클리셰를 반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문제는 좀더 '근원적'인 부분에 있다. 아버지는 과음으로 죽고,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수감되었으며, 심지어 고모와 잠자리를 한데다가(근친상간), 언청이며 충동적인데다 성에 대해서 유치하게 갈구하기(수병들이 바다에 나가서 모래사장에 나신의 여성처럼 보이는 모레조각을 만들자, 그 위에 마운팅을 한다던가...)까지 하는 프레디의 내력은 그의 문제가 뿌리 깊고 역사적인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본인도 이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다. 그가 종전 후 자신에게 마음을 준 여자를 거부하고 고향을 떠나 정처없이 방랑하는 것은 그 자신의 성격과 핏줄에 숨어있는 문제로 인해서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한다는 자포자기와 공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1950년대라는 독특한 시대에 던져놓은 것은(사실 모든 시대는 제작기 특징을 지니기는 하지만), 감독의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종전 이후 팍스아메리카와 미국의 황금기라는 별명을 받고 있는 이 시대야 말로 미국의 '정상성'에 대한 집착이 극에 달한 나머지 속으로부터 붕괴되고 있는 조짐을 보이던 시기였다(존 업다이크의 소설 달려라 토끼나, 니콜라스 레이의 실물보다 큰 같은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이 시기의 밝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집착은 역설적으로 폴아웃 등의 서브 컬처에서는 그 제정신이 아니고 썩어버린 내면을 드러내기 위한 역설적인 기제로 사용되는데, 영화에서는 프레디의 첫 직업을 백화점 사진기사로 정하면서 이를 극대화한다. 행복해보이지만 어딘가 공허해 보이는 인물들의 사진을 찍는 프레디는 그 사이에 낄 수 없는 타자이다. 그런 그가 사진을 찍으려는 인물에게 조명을 과도하게 들이댐으로써 고객과 싸우는 부분은 그의 충동적인 면모와 함께 그런 비정상적인 아름다움과 정상에 대한 집착을 까발리고자 했던 그의 욕구가 드러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1950년대라는 배경에 있어서 프레디는 '독'같은 존재이다. 그는 사람들이 숨기고 싶어하는 어두운 내력으로써, 끝없이 사회로부터 밀쳐질 수 밖에 없는 타자이다.(유람선의 신나는 음악을 배경으로 신경을 긁어내는 저음의 BGM을 이중으로 깔아서 그가 느끼는 소외감과 신경증을 드러내는 장면을 보라)심지어 그는 사람이 먹을 수 없는 독같은 괴주(페인트 희석제나 사진 인화액 같은 걸 섞은 술을 우리는 술이라 부르지 않는다)를 만들어 내고, 이를 마신다. 이 술은 그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인데, 그 이외에는 아무도 이 술을 마실 수 없다는 점(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 있어서 그를 상징하는 물건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렝카스터는 그의 술을 마시고는 독특하다고 평한 뒤에 프레디에게 매료된다. 


렝카스터 도드도 프레디 같이 참으로 독특한 케릭터이다. 렝카스터는 유사종교 집단이자 사이비 과학을 신봉하는 코즈를 이끄는 리더로써, 유쾌하고 유머러스하면서 동시에 보통의 사이비 교주들과 달리 자신이 하는 일이 인류를 구원하는 일이라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다. 그가 이끄는 코즈라는 집단의 사상은 대단히 독특하며 이 영화의 난이도를 높여버리는 주범이 된다:인간은 영원불멸한 영혼을 갖고 있는데, 육신이 죽으면 영혼은 떠나서 다음 육신으로 들어간다. 그렇기에 인간은 과거 전생의 자신을 파악함(코즈는 현재의 삶을 꿈으로 보고 이를 '전생으로 회귀해서 전생을 인지하는 최면-동시에 전생을 인지하고 바꿈으로써 영혼의 불멸성을 깨닫는 반최면화'하여서 영원불멸한 영혼을 인지할 수 있다고 본다)으로써 영원불멸한 삶을 얻게 된다고 보는 집단이다. 물론 랭커스터는 이를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행하고 있지만, 현대인의 시점에서 코즈를 보았을 때는 영락없는 유사 과학 사이비 종교집단에 불과하다. 이 지점이 상당히 미묘하면서 재밌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만약 감독이 이 코즈라는 집단의 사상을 현재 존재하는 메이저 종교(물론 사이언톨로지도 아닌)들로부터 차용했다면 이 영화의 복잡 미묘한 성질은 아마도 사라지고 영화외적으로 영화의 뉘앙스와 전혀 관계없고 의미없는 종교적 논쟁이 반복 재생되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사이비 종교로서 코즈 연합회를 만든 뒤에, 그 논리에 의거해서 한 사람의 인생을 여러가지 의미에서 바꾸는걸 보여줌으로써 관객이 종교에서 한발자국 떨어져서 이 '변화'를 판단할 수 있게끔 만든다.


이런 랭카스터가 프레디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그가 정말로 독특한 사례이기 때문이었다. 복잡한 내력을 가진 인물(좀더 '코즈'적인 해석으로 본다면 '전 역사를 통틀어서 독의 집합체'으로서의 존재)인 프레디를 과거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서 정상인으로 교화하는 작업은 렝카스터에게 있어 대단히 흥미로운 과제였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프레디가 렝카스터에게 동조하고 그의 수행방식에 따르는 것은 랭카스터가 처음으로 프레디를 이해해준 타인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서 프레디는 문제에 대해서 계속 거짓말하고 회피하는 대신(영화 내내 그가 다른 사람에게 자신에 대해서 거짓말하거나 피상적인 이야기만 하는걸 생각해보면 랭카스터에 대해서 프레디는 대단히 솔직했다고 볼 수 있다.)에 그 자신의 본질(집안 내력과 성격, 그리고 도피의 원인까지)을 돌아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렝카스터가 프레디를 교화하려는 시도 자체는 많은 난항을 겪게 된다. 일단 프레디의 성격 자체가 쉽사리 고쳐질 수 없는 것이기도 하며, 프레디 역시 코즈의 교리가 어딘가 말도 안되는 헛소리의 연속이라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철창 안에서 렝카스터에게 '당신도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도 모르잖아!' 소리친다던가) 그리고 렝카스터의 주변 인물들도 프레디가 자신들을 파멸시킬 수 있는 독같은 존재라는것을 깨닫고 렝카스터에게 프레디를 멀리하라고 충고한다. 특히 그의 아내이자 코즈의 실력자(직접적으로는 묘사가 안나오지만, 렝카스터를 수음해주는 매리의 모습과 랭카스터의 묘하게 종속된 묘사를 생각해보면...)인 매리의 경우, 프레디를 극도로 경계한다. 하지만 렝카스터는 프레디를 포기하지 않는데, 프레디를 포기하는 순간 그들의 실패를 선언하는 꼴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렝카스터는 프레디를 교화한다. 하지만 그게 코즈의 사상과 이론이 프레디를 정상인으로 만든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기서 렝카스터와 프레디의 관계는 기묘하게 틀어지기 시작한다:프레디는 이제 렝카스터로부터 성격 교정을 위한 수행을 받는 것을 끝 낸뒤, 렝카스터의 사진을 찍음으로써 다시금 렝카스터와의 거리를 벌이기 시작(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 처음의 백화점 사진사 일을 할때처럼)한다. 동시에 렝카스터 역시도 그의 교화가 프레디의 본질을 바꿔놓지 못했음을 인지한다:책 2권에서 '기억하다'라는 단어 대신에 '상상하다'라는 단어를 썼고 그것이 코즈 사상의 거대한 변화를 불러일으킬거라는 그의 추종자의 질문에 대해서 신경질적으로 대하는 렝카스터의 모습에서 이것이 잘 드러난다. 왜냐면 전적으로 2권의 집필 동기를 부여한 것은 바로 프레디와 그의 교화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전생의 기억을 되짚어올라가서 그 기억을 바꿈으로써 기억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코즈의 사상과 달리 프레디는 그의 본질을 '바꿀 수 없었기'때문이었다.


그리고 프레디는 사람을 폭행한 뒤에, 자신이 변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자신의 멘토이자 친구였던 렝카스터를 떠나 자신이 도피했던 연인을 찾으러 나선다. 그리고 연인이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프레디의 모습에서, 우리는 초반의 프레디와는 다른 무언가를 발견한다:그는 확실히 변한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프레디의 변한 모습은 '코즈' 식이나 1950년대식의 정상인으로서의 개념이 아닌, 자신의 과거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그로부터 자유로워진 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결국 교화는 실패로 끝났다고 비난하는 매리와 자신에게 메여서 영원히 비정상인으로 살거나 혹은 영원히 자신과 결별 중 둘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이야기하는 랭카스터. 랭카스터는 떠나는 그에게 '자네는 인류 최초로 마스터가 없는 자유로운 영혼이 될걸세'라고 축복을 해주고, 떠나는 뱃사람의 연가(이 영화에서 바다는 자유와 희망을 상징하는 은유로 작용한다)를 불러주는 렝카스터의 모습은 프레디의 변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결국은 자신을 떠나야 프레디가 궁극적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알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이비 종교의 수장과 이 시대의 맹독과도 같은 인물 사이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진실된 우정이 피어난다.


영화의 마지막, 프레디는 영화 내에서 처음으로 여자와 제대로 된 섹스를 갖는다. 영화 내내 여자에게 유치하게 껄덕대던가, 모래사장의 모래여인에게 마운팅하고 해병들이 뛰노는 해변가에서 바다를 향해 자위하거나, 집회에 모인 여인들이 벌거벗은 것을 상상하는 장면들(이 장면들은 묘한 성적 긴장감들이 있었다)과 다르게, 이 마지막 정사씬은 편안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프레디는 정사를 나누는 여인에게 자신의 마스터였던 렝카스터가 했던 교화를 그대로 반복한다(눈 안 깜빡이고 진실 이야기하기) 본인은 이를 자유로워진 영혼이 자신의 한때 스승이었던 사람을 기리는 독특한 제의로 느꼈다.


이러한 길고 쓸모없는 분석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놀라울 정도로 섬세한 덕분에 놀라울 정도로 지루하다. 그나마 이 지루한 영화에 있어서 볼만한 스펙타클은 바로 프레디 퀠 역을 맡은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다. 그는 구부정하면서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도 다른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그를 밀어낼거 같은 독특한 분위기로 극을 압도한다. 또한 미친놈 처럼 발광하는 장면에서는 격정적으로 발광을 하다가도, 얼굴로 독특하고도 섬세한 표정연기를 보여주는 '안면예술'을 보여주기도 한다. 렝커스터 역을 맡은 필립 셰이모어 호프만의 친근하면서도 유쾌하고 확신에 가득찬 선의의 사이비 교주 연기도 출중했지만, 호아킨 피닉스의 신들린 연기는 그를 '전설적인 리버 피닉스의 동생'이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주었다. 아니, 호아킨 피닉스가 좀더 커리어를 쌓으면 리버 피닉스가 '전설적인 호아킨 피닉스의 형'으로 불리게 될 날이 올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솔직히 영화 마스터는 완벽하지 않다. 영화는 극히 섬세한 감정들과 섬세한 위치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너무나 많은 것을 갖다 붙였다. 물론 감독 폴 토마스 엔더슨은 이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데 성공하였으나, 문제는 극 자체를 즐기기에는 영화가 너무나 어려운 무언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스터는 아름다운 영화다. 그것은 단순하게 한쪽이 옳다거나 양비론으로 이어지지 않는 인간 '교화'의 문제를 훌륭하게 다루고 있으며, 여태까지 교화를 다룬 고발 영화(시계 태엽 오랜지 라던가)와 다른 자신의 지점과 미학을 공고히 한 작품이다. 기회가 되신다면 꼭 감상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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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스포일러 있습니다.

*피판에서 감상한걸 토대로 쓰여진 감상입니다.


한물간 배우 로빈 라이트는 미라마운트 영화사로부터 독특한 마지막 제의를 받는다. 자신의 이미지와 연기를 영화사에게 파는 대신에 로빈 라이트 본인은 더이상 연기를 할 수 없는 전속계약을 맺는것. 로빈은 이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지만 시대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기에 영화사와 계약을 맺기로 한다. 그리고 20년 후, 로빈 라이트는 미라마운트 영화사가 주최하는 미래학 회의에 초대를 받고 참여하게 되는데...


콩그레스는 전쟁에 대한 기억과 홀로코스트에 대한 사회적/개인적 은폐를 다룬 아리 폴만 감독의 전작 '바시르와 왈츠를'와는 사뭇 다른 포지션을 취한다. 필름 위에 스케치를 덧대서 만들었다던 '바시르와 왈츠를'가 실제 위에 파편적이고 몽환적인 이미지를 덧붙여서 기억을 재구성한 뒤에 그것을 마지막에 거둬들임으로써 그 이미지의 끝에 존재하는 '진실'을 목도하게 만드는 놀라운 구조와 기법, 방법론을 보여주었다면, 콩그레스는 그와 정반대로 미래의 기술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묵시룩, 그리고 문화산업이 지향하는 끝을 가정한다. 절반은 현실, 절반은 애니메이션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아리 폴만이 바시르와 왈츠를을 만들기 전, 스타니스와프 렘의 원작 소설 미래학적 회의를 읽은 그때부터 구상된 아리 폴만의 라이프워크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솔직히 바시르와 왈츠를에 비교하기에는 콩그레스는 나른하며 드라마보다 도식적인 구조가 앞서는 부분이 적지않게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콩그레스는 매력적인 작품이며, 감독의 문제의식은 이런저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포인트가 분명하다..


콩그레스의 모티브는 발터 벤야민이 지적한 헐리웃 스타 시스템과 거짓 아우라의 문제와 맥락이 닿아있다. 벤야민에 따르면 예술작품(혹은 배우)의 아우라(그 장소에서만 인지할 수 있는 예술작품/배우의 독특한 분위기)는 기술복제의 과정을 통해서 제거된다. 기술복제를 통해서 예술작품은 그 아우라가 보여주는 독특한 매력 때문에 숨겨져서 숭배받는 위치를 극복한다. 하지만, 벤야민은 당시 헐리웃 스타 시스템을 통해서 지적한 거짓 아우라의 문제는, '배우'라는 단순한 인간이 마치 인간을 뛰어넘은 무언가를 가진듯이 포장해서 이를 팔아먹는 문제를 지적하였다. 대중이 일개 인간에 불과한 '스타'라는 존재에 그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면서 숭배하고 여기에 몰입하는 현상(동시에 이걸 시스템해서 상품화하는 거대자본까지)을 벤야민은 문화산업이 갖는 고유의 문제로 파악하였다.


콩그레스의 시작점 역시 벤야민이 대중문화에 대해서 내린 특유의 문제의식에 기초한다. 기계와 애니메이션이 배우의 역할을 대체하는 것은 단순한 인간이 기계에 의해서 대체되는 인간 패배를 표현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로빈 라이트가 마지막 계약을 두고 이런저런 단서조항들에 대해서 언급하는 장면을 보자. 변호사가 로빈 라이트로부터 추출한 이미지가 어떤 장르에는 출연해서는 안되며, 영화에 출연할 때의 나이, 즉 배우의 이미지를 흥정하듯이 정하는 장면은 이 기술의 발전이 로빈 라이트를 그대로 대체하는 것이 아닌, 로빈의 이미지만을 뽑아내서 박제한 것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배우의 '연기 금지 조항'이다. 배우의 복제품, 즉 상품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배우 본인의 연기를 제한한다는 것, 벤야민이 기술복제가 진품의 존재 자체를 희미하게 만들어서 아우라를 제거한다고 한 주장의 정반대의 상황을 상정하고 있다:존재할 수 없는 거짓의 아우라(고정된 배우의 이미지)가 인간을 대체한다.


하지만, 기술에 대한 로빈의 부정적인 모습과 로빈의 마지막 연기 장면을 통해서 영화는 로빈 라이트라는 인간이자 배우의 삶을 긍정한다. 하이 커리어에서부터 점점 바보같은 실수를 해서 커리어를 점점 말아먹고, 종국에 가서는 씁쓸한 퇴물 배우의 인생을 보내고 있는 로빈 라이트 본인의 슬프면서 우아한 모습(아이러니 하게도 로빈 라이트는 영화속에서 관계자들이 까는만큼 커리어를 말아먹은 배우는 아니다.)과 매니저의 고백을 들으면서 생애 마지막 연기를 벌이는 로빈 라이트의 모습은 대중문화 '산업'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진짜 인간의 희노애락이 들어간, 인간적인 무언가를 갖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영화의 이야기는 20년 뒤 미래학 회의에 초대받은 로빈 라이트의 넘어가며 영화는 실제에서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방식을 바꾼다. 인간의 감각을 속이는 독특한 약물을 이용해 만들어진 애니메이션 구역은 오래된 미국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화려한 색깔로 치장된 공간이며 사람의 영역이 아닌 케릭터의 영역을 구성한다. 그리고 로빈 라이트는 영화사의 놀라운 계획을 듣는다:영화는 한물 갔어요. 미래의 기술은 '느낌'을 파는 겁니다. 제가 당신을 여기 부른 이유는 당신의 느낌을 팔기 위해서 입니다. 이 기술을 통해서 사람들은 당신을 들이키게 될겁니다. 당신은 이제 '물질'이 된거라구요, 로빈 라이트!


사람들에게 거짓 아우라를 팔았던 대중문화는 이제 사람에게 '느낌'을 팔기 시작한다. 이제 대중들은 가짜 신들을 숭배하는 것이 아닌 가짜 신, 그 자체가 된다. 불의의 사고로 또다시 20년이 흘러 그 미래의 기술이 보급된 세계를 로빈 라이트는 목격한다. 호텔에서 본 애니메이션 구역은 이제 전세계로 뻗어나갔으며, 인류는 이제 자신의 육체와 모습을 탈피해서 다양한 이미지로 변신하며 개인의 느낌과 이미지는 이제 모든 대중이 다같이 공유하게 된다. 그렇기에 극중 누군가는 인류에게 더이상 컴플렉스나 열등감이 없는 유토피아의 세계에 도달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아들을 찾기 위해 약에서 깨어난 로빈의 눈에 보인 세계, 애니메이션의 '껍질'을 벗어던진 '현실'은 초라하고 볼품없는 거지꼴을 한데다 약에 취한 대중들이 돌아다니는 완벽한 디스토피아의 세계다.(재밌는 점은 이 각성 장면의 연출이 바시르와 왈츠를 마지막 장면 연출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가짜 신을 숭배하기 포기하고 스스로 가짜 신이 되기를 자처한 대중의 말로란 결국 가짜에 더욱 집착해서 자폐적인 존재가 되버렸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한 '거짓'과 대중문화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에도 진실이 있을 가능성을 어렴풋이나마 보여준다. 아들을 찾아 환상에서 벗어난 로빈은 자신의 아들이 자신을 기다리다가 결국은 환상의 세계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듣고는 다시 환상의 세계로 돌아가기를 자처한다. 하지만 환상의 세계에서는 고정된 '이미지'란 존재할 수 없기에, 돌아가더라도 아들을 찾을 수 없고 설령 찾더라도 그것이 아들인지 알 수 없을거라는 경고에도 로빈은 환상의 세계로 돌아간다. 하지만 로빈은 스스로 아들이 되는 독특한 방법으로 아들을 찾아내며 자신이 현실을 떠나기전과 같은 풍경에서 연을 날리고 있는 아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결론에서 영화는 인간이 자폐적인 세계에 몰두하고 의미없는 상념과 이미지의 폭풍이 현실을 집어삼키더라도 거기에는 서로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믿음을 보여준다. 스스로 거짓 신이 되는 것이 아닌, 꿈을 공유할 수 있는 가능성과 여지를 남겨둠으로서 사람의 꿈은 존재하며 끝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콩그레스가 아름다운 영화인 것은 사실이나, 문제는 많은 부분 빈칸이 남아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는 전반부, 후반부 파트만 놓고 각각 다른 한편의 영화를 만들어도 될만큼 방대하고 복잡한 내용을 무리하게 한편의 영화로 압축시키려는 시도를 했으며, 몇몇 부분은 나른해지고 케릭터들은 몇몇 주요 인물들을 제외하면 의미없이 소모될 뿐이다(특히 별다른 설명이 없어서 졸지에 20년간 로빈을 기다린 변태 스토커가 되버린 애니메이터...아니 그게 더 적절한 설명일지도) 하지만 콩그레스는 그런 문제들을 어느정도 눈감아줄 수 있는 힘과 매력이 있다. 아마도 좀만 덜 욕심을 부렸다면, 바시르와 왈츠를에 비견되는 작품이 나올수 있었을텐데 라는 아쉬움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바시르와 왈츠를을 감명깊게 본 관객이라면 추천할만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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