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루시퍼는 닐 게이먼의 샌드맨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품이다. 샌드맨에서 지옥의 지배자인 루시퍼 모닝스타는 더이상 지옥을 지배하는 것을 그만두고 스스로의 날개를 잘라낸 뒤, 지상으로 기나긴 휴가를 떠나게 된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드라마 루시퍼와 닐 게이먼의 샌드맨이 서로 연관되어 있는 부분은 이 정도일 것이다:세계관도 맞닿아있지 않고, 케릭터도 새롭게 해석되어 있으며, 샌드맨과 같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지옥의 지배자가 지상으로 휴가를 나온다면?' 이라는 짧고 굵직한 발상에서 시작한 루시퍼는 나름의 매력을 갖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먼저 언급해둬야 하는 점은 수사물 장르로서의 루시퍼는 상당히 엉성하다는 점이다:이런 수사물들은 범죄에 얽혀있는 비밀을 인물들의 능력을 이용해 파해쳐 내려가면서 진실에 도달하는 과정이 중요한 장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루시퍼에서 범죄는 미스터리로 깊이가 있다고 할 수 없다. 각각의 범죄들에 숨겨져있는 이면이나 이를 풀어나가는 방식 자체가 상당히 거칠기 때문이다. 인물이나 단서가 여기저기 건너뛰기 떄문에 짜임새 있는 수수깨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모든 수사물의 범죄 해결법이 인물들의 능력(정통적인 추리든 초자연적인 능력이든)에 맞물려 있고, 그 능력이 인물들의 성격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한다:루시퍼의 경우에 그 능력이란 '타인의 욕망을 밝히는 것'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는 욕망의 흐름대로 진행되며, 그 욕망의 흐름에서 인물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루시퍼가 욕망과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동화되어가는지의 과정이 더 중요하게 초점을 맞추어진다.
드라마 내에서 욕망이라는 요소는 매우 중요한 테마로 작용하는데, 화려한 로스 엔젤레스의 클럽이나 파티 문화, 섹스와 마약 같은 자극적인 요소들이 드라마 곳곳에 깔려있고, 그러한 요소들의 중심에는 루시퍼라는 인물이 있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루시퍼라는 인물을 성경이나 기독교 문화에서 등장하는 절대악의 개념으로 접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루시퍼는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고 지옥의 지배자로 추방당했지만, 인간이 행하는 모든 악은 루시퍼나 악마들이 부추긴 것이 아닌 인간 스스로가 행한 것이라는 것이 루시퍼의 핵심 전제다. 대신 드라마는 반항아이자 욕망에 충실하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혐오하는 상처받은 인물로 루시퍼를 설정하였다.
드라마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루시퍼라는 인물을 성서가 아닌 이슈가 있는 가족에서 자라난 탕아로 묘사하고 있는 점이다. 분명 성서와 지옥이나 신화적인 세계들(창조주와 천사, 악마와 같은)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드라마 루시퍼는 이들이 '별개로 존재하는 규칙'에 얽메여있는 것이 아닌 '인간들과 유사한 문제들(아버지나 형제 문제 같은)'을 통해서 성서와 다양한 신화속의 이야기를 재해석한다.
그렇기 때문에 드라마의 핵심은 살인을 해결하는 것이 아닌, 루시퍼와 클로이 데커의 관계나 린다 박사와 정신과 상담 등의 변화 과정이다. 첫 시즌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마력이 통하지 않는 클로이 데커와 자기 위해서 노력하는 루시퍼가 점차 변화해서 자기 혐오와 이기적인 모습에서 벗어나고 주변 사람과 관계를 맺어나가는 과정은 매력적이다. 여기서 루시퍼 역을 맡은 톰 앨리스의 연기가 두드러지는데, 첫 시즌의 매력적인 조증 환자였던 루시퍼에서 점차 클로이 데커라는 인물에게 마음을 열고 나름 진중한 면모를 가진 인물이 되어가는 과정을 매력적으로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타인의 공포를 조종하고 루시퍼에게 콤플랙스를 심하게 가진 쌍둥이인 미카엘까지 연기폭이 상당히 넓게 잘 소화하였다.
결론적으로 루시퍼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나름의 매력을 갖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원작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의 기준에서 보자면 상당히 근본없는(?) 재해석이긴 하지만, 무난하게 아무 생각없이 볼만한 작품이다.
꺼져라, 꺼져라, 덧없는 촛불이여! 인생은 걸어다니는 그림자일 뿐. 무대에서 잠시 거들먹거리고 종종거리며 돌아다니지만 얼마 안 가 잊히고 마는 불행한 배우일 뿐. 인생은 백치가 떠드는 이야기와 같아 소리와 분노로 가득 차 있지만 결국엔 아무 의미도 없도다.
-맥베스 5막 5장, 셰익스피어
개인적으로 드라마라는 대중 문화 장르에 대한 감상평은 꺼리는 편이다.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유기적인 짜임새를 유지하는 것이 어려운 작품이다:초기에 짜여진 콘셉트와 각본들은 해가 바뀌고 이야기가 진행되면 폐기되고 변질되기 십상이고, 배우들의 계약 문제와 인기로 인한 급작스러운 종영과 원치 않게 늘어나는 이야기 분량들 등등은 이야기의 구심점을 흐트려뜨리고 하나의 '작품'으로 구성되게 만드는 것을 방해한다. 하지만 드라마라는 장르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핵심적인 테마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욕망'일 것이다. 사람들은 드라마를 통해서 자신의 욕망이 관철되기를,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욕망의 해소와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를 희망한다. 아무리 이야기가 망가지고, 배우가 바뀌고, 갑작스러운 종영을 맞이하게 되더라도 드라마라는 대중 문화 장르가 나름의 일관성과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브레이킹 배드는 본인을 놀라게 만든 드라마였다. 일반적인 드라마들은 이야기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이야기가 너무 커져서 어딘가 나사가 하나씩 빠지거나, 원래 갖고 있었던 결함이 두드러지거나 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 하지만 브레이킹 배드는 시즌 1에서 시즌 5까지의 모든 이야기가 일관된 테마와 주제(욕망과 도덕)를 갖고 있고, 더 나아가서 이야기와 사건의 흐름에 따라서 인물들의 변화가 유기적으로 이루어지기 떄문이다.
브레이킹 배드는 여러 의미에서 프란시스 코폴라의 '대부'와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범죄와 가족, 도덕, 관계의 파국 등등의 테마를 두 작품은 서로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눈여겨 봐야할 점은 두 작품의 공통점이 아니라 '차이점'일 것이다.
대부의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왕국의 흥망성쇠와 맥을 같이 한다. 어떻게 왕이 왕위에 등극하였는지(대부 1편), 왕국을 지켜냈는지(대부 2편), 그리고 후계자에게 왕위를 물러주었는지(대부 3편)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대부의 서사다. 그리고 대부의 이야기에서 가족은 중의적 의미(실제의 가족과 범죄 조직으로서의 패밀리, 가족)를 띄고 있기 때문에, 영화 속 가정사(결혼식, 문제를 일으키는 형제, 별거, 세례식 등)는 이야기의 외연과 내연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로 인해 대부는 가족의 이야기인 동시에 거대한 고전 서사의 일부가 된다:원치 않게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은 아들의 이야기는 급작스럽게 왕위를 이어받은 왕자의 이야기로 이어지며,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가족에게 상처입히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인생사에서 접하는 이야기의 연장선이자 왕위를 지키기 위한 폭군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대부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이유는 사람이 살면서 접하는 삶의 변곡점들이 범죄와 도덕이라는 테마 아래 고전적인 서사와 결합하여 유기적이고 복합적인 서사를 구축하는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레이킹 배드는 범죄와 도덕, 가족이 함께 결합되었기는 했지만 그것이 거대한 서사의 일부(범죄 왕국의 운영)가 아니라 그것들이 어떻게 변화하는가에 초점이 잡혀있다. 대부에서 마이클이 아버지의 자리를 원치않았지만 억지로 떠맡고 그 과정에서 서서히 도덕적으로 망가져갔다면, 브레이킹 배드에서 월터는 전적으로 자신의 욕망에 따라 나락으로 떨어진다. 브레이킹 배드의 이야기는 그 욕망이 어떻게 더 거대해지고, 더 많은 거짓말을 만들어내고, 모든 것을 망가뜨려가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연결고리를 통해서 알레고리와 연결되어 있던 대부와 달리, 브레이킹 배드의 욕망들은 전적으로 '현실적'이다:브레이킹 배드는 월터가 가족을 위해 돈을 남겨주기 위해 시작되었고, 매 시즌마다 그 욕망이 구체적인 숫자(자식의 대학 자금, 가족의 병원비, 차의 구매 등등)으로 거대해진다. 브레이킹 배드의 이야기가 일견 허무맹랑한 흐름처럼 보일지라도, 사람들에게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이 모든 것들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손에 잡힐만한 욕망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욕망에 따라서 마주하는 도덕적 딜레마들도 마약과 범죄라는 소재를 때어놓고 본다면 일상생활에서 접할만한 이야기들이다.
흥미로운 점은 브레이킹 배드의 월터가 대부의 마이클과 서로 대척점에 놓여있다는 점이다. 월터는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보이지만, 가장 중요한 동인이 욕망에 놓여있고 가장 중요한 순간에 충동적으로 행동(예를 들자면, 제시를 구하기 위해 거스의 부하 마약상 둘을 차로 받아버리고 쏴죽인다던가)함으로써 일을 더 꼬이게 만든다. 거스가 월터를 평가하였듯이, 그는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지만 치밀하지 못하다. 오히려 20년 동안 마약 제국을 운영해왔고 스스로를 절제하며 살아온 거스가 대부의 마이클에 가깝다 할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거스가 죽는 순간이 그의 억눌러온 '욕망'-자신의 친구를 죽인 자에 대한 복수-이 가장 두드러진 순간이란 것이다)
이런 점에서 브레이킹 배드와 대부는 셰익스피어의 비극인 맥베스와 리어왕에 맞닿아있다. 둘다 비극이지만, 그 비극의 스케일과 초점이 다르다. 리어왕은 가족으로 인해서 고통 받고 파멸한다는 점에서 대부의 프로토타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브레이킹 배드는 관계망에 의해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욕망에 의해서 광기에 빠지고 파멸한다는 점에서 맥베스에 맞닿아있다:맥베스는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인간이었지만, 제왕의 능력을 지니지 못했고, 왕이 되고자하는 스스로의 욕망에 짓눌려서 비극을 만들어내었다.
브레이킹 배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월터 화이트를 이해해야 한다. 월터라는 인물은 욕망이라는 동인에 의해서 움직이는 인물이다. 하지만 월터는 단순히 죽음의 앞에서 돈이 급해서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다. 월터의 욕망은 가족에게 무언가를 남기고자 하고, 가족에게 무언가(존경받는 아버지, 좋은 동서, 좋은 남편 등)가 되고자 하고, 무엇보다 잘 하는 것을 하며 최고가 되고자 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 모든 것들은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월터 화이트 본인의 관점에서 관철되는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욕망들이다. 거스가 죽은 후, 스카일러에게 월터가 정상적인 가족을 요구하는 모습들이나 자신의 계획을 위해 어린아이에게 독을 먹이는 모습 등은 월터라는 인물의 이기적이고 잔인함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하지만 월터 화이트가 이기적인 욕망을 내려놓을 때가 종종 있는데, 이 때는 조력자인 제시 핑크맨과 밀접하게 연관이 있다. 자신의 제자이자 동업자인 제시 핑크맨은 월터 화이트의 악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위기의 순간에 서로를 돕지만, 이들의 관계는 점점 나락으로 빠진다. 흥미로운 점은 제시가 생각하는 월터와의 관계, 월터가 생각하는 제시와의 관계는 서로 결이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제시를 월터가 이용한다는 점은 전제는 공통이다. 하지만 월터가 자신을 단순하게 조종하고 착취한다고 생각하는 제시와 달리, 월터는 제시와의 관계에서 유사 부자 관계를 느낀다. 그러나 가족에게 자신의 범죄를 숨겨야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나 잘하는 것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월터는 제시와의 관계를 더 특별하게 생각한다.
월터와 제시의 관계는 일종의 '나르시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월터는 자신의 특기를 살리는 모습, 성공해서 돈을 버는 모습, 생존하기 위해 동고동락 모습 등등의 다양한 모습을 제시에게 투영하기 때문에 자신의 관점에서 제시에게 최선을 선택하여 제시를 조종하려 한다. 하지만 제시가 자신의 예측과 다른 형태로 행동하면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특히 마지막 시즌에서 제시가 행크와 협력해서 월터를 몰아붙이는 걸 알아채는 부분), 가족과의 관계보다 월터와 제시의 관계가 더 깊은 무언가가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브레이킹 배드가 훌륭한 점은 이야기의 흐름 속에 중산층이 맞딱뜨리는 일상적인 장면들과 엮어서 영상을 잘 만들었다는 것이다. 일견 무의미해보이는 도입부의 영상들이 그 화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주요한 소재라는 점, 그리고 현란하거나 자극적인 요소들 없이 극을 끌어가는 점에서 높게 평가할만하다. 이러한 강점이 두드러지는 부분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못느끼고 공허함을 느끼는 제시의 방탕한 삶을 파티 문화나 게임, 음악 등의 다양한 대중문화와 교차하여 직조하는 부분이다. 단순히 피상적인 인용이 아닌 피폐해져가는 인물들의 심리와 대중문화를 엮어내는 장면에서 브레이킹 배드는 서사 뿐만 아니라 영상과 연출 측면에서도 높은 성취를 이루었다.
결론적으로 브레이킹 배드는 드라마라는 매체에서 얻을 수 있는 높은 성취를 이룬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시즌 5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를 하나의 짜임새 있는 모양새로 드라마를 만든 것도 충분히 대단한 성과라 할 수 있지만, 그 짜임새가 범죄와 도덕, 중산층, 대중문화, 사회의 흐름을 모두 함께 엮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을만하다. 그렇기에 브레이킹 배드는 드라마를 본다면 꼭 봐야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영화의 도입부, 영화는 무수히 많은 전쟁들과 어린이 피해자들에 대한 통계를 담담하게 읊는다. 이를 통해 영화는 전쟁이라는 폭력을 가하는 어른, 그리고 그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피해자 어린이라는 도식적인 구도를 구축한다. 이 구도는 익숙한 클리셰이자 대중문화나 이야기를 넘어서 현대 사회의 도덕율을 관통하는 구도다. 그 도덕율이란 먼저 온 자들이 뒤에 올 세대들을 보호하고 더 나은 길로 나아갈 수 있게끔 배려하는 것이다. 이 도덕율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새로 사회로 들어온 자들이 사회를 채울 수 없을 것이고 사회는 점차 말라 시들어 죽을 수 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도덕적 딜레마가 현대적인 것이기도 하다:상대적으로 영아 생존율이 낮고, 노동하는 청장년 계층이 나이 어린 세대원보다 더 중시되는 근대 이전 시대에는 이러한 도덕율과 감수성이 일반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살기 어려운 시대라도 '부녀자'를 쉽게 죽이는 관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린이를 손쉽게 살육하는 것에 대해서 어느정도 거부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좀 더 정확하게 짚자면 아녀자를 죽이는 대신 노예로 삼는 일이 더 흔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의료기술의 발전과 수명의 연장, 생산력의 증대 등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게 되면서, 이러한 어린이라는 약자를 보호하는 도덕율이 틀을 갖추고 당위성을 강하게 갖게 된 것도 사실이다.
누가 어린이를 죽일 수 있는가는 위와 같은 현대적인 도덕율과 딜레마(실제로 어른 세대가 젊은 세대를 피해자로 만드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는 좀비물이라는 장르를 따르고 있다: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라는 전설적인 영화 이후, 많은 수의 좀비물들(모든 좀비물은 아니다, 몇몇 좀비물들에서 대중이 등장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은 산업 사회와 도시 문명의 도래 이후 등장한 '대중과 군중'에 대한 공포를 스펙타클로 다루었다. 대상화된 대중이자 주인공과 관객들로부터 유리된 존재인 좀비들은 그야말로 낯선 사회와 세상의 종말 그 자체다. 그리고 여기에서부터 모든 좀비물은 좀비(=대중과 현대사회)에 대한 각기 다른 해석을 가미하면서 다양한 맥락을 쌓아올려왔다.
영화는 이 좀비와 군중을 '어린이'로 채워넣으면서 좀비물 장르에 도덕적 딜레마를 뒤섞는다. 어린이 좀비의 존재는 더이상 내가 아닌 대중에 대한 공포가 아닌 '도덕적 딜레마 그 자체'가 된다. 미래세대, 사회의 희망, 그리고 약자 등등, 어린이를 죽이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상당한 터부이며, 심지어 몇몇 대중문화권에서는 자극적이라 여겨 쉽게 다루지 않는 요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누가 아이를 죽일 수 있는가? 라는 영화가 시작하는 지점은 그러한 현대적인 도덕율과 아이 살해의 터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현실 그 자체'다:이미 영화의 도입부에서 언급했듯이, 무수히 많은 전쟁들과 사회의 붕괴는 사회적인 약자인 어린이 피해자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즉, 누가 아이를 죽일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이미 아동살해라는 끔찍한 상태를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런 끔찍한 전제에서 출발하기에 영화는 '순수한 아이들이 충분히 도덕적이지 못한 어른을 심판하는' 소설과 영화 등의 클리셰를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직접적으로 에리히 케스트너가 쓴 동물들의 대회의나 5월 35일 같은 작품이나 좀 더 더 폭을 넓게 본다면 미하엘 엔더의 모모 같은 작품들이 이러한 클리셰를 따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초반에서 어른들의 악행의 가장 큰 피해자가 어린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처럼, 영화는 일견 피해자가 가해자를 심판하는 이야기로 보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절망은 그런 클리셰를 넘어 더 깊고 어두운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어린이들이 공동체를 구성하여 어른을 죽이는 괴현상에 대한 '트리거'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몇몇 추측과 감염에 대한 묘사, 마지막 엔딩의 대사를 통해서 우리는 그 원인을 유추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이러한 클리셰의 결론과 영화의 내용들이 대치된다는 것이다:피해자가 가해자를 심판하는 이러한 구도의 작품들은 결국 어린이들이 어른을 심판하는 동시에 용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이러한 작품들은 새로운 세대가 어른 세대를 용서하고 함께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희망'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어린이가 어른을 죽이는 시퀸스를 구성하는 히스테리컬한 컷과 신경을 긁는 음향 연출, 그 사실에 좌절하는 주인공의 절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어린이를 죽일 수 없는 주인공의 딜레마를 다루는 연출까지 영화는 그 어떠한 안전장치 없이 헐리웃에서 제작된 공포영화보다도 더욱 더 사람을 몰아붙이며, 심지어 마지막에는 그 모든 희망의 가능성조차 버리게 만든다.
이러한 극단적인 절망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깔려있다. 영화는 스페인 군부독재 말기에 제작되었고, 군부 독재와 억압에 대한 깊은 절망감이 영화에 깊이 깔려있다 할 수 있다. 영화 자체는 그러한 사회적 함의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이 절망감은 당시 스페인 영화계에 깔려있는 깊고도 강렬한 감정이었다. 대표적인 예는 스페인 시절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들일 것이다:종교는 자본가와 결탁하여 카드놀이나 하고, 성체는 모욕당하며, 희망은 없고 파시스트들이 데모하는 사람들을 쏴죽인다. 영화에는 이러한 것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당시 스페인 군부의 검열이 심했기 때문이다), 이 뜬금없는 좌절감과 절망감들은 극을 일반적인 장르 안전장치 바깥으로까지 밀어붙이는 동력이 된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한 절망감을 그저 감정에서 끝내지 않고 논리적인 구조로 안착시킨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전화 교환원의 죽음을 다루는 시퀸스일 것이다. 이 시퀸스는 교회라는 공간을 죽은 여자의 옷을 들고 춤을 추는 소녀들 - 시신을 성희롱하는 소년들 - 고해성사를 흉내내는 어린이들로 3등분한다. 영화 내내 보여지는 긴장감 넘치는 구조와 다르게 묘한 맥락을 가지는 이 장면은 추악한 인간의 행동을 초현실적으로 축약하는 부분이다. 교회라는 성스러운 장소 아래서 살해한 타인의 재물을 갈취하고(소녀들), 성에 대한 추잡한 욕망을 드러내며(소년들), 그것을 고해성사하여 퉁치는 모습(고해성사를 흉내내는 아이들)을 통해서 그들이 하는 행동 자체가 어른들이 하는 행동들, 인간 만마전의 축소판이라는 것을 논리적으로 구성한다.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에 어른을 살해하는 어린이의 입을 빌려서 이 모든 것이 '놀이'라고 이야기한다:놀이는 실제가 아니지만, 그 실제를 모방하는 사회적 행동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실제'를 모방한단 말인가? 그것은 바로 폭력 사용하는 어른들로부터 말이다. 영화는 어른과 아이의 관계가 일반적인 가해자-피해자의 이분법적인 구도가 아닌, 어른의 폭력이 아이의 폭력으로 대물림되는 구조라고 이야기한다. 사람을 죽고 죽이는 것을 즐기는 세대의 순환고리라 이야기하는 영화의 절망감은 많은 공포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밑바닥이 없는 절망감이다.
이러한 절망의 논리구조 아래서, 영화는 전개 내내 이렇게 빠져나갈 수 없는 절망감과 광기로 인물들을 몰아붙인다. 마치 '이래도 선(아동 살해)을 안넘을래?', '선을 넘어도 답이 있을거 같아?' 식으로 이야기를 몰아붙이는 영화는 많은 대중문화의 금기들을 뛰어넘는다. 주인공을 자신을 죽이려 하는 아이를 쏴죽이고, 주인공의 아내는 자신의 태아에 의해서 내부에서부터 내장이 찢겨져 나가 죽으며,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주인공은 변해버린 아이들을 향해서 기관총을 난사하고 자신만 살아남겠다고 달려나가고, 변해버린 아이들과 싸우며 절규하다 경찰의 총에 맞아죽는다. 이 모든 과정들에서 드러나는 절망감과 긴장감은 그 어떠한 희망도 없는 깊은 절망감이다.
결론적으로 누가 아이를 죽일 수 있는가는 정말로 훌륭한 호러영화라 할 수 있다.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공포를 넘어서 '절망감'을 사회적 도덕률과 터부를 이용해서 훌륭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호러 영화를 좋아하고 기회가 된다면 꼭 볼 것을 추천하는 바이다.
괴물 영화에서 괴물의 본질은 그로테스크함이다. 그리고 그 그로테스크함은 인간이 갖고 있는 어두운 속성과 맞닿아 있다. H.R.기거가 디자인하고 리들리 스콧이 감독한 에이리언의 제노모프가 성기와 삽입, 섹스, 생명의 재창조에 대한 기괴한 은유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 기괴한 은유는 필연적으로 고전적인 괴물에서 찾아볼 수 없는 현대적인 에너지의 폭발에 기반한다. 고전적인 괴물이 동물과 인간을 섞거나 동물을 재해석함으로써 동물이 갖고 있는 특수성에 주목하였다면, 현대 영화 매체의 괴물들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산업화되고 재생산된 기괴함,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욕망과 공포에 주목한다.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두 영화, 그들Them!(1954)과 그것은 살아있다It's Alive(1974)이다. 20년의 텀을 두고 세상에 나온 괴물 영화는 서로 다른 공포(방사능 오염과 유전자 변이에 대한 공포 vs 탈리도마이드와 기형 임신, 중산층의 사회적 위신을 둘러싼 불안과 공포)가 각각의 괴물(거대화된 거미와 살인 괴물 아기)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구현되었다. 서로 소재와 내용, 연출 톤에도 불구하고 이 두 영화는 클라이맥스에서 LA의 하수도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묘한 접점을 갖는다. 마치 거대한 도시의 아래 구불구불 꼬여 있는 내장과도 같은 하수도를 해매며, 두 영화에서 인물들은 가장 내밀한 공포와 마주한다.
먼저 그들Them!(1954)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영화는 명백히도 원자력 시대의 도래에 대한 공포를 드러낸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이 공포를 다루는 방식일 것이다. 핵실험이 있었던 뉴 맥시코의 사막에서 대서양으로, 그리고 LA의 하수도에 도착하기 까지, 영화는 논리적인 흐름과 판단에 따라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영화 내내 인물들은 감정이나 공포에 휘둘리지 않는다. 거대 개미를 추적하는 과정은 합리적인 추론이며, 정부는 핵실험의 실수를 숨기는데 전전긍긍하기 보다는 대중에게 정확하고 확실한 정보를 전달하며 계엄령을 통해서 질서를 유지하고자 한다.
일반적인 공포 영화에서 공포의 대상이 괴물 그 자체였다면, 영화 그들에서 공포의 대상은 거대 개미가 아닌 다른 무언가이다. LA 하수도에서 마지막 여왕 개미의 알집을 태우면서 그들은 핵실험의 영향이 얼마나 클지, 어째서 개미만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되묻는다. 거대한 개미가 나올 수 있다면, 거대한 전갈도, 아니면 다른 이상한 무언가도 등장할 수 있다. 그렇다면 거대한 개미는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다. 즉, 영화에서 근본적인 공포는 마지막 박사의 표현대로 바로 새로운 시대인 원자력 시대에 대한 공포이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대처하더라도, 무엇이 일어날지 모르는 시대가 도래했다. 불타는 여왕 개미의 알집을 바라보는 인물들의 표정은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의 표정이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시대에 어떤 재앙이 올지 모르는 사람들의 막연한 절망감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그에 반해서 그것은 살아있다It's Alive는 좀 더 내밀하지만 사회적인 공포에 주목한다. 임산부 입덧을 막기 위해서 산모들이 먹었던 탈리도마이드가 기형아를 만들어냈었던 사건에 모티브를 얻은 영화는 무엇하나 부러울 것 없는 부유한 중산층 가정이 살인 기형아를 낳았을 때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가에 주목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살인 기형아를 둘러싼 이야기가 개개인의 드라마가 아닌 사회적인 욕망이라는 것이다:살인 기형아를 낳은 아버지는 자신의 사회적 위신을 생각해 기형아가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고 극구 부정하며 심지어 자신의 자식인 기형아를 직접 자기손으로 죽이려 한다. 중산층이 소비하는 다양한 약물을 만드는 제약회사는 기형아 아이가 자신들의 약물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게 밝혀지는게 두려워 살인 기형아를 완전히 박살내버릴 것을 경찰 반장에게 은밀하게 제안하기도 한다. 결국 살인 기형아라는 사건을 둘러싸고 다양한 사회적 욕망들이 충돌한다.
그것은 살아있다에서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과정 자체를 마치 사실을 다루는 듯한 '다큐멘터리'의 문법으로 다룬다는 점이다. 영화는 극적인 연출과 감정을 고조할만한 이야기와 극의 장치들을 최대한 억누른다. 그 결과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고요하지만 그 속에서는 휘몰아치는 다양한 사회적 욕망들의 소용돌이다. 객관적으로 연출되는 이들의 욕망은 관객에게 이입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그들과 달리 그것은 살아있다는 영화가 더 차분한 동시에 끓어오른다.
그러나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기형아의 아버지는 LA 하수도의 어둠 속에서 자신의 자식에게 자신의 사회적 위치 때문에 하지 못했었던 내밀한 고백을 한다. 기형아 역시도 자신의 가족이라는 것을 인정한 아버지는 자신의 자식을 안고 자식을 죽이려는 경찰을 피해 배배꼬인 하수도 통로를 해맨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 솔직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빠져나갈 수 있는 곳은 없고, 자식은 경찰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영화는 이러한 일이 시애틀에서도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끝을 낸다. 기형아에 대한 두려함, 중산층의 사회적 지위와 허영을 둘러싼 공포가 단순히 그들만의 것이 아닌 당시 미국사회가 공유하던 것임을 암시하면서 말이다.
영화 그들과 그것은 살아있다는 서로 다른 욕망과 공포, 연출 방식을 통해서 각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흥미로운 점은 그서로 다른 이야기가 클라이맥스를 맞이하면서 LA 하수도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비슷한 결과를 맞이한다는 것이다. 그들에서 하수도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내는 여정의 종착지로, 그것이 살아있다에서 하수도는 사회적 위신과 욕망을 뒤로한채 괴물이 된 자신의 자식 앞에서 솔직해질 수 있는 공간이 된다. 그 어두운 공간에서 인물들은 공포의 본질과 대면한다. 마치 다양한 욕망이 꿈틀거리는 도시의 거대한 창자 속에서 말이다. 두 영화는 모두 그런 점에서 훌륭한 괴물영화라 할 수 있다. 괴물과 인간의 공포, 그리고 그 그로테스크함이라는 본질을 정확하게 궤뚫어 보고 있기 때문이다.
서부극에서 서부라는 공간은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존 포드의 서부극인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를 예로 들어보자: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에서 서부는 낭만과 자유가 넘치는 공간이 아닌, 법 바깥에서 착실한 사람들이 무법자들에게 고통받는 공간이다. 하지만 인디언에서부터 아프리카계 미국인까지, 모두에게 열려있는 기회의 땅, 새로운 공동체를 위한 공간이기도 하다. 이런 공간에서 사람들이 꿈꾸는 것은 새로운 공동체를 위한 울타리, 법을 만드는 일이다.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에서 서부라는 공간은 양가적인 감수성을 지닌다. 역사의 어둠도 존재하지만 그 어둠에 빛이 비추어지면서(마치 리버티 벨런스를 쏘는 그 장면이 다시 한번 재해석 되듯이) 새로운 맥락을 갖게 되는 것처럼, 다시 돌아갈 수 없지만 좋았던 그 때를 반추하는 것처럼 말이다.
서부라는 공간이 어떻게 비추어지는가는 창작자들의 해석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안소니 만과 같이 흥미로운 관점에서 접근하는 감독도 없었을 것이다. 안소니 만의 서부극에서 서부는 '미지의 공간'이다. 안소니 만의 영화에서 서부에서 모든 소문과 전설은 존재하지만, 그것을 직접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서부의 사나이Man of the West의 예를 보자. 여기서 주인공인 링크 존스는 처음 학교 선생을 구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의 돈을 모아서 떠나는 신뢰할만한 사람으로 나오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과거에 악랄한 토빈의 갱단원이었음이 밝혀진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진술로 모호하게 밝혀질 뿐이다:영화 내에서 그 어떠한 사실도 명확하게 확정짓지 않는다.
서부의 사나이의 모호성은 인물들의 진술과 실제 사이의 괴리에 기반한다:링크 존스를 살인자와 악당이라 주장하는 토빈의 진술과 링크 존스의 초반 묘사는 분명 상충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한 상충된 묘사 그 어느쪽에 무게를 실어주지 않는다. 정확하게는 링크 존스에 대한 직접적인 회상과 묘사를 완벽하게 거부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진술은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있는 회색 영역에 떨어지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토빈의 허황찬란한 은행강도 계획은 다 쓰러져가는 마을과 빈 금고로 거짓되었음을 드러내고, 토빈과 링크 존스의 마지막 결투는 장엄하기 최후라기 보다는 폐허 위에서 이루어지는 난투에 가깝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서 안소니 만은 서부극이라는 전설을 장엄하고 휘황찬란한 것이 아닌 진실과 이를 둘러싼 알 수 없는 공간으로서의 서부를 다룬다. 안소니 만의 서부극에서 주인공과 이야기들은 사건의 연속에 배치되어 있으며, 그 시작과 결과는 알 수 없다. 흥미로운 점은 진실과 공간, 그리고 시간의 흐름(좀 더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역사) 사이의 관계가 안소니 만 서부극에서는 계속해서 등장하는 테마였다는 것이다. 윈체스터 73의 사례를 보자. 이 서부극에서는 윈체스터 73이라는 명총이 다양한 소유주를 거치면서, 서부를 둘러싼 폭력의 역사와 그 속에서 도구가 갖는 의미를 보여주었다. 윈체스터 73의 클라이맥스는 린이 추적하던 자가 바로 자신의 아버지를 쏜 동생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일 것이다. 무법자의 폭력, 원주민과 기병대 간의 폭력, 그리고 마지막에는 아버지를 쏜 아들이라는 근원의 폭력까지,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도구인 윈체스터 73이라는 총기를 통해서 모든 것을 꿰뚫어 본다.
흥미로운 점은 윈체스터 73에서 이 윈체스터라는 총기가 겪는 일련의 사건이 안소니 만의 서부극의 특질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윈체스터라는 총기는 거대한 맥락의 연속에 놓여있으며, '전체와 분리해서 볼 수 없지만, 동시에 전체를 조망할 수 없는' 묘한 관점에 놓여있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서부의 사나이 같은 안소니 만의 서부극을 설명하는 주요한 기제라 볼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감상적인 로맨티시즘이 아닌, 약육강식의 비정함이 존재할 뿐이다. 다른 예인 머나먼 서부의 예를 보자. 여기서 주인공인 제프는 영화의 시작부터 살인죄로 고발되며, 일반적인 영화의 주인공 같이 도덕적으로 무결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법과 제도를 피해서, 서부에서 서부로 움직이며 돈을 버는 이 남자는 그 정체와 기원이 모호하다.
물론, 머나먼 서부는 그래도 윈체스터 73이나 서부의 사나이와 같은 서부 공간에 대한 비정한 시각에만 입각해서 바라보지는 않는다. 마을을 세워서 법의 태두리로부터 보호받고자 하는 마을 주민들의 모습은 리버티 존스를 쏜 사나이를 바라보는 시각과 유사하다. 법과 제도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악역 게넌 보안관과 이를 바라보는 제프와 여주인공의 모습은 법과 제도 바깥인 서부를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의 관점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악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다른 예들도 그러하듯이, 이러한 악을 처단하는 것이 머나먼 서부의 메인 플롯이다. 하지만 다른 서부극들과 안소니 만의 서부극이 결이 다른 부분이 있다면, 그 끝이 행복한 결말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부라는 거대한 공간 속에서, 이러한 사건은 그저 작은 사건에 불과하다. 그들의 끝이 행복할지, 아니면 또다른 불행으로 이어질지, 플롯은 명확하게 확답해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불확실성이 안소니 만 서부극을 구분짓는 또다른 특질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잊을 수 없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You can't forgive what you can't forget"
-Arcade Fire, Windowsill
할로윈 밤의 살아 있는 공포이자 레전드로 불리는 ‘마이클 마이어스’, 존재만으로 모든 것을 압도하는 그가 40년 전 그를 유일하게 기억하는 그녀 ‘로리 스트로드’와 다시 마주하게 되는데…(네이버 영화 소개)
할로윈 1978은 호러 영화에 있어서 슬래셔 하위 장르를 정의내린 작품이다. 흥미로운 점은 할로윈1978이 살인마를 소재로 다룬 첫번째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전에도 살인마를 다루는 공포 영화가 있었다. 그러나 할로윈1978이 특별한 이유는 살인마 공포라는 장르 자체의 문법을 확립한 데 있다. 살인마의 존재,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희생자들, 그리고 살인마와 주인공의 사투 등 할로윈은 슬래셔 장르 서사 요소들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살인마의 등장과 살해 장면, 섹스와 고어를 한 영화 아래 뒤섞는 것도 할로윈을 통해 확립되었다. 하지만 서사 요소나 연출보다도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카펜터가 카메라를 통해 바라보는 미국 중산층이었다. 조용하지만 어딘가 텅비어있고, 어른은 존재하지 않으며 청소년들이 방탕하게 섹스를 하는 모습을 통해 카펜터는 미국 중산층의 풍경을 마치 종말을 맞이한 폐허처럼 다루었다. 이런 성적 방종을 통해 드러나는 도덕의 붕괴, 기성세대를 대변하여 징벌하는 듯한 살인마, 살아남는 주인공의 순수함 같은 시선은 살인마와 희생자의 관계에 대한 장르적 표본이었다. 그리고 할로윈의 통찰 이후로, 수많은 영화들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러한 장르를 따라갔다. 과거를 넘어서 미래에 일어날 장르적 특색을 먼저 정리한 작품이 할로윈이었다.
할로윈1978의 영화적 의미 이외에도 영화는 상업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수많은 속편과 시리즈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몇몇 작품들을 제외하면 영화는 원본의 완성도를 따라가지 못하였고, 영화는 주기적으로 리부트를 반복하면서 설정을 뒤집고 과거의 영광을 되세김질 할 뿐이었다. 그리고 여기 할로윈 레저렉션(2018)이 등장하였다. 특이하게도 이 영화는 프랜차이즈가 걸어온 모든 역사를 부정하고 자신이 할로윈 1편 이후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직계혈통임을 자처하였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영화는 그만한 성공과 평단의 호응을 끌어냈다.
유념해야하는 점은 할로윈 레저렉션은 애시당초에 원작을 뛰어넘고자 하는 작품이 아니다. 영화의 큰 서사 구조인 '마이클의 탈출 - 살인 - 로리 스트로드와의 마지막 결전'은 이미 1978에 완성된 구조였다. 또한 영화의 많은 컷들과 소품의 배치, 이야기의 전개, 심지어 살인 방식까지 할로윈 프랜차이즈 전체에 근거를 두고 있다. 마치 더 씽2011과 같이 큰 구조와 컷 등을 가져오면서 그 속에다 감독 자신만의 영화적인 해석을 붙이는, 속된 말로 하면 팬메이드 무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씽 2011이 더 씽1982의 안주하여 프리퀼이란 지루한 아이디어에 사로잡혔다면, 할로윈 레저렉션은 원작에서 보지 못했었던 새로운 맥락과 인물들 사이의 관계성에 주목한다.
할로윈의 특이성은 모든 슬래셔 영화의 원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점에는 마이클 마이어스라는 인물이 있다. 요즘같이 살인마들에게 구구절절한 사연과 슈퍼스타나 가질법한 개성이 붙어서 따라다니는 시대에 마이클 마이어스라는 살인마는 대단히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할로윈1978에서 마이클 마이어스는 순수한 악이다. 그는 기원도 없다, 동기도 없다, 심지어 말조차도 하지 않는다. 하얀색 가면 밑에서 후욱 거리는 숨소리만 낼 뿐인 마이클 마이어스는 불가해하며 순수한 악의 존재를 그려낸다. 하지만 이렇게 '추상적인 악역'은 현실감이 없기 때문에 극에서 붕 뜨거나 난잡한 설정이 붙기 쉽다. 그러나 존 카펜터는 그러한 불가해한 악을 훌륭하게 스크린으로 옮겼다:어딘가 폐허를 연상시키는 미국 중산층 주택가의 어두운 그림자 처럼 스며들어간 마이클의 존재는 마치 처음부터 거기 존재했었던 것 같은 강력한 존재감을 과시한다. 그렇기에 '거기에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악'을 카메라 연출과 음악으로 잡아낸 존 카펜터는 순수한 악이란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화 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렇다면 레저렉션2018은 어떠한가? 큰 틀에서 레저렉션은 1978에 대한 데칼코나미다: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카메라 워크, 연출, 음악 사용(존 카펜터 본인이 직접 참여한) 등이 원작에 참조를 두고 있다. 하지만 2018은 여기에 '40년의 시간'이란 맥락을 배치한다. 그리고 영화는 영리하게도 '순수한 악으로부터 살아남은 피해자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라는 가해자-피해자의 관계성에 주목한다. 마이클 마이어스가 순수한 악이었다면, 그로부터 살아남은 로리 스트로드는 무엇이었을까? 과연 이 시대에 순수한 악이란 개념이 존재할 수 있을까? 영화는 변화한 시대상과 생존자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서사를 이끌어낸다.
먼저 주목할만한 부분은 '순수한 악이란 구시대적 발상'이라는 시대의 트렌드를 반영한 것이다:프로파일링과 과학적 수사의 발달로 인해, 우리는 살인마가 그저 순수한 악이나 공포가 아닌 뒤틀린 모티브를 가진 퇴행적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이제 살인마는 슈퍼스타인 것처럼 팬들을 갖고 있고 하나의 가십거리 처럼 소비된다.(첫 시퀸스에 등장하는 영국인 팟캐스트 방송자 둘을 보라) 마이클은 이제 평범한 고등학생 총기 난사범의 킬카운트도 못따라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째서 사틴 박사나 저널리스트들은 마이클에 매료될까. 그것은 바로 마이클이 순수한 악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모든 살인마는 동기를, 자신만의 수법을 갖고 있다. 하지만 마이클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자신을 대변하려 하지도 않고, 변호하려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거기 있고, 살인을 할 뿐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마이클의 살인 장면을 연출하는 방법일 것이다:영화는 슬래셔 영화에서 자주 보여지는 과장된 살인 방법이나 생존자의 사투같은 장면에 집착하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마이클이 어떻게 평범한 일상 속으로 들어가, 평범한 일상의 도구로 인간들을 참살하는가를 롱테이크로 다뤄내고 있다. 일상의 삶이 존재하는 동시에, 그 삶이 드리우는 그림자에 조용히 침입하여 삶을 파괴하는 마이클의 존재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악의 존재를 다룬다. 이런 점에서 2018년 버전은 1978의 종말론적인 풍경과는 다르지만, 일상에 자연스럽게 침투하는 모습을 드러낸 점에서 마이클의 무서움을 잘 다루었다.
그 다음으로 봐야하는 것은 생존자에 대한 재해석이다. 악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는 악에 메일 수 밖에 없다:악에 대한 공포, 그로 인해 파괴되는 삶. 악과 생존자는 강력한 인과관계로 묶여있다. 그렇기에 마이클은 로리 스트로드에게 집착할 수 밖에 없다. 로리는 마이클에게 있어서 완성시키지 못한 하나의 퍼즐 조각이다. 그 완성하지 못한 것에 대한 40년의 집착을, 순수하고 완벽한 악 그 자체를 보통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오직, 그 때 그 장소에 있었던 노인들만 이해할 뿐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순수한 악에 대한 두려움만 있는 것이 아니다. 타협할 수 없는 악이 있기에 그것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다. 악이 있다는 것을 목도한 로리 스트로드의 삶은 망가졌지만, 동시에 자신의 삶에 상흔을 남긴 마이클에 없애고자 한다. 희생자는 더이상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이 아니다. 악이 있다면, 그것은 파괴해야 한다. 구세대적인 이분법이지만, 1978년 할로윈과 2018년의 할로윈은 40년이란 시간의 간극을 통해서 이 당위성에 무게감을 실어주었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해방과 역전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악이 존재하더라도, 생존자는 더이상 무력하게 당하지 않는다. 생존자는 공포에 사로잡혀있지만, 동시에 사명감으로 함께 준비되었다. 최근 슬래셔 영화에서 피해자가 역으로 살인마를 떄려눕히는 경우가 왕왕 있다. 하지만 할로윈 2018는 무려 40년을 기다리고 준비해왔던 생존자의 복수극이다. 살인마가 언제 무력한 생존자를 덮칠 지를 보는 것이 아닌, 준비된 주인공과 살인마 사이의 팽팽한 긴장과 갈등을 할로윈 2018은 다루고 있다:마이클이 목을 조르면 로리는 산탄총으로 마이클의 손가락을 날려버리고, 붙잡히면 칼로 찌르는 등등 40년 전 똑같은 역할을 맡았던 배우들이(물론 마이클은 대역을 쓰긴 했지만, 진짜 마이클 역을 맡은 배우도 영화에 출현하긴 하였다) 다시 엎치락 뒤치락하는 장면들은 장르의 팬으로서 희열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최고의 절정은 로리가 시리즈의 역사를 그대로 마이클에게 되갚아 주는 클라이맥스 부분이다. 마이클과 로리가 싸우다가 로리가 창밖으로 떨어지고, 마이클이 한 눈을 판 사이 사라지는 장면은 할로윈1978의 엔딩 장면을 역할만 그대로 바꿔서 되갚은 것이다. 더 나아가 마이클의 뒤 그림자 속에 숨은 로리가 스팟라이트를 받으면서 튀어나오는 장면은 1978년 작품의 마이클 등장 장면을 역전한 것이다. 더이상 생존자가 무기력하게 당하고 생존 '당하는' 것이 아닌, 살아남는 것을 넘어서 악을 처단하는 도식을 만들어낸다. 과잉이긴 하지만 살인마가 살인을 벌이는 공간인 집에 대한 재해석도 눈에 띈다. 쇠창살 등으로 막혀있는 로리의 집은 마치 맹수인 살인마와 주인공을 한데 가둬놓는 우리cage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그것은 살인마를 유인하고 가둬서 끝장내기 위한 준비된 함정trap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모든 것은 살인마에게 되갚아주기 위한 것들이었다.
결론적으로 할로윈 레저렉션은 원작에 대한 존경과 함께, 40년의 간극을 자기만의 재해석으로 채워넣은 훌륭한 작품이다. 가장 아쉬운 점은 이 영화가 이걸로 끝나는 것이 아닌, 2편의 속편을 더 만들겠다는 영화사의 발표다. 할로윈 레저렉션은 그 자체로 완결된 영화였다. 거기다 새로운 무언가를 붙이는 건 사족이다. 하지만 사족이 붙더라도, 이 영화의 가치는 시간이 지나도 빛을 바라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한여름, 낮이 가장 긴 날 열리는 미드소마에 참석하게 된 친구들. 꽃길인 줄 알고 들어간 지옥길, 축제가 끝나기 전까지 절대 빠져나올 수 없다.(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영화 미드소마는 상당히 독특한 영화이다. 장르적인 구분을 내리자면 미드소마는 공포 영화다. 그러나 미드소마는 과연 무엇에 대한 공포영화인가? 라는 질문으로 들어간다면 이 영화는 오리무중에 빠지기 쉽게끔 되어 있다. 이교도 사회이자 단절된 사회인 호르가가 공포의 대상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단순하게 이교도들의 사회를 다룬다는 측면에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닌, 주인공인 대니가 겪었던 사건과 대니 주변 인물들의 행동들, 그리고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영화가 내리는 결론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본다면 단순히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거나 깜짝 놀라게 만드는 공포 영화라고 쉽게 정의할 순 없다.
미드소마가 다루고자 하는 공포와 그 감정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영화가 직접적인 레퍼런스로 삼고 있는 위커맨(1973)을 먼저 다루어야 할 것이다. 멀리 떨어진 변방의 섬에서 사라진 소녀를 찾기 위해서 분투하는 경찰관이 결국은 인신공양의 제물로 간택되어 죽음을 맞이한다는 위커맨은 미드소마 뿐만 아니라 수많은 호러 영화들에게 영감을 준 작품이다. 위커맨의 이야기 구도는 올바른 주인공과 사악한 이교도 사이의 알력으로 극적 긴장감을 조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인공인 경찰관은 경찰 제복을 입고 1970년대 관점에서도 캐캐묵은 도덕관념과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그에 대비한 사이비 종교도 사람을 제물로 바치긴 하지만 나름의 논리와 정당성을 갖추었다. 위커맨의 서사 구조를 단순한 선악의 대결로 보기 힘든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위커맨의 핵심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제 3자 관점에서 바라본 문화의 기이함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것을 춤과 율동, 그리고 자유분방한 성관념을 통해서 드러낸다. 사람들이 원시 고대 종교가 갖고 있는 편견들(인신공양, 생명 잉태에 있어서 여성의 강조, 성에 대한 직접적인 은유 등)을 한 데 모은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악으로 둔갑시키지 않는다. 영화는 균형의 추로서 우리가 이입할 수 없는 보수적인 종교와 권위를 따르는 주인공을 설정함으로 어느 한쪽에 몰입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두 문화의 충돌을 목도하게 만든다.
위커맨의 서사가 '제 3자의 관점에서 본 두 문화의 충돌'이라면 미드소마 서사의 핵심은 '이질적인 두 문화의 결합'이다. 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위커맨의 서사가 제 3자적인 관점이었다면 미드소마의 서사는 전적으로 대니가 호르가라는 공동체에 어떻게 편입되는가를 다루는 내부인의 관점에서의 이야기다. 분명 위커맨에서 나타나는 두 문화의 충돌이 미드소마에서도 일정 정도 다루어지긴 하지만, 미드소마는 모든 이야기와 서사 구조, 상징들이 대니의 삶에 있어서 시련-방황-극복-공동체의 편입이라는 구조로 맞춰졌다. 어떻게 보면 미드소마는 구조적인 부분에서 위커맨을 차용하되(인신 공양을 하는 이교도에 대한 이야기), 핵심적인 부분에서 위커맨과 정반대로 서사를 전개하여(이입할 수 없는 주인공 vs 모든 서사 구조의 중심인 주인공) 레퍼런스를 뛰어넘고자 하는 야심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를 표현하기 위해서 미드소마는 종교적인 상징과 징조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일찍이 조셉 켐벨은 영웅 신화에 대해서 "인간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들(자식의 탄생, 성장, 부모로부터의 독립 등)을 상징화 한 것이 신화이다"라 했다. 미드소마는 비록 영웅 신화를 다루고 있진 않지만, 사람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순간들을 서사와 배경에 녹여냈다는 점에서 조셉 캠벨이 이야기한 구조로서의 신화를 따르고 있다. 영화는 첫 시퀸스에서 겨울의 호르가와 대니가 가족을 잃는 장면을 교차하여 보여준다. 이를 통해서 겨울과 죽음의 이미지를 교차시키고, 한 사람의 가장 어두운 순간을 호르가로의 여정으로 이어지는 필연성으로 이어나간다.
미드소마Midsommar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낯설지만, 사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24절기 중 해가 가장 오래 뜨는 '하지'다. 이러한 하지는 문화권에 따라 해가 가장 오래 떠있다는 점에서 생명이 가장 충만한 시기로도 묘사가 되는데, 첫 시퀸스가 대니 가족의 죽음에서 시작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는 의미심장하다. 영화는 죽음의 가장 어두운 시기에서 시작해 해가 가장 긴 시기에 맞이한 생명력이 넘치고 폭발하는 순간으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리고 이러한 계절적 변화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변화할 수 밖에 없는 흐름을 다루는 동시에, 필연적으로 대니가 어떤 식으로든 그 나름대로의 구원을 찾게 될 것이라고 암시한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가 이러한 생명의 폭발을 그로테스크한 장면들과 양식으로 다루었다는 것이다. 우선 영화에 나오는 다양한 벽화들이나 상징들이 등장하는 장면들은 양식 그 자체로서 그로테스크에 부합하기는 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단순히 양식으로서의 그로테스크를 넘어서 육체의 훼손과 절단이라는 고어를 통해서도 생명력의 폭발으로 그로테스크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생명의 주기가 끝난 노인들이 절벽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하는 장면이나 근친상간의 결실인 루벤의 존재, 피의 독수리를 당한 시체에 꽃을 꽂아두어 죽음과 생명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표현하는 장면 등은 이러한 그로테스크한 고어 장면들을 직접적으로 다룬다.
그로테스크한 것은 감각적으로 표상할 수 있는 것을 최고도로 고양시킨 것이다…이러한 의미에서 그로테스크한 형상물들은 동시에 한 시대의 넘쳐흐르는 기운의 표현이다….물론 그로테스크한 것의 원동력을 두고 보면 이와는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점이 있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퇴폐적인 시대나 병적인 두뇌를 가진 자들도 그로테스크한 형상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이 경우 그로테스크한 것은 퇴폐적 시대와 병적 개인들에게는 세계와 삶의 문제들이 해결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에 대한 충격적인 반작용의 표현이다…이 두경향 가운데 어느 경향이 창조적 추진력으로서의 그로테스크한 판타지의 배후에 있는가 하는 것은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에두아르트 푹스, 당조의 조형예술;발터 벤야민, 수집가이자 역사가 에두아르트 푹스에서 재인용.
아리 애스터는 이미 전작이자 데뷔작이었던 유전에서도 미니어처를 통해서 불길한 징조의 반복이라는 이미지를 구체화 시킨 적이 있다. 그리고 이번 작품 미드소마에서는 감독은 자신의 장기를 최대로 발휘하였다. 영화는 곳곳에 이미지와 상징을 촘촘하게 심어놨으며(심지어 영화의 첫 그림은 영화 시놉시스 전체의 요약이다), 이러한 영화 속 이미지와 상징들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이자 징조 그 자체다. 즉, 하지 축제 자체가 생명력의 과잉에 대한 상징인 것처럼, 영화는 이미지의 과잉을 통해서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불길함과 필연성을 배치하며, 단지 개별 장면의 그로테스크함을 넘어서 영화 자체가 그로테스크 양식 자체가 된다.
그리고 생명력의 과잉에는 필연적으로 생명이 소비하여야 하는 소비재, 먹이가 필요하다. 그 먹이는 바로 외부에서 데려온 '죽어 마땅한 산 재물들'이다. 영화의 전반에 등장하는 외부자들은 영화 이야기와 호르가 공동체 관점에서 죽어야 하는 당위를 가지고 있다:마크는 섹스를 밝히면서 마을의 신성한 나무에 오줌을 갈기는 불경을 저질렀고, 조쉬는 학사 논문을 핑계로 마을의 경전을 도둑질하려 하였다. 잉마르가 데려온 커플 역시 호르가 공동체의 규범을 이해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기에 죽음에 대한 당위를 얻었다.
이 외부자들에게 있어서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현대문명의 개인주의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외부자들은 거대한 자연의 흐름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호르가 공동체와 대치된다. 영화의 초반 시퀸스에서 대니를 짐처럼 생각하고 해어지길 주저하는 크리스티안이 그러하고, 원치않게 대니를 스웨덴 여행에 동참시키면서 불만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크리스티안의 친구들도 그러하다. 이들을 다루는 영화의 시퀸스는 매우 '어색'하다. 무언가 서로 소통을 시도하고 있지만, 각자 자기 주장에 갇혀서 멤돌 뿐이다. 하지만 상대방에 대한 체면치례나 사회관계를 고려하여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못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크리스티안의 최후는 특별하다:그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서 겨울잠과 겨울의 기운을 대변하는 곰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화형을 당한다. 그는 마크나 조쉬과 같은 현대사회의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대변하지만, 흥미롭게도 극의 클라이맥스 부분에서는 주인공인 대니와 여성성의 대척점에 섰다. 이러한 점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이 크리스티안이 마을 공동체의 일원과 섹스를 하는 장면이다:기존 공포 영화 문법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 섹스 장면은 여성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점, 섹스와 같은 개인적이고 은밀한 행위조차도 개인의 것이 되지 못하는 점, 남성성의 거세 등등이 드러난다. 섯부른 판단일 수도 있겠지만, 영화는 현대문명을 남성성에 호르가와 같은 고립된 공동체를 여성성에 대입하고 있지 않은가 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결국은 펠레가 대니에게 물었던 '과연 그(크리스티안)가 너를 지탱해주느냐?'라는 물음에 대한 대니의 대답은 크리스티안으로 대변되는 현대사회와 개인주의를 버리고 호르가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니는 5월의 여왕으로서 세상의 중심에 서며, 크리스티안이 외도를 하였을 때의 충격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나눈다기 보다는 동기화하는')를 얻는다. 그렇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불타죽어가는 호르가 마을의 산 제물에 공감하며 통곡을 할 때, 대니 혼자서 미소 지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미드소마는 감독의 야심이 넘처나는 작품이다. 그리고 관객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도 충분히 있고 감독도 자신의 재량을 십분 발휘한다. 그러나 영화 자체가 과잉이 아니었나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 많은 상징들과 복선들을 영화 내에 우겨넣고 관객이 자연스럽게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무리다:영화 초반에 24절기를 암시하는 달의 그림을 넣은 장면이나 곰과 공주의 그림을 대니가 자고 있는 방에다 붙여 넣은 것, 호르가 마을에서 묵을 때 각 인물들의 마지막이 침대 머리맡에 태피스트리 형태로 새겨진 것, 바이킹 전통 처형 방식인 피의 독수리나, 조쉬의 발에 세겨진 도둑이라는 룬문자 등등. 영화는 하나의 세계를 완성하기 위해서 디테일에 집착하지만, 그러한 것들을 1회 감상으로 모두 찾아내는 건 어렵다. 물론 영화의 큰 틀에서의 구조가 관객들도 충분히 따라올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미드소마는 자칫 잘못하면 자기만 아는 이야기를 자기만 털어놓는 괴작이 될 뻔하였다.
즉, 미드소마는 관객이 받아들일 수 있는 영화 정보량의 임계치에 근접한 물건이다. 더 과하거나 이야기 구조를 비틀었으면 이 영화는 카드로 만들어진 집처럼 산산이 부서졌을 것이다. 미드소마는 공포영화를 사랑하는 팬들이나 특이한 영화를 좋아하는 영화광들에게 어필할만하며, 이후로도 계속 거론될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다. 그러나 만약, 아리 애스터가 미드소마의 성공에 취해 더 야심찬 영화를 만든다면, 그때는 이해 자체가 어려운 괴작이 될 가능성이 높다.
존 윅 시리즈는 코믹스 중심의 최근 트랜드(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같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영화다:원작도 없는 간결한 서사에, 오로지 액션만이 중심이 된 영화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 영화 리뷰 만화에서는 존 윅 시리즈를 '그 어떠한 주제의식 없이 존 윅이 사람을 몇명 쏴죽이는게 중요한 영화'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일견 이러한 평가는 옳은 것처럼 보인다:최근에 개봉한 3편인 파라벨럼도 "존 윅이 뉴욕에서 탈출함 - 존 윅이 최고 의회와의 중재를 위해 원로를 찾아감 - 친구인 윈스턴을 죽이기 위해 뉴욕으로 돌아옴 - 덤비는 모든 적들을 제거하지만 윈스턴에게 배신당하고 살아남음"이라는 4가지 사건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물론 그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액션씬(총격, 맨손 격투, 나이프 파이팅, 근접전 등등)들이 존재했지만 말이다. 이렇게 존 윅 시리즈는 1편에서부터 3편까지 짧은 시놉시스 내에서 반전이나 영화 특유의 주제의식 없이 러닝 타임 내내 액션으로 몰아붙이는 영화였다.
하지만 과연 존 윅 시리즈가 "아무런 내용없이" 액션으로 몰아붙이기만 하는 영화 시리즈였을까? 좋은 이야기들은 기본적으로 관객이 주인공에 자신을 대입하면서 이야기에 빠져드는 몰입의 요소를 갖는다. 존 윅이 그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다 죽이는 살인마였다면,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일어나는 모든 액션은 거북하고 불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존 윅이라는 케릭터가 움직이는 모티브에는 분명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런 점에서 모 영화 리뷰 만화의 평가는 존 윅 시리즈의 핵심을 빗겨나간 수박 겉햟기에 불과하다. 영화는 분명 존 윅이 어째서 그런 짓을 하는가? 에 대해서 관객들에게 잘 설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빗겨나간 채로 영화를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존 윅 1편은 흥미롭게도 10년 전에 나왔던 리암 니슨 주연의 영화 테이큰과 유사하다:둘 다 건드려서는 안되는 사람을 건드리면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주인공이 자신에게 고통을 준 악역들에게 몇 배에 상응하는 고통을 주는 것으로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존 윅과 테이큰이 주는 카타르시스의 핵심은 테이큰의 명대사 "(전혀 사적인 감정이 없다는 악역에게)나에겐 완전히 사적이야"로 축약할 수 있다:주인공들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하고, 개인적인 삶을 파괴하였던 무정한 세상과 잔인한 폭력에 대해서 몇배의 폭력으로 대응한다는 점에서 일반 대중도 공감할 수 있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한 것이다.
그러나 "건드려서는 안되는 주인공을 건드려서 좆되는 악역들"이라는 이야기에서 출발한 두 영화는 후속작이 나오면서 서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테이큰 시리즈는 "건드려서는 안되는 주인공의 딸을 건드려서 좆됨"(1편), "건드려서는 안되는 주인공의 전처와 딸을 건드려서 좆됨"(2편), "건드려서는 안되는 주인공의 전처를 죽여서 좆됨"(3편)이라는 반복되는 패턴을 보여주다가 대중들의 외면을 받고 몰락하게 되었다. 물론 3편이 나름대로의 반전을 설정하기는 했지만, 관객들이 테이큰 시리즈에 요구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존 윅 2편은 독특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확장하였다:1편은 존 윅이 자신의 개인적이고 사적인 생활의 파괴에서 비롯된 분노가 동인이었다면, 2편은 존 윅이 빠져나올 수 없는 공적인 세계(킬러들과 암흑가의 규칙들)에서 자신의 사적인 생활(죽은 아내와의 추억)을 지키고자 하는 싸움이었다. 이러한 공적인 세계 1편에서도 어느정도 드러나기는 했지만(암살자들의 성역인 콘티넨탈 호텔이나 암살자들의 화폐인 금화 같은), 그것을 전세계적인 규칙과 암살자들의 공적인 사회로 구축한 것은 2편의 공이 크다.
그렇다고 2편은 이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정 설명을 갖다 붙이지 않았다:관객이 아는 것은 존 윅이 산티노에서 빚을 졌다는 것, 그리고 그 빚은 존 윅이 산티노의 부탁을 들어주기 전까지는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원시적인 채무 관계이며, 채무라는 시스템을 기능케 하는 공동체와 규약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2편에서 관객들은 설정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 필요 없이, 1편에서 어렴풋이 보였던 암살자들의 사회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사회의 미니어처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존 윅의 세계는 무협 영화에서 등장하는 세계관과 비슷하다:둘 다 세상 안에 작은 미니어처의 형태로 구현되어 있고(암살자들의 세계와 강호), 그 내부에서의 규칙들은 현실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동시에 납득가능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존 윅 2편부터는 이러한 무협 영화에서의 강호라는 커뮤니티를 암흑가의 커뮤니티로 재해석하는 동시에(기술에 대한 존경, 주고 받는 예의와 격식 등), 서브컬처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범죄, 무협, 총격전 등의 클리세를 뒤섞는다. 존 윅 시리즈는 그야말로 전세계 액션 영화의 잡탕과도 같은 시리즈다. 이런 점에서 존 윅 시리즈는 고전적인 액션영화의 오마주인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 시리즈와도 맥이 닿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킬 빌이 B급 영화의 오마주를 통해서 일종의 예술영화(?)를 만들었다면, 존 윅 시리즈는 자신이 B급 영화라는 것을 전혀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존 윅 시리즈의 매력일 것이다.
2편이 공적인 생활과 사적인 자신 사이에서 정당한 복수(공적인 규약을 지켰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배신한 산티노를 쏴 죽인 것)를 선택하는 이야기였다면, 3편은 공적인 조율을 통해서 평화를 되찾고자 한다. 영화의 부재인 파라 벨럼Para Bellum은 4세기 경 쓰여진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의 군사학 논고에서 나온 유명한 격언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해라"(Si vis pacem, para bellum)에서 따온 것인 동시에 탄약 종류 중 가장 유명하고 많이 팔린 9mm 탄약의 규격을 뜻하는 중의적인 제목 선정이다. 여기서 존 윅은 전세계 암살자들을 적으로 돌렸지만, 자신의 복수가 정당한 것임을 알리고 자신의 사적인 삶(평화)을 되찾기 위해 공적인 권위(모로코에서 만나는 암살자 기원의 일족)에 호소한다. 영화는 제목에 전쟁을 준비해라Para Bellum고 하였지만, 평화를 원하면Si vis pacem이라는 전제를 숨기고 있는 셈이다.
전세계 암살자들을 적으로 돌린 상황에서도 평화를 원하는 존 윅이라는 케릭터는 단순하지만 분명한 매력을 가졌다. 필요하다면 권총, 산탄총, 저격총, 나이프, 몽둥이, 심지어는 연필로도 사람을 죽이는 냉혈한이지만 동시에 상대에 대한 예의와 격식을 끝까지 지키는 케릭터이기 때문이다. 서로 아는 킬러를 죽이지 않고 보내준다던가(1편), 격식을 지킨 친구를 마무리 일격을 가하지 않고 놓아준다던가(2편), 예의를 갖춰서 싸워준 상대를 죽이지 않는 등(3편) 걸어다니는 살인 기계에 인간미를 가미한 것이 존 윅이란 케릭터다. 그렇기에 존 윅은 "거칠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신사답지 않으면 살아갈 자격이 없다"라는 필립 말로의 경구가 들어맞는 인물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존 윅은 엄청난 고난을 경험한다. 많은 사람들은 존 윅 시리즈를 "택티컬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모든 것들을 갖다 붙인 영화" 또는 "짧은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사람을 죽이는 영화"로 본다. 물론 그것이 중요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3편을 본 지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존 윅은 "적들보다 존 윅이 더 처맞는 영화"다. 그리고 이것이 존 윅이라는 영화 시리즈의 정체성이자 존 윅이라는 인물의 정체성 그 자체다:자신의 사적인 삶들(아내와의 추억, 개, 친구 등등)을 지키기 위해서 세상의 온갖 고통과 역경을 겪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뚜기처럼 일어나 예의와 격식을 갖춰가며 상대를 쓰러뜨리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대단히 고전적인 헐리웃 액션 영화의 주인공이지만, 우리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공감할 수 있는 액션 영화의 주인공"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존 윅은 개 한마리와 자동차 한대로부터 시작된 영화였지만, 이제는 전세계를 적으로 돌려버린 한 남자에 대한 영화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관객에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왜냐면 모든 사람에게는 말도 안되는 사소한 것이지만 지키고 싶은 무언가가 있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세상 모두를 적으로 돌려도 상관 없다는 욕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존 윅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욕망을 잘 건드리고, 액션을 통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드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애니’는 일주일 전 돌아가신 엄마의 유령이 집에 나타나는 것을 느낀다. 애니가 엄마와 닮았다며 접근한 수상한 이웃 ‘조안’을 통해 엄마의 비밀을 발견하고, 자신이 엄마와 똑같은 일을 저질렀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애니의 엄마로부터 시작돼 아들 ‘피터’와 딸 ‘찰리’에게까지 이어진 저주의 실체가 정체를 드러내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그리스 비극의 핵심은 비범한 인물이 신들의 시기와 질투를 사 피할 수 없는 파멸을 맞이하는 것이다. 극 중에 나오는 아킬레우스의 파멸을 보라:그는 온갖 불길한 전조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나아갔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잃는 파국을 맞이한다. 하지만, 동시에 영화는 이러한 의문을 제기한다:만약 아킬레우스가 자신이 향해가는 파국의 결과를 알았다면, 혹은 그에게 더 많은 선택지가 주어졌더라면 그 비극은 과연 덜 비극적이었을까?
유전은 일반적은 호러영화와는 결이 다른 작품이다. 우선, 이 영화에는 호러 영화 장르 특유의 점프 스케어가 거의 없다. 영화는 차분하고 불길한 시선으로 한 가족이 어떻게 기이한 파멸을 맞이하는지를 다룰 뿐이다. 몇몇 관점에서 본다면, 유전은 공포 영화보다도 그리스 비극에 가까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가족들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불가해한 징조들을 목도하지만, 그것으로부터 맞서 싸우거나 도망치지 않으며 심지어 파멸을 스스로 실현(강령의식을 하는 등)한다. 오히려 공포 영화를 오랫동안 보아온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 가족들이 참으로 답답(?)하다고 느껴질 부분도 많다.
하지만 역으로 접근해보자:어째서 이 가족은 파멸에 도달하는가, 혹은 파멸에 도달할 수 밖에 없을까? 고대 그리스 비극의 핵심은 무엇을 해도 파멸할 수 밖에 없는 영웅의 운명(일리아드의 아킬레우스 같이)이었다. 그리고 유전에서 공포의 핵심은 점프 스케어로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파멸을 피할 수 없다'라는 메세지를 관객들에게 각인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메세지의 한 가운데는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있다.
애니가 처음 모임에서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관객들은 그녀의 가족사가 광기와 죽음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울증으로 굶어죽은 아버지, 해리감 정체 장애로 오랫동안 고통받다 죽은 어머니, 정신분열증으로 자살한 오빠, 기이한 행동을 하는 찰리와 몽유병을 겪는 자신까지, 자신의 가족 핏줄 속에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끔찍한 무언가가 기어다니는 인상을 준다. 정신병력이 환경과 유전의 영향을 강하게 받긴 하지만, 영화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그런 '과학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유전의 핵심은 불길한 이미지들이 서로 유추되어 파멸의 연쇄를 만들어낸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꿰뚫어보는 것은 '가족은 서로 닮는다'라는 오래된 명제가 숨어있다. 영화 유전에서 이 명제는 연역이나 귀납이 아닌, 유비추리(서로 비슷한 명제들을 통해서 비슷한 결론을 내리는)의 영역이다. 애니가 빠지는 가족의 내력에 대한 집착와 잃어버린 가족에 대한 행동들은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어머니가 찰리와 피터에게 했었던 것과 유사하다. 하지만 정신 질환을 앓는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애니는 남들에게 보이지 않지만 자신에게만 보이는 명백한 사건의 흐름을 볼 수 있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논리적인 개연성을 가진 서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 불길한 이미지들을 보여주면서 애니의 광기를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만든다.
애니의 광기는 그리스 비극과 분명하게 다르다:그리스 비극의 핵심은 영웅이 파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그렇듯이, 평범한 인간을 뛰어넘은 그가 아무리 발악하고 노력하더라도 자신의 어머니와 동침하게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유전에서 가족의 파멸에 집착하여 점점 미쳐가는 애니는 그렇지 않다. 그녀는 비범하지도 않고, 우리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다소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정도일 뿐이다. 바로 이 부분이 유전을 공포 영화로 만드는 부분이다:가족에 대한 집착과 주변 환경에서 보여지는 불길한 이미지와 징조들은 평범한 사람들도 주변에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평범한 것들이다. 마치 특별할 것 없는 모든 것들이 일상을 옥죄어오며 파괴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유전은 점프 스케어나 끔찍한 이미지 없이도 두려운 공포 영화가 될 수 있었다.
연출관점에서 본다면, 유전은 이를 독특한 카메라 연출을 통해서 이루어낸다:마치 정물을 다루는 듯한 카메라의 움직임은 영화 속의 세계를 불길한 시선으로 관조한다. 그리고 애니의 직업인 미니어처 조형사라는 점은 유전의 카메라 연출을 독특하게 변주시키는 요소로 작용한다. 무언가 불길한 일이 일어날 때마다, 동일한 상황으로 구성되어 있는 미니어처들을 카메라는 고요하게 관조하고 들여다본다. 마치 똑같은 일이 다시금 반복되고 일어난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영화는 극 내에 동일한 상황을 복제하여 이것이 단순한 장면이 아닌 불길한 서사의 일부인 것처럼 구성을 한다.
결론적으로 유전은 독특한 공포영화고, 단순하 불길함만으로 이야기와 공포를 이끌어나갈 수 있다는 것을 훌륭하게 보여준 사례라다. 공포 영화에 익숙치 않은 사람이라도, 이 영화를 충분히 즐길수 있고, 그리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끔찍한 유년기와 전쟁 트라우마로 늘 자살을 꿈꾸는 청부업자 ‘조’. 유력 인사들의 비밀스러운 뒷일을 해결해주며 고통으로 얼룩진 하루하루를 버텨내던 어느 날, 상원 의원의 딸 ‘니나’를 찾아 달라는 의뢰를 받고 소녀를 찾아내지만 납치사건에 연루된 거물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렇게 다시 사라진 소녀를 구하기 위해 나서는데… (영화 시놉시스)
린 램지의 영화 모번 켈러는 인상적인 시퀸스를 지니고 있다:집에 돌아온 주인공 모번 켈러는 집에 돌아오자 자살한 남자친구의 시신을 발견한다. 그의 유서와 소설을 확인한 주인공은 일상생활을 하다 불현듯 남자친구의 시신을 욕조에 넣고 톱으로 절단한다. 이때 '나는 당신에게 과하게 집착하고 있어요', 라는 내용의 가사가 나오면서 영화는 관객을 심란함과 혼란속으로 몰아넣는다. 왜 모번 켈러는 남자친구의 시신을 토막내는가. 그리고 이 뜬금없는 기괴한 음악 인용과 장면의 인용은 대체 어떤 의미인가. 이러한 모번 켈러의 도입 시퀸스는 린 램지의 영화 모두를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미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린 램지 감독의 신작이다. 위의 시놉시스에 적힌대로, 큰 이야기는 한때 유행하였던 테이큰이나 아저씨와 같은 액션 장르 영화 공식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실제 구성은 장르 영화적이지도 않고, 심지어는 영화에는 기승전결을 구성하는 최소한의 요건만을 남겨둔 채로 서사를 구성한다. 90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동안 영화는 크게 일곱 가지의 사건(조의 등장 - 상원의원의 의뢰 - 니나와의 만남과 구출 - 니나의 납치 - 주변 인물들의 죽음 - 주지사의 추격 - 니나의 재구출과 엔딩)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이 일곱가지의 사건들은 서사로써 밀접하게 이어져서 이야기를 구성하기 보다는 주인공인 조의 환영과 심리상태를 묘사하기 위한 일종의 방아쇠 역할을 한다. 또한 이는 린 램지가 모번 켈러 첫 시퀸스에서 보여주었던 장면과 상황을 구성하는 미학과 밀접하게 맞물린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를 구성하는 미학의 핵심은 영화적이다:산업화된 매체인 영화는 음악과 영상, 배우의 연기가 재조립을 통해서 구성된다. 벤야민이 예로 들었듯이, 몸싸움을 벌이다가 창문을 통해 도망가는 액션 시퀸스의 장면이 몸싸움-창문으로 뛰어내림이라는 시간적 순서에 따라서 촬영을 진행하는 것이 아닌 먼저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장면을 촬영한 후, 몸싸움 장면을 촬영한 후 이를 편집작업을 통해서 마치 '하나의 장면'처럼 연결시키는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영화라는 매체의 특징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속에서 이미지와 장면들은 꼭 같은 시공간에 얽메여있을 필요가 없다:때로는 편집 작업과 쇼트, 앵글 등을 통해 서사의 흐름이나 논리적 흐름을 뛰어넘어서 창작자의 맥락과 의도에 따라서 자유롭게 재조합될 수 있다. 그렇기에 영화 속에서 시공간은 서사라는 하나의 방향성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 컷의 편집과 삽입, 쇼트의 분절 등을 통해서 새로운 시공간으로 변화한다.
다시 모번 켈러의 장면으로 돌아와보자:어째서 주인공은 영화의 중반 뜬금없이 자살한 남자 친구의 시체를 욕조에서 토막내었을까. 이 장면은 서사라는 일방향적인 시공간의 흐름에서 접근한다면 불가해한 장면이다. 하지만 이 장면은 꼭 그래야한다는 당위성은 없지만, 동시에 모번 켈러라는 개인이 서사를 넘어서(남자친구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넘어서) 영화의 장면을 지배하는 강렬한 기괴함을 선사한다. 즉, 이 장면은 서사라는 흐름에서 벗어나면서 사건에 대한 개인의 인상/사건을 대하는 인물의 태도를 강력하게 드러낸다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장면에서 인물은 서사를 넘어서 영화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강렬한 무언가가 된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 역시도 동일한 미학이 적용된다. 이는 조의 어머니가 킬러들의 손에 죽은 뒤, 자신 나름대로 장례를 지내러 호수로 떠나 자살을 시도하는 조의 모습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일반적인 서사 구조였다면, 이러한 장례의 과정 자체가 극의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요소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서사라는 시공간의 흐름을 거부하고 개인의 이야기로 침잠하는 구조를 보여줌으로써, 이미지가 작품을 지배하는 구조를 구축한다. 즉, 이 작품에서 서사는 개인의 심리와 행동을 전개하기 위한 최소 당위에 불과하다. 모번 켈러가 그러했고, 이 작품이 그러했듯이 가장 중요하게 눈여겨 봐야할 점은 바로 조라는 인물의 심리 상태가 전체 영화의 미학을 어떻게 구성하는가이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폭력의 피해자들에 대한 영화다. 조는 영화 내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로부터 학대받았은 기억과 군인으로 복무했을 때의 경험들의 플래시백(컨테이너에 쌓인 시체들, 초코바 하나 떄문에 총맞고 죽은 어린아이가 일으키는 다리의 사후경직)으로 고통받는다. 그리고 영화는 이러한 플래시백을 환청과 환몽의 형태로 재구성한다. 그리고 환몽과 환청은 자기파괴의 이미지, 특히 질식의 이미지와 밀접하게 맞닿아있다:영화의 첫 시퀸스에서 조는 의뢰를 해결한 후, 침대에 누워서 비닐봉지를 뒤집어쓰고 자신을 스스로 질식시킨다. 질식 특유의 내부에서부터 타들어가는 고통은 어떻게 본다면 그가 겪고 있는 트라우마의 성질을 드러내는 부분이자, 동시에 '숨을 쉬고 싶다'라는 원초적인 욕망을 드러낸다. 그리고 환청과 환몽은 조가 숨을 쉬지 못하게끔 만드는 '물'과 같은 존재다:그는 스스로의 머릿속의 이미지속에 갇혀있는 존재이며, 끊임없이 자기를 파괴하고자 하는 충동에 질식당한다.
하지만 조라는 인물을 피해자가 가해자가 된다는 단순한 역할의 클리셰로 이어지진 않는다. 우선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폭력 영화의 테마를 취하면서도,장르 영화의 문법을 전혀 따르지 않는다:예를 들어, 조가 처음으로 니나를 매춘굴에서 구해내는 시퀸스를 보자. 이 시퀸스에서 린 램지는 CCTV의 화면들로 쇼트들로 구성하였고, 조가 경비원과 아동성애자를 죽이는 폭력의 과정을 삭제한 채 오로지 결과(쓰려져있는 사람들)만을 무미건조하게 담아내며, 카메라 역시 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닌 조를 무미건조하게 관찰하듯이 쇼트에서 쇼트로 이동하는(cctv에서 cctv로) 이어내어 마치 시공간 자체가 끊기고 날아가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런식으로 영화에서 폭력은 때로는 과정 없이 결과만(집에서 어머니를 살해한 두명의 암살자를 총으로 제압하는 과정이라던가), 혹은 그 결과조차도 삭제되어있는 경우(예를 들어 약속시간에 늦은 조력자를 조가 구타하는 장면)들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영화에서의 폭력이라는 테마가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오히려 영화에서 집중하는 것은 폭력의 원인과 과정이 아닌 '결과와 여진'이다.
조는 자신의 폭력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호텔방에서 부패경찰을 목졸라 죽일 장면에서도 그의 살인은 천장에 달린 거울에 비춰진 이미지 형태로 묘사되며,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별장의 인물들을 하나씩 제압할 때조차 폭력의 과정 묘사없이 분절된 컷들이 연결되고 반복되며 어지러이 흩어진다. 오히려 흥미로운 점은 폭력이 끝나고 난 뒤에 조가 취하는 태도일 것이다:예를 들어, 자신의 집에 침입한 암살자 중 한명에게 치명상을 입힌 조는 암살자에게 약을 먹이고 옆에 누워서 함께 노래를 흥얼거린다. 이 기괴한 장면에서 조는 이상하게도 암살자가 어머니를 죽였다는 사실보다도 폭력의 피해자로 죽어가는 암살자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기괴한 장면이 뜬금없다던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닌, 영화 전체의 미학에 맞물려 들어간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그렇다면 이미지화 되거나(CCTV나 거울상) 쇼트에서 잘려나간(클라이맥스에서 저택의 경호원들을 제거하는 시퀸스) 조의 폭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의 직업과 깊은 연관을 갖는다:그는 소아성애자들로부터 피해자들을 구하는 청부업자다. 그의 행위는 피해자를 구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하려는(어린 시절 무력하게 당했었던) 행위인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구원을 위해 휘두르는 폭력이 이미지화 되었다는 점은 그가 경험하는 환몽과 환청의 연장선상에서 보아야할 것이다. 즉, 그가 휘두르는 폭력은 그를 구원하는 것(피해자를 구하는 것)이 아닌 그의 환청과 환몽과 같이 그를 질식시키는 요인이 된다. 역설적이게도 그가 구원을 향해서 더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그는 더 끔찍한 악순환의 고리로 빠져들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현듯 폭력을 멈추고 자신이 죽인 피해자 옆에서 누워서 함께 노래를 부르고 손을 잡는 것은 어떻게 보면 조라는 인물의 동인(피해자를 구하고자 하는 것)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장면이다.
조가 니나를 구하려 하는 것 역시 자신의 트라우마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고 구원을 추구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그의 환청과 환시에서 뚜렷하게 얼굴을 가진 인물로 등장하는 사람들(어린 시절 조, 어머니, 그리고 니나)은 모두 폭력의 피해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그는 피해자인 니나를 구하는데 실패한다:니나는 이미 모든 일의 원흉인 주지사의 목을 면도날로 그어 죽였으며, 그녀 역시도 조와 같이 폭력이 남긴 트라우마에 갇혀버린 피해자가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조가 니나에게 괜찮다고 이야기한 것이 아닌, 니나가 조에게 괜찮다고 이야기를 한 점이다:그녀 역시도 조가 어째서 그렇게 필사적으로 자신을 따라왔는지 알고 있었다. 이 장면에서 폭력의 피해자로써 그들은 기묘한 유대감을 갖는다.
하지만 정작 주지사를 죽이고 폭력으로부터 해방되었음에도 그들이 가야할 목표는 없었으며, 니나는 조와 같은 인물(트라우마와 폭력의 순환)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에 무관심한 세계는 폭력의 피해자들을 없는 존재인냥 취급하며 행복하게 흘러갈 뿐이었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라는 제목의 선언은 폭력의 피해자들이 폭력의 경험에 갇혀서 살아갈 뿐이다. 그리고 조는 니나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식당에서 권총으로 자살하는 환상을 보게 된다:불현듯 터져나오는 총성과 흘러나오는 뇌수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행복하고 밝을 뿐이다. 이 순간 폭력의 피해자들은 스스로를 트라우마로부터 구해내는데 실패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니나가 자리로 돌아오고, 조에게 말을 건다:밖은 아름다우니, 어디론가 떠나자고. 그 순간 그들은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린다. 카메라에서 순식간에 사라짐으로써 피해자들은 그들 자신을 드디어 질식할 것 같은 세계와 트라우마의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폭력이라는 테마를 피해자의 관점에 맞추어 훌륭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여기에는 어떤 장르적 클리셰(폭력에 물든 순정 마초 같은)도 없고, 미화도 없다. 하지만 세부적인 디테일들과 쇼트의 구성, 개인화된 이미지들을 배치해둠으로써 영화는 피해자의 경험을 개인적이고 내밀한 것으로 만들되 동시에 관객 모두에게까지 전달하게끔 만든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영화 매체의 경험을 잘 다뤄낸 작품이며, 영화관에서 볼 기회가 있다면 꼭 보기를 추천한다.
덧. 번역이 매우 훌륭하다. 모번 켈러도 그러하고, 린 램지의 영화에서는 흘러나오는 노래의 가사가
장면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데, 번역가는 그런 부분들을 캐치해서 자막을 구성하였다.
덧2. 흥미롭게도 폭력의 가해자이자 원흉의 이미지를 상당히 추상적이지만 분명하게 구성하기도 하였다.
니나를 납치할 때 보여지는 부패 경찰의 뱃지, 암살자의 성조기 버튼, 그리고 노래 가사나 인형의 집을 건드리는 손의 존재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