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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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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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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재밌어 보이네요

(2연속 땜빵)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새 컴퓨터에서 때우는 땜빵!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하나의 작전, 서로 다른 목표 당신이 믿었던 정의가 파괴된다. 사상 최악의 마약 조직을 소탕하기 위해 미국 국경 무법지대에 모인 FBI요원 케이트(에밀리 블런트)와 CIA 소속의 작전 총 책임자 맷(조슈 브롤린), 그리고 작전의 컨설턴트로 투입된 정체불명의 남자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로).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극한 상황 속, 세 명의 요원들은 서로 다른 목표를 향해 움직인다. 숨쉬는 모든 순간이 위험한 이곳에서 이들의 작전은 성공할 수 있을까! (네이버 영화)


드니 빌뇌브란 감독이 갖고 있는 강점이란 무엇일까? 고작 두편의 영화(프리즈너스와 그을린 사랑)만을 본 본인이 그의 영화세계에 대해서 평가하는 것은 힘들겠지만, 본인은 조심스럽게 그의 영화에 있어서 핵심적인 부분은 고발하는 침묵이라 이야기하고 싶다. 그을린 사랑은 자칫 잘못하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무게있는 이야기와 별개로 선정적인 멜로드라마와 폭력의 이야기로 나아갈 수 있는 위험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드니 빌뇌브는 소재의 자극적인 부분을 이야기 외적인 부분인 카메라 워크와 미장센을 통해서 통제한다. 마치 세상을 관조하는 듯한 영화의 시선 속에서 선정적인 이야기들과 폭력은 마치 세상의 일부인 것처럼 조용해지고 얌전해진다. 하지만 그것이 거기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그을린 사랑의 충격적인 진실이 관객에게 묵직하게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은 관객이 그 존재를 은연중에 알아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을린 사랑이나 프리즈너스의 이야기는 그 충격적인 '진실'을 통해서 이야기가 역전되거나 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흔히 진실을 통해서 새로운 결론에 도달하는 영화 장르적 개념으로서의 '반전'과 다르게 그을린 사랑이나 프리즈너스의 이야기는 전적으로 '그렇게 도달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드니 빌뇌브의 영화 미학은 진실이란 이름의 반전을 이용하여 관객의 머리채를 잡아 젖히며 '이걸 봐, 이걸 보라고!'라고 강요하고 폭로하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관객은 그 진실로부터 도피하고자 한다. 프리즈너스의 두 주인공을 보자:아버지는 자식을 납치했다고 생각하는 범인을 고문하지만, 관객과 아버지는 그가 은연중에 범인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차라리 그가 범인이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그가 범인이 아니라 또다른 희생자라는 불편한 진실은 관객의 시야 내에 무거운 바위처럼 자리를 잡으며 관객에게 그 진실을 고발한다. 그리고 관객들이 아무리 고개를 돌리고 또 돌려도 그 진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그리고 관객이 진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영화는 클라이맥스로 향하며, 그 진실이 도달해야 하는 숙명적인 결론으로 치닫는다. 그렇기에 좀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드니 빌뇌브의 영화에 있어서 반전의 개념은 영화의 극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수용하는 관객애게서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그것은 바로 관객이 영화의 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인 것이다.

시카리오는 그런 의미에서 전적으로 드니 빌뇌브의 강점들이 살아있는 영화다. 영화의 이야기는 겉으로 보기에는 꾸준히 그 맥락을 이어오고 있는 마약을 둘러싼 르포 형태의 픽션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고, 실제로도 그 내용 자체도 장르적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마약을 없앨 수 없다면 통제하겠다는 맷의 극중 발언과 사상은 이미 다른 영화나 대중매체 등을 통해서 많이 묘사되었었고, 그 최대 수혜자가 미국이라고 미국을 은연중에 돌려까는 톰 클랜시 원작 해리슨 포드 주연의 긴급명령으로 이미 20년전에 나오기도 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시카리오에는 추악한 진실로부터 정의를 대변하는 유일한 대변자인 라이언 박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시카리오는 전적으로 진실 앞에서 무너지는 정의와 체제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시카리오는 그 불편한 진실,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외면되고 있는 마약과 관계된 이야기에 대한 고발이기도 하다.

시카리오의 재밌는 부분은 극중 주인공인 케이트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전원 '남자'라는 사실이다. 물론 CIA, FBI, 마약단속반, 국경수비대 등 같은 군과 치안에 관련된 종사자들이 남성적이고 마초적인 성격을 띄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시카리오에는 남성적-여성적인 이미지들이 극도로 거세되어 있다:마초적인 이야기나 로멘스 같은 것을 거세함으로써 영화에는 남자들만의 세계와 케이트라는 이방인이라는 추상적이지만 명확한 막을 구축한다. 이러한 성적인 이미지의 거세는 케이트 머서라는 인물을 '전문가'로 묘사하는 동시에 남자들의 세계에서 고립되어 고생하는 외부자의 이미지 양측으로 구축하게 된다. 그렇기에 시카리오는 어떤 의미에서 유능한 커리어 우먼의 분투기라 할 수 있는 제로 다크 서티의 분위기와 맞닿아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제로 다크 서티에서 마야가 그러한 외부적인 상황에 굴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관철시키고 끝내는 목적을 달성했던 것과 다르게, 시카리오에서의 케이트는 타협할 수 없는 상황들과 마주하게 된다. 

전적으로 성적인 의미를 거세하고 있는 시카리오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단 한 시퀸스에서는 이 섹스의 이미지가 명확하게 드러난다:맷의 페이스에 끌려다니는 상황에 지쳐버린 케이트는 동료의 소개로 남자 경찰과 원나잇 스탠드를 하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거기서 그녀는 자신이 원나잇을 하려는 남자가 부패에 연루되었음을 직감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증거를 본다. 케이트는 그를 제압하려 하지만 역으로 죽을 곤경에 처하게 되고,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알레한드로가 나타남으로서 살아나게 된다. 일견 극의 긴장감을 올리는 시퀸스처럼 보일 수 있지만, 흥미로운 점은 이 이전과 이 이후에서 일절 성적인 긴장감이나 남성-여성의 벽을 다루는 내용의 장면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 시퀸스조차도 성적인 긴장감이나 로맨틱, 반전 같은 자극적인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로멘틱한 분위기나 성적인 긴장감이 느껴진다기 보다는 우울함과 피로감의 끝에서 쉴 자리를 찾아 기대는 듯한 카메라의 부감과 관조함은 이 시퀸스의 흐름이 여타 대중문화에서 다루는 여성-남성의 관계나 섹스에서 빗겨 나가 있음을 드러낸다. 


왜 시카리오는 자극적으로 다뤄질 수 있는 섹스를 자극을 최대한 억누르는 방향으로 다뤄낸 걸까? 그것은 케이트가 '남성'과 관계를 맺는 행위 자체에서 오는 의미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일반적이고도 정상적인 섹스는 '상호합의' 하에서 서로 합을 맞추는 행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케이트가 이 시퀸스 전까지 처해있었던 상황은 불편함과 피로함의 연속이었다. 어떤 임무인지도 모르고 맷에게 끌려다니면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고, 법과 절차가 지켜지지 않는 일들을 경험한다. 하지만 그녀가 임무를 그만두지 않는 것은 표면상의 악을 몰아내는 것이 아닌 좀 더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싶기 때문이며, 케이트는 등을 돌려서 떠날 수 있었음에도 떠나지 않고 영문 모를 일들을 마주하며 남는다. 그러나 케이트가 마주하는 일들은 그녀를 피로하게 만들며, 동시에 상황과 타협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게 만든다. 그렇기에 '남자'와 섹스를 시도하는 것은 상황과 타협하는 맥락을 만들며, 전희의 도중에 부패의 증거를 보고 남자를 밀어내는 것은 가장 외롭고 피로한 순간조차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케이트의 의지를 드러내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렇게까지 케이트가 거부하고자 하는 현실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케이트와 맷이 처음 만나는 장면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오프닝 시퀸스에서 카르텔의 폭탄 테러로 FBI 에서 사상자가 나오는 끔찍한 사건의 대책 회의에서 맷은 조리를 신고 나왔다. 그것을 바라보는 케이트가 '당신은 대체 뭐하는 인간이냐'라는 표정으로 맷을 바라보자 맷은 능글맞게 자신을 소개한다. 맷이란 케릭터는 케이트와 다르게 이런 일들이 '익숙한' 인간이다:그렇기에 케이트의 끊임없는 거부와 항변에도 능글맞게 웃어넘기거나 귀찮아 할 뿐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그의 계획대로 진행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예측에서 한 치도 빗나가지 않듯이, 알레한드로는 충실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기에 케이트와 대립되는 맷과 남자들의 세계는 자신들만의 언어로 움직이는 세계이며, 케이트가 속한 일상의 법과 정의, 규칙의 경계이자 그 너머이다. 멕시코 후아레즈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폭력들은 항상 상존한다(잠깐 잠깐 삽입되어 들어오는 맥시코 경찰의 일상을 보자;아들과 함께 일상적이고 평화로운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의 침대 옆 의자에는 산탄총이 놓여있다.) 하지만 마약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면 통제해야한다는 맷의 표현처럼, 이 폭력들은 교묘하게 통제되어 있으며 세계의 일부로 통합되어 있다. 케이트가 저항하고고 좌절하는 영역은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상황인 동시에, 법과 규칙 너머의 세계다.  


영화는 이를 카메라워크와 풍경을 통해서 은연중에 프레임 안에 합치시킨다:미국-맥시코의 국경을 멀리서 잡아내는 부감의 풍경은 마치 하늘 아래서 일어나는 모든 폭력적인 사건들이 일상적이고 무심한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또한 미국과 맥시코의 경계를 다루는 카메라는 법과 무질서라는 이분법적으로 마치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것 같은 맥락을 깔아두며, 영화의 클라이맥스의 미장센으로 귀결되는 발판을 제공한다:영화의 마지막, 맷과 케이트는 국경을 오가는 카르텔의 땅굴을 확인하고, 이 곳을 급습한다. 해질 무렵 땅거미 속으로 무장한 델타포스 대원들과 CIA, FBI 요원들이 하나 둘 어둠속으로 조용히 가라앉는 모습은 영화가 어둠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진상, 세계를 움직이는 추악한 논리 속으로 들어감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 시퀸스에서 케이트는 두가지를 알게 된다:알레한드로가 맥시코 카르텔에 의해서 가족을 잃고 복수를 꾀하는 전직 검사였음을, 그리고 이 모든 작전이 마약을 제거하는 것이 아닌 통제하기 위함이었음을 말이다. 시카리오는 영화 전반에 부감의 카메라워크를 깔아두고 클라이맥스의 순간의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인물들을 통해서 관객이 법과 무질서, 그리고 그 상위의 통제하는 '힘'을 한 데로 어우르는데 성공한다.    


결국 모든 것은 CIA의 의도대로 흘러가게 되고, 케이트는 무기력하게 자신의 집에서 알레한드로의 협박 아래 이 모든 것이 합법적으로 행해졌다는 CIA의 서류에 사인하게 된다. 하지만 끝까지 무기력하게 끌려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케이트는 알레한드로에게 총을 겨눈다:모든 것이 끝난 상황에서 왜 그녀는 끝까지 알레한드로에게 총을 겨누며 저항하는 것일까? 그것은 알레한드로가 속한 남자들의 세계, 법과 무질서 양측을 모두 '통제'하는 세계에 대한 미약한 저항의 표현이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라도 절대로 타협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그리고 영화는 후아레즈로 카메라를 다시 돌린다:경찰인 아버지를 잃은 아들은 축구시합에 나가서 축구를 한다. 하지만, 총소리와 함께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고, 뒤를 돌아보게 된다. 폭력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닌 평화로운 일상 속에 알레고리처럼 침투되어 있으며, 싸워야 하는 것은 폭력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구축하는 논리와 알레고리, 그 논리를 돌리는 힘 그 자체라는 것이라는 걸 영화는 보여준다. 드니 빌뇌브의 시카리오는 그런 점에서 아름답고도 잔혹하며 흥미로운 영화라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악을 찾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이 악과 싸워야 해.

 하나의 악이 다른 악을 정당화하진 않아.


혹은 다른 악을 부정하지도 않지." 



-영원한 친구, 존 르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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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이후, 남들은 볼 수 없는 무언가 날 따라오기 시작했다! 19살 제이는 멋진 남자친구와 근사한 데이트를 한 그 날 이후, 누군가 자신을 따라다닌다는 섬뜩한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그녀를 더욱 불안에 떨게 한 것은 자신을 따라다니는 존재가 남들에겐 보이지 않는다는 것! 알 수 없는 정체는 언제 어디서나 제이 앞에 나타나 그녀의 일상을 서서히 옥죄어오고, 악몽보다 더한 공포와 불안감에 시달리는 제이. 이 기이한 저주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않으면 ‘그것’은 죽을 때까지 쫓아온다!(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팔로우는 겉으로 보기엔 전형적인 하이틴 호러 영화처럼 보인다:섹스를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집요하게 쫒아오는 초자연적인 존재와 이로 인해서 생기는 사건들의 이야기는 이미 존 카펜터의 할로윈 이후로 수도 없이 반복되고 변형된 이야기다. 하지만 팔로우가 독특한 부분은 전형성이 색다른 형태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감독은 팔로우를 제작할 때, 호러 만화인 '블랙홀'을 많이 참조하였다고 밝힌 적이 있다. 흥미로운 점은 크로넨버그와 B급 호러 영화 특유의 신체 변이에 초점을 맞춘 블랙홀과 팔로우 사이에는 큰 접점이 없어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10대들의 성과 불안, 섹스를 통해 전염되고 공유되는 불안과 감성을 다룬 블랙홀은 팔로우라는 작품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아주 중요한 열쇠다.


보통의 영화에서 섹스는 성적인 자극을 제공하는 관음증적인 코드로써 삽입되기 쉽다. 또한 이것을 피해가려는 수많은 창작자들도 스스로의 무의식과 관습, 습관에 내재되어 있는 관음증적인 시선이나 성적인 편견에 의해서 의도치 않게 이 편견을 재생산하기도 하였다. 엄밀하게 보자면, 섹스를 주요한 소재나 주제로 다루는 작품은 성적인 자극을 거세해야 하며 이는 섹스에 대한 창작자 자신의 확고한 자기 인식에 의해서 가능하다. 팔로우는 이 부분에서는 확실하게 성공하고 있다:팔로우에서 섹스는 성적인 자극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팔로우에서 섹스는 중요한 행위(그것을 옮기는)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어딘가 삭막하고 메말라있으며 불안하다는 감상을 지울 수 없다. 또한 섹스를 통해서 전염되는 '그것'의 존재는 작중에서 행해지는 모든 섹스를 어딘가 불안하고 위험하게 느껴지는 행위로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팔로우에서 나오는 섹스와 그것의 이미지는 '성병'을 은유한다고 볼 수 있을까? 그렇게도 볼 수 있다. 섹스를 통해서 전염되는 성병의 이미지는 이미 B급 호러 영화에서 자주 사용된 소재이기도 하다.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작품들에서 자주 사용되는 섹스를 통한 성병과 감염의 이미지는 섹스가 갖고 있는 파괴력과 힘을 드러내며 영화가 깊이 영향을 받은 블랙홀도 이러한 연장선상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팔로우의 특이점은 성병 특유의 끈적함이 배제되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팔로우에서 섹스를 통해서 전이되는 것은 성병 특유의 신체적이거나 내부적인 변화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바깥에서 오며, 뛰지는 않지만 감염자가 어디에 숨어있든 끝까지 따라오는 집요함과 정시성, 그러고 피할 수 없는 숙명론적인 분위기를 만드는데 집중한다. 


이러한 '그것'의 특징은 극중에서 주인공들은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계속해서 확인하고 불안에 떨게 만든다. 그것은 프레임 바깥에 있더라도 여전히 주인공을 향해서 오고 있다. 이 정시성과 숙명적인 분위기에 기반한 공포는 여지껏 호러 영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독특함을 보여준다. 보통의 호러 영화에서 유령이나 초자연적인 존재는 주인공과 관객을 놀래키기 위해서 연출된 타이밍에 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그것이 놀랍고 무섭게 느껴지더라도 그것의 리듬과 템포를 알면 쉽게 이에 적응할 수 있다. 하지만 팔로우의 그것은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속도가 느리기에 따돌릴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완벽하게 회피할 수 없으며 프레임 바깥에 있더라도 주인공을 향해서 일직선으로 성실하게 오고 있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갑자기 튀어나오는 유령에 놀라기 보다는 그것이 언제 주인공에게 도착할 것인지에 대한 불안감으로 각 시퀸스의 장면들을 세밀하게 살펴보게 된다. 이는 주인공이 공유하는 공포와 불안을 관객들도 공유한다는 것이다. 이 막연하지만 확실한 불안감과 죽음에의 공포는 팔로우를 청년들과 섹스를 소재로 한 호러영화 중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올려놓는다.


팔로우 특유의 이러한 분위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는 주인공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집단에서부터 분석을 시작함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영화 팔로우에서는 기이할 정도로 '어른'의 존재가 거세되어 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강력한 존재감을 과시할 뿐, 영화는 주인공과 그녀를 둘러싼 또래집단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이 또래집단은 보통의 하이틴 영화에서 등장하는 활발한 집단과는 다르다. 이들은 무언가 적극적으로 하거나 밝다기 보다는 어딘가 무기력하고 우울하게 누워있거나 각자의 할 일에 빠져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그들이 서로에 대한 이해심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주인공의 친구들은 주인공이 처한 황당한 상황(내 눈에만 보이는 존재가 나를 따라오면서 공격하는데, 이게 섹스로 옮겨간다)을 이해하면서 같이 상황을 해결하려 한다. 하지만 섹스를 통해서 전염되는 그것의 존재는 오로지 섹스를 통해서만 '시선'을 공유할 수 있다. 그래서 친구들은 조력자인 동시에 안타깝게도 방관자일 수 밖에 없다.


팔로우에서 섹스는 단순하게 쾌락을 찾는 행위 그 이상이 된다:섹스를 통해서 주인공은 주변사람과 자신의 공포와 불안을 공유하며 또래집단 내에서 은밀하게 오가는 성적인 욕망의 교차가 이루어지게 된다. 하지만 주인공과 그녀의 친구가 섹스를 함으로서 시선을 공유하는 동시에 섹스를 통해서 전염되는 그것의 존재는 역으로 새로운 불안감을 만들어낸다. 섹스는 유일하게 불안을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이긴 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점점 더 나락으로 밀어내는 행위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이 옮겨붙기 전에 주인공이 남자와 섹스를 하면서 했었던 소소한 이야기들이나 욕망들의 공유는 섹스가 갖고 있는 힘을 보여주며, 동시에 이후에 불안에 떨면서도 몸을 섞음으로서 시선을 공유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친구 그 이상의 관계로써 바라보는 세상을 공유하고자 하는 소통 행위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소통의 행위로써 섹스로 옮겨지는 그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영화는 이에 대한 뚜렷한 답을 던지지는 않지만, 동시에 이를 추론할 수 있는 정황증거들을 던져주고 있다. 주인공과 친구들은 클라이맥스 직전에 이런 이야기를 한다:주경계를 넘어서 박물관에 가는데 어른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과 그것이 정말로 별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정말 큰일 처럼 느껴진 어린 시절의 경험에 대해서 말이다. 또한 클라이맥스에 그것이 주인공 아버지의 모습으로 등장한 모습이나, 어른들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은 모습 등을 통해서 영화는 어른의 존재를 제거하는 동시에 어른의 이미지를 중요하게 차용한다. 즉, 섹스는 어떻게 보면 정말로 별거 아닌 삶의 일부 같은 행위지만, 젊은 세대의 무의식 속에서는 마치 어겨서는 안되는 금기로써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금기를 어김으로써 생겨난 죄의식과 불안감은 올곧게 금기를 어긴 행위자에게로 돌아온다. 그렇기에 '그것'은 정직하고 성실하게 금기를 어긴(섹스를 행한) 사람들을 쫒아온다. 그리고 이 뚜렷하지 않은 죄의식으로부터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은 공범을 늘림으로써 같은 세계와 시선을 공유하는 것 뿐이다. 영화의 마지막 죽였다고 생각한 그것의 존재가 주인공과 그녀의 남자친구를 뒤쫒아오는 모습을 통해서 이러한 명제를 공고하게 만든다.


영화 팔로우는 섹스라는 소재를 자극적이지 않게 다루면서도 그것의 본질에 깊숙하게 접근한 작품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의 존재가 만들어내는 불안을 효율적으로 사용함으로써, 프레임 내에 공포의 존재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주인공과 관객들이 그것일 지속적으로 인지하게 만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호러영화로써도, 하이틴 영화로써도, 그리고 섹스를 다룬 영화로써도 팔로우는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주는 좋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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얍얍 땜빵 얍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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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원래는 트위터에 쓰려다가 스포일러 때문에 일부러 블로그로 뺀 짧은 글입니다.


경성학교는 그야말로 괴이한 영화다:겉으로 보이는 영화의 문법은 호러로 보이지만, 정작 그 끝에는 특이하게도 SF의 문법이 지배하고 있다. 경성학교의 당혹스러운 부분은 바로 이 장르적인 괴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과연 폐쇄된 공간과 집단에서 생기는 일을 다룬 호러를 지향하는가, 영하의 황당한 결론처럼 SF를 지향한 것일까? 이 글에서 주장하는 것은 경성학교는 전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SF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영화의 전개나 마무리에 있어서 다소 아쉬운 부분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경성학교가 보여주는 SF의 세계는 단순하게 장난스러운 시도가 아닌 나름대로의 진지한 고찰과 고민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좀 더 마무리만 훌륭했었다면 경성학교는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독특한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학교란 공간은 전적으로 근대적인 공간이다:기본교육을 통해서 개개인의 신체와 정신에 국민이라는 표준을 삽입한다. 그렇기에 학교는 통제의 공간이자 훈육의 공간(이며, 동시에 '과학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극중 고립된 여자들만이 입학하는 요양 기숙사 학교라는 고립된 환경과 함께 훌륭한 황국 신민을 만들어내는 교육과 인체실험을 통해서 강인한 병사를 만들어내는 방법론이 서로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목적에 맞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정신과 육체에 동시에 작용한다는 점에서 경성학교가 취하고 있는 교육론은 충분히 SF 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이름, 호명 방식의 차이에 따라서 영화는 두 세계를 분류한다:일본식 이름을 통해서 교육받는 신체와 자아를 드러내며, 동시에 진짜 이름, 한국어 이름을 통성명함으로써 인간적인 관계를 드러낸다. 


경성학교에서 재밌는 점은 폐병의 알레고리를 뒤집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처음 학교에 왔을 때는 거동에도 무리가 있을 정도로 힘들었던 주인공은 전형적인 결핵, 폐병 환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신체 강화제를 투여받으면서 점점 적극적이고 자신감 있는 인간으로 변화하게 되는데, 영화의 마지막에는 적극적인 반격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전반적으로 영화가 갖고 있는 이런 저런 재밌는 부분들은 어디까지나 '재밌는' 부분에서 멈추었다고 생각한다:영화는 각각의 중요한 요소들을 영화 내에 끌어들이는데는 성공하였지만, 정작 하나로 합쳐놓고 보았을 때의 그 화합은 부분의 합에 못미친다는 느낌이다. 좀 더 다듬고 이야기를 전개시켰다면 경성학교는 분명 더 좋은 작품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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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습니다.


핵전쟁으로 멸망한 22세기. 얼마 남지 않은 물과 기름을 차지한 독재자 임모탄 조가 살아남은 인류를 지배한다. 한편, 아내와 딸을 잃고 살아남기 위해 사막을 떠돌던 맥스(톰 하디)는 임모탄의 부하들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끌려가고, 폭정에 반발한 사령관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는 인류 생존의 열쇠를 쥔 임모탄의 여인들을 탈취해 분노의 도로로 폭주한다. 이에 임모탄의 전사들과 신인류 눅스(니콜라스 홀트)는 맥스를 이끌고 퓨리오사의 뒤를 쫓는데... 


시대는 리메이크와 리부트를 요구하고 있다:한때 시대를 풍미했었던 대중문화 작품들은 다시 한번 시대적 해석을 통해서 재탄생되어서 그 질긴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 혹자는 이러한 경향이 이 시대가 갖고 있는 한계, 우리 시대가 갖고 있는 창의력의 고갈과 새로운 옛 것의 발견을 통해서 과거로 회귀하려는 흐름으로도 보기도 한다. 물론 그러한 해석이 맞을 수도 있거나, 틀릴 수도 있으며, 혹은 우리가 모르는 제 3의 요인의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점은 매드맥스:분노의 도로 역시 그러한 흐름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러한 흐름과 경향성을 재쳐두고 본다면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는 프랜차이즈의 전통을 충실하게 따르면서도 그 구태의연함이 갖고 있는 우직함이 현대에도 필요하다는 것을 충분히 주장하고 더 나아가 그 이상을 작품이다.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도록 하겠다:세상이 망한다는 것은 대체 어떤 것일까? 서브컬처 상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로 분류되는 수많은 작품들뿐만 아니라 장르를 뛰어넘어서 '종말'의 이미지는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해왔다. 수많은 창작자들이 '종말'이라는 테마에 매료되었던 것은 그 '종말'을 통해서 인간이 갖고 있었던 절망이나 희망을 드러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인간은 종말에 의해서 절망하고 미쳐가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종말로부터 새로운 희망이 생겨나기도 한다:인간을 옭아매고 있었던 가식적인 제도, 문화, 시스템 등을 무너뜨리고 0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모든 것이 종말한다면 과연 문자의미 그대로 0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는 그저 모든 것이 끝난 잿더미 위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순진한 희망을 가진것 뿐일까. 혹은 더 끔찍하게도,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신세계의 밑거름이 되는 종말의 잿더미는 존재하지 않고 그저 영원히 조금씩, 더 끔찍한 방향으로 망해버리는 것 아닐까. 예를 들어 이토 케이카쿠의 소설들(학살기관이나 하모니)을 보자:세상이 멸망할 것같은 사건이 일어나도, 인간들은 그 멸망과 종말에 적응해나간다. 그리고 그 종말을 마치 '일상적'인 것처럼 받아들인다. 혹은 J.G. 발라드의 소설을 보자:물에 빠진 세계에서 인간들은 종말에 도취되며 종말의 더위 속으로 녹아서 사라진다. 발라드의 멸망 3부작에서 종말은 새로운 변화의 시작이 아니다. 여기에서 종말은 인간에게 있어서 '융합'되는 것, 익숙해지는 개념에 가깝다. 즉, 어떻게 본다면 종말은 모든 것의 끝이나 새로운 시작이 아니다:종말은 그저 환경의 '변화'에 불과하다. 그리고 환경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적응'을 수반한다.


매드맥스:분노의 도로가 배경으로 삼고 있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세계도 그러하다:관객들이 마주하는 매드맥스의 세계는 의외로 '정상적'인 세계이다. 제한된 자원인 물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이를 통해 권력을 쥔 이모탄 조는 물을 자원으로 모든 것을 소유한다:자식들이자 병사들인 워보이나, 워보이를 생산하는 여성들인 브리더, 여성 모유를 착유해서 식량을 쥐고, 물을 자원으로 무기 농장의 무기나 가스 타운의 석유와 교역하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마치 정상적인 사회가 작동하는 것처럼, 이모탄 조가 지배하는 분노의 도로는 마치 '합리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기에 몇몇 사람들은 이모탄 조가 죽고 퓨리오사가 리더로 되는 것이 시터델의 필연적인 멸망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도 결론내리기도 하였다. 이모탄 조의 방법론은 '합리적'이고도 '논리적'으로 제한된 자원을 통제하는 것이며, 그리고 이는 인류의 '생존'이라는 '거시적'인 목표에 비추어 보았을 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는 잘못된 방식의 접근이다:멸망과 그에 대한 적응이라는 측면에서, 이모탄 조가 만들어낸 분노의 도로는 구세대의 절망, 아니 인류 역사 이래 계속되어 왔었던 절망을 새로운 환경에 맞게 적응 변화시킨 사회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이모탄 조의 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는 종말 이후 변화한 환경에 적응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가 아닌 구시대로부터 이어내려져 온 반복된 절망, 우리가 오랫동안 적응해왔었던 오래된 종말의 모습에 대한 것이다:빈부의 문제, 남자와 여자의 문제, 전쟁의 영광과 약탈의 문제 등등. 인간은 항상 이런 미친 것들에 적응해왔었다, 그리고 순종하였었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효율적인 세계의 종말 아래서 인간은 착실하게 '적응'이라는 이름으로 미쳐갔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의 세계는 그야말로 구시대적이며, 이러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특유 아래서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영화에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작품들 특유의 막나가는 살인, 방화, 약탈, 강간 등의 말초적인 행위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에 종말 이후 각자의 방식대로 미쳐버린, 아니 세상에 '적응'해버린 인간 군상들이 등장한다.


여기서 매드맥스:분노의 도로가 차용하고 있는 인간 군상에 대한 관점은 전적으로 패미니즘 담론이다:남성은 파괴하며, 여성은 생산한다. 어떻게 보면 이제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1980년대스러운 오래된 담론(패미니즘도 항상 변화하고 있다. 이 점을 숙지하여야 한다)을 영화는 천연덕스럽게 그대로 써먹고 있다. 메인빌런에서부터 거대한 가족을 이끄는 권위주의적인 가부장(이모탄 조), 사람을 잡아먹는 양복입은 식인종 자본가(피플 이터), 사람을 고문하기 좋아하는 폭력적인 무기상(무기농장 주인)을 설정해놓고, 그와 대칭되게 도망가는 자들을 '여성 브리더'로 설정해놓은 점에서부터 이미 철저하게 스테레오 타입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스테레오 타입은 오히려 영화를 단순하지만 강렬하게 만드는데 주요한 동력이 된다. 이전 칼럼에서도 지적하였듯이 매드맥스 시리즈의 이야기는 도로라는 공간과 함께 속도와 속력이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칼럼을 요약하자면 도로라는 공간 끝에 놓여있는 도착지, 그리고 그 곳을 향해서 나아가는 방향성이자 운동량인 속도가 매드맥스 시리즈 속의 케릭터들을 움직이는 주요한 동력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원화된 케릭터 군상들은 강력한 대비를 이루며 방향을 가진 운동을 완성한다:여성들로 구성된 브리더와 퓨리오사, 그리고 맥스는 시터델을 등을 진 체 희미한 희망을 쫒아 녹색의 땅을 향해서 정처없이 나아간다. 그리고 이들을 남자들로 구성된 파괴적인 악당들이 뒤쫒는다. 


영화의 케릭터 조형은 스테레오 타입에 따라 단순해진 대신에 '깊이'를 더한다. 깊이를 가진 다양한 케릭터들이 적재적소에서 빛을 발하기는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케릭터는 맥스와 퓨리오사일 것이다. 먼저 퓨리오사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기존의 대중문화에서도 싸우는 여전사의 이미지는 항상 존재해왔었다. 하지만, 많은 작품들이 싸우는 여전사를 다룰 때 '헐벗은 눈요깃거리'나 '모성성' 등의 스테레오 타입에 잡혀 있는 경우가 많았었다. 퓨리오사의 신선함은 그런 성적인 매력이나 여성의 스테레오 타입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 전통적인 '전사'의 이미지에 기초하고 있다. 퓨리오사는 영화의 처음에는 이모탄 조의 소유물을 빼돌려 그를 분노케하려 하지만, 녹색 땅에 가까워질수록 새로운 희망에 벅차오르다 좌절하는 등의 다양한 변화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녀를 움직이는 근원적인 동인 자체는 분노Fury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처음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은 인간을 향한 개인적인 분노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에 찬 밝은 불꽃같은 분노까지 그녀는 전적으로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 케릭터이다. 


재밌는 점은 몇몇 사람들이 퓨리오사를 받아들이는 방식이다:칸느 영화제 시사회 GV에서 기자는 '여자가 이렇게 분노해도 되나요?'라는 질문을 샤를리즈 테론에게 던졌다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밑도 끝도 없이 멍청한 질문을 영화/연예 기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람이 했다는 것이다. 도대체 여자가 분노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어디있단 말인가. 하지만 퓨리오사라는 케릭터가 갖는 특수성은 영화 내적인 것이 아닌 영화 외적인 것이다. 여지껏, 분노에 이끌려서 싸우고 투쟁하는 여성 케릭터는 흔치 않았다. 더욱이 삭발을 하고 한 팔을 잃은 채 눈가에 엔진오일을 바르는, 기존의 성적인 코드를 제거한 채 강렬한 인상을 주는 여성 케릭터 자체가 드물었던 것이다. 물론 퓨리오사의 케릭터 자체도 깊이가 있는 뛰어난 케릭터인 것도 한몫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맥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기존 시리즈에 등장한 멜 깁슨의 맥스는 정상적이고 능글맞은 마스크 밑에 폭발할 것 같은 광기를 숨기고 있는 케릭터였었다. 하지만 톰 하디의 맥스는 그와는 다르다:톰 하디의 맥스는 광기가 폭발할 거 같은 위험을 느끼기 보다는 어딘가 망가져버린 이미지, 전쟁통에 모든 걸 잃어버리고 전장을 떠도는 군견과도 같은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지켜야할 것도 잃어버린 채, 오로지 생존본능에 따라서 움직이는 톰 하디의 맥스는 환영이나 환청 등의 형태로 구현된 '죄의식'이라는 측면에서 멜 깁슨의 맥스와는 다른 차별성을 지닌다. 이것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맥스의 언어사용일 것이다. 톰 하디의 맥스는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단문이나 툴툴 거리는 목소리로만 의사소통을 한다. 언어를 잃어버린 듯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톰 하디의 맥스는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외톨이 같은 모습을 더욱 강화한다.


기존 시리즈의 맥스는 협상을 하는 솜씨 좋은 해결사의 이미지가 강했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기술을 판다. 그리고 자신의 생존에 득이 되지 않는 행위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유념해야 하는 점은 그가 자신의 생존의 측면에서 기술을 팔아먹고 사는 해결사 같은 인물이긴 하지만, 그것이 그가 공동체가 갖고 있는 방향성과 비전에 공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그는 항상 중요한 순간에 자신에게 득이 될 것 없는 '자원봉사'로 공동체를 위기에서 끌어낸다.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 더 나은 삶에 대한 믿음이 맥스 역시도 강하다. 다만 맥스는 그 자신이 공동체에 정착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영화의 마지막에 맥스는 항상 공동체를 뒤로한 채 도로 위에 남기를 선택한다. 그리고 매드맥스:분노의 도로의 맥스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왜 맥스는 항상 떠나는 공동체를 뒤로 한 채 도로 위에 남기를 선택하는가? 톰 하디의 맥스는 그것이 환영이나 환청의 형태로 등장하는 죄책감으로 묘사한다. 그의 실패로 인한 죄책감과 자신은 공동체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자학이 그를 언어를 잃어버리고 생존본능에 따라서 움직이는 인간형으로 만든다. 그렇기에 매드맥스:분노의 도로의 맥스는 전적으로 기존 시리즈에서 출발하였지만 새로운 방향성으로 재해석된 케릭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매드맥스:분노의 도로의 맥스가 다른 시리즈의 맥스와 차별화되고, 더욱 깊은 모습을 보여주는 부분은 바로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맥스가 사람들의 방향성을 '반전'시킨 것이다. 여지껏 시리즈에서 맥스는 공동체의 비전과 가능성에 조력하는 모습을 보여왔만 그 자신이 어딘가에 뛰어들어서 무언가를 바꾸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분노의 도로에서 맥스는 헛된 희망에 걸어서 실패하고 그로 인해 죄의식으로부터 도망쳐왔었던 경험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공동체에 조언을 한다:소금 사막 너머의 무의미한 희망에 걸지말고, 시터델을 점령하여 우직하게 정면으로 승부하라고. 그것은 맥스 자신이 과거에 하지 못했었던 것에 근거한 조언이다. 이 방향성의 반전과 함께 도망자들과 추적자들의 위치가 바뀌게 된다:이제 여지껏 도망자들을 압도한다고 생각했었던 이모탄 조와 그 일당들은 자신의 소유물들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하고, 반대로 도망자들은 헛된 희망이 아닌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처음으로 손에 쥐게 된다.


영화의 모든 액션씬들이 잘 짜여져서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이 클라이맥스의 추격씬은 그야말로 예술적이라 할 수 있다. 클라이맥스 이전의 러닝타임까지 도로는 도망의 공간이었으며, 어디론가 이어지는지도 모르는 정처없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방향성을 반전시킴으로써 도로는 이제 근거없는 희망의 공간이 아닌 새로운 출발을 위한 공간으로, 더 나아가 최후의 결전에 걸맞는 공간이 된다. 그리고 맥스는 클라이맥스 시작에서 영화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능동적인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죄의식과 마주하여 사람들을 이끈다. 혹자는 이 영화를 퓨리오사 일행과 이모탄 조 일당들의 싸움이고 맥스는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표현을 하기도 했지만, 단 한 번의 조언으로 맥스는 기존의 매드맥스 시리즈의 맥스 케릭터들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압도해버린다. 


하지만 퓨리오사의 시터델 점령이 성공한 이후, 맥스는 일행과 함께 남기를 선택하지 않고 다시 떠나기를 선택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게 하였지만, 정작 스스로를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이것이 끝이 아니다:조지 밀러 감독은 톰 하디와 함께 매드 맥스 시리즈를 3편 더 찍을 계획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3편의 매드맥스를 통해서 감독은 무엇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일까? 본인은 그것이 맥스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3부작에 걸쳐서 맥스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의 방황 끝에는 과연 무엇이 존재할까? 정착? 죽음? 구원? 본인은 맥스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결말은 아마도 희생이나 죽음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이 예정된 비극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신화에 있어서 영웅의 몰락은 예정된 결말의 일부이다. 그러나 맥스는 영웅이 아니다. 앞서 칼럼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매드맥스 시리즈는 '영웅은 아닌, 맥스라 불린 남자'의 이야기다. 그렇기에 본인은 매드맥스의 이야기를 '전설'이라고 생각한다: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내려져오는 사람, 문제를 해결하지만 스스로는 정착할 수 없는 슬픈 숙명을 가진 한 남자에 대한 전설. 그리고 그 전설은 우리에게 세상의 질서나 이상을 교육하는 신화가 줄 수 없는 무게를 준다. 사람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고뇌한 사람, 더 나은 세계를 꿈꾸었지만 정작 그 더 나은 세계를 위해서 사라질 수 밖에 없었던 사람에 대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는 그 무게와 교훈은 신화의 압도적이고도 어떤 의미에서는 비인간적인 세계에 대칭되며 사람의 손에 잡히는 인간적인 이야기가 된다. 그렇기에 본인은 만약 새로운 매드맥스 시리즈의 3부작이 마지막에 맥스가 죽는다면, 그 끝을 어느정도는 얼버무리듯이 끝났으면 좋겠다. 좋은 이야기들은 끝을 열어놓아서 사람들에게 계속 영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죽지 않았다면 그들은 오늘도 어디에선가 살아 있다”

-발터 벤야민, 이야기꾼: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작품에 대한 고찰.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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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지도 한 장을 들고 홀연히 할리우드에 나타난 미스터리 소녀 ‘애거서’. 그녀가 여배우의 매니저 일을 하기 위해 할리우드에 나타난 후 모든 이들과 실타래처럼 엮이면서 그들의 비밀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이번 배역만은 꼭 따내야 하는 위기의 여배우 ‘하바나’, 최고의 아역스타였지만 이제는 한물간 ‘벤지’와 그의 부모, 할리우드 스타를 꿈꾸는 렌트카 운전 기사 ‘제롬’. 그들과 ‘애거서’의 엉킨 이야기들이 하나씩 풀어지게 되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벤야민은 일찍이 기술복제 시대와 예술작품이라는 소논문을 통해서 영화의 가능성과 위험을 다룬 적이 있다. 거기서 그는 영화 제작 시스템, 특히 헐리웃 스타 시스템을 직접적으로 비판하였다. 영화의 가능성은 아우라의 거세를 통해서 수많은 대중이 작품을 즐길 수 있다는 것에 있다. 하지만 헐리웃 스타 시스템은 이러한 영화의 아우라 거세를 숨기고, 마치 배우에게 실제 아우라가 존재하는 것처럼 속여서 대중을 거짓된 환상에 사로잡히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지금까지도 적용되는 명제이다:벤야민이 주목한 영화의 계몽 가능성과 함께 배우에 대한 광적이며 물신적인 집착의 위협이 여전히 영화를 둘러싸고 팽팽한 길항 작용을 벌이고 있으니 말이다.

영화 맵 투 더 스타즈는 그러한 길항 작용에 대한 이야기다:헐리웃과 스타의 삶이라는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근친상간'이라는 키워드가 그것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과 근친상간이 내포할 수 밖에 없는 암울한 운명 사이의 파국이 불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구체화된다. 일찍이 B급 SF 호러에서부터 폭력과 섹스를 붓과 캔버스 삼고 새로운 영화 세계를 구축한 거장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신작인 맵 투 더 스타즈는 그의 필모그래피를 놓고 비교해 본다면 스파이더(근친상간을 주제로 한 영화)와 데인저러스 메소드(새로운 인간이기를 꿈꾸는) 사이의 어느 중간에 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기나긴 필모그래피에도 불구하고 헐리우드에 최초로 입성한 크로넨버그가 헐리웃을 바라보는 시선은 잔인하리만치 냉정하고 암울하다.

영화의 이야기는 크게 두 축을 두고 전개된다:한 쪽은 화재로 사망한 전설적인 여배우 어머니를 두고 그에 대한 컴플렉스에 시달리는 하바나, 다른 한쪽은 화상자국이 심하게 남은 애거서이다. 불이라는 이미지는 이 둘을 엮어주는 중요한 매게이다. 그리고 이 '불'의 이미지는 헐리우드가 갖고 있는 치명적인 매력(꿈의 실현)과 파괴 양 측면을 모두 드러낸다. 흥미로운 점은 이 둘이 '근친상간'이라는 이미지로 엮여있다는 것이다:하바나는 어머니를 '성적으로' 사랑했으며, 애거서는 어렸을 적 자신의 동생 벤지와 결혼식을 올리다가 화상을 얻었으며 부모 결혼의 비밀(근친상간에 의한)을 앎으로써 아름다운 근친상간이라는 이미지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근친상간의 이미지가 둘러싸고 있는 시놉시스의 뼈대는 바로 하바나 어머니가 출연한 전설적인 영화의 리메이크를 둘러싼 갈등을 형성한다. 이 리메이크라는 개념 자체도 어떤 의미에서는 '근친상간'적이라 할 수 있다:과거의 작품을 '과거의 이야기+현대의 배우, 방법론'으로 만들어냄으로서 과거의 산물인 현대의 영화 산업이 자기 부모와 결합하여 자신을 복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 리메이크라는 개념 자체가 갖고 있는 근친상간적인 함의가 현재의 영화 산업에 있어서는 대세적인 흐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21세기, 정확하게는 2010년대 전후로 들어오면서 유명한 과거 작품의 리메이크는 대중문화의 핫한 트랜드다. 우리는 이것을 다시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리부트'라고 칭하고 있다:하지만 이 리부트 열풍의 근간에는 과거의 이야기와 현재의 배우 그리고 각색을 첨가한다는 점에서 영화에 등장하는 근친상간적인 이미지가 다분히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면 왜 지금에 와서 리부트 열풍이 일어나는 것일까? 혹자는 21세기 인터넷으로 만들어진 대중 문화가 더이상 새로운 것을 꿈꾸지 못하고, 과거의 추억을 소비하는 아카이브적인 성격을 띄기 시작했다고 보기도 한다. 본인도 여기에 어느정도 동의한다. 하지만 좀 더 역사적인 관점에서 접근해보자:벤야민은 헐리웃 스타 시스템이나 영화산업이 배우에 대한 물신주의적 숭배를 낳고 이를 통해 유지된다고 보았다. 그러한 배우와 작품에 대한 물신주의적 숭배가 무너질 수 없는 하나의 '전설'을 만들어낸다면, 그 전설을 자가복제적으로 재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수익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근친상간적인 리부트는 헐리웃 스타 시스템이 만들어낸 필연적인 결과가 아닐까? 근친상간이라는 테마와 함께 이 영화의 제목, 스타를 향한 지도Map to the Stars에서도 드러나듯이 영화는 단순하게 헐리웃의 현재 관점에서의 자가복제적인 이미지의 재생산을 넘어서 대중문화의 역사 전반에 깔려있는 근친상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유념해야하는 점은 무조건적으로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애거서는 근친상간적인 결합 자체가 갖고 있는 아름다움의 이미지에 집착한다. 실제로도 영화 산업 이전에도, 인류는 과거의 이미지를 현재적인 관점에서 복제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왔다. 애거서가 그리스 신화를 인용하듯이 인류가 자신이 영향을 받고 시작했던 이미지와 결합하여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가 이런 자가복제적인 이미지를 근친상간의 형태로 표현한 것은 이미 '그 자체에 파국을 내포하고 있다'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다:일찍이 사드가 그의 저서에서 자동기계적인 육체와 섹스를 통해 보여주었듯이, 섹스는 그 자체에 어떠한 제한을 두지 않으면 스스로 극단적인 파멸로 치달을 수 밖에 없다. 영화는 이를 두가지 형태로 보여준다:첫번째는 애거서가 하바나를 죽이게 되는 계기 자체가 하바나와 제롬과의 섹스를 목격한 것이었으며, 두번째는 애거서와 벤지가 갖고 있는 환각으로 대표되는 정신병(근친상간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의 이미지이다. 이 두 이미지들은 근친상간이라는 형태가 자체가 파멸로 치달을 수 밖에 없다는 숙명론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에는 불에 대비되는 '물'의 이미지가 은연중에 깔려 있다:불로 대변되는 열정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물의 이미지는 은연중에 이 불과도 같은 결합이 파멸할 것을 암시한다. 욕조에서 물을 뒤집어쓴 채 등장하는 하바나의 어머니 환영, 수영장에서 익사한 배우의 아들, 수영장에서 나오는 죽은 아이들의 환영, 수영장 근처에서 분신하는 벤지와 애거서의 어머니(그리고 분신하기 전엔 욕조 안에 물을 받아놓고 홀로 흐느낀다) 등등. 영화는 불과 물의 대비를 통해서 자기 파괴적인 아름다운 불꽃과 차갑고 축축하며 기분나쁘게 끈적한 물의 정적인 이미지를 동치시킨다. 영화의 결말 역시 이러한 숙명에 의해서 애거서와 벤지,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파국을 맞이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치사량의 수면제를 먹고 별을 바라보며 별들을 바라보는 이들 남매의 결말은 근친상간적 자기 복제가 가져다 줄 파국 그 자체인 것이다.


크로넨버그의 최초 헐리웃 입성작인 맵 투 더 스타즈는 그야말로 헐리웃으로 대표되는 영화산업 및 대중문화에 대한 문제의식에 기초하고 있다. '니들은 죄다 근친상간범들이야!'라고 외치는 크로넨버그의 독기와 자신의 이미지를 내다버리는 혼신의 연기를 줄리안 무어의 연기는 이 영화를 빛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본인이 생각하는 크로넨버그 영화의 최대 걸작에는 못미치지만, 리부트 열풍이 부는 요즘같은 시대에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영화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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