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의 도입부, 영화는 무수히 많은 전쟁들과 어린이 피해자들에 대한 통계를 담담하게 읊는다. 이를 통해 영화는 전쟁이라는 폭력을 가하는 어른, 그리고 그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피해자 어린이라는 도식적인 구도를 구축한다. 이 구도는 익숙한 클리셰이자 대중문화나 이야기를 넘어서 현대 사회의 도덕율을 관통하는 구도다. 그 도덕율이란 먼저 온 자들이 뒤에 올 세대들을 보호하고 더 나은 길로 나아갈 수 있게끔 배려하는 것이다. 이 도덕율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새로 사회로 들어온 자들이 사회를 채울 수 없을 것이고 사회는 점차 말라 시들어 죽을 수 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도덕적 딜레마가 현대적인 것이기도 하다:상대적으로 영아 생존율이 낮고, 노동하는 청장년 계층이 나이 어린 세대원보다 더 중시되는 근대 이전 시대에는 이러한 도덕율과 감수성이 일반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살기 어려운 시대라도 '부녀자'를 쉽게 죽이는 관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린이를 손쉽게 살육하는 것에 대해서 어느정도 거부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좀 더 정확하게 짚자면 아녀자를 죽이는 대신 노예로 삼는 일이 더 흔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의료기술의 발전과 수명의 연장, 생산력의 증대 등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게 되면서, 이러한 어린이라는 약자를 보호하는 도덕율이 틀을 갖추고 당위성을 강하게 갖게 된 것도 사실이다.

 

누가 어린이를 죽일 수 있는가는 위와 같은 현대적인 도덕율과 딜레마(실제로 어른 세대가 젊은 세대를 피해자로 만드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는 좀비물이라는 장르를 따르고 있다: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라는 전설적인 영화 이후, 많은 수의 좀비물들(모든 좀비물은 아니다, 몇몇 좀비물들에서 대중이 등장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은 산업 사회와 도시 문명의 도래 이후 등장한 '대중과 군중'에 대한 공포를 스펙타클로 다루었다. 대상화된 대중이자 주인공과 관객들로부터 유리된 존재인 좀비들은 그야말로 낯선 사회와 세상의 종말 그 자체다. 그리고 여기에서부터 모든 좀비물은 좀비(=대중과 현대사회)에 대한 각기 다른 해석을 가미하면서 다양한 맥락을 쌓아올려왔다.

 

영화는 이 좀비와 군중을 '어린이'로 채워넣으면서 좀비물 장르에 도덕적 딜레마를 뒤섞는다. 어린이 좀비의 존재는 더이상 내가 아닌 대중에 대한 공포가 아닌 '도덕적 딜레마 그 자체'가 된다. 미래세대, 사회의 희망, 그리고 약자 등등, 어린이를 죽이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상당한 터부이며, 심지어 몇몇 대중문화권에서는 자극적이라 여겨 쉽게 다루지 않는 요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누가 아이를 죽일 수 있는가? 라는 영화가 시작하는 지점은 그러한 현대적인 도덕율과 아이 살해의 터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현실 그 자체'다:이미 영화의 도입부에서 언급했듯이, 무수히 많은 전쟁들과 사회의 붕괴는 사회적인 약자인 어린이 피해자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즉, 누가 아이를 죽일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이미 아동살해라는 끔찍한 상태를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런 끔찍한 전제에서 출발하기에 영화는 '순수한 아이들이 충분히 도덕적이지 못한 어른을 심판하는' 소설과 영화 등의 클리셰를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직접적으로 에리히 케스트너가 쓴 동물들의 대회의나 5월 35일 같은 작품이나 좀 더 더 폭을 넓게 본다면 미하엘 엔더의 모모 같은 작품들이 이러한 클리셰를 따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초반에서 어른들의 악행의 가장 큰 피해자가 어린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처럼, 영화는 일견 피해자가 가해자를 심판하는 이야기로 보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절망은 그런 클리셰를 넘어 더 깊고 어두운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어린이들이 공동체를 구성하여 어른을 죽이는 괴현상에 대한 '트리거'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몇몇 추측과 감염에 대한 묘사, 마지막 엔딩의 대사를 통해서 우리는 그 원인을 유추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이러한 클리셰의 결론과 영화의 내용들이 대치된다는 것이다:피해자가 가해자를 심판하는 이러한 구도의 작품들은 결국 어린이들이 어른을 심판하는 동시에 용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이러한 작품들은 새로운 세대가 어른 세대를 용서하고 함께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희망'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어린이가 어른을 죽이는 시퀸스를 구성하는 히스테리컬한 컷과 신경을 긁는 음향 연출, 그 사실에 좌절하는 주인공의 절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어린이를 죽일 수 없는 주인공의 딜레마를 다루는 연출까지 영화는 그 어떠한 안전장치 없이 헐리웃에서 제작된 공포영화보다도 더욱 더 사람을 몰아붙이며, 심지어 마지막에는 그 모든 희망의 가능성조차 버리게 만든다.

 

이러한 극단적인 절망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깔려있다. 영화는 스페인 군부독재 말기에 제작되었고, 군부 독재와 억압에 대한 깊은 절망감이 영화에 깊이 깔려있다 할 수 있다. 영화 자체는 그러한 사회적 함의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이 절망감은 당시 스페인 영화계에 깔려있는 깊고도 강렬한 감정이었다. 대표적인 예는 스페인 시절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들일 것이다:종교는 자본가와 결탁하여 카드놀이나 하고, 성체는 모욕당하며, 희망은 없고 파시스트들이 데모하는 사람들을 쏴죽인다. 영화에는 이러한 것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당시 스페인 군부의 검열이 심했기 때문이다), 이 뜬금없는 좌절감과 절망감들은 극을 일반적인 장르 안전장치 바깥으로까지 밀어붙이는 동력이 된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한 절망감을 그저 감정에서 끝내지 않고 논리적인 구조로 안착시킨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전화 교환원의 죽음을 다루는 시퀸스일 것이다. 이 시퀸스는 교회라는 공간을 죽은 여자의 옷을 들고 춤을 추는 소녀들 - 시신을 성희롱하는 소년들 - 고해성사를 흉내내는 어린이들로 3등분한다. 영화 내내 보여지는 긴장감 넘치는 구조와 다르게 묘한 맥락을 가지는 이 장면은 추악한 인간의 행동을 초현실적으로 축약하는 부분이다. 교회라는 성스러운 장소 아래서 살해한 타인의 재물을 갈취하고(소녀들), 성에 대한 추잡한 욕망을 드러내며(소년들), 그것을 고해성사하여 퉁치는 모습(고해성사를 흉내내는 아이들)을 통해서 그들이 하는 행동 자체가 어른들이 하는 행동들, 인간 만마전의 축소판이라는 것을 논리적으로 구성한다.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에 어른을 살해하는 어린이의 입을 빌려서 이 모든 것이 '놀이'라고 이야기한다:놀이는 실제가 아니지만, 그 실제를 모방하는 사회적 행동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실제'를 모방한단 말인가? 그것은 바로 폭력 사용하는 어른들로부터 말이다. 영화는 어른과 아이의 관계가 일반적인 가해자-피해자의 이분법적인 구도가 아닌, 어른의 폭력이 아이의 폭력으로 대물림되는 구조라고 이야기한다. 사람을 죽고 죽이는 것을 즐기는 세대의 순환고리라 이야기하는 영화의 절망감은 많은 공포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밑바닥이 없는 절망감이다.

 

이러한 절망의 논리구조 아래서, 영화는 전개 내내 이렇게 빠져나갈 수 없는 절망감과 광기로 인물들을 몰아붙인다. 마치 '이래도 선(아동 살해)을 안넘을래?', '선을 넘어도 답이 있을거 같아?' 식으로 이야기를 몰아붙이는 영화는 많은 대중문화의 금기들을 뛰어넘는다. 주인공을 자신을 죽이려 하는 아이를 쏴죽이고, 주인공의 아내는 자신의 태아에 의해서 내부에서부터 내장이 찢겨져 나가 죽으며,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주인공은 변해버린 아이들을 향해서 기관총을 난사하고 자신만 살아남겠다고 달려나가고, 변해버린 아이들과 싸우며 절규하다 경찰의 총에 맞아죽는다. 이 모든 과정들에서 드러나는 절망감과 긴장감은 그 어떠한 희망도 없는 깊은 절망감이다.

 

결론적으로 누가 아이를 죽일 수 있는가는 정말로 훌륭한 호러영화라 할 수 있다.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공포를 넘어서 '절망감'을 사회적 도덕률과 터부를 이용해서 훌륭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호러 영화를 좋아하고 기회가 된다면 꼭 볼 것을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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