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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 스포일러 있습니다.

인류사를 돌이켜보면, 우리가 '다른 문화'와 '우리 문화'를 다원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얼마되지 않았다. 고대와 중세의 신화들은 지역과 부족 단위로 쪼개져 있었고, 세상에 대한 설명은 지역적이었다. 심지어 같은 신화와 종교를 믿는 부족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같은 뿌리를 두되 다른 신화와 해석을 믿는 타인으로 분화되었다. 볼 수 있는 세계가 한정되고, 교류할 수 있는 반경이 작기 때문에 중세와 고대 사회는 현대사회에 비교해서 지역적이고 특수하며 폐쇄적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특수성과 폐쇄성이 현대 사회에 비해 중세와 고대사회가 더 '다양하고 잘게 쪼개진 사회'가 될 수 있었다는 점도 존재한다: 현대사회가 세계적이고 과학에 기반한 해석, 보편적인 인권에 대한 믿음 등에 기반하여 '보편적인 뿌리 위에 세워진 다양성'이라는 가치 체계를 만들었다면, 고대와 중세는 오로지 '우리 이외에는 존재할 수 없는/혹은 무가치한' 가치 체계에 기반하여 자기 믿음을 수립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고대 중세 사회의 개개인이 타인과 타문화를 받아들이는 방식과 별개로 고대 중세 사회가 갖는 다양한 집단으로 만들어진 스펙트럼이란 현대사회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비유하자면 현대사회가 빛이 다양한 색상과 파장을 지닌 스펙트럼으로 구성되어있다는 걸 안 상태에서 빛을 다양성을 지닌 구조체로 인식한다면, 고대 중세 사회는 빛의 한 색상만 보고 그것이 빛의 전체라고 인식하는 경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흥미로운 부분은 빛이란 서로 다른 색상(붉은색이다, 푸른색이다)이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섞이거나 충돌할 때 발생하는 일들일 것이다.

로버트 애거스 감독의 노스맨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모티브가 된 암레트 왕자의 전설을 베이스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하지만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기독교 중세 봉건 왕조의 이미지를 베이스로 한 4대 비극의 햄릿과 다르게 영화는 바이킹 문화권인 암레트 왕자의 원전 이야기를 다루는데 주력한다. 감독의 주 관심사가 현대 이전의 시대(더 위치 - 중세~근대, 라이트하우스 - 근대)의 이미지들을 다루는 것인만큼, 바이킹 문화를 다루는 노스맨 역시 감독의 주 관심사의 연장선에 놓인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노스맨은 감독의 전작들(더 위치, 라이트하우스)에 비해서 미학과 서사적으로 더욱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

노스맨은 기본적으로 신화를 다루는 작품이다. 하지만 노스맨의 '신화'의 개념은 대중매체에서 다루는 신화의 개념과는 완전히 다르다. 일반적으로 대중문화에서 신화란 '존재하지 않은 것에 대한 동경'이라 할 수 있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 같은 작품들은 특수효과나 분장들을 이용해서 이 세상에 없는 것들을 묘사한다. 기괴한 것, 웅장한 것, 아름다운 것 등등 인간의 상상력과 첨단 기술들이 신화적 세계를 구축하는데 사용되었다. 노스맨에도 그러한 비현실적인 요소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노스맨의 신화에 대한 묘사는 존재하지 않은 것에 대한 동경과 거리가 멀다.

노스맨의 신화적 이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화가 고대 ~ 중세 사회의 사람들에게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고대~중세인들에게 있어서 신화란 단순히 거대한 것과 아름다운 것, 위대한 것에 대한 동경이 아니었다. 신화는 세계를 인식하는 도구였다. 대중문화와 신화의 관계를 논한 조셉 켐벨의 신화학이나 기독교와 이단 종교 사이의 관계를 다룬 프레이저의 황금가지, 인간의 믿음과 공간이 어떠한 관계를 갖는가에 대한 공간 미학 담론 토포필리아까지, 수많은 저서들과 분석들이 과거인들의 신화가 그저 단순한 우상숭배나 미개한 믿음이 아닌 그 시대의 사유방식을 다룬다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고대인들의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 복잡한 속성들이 있지만, 그중 여기서 눈여겨 보고자 하는 것은 신화의 '강박적'인 속성일 것이다. 신화에서의 강박이란 신화가 정의내리고 있는 구조에 대한 집착이자 모든 것을 그 구조 아래 묶고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마치 주문처럼, 반복적이고 특정한 언어 사용을 통해 자연과 정령, 더 고차원적인 존재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인간의 강한 믿음이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그 믿음은 신화적 구조 아래서 보상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로버트 애거스의 작품들은 현대 이전의 인물 군상들의 심리와 세계를 강박적인 이미지의 구조로 재해석하고 다룸으로써 현대인들도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게끔 만드는데 맞추고 있다. 더 위치에서는 주인공에 대한 기독교적인 차별과 착취로 어떻게 근~중세 시대의 여성이 마녀가 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었는지를, 라이트하우스에서는 고립된 환경에서 어떻게 근대인들이 미쳐가는지를 다루었다. 이들 작품의 핵심은 현대 이전의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생각하고 세상을 바라보았다'였고, 더 나아가서 그것을 단순히 대사나 서사가 아닌 이미지의 형태로 구현하여 여타 작품들과 다른 독자적인 작품들을 구축하였다. 

노스맨 역시 그런 작품이다. 분화하는 화산을 보여주며 이야기의 끝을 암시하는 영화는 대칭적인 이미지들과 상징들을 보여주면서 신화 이전의 강박을, 더 나아가 강박이 어떻게 신화를 구축하는지를 보여준다. 많은 장면에서 이는 두드러지는데, 대표적인 장면은 영화의 초반 시퀸스에서 아버지가 삼촌에게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보면서 암레트가 주문처럼(아버지에게 복수하고, 어머니를 구하고, 원수를 죽인다) 자기 암시를 거는 부분일 것이다. 강박적으로 자신의 사명을 되새김질하면서 먼 바다로 출항하는 장면에서 장면은 바다로 나가는 바위가 좌우로 놓여 있어 마치 소년 암레트가 관문을 지나 어른이 되는듯한 이미지를 형성한다. 또한 그 좌우 대칭의 구조를 통해서 반복적이고 대칭적인 구조와 강박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도 주력한다.

노스맨에서의 신화의 강박증은 비단 작품의 컷이나 주인공의 심리를 구성하는 것 이상의 영향력이 있다. 그것은 신화와 세계를 설명하는 방식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노스맨에서도 신화를 다룰 때 필수로 등장하는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러한 방법이 다소 모호하게 그려진다는 것이 흥미롭다:가령, 복수를 위한 칼을 가지기 위해 시체와 사투를 벌이는 장면은 컷의 모호한 구성(되살아난 시체의 목을 내려친 후, 카메라 움직임을 통해 칼을 줍는 첫 상황으로 돌아와 마치 그것이 인물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환상처럼 다루었다)이라든가, 처마에 묶인 암레트를 구하는 까마귀(오딘은 지혜를 얻기 위해 세계수에 스스로를 교수형하였으며, 까마귀는 오딘의 상징이기도 했다) 같은 것들은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암시하지만 그것이 실제 초자연적인지 아니면 그저 인물의 믿음에 따라 세상을 그렇게 해석한 것인지 알 수 없게끔하는 모호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모호함이 신화의 장엄함과 위대함보다도 신화의 가장 뼈대라 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강박적인 믿음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는 암레트 왕자의 복수극을 영화는 여러 신화를 믿는 공동체의 충돌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암레트는 오딘을 주신으로 믿는 오딘 계열을 따르지만, 복수의 대상인 삼촌은 오딘이 아닌 여신 프레이야를 믿는 모습을 보여준다. 신화를 분석하는 일부 학계에서는 원래 아스 계열(오딘이 주신인)과 바냐르 계열(프레이야가 주신인)이 서로 나뉘어져있다가 합쳐진 것으로 해석하는데(구체적인 근거가 없기에 어디까지나 가설로만 존재하는 학설이다), 영화는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암레트와 삼촌의 대립을 남성적인 오딘과 여성적인 프레이야의 대립으로 치환시킨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이 암레트의 어머니다. 어머니를 구하겠다는 암레트의 다짐은 사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배신하고 삼촌을 끌어들여 왕위를 찬탈했다는 사실에 무너진다. 세계에 대한 하나의 설명(아버지에 대한 복수, 어머니의 구출, 배신자의 복수)이 무너지는 순간인데, 영화는 도입부의 어머니 방의 장면과 아버지의 가르침(여자는 방에 비밀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 교차하면서 복선을 깔아두었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그것이 하나의 문화권 내에서도 모계(어머니와 프레이야를 모시는 바나르 신족 계열)와 부계(아버지와 오딘을 모시는 아스 신족 계열)의 싸움으로 치환되어 들어온다. 하나의 세계와 사건을 두고 두가지 상반된 진실이 충돌한다는 점을 감독은 일종의 고대인들의 다문화(?)적 관점으로 다뤄내고 있다.

하지만 노스맨이 로버트 애저스의 다른 영화보다 뛰어난 점은 비단 이미지만 제공하는 것이 아닌 그것을 묶어서 하나의 독특한 메세지로 만드는데 있다. 세계를 설명하는 신화와 기저에 깔린 강박은 새로운 해석을 만나면서 흔들리고 새로운 탈출구를 찾는다. 암레트와 같이 노예로 팔려온 슬라브 족 여인이 그의 복수를 돕는 과정에서 사랑에 빠지고, 그 복수와 파멸이라는 결말에서 다른 길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녀 역시 암레트의 미래를 점칠 때 신화적인 관점을 곁들여서 바라본다는 것인데, 북구 신화가 아닌 슬라브 계통의 신화에 근거하여 신탁을 듣는다. 서로 다른 두 믿음을 가진 세계가 화합하여 공존하는 점에서 신화적 이미지가 가진 편협함과 강박을 넘어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극의 클라이맥스에서 암레트는 여인이 자신의 쌍둥이 자식을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이 본 신탁을 재해석한다:처음에 그는 주신 오딘의 신탁에 따라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어머니를 구출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여인이 자식을 회임한 후에는 자신의 원수인 삼촌으로부터 자식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위협을 제거하는 것으로 변화한다. 강박적인 세계관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닌 자식이라는 새로운 가능성과 미래를 발견하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해석으로 바뀔 가능성을 가진 운명을 재해석 하여 바뀌지 않는 결말을 가진 숙명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점은 신화와 삶을 받아들이는 고대인의 독특한 시각이자 삶에 대한 페이소스를 느끼게 만든다.

그렇기에 로버트 애저스의 영화 노스맨은 신화적 이미지의 재해석을 뛰어넘는다. 그것은 고대인들이 신화를 남겼을 때, 가장 근저에 남아있는 세계를 향한 강박과 삶에 대한 희로애락, 그리고 더 나아가서 다른 문화를 받아들여 성숙해지고 더 나아가서 끝에 남은 파국을 담담하게 받아들여 뒷세대에게 자신의 유산을 남기는 거대한 드라마다. 노스맨은 강렬하고도 강박적인 이미지를 제공하는 동시에 그 이미지로부터 벗어나며 그것을 성숙하게 받아들이는 고대인을 다룸으로써 대중문화에서 신화들을 교차하여 재해석한다. 이전작들이 이미지를 정교하게 다루는데 집중하였다면, 이제 감독은 자신이 잘하는 것을 넘어서 이미지로 독특한 감수성과 공감대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많은 감독들이 자신이 잘하는 것에 천착하다 커리어를 마무리 짓는걸 생각한다면 로버트 애저스는 노스맨을 통해 한 층 더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론을 내리자면, 노스맨은 훌륭한 영화다. 물론 캐스팅에 비해서 대중적이지 않은 이미지와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고, 일반적인 신화를 다룬 영화를 생각한다면 대단히 낯설고 생소할 것이다. 그러나 그 낯섬과 생소함 속에서 영화는 신화의 근저에 깔려있는 감수성을 다루고, 그것을 신화의 특수성이 아닌 좀더 인간사의 보편 타당한 경험으로 승화시키는데 주력한다.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은 아닐진 몰라도, 노스맨은 대단히 인상적이고 한번쯤은 감상해보는 것을 추천하는 영화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범인류사와 지방사의 관계는 단순히 부분과 집합의 관계로 정의내릴 수 없다. 어떤 범인류사의 흐름들은 지방사에서 발견되지 아니하며, 어떤 지방사의 사건들은 그 지방만의 특수한 사건들로만 끝난다. 그렇기 때문에 범인류사와 지방사는 서로 논리적으로 등치 불가능하며 서로의 정합성을 담보하지 않는 독립적인 명제다. 하지만 그러한 범인류사와 지방사를 뒤집어서 등치시키는 예술작품들이 있다:그러한 작품들은 논리적으로 등치될 수 없는 두 명제를 등치시킴으로 이런 예술 작품들은 단순히 한 지방, 집단, 개인의 경험이 아닌 범인류적인 경험과 공감을 끌어내는 작품으로 승화되기도 한다. 


이 논의는 논리학적으로 성립이 불가능한 두 명제, 범인류 보편사를 지방사로 특수화하기, 혹은 지방의 특수사를 범인류사로 보편화하기라는 모순적 명제가 예술 작품의 미학 내에서는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모순적 명제들이 참으로 성립할 수 있는데는 우리가 보편적이라고 생각하거나 특수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명제와 조건에 대한 숙고와 통찰력, 더 나아가서 각 보편 명제와 특수 명제 사이의 논리적 관계망을 뛰어넘는 유비추리적 관계망, 미학적 통찰력과 감상, 공감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요컨데 뛰어난 예술적 통찰과 미학적 성취는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명제들을 연결하고 이들을 관통하는 주제와 담론을 생산한다.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은 에드워드 양이 감독하고 대만 계엄령 시절을 다루는 영화다. 영화는 최초의 대만 청소년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진 작품이고, 어떻게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이야기로 다루면서 중국 본토에서 도망나온 사람들의 암울했던 삶을 이야기한다. 흥미로운 점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 영화 팬들 사이에서 차지하는 위치일 것이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한국의 영화 커뮤니티에서 오랫동안 명작으로 칭송받았을 뿐만 아니라 마틴 스콜세지가 복원을 지원했을 정도로 영화팬들 사이에서 이 영화에 대한 공감대는 대만을 넘어서 전세계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기법이나 이야기를 다루는 관점에서 훌륭한 영화였다. 영화는 막막한 미래와 암울한 대만의 분위기를 섬세한 필치로 훌륭하게 다뤄낸다. 예를 들어 청소년 시절의 풋풋한 이미지와 대만의 암울한 상황(지나가는 탱크, 행군하는 군대, 군복을 입은 교련 선생 등등)들을 같은 컷 안에 배치하되 문이나 버스의 차창 같은 하나의 막을 두어 분절시키는 구조를 취하여 주인공들의 청소년 드라마를 둘러 쌓고 있는 암울한 시대상을 드러낸다. 그 외에도 대만을 지배했던 일제의 유산들을 소품처럼 배치하거나, 미국 문화에 대한 동경과 막연한 탈출구로써의 도미 유학, 지식인의 사상검증과 청소년 계층의 갱스터 문화 등등 다양한 것들을 다룬다. 그것들이 산만하게 흩어지지 않고 하나의 영화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4시간의 러닝 타임이 지루하지 않고 흥미진진하다.


허나 흥미로운 점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 대한 세계적인 찬사일 것이다:분명 영화는 기법적으로 잘 만들어진 부분들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근 40년간의 대만의 계엄령 시절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의 감수성은 대단히 특수한 부분들이 있다. 그러나 눈여겨 보아야할 점은 이 영화가 대단히 특수한 감수성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깊이있게 다루었기 때문에 역으로 세계적으로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부분이 생겼다는 것이다.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에서 가장 의외인 부분은 이 영화가 기본적으로 '갱스터' 영화라는 점일 것이다. 아이들은 다른 학교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불량 서클을 만들고, 거기서 별명으로 서로를 부르면서 친밀감을 갖는다. 그러나 영화는 이를 단순한 탈선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영화속에서 아이들은 아이들의 세계에서, 어른들은 어른들의 세계에 갖혀 사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위에서 언급한 한 공간을 둘러싼 두 층위의 현실처럼 이 둘은 서로 섞이진 않지만 서로에게 어느정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부모 계층은 때로 자식 세대에게 가르침을 주거나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하지만(주인공 아버지가 주인공과 나란히 서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부모 세대는 이미 시대의 어두운 부분들(사상검증이나 변화해버린 주변 환경, 먹고 살아야하는 어른으로서의 책임 등)을 감당하기 벅찬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공백에 동년배들의 변두리 문화가 들어선다. 영화는 이들이 무대를 잡고 장사를 하거나, 미국 팝송을 부르거나, 당구를 치는 등 마치 '어른인 것마냥' 행동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장면들이 보여주는 것은 이들이 어디까지나 청소년들의 영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도 암시한다. 가장 단적인 부분들이 '폭력'에 대한 부분들이다. 영화에서 청소년 갱들이 서로를 린치하는 장면들이 나오긴 하지만, 이들의 폭력들은 대단히 부드럽다. 반대의 사례를 뽑는다면 한국의 말죽거리 잔혹사 같은 작품이 있을 것이다. 그 시대를 다루는 한국 영화의 폭력의 사실성과 극단성에 비교해본다면, 이들의 폭력은 어딘가 어설프다. 물론 그것이 점점 고조되면서 살인까지 도달하는 것이 영화의 핵심이긴 말이다.


이런 점들 때문에 영화는 갱스터 영화라는 측면에서 단순히 대만사라는 지방사에서 세계사적인 보편성과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게 되었다. 사회의 변화와 혼란, 부모세대 권위의 몰락,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대체 문화들(갱스터에서 서브컬처, 대안 집단 등등)은 세계사의 큰 흐름에서도 자주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넓은 의미에서 대체 문화는 어떻게 본다면 반항인 동시에 그 권위의 공백을 채우는 존재였다. 다른 영화 예재들을 보자. 전설적인 영화 대부는 주인공은 부모의 부도덕한 불법 비즈니스 왕국을 물려받기 싫어하는 반항아에서 왕국의 적장자로 떠오르는 이야기를 다룬다. 살아남기 위해서 뭐든지 해야 했었던 이민자 사회의 어둠과 결국 부모세대를 그대로 따라갈 수 밖에 없는 숙명론까지 대부 시리즈는 그저 범죄 영화의 교과서를 넘어서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는 공감대를 만들었다. 핵심은 각각의 지방적인 영역들(역사, 문화, 이야기, 전설 등등)에 대한 깊은 통찰은 때로는 인간에 맞닿아있는 근원적인 본질들을 건드렸기 때문에 단순히 지방이나 지엽적인 이야기를 넘어서는 번뜩임을 보여주었다.


다시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으로 돌아와보자. 영화는 그러한 시대가 갖고 있는 공백을 채워넣기 위해서 젊은 세대가 방황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디에도 갈 수 없었다:소년 갱들과의 알력이나 방황이나 이러한 이야기들은 결국 근원적인 공허를 채워넣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은 사랑에 집착한다. 하지만 그 사랑은 그가 생각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공허와 방황 끝에서 소년은 우발적으로 소녀를 살해한다. 이는 대만의 젊은 세대에 대한 은유(탈출구 없이 스스로 파멸할 수 밖에 없는)인 동시에, 섬세한 영혼을 가졌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기도 한 것이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맨(2022)은 엑스 미카나와 서던 리치 영화를 찍었던 알렉스 가랜드의 신작이다. 이야기는 간단하다:폭력적이고 가스라이팅을 하던 남편이 아내 앞에서 자살을 하고, 아내는 기분 전환을 위해 시골으로 휴양을 갔다가 초자연적인 현상을 맞이한다. 불쾌한 남성의 미소가 알려주듯이, 영화는 유해한 남성성을 소재로 한 영화다. 엑스 마키나나 어떻게 보면 서던 리치까지 여성의 관점과 이야기를 다루어내려고 한 감독의 일관성이 느껴지는 부분인데, 멘은 그것이 매우 노골적이다. 2000 ~ 2010년 이후로 수위로 떠오른 여성 혐오와 유해한 남성성,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려는 멘은 한가한 영국의 시골과 아름다운 풍광들, 고대의 이미지와 종교, 더 나아가서 문자 의미 그대로 재생산되는 남성성의 유해함을 하나로 엮으려는 야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까지 성공적이진 않다.

멘은 유해한 남성성의 그로테스크함을 드러내는데 집중하고 있다. 물론 영화는 장면마다 유해한 남성성에 대한 사례들을 충실하게 넣어두었고, 이것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감 불쾌한 느낌을 주게 만든다. 시골에 도착하는 시퀸스를 예로 들어 보자: 사과를 주워먹는 주인공을 보면서 금지된 과일이니 먹지 말라고 이야기하며 불쾌해하다가 갑자기 농담이라고 이야기하는 제프리의 모습은 기록으로 남은 가장 오래된 가스라이팅인 성경의 선악과(=사과)에 대한 이야기다. 제프리의 수동 공격성이나 은연중에 드러나는 여성에 대한 편견들 등등은 이 영화가 무엇을 다루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스토커하는 알몸의 남성의 그로테스크함, 종교적인 이야기를 들먹이며 가스라이팅을 하는 신부, 이유없이 여성에게 욕하는 소년, 스토커를 죄없이 풀어주는 경찰 등등까지 모든 것이 유해한 남성성의 전형들이다.

영화는 이러한 유해한 남성성들(소년 역을 제외하고)을 하나의 배우(제프리 역의 배우)에게 1인 다역을 맡김으로써 '결국은 하나의 남성성의 전형'에 집중한다. 이 부분은 성공적이라 할 수 있는데 다양한 아키타입들이 같은 페이스를 공유함으로 유해한 남성성이라는 분명한 이미지를 관객에게 심어주는데 성공한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보여지는 유해한 남성성의 재생산 장면은 문자의미 그대로 이 영화의 모든 내용을 집약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멘에서 눈여겨 볼 또다른 점들은 영국 시골의 자연풍광을 영상으로 잡아내는 감독의 시선이다. 멘에서 보여지는 영국 시골의 풍광은 유해한 남성성의 '역사성'을 부여한다. 폐허가 된 터널, 교회, 흐르는 구름과 밭들, 더 나아가서 석상과 흩날리는 민들레 씨앗, 썩어가는 사슴의 사체 등등을 유해한 남성성 테마 아래 하나로 엮는다. 흩날리는 민들레 씨앗을 일종의 정액과 정자의 메타포로 이용하여 사슴의 사체 새까만 눈구멍 속으로 들어가서 석조에 새겨진 고대 남성의 이미지로 이어지는 장면 등 상당히 강렬하다. 이는 감독의 전작인 서던 리치에서 보여준 강렬한 이미지를 이어받은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영화의 강점이 거기서 끝난다는 것이다. 이미지는 강렬하지만 이것을 하나로 묶는 맥락Context는 상당히 부족하다. 엑스 마키나의 예를 들어보자. 엑스 마키나는 인형의 집을 SF와 가이노이드(여성형 안드로이드)라는 아키타입, 그리고 백마 탄 왕자라는 판타지를 뒤트는데 집중한다. 영화는 여성 서사와 남성성의 유해함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그것을 너무 크게 벌리지 않고 유기적으로 잘 엮어냈다. 엑스 마키나에서 중요한 부분은 자신을 구해주려는 판타지(성적인 것과 함께)를 가진 남성을 거부하고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을 선택하는 주동적인 여성 주인공을 설정했다는 것이다. 이 주동적인 여성의 존재가 엑스 마키나의 성정치적인 맥락들(남성의 시선으로 극을 이어나가다가 반전을 맞이하는 것)을 완성하며 무기질의 영상 톤과 서사를 유기적으로 엮어낸다.

하지만 멘은 그렇지 못하다. 멘에서 여성 주인공은 유해한 남성성의 피해자이지만, 남성성의 가해에 맞서서 그 여성 주인공을 위한 서사는 마련되지 않았다. 멘에서 여성 주인공의 서사는 자살한 남편을 떨쳐내는 과정이다. 클라이맥스에서 유해한 남성성이 재생산되는 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유해한 남성성은 고대(알몸의 남성)로부터 중세(성경과 종교)로, 그리고 현대의 시스템(경찰)으로까지 이어자고, 여성에 대한 구애와 사랑, 왜곡된 관계에의 요구로 이어진다. 그것이 남성의 출산과 재생산을 거쳐서 자살한 남편으로 이어지는 장면은 그로테스크하지만 유해한 남성성이란 분명한 메세지를 제공한다. 그러나 문제는 영화가 유해한 남성성에 천착하여 그의 대척점인 여성 주인공을 단순한 피해자으로만 느껴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분명히 친구가 이야기했듯이 '그 망할 남자놈의 거시기를 도끼로 잘라주겠어'라고 한 말을 주인공이 실현 했으리라 보여지는 엔딩의 장면은 전혀 카타르시스가 느껴지지 않는다. 분명 유해한 남성성의 재생산을 보여주면서 성기 절단씬을 보여주지 않은데는 어떤 '모호성'을 엔딩에 주기 위한 감독의 복안이 있으리라 느껴지긴 하지만, 그러기에는 영화의 맥락은 풍광의 모호한 이미지들과 남성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에 묻혀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유해한 남성성의 반대편에 놓여있는 여성 주인공에 대한 서사가 강하게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점에서 멘은 샘 페킨파의 인간 혐오 영화 스트로우 독의 남성 혐오 버전이라 할 수 있다. 멘과 비슷하게 영국 시골을 배경으로 한 스트로우 독에서 샘 페킨파가 여성을 혐오하긴 했지만 남성 마초의 파괴성과 광기로 모든 것이 파괴되는 것을 다루었고, 멘 역시도 여성을 향한 남성의 유해함과 그로테스크에 맞서 여성이 남성의 성기를 도끼로 절단한다로 결론 내리기 때문이다. 다만 스트로우 독 자체가 갖고 있었던 깊은 니힐리즘이 영화의 완성도와 별개로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준것에 반해, 멘의 유해한 남성성의 재생산이란 그로테스크한 씬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 어딘가 밋밋하다. 스트로우 독이 샘 패킨파의 니힐리즘과 인간 혐오이라는 강렬한 테마에 갖고 있었던 것에 반해, 멘의 테마는 분명 그로테스크하긴 하지만 어딘가 트위터의 '핸냄저 썰 푼다 ㅡㅡ' 수준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이는 영화 멘이 결국 위에서 이야기한 주동 세력과 반동 세력 모든 것을 관통하는 중요한 테마 없이 한쪽을 향한 혐오로 구성하였기 때문이다. 엑스 마키나처럼 유해한 남성성의 대척점에 저 너머를 바라보는 희망과 비전, 혹은 그것 조차 압도하는 공허함과 분노가 있었다면 영화가 그로테스크 이상의 가치를 지닐 수 있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멘은 남성성의 그로테스크함과 기분 나쁜 부분들을 잘 다루고 있긴 하지만, 그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강렬한 이미지들과 풍광들은 존재하지만 여성 주인공의 서사를 무게감있게 다루지 않은 부분이 패착이라 할 수 있다. 서던 리치나 엑스 마키나 같은 작품들을 찍은 감독인 만큼 그 다음 작들은 기대해볼만 하지만, 이후에는 좀 더 작품에 더 먼 곳을 바라볼 수 있는 복안을 두고 작품을 만들었으면 좋을 것이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반지의 제왕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당시 블록버스터 영화의 흐름을 거슬렀기 때문이다. 그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스타워즈:보이지 않는 위협을 예로 들어보자. 스타워즈:보이지 않는 위협은 컴퓨터 그래픽을 대규모로 적용한 블록버스터였는데, 가장 유명한 자자 빙크스나 마지막 클라이맥스 전투장면에서 수많은 드로이드 병사들과 주인공 일행이 격돌하는 CG 장면들을 대거 채용하였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위협에 대한 사람들의 평은 미적지근할 수 밖에 없었는데, 본질적으로 CG와 배우들의 연기 사이에 비롯된 괴리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자 빙크스는 아직까지도 팬덤의 증오를 받는 케릭터로도 악명을 떨쳤는데, 이는 케릭터의 성격 뿐만이 아니라 배우들 사이에서 묘한 어색함을 만들어낸 이유도 한몫했다. 하지만 CG의 등장은 블록버스터 영화 업계에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넘어갈 수 밖에 없는 과정이었다.

반지의 제왕이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의미가 있었던 것은 CG를 이용하면서도 '대규모 전투나 특정 부분에서 특수분장'을 이용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특수분장 자체는 00년 이전 고전적인 헐리웃 영화나 B급 영화나 고어 영화 등에서 자주 사용했던 테크닉으로 어떻게 보면 진부한 기술이었다. 그러나 피터 잭슨은 이 오래된 전통을 훌륭하게 살렸을 뿐만 아니라(카메라 앵글 내에서 주로 일어나는 전투들은 모두 특수분장과 액션으로 묘사하되, 규모가 큰 행군 장면 같은 부분들은 CG로 처리) CG에 비해서 오히려 값싸게 촬영함으로써 여전히 특수분장이 현역임을 과시하였다.

반지의 제왕의 케이스와 스타워즈의 케이스를 서로 비교해서 본다면, 그것은 바로 '질감'의 차이일 것이다. CG로 만들어진 드로이드들의 쨍하고 깔끔한 느낌은 어딘가 기존 배우들이나 세트의 질감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소품이나 분장 등으로 구성할 수 없는 물건이나 씬의 구성 등은 분명 CG밖에 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러나 특수분장과 창작자들이 만든 소품들은 CG로 만들어진 물건들의 분위기와 다르며, 무엇보다 현실의 배우나 세트의 질감과 통일감을 이루게 되어 독특함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이런 것들이 가장 두드러지는 것들이 고어와 끈적거리는 것들에 대한 질감일 것이다:살의 번들거림, 내장의 축축함, 오물의 탁한 색깔 등은 CG로 만들어질 때와 특수분장으로 만들어질 때가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은 한 때 과거의 주류였지만 이제는 사라져버린 기술이라 할 수 있다. 찰흙이나 인형들을 이용해서 컷단위로 사진을 찍어 촬영한 후, 그것을 이어서 마치 인형이 움직이게끔 구성한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은 로보캅이나 스타워즈와 같은 과거 영화들의 특수효과 전반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뚝뚝 끊기는 질감과 다른 세트와 별개로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질감은 결국 더 나은 기술인 CG로 넘어가는 이유가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질감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 완전히 절멸되지 않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인 매드갓은 그러한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의 정점에 선 필 티펫 감독의 작품이다. 로보캅이나 스타워즈 같은 작품들의 특수효과를 만든 이력이 있는 필 티펫은 이 매드갓을 찍기 위해서 30년을 투자하였다. 바벨의 붕괴를 이야기하는 레위기로부터 시작하는 매드갓은 파괴적이고 어두운 이미지들의 연속으로 구성하였다. 축축한 고기덩어리와 점액질의 끈적함, 탁한 액체들 등으로 구성된 매드갓의 디스토피아는 극단적인 신체의 변질과 분해, 전쟁, 파괴, 죽음의 이미지로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매드갓에서의 이미지는 전반적으로 '쓰레기와 폐기물'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깃덩어리로 만들어진 덩어리들은 구역질나는 점액질들을 뱉어내며 먼지로 만들어진 사람들을 핍박하고, 의사는 병사의 몸에서 피에 젖은 귀금속들을 뜯어낸다. 매드갓의 강렬한 이미지들은 전적으로 '실제 존재하는 물건들의 질감'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여타 디스토피아나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쓰레기의 질감을 잘 살려내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질감이 실제의 인물이나 세트의 이미지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어딘가 이질적이고 뚝뚝 끊겨보이는 움직임, 그리고 그로테스크하게 부풀어 버린 살덩어리나 인물들의 움직임을 이질적으로 구성한다. 

혹자는 매드갓의 메타포가 죽어버린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기도 한다:한 때 시대를 풍미했었던 스톱 모션은 이제 매이저 스트림에서 벗어나 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갖고 있는 강력한 이미지들은 여전히 지금에도 통용된다. 잔혹하게 해체된 병사에게서 때어낸 기괴한 태아는 곱게 갈려나가 새로운 문명을 만들고, 쇠락하는 프로세스를 다시 구성한다. 대사나 나레이션 없이 도달하는 매드갓의 강렬한 이미지들은 인상적이라 할 수 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범죄도시 2편은 흔히들 마동석 영화와 장르 영화의 전형이라 부를 수 있는 작품이다. 기존의 장르 영화들과 비교하였을 때 특출나게 뛰어난 부분이나 새로운 부분들은 없지만, 그렇다고 흠잡을 부분들도 없는 모범적인 장르 영화의 표본이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에는 '전지전능한 마동석이 나와서 모든 것을 정리한다'라는 단순한 플롯을 따라갈 것 같은 범죄도시 2는 의외로 플롯이 탄탄하여 긴장감을 부여하는데, '나쁜놈들이 얼마나 나쁜가?'와 '나쁜놈들이 어떻게 개연성 있게 데우스 엑스 마키나인 마동석을 피해가는가?' 라는 부분을 깔끔하게 잘 정리하여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더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사악한 악이 나름 유능하게 정의를 피해가다가 피할 수 없는 정의를 만났을 때의 카타르시스를 범죄도시 2는 잘 정리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재밌는 영화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비단 범죄도시 2뿐만이 아니라, 최근 한국식 장르영화라 할 수 있는 다른 영화들에서도 보여지는 특징들이다. 각자 영화가 추구하는 장르 개념들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거기에 자신의 색체라고 할 수 있는 조미료들을 섞어서 장르의 소재를 더 두드러지게 만드는 것이다. 한국식 케이퍼물이라 할 수 있는 도둑들이나 꾼 같은 작품을 보면 도둑질이나 사기의 계획, 그 밑에 깔려있는 인물들의 복잡한 관계,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마지막 결론으로 이어지는지들에 대한 분명한 공식들이 정해져 있다. 여기에 꾼은 믿을 수 없는 주인공과 사악한 검사 조력자, 그리고 유명했던 사기 사건에 모티브를 두고 이야기를 전개했고, 도둑들은 중화 문화권과 한국을 오가면서 '국제적인 스케일'로 이야기를 넓혔다. 각각 개성들이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장르 영화에서 기대할만한 재밌는 요소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 영화들은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장르적인 특성들과 개성에도 불구하고, 이들 영화에는 다른 세계 장르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끈적함'이 존재한다. 한국식 좀비 장르 영화의 한 획을 그은 부산행의 예를 보자:열차 칸을 통과하기 위해서 주인공 일행이 트로트 음악을 배경으로 좀비와 몸싸움을 벌이며 싸우는 장면은 여타 좀비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좀비 영화에서 고어의 질척거리는 끈적함이나 축축함과 다른 부산행의 질감은 마치 습기찬 곳에서 살과 물체가 쩍쩍 들러붙는듯한 불쾌함에 가깝다. 마치 살과 물체가 하나가 되는 듯한 묘한 끈적함과 페이소스가 한국식 장르 영화의 질감에 묻어나오는데, 이러한 장르적 특수성 때문에 한국 장르 영화들은 세계 영화계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였다. 

한국 영화의 장르적 특수성들은 2000년대 초반의 장르 영화를 만들던 거장들의 영향력이 크다:박찬욱, 봉준호, 나홍진 등과 같은 지금은 세계 영화계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감독들이 2000년대 초반 감독 특성과 대중성이 같이 섞인 영화를 만들었다. 그 중에 가장 큰 획을 그은 것은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이다:과거로의 회귀, 사회를 꿰뚫어 보는 통찰, 장르적 긴장감, 한국 사회의 독특한 분위기들이 그 영화에 묻어있었다. 한국형 블록버스터 100만 관객 시대를 열었던 쉬리와 같은 영화들이 몇년전에 나왔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 궤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이는 CJ나 대기업들이 기존 충무로 자본과 다른 길을 걷기 위해서 새로운 감독들과 소재에 기회를 준 것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한국 영화의 장르적 완숙도는 2000년대 초반의 거장 감독들의 실험과 성공, 그 실험을 베이스로 하여서 어떻게 하면 장르적인 재미를 줄 수 있는가에 대한 탐구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한 소재의 자가복제(물론 이런 영화들도 있지만)에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새로운 변주를 진행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명작의 조건은 마지막화에 조지는 거라고!"

-호에로 펜 中

 

우리는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것이 일상생활에서 좋은 습관이 아니라고 배운다:사람이 질문을 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무언가에 대한 해답을 듣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다시 질문으로 이어나가는 것은 바람직한 소통 방식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창작물들, 특히 장기연재작에서 하나의 사건과 질문이 다른 질문으로 이어지며,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 경우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어째서 그런것일까? 장기연재물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극에 집중하게끔 만들어야 극을 유지해나갈 수 있다. 하나의 질문이 하나의 대답으로 일대일 대응이 된다면, 모든 극과 갈등, 의문은 마무리되고 더이상 이야기는 진행될 여지가 생기지 않는다. 그렇기에 연재, 방영되는 상영작들에서 질문은 계속해서 질문을 만들어야 하고, 그래야만 사람들은 그것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극의 전체 구조를 심각하게 무너뜨릴 소지가 있다. 우리가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지 말라 라는 격언을 배우는 것을 생각해보자. 질문을 통해서 우리가 구하고자 하는 것은 답이다. 질문에 새로운 질문이 등장하는 것은 이야기의 크기를 키우고, 사람들의 관심과 흥미를 유발하여 계속 극에 몰입하게 하는 동력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동시에 답 없은 질문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극이 한순간에 무너질 가능성도 같이 커진다. 위 호에로 펜의 대사처럼, '마지막에 조져버리는 것'은 그러한 질문들이 쌓이고 쌓여서 무너질 때, 답변없이 작가가 극에서 도망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호에로 펜이 이야기한 '마지막에 극적으로 조져버리는' 케이스는 생각외로 적다. 샤먼킹 처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프린세스 하오 같은 말도 안되는 엔딩을 내고 도망친 뒤에, 다시 졸렬하게 돌아와서 재연재를 하는 그런 작품은 창작물 역사를 통털어 봐도 그렇게 많지 않다. 오히려 '마지막에 극적으로 조져버리고 튀는' 케이스보다도 '천천히 추하게 지저분해지며 망하는' 케이스가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엑스파일의 예로 들어보자: 엑스파일은 외계인이 2012년 지구를 식민지화 하고 인류를 노예화 한다는 거대한 음모가 메인 플롯으로 정해놓고, 그에 맞춰서 큰 이야기를 전개했었다. 하지만 인기가 식지않고, 계속해서 드라마가 계속되면서 작가들은 점점 거대해지는 이야기에 끝을 내지 못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질문과 이야기를 붙여나가서 이야기의 몸집을 불려나갔다. 그 결과, 실제 외계인 음모가 실현되는 2012년이 도래하고, 스컬리와 멀더의 자식이 생기고, 주요 악역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끝을 맺지 못하고 어중간한 상태에서 제작이 중단되어 버렸다.

결국 극이 무수히 많은 질문들을 꼬리에 꼬리를 물어 던지더라도, 그 질문들은 이미 답을 내놓은 상태에서 짜임새 있게 진행을 해야 이런 상황에 봉착하지 않는다. 극단적으로는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전개들에 대한 질문과 답 쌍을 편집증적으로 정해놓고 진행한 진격의 거인 같은 작품이 있지만, 여기서 간략하게 다룰 작품은 용과 같이 7:빛과 어둠의 행방이다. 처음 전혀 이야기와 관련없어 보이는 용과 같이 7은 장장 2시간 가까이에 걸친 오프닝 시퀸스 이후 본격적인 게임으로 이어진다. 파이널 판타지 13 같이 배경 설정을 길게 풀어놓는 타입의 서사라 할 수 있는데,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긴 오프닝 시퀸스가 생각외로 사람의 관심을 끈다는데 있다.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은 과거 요코하마의 이야기 - 과거 감옥에 들어가기 전 카스가 이치반의 이야기 - 감옥에 들어가고 나서 배신당한 카스가 이치반 - 카스가 이치반이 자신의 두목을 찾아가 대면하는 점 - 배신할거 같지 않은 두목이 자신을 배신하는 사건 - 갑자기 요코하마에 떨어짐 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이야기들이 폭풍같이 몰아치면서 플레이어들에게 '다음에 무슨일이 일어날까?' 라는 궁금증을 계속 들게 만든다.

하지만 용과 같이 7이 좋은 서사를 보여주는 게임인 이유는 그러한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에 적절한 답들을 다 제공한다는 것이다:어째서 첫 과거 요코하마 이야기가 맨 앞에 배치되었는가? 어째서 두목은 카스가 이치반을 배신했는가? 어째서 눈을 떴는데 카무로쵸에서 요코하마로 갔는가? 놀랍게도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모든 질문들에 게임은 적절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고, 그것이 질문과 대답이 쌍으로 맞물려 문제 해결/질문 제시가 되면서 게임에 집중할 수 있는 주요한 동력이 된다.

결국 핵심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더라도, 그 끝에는 모든 것에 대한 대답을 제시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질문과 대답은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하게 던져져야 한다. 용과 같이 7이 소프 드라마 관점에서 좋은 구성을 보여주었던 것은 계속되는 질문과 대답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훌륭한 완급을 보여준다는 점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질문과 대답의 쌍들이 구조화 되어서 끝에 이루어지는 결론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납득 가능하게 다가왔다는 점이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 약혼자가 아닌 여자는 뭐라고 불렀소? 하워드?
- 아뇨, 약혼자가 아닌 여자는 하워드라고 부르지 않고...
  아내가 아닌 여자가 하워드라고 부르지 않아요
  제 약혼자가 아닌 여자는 제 아내도 아니죠
  제 아내가 아닌 약혼자는 스티브라고 부르지 않고...
  하워드라고 부르죠 아시겠어요?

- What's Up Doc?, 1972

하워드 혹스의 걸작 코미디 베이비 길들이기는 현재의 관점에서 봐도 광기넘치는 코미디 영화다:범생이 샌님이 지금식으로 이야기하면 천연계라 할 수 있는 여자의 페이스에 휩쓸려서 자신이 원치않는 상황을 마주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과 전혀 맞지 않는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의 베이비 길들이기는 당시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지금에서는 코미디의 장르에 큰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분류된다. 베이비 길들이기의 전위성은 각본과 펀치라인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계속해서 휘몰아친다는데 있다. 그리고 그렇게 휘몰아치는 대사와 상황이 물흐르듯이 이어진다는 점에서 베이비 길들이기는 각본이 대단히 훌륭하게 짜여진 작품이다.  

 

베이비 길들이기에서 코미디의 핵심은 바로 '이어지지 않는 것들이 이어지는 것'에 있다. 우선 영화의 제목에 등장하는 베이비는 길들여진 '표범'의 이름이다. 시작부터 길들여진 애완동물과 표범이라는 두가지 어울리지 않는 개념을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영화의 코미디 컨셉은 이어지지 않는 것들이 서로 이어지면서 생기는 오해와 어색함에서 생기는 웃음에 기반한다. 이러한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높은 위치에 놓여있는 것들(권위 있는 존재나 존경 받는 존재 같은)이 낮은 위치로 떨어지는 수직적인 낙차에서 발생되는 웃음이 아닌 대등한 위치에 놓여있거나 서로 다른 개념을 연결짓는 것인데, 영화는 서로 맞지 않는 어색한 것들의 연결을 넘어서 상반된 개념을 연결시키는 것까지 능숙하게 연결 짓고, 속도감 있게 다루면서 영화의 재미를 더한다.

 

이것을 속도감 있게 재현할 수 있는 동력이 되는 것은 바로 관계대명사이다. 이것과 저것, 그것으로 구성되어있는 관계 대명사는 사물의 실제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발화자의 거리에 따라서 발화 대상을 편리하게 부르기 위해서 존재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는데, 베이비 길들이기는 대화하는 쌍방의 상황이 전혀 다르고 그 거리와 지칭 대상이 완전히 다른 상황을 연속해서 설정함으로 능숙하게 오해를 살만한 상황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극의 중간에 살인 표범과 애완용 표범이 둘이 동시에 등장해서 서로 오해를 사는 상황을 만들어내고, 더 나아가서 여주인공이 살인 표범을 베이비라 착각하고 실제 포획해서 경찰서로 끌고 들어오는 장면 등은 영화 내내 오해에 오해를 쌓아올리며 만들어낸 훌륭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혼란 속의 중심에 서있는 것이 바로 샌님 같은 남주인공과 자유로운 여주인공이다:베이비 길들이기에서는 건장한 이미지인 캐리 그랜트가 지적인 남주인공 박사의 이미지를 연기하였는데, 이러한 불균형한 모습과 함께 그 어떤 상황에서도 예의범절을 지키는 모습에서 영화가 유지하는 '오해와 어울리지 않는 것'의 맥락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남주인공이 그런 예의범절을 지키는 모습을 통해서 자칫 무례하거나 폭력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에서 선을 유지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여주인공은 남주인공과 대척되어 온갖 광기와 카오스를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맡는데, 남주인공과 상극인 여주인공은 상극이라 할 수 있지만 영화는 이 상극이 자석의 S와 N극 처럼 들러붙는 과정을 쉴세없이 주고받는 펀치 라인의 빠른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여냄으로 로맨틱 코미디 장르로서 성립한다.

 

그리고 피터 보그다노비치의 왓츠 업 닥은 베이비 길들이기의 리메이크 작이다. 리메이크 작인만큼 큰 개념이나 매력적인 부분들을 따오기는 했지만, 흥미롭게도 왓츠 업 닥은 시대가 흐르면서 바뀐 부분과 새로운 장르적 특성들을 함께 녹여낸 작품이었기에 리메이크 이상의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우선 왓츠 업 닥에서 눈여겨 봐야할 점은 작품 자체가 워너브라더스에서 만든 1930년부터 만들어온 단편 만화영화인 '루니 툰'의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일 것이다:애시당초에 제목 자체가 루니 툰의 간판 케릭터인 벅스 버니의 입 버릇(뭔 일이쇼What's Up, Doc?)에서 따온 제목인 거에서부터 시작해서, 여주인공인 바바라 스트라이샌드의 이미지가 묘하게 롤라 버니를 연상케 한다는 점, 극 중 내에 오마주 형태로 루니툰이 영상이 들어갔다는 점들이 그러하다.

 

 

 

루니 툰의 코미디 스타일은 기본적으로 베이비 길들이기 보다 좀 더 '포괄적'이라 할 수 있는데, 루니 툰은 1920~30년대 유명한 코미디언이었던 막스 브라더스가 출연했던 고전 코미디 영화에 베이스를 두고 있고 이 스타일은 단순히 관계 대명사의 오해 외에도 다양한 코미디 요소들을 섞고 있기 때문이다. 막스 브라더스의 영화는 기본적으로 비상식이 상식처럼 묘사되는 점이나 강박적으로 어떤 행동 하나에 집착하여서 영화 속 인물들을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몰아넣는 점에서 웃음을 유발한다. 루니 툰의 코미디 스타일에서 드러나는 폭력성이나 상대 케릭터를 능숙하게 엿먹이는 각본과 펀치라인 등은 전반적으로 막스 브라더스의 코미디 영화 스타일에 기반하고 있다. 다만, 강박적으로 하나의 상황에 집착하는 모습은 루니 툰과 베이비 길들이기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부분이긴 하고, 왓츠 업 닥에서는 양쪽의 전통과 특징들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왓츠 업 닥이 리메이크를 하면서 베이비 길들이기와 달라진 점은 크게 두가지다:첫번째는 과격해진 슬랩스틱과 스턴트들이다. 베이비 길들이기가 30년대 영화에서 보여주는 슬랩스틱이라는 점에서 고전적이긴 하지만 동시에 '점잖은' 모습을 보여주긴 한다. 하지만 왓츠 업 닥은 루니 툰이 1970년대까지 이어지면서 보여준 과격한 슬랩스틱이나 액션 장면들을 영화에 두 장면으로 녹여내는데, 첫번째는 리셉션이 끝나고 난 다음에 일어나는 일련의 슬랩스틱들, 그리고 두번째는 대단원에서 서로가 원하는 가방을 쫒아 추격전을 벌이는 슬랩스틱 시퀸스가 있다. 무심하게 컷을 잡고 그 속에서 과격한 슬랩스틱을 이어가는 과정은 감독인 피터 보그다노비치의 특징과 루니툰의 특징이 함께 들어간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두번째는 성에 대한 묘사일 것이다:기존의 베이비 길들이기에서 보여주는 것과 달리 왓츠 업 닥은 성에 대해서 상당히 자유롭게 보여주는데, 바바라 스트라이샌드의 목욕 장면이나 피아노 위에서 키스하는 장면하는 등은 시대가 변화했음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베이비 길들이기와 다르게 여주인공이 성에 대한 자유로운 묘사를 함으로 단순히 말괄량이나 천연임을 넘어서 그것이 성적인 에너지와 자유분방함, 그리고 더 나아가서 새로운 시대의 인물형(다양한 학문을 전공하면서 박학다식한 모습을 보여주는)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왓츠 업 닥은 단순한 리메이크를 넘어선 리메이크라 할 수 있다. 원작의 쉴세없는 상황 변화와 펀치라인을 유지하면서, 변화한 시대상과 영화가 발전하면서 쌓아올려진 장르적 특징들, 무엇보다도 그것을 하나로 통제하고 자신의 색체를 넣는 감독의 능력까지 모두가 반영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본다면 양쪽 모두 함께 보기를 강력하게 추천하는 바이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고어Gore란 무엇인가. 고어란 영어의 오래된 표현 중, 엉겨붙은 피, 선혈을 표현하는 단어로부터 유래되었다. 피의 카니발 이후, 고어라는 장르는 B급 호러영화에서 일반 영화 전반으로 퍼져나갔다. 이제 인체 훼손과 파괴는 특정 서브컬처의 점유물은 아니다. 인간이라는 존엄성을 가진 인격체가 폭력이라는 프로세스를 통해 피와 근육, 뼈의 파편으로 분해되고 쪼게지는 그 모독의 미학은 대중에게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폭력이 존재하는 곳에는 그 증거물로 고어가 존재할 것이고, 대중매체가 폭력을 다룬다면 고어의 표현방법론은 계속해서 발전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좀 더 나아가보자:인간의 인격을 해체하고 모독하는데 있어서 폭력이란 '물리적'인 방법만이 존재하는 것일까. 한 인간이 인간 미만의 존재로 모독당하는 과정, 더 나아가서 그 과정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불쾌함이란 단지 물리적 고통을 넘어서, 사회 경제적인 빈곤이나 정신적인 질병, 인간과의 관계 등에서 다양하게 드러날 수 있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고어의 미학 범주에 넣진 않겠지만, 이러한 모독과 부패의 과정 역시 광의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고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광의의 고어, 인격체가 주변 환경에 의해서 찌그러 들고 부패하는 과정은 대중적이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폭력과 그 표현 방법론으로 고어는 일종의 '해방감'을 선사한다:현실에서 이루어지기 힘든 비현실적인 욕망(폭력적 욕망)의 실현을 위해 고어의 미학은 발전했다. 터져나가는 머리, 흘러나온 내장, 박살난 신체들은 인간의 어두운 욕망들을 충족하기 위한 미학으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한 인간이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박살나는 과정에서 대중이 일반적인 고어의 미학에서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없다. 이러한 모독과 파괴의 과정은 비일상적인 축제라고 이야기하기에는 현실의 재현에 가깝기 때문이다. 가난, 정신병, 사회적 차별 등은 여전히 현실이다. 그런 실제의 모독을 재현하는 것은 재미와 해방과 거리가 멀다. 

 

물론 이런 인간 모독의 과정을 다루는 작품들이 존재하기는 한다. 아트하우스 계열의 영화들이 그렇고, 여기서 간략하게 다루고자 하는 클린 쉐이븐 같은 작품들이 그러하다. 흥미롭게도 아트하우스 영화에서 사회적인 차별이나 정신병 같은 소재들이 벗어나고자 하는, 벡터가 있는 작품이었다면 클린 쉐이븐 같은 작품들은 가난과 정신병과 같은 것들이 '날 것 그 자체'로 묘사된다는 점에서 특징적인 작품이다.

 

클린 쉐이븐은 망가져버리고 낮게 짖눌려버린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다:클린 쉐이븐의 주인공은 조현병을 앓는 환자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입양된 자신의 딸을 찾기 위해서 머나먼 여정을 떠난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은 일반적인 맬로 드라마 같진 않다. 주인공은 계속해서 환청을 듣고, 편집증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가리기 위해 유리를 가리거나 뒤집으며, 더 나아가서는 실제 자신이 했는지 안했는지 조차 불분명한 상황들(아이를 살해하는 장면이라던가)의 환상에 시달린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서 영화는 밑바닥 삶을 메마른 시선으로 바라본다.

 

클린 쉐이븐의 미학은 쓰레기의 미학이다. 그리고 그 쓰레기들이란 인간 인격의 파괴된 잔여물, 광범위한 의미의 고어라 할 수 있다. 영화 속 세계는 주인공의 머릿속 마냥 난잡하고 무가치하며 흩어져있다. 그가 훔친 차, 도서관에서 흐트려놓은 책들, 잠시 들렀던 그의 부모의 집과 싸구려 모텔 등처럼 그의 주변 모든 것들은 지저분하게 눌어붙은 자국마냥 빛을 바라고 어지럽게 흐트러져있다. 이러한 어지럽고 지저분한 광경들은 인물들이 처해 있는 광경들이 그들이 어찌할 수 없는 환경에 놓여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는 여기에 어떤 감상조차 담지 않고 메마른 감수성으로 보여줌으로 마치 파괴되어버린 인간들의 모든걸 마치 로드킬 당한 고양이의 시체마냥 무덤덤하게 드러낸다.

 

흥미로운 점은 클린 쉐이븐에서 육체의 파괴와 정신의 파괴가 서로 교차되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일 것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몸에 도청장치가 삽입되었다고 믿고, 스스로 머리 가죽을 뜯어내거나 손톱을 파내고 그 밑에 있는 살점을 칼로 후벼 판다. 상당히 고통스러운 이 장면에서 보여주는 주인공의 태도는 흥미로운데, 자신의 조현병적인 집착에 그 행위가 주는 고통에 대해서 어떠한 반응을 하지도 않은채 차갑고 덤덤한 시선으로 자신의 행위를 응시한다. 자신을 파괴하는 과정, 자신의 신체조차 조현병적인 망상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쓰레기처럼 다룬다는 점에서 그의 정신은 파괴되고 부패되어 분해되어간다.

 

하지만 그런 그가 딸 앞에서 어떻게든 정상임을 유지하려 하는 모습을 영화는 극적으로 다루지 않지만, 동시에 영화 내내 보여준 부패되고 망가져버린 그의 삶과 정신 속에서 어떻게든 딸 앞에서 논리와 이성을 지키고 딸을 되찾으려 하는 시도 자체는 영화의 미학에 대비되어 더 극명하게 두드러진다. 하지만 바로 그 다음, 딸을 죽였다고 오해한 형사에 의해서 버려지는 쓰레기처럼 죽어버린다.

 

클린 쉐이븐은 인간과 쓰레기가 같이 뒹굴면서 그것이 결국은 '신뢰할 수 없는 주인공=쓰레기=박살난 인격'이라는 미학을 완성시키지만, 그러한 미학에도 불구하고 딸을 찾아나서는 그 과정에서 일말의 가능성과 그것이 부정되는 순간을 메마르게 다뤄낸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어떤 드라마보다도 특이한 감수성이 충만한 영화라 할 수 있는데, 쓰레기와 같은 풍경과 메마른 감상주의 사이에서 줄다리기 하면서 불쾌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묘한 인상을 준다. 마지막 딸이 아버지가 죽은 과정을 모두 목격하고도 죽어버린 아버지를 추억하며 무전을 하는 장면은 기분 나쁘게 메마른 영화에 남겨진 오아시스 같은 장면일 것이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예르카가 정말 원한 건 움직이는 그들을 보는 거였다.
그래서, 그는 지구 중심으로 가서 태고의 괴물들을 만나는 쥘 베른 (Jules Verne)의 책을 읽고
우리도 똑같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쥘 베른 책 속의 거의 모든 게 실제로 이루어졌기에 우린 가기로 결심했다.

- 태초로의 여행

 

Science Fiction, 과학 소설이나 공상과학으로 불려지는 이 용어는 과학이 만들어내는 가능성에 주목하여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이 장르는 오랜 전통을 자랑한다. 그도 그럴것이 과학이라고 하는 가능성의 영역이 인간이 꿈꾸던 영역들을 하나 둘 실현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초창기 SF 작가였던 쥘 베른이 썼던 소설들을 보자. 쥘 베른이 썼던 소설들 중에서 상당수는 이제 현실로 이루어졌다:달으로의 여행(달나라 탐험)이나 해저로의 여행(해저 2만리), 80일만에 세계를 일주한다던가(80일간의 세계 일주) 등의 다양한 이야기들은 이미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왔다. 이것들은 우리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손이 닿지 않는 영역에 대한 동경이 과학을 통해 언젠가 이루어질 수 있는 염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의 반증일 것이다.

 

그렇기에 과학은, 어떤 의미에서 현대 인류에게 '낭만'으로 다가왔다. 물론, 시대가 바뀌면서 과학이 불러올 재앙과 그것을 휘두르는 인류의 문제 등에 대한 다양한 문제 제기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과학이 만들어낼 미래에 대한 희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과학은 인류가 갖고 있던 '근원적인 호기심'에 대한 발현과 동경이라는 점에서 과학에 대한 인류의 낭만은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어째서 새들은 날 수 있는가? 새들이 날 수 있는 원리를 이해하면 인류도 날 수 있을까? 어째서 태양은 불타오르는가? 우리도 그런 태양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현실을 벗어나,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것에 대해 몽상을 하는 것이야 말로 과학을 시작케 만든 근원이었다. 그렇기에 다양한 면모를 가지게 된 지금에 와서도 과학은 '낭만'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카렐 제만의 영화들은 그런 의미에서 '낭만'으로써의 과학을 다루고 있는 SF 영화라 할 수 있다:과학이 만들어낸 무서운 무기를 다루고 있는 영화(죽음의 발명품)에서조차, 인류는 과학에 대한 희망찬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카렐 제만의 영화들은 단순히 과학이 가져다 줄 미래를 다루고 있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SF 영화들과 다르다 할 수 있다. 죽음의 발명품은 19세기를,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은 근대 귀족사회를, 태초로의 여행은 현대의 아이들이 '과거의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에서 그의 SF 영화 관점은 '과거'에 베이스를 둔다.

 

카렐 제만이 낭만적인 SF를 다루는데 있어서, 주요한 모티브는 쥘 베른이다.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작품을 만들기도 했지만(죽음의 발명품), 카렐 제만이 쥘 베른의 소설들을 인용하는 주요한 모티브는 그것이 '과거의 SF'였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상상은 지금 현실이 되었다. 그렇다면 제만의 영화에서 SF는 더이상 과학이 만들어낼 가능성이 아닌, 일종의 확정된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카렐 제만의 영화들은 어딘가 우스꽝 스럽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스타일이 구현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카렐 제만 영화에서의 세트와 애니메이션 스타일일 것이다:19세기 사람들이 20세기와 21세기를 상상하면서 만들어낸 동판화 스타일의 일러스트들을 기반으로 카렐 제만은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내는데, 그 세밀함과 동시에 시대착오적인 부분들은 관객에게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쥘 베른으로 대표되는 과거의 SF를 통해서 카렐 제만은 과학이 가져다 줄 미래적인 가능성이 아닌, 과거인이 갖고 있는 과학에 대한 낭만과 자세가 현재가 맞닿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리고 그의 영화 속에서 과학의 핵심적인 속성은 여전히 과거나 현재나 맞닿아 있다. 태초로의 여행에서 아이들은 일지를 기록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탐사는 영광이나 모험이 아닌, 과학적인 자세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그들이 태초의 삼엽충을 목격하기 위해서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을 했던 것처럼, 과학적인 자세는 호기심과 그 호기심을 인류 모두에게 공유하기 위해서 정확한 측정과 공유된 명칭을 부르는 것, 이를 통해서 우리만의 지식을 넘어서 인류 전체가 함께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지는 것이 과학의 본질이라 그는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들 중 허풍선이 남작은 SF의 낭만을 가장 훌륭하게 체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의 시작에서 우주 비행사는 달에 도착해서 거기 먼저 도착한 근대의 시인들과 모험가들을 만난다. 그리고 모험가 허풍선이 남작은 그에게 과거의 모험들을 체험하게 한다. 술탄의 왕궁, 생선의 뱃속, 요새 등등을 탐험하면서 허풍선이 남작이 보여주는 모험들은 과거 낭만 소설에서 보여준 허풍 넘치는 모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공주를 가운데 두고 우주 비행사와 허풍선이 남작 둘이서 삼각관계를 구성하는 모습도 그러하다.

 

하지만 우주비행사와 삼각관계로 대립각을 세우던 허풍선이 남작도 결국 그를 인정하고 그가 위험에 처할 때, 그를 도와준다. 허풍선이 남작(근대의 낭만소설)도 우주 비행사가 꿈꾸던 세계(SF의 세계)가 '낭만'이라는 측면에서 자신과 맞닿아있음을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근대에서 현대로, 현대에서 다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속에서 서로 다른 삶을 살았지만 '낭만'이라는 꿈 하나로 이어진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은 SF와 과학이 새로운 시대의 낭만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달은 아직까지 시인들과 몽상가 들의 것이고,
과감한 공상가들과 흰 가발의 모험가들 것이지.
긴 코트 입은 공상가들과 최신 소설에 나오는 이상한 헬멧을 쓴 자들의 것
그리고, 물론 연인들의 것!

그들에게 달은 언제나 가장 사랑스러웠지!
그리하여, 난 유쾌하게 모자를 벗어 던지네 별들에게 날아 가도록!

우리를 대신해, 모든 용감한 친구들을 맞이하라고 
그들은 이미 우주의 반기는 품속으로 길을 떠났으니!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잭 스나이더가 만든 새벽의 저주는 훌륭한 오락영화였다. 1978년 동명의 전설적인 영화를 리메이크한(국내에서는 시체들의 새벽 - 새벽의 저주로 이름이 달라지긴 했다) 이 영화는 달리는 좀비와 생존, 좀비와의 근접하여 싸우는 야만적인 총싸움, 대중화된 고어까지. 20년이 다되어가는 지금에 와서도 대중문화와 좀비를 논한다 하면 새벽의 저주를 빼놓고 이야기를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조지 로메로가 이 영화를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유명한 사실이다(링크) 그리고 잭 스나이더 판의 리메이크 판에 대해서 좋지 않게 평가하는 평론이나 칼럼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사례 링크)

 

이러한 비판적 평론들의 근저에는 시체들의 새벽이 갖고 있는 특수성이 내재되어 있다. 물론 새벽의 저주와 시체들의 새벽에서 공통적인 부분들은 존재한다:좀비들과 쇼핑몰, 좀비보다 더 무서운 인간들 내부의 갈등. 새벽의 저주는 시체들의 새벽 원판에서 주요한 모티브들에 집중하여 영화를 재구성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주요 모티브들을 하나로 엮는 영화의 시선이 새벽의 저주에서는 완전히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대체 잭 스나이더가 원작의 무엇을 보고 리메이크를 했는지 모르겠다' 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새벽의 저주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지 로메로라는 감독을 이야기해야할 것이다:전설적인 좀비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만든 감독으로 알려져있긴 하지만, 로메로의 필모그래피는 좀비 3부작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놀이공원이나 마틴 같은 영화를 만들기도 한 조지 로메로는 아마도 미국 영화감독 중에서 '분명하게' 좌파적이라 이야기할 수 있는 감독이었다. 놀이공원 자체가 노인 복지와 계급 사회, 착취에 대해서 정면으로 비판한 작품이었고, 마틴은 미국 중산층의 교외 문화와 삶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작품이었다. 잘 알려진 좀비 3부작 역시 좀비와 인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시체들의 낮이나, 인종 문제의 우화로도 읽힐 수 있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엔딩도 그러한 요소들이 산재했다.

 

그리고 시체들의 새벽의 테마는 '죽어버린 미국 사회'였다. 영화의 시작, 전세계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되살아나는 일들이 일어나고, 주인공은 그 상황을 방송으로 정리하여 보도를 한다. 하지만 이런 중요한 사태를 보도를 하는 와중에 사람들은 세상이 망했음을 직감하고 하나 둘 자신의 자리에서 이탈을 하고 주인공 역시 도로교통국 소속인 연인과 함께 방송국을 버리고 도망친다. 영화의 시작점이 바로 의무의 방기인 셈이다. 그 다음 시퀸스는 더욱 더 노골적인데, 군대가 건물로 진입하여 산자와 죽은자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죽여버리고, 거기서 다른 두 주인공들이 피로감을 느끼고 탈출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이것은 생존은 아니다:분명 이 시점까지 영화 속의 미국 사회와 정부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는 것, 이제 더이상 정상적으로 이 이후 살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이 직시하고 자신의 의무와 직무를 내던지는 것으로부터 영화가 시작하는 셈이다. 영화의 시작은 바로 '미국이라는 국가가 죽어가는 상황'이었던 셈이다.

 

위와 같은 점에서 시체들의 새벽의 시작은 몇몇 아포칼립스 장르에서 보여지는 무너지는 세계에서 아나키적인 자유와 능력에 따라 생존하는,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신자유주의적인 자유 가치'와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좀비랜드 같은 영화를 보자. 거기서 좀비 사태는 주인공들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일종의 해방구로 작용한다. 물론 이것만으로 좀비랜드가 신자유주의적인 가치를 옹호한다고 볼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얼마나 이러한 좀비 아포칼립스,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에서 신자유주의적 판타지가 깔려있는지를 반증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체들의 새벽에서 보여주는 죽어가는 세계 역시도 가치와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무너짐은 개인이 자유로운 세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헬기를 타고 지나가듯이 사람들은 무표정하게 지나가는 좀비들을 즐겁게 사냥한다. 하지만 동시에 쇼핑몰을 떠도는 좀비들이 실제 사람과 등치됨을 보여줌으로 좀비가 인간과 은연중에 다를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것들을 즐겁게 죽여버리는 인간은 무엇이 되는 것일까? 그리고 역으로 정부와 사회가 그렇게 좀비들을 죽여버리는 세계 자체를 등져버리고 도망치는 사람들은? 시체들의 새벽에서 보여주는 사회가 무너지는 것은 단순히 '좀비'라는 외적인 위협에 의해서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사회와 조직은 더이상 공공의 선과 가치를 지키지 못하고, 내재된 폭력성과 광기(초반 시퀸스의 경찰중 하나가 미쳐 날뛰며 아무 관계없는 민간인들을 사살하듯이)을 표출하며 스스로 망가져간다. 그리고 멀쩡한 사람들은 그러한 광기에 정면으로 맞서 마지막까지 싸우는 것이 아닌, 책임과 의무를 방기하고 멀리 도망칠 뿐이다. 말하자면 체제와 구조, 가치의 종말과 죽음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체들의 새벽은 해방구의 세계가 아니다. 모든 가치가 무너진 사회를 전제하고, 멀쩡한 사람들이 사회를 등지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 사람들이 죽어버린 소비 문화인 쇼핑몰에 갇혀버리는 이야기이기도 하다:헬기를 타고 도망치던 주인공 일행은 물자가 풍족하게 쌓여있는 쇼핑몰을 발견하고 점거한다. 흥미로운 점들은 좀비들이 마치 살아생전 쇼핑몰에서 쇼핑을 하듯이 쇼핑몰을 돌아다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회가 무너지고, 세상이 미쳐돌아가도 쇼핑몰에는 물건이 그득이 쌓여있고 소비자들(좀비들이지만)이 영원히 돌아다니고 있다는 점에서, 시체들의 새벽의 쇼핑몰은 생존을 위한 공간보다도 '죽어버린 자본주의 소비 사회 그 축소판'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생존자들이 캐나다로 도망가다가 쇼핑몰에 사로잡혀서 머무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제는 더이상 의미없는 물질들에 사로잡혀 있다가 다른 생존자들과 무의미한 물질들(폭주족들이 쇼핑몰을 강탈할 때, 마치 '블랙 프라이데이' 할인을 두고 경쟁하는 소비자들처럼 보여준 것은 그러한 부분을 잘 드러낸다)을 두고 싸우다가 공멸하는 것은 소비사회에 대한 음울한 경종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시체들의 새벽은 반 체제, 반 구조적인 동시에 더 나아가서 '반 장르적'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좀비 영화들이 좀비들에 맞서서 싸우고, 살아남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데 반해 시체들의 새벽은 죽어버린 물질들에 집착하다 다른 생존자들과 싸우다 공멸하는 쪽에 가깝기 때문이다. 물론 이후 영화들이 후자의 요소(생존자들과의 자멸적인 경쟁)에 초점을 맞추기는 했지만, 이후 영화들이 생존이라는 중요한 요소를 두고 경쟁한 것과 시체들의 새벽이 보여주는 결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시체들의 새벽은 어떤 의미에서 장르의 시조였지만 동시에 반 체제적이고 반 장르적인 영화였다. 이는 로메로의 영화 세계와 크게 맞닿아있다. 그의 다른 영화인 마틴을 보자. 거기서 주인공은 흡혈귀이지만 동시에 흡혈귀가 아니다. 처음에는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의 피만 마실 수 있었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그 피를 마시는 규칙은 무너지고 주인공은 혼란을 경험한다. 황폐하고 늙어버린 교외를 배경으로 중산층 문화에 대해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조지 로메로는 통상적인 관념을 거부하는 사람이었다. 이는 그가 영화에서 좀비를 다루는 방법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그들은 뻣뻣하기는 하지만 생전의 삶의 기억에 매달려 계속해서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있는 존재들이다. 어딘가 우스꽝스럽게 분장한 그들은 루치오 풀치의 좀비(썩어문드러진 존재들)들에 비해서 덜 '좀비'스럽지만, 그 덕분에 다양한 인종과 계급의 사람들이 나온다는 점에서 호러 영화에서 좀비의 모티브인 '대중'에 더 가깝다. 

 

좀비를 '우리와 닮았다, 아니 우리일지도 모른다'라는 발상은 좀비 영화의 '죽여도 되는 존재'와 완전히 상반된 개념이다. 조지 로메로는 쇼핑몰과 그곳을 배회하는 좀비들을 통해서 소비사회 그 자체를 풍자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대중을 몰아내고 그것을 차지하는 주인공들과, 아무런 의미없는 사치재와 물질들을 두고 싸우는 폭주족들의 모습을 통해서 세상이 망해도 여전히 물질에 얽메여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판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로메로가 이후 좀비 영화를 두고 좋지 않게 본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링크) 좀비들은 타자화되었지만, 동시에 '우리들 모습' 그 자체였다. 좀비들을 쉽게 죽여버리는 자유를 논하는 것은 역으로 우리가 '타자를 어떻게 보는가'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로메로는 이러한 명제를 정확히 간파하였고, 그런 통찰력은 시체들의 새벽에 전반적으로 잘 녹아있다.(이러한 통찰력에 대한 오마주는 숀 오브 더 데드에서 잘 드러나는데 

 

결론을 내리자면, 시체들의 새벽은 전설 그 자체인 동시에 장르를 넘어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장르적인 모티브인 동시에 장르가 가질 수 있는 정치적 위험성과 그에 대한 통찰력도 함께 들어 있다. 시간이 된다면 꼭 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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