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괴물 영화에서 괴물의 본질은 그로테스크함이다. 그리고 그 그로테스크함은 인간이 갖고 있는 어두운 속성과 맞닿아 있다. H.R.기거가 디자인하고 리들리 스콧이 감독한 에이리언의 제노모프가 성기와 삽입, 섹스, 생명의 재창조에 대한 기괴한 은유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 기괴한 은유는 필연적으로 고전적인 괴물에서 찾아볼 수 없는 현대적인 에너지의 폭발에 기반한다. 고전적인 괴물이 동물과 인간을 섞거나 동물을 재해석함으로써 동물이 갖고 있는 특수성에 주목하였다면, 현대 영화 매체의 괴물들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산업화되고 재생산된 기괴함,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욕망과 공포에 주목한다.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두 영화, 그들Them!(1954)과 그것은 살아있다It's Alive(1974)이다. 20년의 텀을 두고 세상에 나온 괴물 영화는 서로 다른 공포(방사능 오염과 유전자 변이에 대한 공포 vs 탈리도마이드와 기형 임신, 중산층의 사회적 위신을 둘러싼 불안과 공포)가 각각의 괴물(거대화된 거미와 살인 괴물 아기)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구현되었다. 서로 소재와 내용, 연출 톤에도 불구하고 이 두 영화는 클라이맥스에서 LA의 하수도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묘한 접점을 갖는다. 마치 거대한 도시의 아래 구불구불 꼬여 있는 내장과도 같은 하수도를 해매며, 두 영화에서 인물들은 가장 내밀한 공포와 마주한다.

 

먼저 그들Them!(1954)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영화는 명백히도 원자력 시대의 도래에 대한 공포를 드러낸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이 공포를 다루는 방식일 것이다. 핵실험이 있었던 뉴 맥시코의 사막에서 대서양으로, 그리고 LA의 하수도에 도착하기 까지, 영화는 논리적인 흐름과 판단에 따라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영화 내내 인물들은 감정이나 공포에 휘둘리지 않는다. 거대 개미를 추적하는 과정은 합리적인 추론이며, 정부는 핵실험의 실수를 숨기는데 전전긍긍하기 보다는 대중에게 정확하고 확실한 정보를 전달하며 계엄령을 통해서 질서를 유지하고자 한다. 

 

일반적인 공포 영화에서 공포의 대상이 괴물 그 자체였다면, 영화 그들에서 공포의 대상은 거대 개미가 아닌 다른 무언가이다. LA 하수도에서 마지막 여왕 개미의 알집을 태우면서 그들은 핵실험의 영향이 얼마나 클지, 어째서 개미만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되묻는다. 거대한 개미가 나올 수 있다면, 거대한 전갈도, 아니면 다른 이상한 무언가도 등장할 수 있다. 그렇다면 거대한 개미는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다. 즉, 영화에서 근본적인 공포는 마지막 박사의 표현대로 바로 새로운 시대인 원자력 시대에 대한 공포이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대처하더라도, 무엇이 일어날지 모르는 시대가 도래했다. 불타는 여왕 개미의 알집을 바라보는 인물들의 표정은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의 표정이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시대에 어떤 재앙이 올지 모르는 사람들의 막연한 절망감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그에 반해서 그것은 살아있다It's Alive는 좀 더 내밀하지만 사회적인 공포에 주목한다. 임산부 입덧을 막기 위해서 산모들이 먹었던 탈리도마이드가 기형아를 만들어냈었던 사건에 모티브를 얻은 영화는 무엇하나 부러울 것 없는 부유한 중산층 가정이 살인 기형아를 낳았을 때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가에 주목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살인 기형아를 둘러싼 이야기가 개개인의 드라마가 아닌 사회적인 욕망이라는 것이다:살인 기형아를 낳은 아버지는 자신의 사회적 위신을 생각해 기형아가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고 극구 부정하며 심지어 자신의 자식인 기형아를 직접 자기손으로 죽이려 한다. 중산층이 소비하는 다양한 약물을 만드는 제약회사는 기형아 아이가 자신들의 약물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게 밝혀지는게 두려워 살인 기형아를 완전히 박살내버릴 것을 경찰 반장에게 은밀하게 제안하기도 한다. 결국 살인 기형아라는 사건을 둘러싸고 다양한 사회적 욕망들이 충돌한다.

 

그것은 살아있다에서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과정 자체를 마치 사실을 다루는 듯한 '다큐멘터리'의 문법으로 다룬다는 점이다. 영화는 극적인 연출과 감정을 고조할만한 이야기와 극의 장치들을 최대한 억누른다. 그 결과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고요하지만 그 속에서는 휘몰아치는 다양한 사회적 욕망들의 소용돌이다. 객관적으로 연출되는 이들의 욕망은 관객에게 이입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그들과 달리 그것은 살아있다는 영화가 더 차분한 동시에 끓어오른다.

 

그러나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기형아의 아버지는 LA 하수도의 어둠 속에서 자신의 자식에게 자신의 사회적 위치 때문에 하지 못했었던 내밀한 고백을 한다. 기형아 역시도 자신의 가족이라는 것을 인정한 아버지는 자신의 자식을 안고 자식을 죽이려는 경찰을 피해 배배꼬인 하수도 통로를 해맨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 솔직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빠져나갈 수 있는 곳은 없고, 자식은 경찰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영화는 이러한 일이 시애틀에서도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끝을 낸다. 기형아에 대한 두려함, 중산층의 사회적 지위와 허영을 둘러싼 공포가 단순히 그들만의 것이 아닌 당시 미국사회가 공유하던 것임을 암시하면서 말이다.

 

영화 그들과 그것은 살아있다는 서로 다른 욕망과 공포, 연출 방식을 통해서 각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흥미로운 점은 그서로 다른 이야기가 클라이맥스를 맞이하면서 LA 하수도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비슷한 결과를 맞이한다는 것이다. 그들에서 하수도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내는 여정의 종착지로, 그것이 살아있다에서 하수도는 사회적 위신과 욕망을 뒤로한채 괴물이 된 자신의 자식 앞에서 솔직해질 수 있는 공간이 된다. 그 어두운 공간에서 인물들은 공포의 본질과 대면한다. 마치 다양한 욕망이 꿈틀거리는 도시의 거대한 창자 속에서 말이다. 두 영화는 모두 그런 점에서 훌륭한 괴물영화라 할 수 있다. 괴물과 인간의 공포, 그리고 그 그로테스크함이라는 본질을 정확하게 궤뚫어 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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