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382건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로베르 브레송은 자신의 저작들을 영화라는 시네마라고 부르기보다는 시네마토그래프라는 표현을 쓰기를 고집하였다. 시네마토그래프는 로베르 브레송이 창안한 단어로써, 적절한 번역을 찾기는 어렵지만 영화에 있어서 영상보다는 기록적 측면에 무게를 실어주는 단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브레송의 일지가 보여주는 '기록'에 대한 강조와 '연극'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가 동시에 공전하는 것은 납득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영화를 찍을 때, 브레송은 배우의 연기에 대한 어떠한 지시도 없이 기계적으로 반복하게 만든 후, 그것을 촬영하여 편집하여 작품을 만들었다. 그렇기에 브레송 영화는 관객의 감정을 고양하기 보다는 관객이 배우와 영화를 관조하게 만드는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브레송의 스타일은 지금까지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브레송의 미학은 벤야민이 영화라는 예술에 대해서 논평하였던 내용들을 공유하고 있다:벤야민은 영화가 예술이 되는 것을 논하기보다 예술이 영화로 인해 무엇이 바뀌었는지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하였다. 기술이라는 형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의 내용을 변화시킨다. 그렇다면 벤야민이 영화라는 매체이자 기술의 특징이 무엇이라고 정의내렸을까? 벤야민은 영화의 다양한 부분에 주목하였지만, 그 중 핵심으로 꼽는 것은 '아우라'의 제거였다. 아우라의 특징은 바로 진품성이다:어떤 예술 작품이든 감상자가 진품을 마주할 때만 갖는 독특한 느낌이 있다. 그 진품성인 아우라를 대량생산을 통해 제거하는 것이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이다. 


연극과 영화의 차이는 이러한 아우라 유/무를 더욱 뚜렷하게 드러낸다. 브레히트는 뛰어난 연극은 하나의 '스포츠 경기'와도 같다고 이야기하였다. 그 어떤 연극도 동일하게 상연되지 않는다. 연기자의 컨디션, 느낌, 관객의 반응 등등 연극의 모든 부분들은 하나 하나 재현 불가능한 역동성을 띄고 있으며 뛰어난 연극 감상자는 그러한 배우의 근육, 움직임, 눈빛, 그날 무대의 분위기 등을 모두 감상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영화는 다르다. 영화는 대량복제를 통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진품성이 없으며, 또한 편집/촬영 프로세스로 인해 연극 배우가 몰입하여 만들어낼 수 있는 단 한번의 신비로운 연기는 성립될 수 없다. 벤야민은 이러한 아우라의 거세가 영화라는 예술이 대중예술로 거듭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보았다. 더이상 예술은 특수한 환경과 공간, 시간 내에서만 성립되지 않는다. 영화를 통해서 예술은 수많은 대중에게 배급되고 보급된다. 그렇기에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부터 소비되는 과정까지 영화는 하나의 산업이 된다.


그렇다면 브레송과 벤야민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벤야민은 영화 산업에 있어서 스타 시스템과 거짓된 아우라가 갖는 허구성을 비판하였다. 스타 시스템은 배우의 연기-방향성의 부여-감정의 고양-고양된 감정을 실제의 스타에 덧입혀 착각하는 것으로 성립되며 벤야민은 이것이 거짓된 아우라라 지적하였다. 흥미롭게도 이는 브레송의 연극과 영화 스타에 대한 혐오와도 일맥상통한다. 브레송에게 있어서 배우는 어떤 극적인 감정(연극과도 같은)을 이끌어내기 위한 연기를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배우에게 대본을 읽게 하고, 그 어떤 연기지도 없이 여러번의 연기를 한 것을 촬영/편집하는 브레송의 영화 스타일은 관객에게 감정을 고취시키는 일정한 방향성을 부여하고자 하지 않는다. 브레송에게 있어서 모든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다큐멘터리였던 것이다. 그것은 사실의 기록이며, 관객들이 보는 것은 극적으로 고양되는 감정이 아닌 카메라 앞에서 담담하게 표현되는 삶 그 자체이다. 그렇기에 브레송은 벤야민이 이야기했던 영화 개념에 가장 부합하는 감독이라 칭할 수 있으며, 삶을 묘사하는 것이 아닌 삶을 기록하는 영화로써 영화만이 갖고 있는 특징을 잘 포착해낸 거장이라 할 수 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상]러빙(2016)  (0) 2017.04.08
[감상]로건(2017)  (0) 2017.03.05
에일리언 : 코버넌트 트레일러  (0) 2016.12.30
[감상]핑퐁  (1) 2016.12.18
[감상]밤과 안개  (0) 2016.12.12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멍...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상]로건(2017)  (0) 2017.03.05
[칼럼]벤야민과 브레송에 대한 짧은 이야기  (0) 2017.01.29
[감상]핑퐁  (1) 2016.12.18
[감상]밤과 안개  (0) 2016.12.12
가디언즈 오브 겔럭시 2 트레일러  (0) 2016.12.04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다소 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마츠모토 타이요의 작품에서는 영웅이라는 테마가 중요하게 등장한다:논리와 규칙을 뛰어넘는 자로서의 영웅. 마츠모토 타이요는 어린아이가 믿을법한 동화 속 세계의 영웅들이 현실의 무서움을, 고통을 뛰어넘어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마츠모토 타이요는 그 영웅의 어두운 속성마저도 세심하게 케치해낸다. 넘버 파이브에서 파이브는 자신의 전우이자 형제였던 자들을 한명 한명 사냥해나간다. 철콘 근크리트에서 쿠로는 시로가 없는 세계에서 홀로 폭주한다. 타이요는 자칫 잘못하면 무거워지거나 복잡해지는 이야기를 특유의 흑백의 이분법적인 세계에서 세밀하게 캐치해내며, 어린이들의 발상과 상상력에 기반해서 작품을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마츠모토 타이요는 세상의 복잡한 이야기들을 유치하지만 모두가 공감할 수 있고 단순하게 다뤄내어 공감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만화가다.


그리고 유아사 마사아키는 마인드 게임과 케모노즈메, 다다미 넉장반 세계일주를 만들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애니메이션 세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한 감독이다. 그의 애니메이션은 표현과 선들이 자연스럽게 변화하며, 다른 영상 장르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애니메이션 만의 독특한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그에게 있어 이미지는 자유롭게 변화하며 모든 것들에 생명을 부여한다. 그렇기에 살아있지 않은 것에 생명을 부여한다는 의미에서 애니메이션의 어원인 Animate(강신하다, 살아 움직이게 만들다)라는 표현에 가장 적합한 감성을 가진 감독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마츠모토 타이요의 핑퐁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다고 하였을 때, 어떻게 보면 정말로 준비된 감독이 작품을 맡았다 평할 수 있었다.


핑퐁 애니메이션은 마츠모토 타이요의 핑퐁 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옮긴 작품이다. 하지만 유아사 마사아키가 만들어내는 핑퐁의 애니메이션은 그저 만화 버전의 복제라고 할 수는 없다. 흥미로운 점은 핑퐁 애니메이션은 핑퐁 만화버전의 '대척점'에 서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츠모토 타이요의 핑퐁은 전적으로 영웅은 일반적인 사람들, 우리라 할 수 없으며 영웅은 떠나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조용히 일상에 남아 날아오르는 영웅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비관론이나 열패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마츠모토 타이요는 고요히 영웅과 이를 둘러싼 사람들, 그리고 영웅이 날아오르는 과정을 담담히 서술한다. 그의 매마른 필치로 서술되는 그림들은 어딘가 황량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그 속에는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있다:타이요는 순간 순간 중요한 장면을 선의 굵기로, 동적인 필치로 감상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는 장면들을 연출한다. 마츠모토 타이요는 분명 영웅을 긍정한다. 모든 논리와 규칙을 뛰어넘는 자, 가장 필요할 때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주며 영감을 주는 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어떤 패배주의적 감상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영웅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수 없다. 그렇기에 타이요는 고요히 영웅이 없는 세계를 그려낸다. 쓸쓸한 바닷가에서 바닷가 너머의 영웅을 반추하면서 말이다.


흑백의 매마른 색조속에서 표현되는 만화 핑퐁의 세계는 애니메이션의 세계로 넘어오면서 총천연색의 새로운 맥락을 지니게 된다. 즉, 매체적 차이에서 오는 맥락의 변화로 인해 우리는 마츠모토 타이요의 핑퐁을 똑같이 애니메이션에서 재현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리고 유아사 마사아키는 그것을 정확하게 이해한다. 유아사의 위대함은 그 장르적 차이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시대의 변화(핑퐁 원작은 90년대 후반의 그려진 작품이지만, 유아사의 작품은 2010년대에 만들어졌다)를 작품에 교묘하게 접합시키며, 더 나아가 약간의 뉘앙스 차이로 마치 동전의 양면 같은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었다는 것이다. 수많은 창작자들이 원작보다 더 나은 원작을 만들겠답시고 재앙을 불러일으켰던 걸 생각한다면, 유아사의 태도는 실로 존경스럽다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유아사의 핑퐁은 기본적으로 타이요의 핑퐁과 똑같이 영웅에 대한 믿음을 공유한다. 영웅은 존재한다. 영웅은 우리가 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며 우리와 함께한다는 것을 긍정한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타이요의 핑퐁은 흑백의 세계로 이를 묘사하는데 반해서, 유아사의 핑퐁은 이를 천연색으로 묘사를 한다. 그렇기에 타이요의 핑퐁에는 없는 독특한 생기가 유아사의 핑퐁에는 흐르게 된다. 그리고 유아사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이미지와 사고의 흐름은 이를 더욱 가속시킨다. 만화의 칸들을 연상시키듯이 분절되는 시퀸스 내에서 컷을 하나하나 구성하며 독특한 리듬을 만들어내며, 탁구공과 라켓이 내는 경쾌한 소리의 리듬은 마치 작품이 살아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심어준다. 후반으로 갈수록 유아사의 핑퐁은 탁구공이 오고가는 시퀸스를 애니메이션, 아니 심지어 영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롱테이크로 만들어냄으로써 작품을 보는 감상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주게 된다.


타이요가 어딘가 메마른 감성으로 이를 묘사하는데 집중하였다면, 유아사의 총천연색 자유로운 감성이 우리에게 심어주는 것은 일종의 축제이다:유아사의 핑퐁은 핑퐁이라는 작품 자체를 거대한 축제로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현실의 메마른 논리 속에서 한 명 두 명 조용히 사라졌던 타이요의 핑퐁과 다르게 모두에게 공평하게 참여의 기회를 주려 한다. 바로 '탁구'로 하나되는 세계, 꿈과 희망이 존재하는 세계에 대해서 말이다. 재밌는 점은 타이요가 꿈과 희망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오지 않음을 긍정하는 것을 유아사 역시도 긍정한다는 것이다:결국 페코는 카자마에게 날개가 있음을 증명하였지만, 카자마은 호시노 만큼 날아오를 수 없다. 스마일 역시도 마찬가지며, 결말 역시 다른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뀐 것일까?


유아사는 총천연색의 세계와 함꼐 아주 세밀한 디테일들을 틀어버림으로써 결말의 뉘앙스를 180도 바꾸는데 성공한다. 극 중 모든 인물들은 탁구라는 매체 아래 묶여있으며, 각자의 삶을 산다. 모두가 영웅이 되진 않는다. 하지만 영웅이 꾸는 꿈을 함께 꾸며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유아사는 믿는다. 그렇기에 지나간 세월을 반추하며 다시끔 여름(페코와 스마일이 탁구 대회에 나갔던)이 온다고 이야기하는 타이요의 핑퐁과 다르게, 유아사의 핑퐁은 다시금 (축제의) 여름이 온다고 이야기한다. 장르적 특성을 십분활용함으로써 디테일을 바꿈으로써, 유아사 마사아키는 동일한 작품을 별도의 시나리오 수정 없이 완벽하게 대칭되는 작품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아니 내게 있어서 많은 부분을 시사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본인은 본인 인생에 가장 힘든 순간에 유아사 마사아키의 다다미 넉장반 세계일주를 보았고, 이를 글로 풀어낸 적이 있었다(http://leviathan.tistory.com/1501 5년전의 일이다) 그리고 직장을 다니고 있는 지금, 어떻게 글을 쓰고 컨텐츠를 소비할 것인가 고민하는 본인에게 핑퐁은 불현듯 다시 돌아왔다(물론 이걸 본 건 재작년의 일이었다...) 마치 운명처럼 말이다. 본인이나 이 글을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서브컬처는 그저 즐기고 잊어버리는 단순한 흥미거리가 아닐 것이다. 본인이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삶의 중요한 순간에 함께한 작품이 있었다는 것을, 설령 그것이 내 인생을 바꾸진 못했더라도 그 순간에 함께 하고 영감을 주었다는 점만으로 영원히 기억될 작품이 있었다는 것은 정말로 크나큰 축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비록 영웅이 될 수 없을지라도, 영웅과 함께 꿈을 꾸고 같은 것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 유아사의 핑퐁은 서브컬처의 세대라 할 수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 영원히 기억될 시대의 작품이라 평하고 싶다. 


끝으로 핑퐁 애니메이션의 오프닝과 가사를 함꼐 올리며 글을 끝내도록 하겠다.








새로운 시대가 왔는데도 바짝 쫄아서 나오려 하지 않아.
길이 너무 곧게 뻗어서 도망칠수도 없어.
선택에도 길이 없어서(명상중!)
혼자서는 뭘 하고 싶은지 알 수 없어서(망상중!)

자신과 타인을 비교해서 자기를 구석으로 몰아넣어

나는 세계에 단 한명뿐이야,
언제나 세계에 단 한명뿐이야.

그런데 하는게 좀...

나만 할 수 있는 일 같은건 없을지도 모르지만

아무것도 안 한채 사라질거야?
아무것도 안 한채 사라질거냐고?
아무것도 안 한채 사라질거 같냐고!

뭐라든! 언제든! 기분 좋은 일을 알고 싶은것 뿐이야!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다큐멘터리 장르는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있어서 지루한 영화 장르라 할 수 있을 것이다:왜냐하면 역사적 사실에는 어떤 극적 구성이 없기 때문이다. 어떠한 반전도, 충격적인 진실도, 징벌과 포상받아 마땅한 선과 악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에는 오로지 사실만이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바로 다큐멘터리가 갖는 이 장르적 특징이 다큐멘터리를 가장 보기 힘든 지루한 장르로 만들었다. 또한 사실의 나열이라는 측면에서 다큐멘터리는 다른 매체들(책과 같은 기록 매체)에 비해서 하등 나아보일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라는 '영화' 장르는 다른 사실의 기록 매체들과 다른 힘을 갖고 있으며, 몇몇 다큐멘터리들은 종종 '기록'이라는 다큐멘터리의 장르적 경계를 벗어나기도 한다.


밤과 안개는 유대인 학살을 다룬 다큐멘터리다:처음 공개될 당시, 영화 속에 담겨 있던 끔찍한 기록 영상들은 수많은 논란거리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30분에 불과한 이 짧은 다큐멘터리는 유대인 학살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 묵직하고도 날카로운 통찰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공개된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밤과 안개는 다큐멘터리의 걸작이자 우리에게 무거운 울림을 가져다 주는 작품이다.


밤과 안개의 미학적 핵심은 사실의 '재현'에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극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재구성이나 다큐멘터리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고발과는 다르다. 우선, 극적인 재구성은 일정한 흐름(플룻)에 따라서 이야기의 화소를 재배치하고, 프레임과 컷, 쇼트를 구성한다. 물론 밤과 안개 역시도 유대인이 '처리'되는 과정을 기록물 영상에 따라 배치함으로써 추방-격리-처리라는 나치 독일 유대인 '처리' 프로세스 3단계의 큰 그림을 보여준다. 하지만, 밤과 안개의 그것은 작품을 만든 창작자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다:밤과 안개에서 기록물과 나래이션은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 최대한 담담하게 서술하고자 하며, 이러한 비인간적인 행태가 마치 일상적으로 있었던 일이었던 것처럼 묘사한다.


그렇다면 밤과 안개는 유대인 학살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고발'하고자 한 것일까? 물론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의 미덕 중 하나는 숨겨져있던 사실을 재조명하여 고발하는 것도 있다. 하지만 고발이란 보통 단순한 과거 사실의 폭로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대저 과거 사실의 고발이란 현재의 사실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존재한다. 우리는 나치 독일의 부역자들이 적극적인 부역자들 뿐만 아니라 소극적인 동조자들, 나치를 막지 않았던 독일의 일반 시민들, 더 나아가서 그들이 그 지경에 이르기 까지 침묵으로 동조했던 세계의 열강과 국제 정세, 사상적 흐름, 시대가 있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책임들을 나치와 히틀러라는 표상에게 뒤집어씌우고 수많은 이들이 침묵했었다는 사실 역시 우리는 은연중에 나마 알고 있다. 그렇다면 밤과 안개는 이를 지목하고자 한 것일까? 어느정도는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밤과 안개는 우리가 눈돌리고자 했었던 비인간적인 행태를 다루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사실을 고발하여 지금 현재의 구체적인 사실을 고발하고자 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다큐멘터리적 고발이 우리에게 구체적인 과거의 사실로부터 새로운 현재의 사실을 이어서, 충격과 깨달음을 주는 일종의 계몽적인 역할을 자처하였다면, 밤과 안개에는 현재의 구체적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처음 진술하였던 '재현'으로 돌아와서 집중하여야 한다:영화는 컬러로 표현된 현대의 수용소에 도착해서, 그 위에 흑백의 영상을 덧입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밤과 안개는 현재와 과거를 교차시킴으로써 현재와 과거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데 집중한다. 그것은 마치 현재와 과거는 연결되어 있고, 과거의 끔찍했었던 경험들이 여전히 우리와 함께 같이 살아숨쉬고 우리를 짓누르는듯이 느껴지게 만든다. 알렝 레네가 밤과 안개를 통해서 만들어내고자 한 것은 과거의 사실이 현재의 사실로 1대1 대응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과거 사실에 대한 고발도, 어떤 감정을 이끌어내기 위한 사실의 재구성도 아니었다.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현실에 입히는 것, 그것이 여전히 현실에 맞닿아있으며 이후의 우리들은 어떤 도덕적 책임을 져야하는가라는 무거운 질문이 밤과 안개가 재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러한 재현은 때로는 우리에게 사실의 고발보다 더욱 무거운 질문을 맞딱뜨리게 만든다:빛을 향한 그리움에서 독재정권에 납치당한 사람들의 유해를 찾기 위해서 광활한 사막을 하염없이 해매이던 실종자 가족들의 모습은 어떠한 도덕적 규탄을 주장하지 않고, 사실을 고발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무거움이 프레임 바깥의 감상자들에게 전달된다. 또한 침묵의 시선에서 학살자들의 추억을 조용히 지켜보는 프레임 바깥의 희생자 가족의 모습을 보라. 그가 갇혀 있는 무거움은 단순히 학살자들에 대한 규탄과 비난과는 다른 무거움, 그들이 인고했어야 했었던 크나큰 고뇌를 전달한다. 바시르와의 왈츠를은 어떠한가? 현실에 덧입혀진 애니메이션을 벗김으로써, 나도 거기 있었다 라고 학살의 기억을 받아들이는 목격자의 증언을 현실과 이미지를 절묘하게 섞어서 그 충격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이러한 다큐멘터리의 조류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부분들은 바로 도덕적 규범에 대한 훈육이 아닌, 가장 무거운 주제에 대해서 사람들을 침잠하게 만든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과거의 역사를 현재에 덧씌우고 그것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재현의 과정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알렝 레네의 밤과 안개는 컬러와 흑백을 오가며 마치 이 모든 참혹한 현장들의 현재 일어나는 것과 같은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구체적인 사실의 고발이 아닌 불연속적인 시간을 마치 연속적인 것처럼 연결지어 시적인 슬픔을 불러일으키며, 어떤 주의나 사상, 이념을 넘어 우리가 인간으로써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도덕에 대한 깊은 고민을 갖게 만든다. 그 어떠한 고발보다도, 그 어떠한 드라마보다도 밤과 안개가 그려내었던 유대인 학살에 대한 기억은 현재에도 그 고통스러운 기억과 질문, 고뇌를 훌륭하게 현대적으로 재현해낸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핳하 땜빵인거야!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상]핑퐁  (1) 2016.12.18
[감상]밤과 안개  (0) 2016.12.12
울버린 3 로건 공개 트레일러  (0) 2016.11.15
[감상]미드나잇 스페셜  (0) 2016.10.16
[감상]벌거벗은 섬  (0) 2016.08.28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내일은 둠 리뷰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상]밤과 안개  (0) 2016.12.12
가디언즈 오브 겔럭시 2 트레일러  (0) 2016.12.04
[감상]미드나잇 스페셜  (0) 2016.10.16
[감상]벌거벗은 섬  (0) 2016.08.28
[감상]이민자  (0) 2016.05.22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알톤 메이어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아이다. 알톤의 아버지 로이는 아들을 믿는 종교 극단주의자 집단으로부터 아들을 구하기 위해 한밤 중 아들을 데리고 도망길에 오른다. 같은 시간, 알톤의 능력을 알아챈 미국 정부는 국가 안전국의 폴 세비어를 내세워 조사를 벌인다. 조절되지 않는 능력으로 고통받는 아들, 종교 극단주의자 집단과 정부가 동시에 부자를 쫓는 위험한 상황, 아버지와 아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세상의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운명을 향해 다가간다.(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네이버 영화의 시놉시스만 본다면, 미드나잇 스페셜은 거대한 음모론과 추적, SF와 관련된 스릴러 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시라:이런 영화들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네이버 영화 시놉시스가 사람을 낚기 위해서 제대로 사기를 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니까. 제프 니콜스의 필모그래피는 다양한 장르 영화로 구성되어 있는듯 하지만,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가 그러했듯이 장르 영화의 테마는 그야말로 '기믹'적인 부분에 불과하다. 영화의 겉을 긁어내보면, 제프 니콜스의 영화는 장르 영화의 공식을 뒤틀어서 가족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미국 남부의 풍광과 함께, 다양한 형태의 사랑과 가족들이 한데 어우러진다. 제프 니콜스는 논리적으로는 관계가 없는 풍광들을 한데 묶어서 그 사이에서 관객들이 어떤 '경이'에 젖어들게 만든다. 


모든 거장들이 그렇듯이, 제프 니콜스는 가족의 다양한 면모를 바라볼 줄 아는 감독이다. 그에게 있어서 가족이란 혈연으로 구성되어 있는 공동체의 개념을 뛰어넘는다. 머드의 경우를 보자:머드에는 다양한 형태의 사랑과 유사 가족 공동체가 등장하며 그 다양성의 스펙트럼 속에서 묶여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년이 성장하는 이야기를 다루었다. 그에게 있어서 가족이란 하나의 '관계'의 형태이다. 그렇다면 그 관계를 구성하는 핵심은 무엇일까? 머드에서는 그 핵심이 등장하지 않았었고, 등장할 필요도 없었다. 머드는 소년이 성장하는 이야기인 만큼, 소년은 다양한 형태의 사랑과 관계를, 그리고 자신의 세계를 회복시키고자 했었던 주술이 실패하고 세상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다루는데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드나잇 스페셜은 제프 니콜스가 생각하는 가족이란 집단의 본질에 근접하였다.


미드나잇 스페셜이 묘사하는 가족의 본질은 '신뢰'이다. 하지만 이 신뢰는 우리가 가족관계에서 경험하는 무조건적인 신뢰(너는 더 위대한 존재가 될 것이다 같은)와는 다른 방식이다:아버지인 로이는 아들인 알톤이 더 위대한 계획의 무언가(농장의 사이비 교도들 처럼)라고 생각하거나, 세계에 위협이 될거라고(NSA 같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유일한 동기는 죽어가는 자식을 살리는 것이다:하지만 자식을 살리는 과정은 상식적이라고 볼 수 없다:명백하게도 알톤이 죽어가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도 로이는 결코 그를 병원에 데려가려 하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로이는 자식인 알톤을 '믿고 있다' 그것은 자식이 이러한 역경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식에 대한 신념에 근거한다. 그리고 제프 니콜스는 머드에서 그랬었던 것처럼 신념에 의한 공동체를 다각도로 풀어낸다:알톤이라는 아이를 중심으로 다양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다. 마치 빛이 프리즘을 통과해서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분리되는 것 같이, 알톤은 이 영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이 믿고 싶은대로 믿거나(농장), 그걸 두려워하거나(정부) 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상대방을 믿는 것, 미드나잇 스페셜은 그것을 '가족'이라고 본다.


흥미로운 점은 미드나잇 스페셜은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알톤이 로이와 가족의 품을 떠나는 것에 대해서 드라마틱하게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마치 원래 있어야 헀었던 곳으로 돌아가듯이 이야기는 건조하게 이별을 다룬다. 이것은 영화가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신념'이라는 측면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묘사이다:보통의 가족이 서로를 소유하는 유사 자아의 개념으로 바라보았기에 가족의 일원이 다른 곳으로 떠나가는 것에 대해 슬픈 눈길로 바라보았다면, 미드나잇 스페셜의 가족은 타인이라는 전제 하에서 서로 일정 정도 거리를 두고(무엇보다도 알톤은 '다른' 존재이니까) 서로를 믿는 공동체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알톤이 어디론가 떠나는 것이 공동체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애시당초에 그들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어져있다는 것을 영화는 신비로운 분위기로 풀어낸다.


미드나잇 스페셜의 플룻에는 논리적인 개연성은 거의 존재하지 아니한다:어째서 알톤은 로이의 자식이 되었고, 농장에서는 왜 알톤을 믿는가? 알톤의 눈을 통해서 들여다보는 빛과 알톤이 온 세계 등에 대해서 영화는 일언반구의 설명을 주지 않는다.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그러한 성긴 플롯들이 신비로운 분위기에 잡혀서 마치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확신을 주는 연출들이다:하늘과 땅이 만나는 너머로 펼쳐져 있는 드넓은 자연 풍광을 통해서 영화는 거대한 자연의 아름다움에 집중한다. 머드를 통해서 보여주었던 아칸소의 거대한 자연풍광이 미드나잇 스페셜에선 루이지애나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점은 영화의 구심점이 되는 알톤의 존재이다:알톤은 저멀리의 우주로부터 오지 않았다. 그는 우리와 함께하지만 보이지 않는 '다른 세계'로부터 왔다. 그 다른 세계는 어디란말인가? 미드나잇 스페셜이 바라보는 세계는 하늘 저 너머를 우러러 보는 수직적인 세계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클라이맥스에서 보여지는 세계는 마치 자연 풍광의 일부처럼 보인다. 어째서 알톤의 존재를 저너머의 미지의 세계로부터 온 것이 아닌 우리와 함께 살아있는 자연풍광의 일부처럼, 신비로운 세계처럼 보여주었던 것일까? 이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와 대비해서 보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는 인류의 탄생과 소멸에 대한 이야기를 거대한 틀로 풀어내고자 하였다면, 미드나잇 스페셜은 우리 곁에 살아 숨쉬는 경이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기에 목성을 향해 여정을 떠났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와 다르게 미드나잇 스페셜은 서로를 믿는 공동체가 루이지애나의 자연풍광을 향해 떠난다. 그렇기에 영화는 모든 인간적인 소소한 것들이 무화되는 미학(저 너머의 창백한 푸른 점처럼)이 아닌 인간의 중력에 잡혀있는 이야기를 다루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미드나잇 스페셜은 제프 니콜스의 미학의 연장선에 놓여있으면서도, 장르적인 표현 방식을 자신의 미학에 훌륭하게 접합시킨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흑백 영화는 천연색을 다룰 수 없었던 구세대의 기술적 한계로 인한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그 기술적 한계로부터 우리는 여지껏 보지못했었던 새로운 미학적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천연색으로 다양한 디테일을 보여주는 세계와 달리, 흑백영화의 모노톤으로 인해 세계는 단순화된다. 마치 만화가 데포르메를 통해서 현실을 왜곡하는 것처럼, 흑백영화도 현실을 왜곡한다. 하지만 그러한 왜곡 속에서도 위대한 흑백영화들에서는 다른 대중문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기품을 느낄 수 있다. 이는 빛과 어둠이라는 이원화된 색을 통해 다른 매체에선 찾아볼 수 없는 단순한 아름다움을 묘사하기 떄문이다:페드로 코스타가 존 포드의 영화를 두고, 중요한 것은 어떻게 단순해질 것인가? 라고 평한 적이 있듯이, 흑백영화의 핵심은 흑백이란 이원화된 표현으로 얼마나 단순하게 세계를 묘사할까에 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본다면 신도 카네토의 영화는 흑백영화의 정수를 정확히 꿰뚫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신도 카네토의 벌거벗은 섬은 아름다움의 백미라 일컬을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는 단순하다:외딴 섬에 사는 일가족의 일상이 4계절을 따라서 진행된다. 어떠한 극적 사건도(물론 극의 마지막에 큰아들의 죽음이 나오기는 하지만), 대사도 영화속에선 드러나지 않는다. 불연속적인 컷들의 삽입을 통해서 영화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마치 단조롭게 반복되는 것처럼 묘사되며, 하나의 사이클을 이루는 것처럼 묘사한다:초반에 물을 길어서 섬으로 나르는 오프닝 시퀸스의 경우,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는데, 카메라를 향해서 걸어오는 부부를 묘사하는 장면을 '겹쳐지게 배치'함으로써 시간적으로 반복되는(요즘 유튜브나 스트리밍 영상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타임랙이라 봐도 무방하다) 듯한 느낌을 부여하게 만든다. 이는 영화 곳곳에서 사용되는 표현 방식인데,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영화는 생과 죽음, 사계절, 슬픔과 기쁨이 평범한 일상 속에서 반복되는 모습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신도 카네토는 그러한 반복되는 일상의 고됨속에서도 묵묵히 버텨내는 활력을 아름답게 표현해내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땀'에 대한 묘사이다. 신도 카네토의 영화는 땀의 번들거리는 질감을 정확하게 표현할줄 아는데, 이는 흑백영화라는 매체의 특성도 크게 한몫한다고 할 수 있다. 햇볕에 반사되어 번들거리는 땀의 질감은 명암이 뚜렷한 흑백영화에 있어서 인상적인 시퀸스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영화에서 땀의 번들거리는 질감은 영화에 일종의 '긴장감'을 불어넣는다:가령 덤불속의 검은 고양이의 오프닝 시퀸스를 예로 들어보겠다. 탈주무사들이 민가에 들어가서 여인들을 강간하기 직전의 긴장을 깔아두는 이 시퀸스에서 땀은 동물적인 불쾌함과 육체적인 긴장감을 드러내는 표현 수단으로 활용된다. 영화 내내 시종일관 땀에 절은 듯한 육체를 묘사하는 오니바바에서는 전쟁으로 피폐해져버린 세상과 그 속에서 동물적인 본능만 남은체로 살아남는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묘사하는 중요한 표현수단이기도 하다.


벌거벗은 섬에서 땀은 힘든 일상과 인물 사이의 긴장감을 불어넣는 표현수단으로 활용된다. 주인공 부부는 물도 흐르지 않는 황폐한 섬에 나룻배로 물을 길어날라서 작물을 기른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영화는 단 한마디의 대사를 사용하지도 않지만, 육체노동의 고됨을 땀이라는 질감(부모세대의 표현을 빌리자면 건강한 노동을 통해 흘린 건강한 땀)과 묵묵히 일하는 주인공 부부를 통해 묘사함으로써 노동과 육체 사이의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만약 이러한 땀의 질감이 컬러 영화였다면 가능했을까? 아니다. 땀이 흐르는 육체로 위로 빛이 내리고, 빛이 부서져서 반사되어 단조로운 세계에 약간이지만 명확한 디테일을 추가하는것 만으로도 영화는 관객들에게 충분히 강한 인상을 남긴다. 컬러 영화였다면, 이 작지만 섬세한 디테일은 다른 디테일과 정보들에 압살되어 사라졌을 것이다(물론 그만큼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도 늘어나겠지만) 이런 점에서 본다면 신도 카네토는 무엇이 흑백영화의 정수인지를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벌거벗은 섬이나 오니바바, 덤불 속의 검은 고양이를 통해서 신도 카네토가 주목하는 부분은 바로 주목받지 못하는 서민의 삶,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의 삶이다. 벌거벗은 섬에서 섬에서의 삶은 단조로운 형태로 반복되지만, 그 주변을 통통배가 지나가며 물고기를 팔러 육지에 왔을 때 보여지는 화려한 도시의 문물 역시 프레임 내로 들어온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한 것들에 시선을 돌리지 아니하며, 묵묵히 단조롭고 반복적인 삶에 초점을 맞춘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가 단순한 삶에 대한 예찬을 문명이란 삶의 양식을 깎아내림으로써 이루어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영화는 주인공 부부가 처한 현실을 관조하며, 주변에 편의에도 불구하고 힘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볼 뿐이다. 


영화에서 가장 눈여겨 봐야할 인물은 주인공 부부의 아내이다:영화는 부인의 모습을 많이 다루기도 하지만, 영화 내에서 가장 희노애락이 분명하게 들어나는 인물이 바로 아내이기 때문이다. 남편은 자기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는 묘사가 많은 반면, 부인은 자신의 감정을 대사없이 다양한 표정을 풀어낸다. 흥미로운 점은 오니바바나 덤불 속의 검은 고양이에서도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온다는 점인데, 남성적인 세계(또는 부조리한 세계)에 피해자(덤불 속의 검은 고양이) 또는 주변인(오니바바)으로 등장하여서 가부장적인 세계나 시선이 갖지 못하는 인물(여성)들의 삶의 편린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문명과 문명 너머의 대비(벌거벗은 섬)와 무사와 평민의 대비(오니바바와 덤불 속의 검은 고양이), 그리고 더 나아가 여성의 삶과 남성의 삶의 대비는 신도 카네토 영화에 있어서 중요한 모티브로 보여지며 흑백영화라는 흑백의 세계에 걸맞는 세계의 접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21년, 뉴욕 그 곳에 사랑이 있었을까?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뉴욕 엘리스 섬에 도착한 ‘에바’. 동행한 여동생의 입국 거부로 맨하탄의 빈민가에 혼자 남겨진 그녀는 댄스홀 밴디츠 루스트 ‘브루노’의 도움으로 일자리를 얻게 된다. 하지만 이 만남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 되고, 삶은 겉잡을 수 없이 흘러간다. 한편, 운명처럼 마주친 ‘올란도’는 그녀에게 다시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는데…사랑을 가져본 적 없는 호스트, ‘브루노’, 사랑에 흔들릴 수 없는 여인, ‘에바’, 사랑도 가지고 노는 마술사, ‘올란도’. 살기 위해 사랑했던 시대에 만난 세 남녀, 새로운 인생을 꿈꿨던 그들의 운명이 엇갈린다!(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영화 감상을 쓸 때마다 네이버 영화 시놉시스를 인용하고 있지만, 네이버 영화 시놉시스는 오로지 이야기의 반만을 다루고 있다. 이민자는 사랑에 대한 문제이긴 하지만, 동시에 전형적인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 대부분은 전형성의 탈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다른 영화적 흐름을 보여주는 일이 많으며, 이것은 더 야즈나 투 러버스의 리뷰에서도 다루었던 부분이기는 하다. 마치 영화 노 맨즈 랜드 같은 씁쓸한 부조리극을 밝은 코미디 극처럼 포장을 했었던 마케팅과 같이, 영화를 소비하는 소비자들에게 있어서 장르적 전형성에 근거하여 영화를 홍보하고 설명하는 것은 편리한 툴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영화를 잘못 이해하게 만드는 치명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기에 투 러버스를 감상하는 관객들은 시놉시스를 믿으면서 동시에 믿지말아야 한다. 그래야만 이 영화가 어떤 의미와 맥락에서 다루어졌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첫 걸음을 띄게 되는 것이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 세계는 가족이라는 기본적인 공동체로부터 시작된다:그리고 그 공동체로부터 탈출하려는 욕구와 안착하려는 욕구, 이 둘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어느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섬세하며 오묘한 모습을 제임스 그레이는 포착한다. 이는 가족이 주는 사랑의 이중성에 대한 감독 개인의 경험에 기반하고 있으며, 사랑이라는 개념을 양가적이며 중력에 비유(끌여당겨지며, 동시에 그 끌여당겨짐에 저항하는)하는 모습은 다른 영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다. 흥미로운 점은 제임스 그레이가 이러한 복잡 오묘한 세계를 다루는데 있어서 주로 쓰는 이야기의 구도가 '전형적인 장르 영화'의 서사라는 것이다:더 야드나 리틀 오데사는 돌아온 범죄자 탕아라는 범죄물의 구도를 다루었다. 그리고 투 러버스는 전형적인 멜로물의 이야기 서사 뼈대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그 내부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무언가 내용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이야기가 아닌, 선인도 악인도 없는 양가적이고도 섬세하며 축축하게 젖어 무거워진 세계이다. 


이민자도 이러한 연장선상에 있다:한 여인을 매춘부로 만드는 포주에 대한 이야기는 전적으로 선과 악이 구분되는 세계로 비춰질 수 있다. 하지만 영화 내에서 브루노가 진정으로 악한인가? 관객들은 영화 내에서 몇몇 섬세한 장면들(에바의 발에 입을 맞추는 브루노)을 통해서 그가 전형적인 악한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분명 에바에게 빠져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어째서 그는 에바를 매춘부로 착취하는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한국영화인 나쁜 남자(김기덕 감독)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여자를 매춘부로 만들어 착취한다는 이야기의 구도는 이민자와 나쁜남자가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부분이며, 동시에 기존의 멜로드라마 서사에 반하는 불쾌하며 미묘한 지점이다. 하지만 나쁜남자가 사랑에 대한 중산층 서사(사랑은 무엇이든 극복할 수 있다)에 거대한 빅엿을 먹여주는 흐름이었다면(이는 감독의 출신 배경 및 성향에 근거하고 있다), 이민자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은 다르다. 김기덕의 나쁜남자가 중산층의 판타지를 거칠게 부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민자는 대단히 섬세하게 그것을 뒤틀며 장르로써의 멜로드라마에서의 사랑이라는 관념과 제임스 그레이 영화에서의 사랑이라는 관념을 접합시키는데 초점을 맞춘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제임스 그레이 영화에서의 사랑은 다음과 같은 제임스 그레이의 자전적인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아버지는 나에게 영화감독이 되지 말라고 하셨다. 물론 그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다. 하지만 그는 틀렸다. 나는 감독이 됐다. 모든 가족의 내부에는 무시무시한 감정적 지원과 감정적 파괴라는 양면이 숨어있다." 사랑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사랑하는 사람을 납작하게 붙잡는 힘을 갖기도 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같은 바운더리 내에 묶고자 하는 것, 그것이 때로는 엄청난 폭력이 될 수도 있음을 제임스 그레이는 인지한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가족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가족을 증오하기도 하지만(가족을 증오하는 영화는 가족을 사랑하는 영화만큼 수가 많다), 제임스 그레이가 이들보다 더 높게 부상하는 것은 가족(또는 가족과 유사한 커뮤니티)에 대해서 사랑하면서 떠나고 싶은 것이라는 양가적인 감정을 훌륭하게 잡아낸다는데 있다:투 러버스에서 어머니는 떠나는 아들을 축복하며 배웅한다, 더 야드에서 삼촌은 끝까지 자신의 사촌을 감싸안으려 한다, 리틀 오데사에서는 돌아온 탕아는 동생을 사랑한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가 훌륭한 것은 가족이란 커뮤니티의 중력과 그에 얽메이는 감각을 다루면서도 그 속에 있는 가치가 '진정성 있게' 느껴지게 만든다는 점에 있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들은 러시아 유대인 이민자라는 커뮤니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그리고 이는 감독 자신의 출신 배경이기도 하다):그런 점에서 본다면 영화 이민자는 제임스 그레이 버전의 대부 2편이라 할 수 있다. 모든 것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1차세계 대전의 전화를 피해서, 핍박받았던 구세계로부터 이민자들은 꿈을 품고 미국으로 건너온다. 하지만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구세계와 동일한 착취와 핍박이었다. 이는 브루노와 에바로 대변되는 폴란드 계 유대인 이민자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국이라는 커뮤니티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에 대한 우화로도 읽을 수 있다. 왜냐하면 미국이란 국가란 근본적으로 이민자들의 나라이기 때문이며, 그러한 이민자들이 믿을 수 있었던 것은 같은 정체성을 지니는 유사 가족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미국으로 이민하는 외국인들이 거치는 엘리스 섬으로부터 시작하는 영화의 시퀸스처럼, 새로운 희망에 부풀어 올랐던 에바 자매의 희망이 외부자라는 신분으로 인해 쉽게 무너지는지(아감벤이 이야기했었던 입국심사장의 난민 같은 호모 사케르적인 의미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에바를 외국인이 아닌 이민자의 유사 가족 공동체에 받아주는 브루노를 통해서 어떻게 이민자들의 커뮤니티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브루노의 유사가족 공동체는 동시에 '착취'의 커뮤니티이기도 하다:먼저 온 이민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서 후에 온 이민자들을 착취하거나 구시대적인 명분 아래서 공동체의 구성원을 내친다. 이는 남성(포주)과 여성(매춘부)의 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에바가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내치는 이모부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에서 가족 내에서 여성 구성원에 대해서 갖는 어떤 공감의 정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가부장적인 권위를 갖는 아버지 같은 존재인 에바의 이모부와 이를 중재하는 여성의 존재인 이모)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그레이는 그 어느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않으며, 답을 내리지 않은채 양가적인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착취인 동시에 동등한 관계(일을 하면 급여를 받는다)의 위태로운 균형이 브루노와 그의 공동체를 지배한다.


그리고 올란도의 등장으로 이야기는 복잡하게 꼬여간다. 엘리스 섬에서 중력을 거스르는 마술을 보여주는 올란도의 모습은 현실의 중력을 거스르는 미국이라는 공간의 매력이자 이민자들의 희망을 대변한다. 하지만 올란도의 등장에 대해서 브루노가 보여주는 극단적인 히스테리의 정서는 일반적인 연적 또는 삼각관계에서 느끼는 감성이 아니다:올란도는 이민자의 공동체를 벗어난 미국이라는 희망과 환상에 매료된(그의 직업이 마술사임을 상기하자) 이전 구성원이며, 자신의 공동체의 구성원인 에바를 '미국적 가치'에 오염시킬 것 같은 탕아다. 이런 점에서 에바에 대해서 갖는 브루노의 감정은 여성에 대한 사랑인 동시에 공동체를 지배하는 가부장의 권위로도 읽힐 수 있다:즉, 브루노의 사랑은 아버지된 자의 권위로써,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수직적인 사랑이다. 그가 이끄는 이민자의 공동체는 그들만의 질서가 있고, 브루노의 질서 내에서 공동체는 가족적인 '사랑'으로 묶인다. 하지만 이 사랑은 진정하긴 하지만 족쇄인 동시에 폭력이기도 하다. 그리고 올란도가 빈 총으로 브루노를 위협할 때(어떻게 보면 미국이란 희망이 갖는 과격한 모습을 보여준다고도 볼 수 있다. 전통과 자신의 출신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온 자유로운 구성원에 대하여), 브루노는 우발적으로 올란도를 죽여버리게 되면서 이야기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이민자가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 세계에 있어서 흥미로운 점은 바로 사랑이 아닌 새로운 요소가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는 것이다:그것은 바로 '고통'이다. 에바가 러시아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할 때, 브루노는 에바의 고해를 엿듣는다. 그리고 거기서 그녀가 이민선에서 강간당하고 문란한 여인으로 낙인찍혔다는 그녀의 고통을 알게 된다. 또한 에바는 브루노가 누명을 쓴 자신을 위해서 경찰에게 폭행당하고 현금을 갈취당하는 것을 엿보며 브루노의 고통을 목격한다. 에바가 이모에게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용서를 구하듯, 브루노와 에바는 서로의 고통에 공감하여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어낸다. 흥미로운 점은 제임스 그레이가 영화 내에서 가장 중요한 시퀸스를 구축하는데 있어서 또다시 '전통'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다는 것이다:러시아 동방 정교회의 고해성사를 고통을 이해하는 모티브로 차용함으로써, 이민자의 전통에서 이민자라는 커뮤니티와 중력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제임스 그레이는 속삭이는 것과 훔쳐보는 것, 엿듣는 것과 같은 극히 은밀하고 섬세한 장면들을 훌륭하게 캐치해낸다. 비단 이민자 뿐만 아니라 그의 다른 영화들에서 침묵속에서 지친 사람들이 서로 기대거나 섬세한 동작들로 서로와 교류하는 장면들을 잡아낸다. 에바의 발등에 입을 맞추고 첫 손님을 받게 하는 시퀸스에서 관객들은 브루노가 에바를 사랑하고 있음을,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로 에바를 옭아메는 폭력을 가하고 있음을 동시에 캐치해낼 수 있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브루노의 이야기가 감언이설이 아닌 어떤 '진정성'마저 느껴지게 만드는 것은 이 상황의 복잡미묘함을 섬세하게 캐치해낸 감독의 역량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영화의 가장 중요한 장면인 고해성사를 엿듣는 장면 역시, 각자의 고통에 갇히는 것이 아닌 내밀한 고통을 듣고 그 아픔에 공감하는 가능성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이런 식으로 영화의 곳곳에서 제임스 그레이는 한 커뮤니티의 가장 내밀한 감정의 흐름을 포착해내며, 어느 감정이나 결론에 치우치지 않는 양가적인 감정, 차오르지만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영화의 마지막, 에바는 동생과 함께 작은 보트를 타고 떠나고, 브루노는 그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흥미로운 점은 리틀 오데사에서 도망치듯이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지는 주인공이나, 투 러버스에서 결국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주인공과 다르게 에바와 브루노는 분명하게도 서로 다른 방향성을 지니고 해어진다는 것이다. 제임스 그레이가 자신의 영화 인생의 기원(러시아 유대인 공동체이자 미국 이민자 커뮤니티)을 이민자라는 영화를 통해 구현하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결말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이제 겨우 서로를 이해하는 진정한 공동체를 형성하였건만, 그들은 이제 서로를 등지고 떠난다. 심지어 같은 프레임 내에 있는 것도 아니다. 정확하게는 프레임 너머로 사라지는 이 둘을 관객이 중간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공동체이자 가능성의 암시다:가족이나 공동체라는 중력에 얽메이는 것이 아닌 중력을 벗어난 공동체, 그 어디에도 편재할 수 있는 공동체의 가능성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제임스 그레이의 이민자는 그의 영화의 기원이자 영화 인생이 전환점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이번 주는 글 쉴거야!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상]벌거벗은 섬  (0) 2016.08.28
[감상]이민자  (0) 2016.05.22
스타워즈 로그 원 티저 트레일러  (0) 2016.04.07
소시지 파티 트레일러  (0) 2016.03.15
수어사이드 스쿼드 공식 예고편  (0) 2016.01.22
1 2 3 4 5 6 7 8 ··· 39
블로그 이미지

IT'S BUSINESS TIME!-PUG PUG PUG

Leviat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