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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블레이드 러너(1982년)의 원작, 안드로이드는 전자양을 꿈꾸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http://leviathan.tistory.com/1681)를 참조해주시길 바랍니다.


인간과 리플리컨트가 혼재된 2049년.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리플리컨트를 쫓는 블레이드 러너 ‘K’(라이언 고슬링)는 임무 수행 도중 약 30년 전 여자 리플리컨트의 유골을 발견하고 충격적으로 출산의 흔적까지 찾아낸다. 리플리컨트가 출산까지 가능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사회에 큰 혼란이 야기되므로 이를 덮으려는 경찰 조직과, 그 비밀의 단서를 찾아내 더욱 완벽한 리플리컨트를 거느리고 세상을 장악하기 위해 ‘K’를 쫓는 ‘니안더 월레스’(자레드 레토). 리플리컨트의 숨겨진 진실에 접근할수록 점차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되는 ‘K’는 과거 블레이드 러너였던 ‘릭 데커드’(해리슨 포드)를 만나 전혀 상상치 못한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자양을 꿈꾸는가는 진짜와 가짜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점점 인간을 닮아가는 안드로이드에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 감정을 이입하는 능력을 무엇이 인간인지를 구분하는 주요한 능력으로 설정한 점, 가짜 양이 아닌 진짜 양을 사고 싶은 데커드의 고뇌와 피로, 마지막으로 일련의 신비로운 경험을 통해서 약간이나마 희망 섞인 가능성을 제시하는 점 등을 통해 소설은 철저한 논리적인 흐름과 과학적 가설에 기반을 두고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는다:소설의 핵심은 인간과 안드로이드,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감정의 이입'과도 같은 모호한 영역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필립 K 딕은 이러한 모호성을 통해 진짜와 거짓이 구분이 점점 힘들어지는 산업 문명과 도회적인 고독과 우울감 등을 한 데 어우러놓았으며, 수많은 SF 소설 팬들을 매료시킨 작품을 만들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년작)은 리들리 스콧이 위 소설을 영화로 각색하여 만든 작품이다. 하지만 리들리 스콧이 소설을 잘 읽지 않고 원작을 각색하여 블레이드 러너를 만든 점은 익히 알려져 있으며(리들리 스콧은 블레이드 러너가 자신의 창작물로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피로에 찌든 배나온 중년 데커드가 헐리웃 액션 배우인 해리슨 포드로 변하는 등 블레이드 러너는 원작을 모두 뜯어고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블레이드 러너의 핵심은 여전히 안드로이드는 전자양을 꿈꾸는가의 모호성,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인가?'에 근거하고 있다. 다만 안드로이드는 전자양을 꿈꾸는가?에서는 그것이 점점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힘들어지는 피로감을 독특한 문체로 풀어냈다면, 블레이드 러너는 철저하게 상징의 시각화와 모호한 상징 네트워크에 구성하여 기반하여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것이 이 영화를 흥행 대참패로 이끌었지만, 영화사에 길이 남는 SF 영화로 만들어주었다.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여전히 구작과 비슷한 모양새를 지니고 있다:강렬한 이미지들과 상징의 느슨한 네트워크, 그리고 일반적인 장르 영화의 전개와는 다른 비정형적인 전개들까지. 좋게 이야기하면 개성이 넘치지만, 나쁘게 이야기하면 대중들에게 먹힐 작품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작품을 만드는 데에 가장 적격은 바로 드니 빌뇌브이다:드니 빌뇌브는 일반적인 영화 시놉시스들을 미장센과 프레임, 비주얼을 이용해 한바퀴 꼬아놓는데 재능이 있으며,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도 그 재능은 어느정도 발휘된다. 하지만 아쉽게도 블레이드 러너 2049에는 드니 빌뇌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들이 십분 발휘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런 독창적인 재해석들과 이미지들이 원작에 사로잡혀 희석되었다는 느낌이다.


1982년 블레이드 러너가 처음 나왔을 때, 영화가 우리에게 약속한 미래는 추적거리는 중금속 산성비와 화려하게 불타오르는 퇴폐적인 네온사인들, 그러한 암울한 세계에 바벨탑처럼 위압적으로 서있는 마천루였다면,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드니 빌뇌브는 우리에게 자연물이 모두 죽어버린 인공물의 미래를 약속한다. 오프닝 시퀸스의 광활하게 펼처진 합성농장들의 유리 온실들, 네모난 콘크리트 건물들과 퇴폐적인 네온사인으로 빛나는 도시, 도시 너머의 쓰레기장들 등등 영화는 자연물의 존재를 완벽하게 배제한다. 그리고 이 인공물의 이미지들 속에서 자연은 죽었거나(사퍼의 집 앞에 놓여있는 하얗게 고사한 나무, 닳고 닳아버린 목마 인형) 허구(스텔린의 기억 제작소 시퀸스 같이)에 불과하다.


이런 철저한 인공물의 세계는 원작 소설과 전작의 테마인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모든 것이 인공적으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세계 속에서 진짜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전작이 시각적 상징을 통해서 데커드가 인간인지 자체에 의문을 갖게끔 만드는 등 서사 자체를 모호하게 만들었다면, 2049는 영화 내에서 모든 것이 완결되며 서사의 모호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2049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압도적인 인공의 풍경이다:영화는 거대한 인공의 풍광 속에서 모든 것을 무가치하게 만들어버린다. 기하학적이고 압도적인 도시 건물들에서부터 쓰레기 더미에 파묻힌 폐허와 방사능에 오염되어 사라져버린 호텔까지, 영화의 모든 이미지들은 피로감을 유발한다. 그렇기에 2049의 등장인물들 모두 어딘가 피로함이 느껴지는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닐 것이다:그들은 이미 자신을 둘러싼 풍광에 압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49는 전작이 그랬던 것처럼 '보는 행위'에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전작이 오프닝 시퀸스에서 눈이 등장하거나 타이렐의 안경(나중에 로이는 타이렐의 눈을 엄지로 터뜨린다), 데커드가 레이첼을 테스트할 때 스크린을 통해서 바라본다던가, 인간과 합성인간을 구분하는 보이그트 캄프 시험이 동공의 움직임을 확인하는 것 등등에서 무언가를 본다라는 시각적 인지에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산업 문명과 매스 미디어의 등장이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가장 다채롭고 화려한 시각 자극을 대중에게 선사해왔기에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자신의 눈을 통해서 보는 것이 아닌 '스크린'이나 '안경'을 통해서 거쳐서 보는 행위 자체가 갖는 인공성에 전작은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2049의 보는 행위에 대한 이미지는 전작에서 반복 재생산되는 부분도 있지만(월레스 비서인 합성인간 러브가 드론을 조종하는 안경으로 K를 보는 점, 월레스의 드론 의안, 거실에 놓여있는 K의 책상 위치-창문을 바라보는 등등) 전작에 비해서 더 나아간 부분도 있다:K의 가상 연인은 조이의 경우, 홀로그램으로써 반투명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반투명함이 그녀를 인지하는 동시에 세상으로부터 유리되게(실제의 것의 아니라는) 만든다. K는 조이를 사랑하나, 동시에 홀로그램이라는 이 '반투명함'(실제하되, 실제하지 아니한다)이 영화의 이미지를 분명하게 '모호'의 영역으로 이끈다. 또다른 모호의 이미지는 물을 통해 반사되는 빛과 어둠의 일렁거림이다:월레스의 집무실에서 볼 수 있듯이, 단순한 빛의 반사가 아닌 빛과 어둠의 교차하는 모호한 상태를 만들어낸다.


바로 여기서부터 2049는 전작에서 찾아볼 수 없는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낸다:전작의 레이첼은 데커드와 관계하여 아이를 가졌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경찰국장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불경이며, 제거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왜냐면 진짜와 거짓은 분명하게도 섞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돌하게도 2049는 바로 이 진짜와 거짓을 섞어버리고, 그 혼합에서 무언가 새로운 진짜와 희망이 탄생할 수 있다고 본다. K는 프로그래밍 된 대로 행동할 뿐인 가상 연인 조이를 사랑하지만 그것이 과연 가짜라 할 수 있을까, K가 가진 주입된 기억을 통해서 느꼈던 감정들은 과연 거짓이었을까, 합성인간과 인간이 사랑하여 낳은 자식은 과연 거짓일까. 진짜와 거짓의 이분법이 아닌 진짜와 거짓이 섞여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2049의 핵심인 것이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기억이 존재한다:영화는 본다는 행위와 함께 기억과 기록이라는 개념을 중요하게 다룬다. 스텔린 박사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기억의 핵심은 불분명하며 흐릿하고 뒤섞여있다는 점이다. 대정전으로 모든 데이터들이 유실되었을 때, 구세대적이고 불분명한 아카이브는 남아서 후세에 기록을 전파한다. 기억이 단순히 과거 사실의 인지 그 이상을 넘어서 시간에 의한 필연적인 소멸에 저항하고 흐름을 거스르는 능동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기억이 설령 K에게 주입된 것이라 하더라도, K는 그 감정을 이해함으로써 진짜 데커드의 딸이 누구인지를 추론해내게 된다. 그것이 설령 거짓의 기억이라 할지라도, K는 거기서 감정을 이입하여 무언가 희망을 찾아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전작에 자신만의 야심을 섞어서 만든 훌륭한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블레이드 러너 2049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전작이 그랬듯이 2049 역시도 이미지들의 느슨한 네트워크로 구성되어있는 작품이며, 감상자의 능동적인 해석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그러나 2049는 전작을 너무 충실하게 따른 나머지 방대하고 느슨한 서사를 만들어버렸다. 장르 영화적인 몰입이 전혀 없고 도시의 살인적이고도 위압적인 풍광 아래서 관객마저도 같이 신음하는 영화를 만든 것이다. 또한 전작에 많은 부분을 답습한 나머지, 이미지들이 너무 방대하게 퍼져있다는 것도 문제다. 만약 기억과 진실-거짓의 관계에 대해서 조명하고자 했다면, 차라리 전작에서의 이미지들(특히 쓸데가 하나도 없었던 리들리 스콧 특유의 종교적인 이미지들)을 대거 처내고 거기에 초점을 맞췄으면 훨씬 괜찮았으리라 본다.


결론적으로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좋은 의미, 나쁜 의미 모두에서 블레이드 러너 전작의 완벽한 재림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싫어할 것이고, 극소수의 사람들만 좋아할 것이다. 문제는 블레이드 러너가 세기말과 디스토피아적 세계, 모호함에 대한 이미지로 재평가 받을 여지가 있었다면 2049에게는 그런 재평가 기회가 존재하지 않을 거란 점이다. 거기에 건질 것이 충분히 많이 있음에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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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주목할만한 에일리언 코버넌트 영상이 있다:코버넌트 호의 승무원들이 콜드 슬립을 하기 전, 마지막으로 하는 만찬과 주인공의 연설, 그리고 에일리언 1편에 대한 작은 오마주(존 허트 옹이 밥먹다가 체스트 버스터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로 그 장면)이 담겨 있는 이 장면은 그 유명한 '마지막 만찬'의 구도를 인용하면서 이것이 코버넌트 승무원들의 마지막 만찬이 될 것을 은연중에(그리고 악의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마지막 만찬을 인용하는 것은 단순한 메타포를 넘어서는 부분이 있다.


성경에서 마지막 만찬은 예수와 그 열 두 제자의 마지막 식사이자 신약 성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직전에 있었던 일이다. 즉, 마지막 만찬은 신과 인간의 새로운 약속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있었던 성경상의 중요한 사건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코버넌트 승무원들 13명(주인공 남편은 아프기 때문에 이 마지막 만찬을 거른다. 그리고 합성인간은 이 만찬의 구도에서 빠져 있다)들의 마지막 만찬 시퀸스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본편이 나오기 전에 특별한 내용을 유추하기는 힘들겠지만, 그것은 프로메테우스의 메타포인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기묘한 관계에 대한 재정립이 이루어질 거라는 일종의 암시라고 할 수 있다.


영화 프로메테우스는 그런 점에서 구약을 연상케하는 물건이었다:영화 내내 인물들은 창조주를 찾아서 돌아다닌다. 하지만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보여준 것은 사랑과 희망이 아닌 피조물을 증오하는 모습, 더 나아가 피조물을 멸망시키려는 모습이 드러난다(사실 이 또한 명확하지 않은 것이, 영화가 이에 대해서 일언반구 설명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사도 바울에 의해서 세계 종교가 되기 이전의 기독교가 유대교의 신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처럼 말이다. 초창기 기독교나 유대교에서 야훼는 창조주이자 절대선, 그리고 더 나아가 절대악의 모습을 어느정도 갖고 있었다(욥기에서 사탄과 획책하는 장면 등을 보자) 즉, 구약의 신은 우리가 생각하는 창조주이자 하나님의 모습보다도 자연현상의 일부라는 느낌이 강했던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에서는 엔지니어가 어째서 인간을 만들었는가에 대한 동인을 가이 피어스의 입을 빌어 이렇게 표현하기도 한다:그저 만들 수 있었으니까 만들었던게 아닐까. 구약의 세계에서 신이 불가해 하듯, 프로메테우스는 창조주와 인간 사이의 관계는 어떤 의도와 목적성이 있는 것이 아닌 원치않은 탄생과 그로 인한 감정의 소용돌이만이 남는 것이 아닐까, 라는 묘한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다. 패스벤더가 연기한 데이빗 8은 바로 그 부분을 정확하게 캐치해내고 있다:만들어진 친절함과 완벽함 아래 숨어있는 무기질적이고 복잡한 감정들, 인간을 모방하였지만 인간이 아닌 데이빗의 복잡한 모습은 프로메테우스라는 영화에서 외계괴물이나  HR 기거의 디자인보다도 더 가치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프로메테우스가 구약이고, 코버넌트가 신약이 된다면 이 영화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코버넌트는 믿음으로 이루어진 공동채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우리는 이미 영상을 통해 공개된 걸로 알고 있듯이, 쇼 박사와 데이빗 8은 엔지니어의 모성에 도착하였고 코버넌트 탐사대도 바로 '그 엔지니어 행성'에 도착한 것으로 정보가 공개되었다. 즉, 엔지니어 행성은 쇼 박사와 데이빗 8의 도착 이후 파괴되었으며(실제 이를 암시하는 컷이 공개되기도 하였다:검은 액체가 담긴 용기를 엔지니어 행성에 투하하는), 코버넌트 호의 승무원들은 바로 그 사건 이후에 도착하여 '결과물'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주를 죽인 피조물들에게 남겨진 세계는 어떤 의미일까. 그것을 목도하고 그 결과물들(네오모프들과 그로 인한 지옥도)을 마주하는 것이 새로운 약속New Testament으로 이어진다는 의미인 것일까.


그런 점에서 에일리언 코버넌트는 상당히 흥미로운 작품일 수 있다:하지만 동시에 그런 점에서 매우 걱정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에일리언 시리즈는 분명 SF 영화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고(기거의 기괴한 디자인, 리플리와 여성 주인공 모델에 대한 새로운 모델 제시 등등) 가치 있는 영화 시리즈임은 분명하나, 프로메테우스처럼 종교적 탄생과 창조주-피조물 사이의 복잡한 감정과 믿음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기거가 성기의 이질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작품을 만들었듯이, 에일리언 시리즈는 충실하게 남성기와 여성기에 기반을 둔 크리처 디자인과 성에 대한 메타포, 이를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리플리라는 케릭터의 재해석(1편 유능한 여자 커리어 우먼, 2편 트러커 맘과 당찬 모성에 대한 재해석 등)을 통해서 쌓아올린 독특한 SF 연작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명성을 쌓아올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프로메테우스는 제노모프(=에일리언)의 기원이 어떻게 되는가라는 팬심과 오덕심이 가득한 망상 위에 리들리 스콧의 과대망상을 끼얹은 괴작이라 할 수 있다. 장르적인 문법 따위는 깡그리 다 무시한 채(제대로 된 괴물 조차 나오지 않고, 그에 대한 설명도 없고, 뭔가 똥싸다 만거 같은 찝찝함까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종교적인 SF 영화(?)를 만들겠다는 프로메테우스는 장르적인 영화를 기대하고 보면 벙찔 수 밖에 없고, 돈은 왜저렇게 많이 들여서 이런 영화를 만들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그야말로 창조주 리들리 스콧의 불가해한 의지와 악의가 느껴지는 괴작이었다. 그렇다면 신약의 위치라 할 수 있는 코버넌트는 좀 더 나은(?) 영화가 될 수 있을까? 그건 개봉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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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두 사람은 남편과 아내로 동거를 함으로써 연방의 평화와 존엄을 위배했습니다. 유죄를 인정합니까? 1958년, 타 인종간의 결혼이 불법이었던 미국 버지니아 주 서로를 영원히 지켜주고, 언제든 함께하기로 맹세한 ‘러빙 부부’가 오직 사랑으로 세상을 바꾼 위대한 러브 스토리. (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제프 니콜스의 영화의 축을 이루는 두가지 테마는 가족과 사랑이다. 테이크 쉘터에서는 경제적 아포칼립스 아래 사랑하는 가족이 종말을 목도하는 이야기를, 머드에서는 다양한 방식의 사랑과 가족의 형태를, 미드나잇 스페셜에서는 제각기 다른 사람들이 사랑으로 가족이 되고 더 나아가 같은 것을 볼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주었다. 어떻게 본다면 제프 니콜스의 영화는 요즘 시대에 있어서 대단히 '반동적'인 영화라 할 수 있는데, 제프 니콜스가 기반하고 있는 가족과 사랑관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음에도 어딘가 안정적이고 보수적이다. 이는 그가 보여주는 영화적 스펙트럼이 미국의 아칸소 같은 시골의 자연풍광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의 선배격이라 할 수 있는 테렌스 멜릭이 거대한 자연 풍광을 통해 인간과 섭리가 하나로 이어짐을 이미 선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멜릭이 트리 오브 라이프로 자신의 장점을 바람 앞의 티끌마냥 흩날려버릴 동안, 제프 니콜스는 정직하게도 자신이 바라본 것, 자신이 믿는 것만을 이야기하였고 이런 점에서 자신의 스승이자 원본을 넘어섰다.


러빙은, 물론 영화 제작 당시에는 의도치 않았지만, 혐오와 차별이 들끓는 작금의 세태에 정말로 시의적절한 영화다. 금지되어 있는 인종간의 결혼, 거기 정면으로 저항한 부부, 그리고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한 사랑까지. 러빙에는 사람들이 원하는 '드라마'가 들어갈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러빙의 이야기는 인간과 체제가 맞부딪히는 정치 드라마가 아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인종 간 결혼의 이야기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은 영화에서 중요하긴 하지만 먼 거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러빙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인권과 같은 거대 담론이 아닌 지근거리에서 일어나는 러빙 부부의 구체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이야기로부터 영화는 거대한 담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될 수 있도록 이끌어낸다.


영화가 다루는 것은 투쟁이 아니라 '인내'며, 인내의 핵심은 바로 '사랑'이다. 하지만 러빙의 사랑은 언어적이거나 서사적이지 않다:제프 니콜스는 과거 자신의 작품들에서 보여주었던 자연 풍광의 파노라마를 러빙 부부의 포옹 등의 신체적인 접촉을 통해서 드러낸다. 그렇기에 이전 작품들에 비하자면 러빙은 두 인물을 한 프레임에 담아내는 장면들이 많다. 특히 영화는 두 인물의 시선이 서로를 응시하는 장면이 많이 배치함으로써 언어적인 표현 없이 두 인물의 감정적 유대감을 표현한다. 흥미로운 점은 러빙은 인물이 중심이긴 하지만, 이 두 인물을 다뤄내는 방식은 마치 자연풍광을 다뤄내는 것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조용히 포옹한채로 서로를 응시하고 쓰다듬는 장면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평온함을 느끼게 만든다. 마치 이들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서 세상과 투쟁할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


흥미로운 점은 러빙의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앞서 이야기했듯이 다소 '반동적'으로 보여지기도 한다는 것이다:러빙 부부는 자신들의 결혼이 불법이었던 버지니아를 떠나 인종간 결혼이 합법이었던 워싱턴으로 갔다가 다시 버지니아로 돌아온다. 인종간 결혼이 합법이었던 곳에 머물렀다면 자신들의 사랑에 어떠한 장벽 없이 그대로 아이들을 기르며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러빙 부부는 다시 버지니아로 돌아간 것일까. 물론 영화가 기반하고 있는 사실에 근거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영화가 러빙 부부의 이야기를 통해서 보고자 한 것은 역사를 바꾼 혁명적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원래 그러했었던 자연의 섭리대로 돌아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역사와 사회에 급진적으로 저항한 혁명가들의 이야기가 아닌 농촌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급진적인 것들이 가장 보수적으로 보일 수 있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은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재밌는 점은 영화에 그런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도 러빙 부부의 곁을 스쳐지나간다는 점이다:러빙 부부에게 연방 대법원까지 재판을 끌고 올라가자고 이야기하는 변호사가 처음 등장하는 시퀸스를 보자. 그의 첫등장은 우스꽝스러우며 '가식적'이다. 그는 연방 대법원까지 소송이 진행되는 것, 더 나아가 소송에 따라서 헌법 그 자체가 바뀔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떠있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나쁜 사람은 아니나, 영화는 그를 러빙 부부와 대비되는 존재로 그려낸다. 어딘가 도회적이고 순수하지 못한 번잡한 사람. 흥미롭게도 이 번잡한 사람들, 도회적인 사건들에 대해서 러빙 부부가 대하는 태도는 상반된다. 남편은 이들을 탐탁치 않게 여긴다. 그리고 자신이 가족을 지킬 수 있다고 아내에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아내는 다른 것을 본다. 자신이 겪었던 일들이 타인에게 희망과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고, 당당하게 행동한다. 영화는 이 둘이 소송을 바라보는 시선이 서로 대비되게 그려내지만, 그것이 갈등으로 이어지지 않게 만든다. 부부는 사랑으로 이어져있지만, 서로 다른 관점과 방법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그것은 갈등이 아니라 공존이며, 이 공존은 서로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이어져있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 연방 대법원은 러빙 부부의 손을 들어주고 미 연방의 헌법은 이로 인해 새로운 수정 조항을 추가하게 된다. 미국의 역사에 길이남을 순간, 그리고 러빙 부부이 겪어온 오랜 고난이 종지부를 찍는 순간에 영화는 어떠한 클라이맥스나 극적 감정을 고조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남편이 아이와 놀아주는 장면을 담담하게 보여주고, 부부가 처음 결혼을 약속하고 집을 짓기로 한 그 장소로 돌아와 집을 짓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마치 원래 그러했었던 것처럼 말이다.


러빙은 다소 반동적인 부분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중력을 갖고 있는 영화다:그것은 연어가 고향을 찾아 회귀하듯이, 인간이 사랑이라는 감정 아래서 가족을 구성하고 서로 다른 사람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가장 원초적인 공존 속에서 세상을 바꾸는 힘과 인내가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러빙은 제프 니콜스의 필모그래피에서 앞으로도 오랫동안 빛날 걸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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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걸고, 지키고 싶은 소녀를 만났다! 가까운 미래, 능력을 잃어가는 ‘로건(울버린)’은  멕시코 국경 근처의 한 은신처에서 병든 ‘프로페서 X’를 돌보며 살아간다.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숨기며 살아가고자 했던 ‘로건’은 정체불명의 집단에게 쫓기는 돌연변이 소녀 ‘로라’를 만나게 되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건 대결을 펼치게 되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브라이언 싱어가 처음으로 엑스맨 영화는 참으로 시의적절한 영화였다. 2000년대를 앞두고 만화를 원작으로 한 블록버스터의 효시를 쏘았을 뿐만 아니라, 휘황찬란한 세계(동시에 그리고 어딘가 유치한)에 대한 비전, 희망, 그리고 소수자성(브라이언 싱어 자신도 성소수자다)에 대한 고찰을 담아낸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엑스맨 3편에서 주춤하였지만,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와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패스트, 그리고 아포칼립스까지 이어지면서 엑스맨 프랜차이즈는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였다. 하지만 엑스맨 프랜차이즈가 예견하였던 휘황찬란한 세계, 소수자들의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시대는 점점 멀어져만 가고 있다. 트럼프가 당선되고, 이민자과 난민은 박해받으며, 여성은 열등하다고 유럽 의회 공식석상에서 발언이 나오기까지 한다. 좋은 시대는 오지 않았고, 희망찬 미래를 말하는 것은 우스워지고 냉소받는 시대가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서 영화 로건은 시작한다.


로건을 만든 맨골드 감독은 3:10 유마행 열차 등의 서부극 영화에 대한 훌륭한 통찰을 보여준 적이 있고, 울버린이라는 케릭터와 서부극 장르라는 두 조합은 독특한 시너지를 일으킨다. 사실, 우리가 울버린의 케릭터를 논할 때 서부극 영화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폭력에 능하지만 폭력에 이골이 난 마초. 더 나은 세계를 꿈꾸지만 정작 자신이 그 더 나은 세계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을 잘 아는 사람. 전통적인 서부극에서 영웅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수색자나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처럼, 능글맞은 마초 존 웨인은 자신의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뒤로 한 채, 자연의 풍광 속으로 그리고 역사의 어둠으로 사라져간다. 로건이란 인물도 그러하다:그는 너무나 오래살았다. 오래 살았기에 그는 매사에 냉소적이며 자조적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 어딘가에는 더 나은 세계를 꿈꾸지만, 그 더 나은 세계 자신의 자리가 없음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기존 엑스맨 시리즈에서 울버린이 엑스맨 가족이자 가족이 아닌 묘한 위치를 점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의 악평과 달리 더 울버린은 프랭크 밀러의 첫 울버린 코믹스(와페니즈 뽕은 프랭크 밀러 작품에서부터 유명한 부분이었다)를 잘 옮긴 작품이라 할 수 있었다. 맨골드 감독은 어떻게 보면 로건이라는 영화에 가장 적합한 감독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로건의 황량한 풍경과 뮤턴트가 모두 사라진 세계를 보고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연상하기도 한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종말 이후의 세계를 가정하여 우리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고찰하는 장르적 전통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로건에는 종말이란 없다. 영화에서 종말은 이미 찾아와서 모든 것을 끝내버렸다:뮤턴트란 소수자들은 이제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는 취급을 당하며, 뮤턴트의 종말 이후 로건은 죽어가며 찰스는 치매에 걸려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다. 즉, 종말이란 사건을 통해서 로건과 찰스는 변화하지 않았다:포스트 아포칼립스의 핵심은 종말이란 사건을 통해서 우리 내부의 무언가가 변화하고/혹은 숨은 것이 드러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것이지만 로건에서 새로운 삶이란 없다. 되새길 본성도, 지켜야할 가치도 없다. 오히려 그들의 삶이란 마치 바스라지기 직전의 먼지, 그 어떤 광기나 감성이 존재할 여유조차 없는 세계다. 그렇기에 이 작품을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영화 전통에 비추어보는 것은 이질적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맨골드 감독의 커리어와 서부극의 전통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서부극에서 서부라는 공간은 로맨스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종종 부조리의 공간이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몬티 헬먼의 서부극들을 보자:몬티 헬먼은 복수의 총성과 바람 속을 달리다에서 법이 없는 세계인 서부라는 세계를 전제하고 그 속에서 생기는 실존적인 부조리를 고찰하기도 하였다. 몬티 헬먼의 서부극에서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이 짓지도 않은 죄로 고발당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에 이끌려 고통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을 보호해주는 그 어떤 안전장치도 없다. 그들은 스스로를 지킬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많은 서부극에서 사람들은 서부의 무법을 낭만적으로 바라보면서도 모순적으로 법과 질서가 있는 세계를 꿈꾼다:존 포드의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에서 사람들은 지주들에 저항하여 법의 울타리를 만들기를 꿈꾼다. 


로건이 바라보는 세계는 바로 이 서부극의 전통(무법의 세계)에 기반한다. 하지만 서부극이 광활한 황야와 탁트인 풍광 등에 기반하여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을 통해 무법의 세계를 바라보았다면, 로건이 바라보는 세계는 도회적이며 삭막하다. 리무진 텍시를 끄는 로건이 바라보는 초반의 세계는 코스모폴리스나 마이클 만 감독의 영화(톰 크루즈의 콜래트럴 같은)을 떠오르게 만드는데, 로건의 세계와 사람들의 세계는 유리되어 있으며 그 속에는 어떠한 감정적 교류와 공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사회는 뮤턴트를 보호하지 않고, 로건을 무법의 천지로 내몬다. 그렇기에 로건은 삭막한 도회의 무법 천지 속에서 살아남은 단 한명의 늙은 무법자이다. 하지만 그는 싸우기에 너무 지쳐버렸다. 그는 너무 늙었고, 너무 많은 죽음을 목도하였으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어가고 있다. 가장 명민했던 자는 치매에 걸리고, 가장 용맹했던 무법자는 초라하게 늙어버렸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서부극 용서받지 못한 자처럼 인생의 황혼에서 자신의 해왔던 모든 것에 회의를 느끼고 부정하는 단계가 바로 로건이 처한 현실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로건은 로라와 만나고, 찰스와 함께 유사 가족을 형성하게 된다. 하지만 로라는 보호의 대상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 그녀는 사람을 너무 쉽게 죽인다. 11살 남짓한 어린아이가 사람을 너무나 쉽게 죽이는 세계는 로건과 로라가 보호하는 주체/보호받는 대상을 나누는 것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오히려 로라와 로건은 서로 겪었던 경험과 감정을 공유하는 동등한 주체들이다. 로건은 로라를 보며 과거의 자신을 본다. 그리고 로라는 로건을 보며 인생의 선배를, 자신을 이끌었던 멘토를 바라본다. 그 속에서 늙은 마지막 무법자는 새로운 세계가 올 수 있는 희망을 다시 한번 발견한다. 물론 늙은 무법자는 계속되는 자기 부정과 분노에 스스로 그 가능성으로부터 눈을 돌린다. 하지만 만화책에 나온 좌표를 향한 여정을 통해, 로건은 그 가능성을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과정에 서부극에서 자주 등장하는 전통에 대한 호감과 신문물에 대한 반감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여정 중에 만난 전통적인 가족에 대해서 애정 어린 시선을 보여주며, 그들이 전통적인 목장을 운영하고 말을 키우며 심지어는 로데오 대회에도 나가고 도움을 준 이방인들에게 따뜻한 한 끼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하는 친절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무인 트럭과 유전자 조작 식물, 로건이 초반에 마주한 황폐한 도시 세계는 그런 따스함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로 묘사된다. 하지만 맨골드 감독은 더 나아가서 이를 비정형적으로 비트는데, 이 전통적인 가족이 여타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백인 가족의 표본이 아닌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설정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모든 악역들은 백인 남자들로 구성되어있는 것은 덤이다. 하지만 영화는 X-24가 이 가족들을 모두 죽이고, 로건을 친절하게 맞이해준 가장이 그를 향해 총구를 돌리는 묘사를 통해서 이들이 이 곳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즉, 로건은 서부극의 전통을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뒤틀어서 여타 영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독자성을 갖게 된다.


또한 서부극과 다르며, 동시에 다른 슈퍼히어로 물에서 찾아볼 수 없는 로건만의 강렬한 개성이 있다:그것은 바로 분노와 고어 묘사이다. 로건의 액션은 모두 분노로 가득차 있고(심지어 로라의 액션도 그러하다), 모든 액션은 다양한 방법의 신체 훼손이 수반된다. PG-13의 틀을 벗어던진 로건의 액션 묘사는 이전까지 울버린이란 케릭터가 갖고 있었던 클로와 힐링팩터라는 특수성을 여과없이 묘사한다. 폭력을 상대에게 수놓고, 고통을 자신의 육체 위에 아로새긴다. 그 고통과 폭력이 로건과 로라를 분노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분노는 다시 엑스맨 프랜차이즈와 영화 로건을 구분짓게 만들며, 동시에 다시 이어지게끔 만든다:없는 사람 취급 당하는 소수자들은 세계에 대해서 분노를 느낀다. 그 분노가 로건이 거침없이 폭력을 휘두르게 만드는 동력이며, 동시에 그가 오랜 세월동안 자신이 휘두른 폭력으로 고통받는 원인이기도 하다. 로건은 그 분노와 함께 분노만으로 세계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렇기에 로건은 끊임없이 로라에게 자신은 만화에 나왔던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서부극에서 총잡이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어린아이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로라는 로건과의 여정을 통해서 그것을 점점 이해하게 된다. 그의 분노, 그의 고통, 더 나아가 그의 슬픔과 회한까지도. 휴 잭맨은 로건, 울버린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고, 그의 X-24 연기를 통해서 동시에 이를 분명하게 드러낸다:악역인 젠더 라이스는 X-24를 가리켜 '어린아이에게 양심을 없앨 수 있었지만, 분노를 심어주지는 못했다'라고 말하였다. X-24의 모습은 그야말로 전성기의 울버린을 연상케하는데, 그의 강렬하고 폭발적인 분노는 로건과 유사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로건과 다르게 X-24의 분노는 맹목적이며, 로건은 그러하지 않는다:로건의 분노에는 어딘가 지쳐있고, 그리고 어딘가 회한으로 가득차있는 것을 옆볼 수 있다. 그의 고통에는 그가 겪어온 세월의 무게가 있으며, 그 세월의 무게로부터 로건은 분노로만 휘둘리지 않는 인물이 된다. 휴 잭맨은 X-24와 로건을 모두 연기함으로써 그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꿰뚫어 본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로건은 죽는다. 하지만 고통과 분노 속에서 어린 뮤턴트들과 로건은 가족이 되고, 더 나은 세계, 희망을 꿈꿀 수 있게 된다. 지금 같이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우스운 시대, 거짓말이 대안적 사실이 되는 기만적인 시대에 로건이 이야기하는 테마는 시의적절하고 또한 자칫 감정의 고양으로 이어질 수 있는 신파로 몰아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의 슈퍼히어로 영화들이 시네마틱 유니버스란 한계에 갇혔다면, 로건은 독립된 영화로써 매우 훌륭하며 엑스맨 프랜차이즈 내에서도 최고로 뽑아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영화의 마지막, 로라는 영화 셰인을 인용하며 로건을 추도한다. 마치 서부극 특유의 결말처럼, 영웅은 자신이 왔었던 자연속으로 다시 돌아간다. 왜냐면 영웅은 총성이 울리지 않는 사회에는 더이상 필요하지 않은, 아니 존재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를 기억할 것이다. 더이상 총성 없는 세계, 분노와 폭력으로 저항할 필요가 없는 세계를 위해 자신의 육체 위에 고통을 아로새겼던 존재, 스스로 영웅이 아니라 되새겼지만 선량했던 사람이었던 로건을.




아 우리는 친절함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여 했던 우리는

스스로가 친절할 수 없었구나


인간이 인간을 도와주는

시대가 되거든, 그대여

우리를 생각해다오

관용의 눈으로


-베르톨트 브레히트, 후손들에게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로베르 브레송은 자신의 저작들을 영화라는 시네마라고 부르기보다는 시네마토그래프라는 표현을 쓰기를 고집하였다. 시네마토그래프는 로베르 브레송이 창안한 단어로써, 적절한 번역을 찾기는 어렵지만 영화에 있어서 영상보다는 기록적 측면에 무게를 실어주는 단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브레송의 일지가 보여주는 '기록'에 대한 강조와 '연극'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가 동시에 공전하는 것은 납득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영화를 찍을 때, 브레송은 배우의 연기에 대한 어떠한 지시도 없이 기계적으로 반복하게 만든 후, 그것을 촬영하여 편집하여 작품을 만들었다. 그렇기에 브레송 영화는 관객의 감정을 고양하기 보다는 관객이 배우와 영화를 관조하게 만드는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브레송의 스타일은 지금까지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브레송의 미학은 벤야민이 영화라는 예술에 대해서 논평하였던 내용들을 공유하고 있다:벤야민은 영화가 예술이 되는 것을 논하기보다 예술이 영화로 인해 무엇이 바뀌었는지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하였다. 기술이라는 형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의 내용을 변화시킨다. 그렇다면 벤야민이 영화라는 매체이자 기술의 특징이 무엇이라고 정의내렸을까? 벤야민은 영화의 다양한 부분에 주목하였지만, 그 중 핵심으로 꼽는 것은 '아우라'의 제거였다. 아우라의 특징은 바로 진품성이다:어떤 예술 작품이든 감상자가 진품을 마주할 때만 갖는 독특한 느낌이 있다. 그 진품성인 아우라를 대량생산을 통해 제거하는 것이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이다. 


연극과 영화의 차이는 이러한 아우라 유/무를 더욱 뚜렷하게 드러낸다. 브레히트는 뛰어난 연극은 하나의 '스포츠 경기'와도 같다고 이야기하였다. 그 어떤 연극도 동일하게 상연되지 않는다. 연기자의 컨디션, 느낌, 관객의 반응 등등 연극의 모든 부분들은 하나 하나 재현 불가능한 역동성을 띄고 있으며 뛰어난 연극 감상자는 그러한 배우의 근육, 움직임, 눈빛, 그날 무대의 분위기 등을 모두 감상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영화는 다르다. 영화는 대량복제를 통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진품성이 없으며, 또한 편집/촬영 프로세스로 인해 연극 배우가 몰입하여 만들어낼 수 있는 단 한번의 신비로운 연기는 성립될 수 없다. 벤야민은 이러한 아우라의 거세가 영화라는 예술이 대중예술로 거듭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보았다. 더이상 예술은 특수한 환경과 공간, 시간 내에서만 성립되지 않는다. 영화를 통해서 예술은 수많은 대중에게 배급되고 보급된다. 그렇기에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부터 소비되는 과정까지 영화는 하나의 산업이 된다.


그렇다면 브레송과 벤야민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벤야민은 영화 산업에 있어서 스타 시스템과 거짓된 아우라가 갖는 허구성을 비판하였다. 스타 시스템은 배우의 연기-방향성의 부여-감정의 고양-고양된 감정을 실제의 스타에 덧입혀 착각하는 것으로 성립되며 벤야민은 이것이 거짓된 아우라라 지적하였다. 흥미롭게도 이는 브레송의 연극과 영화 스타에 대한 혐오와도 일맥상통한다. 브레송에게 있어서 배우는 어떤 극적인 감정(연극과도 같은)을 이끌어내기 위한 연기를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배우에게 대본을 읽게 하고, 그 어떤 연기지도 없이 여러번의 연기를 한 것을 촬영/편집하는 브레송의 영화 스타일은 관객에게 감정을 고취시키는 일정한 방향성을 부여하고자 하지 않는다. 브레송에게 있어서 모든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다큐멘터리였던 것이다. 그것은 사실의 기록이며, 관객들이 보는 것은 극적으로 고양되는 감정이 아닌 카메라 앞에서 담담하게 표현되는 삶 그 자체이다. 그렇기에 브레송은 벤야민이 이야기했던 영화 개념에 가장 부합하는 감독이라 칭할 수 있으며, 삶을 묘사하는 것이 아닌 삶을 기록하는 영화로써 영화만이 갖고 있는 특징을 잘 포착해낸 거장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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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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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다소 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마츠모토 타이요의 작품에서는 영웅이라는 테마가 중요하게 등장한다:논리와 규칙을 뛰어넘는 자로서의 영웅. 마츠모토 타이요는 어린아이가 믿을법한 동화 속 세계의 영웅들이 현실의 무서움을, 고통을 뛰어넘어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마츠모토 타이요는 그 영웅의 어두운 속성마저도 세심하게 케치해낸다. 넘버 파이브에서 파이브는 자신의 전우이자 형제였던 자들을 한명 한명 사냥해나간다. 철콘 근크리트에서 쿠로는 시로가 없는 세계에서 홀로 폭주한다. 타이요는 자칫 잘못하면 무거워지거나 복잡해지는 이야기를 특유의 흑백의 이분법적인 세계에서 세밀하게 캐치해내며, 어린이들의 발상과 상상력에 기반해서 작품을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마츠모토 타이요는 세상의 복잡한 이야기들을 유치하지만 모두가 공감할 수 있고 단순하게 다뤄내어 공감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만화가다.


그리고 유아사 마사아키는 마인드 게임과 케모노즈메, 다다미 넉장반 세계일주를 만들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애니메이션 세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한 감독이다. 그의 애니메이션은 표현과 선들이 자연스럽게 변화하며, 다른 영상 장르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애니메이션 만의 독특한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그에게 있어 이미지는 자유롭게 변화하며 모든 것들에 생명을 부여한다. 그렇기에 살아있지 않은 것에 생명을 부여한다는 의미에서 애니메이션의 어원인 Animate(강신하다, 살아 움직이게 만들다)라는 표현에 가장 적합한 감성을 가진 감독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마츠모토 타이요의 핑퐁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다고 하였을 때, 어떻게 보면 정말로 준비된 감독이 작품을 맡았다 평할 수 있었다.


핑퐁 애니메이션은 마츠모토 타이요의 핑퐁 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옮긴 작품이다. 하지만 유아사 마사아키가 만들어내는 핑퐁의 애니메이션은 그저 만화 버전의 복제라고 할 수는 없다. 흥미로운 점은 핑퐁 애니메이션은 핑퐁 만화버전의 '대척점'에 서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츠모토 타이요의 핑퐁은 전적으로 영웅은 일반적인 사람들, 우리라 할 수 없으며 영웅은 떠나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조용히 일상에 남아 날아오르는 영웅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비관론이나 열패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마츠모토 타이요는 고요히 영웅과 이를 둘러싼 사람들, 그리고 영웅이 날아오르는 과정을 담담히 서술한다. 그의 매마른 필치로 서술되는 그림들은 어딘가 황량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그 속에는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있다:타이요는 순간 순간 중요한 장면을 선의 굵기로, 동적인 필치로 감상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는 장면들을 연출한다. 마츠모토 타이요는 분명 영웅을 긍정한다. 모든 논리와 규칙을 뛰어넘는 자, 가장 필요할 때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주며 영감을 주는 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어떤 패배주의적 감상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영웅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수 없다. 그렇기에 타이요는 고요히 영웅이 없는 세계를 그려낸다. 쓸쓸한 바닷가에서 바닷가 너머의 영웅을 반추하면서 말이다.


흑백의 매마른 색조속에서 표현되는 만화 핑퐁의 세계는 애니메이션의 세계로 넘어오면서 총천연색의 새로운 맥락을 지니게 된다. 즉, 매체적 차이에서 오는 맥락의 변화로 인해 우리는 마츠모토 타이요의 핑퐁을 똑같이 애니메이션에서 재현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리고 유아사 마사아키는 그것을 정확하게 이해한다. 유아사의 위대함은 그 장르적 차이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시대의 변화(핑퐁 원작은 90년대 후반의 그려진 작품이지만, 유아사의 작품은 2010년대에 만들어졌다)를 작품에 교묘하게 접합시키며, 더 나아가 약간의 뉘앙스 차이로 마치 동전의 양면 같은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었다는 것이다. 수많은 창작자들이 원작보다 더 나은 원작을 만들겠답시고 재앙을 불러일으켰던 걸 생각한다면, 유아사의 태도는 실로 존경스럽다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유아사의 핑퐁은 기본적으로 타이요의 핑퐁과 똑같이 영웅에 대한 믿음을 공유한다. 영웅은 존재한다. 영웅은 우리가 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며 우리와 함께한다는 것을 긍정한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타이요의 핑퐁은 흑백의 세계로 이를 묘사하는데 반해서, 유아사의 핑퐁은 이를 천연색으로 묘사를 한다. 그렇기에 타이요의 핑퐁에는 없는 독특한 생기가 유아사의 핑퐁에는 흐르게 된다. 그리고 유아사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이미지와 사고의 흐름은 이를 더욱 가속시킨다. 만화의 칸들을 연상시키듯이 분절되는 시퀸스 내에서 컷을 하나하나 구성하며 독특한 리듬을 만들어내며, 탁구공과 라켓이 내는 경쾌한 소리의 리듬은 마치 작품이 살아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심어준다. 후반으로 갈수록 유아사의 핑퐁은 탁구공이 오고가는 시퀸스를 애니메이션, 아니 심지어 영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롱테이크로 만들어냄으로써 작품을 보는 감상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주게 된다.


타이요가 어딘가 메마른 감성으로 이를 묘사하는데 집중하였다면, 유아사의 총천연색 자유로운 감성이 우리에게 심어주는 것은 일종의 축제이다:유아사의 핑퐁은 핑퐁이라는 작품 자체를 거대한 축제로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현실의 메마른 논리 속에서 한 명 두 명 조용히 사라졌던 타이요의 핑퐁과 다르게 모두에게 공평하게 참여의 기회를 주려 한다. 바로 '탁구'로 하나되는 세계, 꿈과 희망이 존재하는 세계에 대해서 말이다. 재밌는 점은 타이요가 꿈과 희망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오지 않음을 긍정하는 것을 유아사 역시도 긍정한다는 것이다:결국 페코는 카자마에게 날개가 있음을 증명하였지만, 카자마은 호시노 만큼 날아오를 수 없다. 스마일 역시도 마찬가지며, 결말 역시 다른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뀐 것일까?


유아사는 총천연색의 세계와 함꼐 아주 세밀한 디테일들을 틀어버림으로써 결말의 뉘앙스를 180도 바꾸는데 성공한다. 극 중 모든 인물들은 탁구라는 매체 아래 묶여있으며, 각자의 삶을 산다. 모두가 영웅이 되진 않는다. 하지만 영웅이 꾸는 꿈을 함께 꾸며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유아사는 믿는다. 그렇기에 지나간 세월을 반추하며 다시끔 여름(페코와 스마일이 탁구 대회에 나갔던)이 온다고 이야기하는 타이요의 핑퐁과 다르게, 유아사의 핑퐁은 다시금 (축제의) 여름이 온다고 이야기한다. 장르적 특성을 십분활용함으로써 디테일을 바꿈으로써, 유아사 마사아키는 동일한 작품을 별도의 시나리오 수정 없이 완벽하게 대칭되는 작품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아니 내게 있어서 많은 부분을 시사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본인은 본인 인생에 가장 힘든 순간에 유아사 마사아키의 다다미 넉장반 세계일주를 보았고, 이를 글로 풀어낸 적이 있었다(http://leviathan.tistory.com/1501 5년전의 일이다) 그리고 직장을 다니고 있는 지금, 어떻게 글을 쓰고 컨텐츠를 소비할 것인가 고민하는 본인에게 핑퐁은 불현듯 다시 돌아왔다(물론 이걸 본 건 재작년의 일이었다...) 마치 운명처럼 말이다. 본인이나 이 글을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서브컬처는 그저 즐기고 잊어버리는 단순한 흥미거리가 아닐 것이다. 본인이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삶의 중요한 순간에 함께한 작품이 있었다는 것을, 설령 그것이 내 인생을 바꾸진 못했더라도 그 순간에 함께 하고 영감을 주었다는 점만으로 영원히 기억될 작품이 있었다는 것은 정말로 크나큰 축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비록 영웅이 될 수 없을지라도, 영웅과 함께 꿈을 꾸고 같은 것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 유아사의 핑퐁은 서브컬처의 세대라 할 수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 영원히 기억될 시대의 작품이라 평하고 싶다. 


끝으로 핑퐁 애니메이션의 오프닝과 가사를 함꼐 올리며 글을 끝내도록 하겠다.








새로운 시대가 왔는데도 바짝 쫄아서 나오려 하지 않아.
길이 너무 곧게 뻗어서 도망칠수도 없어.
선택에도 길이 없어서(명상중!)
혼자서는 뭘 하고 싶은지 알 수 없어서(망상중!)

자신과 타인을 비교해서 자기를 구석으로 몰아넣어

나는 세계에 단 한명뿐이야,
언제나 세계에 단 한명뿐이야.

그런데 하는게 좀...

나만 할 수 있는 일 같은건 없을지도 모르지만

아무것도 안 한채 사라질거야?
아무것도 안 한채 사라질거냐고?
아무것도 안 한채 사라질거 같냐고!

뭐라든! 언제든! 기분 좋은 일을 알고 싶은것 뿐이야!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다큐멘터리 장르는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있어서 지루한 영화 장르라 할 수 있을 것이다:왜냐하면 역사적 사실에는 어떤 극적 구성이 없기 때문이다. 어떠한 반전도, 충격적인 진실도, 징벌과 포상받아 마땅한 선과 악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에는 오로지 사실만이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바로 다큐멘터리가 갖는 이 장르적 특징이 다큐멘터리를 가장 보기 힘든 지루한 장르로 만들었다. 또한 사실의 나열이라는 측면에서 다큐멘터리는 다른 매체들(책과 같은 기록 매체)에 비해서 하등 나아보일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라는 '영화' 장르는 다른 사실의 기록 매체들과 다른 힘을 갖고 있으며, 몇몇 다큐멘터리들은 종종 '기록'이라는 다큐멘터리의 장르적 경계를 벗어나기도 한다.


밤과 안개는 유대인 학살을 다룬 다큐멘터리다:처음 공개될 당시, 영화 속에 담겨 있던 끔찍한 기록 영상들은 수많은 논란거리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30분에 불과한 이 짧은 다큐멘터리는 유대인 학살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 묵직하고도 날카로운 통찰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공개된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밤과 안개는 다큐멘터리의 걸작이자 우리에게 무거운 울림을 가져다 주는 작품이다.


밤과 안개의 미학적 핵심은 사실의 '재현'에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극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재구성이나 다큐멘터리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고발과는 다르다. 우선, 극적인 재구성은 일정한 흐름(플룻)에 따라서 이야기의 화소를 재배치하고, 프레임과 컷, 쇼트를 구성한다. 물론 밤과 안개 역시도 유대인이 '처리'되는 과정을 기록물 영상에 따라 배치함으로써 추방-격리-처리라는 나치 독일 유대인 '처리' 프로세스 3단계의 큰 그림을 보여준다. 하지만, 밤과 안개의 그것은 작품을 만든 창작자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다:밤과 안개에서 기록물과 나래이션은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 최대한 담담하게 서술하고자 하며, 이러한 비인간적인 행태가 마치 일상적으로 있었던 일이었던 것처럼 묘사한다.


그렇다면 밤과 안개는 유대인 학살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고발'하고자 한 것일까? 물론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의 미덕 중 하나는 숨겨져있던 사실을 재조명하여 고발하는 것도 있다. 하지만 고발이란 보통 단순한 과거 사실의 폭로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대저 과거 사실의 고발이란 현재의 사실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존재한다. 우리는 나치 독일의 부역자들이 적극적인 부역자들 뿐만 아니라 소극적인 동조자들, 나치를 막지 않았던 독일의 일반 시민들, 더 나아가서 그들이 그 지경에 이르기 까지 침묵으로 동조했던 세계의 열강과 국제 정세, 사상적 흐름, 시대가 있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책임들을 나치와 히틀러라는 표상에게 뒤집어씌우고 수많은 이들이 침묵했었다는 사실 역시 우리는 은연중에 나마 알고 있다. 그렇다면 밤과 안개는 이를 지목하고자 한 것일까? 어느정도는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밤과 안개는 우리가 눈돌리고자 했었던 비인간적인 행태를 다루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사실을 고발하여 지금 현재의 구체적인 사실을 고발하고자 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다큐멘터리적 고발이 우리에게 구체적인 과거의 사실로부터 새로운 현재의 사실을 이어서, 충격과 깨달음을 주는 일종의 계몽적인 역할을 자처하였다면, 밤과 안개에는 현재의 구체적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처음 진술하였던 '재현'으로 돌아와서 집중하여야 한다:영화는 컬러로 표현된 현대의 수용소에 도착해서, 그 위에 흑백의 영상을 덧입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밤과 안개는 현재와 과거를 교차시킴으로써 현재와 과거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데 집중한다. 그것은 마치 현재와 과거는 연결되어 있고, 과거의 끔찍했었던 경험들이 여전히 우리와 함께 같이 살아숨쉬고 우리를 짓누르는듯이 느껴지게 만든다. 알렝 레네가 밤과 안개를 통해서 만들어내고자 한 것은 과거의 사실이 현재의 사실로 1대1 대응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과거 사실에 대한 고발도, 어떤 감정을 이끌어내기 위한 사실의 재구성도 아니었다.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현실에 입히는 것, 그것이 여전히 현실에 맞닿아있으며 이후의 우리들은 어떤 도덕적 책임을 져야하는가라는 무거운 질문이 밤과 안개가 재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러한 재현은 때로는 우리에게 사실의 고발보다 더욱 무거운 질문을 맞딱뜨리게 만든다:빛을 향한 그리움에서 독재정권에 납치당한 사람들의 유해를 찾기 위해서 광활한 사막을 하염없이 해매이던 실종자 가족들의 모습은 어떠한 도덕적 규탄을 주장하지 않고, 사실을 고발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무거움이 프레임 바깥의 감상자들에게 전달된다. 또한 침묵의 시선에서 학살자들의 추억을 조용히 지켜보는 프레임 바깥의 희생자 가족의 모습을 보라. 그가 갇혀 있는 무거움은 단순히 학살자들에 대한 규탄과 비난과는 다른 무거움, 그들이 인고했어야 했었던 크나큰 고뇌를 전달한다. 바시르와의 왈츠를은 어떠한가? 현실에 덧입혀진 애니메이션을 벗김으로써, 나도 거기 있었다 라고 학살의 기억을 받아들이는 목격자의 증언을 현실과 이미지를 절묘하게 섞어서 그 충격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이러한 다큐멘터리의 조류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부분들은 바로 도덕적 규범에 대한 훈육이 아닌, 가장 무거운 주제에 대해서 사람들을 침잠하게 만든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과거의 역사를 현재에 덧씌우고 그것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재현의 과정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알렝 레네의 밤과 안개는 컬러와 흑백을 오가며 마치 이 모든 참혹한 현장들의 현재 일어나는 것과 같은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구체적인 사실의 고발이 아닌 불연속적인 시간을 마치 연속적인 것처럼 연결지어 시적인 슬픔을 불러일으키며, 어떤 주의나 사상, 이념을 넘어 우리가 인간으로써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도덕에 대한 깊은 고민을 갖게 만든다. 그 어떠한 고발보다도, 그 어떠한 드라마보다도 밤과 안개가 그려내었던 유대인 학살에 대한 기억은 현재에도 그 고통스러운 기억과 질문, 고뇌를 훌륭하게 현대적으로 재현해낸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핳하 땜빵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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