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실물 보다 큰'은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건 이 영화에서 어떠한 의미도 갖지 않는다. 흔히들 'Based on Real Story'라고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하면, 우리는 실화같지 않은 실화의 이야기를 통해서 세상은 밝고 아름답고 살만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실물 보다 큰 은 그런 일반적인 실화극과는 다르다. 만약 실물 보다 큰이 실화극으로서 의미를 가지려면, 적어도 에드가 아들을 죽이려고 시도하고 병원에 끌려난 뒤, 코티즌 중독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에드의 모습을 눈물겹게 보여줬어야 했을테니까. 오히려, '실물 보다 큰'은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이미지를 차용하고, '중독' 상태의 에드에 초점을 맞추면서 기묘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영화를 분석하기 앞서서 우리는 1950년대 미국이 어떤 곳이었는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세계는 두 강대국에 의해서 양분된다. 소련과 미국,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사이의 냉전. 그와 별개로 미국은 2차세계대전 이후로 유래없는 부흥기를 맞이한다. 한 때, 이민자들의 2류 국가였던 미국은 이제 마샬 플랜을 통해 한때 세계의 중심이었던 유럽의 부흥을 지원하며, 자유의 수호자이자 세계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했다. 세계는 평화로웠고, 정의로웠으며, 미국에 의한 평화, 즉 팍스 아메리카가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영화가 만들어진 1958년은 이제 그 팍스 아메리카의 끝자락이었다. 1960년대가 어떤지는 모두 알지 않는가? 약쟁이 히피들과 반전, 그리고 더러운 전쟁인 배트남전까지.


'실물 보다 큰'은 바로 이 지점, 팍스 아메리카의 종말 직전에서 시작한다. 가장인 에드는 학교 선생과 택시 회사 접수원일을 동시에 하는 평범한 미국 중산층 가장이다. 그런 그가 심각한 희귀 불치질환에 걸려서 고통 받게 되고, 살아남기 위해서 평생 코티즌을 복용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하지만 이 약에는 정신질환을 유발하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다. 영화의 대부분은 에드가 코티즌을 복용한 이후의 심리상태를 묘사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과대망상증에 빠져서 학부모들 앞에서 위대한 미국의 이상향을 설파하지 않나, 직장을 때려치우고 위대한 미국의 미래를 위해 논문을 내겠다고 하지 않나, 심지어 영화의 종반에는 구약의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를 들먹이면서 아들을 죽이려한다.


에드라는 인물은 미국을 그대로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미국의 가족 경제를 책임지는 가장이며, 미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한 명의 시민이고, 가족을 사랑하며, 신앙에 충실한 남자다. 문제는 이런 모습들을 영화는 그가 정상일 때 보여주는 것이 아닌, 그가 코티즌으로 정신이 훼까닥 돌아버린 이후에 보여준다. 그는 처음에는 가족을 위해 쓰러질 수 없다는 일념으로 코티즌을 복용하지만, 점차 약을 맹신하며 약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약에 취했을 때 그는 스스로를 거물로 생각한다. 하지만 웃기는 건, 실제 그는 그의 동료인 윌리에 비해서 왜소하게 묘사되며, 주변 사람들과 관객들은 이미 그가 약에 취해서 맛이 간 것을 알고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그의 아들마저도 '아버지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그저 보결선수 뿐이었다구요!'라고 아버지를 대놓고 까버리며, '이런(약에 취한) 아버지 따위는 그냥 죽어버리는게 더 나아요!'라고 선언하고, 그의 부인은 영화의 말미까지 그의 광증을 알아채지만 어떠한 제제도 가하지 못하고 그저 끌려다닐 뿐이다. 


제임슨 메이슨의 과장되고 위압적인 연기는 에드라는 케릭터를 단순한 미치광이 그 이상으로 만든다. 1950년대식의 촌스럽고 과장된 연기를 뛰어넘어 신념에 가득찬 선지자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제임슨 메이슨의 연기는 웅장하며 거대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논리와 신뢰성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약빨 좀 받은 약쟁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실물 보다 큰은 이런식으로 요즘 영화 같이 대놓고 이야기 하지만 않을 뿐, 그 속에 1950년대 미국 사회와 시대상에 대한 격렬한 악의를 드러낸다. 에드가 설파하는 전통적인 미국의 가치관이란 한낮 약쟁이의 약빤 소리에 불과하며, 심지어 주변 사람들도 모두 그것을 알고 있다. 다만 아무도 입으로 말을 꺼내지 않을 뿐. 게다가 이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영화의 결론은 '그(미국)는 불치병을 갖고 평생 약(임시방편)이나 빨고 살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종말론적이기 까지 하다. 


영화가 만들어내는 1950년대는 우리가 대중매체에서 접하는 기묘한 이미지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1950년대는 다시 오지 않는 미국의 황금기로 평가받고 있고, 많은 매체들은 미국의 밝은 이미지(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를 묘사할 때 많이 차용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폴아웃 3와 베가스의 아름답고 바람직하지만 어딘가 망가지고 뒤틀려버린 듯한 이미지들이다. 놀랍게도, 실물 보다 큰 은 바로 그 시대가 현재였던 그 시점에서 이 뒤틀려버린 미국의 이상향을 보여준다. 영화는 시종일관 어딘가 나사빠지고 불연속적인 대화의 연속이며, 가족의 행복한 모습과 이미지의 이면에는 폭탄과도 같은 긴장감을 깔아둔다. 2.35 대 1의 시네마스코프 기법은 1950년대의 사회를 아름답게도 묘사하지만, 수평적 구도와 수직적 구도를 혼합해서 인물과 인물 사이의 묘한 거리감과 수직적인 위계질서(특히 위의 포스터에서 나온 그림자를 통한 묘사 장면에서 압도적으로)를 구축한다.


영화의 독기를 제쳐두더라도, 영화가 보여주는 선견지명은 엄청나다. 교사인 에드가 이야기한 전통적인 미국의 가치와 이상은 1960년대를 거쳐서 이제 완벽하게 붕괴되었다. 그리고 '공립학교 교사'가 이야기한 '미국의 이상향'은 미국의 공교육 시스템의 붕괴로 이미 설자리를 잃어버린지 오래다. 물론, 영화가 이야기 한대로 미국은 종말을 맞이한 것은 아니며, 미국의 가치관은 변화하여 지금까지 존속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국가의 이상적인 인재상을 배출하는 공교육 시스템의 붕괴와 '교사' 에드가 영화를 통해 드러내는 미국의 문제점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실물 보다 큰 은 미학적으로든, 이야기로든 간에 이미 1958년에 찍었다고 생각하기 힘든 영화다. 영화가 만들어내는 1950년대의 유토피아적인 분위기, 그리고 그 속에서 썩어들어가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제임슨 메이슨의 웅장한 연기로 비꼬는 모습은 시대를 앞서가도 한참 앞서나갔다. 기회가 된다면 꼭 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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