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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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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 살 소년, 살인자 ‘머드’를 만나다! 14살 소년 ‘엘리스’는 절친 ‘넥본’과 함께 미시시피강 하류 무인도에서 나무 위, 놀라운 모습으로 걸려있는 보트를 발견한다. 아지트가 생겼다고 좋아하는 것도 잠시, 십자가가 박힌 구두를 신고 낡은 셔츠를 입은 채 팔에 뱀 문신을 한, 검게 그을린 ‘머드’가 소년들 앞에 나타난다. 사랑하는 여자 ‘주니퍼’를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 중인 ‘머드’는 ‘엘리스’와 ‘넥본’에게 도와줄 것을 요청하고, ‘엘리스’는 서로 사랑하는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하는데…


테이크 쉘터 감독인 제프 니콜스의 신작 머드는, 참으로 클리셰스럽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를 은유나 비유가 아닌,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서 한 소년이 성장하는 과정과 사랑의 이야기를 다루고자 한다. 그러나 주제와 이야기를 뻔히 드러냄에도 불구하고, 머드는 정말로 찬란하게 빛나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머드는 사랑의 다양한 형태(순애보에서부터 비뚤어진 자식/형제 사랑까지)를 공평하게 다루고, 이 다양한 모습을 지닌 사랑의 소우주들을 한 아이의 성장 과정속으로 압축하여서 서술하기 때문이다.


머드의 이야기는 전적으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는 끊임없이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제시하고, 그리고 모든 케릭터들의 동인을 사랑으로 설정하는 등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제시한다. 하지만, 영화는 대중매체가 흔히 보여주는 사랑만능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머드의 시작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리라고 생각했던 커뮤니티인 가족을 붕괴시키면서 시작한다. 부모가 이혼하면서, 주인공인 앨리스는 자신의 세계를 구성하는 대부분을 잃어버리고 가치관에 혼란을 느낀다. 그리고 붕괴하는 그의 작은 세계속에서 앨리스는 진정한 사랑에 목말라하며 그것을 갈구한다. 자신이 믿고 의지했던 세계가 무너지면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중심축을 찾아야하기 때문이다. 머드가 자신의 진정한 사랑 주니퍼를 만나기 위해 숨어있다는 것을 안 앨리스가 그를 적극적으로 돕는 것도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칸소 촌뜨기이자 인디언과 미신을 자신의 행동근거로 인용하는 머드란 케릭터는 미시시피 강의 끝에서, 앨리스의 세계가 끝나는 지점에서 만난 기이한 인연이다. 나무에 걸린 보트처럼, 그리고 영화는 영화속 대사처럼 '어떻게 나무위에 보트가 걸리게 되었을까'라는 신비한 인연과 미시시피 강 하구 아칸소 주가 보여주는 독특한 자연경관이 맞물려 들어가면서 앨리스의 개인적인 성장통을 신비한 체험으로 다룬다. 이는 마이애미 주 끝자락에서 문명에 저항하며 쓰래기들을 모으고 자연적인 힘의 위력을 보여주었던 비스트 오브 서던 와일드와 유사한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비스트가 허시퍼피라는 인물이 홍수와 파괴라는 세계의 양측면을 보고 세계를 극복할 힘을 얻어내는 과정이었다면, 머드는 앨리스와 머드의 만남, 그리고 머드에게 매료되었다가 그에게 실망하고, 다시 화해하는 과정을 통해서 소년이 성장하고 세계를 재발견하며 이해하는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앨리스가 머드를 통해 보는 것, 그것은 주술과 미신, 그리고 진정한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신비로운 인간을 통해서 기존의 가치질서들, 붕괴하는 자신의 세계를 회복할 수 있는 원동력을 발견한다:그것은 바로 지고지순한 사랑이다. 자신이 뱀이라는 악운에게 당한 것을 주니퍼가 구해주고, 그로 인해서 주니퍼에게 평생 빠졌으며 진정한 사랑을 위해서 헌신한다고 이야기한 머드는 주니퍼를 자신의 행운의 새라고 지칭한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한명의 남자가 한명의 여자에게 영원불멸한 사랑에 빠지는 평범한 러브스토리를 주술적인 세계관으로 재구성한 것일지도 모른다(그리고 이 지점이 앨리스가 처음 믿은 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주니퍼와 머드의 사랑은 앨리스가 생각한것처럼 지고지순하지 않았다:자신에게 문제가 생길 때만 머드에게로 돌아가고 다시 떠나는 일을 반복하는 주니퍼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보같이 그녀를 위해서 헌신하고 끝내 살인까지 저지르는 머드. 뒤집어서 본다면, 뱀에게 물림으로서 주니퍼를 만나게 된 머드는 역설적이게도 주니퍼라는 뱀을 만난 셈이기도 한 것이었다. 그런 그가 앨리스와 넥본의 도움을 받아 나무에 걸린 보트를 내려서 물위에 띄우고자 하는 것, 다시 한번 주니퍼와 잘되기를 기원하지만 동시에 스스로 나서지 못하고 섬안에 틀어박힌체로 어린 아이들 뒤에 비겁하게 숨는(주니퍼를 직접만나지 않고 쪽지를 보내는 것) 것은 오히려 지고지순한 사랑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현실도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어찌보면 이는 처음부터 은유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신비한 이야기꾼은 자신이 있는 섬에서 떠나지 않고 세계와 마주하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머드는 그런 자기 자신의 비겁함을 아이들이나 믿을법한 다양한 주술과 미신의 형태 뒤에 숨기고 있었던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부모가 없었던 머드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였던 톰은 머드를 믿지 말라고 경고한다:그는 타고난 '거짓말쟁이'라고. 그러면 이 모든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거짓일까? 앨리스와 넥본이 허클배리 핀 마냥 미시시피 강을 뒤지면서 벌였던 지고지순의 사랑이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한 모험은 모두 의미가 없던 것이었을까? 여기서 먼저 짚고 넘어가야하는 점은, 톰의 머드에 대한 지적은 반절만 맞았다는 점이다:머드는 거짓말쟁이나 사기꾼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이야기꾼'에 가깝다. 톰에 대해서 암살자이자 CIA 출신이라고 이야기하는 지점들(사실 톰은 해병대 저격수 출신이었다)이나 그가 자신이 믿는 미신과 주니퍼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지점들에서 머드의 모습은 전형적이며 탁월한 이야기꾼의 그것이라고 볼 수 있다:그리고 이야기꾼의 이야기에는 극적 재미를 위한 '허풍'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아이인 앨리스는 그러한 허풍이 드러나는 지점, 머드가 현실도피하고 어린아이들 뒤에 숨는 비겁자적인 모습을 발견하고 그에게 큰 실망을 하게 된다. 하지만 유념해야하는 점은, 이야기에 허풍과 과장이 섞여들어가게 되더라도 그 속에는 '진실'이 내포되어있기 마련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 머드는 여느 다른 성장물과 차별적인 지점을 드러낸다. 앨리스와 넥본이 머드를 도우면서 보고 듣고 경험했던 그 모든 것들, 영원한 사랑을 위한 일종의 주술은 실패했지만 동시에 사랑이라는 가치를 재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는 이 사랑을 차별없이, 그리고 평등하게 다루어낸다. 현실을 직시한 머드가 주니퍼에게 작별을 고하자 홀로 방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주니퍼, 아버지 같이 머드를 꾸짖지만 머드에게 도움을 주는 톰, 부모 없는 넥본을 자식처럼 키우는 갈렌, 앨리스가 착각했던 첫사랑 메이, 심지어는 이혼하는 부모와 머드를 죽이려드는 킹과 그 부하들까지. 이렇게 가족의 사랑에서부터 사랑인것처럼 보였던 사랑, 그리고 뒤틀린 사랑까지 영화 속에서 다양한 사랑은 앨리스가 머드를 도우면서 만나게 되며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그 무언가이다. 즉, 무너지는 세계 속에서 사랑의 가치관을 재확인하려는 앨리스는 머드의 허풍과 이야기 속에서 다양한 사랑의 형태와 조우하면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앨리스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원하는 주술행위와 머드의 허풍 섞인 이야기를 완성시키는 지점은 앨리스가 웅덩이에 빠져 뱀에 물린 것을 머드가 구해주는 것이다. 이 때, 앨리스는 사랑이 오로지 한사람을 향한, 지고지순의 사랑이 아닌 서로 다른 형태의 사랑들이 존재함을 깨닫게 된다:자신을 걱정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부모에게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는 지점 등에서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뱀이라는 악운을 통해서 사랑이라는 행운을 재확인하는 지점에서 영화에서의 사랑은 양가적인 속성으로 드러난다. 만나고(앨리스-머드) 해어지며(머드-주니퍼), 사랑을 떠나보내고(앨리스의 부모) 동시에 새로운 사랑을 맞이하는 지점들(톰-머드)을 통해서 영화는 사랑의 이야기를 완성시킨다.


영화 머드는 아칸소 주의 이국적인 풍경과 함께(비스트 오브 서던 와일드에서 보여주는 기묘한 미국의 이미지와는 또 다른), 신비로운 이야기꾼과 사랑의 이야기를 매력적으로 다룬다. 어찌보면 마크 트웨인의 허클배리 핀의 모험과 같은 성장물의 연보에서 같이 놓고 볼 수 있는 새로운 고전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스쳐지나갈 정도로 영화는 인상적이며 훌륭하다. 꼭 기회가 된다면 보시길.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버스 납치사건 당시 살인사건 현장에 있던 버스 운전사 사와이는 극적으로 목숨을 건진다. 사와이 이외의 생존자는 중학생인 나오키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나오키의 여동생 둘뿐이다.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은 이들 세 명의 생존자는 사건이후 몰려든 보도진과 주변의 끊임없는 호기심 속에 더욱 깊은 상처를 받는다. 사와이는 버스 납치사건이후 가족을 버리고 모습을 감춰버리고 나오키 남매는 자신들의 세계만을 고집하며 타인과 거리를 둔 생활을 보낸다.



사건이 있은 지 2년 후 나오키 가정은 붕괴되어 이들 남매는 서로를 의지하며 단둘만의 생활을 보내고 있다. 어디론가 모습을 감추었던 사와이가 돌아옴과 동시에 마을에는 연쇄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마을사람들은 그런 그를 의심의 눈길로 바라본다. 과거의 상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고통과 싸우던 사와이는 자신과 같이 버스 납치사건의 생존자인 남매를 찾아간다. 가족도 없이 단둘이 생활하고 있는 남매를 본 그는 이들과 함께 살 결심을 한다. 사와이와 나오키남매와의 공동생활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오키의 사촌형 아키히코가 이들 남매를 찾아온다. 이렇게 4명의 묘한 공동생활은 시작된다.(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영화 유레카는 상처와 재생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영화다. 하지만,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거기서 다시 일어나 원래 생활로 돌아오는 이야기를 유레카는 기존의 영화들과 다른 방향으로 전개한다. 기존의 치유,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외적 동력, 그리고 그 외적 동력의 방향성을 지시하는 '의지'나 '목적의식'은 영화 내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살아달라고는 이야기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해버린다. 동시에 드라마를 최소한으로 축약하고 '일상의 노이즈 낀 영상'(감독의 표현을 따르자면)의 형태를 빌림으로서, 영화가 만들어내는 질감은 지극히 삭막하고 거칠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들은 기묘한 선언(살아달라고는 하지 않겠다)과 함께 시너지를 일으키면서, 영화는 정말로 독특하며 인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영화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서 박살나버린 개인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커뮤니티로부터 시작한다. 여느날과 똑같이 진행되는 등교길과 출근길, 그리고 버스에 탄 그들의 인생은 버스 하이잭 사건과 함께 박살나버린다. 하지만, 남겨진 생존자들이 짊어진 상처와 경험의 무게와 다르게, 세상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버스 납치범이 1차 가해자였다면 이들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지목하는 2차 가해자이자 주된 가해자이다. 살아남은 생존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호기심의 대상으로 여기거나(버스 사건에서 살아남은 코즈에가 강간당했다는 소문이 돌거나), 오해와 편견의 대상으로 전락한다.(범인으로 지목되는 마코토) 심지어 영화는 사회와 커뮤니티의 붕괴를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기본적인 커뮤니티 단위인 가족으로부터 시작시키고 완성시킴으로서 생존자들에게서 공유할 수 있는 기존의 사회를 완전히 거세하고 소외시켜버린다. 이런 구도를 영화는 시종일관 생존자들(마코토, 코즈에, 나오키)과 사람들 사이에 컷 또는 분명한 대비를 만들어낸다:2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마코토를 마코토, 자신의 형과 형수, 자신의 아버지와 조카(아버지-조카-친구-전처와 마코토의 관계는 적대적이거나 이해불능의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마코토가 너무 커버렸기에, 그렇기에 그를 사랑하지만 그를 내버려둘 수 밖에 없는 방관자적인 입장이다) 사이의 세 층위로 뚜렷하게 구분하여 묘사하는 등 생존자들과 일반인들 사이에 보이지는 않지만 뚜렷한 '막'을 만들어내면서 이들과의 단절을 시종일관 강조하며 생존자들끼리 모여서 하나의 대체적인 커뮤니티를 만들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역설한다. 


이렇게 사회로부터 소외당한 생존자들의 상흔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지점이자, 사회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들을 폭력적으로 대하는 지점은 언어를 통해서 구체화된다. 사고 이후 어머니는 집을 나가고 아버지는 죽어 가족 자체가 와해된 코즈에와 나오키가 '실어증'으로 오해받는 지점을 보자:코즈에와 나오키가 실어증이 아니라는 것은 그들끼리 있을 때 언어로 소통하는 지점들이 존재하기 때문도 있으며 그들은 언어를 잃어버렸다고도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언어를 거부하는' 뉘앙스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코토는 남매와 다르게 언어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잃지 않지만, 그가 생존자 이외의 인간들과 소통하는 지점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코즈에와 나오키의 사촌 아키히코와 마코토 사이의 대화양상들, 아키히코가 마코토에게 쏟아내는 언어들을 마코토가 감내하는 듯이 보이는 뉘앙스에서 영화는 '(일상)언어란 폭력이다'라고 선언하는 듯이 보인다. 그렇기에 생존자들은 언어 없이(혹은 거부하는?) 생활을 한다:오히려 영화는 생존자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편견과 폭력을 쏟아내는 지점과 대비되는 지점들로 언어 없음의 편안함을 강조한다(마코토-남매 유사가족의 식사 장면이라던가, 벽을 두드리는 것으로 서로 소통하는 지점이라던가)


이런 특징들이 아오야마 신지 감독은 스스로 "구로사와 키요시의 무의식 속에 공포영화가 살고 있다면 나의 경우는 무의식 속에 서부극이 살고 있다. 서부극 안에 내 무의식이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라 발언과 함께 결합되면서, 영화 유레카는 어찌보면 바로 그러한 감독의 서부극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지점이 된다. 어디서 찾아낸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하고 느릿한 기타큐슈의 풍경이나 2년만에 귀향하는 마코토의 모습을 다루는 장면이 마코토를 일종의 무법자처럼 보여주는 대목 등등은 직접적으로 서부극을 차용한 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이야기 서사적 측면에서도 영화는 서부극의 구도를 들고온다:일상 세계, 즉 법이 지배하는 세계로부터 떨어진 생존자들, 즉 무법자들은 황야에 내던져짐을 당한다. 그리고 삭막한 황야에서 무법자들은 그들을 안내하는 어떠한 지표나 안내도 없이 살아남기 위해서 황야를 해매인다. 


파괴적인 사건으로 커뮤니티로부터 떨어져 나온 무법자들은 그들끼리 살아남기 위해서 갖은 애를 쓰지만, 정작 사회는 이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2년만에 돌아온 의심스러운 방랑자와 실어증에 걸린 것처럼 보이는 남매들의 유사가족은 사회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조합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들의 커뮤니티에서 벗어나서 해법을 찾아야한다. 마코토가 여행을 제안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기에 무법자들은 이제 새로운 대안과 해답을 찾아 나서는 개척자들이 된다.


하지만, 답을 찾아 여행을 떠났지만 기존 사회의 폭력들은 여전히 상존한다: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세상은 계속 원환처럼 돌아며, 그로 인해서 의도되지는 않지만 생존자들에게는 그것은 무한히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처럼 인식된다(아무 생각없이 골프채로 장난을 치는 아키히코 때문에 나오키가 느끼는 심적 압박감 등등을 보라) 그렇기에 자신에게 오는 폭력을 향해서, 나오키는 다시금 폭력(살인)으로 맞받아친다. 마치 무법자가 폭력을 상대하기 위해서 총을 뽑아 살인을 저지르듯이. 이러한 감정은 마코토 역시 느꼈으며, 비슷한 일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아키히코 역시 느낀, 끝없이 자신을 향해 폭력을 가하는 사회를 향해 무법자들이 느끼는 분노의 감정이다. 하지만, 이는 해결책이 아니다:폭력과 증오가 원환을 그리듯이,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다시 피해자가 되는 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황의 연쇄는 어떤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이런 와중에, 여행을 떠나기 전 마코토가 전처에게 했던 이야기는 의미심장하다: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을 해? 이 닳고 닳아서 클리셰로도 분류되지 않는 명제는, 영화 유레카에서는 대단히 의미심장한 명제로 작용된다. 누군가를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이라는 명제가 사회로부터 유리된 무법자들, 동시에 그들 사이에 어떤 혈연/지연 관계도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같이 살아감을 선택한 생면부지 타인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가? 를 물어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아주 근원적인 질문, '(그 모든 조건들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것이 가능할까?'를 던진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사회적인 조건을 떠나서 실존적이고 인간 근원의 존재에 질문을 던지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그후 마코토가 하는 행위들, 자신의 책임도 아닌 남매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아주 클리셰 스럽지만, 마코토는 폐암 비슷한 것으로 죽어가는 뉘앙스를 풍긴다)으로 이 명제를 실현한다. 하지만 이는 어떤 신파적인 명제를 위한 것이 아니다:아키히코가 자수한 나오키에 대해서 '그래도 거기(=감옥) 있는게 나오키한테 행복할거야'라고 이야기하자, 여태까지 아키히코의 언어(이자 폭력)를 참아왔던 마코토는 아키히코에게 통렬한 한방을 날리고는 이렇게 선언한다.


뭐가 ‘행복하겠지’,라는거냐!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거냐고! 나오키가 어디론가 가버렸더라도 언젠가 잃어버린 걸 되찾으러 다시 돌아온다구!!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너 같은 인간들은 아무것도 아닐테니! 나는 말이지, 그 애를 보호하는 걸로 내 삶을 살아갈꺼니까!”


'행복' 같은 사회의 언어, 관용구들의 언어를 거부함으로서, 그렇기에 영화는 '살아라' 라는 명제를 거부한다:그것은 사회로부터 내쫒겨진 무법자들에게는 사회의 폭력이자 명령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의미없는 삶, 내쫒겨진 삶이 아닌 사회 밖에서 살지말고 '(의미있는 삶을) 살아라'라는 명령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마코토는 나오키가 자수하기 전에 이렇게 이야기한다:살아달라고는 하지 않겠다, 대신에 죽지는 말아줘. 죽지 말아달라는 부탁,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달라는 마코토의 바램은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고 벌겨벗겨진 인간들이 그 어떠한 맥락도 존재하지 않는 유대를, 인간이 타인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다 라고 선언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나오키와 작별했지만, 마코토의 노력은 코즈에를 통해서 결실을 맞이한다. 바다에 도착하고, 조개 껍질을 모은 뒤에, 자신의 언어를 되찾은 코즈에가 산 정상에서 바다에서 모은 조개 껍질을 던지면서 인물들을 호명할 때(이 인물들 중에는 심지어 버스 하이잭의 범인도 들어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화해?), 영화는 세피아 빛의 빛바랜 세계를 벗어던지고 총천연색의 세계로 돌아온다. 상처는 자연스럽게 아물고, 부서진 세계는 다시 한번 재봉합된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의, 커뮤니티의, 누군가의 방식이 아니다:그것은 전적으로 사회로부터 떨어진 인간들, 무법자들이 찾아낸 풍경의 재발견이자 화해인 것이다.


영화 유레카는 정말로 인상적인 영화며, 독특한 관조와 무게감이 느껴지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이 영화에 치명적인 결점이 있는데 거의 4시간에 육박하는 러닝타임이다. 물론 감독 아오야마 신지는 삶의 노이즈를 그려내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일사분란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픽션을 거부하는?), 그런 의도를 감안해도 4시간은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감상을 한 본인조차도 영화가 아닌 드라마 보듯이 끊어서 감상했으니 말다한 셈이다. 하지만 그런 지점을 제외한다면 영화 유레카는 정말로 의미심장하고 여운이 길게 남는 영화다. 기회가 된다면 꼭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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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카스티야 고원의 이름 없는 마을. 일요일 영화 트럭이 도착한다. 다용도로 쓰이는 낡은 건물에서 영화 <프랑켄스타인 박사>가 갑자기 상영된다. 관객들 중에는 이사벨과 아나라는 두 소녀가 있다. 동생인 아나는 언니에게 왜 괴물이 사람을 죽이고 마지막에는 죽느냐고 묻는다. 이사벨은 상상력을 동원하여 괴물은 친구가 될 수 있는 정령이라고 대답해준다. 아나는 괴물을 보고 싶어 그를 찾아다니며 부른다. 자매가 부모와 함께 사는 오래된 큰 집을, 아나만이 느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채워간다. 부모들은 삶을 향한 그들만의 향수와 미련에 갇혀 어린 딸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한다. 어느 날 아나가 사라진다. 고통스러운 수색 끝에 아나가 발견되지만, 아나 외에 그 누구도 이 모험의 끝을 알지 못한다. (puredew114@naver.com)(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영화 벌집의 정령은 정말로 독특한 영화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작품이나 영화 내에서 스페인 내전은 하나의 풍경에 불과하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스페인 내전의 상흔이다. 벌집의 정령이 보여주고자 하는 스페인 내전의 상흔(직접적으로 스페인 내전을 다루지 않지만,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은 어떤 점에서는 판의 미로나 악마의 등뼈의 프로토타입이라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장르영화의 공식(판타지나 공포영화)으로부터 벌집의 정령을 원용하는 두 영화와 다르게 벌집의 정령이 출발하는 지점은 상당히 독특하며 아름다운 이미지를 구축한다.


벌집의 정령의 가장 큰 특징은 서사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 프랑켄슈타인의 상영 장면 이후로, 영화는 아나와 이사벨의 일상 생활의 장면들의 연속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그러한 장면들은 어떠한 서사의 일관된 흐름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정말 말그대로의 '일상적인 행위들의 연속'인 것이다. 물론, 이사벨이 아나에게 프랑켄슈타인의 존재, 즉 정령의 존재를 이야기해주고, 그로 인해서 아나가 주변에 흐르는 기묘한 흐름들, '보이지 않는 존재'를 찾으러 돌아다니는 흐름이 깔려있기는 있으나, 본질적으로 그것이 언어화되어 구체적으로 제시된다던가 드러나지는 않는다.


재밌는 점은 그렇다고 영화 자체가 어떤 서사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벌집의 정령은 서양 회화의 전통을 영화 속으로 들고옴으로서 서사를 구축한다;즉, 영화는 서양회화 처럼 소품과 인물의 배치 등을 통해서 어떤 독특한 뉘앙스를 만들어낸다. 마치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 독특한 구도를 통해서 다른 회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뉘앙스를 만들어냈다던가, 그리고 서양회화들이 그림 내에서 소품들(해골 같은 것이나 혹은 특정한 상징물 같은)을 배치함으로서 회화는 단순히 그림을 뛰어넘어서 어떠한 이미지와 시적 함축성을 만드는 지점들, 등등에서 말이다. 벌집의 정령도 그러한 지점들을 갖지만, 재밌는 점은 그런 지점들이 감독이나 작자 단계에서 배치되는 것이 아닌, 일상의 세계가 아나라는 어린 소녀의 시선에 의해서 재배치 되고 거기 숨어있는 '정령', 즉 평화로운 일상 속에 숨어있는 스페인 내전이라는 우울한 풍경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정령의 메타포로서 프랑켄슈타인을 인용한다;아나가 언니 이사벨에게 물어보는 것, 왜 프랑켄슈타인이 아이를 죽이고, 자신도 죽어야했는가에 대해서 이사벨이 프랑켄슈타인은 아무도 죽이지 않고 실체없는 정령이 되어서 여기에도 있다는 이야기(겸 거짓말)를 할 때, 정령과 프랑켄슈타인은 등치된다. 재밌는 점은 이사벨이 아나에게 정령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난 뒤,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아나의 아버지가 인간 사회를 하나의 벌집의 형태로 비유하는 독백이 등장한다. 인간사회가 하나의 벌집이고, 프랑켄슈타인이 실체가 없는 정령이라면, 제목 '벌집의 정령'이 가르키는 바는 바로 사회에서 사라져버린 어떤 맥락 그 자체라는 것이다. 하지만, 어린 소녀를 죽이고 성난 사람들에게 죽음을 당한 '괴물'의 이미지를 이사벨이 부정하고 '그건 영화야 다 뻥이라고'라고 선언하는 지점에서 이 정령은 뭔가 '독특한 것'이 된다. 눈에 보이지는 않으면서 동시에 사회로부터 추방당한 '신비로운' 존재지만, 그것은 사회의 편견과 다르게 사악함이라던가 등의 특질을 지니지 않는다. 


이 정령의 존재를 믿는(또는 눈치챈?) 아나가 재발견하고 일상속에서 찾아내는 이러한 이미지들은 대단히 조밀하고 미세하다. 앞서 이야기한 서양 회화의 전통처럼, 이 모든 것들은 일상의 풍경 속에 숨어있으며 구체적인 이미지라기 보다는 모든 그림의 세밀한 지점들이 하나로 합쳐져서 만들어지는 아주 극히 미묘한 뉘앙스의 문제이다. 그리고 아나는 이 신비로운 분위기에 점점 매혹되는데 언니 이사벨이 창문을 열어놓고 죽은척 하면서 장난을 치는 부분에서의 아나의 모습이라던가, 불타는 장작더미 위를 뛰어넘으면서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아나의 시선은 어딘가 위태롭다. 이 위태로운 감각은 아나가 진짜 정령, 스페인 내전에 관련된 탈영병을 만나게 되면서 구체화된다. 하지만, 그 탈영병이 처형되면서 결국 우리 주변을 정령처럼 떠도는 이 사라진 맥락은 사회에 포함될 수 없으며 잘려지고 거세당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나가 깨닫게 되면서 영화는 극적 갈등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자살까지 생각할정도로 암울함에 빠졌던 아나가 독버섯을 먹기 직전에 본 환상(정령-프랑켄슈타인)과 마지막 엔딩에서의 독특한 결론(창문을 열고 정령에게 속삭이는 부분)을 내리는 부분은 인상적이다. 그것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죽어버린, 혹은 강제로 잊혀져버린 희생자들이 거기 있음을 인정하고 잊지않겠다고 조용히 속삭이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묘하고 섬세하며 여운있는 엔딩의 지점들은 악마의 등뼈에서도 재확인되는데(상처입은 사람들은 떠나며, 유령은 뒤에 남겨진다.), 장르 영화적인 변용이 아니었다면 이러한 이미지의 원전은 확실히 벌집의 정령이 먼저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벌집의 정령은 극적인 서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작품이다. 오히려 아나의 눈으로 보는 일상의 지점들을 아름답고 위태롭게(모닥불 장면 같이) 잡아내었다는 점에서 시각적인 쾌감을 선사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기예모로 델 토로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것도, 그리고 악마의 등뼈에서 이를 장르적 공식을 뒤틀어서 재구축한 것이 이해가 된다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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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그래비티 스포일러도 있습니다.



마진콜로 데뷔한 JC 챈더 감독의 신작이자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 아니 '단독 출연'(......)의 영화 올 이즈 로스트는 그래비티와 비슷한 장르인 재난 생존물이다. 바다에서 홀홀단신으로 포류당한 남자가 살아남기 위해서 분투한다는 정석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듯한 올 이즈 로스트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관객들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영화는 단 한명의 인물로, 독백도 대사도 배경이야기에 심지어 관객이 호응할만한 드라마조차 없는 없는 뼈대만 남은 앙상한 구조로 전개한다. 그렇기에 올 이즈 로스트는 재난 영화 장르의 공식을 거부하면서 새롭고 기묘하며 독특한 경지에 도달한다. 


재난-생존의 코드가 대중문화의 큰 흐름으로 자리잡게 된 데는 현재의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극복할 수 없는 상황들과 그 속에서 살아남기라는 시대적 특수성이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대중문화에 있어서 생존 코드는 상당히 기묘한 전제를 내포하고 있다;상황이 해결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재난 속에 빠진 사람에게 이야기는 '그럼에도 살아라'라고 명령한다. 물론, '그럼에도 살아라'라고 선언하는 이 정언명령이 전적으로 틀렸다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재난-생존의 코드가 인간의 모든 것을 빼앗는 상황을 만들어내면서도, 마지막에 와서는 삶을 긍정하고 '다시 돌아가서 살아라'라고 외치는 것일까? 


그런 기묘한 지점들은 분명 존재한다. 그래비티를 예로 들어보자. 스톤 박사는 친구도 가족도 없이, 자식을 잃은 뒤로는 지구의 희미한 중력에 사로잡혀 부유하는 인간형이다. 그런 그녀가 재난을 이겨내고 다시 인간과 지구 중력이라는 세계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동인이 되는 것은 바로 코왈스키의 존재이다. 물론, 그런 중력에 의해서 다시 지구로 안착하는 과정이 무중력을 중력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닌, '숨어있는 중력의 재발견'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영화 그래비티는 인간의 영성을 긍정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영성을 재확인하고 스톤이 재탄생함에 있어서 코왈스키의 묘사는 대단히 적기 때문에, 어찌보면 감독이 인위적으로 이야기에 삽입하여 만들어낸 극중 장치 쪽에 가깝다는 것 역시도 부정할 수 없다. 즉, 스톤의 재탄생과 귀환은 개연성에 따라서 전개되기 보다는 감독에 의해 의도된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래비티가 그렇다고 나쁜 영화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위와 같은 지점 때문에 그래비티에는 그러한 한계가 있다.(또한 개인적으로 그래비티보다는 다른 방향으로 나간 칠드런 오브 맨이 훨씬 더 좋다고 생각한다) 재밌는 점은, 올 이즈 로스트가 도달하는 지점들은 그러한 지점에서 멀리떨어졌거나, 혹은 정반대라고 볼 수 있는 위치라는 것이다.


올 이즈 로스트는 주인공(심지어 케릭터의 이름조차 없다. 크레딧에서는 Our Man으로 나옴)에게서 모든 것을 거세한다;그의 삶, 가족, 삶의 목표, 살아가야할 동력, 외부적 요인에서 심지어는 그의 언어(영화에서 대사는 총 4번 밖에 나오지 않는다)까지. 그렇기에 이 남자는 전통적인 재난-생존물과 다르게 살아서 돌아가야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서 돌아가야할 이유가 없어짐으로 인해서, 영화는 역설적이게도 온전히 생존을 위한 그의 행위만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로버트 레드포드라는 대배우의 연륜이 빛을 발한다. 기본적으로 대사도 없이 오직 행동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해야하는, 기본적으로 출중한 연기력을 밑바탕에 깔아야지 가능한 배역을 로버트 레드포드는 훌륭하게 소화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로버트 레드포드가 보여주는 노년의 완숙한 이미지는 영화를 독특한 방향으로 이끈다. 만약 이 남자의 역활을 젊은 배우나 마초 이미지의 배우가 맡았을 때, 젊음에서 나오는 생명력, 강인함에 의해서 영화는 어떤 자연 대 인간의 대립구도, 그 속에서 살아남는 인간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조차도 거부한다. 레드포드의 연기는 그에게 닥친 모든 재난을 안으로 삭히고 가라앉힌 뒤에 사태에 대처하는 완숙함을 보여준다. 영화 내내 이 남자는 전혀 다급하지도, 허둥대지도 않는다. 그리고 상황에 능숙하게 대처하면서 사태를 해쳐나가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상황과 맥락의 거세, 그리고 레드포드의 완숙한 노년의 이미지와 출중한 연기가 맞물려 들어감으로써, 영화는 전적으로 '삶의 은유'로서 기능하게 된다:재난이 닥쳐오고, 이 재난을 해쳐나가는 것은 오로지 나 혼자 뿐이다. 거기에는 외부적인 요인(살라고 소리치는 명령)은 사라지고, 살아남는 것이 당연한 행위가 된다. 그렇기에 올 이즈 로스트가 지극히 뼈대만 남긴 묘사를 통해 도달하는 '생존'의 명제는 다른 영화들보다 더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하지만, 동시에 올 이즈 로스트는 혼자만으로 살아갈 수 없음을 강력하게 설파한다. 이 영화에서 재밌는 점은 주인공을 더욱더 큰 위협으로 몰고가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적'인 실수들(처음 잠을 자다 일어나는 시퀸스, 폭풍우에 머리를 부딪혀서 기절하거나, 자다가 배를 놓치거나, 혹은 불로 자기가 여기 있음을 알리려다가 자기 구명보트에 불을 지른다던가)이라는 것이다. 이는 역경에 대처하는 그의 노련함이나 완숙함과는 무관하게 그의 상황을 옥죄어온다. 그렇기에 전적으로 혼자인 그가 재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타인의 존재(구조)를 간절하게 원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는 타인의 존재에 대한 감수성을 드러내는 지점이 아니다. 오히려 육본의를 꺼내들 때 그 속에서 카드가 꽂혀있는 것을 본 그가 카드를 열어보려다 마는 것에서 드러나듯이 영화는 그런 드라마를 거부하며, 뼈대만 남아있으며 앙상한 이야기를 통해 생존과 살아가는데 있어 타인이 절실하며 필요한 지점들을 드러낸다.


감독은 이 뼈대만 남은 이야기를 지루하지 않게, 오히려 몰입감 있게 그려낸다. 마진콜에서 별다른 스펙타클 없이 부드럽게 진행되는 일련의 사건들을 몰입감 있게 다루었지만, 이번 올 이즈 로스트는 그러한 장점들과 함께 독특한 영상대비를 보여준다. 영화는 바다에 있어서 기묘할 정도로 정적인 아름다움을 부여하는데, 오프닝 시퀸스에서 드러나는 컨테이너의 모습(주인공의 요트를 박살 낸), 요트가 침몰해서 사라질때의 바다의 모습, 구명보트에 실려서 표류할 때 구명보트 밑에서 펼쳐지는 물고기들의 소우주(작은 물고기-큰 물고기-그리고 상어)까지. 어떤 점에서 영화는 자연을 절대적 타자로 상정하고 그의 모습과 대비시킴으로서 그가 인간세계로 돌아와야하는 것을 역설한다고도 볼 수 있다.


올 이즈 로스트는 그렇기에 독특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물론 이것이 전적으로 새로운 작품이며, 재난-생존물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올 이즈 로스트는 그 자체로도 훌륭한 영화이며 재난-생존 영화를 이야기할 때 꼭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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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습니다.


방송국 프로듀서 제임스 발라드(James Ballard: 제임스 스페이더 분). 그는 애인 캐서린(Catherine Ballard: 데보라 웅거)과 기이한 성생활을 즐긴다. 이들은 서로의 성적인 문제, 특히 불륜 행각에 자극을 받는 묘한 관계다. 어느날 제임스는 운전도중 여의사 헬렌 레밍턴(Helen Remington: 홀리 헌터)의 차와 충돌한다. 충격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린 제임스의 옆에는 충돌로 튕겨져 나온 헬렌의 남편이 거꾸로 처박힌 채 죽어 있다. 제임스는 사고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헬렌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야릇한 성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러면서 자동차 충돌 사고에 숨어있는 위험, 섹스, 죽음 사이의 이상한 관계 속으로 빨려들어간다.(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J.G 발라드 원작,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영화 크래쉬는 그야말로 도발적인 영화다. 영화에 있어서 서사는 거세되어 있으며, 케릭터 묘사 역시 거의 전무하다. 영화는 상징, 은유 조차도 거부하며 단일하면서 이미지 모두를 관통하는 해석조차도 통용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영화 내에서 본이 자신의 작업이 과학에 의한 신체의 변형이라고 주장을 하다가, 갑자기 이를 뒤집어서 섹스와 죽음의 쾌락에 대한 작업이라고 이야기한다. 도대체 무엇이 진실인가?) 그리고 영화는 전통적인 서사와 이미지를 뭉그러뜨리고 거세한 자리에 섹스의 이미지를 확대-재생산 하여 채워넣는다. 그렇기에 설명만 들으면 영화 크래쉬는 '포르노'와 다를바 없어보인다. 심지어는 크로넨버그의 감독 에이전시마저도 '당신 이런 영화 만들면 커리어 죄다 박살난다'라고 경고했을 정도로 영화는 도발적이며 수위가 높다.


하지만 크레쉬는 포르노가 아니다;이게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섹스와 쾌락에 빠져드는 인간군상만을 다루고, 서사를 배제하여 섹스의 선정적인 이미지로 채워넣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성적인 '자극'을 주는데 천착하지 않는다. 오히려 보는 사람으로서 뜨악하게 만드는 경악스러운 이미지의 향연이며, 당시 칸느 심사위원장을 맡은 마틴 스콜세지는 정말로 뻔뻔한 영화이자 도발이라 '칭송'하였고, 보들리야르는 원작에 대해서 '시뮬라시옹 시대의 걸작'이라 평가하기까지 하였다. 크레쉬가 지적하는 지점들은 그런 성이나 쾌락에 대한 담론을 넘어서는 강렬한 이미지의 연속을 통해서 쾌락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종말' 그 자체를 다루고 있다. 또한, 크로넨버그 필모그래피에 있어서 원작자인 발라드가 얼마나 그의 영화 세계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출발점' 같은 영화다.


크래쉬를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보들리야르의 시뮬라시옹 담론을 들고 오는 것은 매우 적절해보인다.(심지어 보들리야르는 자신의 시뮬라시옹에서 JG 발라드의 원작 크래쉬에 대해서 무려 한챕터를 활용하기까지 한다) 기본적으로 보들리야르가 시뮬라시옹을 통해서 지적하는 지점들은 다음과 같다;시뮬라시옹에 따르면 현대사회는 실재에서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이미지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파생실재에 의해서 만들어진다(사건은 보도에 의해서 발생한다) 이러한 파생실재의 사회에서의 시뮬라시옹의 존재는 과거 정신분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동력인 '무의식'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가령 당신이 어떤 행동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이 행동의 원인을 당신의 '무의식'이라고 설명할 때, 그 '무의식'이란 무엇인가? 무의식이란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것, 내가 알 수 없는 것이다;무의식은 실체에서 벗어난 하나의 '이미지'이다. 그렇기에 이 '무의식에 근거한 정신분석'은 그 스스로 빠져나올수 없는 미로속(파생실재가 파생실재를 만들어내는)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기 때문에 위험하다. 보들리야르가 이야기한 시뮬라시옹이란 것은 바로 그러한 지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그리고 이러한 파생실재들이 힘을 얻는 것은 바로 이런 파생실재들의 연쇄라는 본질을 '숨기는 것'이며 이 와중에 진실은 함열(블랙홀 처럼)되어 사라진다;마치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보도하고 크게 알림으로서 정치의 부정적인 뉘앙스를 제거하고 긍정적인 정치가 실존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그런 지점들처럼 말이다.


영화 크레쉬는 바로 그런 지점에서 높게 비상한다. 원작은 그러한 행위를 기계적이고 학술적인 언어를 이용해서 섹스의 에로티시즘을 거세하고 인간-인간, 인간-기계의 결합을 묘사하며, 그러한 결합에 의해서 인간들이 쾌락과 섹스에 천착하지만 섹스 자체가 사라지는 것을 묘사했다. 하지만 영화판은 그러한 묘사 자체를 할 수 없다. 매체 특성상, 소설은 서술을 통해서 모든 것이 드러나지만 영화는 서술이 아닌 보여주는 매체이기 때문에 원작의 질감을 살릴 수 없는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크로넨버그는 이러한 난제를 연출이라는 정공법으로 훌륭하게, 그리고 우직하게 꿰뚫고 들어가서 해결한다.


크래쉬에서 섹스는 전적으로 행해지지 않는 무언가이다. 이는 섹스의 정의를 행위에 놓느냐 아니면 행위자끼리의 육체적-정신적 결합에 놓느냐에 따라서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영화가 다루는 섹스의 질감은, 타인을 향한 열망이나 열정, 욕정에 기반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타인의 육체도 큰 문제가 되지 아니한다;이들의 섹스는 전적으로 자신 내부로 함열되어 응축되는 무언가이며 그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비정상적인 탐구이다. 주인공 부부인 제임스-케서린의 기묘한 관계(부부는 부부지만, 서로의 섹스 관계에 대해서는 터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감정이 식어있는 듯한 기묘한 광경들), 본과 만난 이후 케서린이 본에 대한 망상을 펼치면서 오르가즘을 느끼지만 동시에 뒤에서 피스톤질하는 제임스는 별개의 오르가즘을 느끼는 듯한 미묘한 거리감을 느끼게 만드는 광경들, 서로의 성기를 만지지만 시선은 서로에게 고정되지 않은체 자동차 충돌을 재현하는 비디오 테이프에 초점을 맞춰서 마치 애무가 아닌 자위를 하는 듯한 인간 군상 등등은 그러한 묘한 '거리감' 혹은 열정이 냉각되어 응축되어 들어가는 지점들을 지적한다;이들의 열정은 차갑게 식어서 자기 내부로 파고들며 섹스의 문제는 전적으로 나-타자의 문제가 아닌 나만의 문제가 된다. 그렇기에 크래쉬의 질감은, 마치 사정한 뒤에 차게 식어서 남아버린 정액과도 같은 끈적하고 불쾌한 무언가를 연상케 만든다.


이러한 파충류적 질감은 다양한 형태의 섹스(인간의 신체의 연장인 자동차를 박살내는 행위, 흉터와 보철에 대한 페티쉬, 동성애, 강간, 여장 등등)는 자극적인 소재에 천착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냉정하고 불쾌하고 끈적거리는 시선으로 다뤄지는 온갖 극단적인 형태의 섹스들은, 이들의 문제가 본질적으로 만천하에 드러내버린다;인간들의 파괴적이고 비정상적인 쾌락, 파생실재적인 이미지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 말이다. 예를들면 본이 강간하듯이 캐서린과 관계를 맺은 뒤, 제임스가 탐하는 것은 본이 케서린에게 거칠게 남긴 손자국이었으며, 분명히 고통스러울법한 흉터를 애무하자 희열을 느끼는 장면들, 그리고 자동차 사고와 충돌에서 쾌락을 얻는 인간 군상들까지. 그렇기에 이들이 벌이고 있는 행태들은 전적으로 시뮬라시옹적이다;인물들은 섹스에서 파생된 파생실재에 대한 탐닉과 탐구를 한다,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 섹스는 함열되어 사라진다. 그리고 이러한 진실은, 그들이 하는 '행위'에 의해서 전적으로 가려진다. 


영화는 이러한 파생실제를 탐닉하는 인간들이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곳은 치명적인 파멸, 죽음이다;프로이트가 지적했던 섹스의 쾌락과 죽음이라는 양가적인 지점들, 사드가 소돔 120일에서 보여주었던 과도한 섹스에서 파괴적인 섹스로의 변화까지. 하지만, 크래쉬가 도달하는 지점은 이들의 불같은 열정과 동력에의한 끓어오르는 지옥이 아니다. 자신 내부로 응축하여 타인의 버튼만을 탐하는 냉정한 파충류 인간들의 이성적이고 숙명적인 파멸이다. 본이 죽고 난 뒤에, 자기들끼리 자동차 충돌을 재현하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상처입은 케서린의 육신을 애무하며, '다음에는...다음번에는 될거야...'라고 속삭이는 제임스의 모습은 결국 파생실재의 연쇄의 끝, 죽음에 도달한 인간의 파멸인 것이다. 


크래쉬는 누군가 그랬고, 이 블로그에서 계속 인용하고는 있지만 크로넨버그야말로 이 시대의 섹스영화의 1인자라 할 수 있는 최고의 지점들을 보여준다. 섹스에 탐닉하는 파충류-인간들 보여주는 크래쉬의 지점들은 인간과 물건 또는 기계와 결합하는 지점에 대한 크로넨버그의 탐구가 섹스라는 수단을 통해서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발라드의 팬이라고 불려지는 크로넨버그가 발라드의 독특한 작품관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를 알아볼 수 있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발라드가 크래쉬를 통해서 어떤 '종말'을 예견하였다면, 크로넨버그는 거기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현재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해본다(폭력의 역사나 데인저러스 메소드 같은)


결론적으로 크래쉬는 대단히 도발적인 영화다. 여러 생각할거리를 던져주는 영화며, 완성도 있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이 영화 좋으니까 보세요 라고 추천할 수 없는 그러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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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습니다.


*http://www.entermedia.co.kr/news/news_view.html?idx=2875&bc=03&mc=09 와 http://djuna.cine21.com/xe/6483889

이 글의 영향도 받았습니다. 참조하시길.


외계인도 우주전쟁도 없다! 이것이,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진짜 재난이다! 지구로부터 600km, 소리도 산소도 없다. 우주에서의 생존은 불가능하다. 허블 우주망원경을 수리하기 위해 우주를 탐사하던 스톤 박사는 폭파된 인공위성의 잔해와 부딪히면서 그곳에 홀로 남겨지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그라비티는 전적으로 '기술적'인 쾌거이다. 처음부터 영화를 만들기 전에 모든 동선과 카메라 워크를 완성해놓고, 그 뒤에 영상을 완성하고, 그 완성된 영상 위에서 배우가 연기를 해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하는 그라비티는 보는 사람에게 있어서 시각적 충격을 선사한다. 하지만 그라비티는 시각적인 충격 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다루는데 있어서도 놀라운 지점들을 보여준다. 영화라는 매체가 전적으로 시각 매체인 점을 감안하면, 그라비티는 컷을 나누어서 다양한 상황과 재난을 화려하고 빠르게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그라비티는 컷전환 없는 롱테이크를 훌륭하게 이용해서 라이언 스톤 박사의 상황에서 닥쳐오는 재난을 몰입감 있게 다룬다.


또한 구조에 있어서도 그라비티의 이야기는 '기술적'으로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재난의 스펙타클에 밀려서 사라질수도 있는 이야기를 회상, 나레이션이나 어떠한 사족이나 부연설명 없이 영화는 롱테이크와 단 두명의 배우, 그리고 사건과 대화의 배치만으로 구성한다. 이야기들은 자연스럽게 카메라를 따라서 전개되며, 큰 부연설명 없이 대사와 배우의 연기만으로(주로 산드라 블록의 라이언 스톤 박사의 1인극으로) 단단하지만 뼈대만 남은 이야기 구조를 구성한다. 물론 후술할 심각한 문제점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그라비티의 이야기 구조는 날씬하고 가볍고 유연하며 아름답다. 단지 카메라 워크 또는 롱테이크 포르노로 치부하기에는 영화는 이야기를 다루는 기술에 있어서 능숙함을 보여준다.


그라비티의 이야기와 미학은, 영화 소개와 정반대로 전적으로 SF적인 감수성에서 벗어나있다고 할 수 있다. 듀나가 지적한대로, 그라비티의 세계는 어떠한 과학적 가정이나 상상력에서 출발하여 인간을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그라비티는 전적으로 '구식'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우주는 해상조난물에서나 볼법할 바다의 연장선상에 불과하며, 스톤과 코왈스키는 배가 난파되어 조난당한 선원들일 뿐이다. 단지, 그것이 태평양 망망대해 한 가운데가 아닌 조난시 생존가능성 제로의 우주에서 일어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병신 같이 느껴지는 한국 그라비티 광고 문구는 이 모든 것을 축약하고 있다;외계인도 없다, 우주전쟁도 없다. 하지만 그라비티에는 '유령'(라이언이 이산화탄소 중독으로 라이언이 보는 코왈스키의 환각)이라는 구세대의 잔재는 있다. 그라비티의 세계는 과학적인 고증이나 디테일에도 불구하고 우주에 대한 페티쉬나 동경은 전적으로 배제한 인간 세계의 극한의 축소판(두 명의 인간과 재난, 생존, 재탄생 등등) 것에 불과하다.(어찌보면 건담에서 사야가 소리친 '중력에 얽메인 우매한 중생들!'이라는 표현은 영화의 미학에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영화의 미학은 지구의 '중력'과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불모의 우주공간의 대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영화는 우주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메라가 아름답게 다루는 지점은 무한하게 펼쳐진 우주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지구의 풍경들이며, 오랫동안 우주를 유영했던 코왈스키가 매료되었던 것은 저 앞에 무한히 펼처진 인류 최후의 프론티어 '우주'가 아닌 해가 떠오르는 '일출' 광경이란 점은 영화가 전적으로 '지구'와 '인간 세계'에 잡혀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인간 세계와 대비되는 우주 공간은, 그야말로 중력과 반대로 엄정한 작용-반작용의 논리가 지배하는 공간이며, 카메라가 우주공간으로 포커스를 돌릴떄 영화는 마치 '여기서는 인간은 살 수 없다'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프닝 시퀸스에서 우주를 묘사하는 끔찍한 설명들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즉, 검은 무한이 지배하며 아무도 살지 않는, 살수 없는 공간이 그라비티의 우주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주를 방황하는  주인공 라이언 스톤 박사는 위태로운 인물이다. 그녀는 죽음(우주)과 삶(지구)의 경계선에서 방황한다. 4살 박이 딸이 죽은 뒤에 집에 돌아가지 않고 차를 타고 하염없이 집 밖을 해매는 이 표류자는 방황 끝에 집(지구)을 벗어나서 우주로 나아간다. 라이언이 우주에서 표류하는 것은 인간 세계의 '중력'에 붙잡히지 않고 떠올라서 사라질 수 밖에 없는 위태위태한 상황을 은유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라이언은 우주에서 표류할 때조차 '중력'에 사로잡혀 있다;왜 라이언은 초반 시퀸스에서 작용-반작용의 법칙에 따라 '무한히' 튕겨나가지 않고 궤도상의 한 지점에서 뱅글뱅글 돌면서 맷 코왈스키에게 구출 받을 수 있었는가? 우리의 '상식'과 다르게 라이언이 지구 궤도상에 붙잡혀 있을 수 있는 것은 '지구의 중력' 영향권 내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다른 인물, 코왈스키와 함께 중력은 계속해서 라이언을 '끌어당기며' 집으로 '귀환하는 이미지'로 작용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영화는 종교적인 탄생과 희생의 이미지를 채용한다. 코왈스키가 라이언을 끌고 가다 결국은 자신을 희생해서 라이언을 구한다.(자신이 끈을 놓는 행위의 반작용으로 라이언을 구하는) 그리고 안전하게 ISS에 안착한 뒤 몸을 웅크린 라이언의 모습이 여태까지 코왈스키가 라이언을 끌고 가는 '끈'의 이미지와 겹쳐지면서 탯줄과 태아의 이미지를 구축, 살 의욕이 없었던 라이언의 재탄생을 드러내는 모습이나 맷의 유령과 조우하는 장면, 기도의 이미지나 마지막 땅 위에 서는 장면까지 그라비티는 종교 이야기를 넣지 않지만 동시에 종교적인 이미지로 영화를 구성한다. 그렇기에 영화는 전적으로 '영성' 충만하다. 이는 전작인 칠드런 오브 맨에서 보여주었던 인간에 대한 신뢰와 희망을 전적으로 더욱 거대한 종교의 이미지를 채용하지 않고 인간의 이야기로만 다루고자 했던 감독 미학의 연장선상이라고도 볼 수 있으며, 그렇기에 드라마도 후술할 결점을 제외하면 매력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의 이미지나 기술적인 완성도와 별개로 그라비티에는 '치명적인 결점'이 있다. 극은 '애매한 지점'이 있는데, 이 영화가 1인극인지 아니면 2인극인지 혹은 그 어느쪽도 아닌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점이다. 분명, 라이언 스톤은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맷 코왈스키는 어떤 케릭터란 말인가? 기본적으로 라이언은 중력에서 붕뜬 위태위태한 존재며, 코왈스키는 그녀를 끌어당겨서 집으로 보내는, '중력'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케릭터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라이언을 중력에 계속 붙잡게 만드는 코왈스키의 역할이 막대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의 케릭터라기 보다는 극에 있어서 '장치'에 가깝다는 점이다. 이는 조지 클루니의 연기나 혹은 극 내에서 코왈스키를 다루는 방식의 문제라기 보다는 전적으로 코왈스키가 하나의 케릭터가 되기까지 충분한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는게 더 합당할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1.5인극(라이언+덤으로 코왈스키)에 가까우며, 결국은 유령의 이미지로 코왈스키를 재탕하면서 그가 하나의 케릭터라기 보다는 '장치'에 가깝다는 것을 인정해버리고 만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드라마는 살짝 붕괴한다;철저히 그때까지가 인간의 이야기였다면 코왈스키의 유령과 데우스 엑스 마키나(착륙은 곧 발진이다)의 등장으로 영화의 이야기는 의도치 않게 인간의 이야기를 벗어나버리고 말게 되는 것이다.


이런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그라비티는 비주얼적으로 아름다운 영화며 90분 내내 사람을 쥐고 흔들 수 있는 마력을 가진 영화기도 하다. 그러나 그라비티는 그런 기술적 성취와 별개로 아쉬운 지점 때문에 더욱 안타깝게 되버린 것이다. 그렇기에 그라비티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커리어 하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길 지점이 많다는 점, 그리고 기본적으로 영화가 못만든 것은 아니라 잘만들었다는 점은 인정해야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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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인 스포일러 있습니다.


세상을 뒤흔든 보스턴 여아 실종사건! 두 남자의 가슴 뜨거운 추적이 시작된다!

한가로운 휴일, 평화로운 마을 두 부부의 딸이 사라졌다.  세상이 모두 이 사건을 주목하고 있는 가운데, 유력한 용의자가 붙잡힌다. 그러나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는 용의자는 풀려나게 되고 사건은 다시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된다. 완벽한 용의자를 의심하는 아빠는 홀로 그를 쫓기 시작하고, 형사는 세상에 숨겨진 진범을 찾기 위해 추적을 시작한다. 유력한 용의자를 범인이라고 믿는 아빠. 진짜 범인은 따로 있다고 믿는 형사. 각각 다른 방식으로 추적을 시작한 두 사람은, 마침내 세상을 충격에 빠트릴 진실과 마주치게 된다!(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드니 빌뇌브의 최근작인 프리즈너스는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폴 토마스 앤더슨의 '마스터'와 유사한 지점이 많은 영화다. 기본적으로 감독의 야심찬 포부가 느껴지는(종교와 스승에 대한 이야기-마스터, 기독교적 죄인과 구원에 대한 이야기-프리즈너스) 구도이고 이야기를 정교하고 섬세하게 채워넣기는 했지만, 프리즈너스의 문제는 마스터와 마찬가지로 결국 그 포부(종교적인 의미와 이미지들)가 대단한 나머지 세밀한 이야기들 속에 빠져서 사람으로 하여금 해매게 만들기 쉬운 지점에 도달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사실, 여기 있는 감상도 기초적으로 영화를 보고 난 다음에 뒤죽박죽인 이미지들을 하나의 틀로써 묶어보려는 시도의 연장선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마스터나 프리즈너스의 문제의식이나 이야기하고자 하는 소재나 주제의식과 별개로, 본인은 개인적으로 프리즈너스가 더 좋았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지극히 섬세한 드라마로 가버리는 바람에 보는 재미는 거의 없었던 마스터에 비교하자면, 프리즈너스는 장르적 공식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두 여자아이가 사라지고, 아버지와 형사는 사건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접근을 한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던진 용의자를 납치해서 고문해서 딸을 찾고자 했고, 형사는 용의자에서 벗어나서 다른 방향으로 사건을 바라보고 해결하고자 한다. 


하지만, 영화는 이렇게 서로 다른, 그리고 상반된 이야기들을 하나로 엮으면서 초점을 흐트러트리지도 않고, 우직한 수사물의 형식으로 풀어낸다. 프리즈너스가 보여주는 수사물 장르의 공식이란, 요즘 흥하고 있는 인식의 재구성(이에 대한 사고들은 https://medium.com/p/a639a7b1315d 에 풀어놓았다)이라던가 고전적인 트릭, 밀실살인류가 아닌 '발로 뛰는 수사'를 보여준다는 점,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관객을 쥐락펴락하면서 몰입하게 만든다는 점은 감독인 드니 빌뇌브의 실력을 입중하는 부분이다. 또한 전혀 그럴거 같지 않은 휴 잭맨의 놀라운 열연, 제이크 질랜할의 노련한 형사 연기까지 영화는 딱히 흠잡을 부분이 없다. 그리고 드니 빌뇌브 감독의 전작인 그을린 사랑이 서로 다른 두 이야기, 현재와 과거, 인물들, 플룻들이 담담한 필치아래서 충격적인 형태로 조우하는 지점들과 그 과정을 세밀하게 구성하였다면, 프리즈너스는 그을린 사랑의 미덕을 장르 영화적 공식에 따라 타이트하고 정교한 형태로 구현하는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바로 이 '타이트하고 몰입감 있는 이야기'에 감독은 너무나 많은 이미지들을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담담한 묘사를 따라서 관객이 사유할 시간과 플룻에 의문을 가질 시간들, 그리고 그것을 재구성해서 충격받고 침묵하게 만드는 그을린 사랑과 다르게 프리즈너스는 쏟아지는 이미지와 사건들, 그리고 작중에서 언급하듯이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라는 명제 하에서 관객이 모든 것을 연결하는 사유를 하기 전에 그 다음 이미지로 휙휙 넘어가는 다소 불친절,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극도로 정교한 형태'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가 수사물 장르의 공식 밑에 깔아놓는 이미지는 명백하게도 '종교적'인 이미지다. 켈러 도버가 주기도문을 읊으면서 사냥을 하는 시퀸스로 시작되는 영화는, 영화 곳곳에 기독교의 십자가 이미지(차 안에 달려 있는 십자가에서부터 심지어 로키 형사의 손에 문신되어 있는 작은 십자가까지)와 구원과 죄인에 대한 이야기를 깔아둔다. 그리고 이는 모든 일의 원흉인 홀리 존스가 남편과 자신의 행위를 '신에게 대적하는 행위'로 선언하고 있는 점, 그리고 갖혀 있는 아이들, 미로를 풀면 집에 보내준다는 납치범(홀리와 그의 남편), 미로에 집착하는 과거의 피해자, 사실상 피해자인 알렉스를 가해자로 보고 감금하고 고문하는 켈러의 모습 등에서 드러나는 '갇혀있다'에 대한 반복적인 이미지들은 간과하기 어려울 정도로 영화 전반에 깔려 있으며, 사건과 이미지들은 서로 연관 복잡한 구조를 구축한다.


일단 제목에서부터 접근을 해보겠다. 왜 제목은 '죄수들'(Prisoners)인가. 왜 죄수(Prisoner)라는 단수가 아니라 '죄수들'이라는 복수의 형태로 서술되어 있을까. 물론 잡혀서 갇힌 아이들은 두명이므로 이들을 지칭하는데 있어서 복수의 형태로 서술하는 것이 맞겠지만, 자세히 잘 살펴보면 영화는 '갇혀 있는' 사람들이나 감금의 이미지와 직접적인 연관을 가진 사람들이 영화 곳곳에 깔려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 뿐만 아니라, 스스로 교도관으로 일했었다고 밝히는 켈러, 과거에 소년원에 있었던 로키, 이미 감금되어 있는 피해자지만 켈러에 의해서 두번 감금되어 고문당하는 알렉스, 과거의 납치 경험에 사로잡혀서 유괴된 아이들의 옷으로 다시금 그 행위를 반복하는 피해자까지. 심지어 원흉인 홀리의 남편은 이미 죽고 없는데, 그의 망령에 사로잡혀있다는 점에서 모두는 그에게 '감금'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미로의 이미지는 이를 구체화시킨다. 자식을 암으로 잃은 홀리 부부는 자신의 아이를 빼앗은 신에게서 다시 아이를 빼앗아온다. 그리고는 납치한 아이들에게 미로를 던져주고는 이렇게 이야기한다:미로를 다 풀면 집에 갈 수 있다, 라고. 사실, 이는 영화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선언이다. 이 해결하기 힘든 난제를 과연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죄'의 미로 속에서(영화 속 선교 라디오에서는 인간은 모두 죄인이기에 고통 받는다고 선언한다) 진실이라는 출구를 향해서 어떻게 나올 것인가. 그렇기에 영화속의 인물들은 모두 죄수들(Prisoners)이다. 


진실에 대한 추구, 어찌보면 수사물의 가장 기본이자 핵심이라고 할 수 있으며 혹자는 이러한 진실(두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에 대한 추구의 과정을 다룬 프리즈너스를 보고 살인의 추억을 연상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살인의 추억이 전적으로 '추억'과 '회상'이라는 색감과 디테일을 통해서 살인사건과 함께 시대 자체를 재구성했다면, 프리즈너스는 진실이라는 미로를 어떻게 풀을 것인가를 두고 두 남자, 켈러와 로키의 서로 다른 접근법을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켈러는 미로 속에서 미로의 해답을 찾고자 한 인간이며, 로키는 미로의 바깥에서 미로의 해답을 찾고자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물론 서로는 서로에 대해서 좋아하지 않지만, 그 둘은 진실을 향한 열렬한 탐구자라는 측면에서 서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먼저 켈러의 경우, 그의 해결방법은 전적으로 잘못되기는 했지만, 전적으로 인간적이다. 자신의 자식을 찾기 위해서 용의자를 고문하는 아버지. 휴 잭맨은 켈러 도버라는 케릭터의 절박함과 분노, 다급함, 마지막으로 그의 피로함을 정말로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이 켈러라는 인물은 유괴사건이라는 죄의 미로 속으로 직접 뛰어든다. 이는 바로 사실 피해자이자 '죄수'인 알렉스를 납치해서 고문하는 것으로 귀결되는데, 켈러의 전직인 교도관, 즉 죄수를 감시하는 '간수'라는 이미지와 자신이 싫어하는 공간으로서의 아버지의 집(아버지는 자신의 집에서 자살하였고, 켈러는 이를 방치한 것처럼 보인다)이자 감옥의 이미지 맞물려 들어가면서 상당히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진실로 가는 열쇠를 쥐고 있으면서도 그는 그 진실에 도달하지 못하는데, 그의 물음 자체가 잘못된 것(피해자가 아닌 아이들을 납치한 용의자로서 알렉스를 전제함)이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그러한 행위를 통해서 자신조차 미로에 갇힌 '죄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알렉스 옆에 꿇어앉아서 주기도문을 읊다가 '자신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부분에서 넘어가지 못하는 것은, 그 자신 역시 죄인이며 이 죄는 씻겨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드러나는 그의 인간적 고뇌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죄의 미로에서 빠져나가는 '구원', 아이들을 찾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로키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전적으로 '외부자'이다. 물론 켈러만큼은 아니지만, 그 역시도 죄의 미로 속에서 구원이자 진실을 찾아내기를 간절히 희망한다.(그의 손등에 세겨진 MAZE, 즉 미로라는 문신을 보라) 그러나 그의 방법은 철저하게 넓은 시야에서 바라보는데, 알렉스가 용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결론내린 로키가 다양한 접근방식(성범죄자 탐문, 수상한 인물을 쫒는다던가 등등)을 통해서 사건의 큰 그림을 맞춰나가는 과정은 상당히 정석적이다. 그리고 이 정석적인 방법은 동시에 주변 사람들과 대비되는데, 모든 것을 분절적으로 바라보는(특히 과거의 피해자의 집을 탐문했을 때 나온 미로의 이미지를 두고 동료들과 벌인 대화라던가) 인물들과 다르게 로키는 이 모든 것이 어떠한 맥락이 있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퍼즐 조각들은 맞춰지지 않은체로 그를 괴롭힐 뿐이다.


재밌는 점은, 이 둘 중에서 가장 먼저 미로의 끝에 도달한 사람은 바로 켈러라는 것이다. 그는 알렉스의 말(알렉스는 알렉스가 아니다)과 구출된 조이의 말(아저씨가 거기 있었어요)을 토대로 범인이 홀리라는 진실을 찾아낸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죄인이기 때문에(무고한 알렉스를 고문하였으므로) 벌을 받아야하는데, 그 벌이란 영원히 미로 속에 갇혀서 자신의 딸을 보지 못하는 형벌이다. 그러나 동시에 알렉스의 고문 덕분에 로키는 자신의 마지막 퍼즐 조각을 발견하고 켈러의 딸을 구출하는데 성공한다. 그렇기에 영화의 끝은 의미심장하다. 모든 것이 끝난 후, 홀리의 집에서 피해자들을 발굴하다 퇴근하는 법의학팀을 바라보던 로키는 희미한 호루라기 소리(켈러의 호루라기)를 듣는다. 구덩이(=미로) 속에 갇혀 영원히 발견되지 않을 죄인인 켈러와 미로 바깥에서 진실을 보는 로키의 대비. 진실이라는 구원에 도달한 자와 도달하지 못한 자. 


영화 프리즈너스는 짜임새 있는 구조와 몰입감 있는 이야기로 관객들을 매료하지만, 정작 그것이 만들어내는 미학적인 지점들은 너무 복잡하거나 섬세해서 관객들로 하여금 따라오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 구석이 있다. 또한 몇몇 부분에 있어선 과도하게  불친절한 모습을(켈러와 아버지의 관계라던가) 보여주었는데, 영화가 좀더 친절해도 괜찮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이런저런 아쉬운 점들에도 불구하고, 프리즈너스는 잘만든 스릴러 영화다. 그것은 요즘 영화들이 잊고 있었던 전통적인 서사와 잘짜여진 두개의 플룻, 그리고 흡입력 있는 이야기에 나름의 미학까지 주목할만한 부분이 많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화는 지나치게 섬세하고 복잡하다. 좀더 맥락을 가다듬고 이미지를 뚜렷하고 구체적으로 제시하였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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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습니다.


며칠전 실직 당한 아빠, 언제나 외로운 엄마, 갑자기 미군에 지원한 형, 남몰래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나. 우리 가족은 모두 거짓말쟁이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 켄지에겐 말할 수 없는 비밀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게 피아노를 배우고 있는 것… 켄지의 천재적인 재능을 발견한 선생님은 음악 학교 오디션을 권유하지만 아빠의 반대 때문에 몰래 피아노 학원을 다니던 켄지는 계속 그 사실을 숨기기로 한다. 그런데 비밀이 있는 건 켄지뿐만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해고 된 아빠, 어느 날 사라진 엄마, 미군에 지원한 형까지 모두들 숨겨둔 비밀이 있었는데... 과연, 켄지는 아름다운 꿈의 연주를 계속 이어갈 수 있을까? 거짓말쟁이 켄지네 가족의 불협화음 조율이 시작된다!(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네이버 영화 시놉시스에서 다뤄지는 것저럼, 도쿄 소나타의 전반적인 이미지는 일종의 '치유물'의 방식으로 다뤄지는 듯한 느낌이 있다. 뭐, 결론을 두고 이야기하자면 치유물은 맞다. 하지만, 도쿄 소나타의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정서는 우리가 소위 이야기하는 힐링과는 거리가 멀다. 호러영화로 자신의 커리어의 정점을 찍은 구로사와 기요시는 절규 이후로는 호러영화가 아닌 다른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토로한적이 있다. 실제로도 도쿄 소나타는 호주 각본가가 쓴 각본을 기요시가 도쿄와 일본의 이야기에 맞게 각색하여 만든 작품이며, 장르적으로는 가족 드라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쿄 소나타를 지배하는 정서는 '공포'다. 문제는 호러영화에서 다뤄지는 공포의 질감과 다르게, 도쿄 소나타의 질감은 담담하며 저자극적이다. 그렇기에, 도쿄 소나타는 더 숨막히는 영화가 된다.


가족의 해체와 재생이라는 담론은 이제 가족 드라마 장르에 있어서 뻔하고도 흔한 것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도쿄 소나타가 이 담론에 접근하는 방식은 색다르다. 겉으로는 멀쩡해보이는 가족이 사실은 내부로는 썩어있었으며, 가족들이 이것을 직면하고 갈등하며 마지막에는 재결합/해체되는 이야기에는 근원적으로 가족 공동체 개념에 대한 창작자들의 다양한 믿음이 깔여있다. 하지만 도쿄 소나타는 이를 부정한다. 영화 내에서 가족 구성원들은 제각기 자신의 문제 속에 틀어박혀 있을 뿐이다. 영화 속에서 피아노 선생이 자신의 이혼에 대해서 담담하게 '원래부터 남남이었던 사람들이 남남으로 돌아간 것 뿐이야'라고 진술했던것 처럼, 애시당초에 서로 남남이었던 사람들이 모여서 가족이라는 서투른 연극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이미지를 구체화하는 것은 바로 가족 간의 '소통의 부재'다. 영화에서 가족들은 서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아니, 대화라는 형식을 빌 뿐, 결국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할 뿐이다. 켄지가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 했을 때, 아버지 류헤이가 켄지의 피아노 교습을 반대한 이유는 지극히 아버지 '개인적인 문제'(가장의 권위를 세우겠다)라는 것이다. 어머니 메구미는 그들 사이에서 중재하는 위치에 서있긴 하지만, 이는 형식적인 중재에 불과하며 의미없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오히려 타카시가 미군에 지원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와 타카시 사이의 갈등에서 어머니가 보여주는 위치는 지극히 자기를 억누르고 상대방을 띄워주는 역할 뿐이었다. 형인 타카시가 아버지에게 미국이 세계의 평화를 지킨다고 역설하는 장면이나, 켄지가 더이상의 대화를 포기하고 자신의 급식비를 털어서 피아노를 배우는 장면들은 전적으로 가족 구성원에 대한 소통의 부재, 결국은 남남일 수 밖에 없는 분위기를 묘사한다.


그렇기에, 켄지 가족에게 있어서 '가족'이란 개념은 전적으로 그들에게 상처주는 무언가에 불과하다. 가장인 류헤이는 실직한 이후, 매일 출근하는 것과 같이 양복을 입고 무료 급식대에서 밥을 얻어먹는다. 가장이라는 권위에 얽메여서 스스로를 옭아메는 그의 위태한 느낌은 해직된 첫날 집 담장을 넘어서 위태위태하게 집에 들어오는(류헤이의 집은 재밌게도 철로 바로 옆에 있다.) 그의 모습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류헤이는 타카시의 뼈아픈 지적(아버지가 우리를 위해서 뭘했는지 이야기 해봐요!)에 백화점 청소부일을 하게 되지만, 청소부로서의 그의 모습에서는 전적으로 가장으로서의 권위와 현실이 충돌하여 만들어내는 경직된 모습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어머니라는 역할에 의해 얽메이는 메구미 역시 누군가 자신을 지탱해주기 바라면서 손을 뻗지만(누군가 나를 일으켜줘) 가족 중 아무도 그 부름에 응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그녀는 차 뚜껑이 열리는 컨버터블 차량을 바라보며 일탈을 꿈꾼다. 자식들의 사정도 사실은 별반 다를게 없는데, 타카시는 가족으로부터 탈출을 꿈꾸며 켄지는 아버지의 권위에 의해서 '실제적'으로 상처받는다.(그는 계단에서 굴러떨여저서 머리를 다친다)


가족 외부의 세계 역시 사정은 비슷하다. 오랜만에 만난 류헤이의 고교동창은 류헤이와 같은 실직자 신세지만, 동시에 집에서 자신이 실직한게 아닌가 하고 의심하자 류헤이를 끌여들여서 연극을 벌인다. 이 때, 이 동창의 집 역시 류헤이의 집과 유사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그리고 동시에 더 무서운 것은, 중학생인 동창의 딸이 사실은 이 모든 연극을 눈치채고 있었다라는 암시다.) 또한 만화책을 전달하다가 걸린 켄지는 자신이 만화책을 본게 아니라 전달한것에 불과하다고 항거하면서 담임교사의 치부를 까발린다. 자신이 받는 부당한 대우(실제로도 그 장면은 켄지 보다는 담임 교사의 부당한 대우가 더 부각되기는 해었다)에 대한 항변이기는 했지만, 그 결과 담임 교사는 자기 담임 학급으로부터 이지메를 당하게 된다. 재밌는 점은 학급 학생들이 교사를 이지메하면서 즐거워하는 장면, 그리고 '이건 혁명이야 혁명!'이라고 외치는 부분에서 기성세대에 대한 신세대들의 반발과 함께 본질적으로 문제에 접근하지 못하는 현세대에 대한 영화의 문제 제기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켄지가 자신의 행동이 지나쳤다고 사과하자 담임 교사는 '서로 가까이 가서 상처주지 말고, 서로 없는 사람 취급하자'라는 식으로 어물쩡 넘겨버린다. 이와 같이, 가족과 그 구성원들, 그리고 그 바깥에 세계까지 타인에 대한 믿음과 소통이 부재한 상황은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영화는 여기에 거스를수 없는 거대한 세계의 흐름을 집어넣는다. 기요시는 구체적이진 않지만 무시할 수 없는 사회적 맥락과 이미지들을 영화 전반에 깔아둠으로서 사회의 문제가 켄지 가족의 문제이며, 동시에 켄지 가족의 문제가 사회의 문제임을 드러낸다. 영화 도입부, 영화 전반을 암시하는 듯이 폭풍이 몰아치고 '집안'으로 폭풍이 들이침과 함께 중국에서 저임금 노동력이 기존의 류헤이 등의 기성세대를 대체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류헤이가 실직 이후 집을 나와서 이리저리 떠도는 장면들에서 군중을 다루는 영화의 이미지는 전적으로 '풍경' 또는 '정물'적인 인상이 강하다. 군중들은 한 방향으로 향해서 걸어가는 등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낸다. 류헤이는 그 속에 끼어있거나, 혹은 그 밖에 존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어느쪽이든 이 거대한 군중의 흐름이라는 풍경은 류헤이와 그 가족들을 압박하는 세계의 흐름으로 작용한다. 심지어 류헤이의 집이 철도변에 있다는 것, 거대한 열차가 끊임없이 소음으로 류헤이의 집을 지나치며 압박하는 모습을 통해서(영화 내내 철로를 다리는 열차는 선명하지 않지만, 분명히 집 바깥, 바로 거기 존재하는 하나의 배경이다) 이 중산층 가정이 사실은 아주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타카시가 미군에 입대한다는 설정은, 현실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설정이다. 하지만 기요시는 '대체역사물'적인 접근을 한다. 미군에 일본인이 입대해서 미국의 현실을 직접 볼 수 있게 되었으면 했다라고 기요시는 이야기했다. 미국이 세계의 평화를 지킨다는 안일하고 이상적인 발상을 하는 타카시가 미군과 함께 전쟁에 참전했다는 것, 그리고 타카시가 완벽한 타자(살인자)가 되어서 집에 돌아오는 악몽을 꾸는 메구미의 모습을 통해서 바깥 세계에 대한 압박과 공포는 점점 더 구체화된다. 


이런 압박 속에서 가족 구성원들은 탈출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이 탈출 방향에서조차 그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려나간다. 메구미가 자신이 청소부로 일하고 있는 것을 보자, 비명을 지르며 메구미와 다른 방향으로 달려나가는 류헤이, 그리고 집에 들어온 어설픈 도둑과 함께(이 도둑은 어떤 의미에서 지극히 기요시적인 케릭터다. 신경증에 사로잡혀 있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컨버터블 차량을 타고 해안으로 도망치는 메구미, 가출하려고 버스에 무임승차하는 켄지까지, 가족 구성원 개개인은 문제에 대한 대답을 찾아내지 못하고 엄청난 압박감에 본능적으로 탈출하려는 시도를 할 뿐이다. 


이들의 '어설픈 탈출'은 전적으로 실패로 돌아간다. 켄지는 버스에 무임승차를 하지만 검사가 기소를 취하하는 바람에 범죄자도 못한체 어설프게 집으로 돌아갈 뿐이며, 류헤이는 차에 치였지만 '죽지도 못한체' 너덜너덜한 체로 집에 돌아온다. 메구미는 도둑과 함께 해변까지 일탈을 했지만, 동시에 현실을 감당하지 못한 도둑이 차와 함께 바다속으로 들어가서 자살함을 선택하는 바람에 홀로 자신만 해변에 남겨졌을 뿐이었다. 결국 이들은 집으로 돌아와서 다함께 밥을 먹는다. 침묵 속에서.


마지막 식사장면은 지난 식사장면들에 비교하면 화학적으로 본질적으로 변화했음을 관객들은 느낄 수 있다. 일탈 이전의 가족들이 식사하는 장면, 그들이 대화하는 모습들, 그리고 그 장면을 지배하는 질감은 삭막함 그 자체였다. 그들은 대화를 하고 있지만 대화를 하고 있지 않으며, 밥을 먹고 있지만 그것이 우리가 소위 믿고 있는 전통적인 가정의 행복함이 아닌 묘한 긴장감 속에 사로잡혀서 어딘가 모르게 경직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있다. 그렇기에 그들이 밥을 먹는 장면은 어딘가 모르게 '깨작거린다'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이 지점이 가장 극대화된 부분이 바로 동창의 집에서 식사를 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분위기가 경직됨을 넘어서 의심이 지배하는 식탁인데(사실 남편이란 작자가 실직을 한게 아닐까 라는), 류헤이의 어딘가 불편하고 긴장된 모습, 그 속에서 태연하게 자기 역할을 연기하는 동창, 이것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아내, 그리고 모든것을 알고 있지만 침묵하는 딸까지 이 팽팽한 신경증의 극치 속에서 가족의 식사란 개념은 서로를 찢어발기는 개념으로 작용할 뿐이다. 이후 동창의 가족들이 자살로 파국을 맞이했다는 걸 생각하면, 이들의 식탁이란 전적으로 폭풍이 몰아치기 전의 고요한 긴장감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클라이막스의 식사 장면은 다르다. 이들의 문제는 전혀 해소되지 않았지만(특히 아버지의 실직이라는), 이들의 긴장감은 해소되어 어딘가 편안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그들의 피로한 모습에서, 그들은 서로의 공통점을 발견해낸듯 하다. 그렇기에 마지막 식사 장면은 전적으로 대사 한마디 없지만, 이들이 모인 장면을 통털어서 가장 가족다운 부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장면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 장면에서 가족의 의미는 재발견된다. 그것은 가장의 권위나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희생이나 개념에 기초한 것이 아닌, 모두가 긴장을 풀고 편히 있을 수 있는 피로의 공간, 모든 것이 무너지고 박살나고 심지어 거기서 탈출하려고 발악을 해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공간으로서 집이자 가족의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다. 여전히 류헤이는 잡역부로 일하고 있으며, 타카시는 파병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은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켄지의 월광 소나타 연주와 함께, 본질적으로 이들이 변화하였음이 암시된다. 파괴적이고 거스를 수 없는 세계의 흐름에서, 이들이 찾아낸 해답은 인고하는 것이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도쿄 소나타는 장르적인 측면에서는 기존의 작품들을 벗어났지만, 여전히 기존 작품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물건이며 데이빗 크로넨버그와 같이 '한 장르에서 대가를 이룬 사람이 다른 장르에서도 빛을 발할 수 있다'라는 것을 훌륭하게 입증한 작품이다. 기회가 된다면 꼭 보시길.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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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한복판. 공원 벤치에 앉아있던 중년의 남자가 순식간에 한 청년의 총에 숨을 거둔다.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기도 전에 범인 조슈아 샤피라(팀 로스 분)는 군중 속으로 사라진다. 그는 마피아 행동 대원 중의 하나다. 전화로 수행한 임무를 보고하는 그의 다음 임무는 브룩클린의 리틀 오데사로 불리는 러시아인들이 사는 지역의 한 아랍계 보석상 팔레비를 없애는 일이다.  하지만 그곳은 자신이 자랐던 마을이며, 그의 부모와 동생, 사랑하는 여인 알라(모이라 켈리 분)가 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사적인 감정을 인정하지 않는 조직에 이 일을 결행한다. 몰래 리틀 오데사로 잠입하지만 그의 동생 루벤(에드워드 펄롱 분)에게 발각되고 죽어가는 어머니의 소식을 접한 조슈아는 그의 생가에까지 들르게 된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살인자로 소문난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데뷔작인 리틀 오데사(한국에선 비열한 거리로 수입되었다)는 독특한 영화다. 영화의 내용은 평범한 범죄물이다:킬러가 한번 떠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와서 살인을 계획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고향을 떠나면서 해어졌던 가족들과 친구들과 다시 조우한다. 그러나, 리틀 오데사는 평범한 장르영화의 공식을 빌려오고, 또 처음부터 끝까지 평범한 장르영화를 인용하지만, 그것을 전혀 다른 분위기로 표현한다.


제임스 그레이 영화 세계를 가리켜 누군가는 '축축한 우울'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물론 아직 제임스 그레이 영화를 모두 본것은 아니지만, 리틀 오데사를 두고 본다면 이 '축축한 우울'이라는 명제는 영화를 훌륭하게 요약한다. 리틀 오데사를 지배하는 분위기는 해어나올 수 없는 우울함이다. 주인공인 조슈아나 루벤, 그리고 형제의 아버지나 병으로 죽어가는 어머니까지 극은 형용할 수 없는 우울로 가득차 있다. 심지어 정사 장면마저도 에로티시즘이 아닌, 우울의 일부로서 다루면서 영화는 독특한 질감을 드러낸다.


하지만 동시에, 그 우울로 인해서 서로 각기 떨어져있는 케릭터들을 공통된, 그리고 평등한 존재로서 설 수 있는 공감대를 만들어낸다. 한병철의 피로사회에서 언급한, 대안적인 '치유하는 피로'의 이미지에 리틀 오데사의 우울은 많은 부분 맥락이 닿아있다. 인물들은 서사적으로 떨어져있으며 각자 자기의 문제와 폭력에 사로잡힌다. 남편은 병든 아내에 대한 욕정을 풀지 못해서 바람을 피며, 장남은 살인자며, 아내는 뇌종양으로 죽어간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 각기 다른 공간에서, 각기 다른 컷으로 잡혀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을 다루는 질감의 동일성, 축축한 우울함과 피로의 정서로 인해서 이들은 묘한 유대감을 만들어낸다. 장남과 친하게 지내는 동생을 가죽벨트로 때리는 장면에서조차, 통속적인 아버지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기 보다 이 행위를 꼭해야하는가 라는 회의와 피로로 장면을 채워넣어버린다. 느릿느릿하면서 우울한 느낌, 그리고 축축한 질감들(대부분은 성가를 연상케하는 삽입곡을 사용한다)은 영화를 지배한다. 


리틀 오데사는 미국의 러시아 유태인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는 제임스 그레이가 미국 러시아계 유태인이기에 기초하고 있는 러시아계 유태 문화의 독특한 풍경들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민자 사회가 겪는 일반적인 아버지 세대와 자식 세대의 괴리(출신지 전통적인 문화를 고수하는 아버지 세대, 그리고 미국적 기회에 현혹되어 범죄자가 된 자식 세대, 그랜 토리노 같은 작품에서도 보여주는 모습이다)에 기반한 갈등을 보여준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렇게 서로 부서진 가족 관계도, 카메라의 독특한 질감 속에서 폭력에 대한 피로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영화의 마지막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형을 노리는 깡패들을 처리하기 위해 형의 권총을 들고 온 동생은 오해를 받아 총을 맞고 죽고, 형의 연인도 그와 함께 죽는다. 그리고 형은 동생의 시체를 소각로에 넣고 태운 뒤에 도망치듯이 자리를 떠난다. 이것이 영화의 마지막이다. 기존의 가족의 화해, 이를 통한 카타르시스를 드러내는 장르영화의 공식에서 벗어난 결말이다. 이는 영화의 우울의 질감을 스크린 바깥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손쉬운 카타르시스를 거부하고, 관객들에게 케릭터가 느끼는 우울함을 같이 느낄 수 있게 함으로서 거기서부터 폭력의 중단을 위한 관객과 영화 모두가 공통의 피로를 느끼게 만들어낸다.


제임스 그레이는 이 영화로 장편 데뷔를 하였는데, 이 영화의 방식이 다른 영화에서도 적용된다는 점에서 제임스 그레이 영화의 미학을 확립하는 기초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제임스 그레이 영화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지표를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던 영화였으며, 동시에 그 자체만으로 독특한 매력이 있는 작품이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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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유명한 과학자 커플 ‘클라이브’(애드리안 브로디)와 ‘엘사’(사라 폴리)는 난치병 치료용 단백질을 만드는 연구를 진행하던 중, 조류, 어류, 파충류, 갑각류 등의 다종(多種) DNA 결합체인 ‘프레드’ 와 ‘진저’를 탄생시켜 동물용 의약 단백질 생산을 가능케 한다.실험을 거듭하면서 유전자 재조합 기술은 발전하고, 다종 DNA 결합체와 인간 유전자의 결합이 가능한 수준에 이르자 과학계와 의학계에 놀라움을 선사하고 싶었던 두 커플은 위험한 실험을 시도한다.  제약회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다종의 결합체와 인간 여성의 DNA를 결합시키는 금기의 실험을 강행하여 인간도, 동물도 아닌 전혀 새로운 생명체인 ‘드렌’을 탄생시킨다. 하지만 이들의 실험은 점점 통제할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큐브의 빈센조 나탈리 감독이 만들고 기예모르 델 토로가 제작을 맡은 스플라이스는 고전적인 SF 스릴러라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냈을 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고전적인 질문을 정석적인 방법으로 풀어내고 있는 작품이다. 문제는 이 정석적인 작품이 요즘 시대에는 맞지않을 정도로 너무나 정석적으로 기분 나쁘기 때문에(일면 데이빗 크로넨버그 영화들, 특히 플라이가 연상되는 부분이 있다) 흥행에서도 참패를 겪었으며 대중적인 평에서도 썩 좋지못한 평가를 들었다. 하지만 스플라이스는 SF적인 설정과 기괴한 창조물 드렌의 모습, 그리고 충격적인 결말까지 기분나쁜 SF 스릴러를 훌륭하게 재현해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생명의 창조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플라이스는 이러한 생명의 창조와 윤리적인 문제를 현학적인 이야기로 끌어가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가 없는 부부 과학자가 자신들이 만든 새로운 생명체를 기르면서 생기는 긴장과 갈등을 일종의 '대안 가족물'(?)의 형식으로 풀이하고 있다는 점에서 스플라이스는 자신의 드라마를 구체적이고 확고한 범위로 좁히는데 성공한다. 특히 완벽하게 새로운 생명을 창조했지만, 이들 부부가 드렌을 숨기면서 기르는 에피소드들은 과학적인 접근인척 하지만 본질은 아이를 한번도 기른 경험이 없는 부부의 좌충우돌에 가깝다는 인상을 주며(무엇을 먹여야 하는가 등등에 대해서), 드렌은 부모에게 있어서 자식의 '이해할 수 없는 타자성'(내가 만들었지만/잉태했지만, 도대체 누구인지 알 수 없는)의 SF식 확대 재생산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스플라이스는 그런 훈훈한 가족드라마를 다루거나 서로를 이해하는 지점에 서있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가족 '판타지'를 차가운 질감으로 도륙내는 지점에서 영화를 풀어나간다. 먼저, 어디까지나 클라이브의 시점은과학적인 관점에서 드렌을 관찰하며 어떤식으로든 드렌과의 거리를 떨어뜨리려는 시도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내었다는 윤리적인 죄책감을 느낀다. 하지만 드렌에 대해서 애정 비슷한 감정을 보였던 엘자의 경우에는 자신의 어머니로 인해서 상처받았던 유년시절의 보상으로서 자신의 유전자를 기증한 것처럼 위장해서 드렌을 만들어내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클라이브-엘자-드렌의 관계가 단순한 과학적 호기심이나 애정 또는 자신의 아이를 원했던 부부의 대안이 아닌(왜냐면 유전자로 보았을 때, 드렌은 엘자의 클론? 이기 때문이다), 가족이면서 동시에 기묘한 삼각관계, 엘자는 자신이자 동시에 딸인 존재로서 드렌을 원했으며, 클라이브는 과학적인 호기심과 윤리적인 죄책감에서 드렌을 바라보며, 그리고 드렌은 자신의 유사 부모를 후술할 유사 근친상간적인 관점에서 접근한다.


그렇기에 기존 대중매체에서 자주 등장했던 '세상의 악으로부터 동떨어진 순수하고 선한 인간의 피조물'이라는 공식은 영화속에서 깨진다, 클라이브(부)-엘자(모)-드렌(자식)이라는 대안 가족의 구조에서 비추어 봤을 때, 드렌은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에 대한 타자로서의 모습을 확대 재생산된 모습 그 자체가 드렌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에서 드렌은 끝까지 이해불가능한 존재다. 포유류, 조류, 어류, 파충류 등등의 유전자를 섞어서 만들었다는 이 신종 생명체는 어느 지점에서는 아름다운 여성의 옆모습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어딘가 부조화스러운 이미지를 지울 수 없다. 사실 이는 신종 생명체의 원형인 프레드와 진저의 이미지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이 둘의 이미지는 전적으로 남성기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다. 심지어 드렌의 태아의 모습-정자-에서부터 인간과 점점 닮아가면서도 이러한 이미지의 원형에서 벗어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순진무구한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언뜻언뜻 변화하는 표정속에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광기와 동물적인 야성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이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장치가 드렌의 꼬리와 꼬리속에 숨겨진 독침이다. 영화 내내 드렌의 독침은 드렌의 순진한 존재로서의 이미지와 대비되는 지점이자 위협으로서 작용된다.(클라이브와 정사를 나누는 장면에서 독침을 드러내는 드렌의 이미지가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엘자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드렌이 엘자의 정신병의 가족력(특히 어머니)이 유전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지적하는 클라이브나 자식세대의 반항심을 정신병적이고 야수적인 파괴로 표현하는 드렌(특히 엘자가 키우도록 허락한 고양이를 엘자가 보는 앞에서 독침으로 쏴죽인다던가), 그리고 점점 자신의 어머니처럼 드렌을 편집증적으로 통제하려는 엘자의 모습까지, 영화는 이 유사 가족이 점점 파국으로 치달으며 이 절정에 있는 것이 바로 '유사 근친상간'이다. 클라이브와 엘자가 드렌이 자고 있는 동안 정사를 나누는 장면을 드렌이 훔쳐보는 듯한 뉘앙스를 보여주는 장면이나 드렌이 클라이브를 유혹하는 장면, 마지막으로 성전환해서 엘자를 겁탈하는 남성 드렌의 모습을 통해서 이들 관계가 완전한 파국을 맞이한다.(동시에 관객들의 정신도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버린다)


스플라이스의 미덕은 생명 창조라는 무거운 주제를 현학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이 아닌 유사 가족 막장드라마를 이용해서 결국은 피조물에게 지나친 집착을 드러낸 창조주가 자신을 모델로한 피조물에 의해서 파멸하는 과정을 잘 드러내었다. 하지만 스플라이스가 잘만든 것은 이런 창조의 이야기를 불쾌함 하나만을 완성하는데 훌륭한 퀄리티로 이루어냈기 때문이지, 그것이 어떤 카타르시스나 미학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명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초기 크로넨버그 영화들, 특히 브루드나 플라이 같은 크로넨버그 미학의 제시 및 일관된 주제의식을 가진 작품들에 비하면 스플라이스의 미학은 아쉬운 부분이 있다. 하지만, 오랜만에 나온,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너무 잘만들어서 기분 나쁜 B급 SF라는 점에서 스플라이스는 SF 영화 팬이라면 꼭 봐야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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