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치명적인 스포일러 있습니다.


세상을 뒤흔든 보스턴 여아 실종사건! 두 남자의 가슴 뜨거운 추적이 시작된다!

한가로운 휴일, 평화로운 마을 두 부부의 딸이 사라졌다.  세상이 모두 이 사건을 주목하고 있는 가운데, 유력한 용의자가 붙잡힌다. 그러나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는 용의자는 풀려나게 되고 사건은 다시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된다. 완벽한 용의자를 의심하는 아빠는 홀로 그를 쫓기 시작하고, 형사는 세상에 숨겨진 진범을 찾기 위해 추적을 시작한다. 유력한 용의자를 범인이라고 믿는 아빠. 진짜 범인은 따로 있다고 믿는 형사. 각각 다른 방식으로 추적을 시작한 두 사람은, 마침내 세상을 충격에 빠트릴 진실과 마주치게 된다!(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드니 빌뇌브의 최근작인 프리즈너스는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폴 토마스 앤더슨의 '마스터'와 유사한 지점이 많은 영화다. 기본적으로 감독의 야심찬 포부가 느껴지는(종교와 스승에 대한 이야기-마스터, 기독교적 죄인과 구원에 대한 이야기-프리즈너스) 구도이고 이야기를 정교하고 섬세하게 채워넣기는 했지만, 프리즈너스의 문제는 마스터와 마찬가지로 결국 그 포부(종교적인 의미와 이미지들)가 대단한 나머지 세밀한 이야기들 속에 빠져서 사람으로 하여금 해매게 만들기 쉬운 지점에 도달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사실, 여기 있는 감상도 기초적으로 영화를 보고 난 다음에 뒤죽박죽인 이미지들을 하나의 틀로써 묶어보려는 시도의 연장선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마스터나 프리즈너스의 문제의식이나 이야기하고자 하는 소재나 주제의식과 별개로, 본인은 개인적으로 프리즈너스가 더 좋았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지극히 섬세한 드라마로 가버리는 바람에 보는 재미는 거의 없었던 마스터에 비교하자면, 프리즈너스는 장르적 공식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두 여자아이가 사라지고, 아버지와 형사는 사건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접근을 한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던진 용의자를 납치해서 고문해서 딸을 찾고자 했고, 형사는 용의자에서 벗어나서 다른 방향으로 사건을 바라보고 해결하고자 한다. 


하지만, 영화는 이렇게 서로 다른, 그리고 상반된 이야기들을 하나로 엮으면서 초점을 흐트러트리지도 않고, 우직한 수사물의 형식으로 풀어낸다. 프리즈너스가 보여주는 수사물 장르의 공식이란, 요즘 흥하고 있는 인식의 재구성(이에 대한 사고들은 https://medium.com/p/a639a7b1315d 에 풀어놓았다)이라던가 고전적인 트릭, 밀실살인류가 아닌 '발로 뛰는 수사'를 보여준다는 점,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관객을 쥐락펴락하면서 몰입하게 만든다는 점은 감독인 드니 빌뇌브의 실력을 입중하는 부분이다. 또한 전혀 그럴거 같지 않은 휴 잭맨의 놀라운 열연, 제이크 질랜할의 노련한 형사 연기까지 영화는 딱히 흠잡을 부분이 없다. 그리고 드니 빌뇌브 감독의 전작인 그을린 사랑이 서로 다른 두 이야기, 현재와 과거, 인물들, 플룻들이 담담한 필치아래서 충격적인 형태로 조우하는 지점들과 그 과정을 세밀하게 구성하였다면, 프리즈너스는 그을린 사랑의 미덕을 장르 영화적 공식에 따라 타이트하고 정교한 형태로 구현하는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바로 이 '타이트하고 몰입감 있는 이야기'에 감독은 너무나 많은 이미지들을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담담한 묘사를 따라서 관객이 사유할 시간과 플룻에 의문을 가질 시간들, 그리고 그것을 재구성해서 충격받고 침묵하게 만드는 그을린 사랑과 다르게 프리즈너스는 쏟아지는 이미지와 사건들, 그리고 작중에서 언급하듯이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라는 명제 하에서 관객이 모든 것을 연결하는 사유를 하기 전에 그 다음 이미지로 휙휙 넘어가는 다소 불친절,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극도로 정교한 형태'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가 수사물 장르의 공식 밑에 깔아놓는 이미지는 명백하게도 '종교적'인 이미지다. 켈러 도버가 주기도문을 읊으면서 사냥을 하는 시퀸스로 시작되는 영화는, 영화 곳곳에 기독교의 십자가 이미지(차 안에 달려 있는 십자가에서부터 심지어 로키 형사의 손에 문신되어 있는 작은 십자가까지)와 구원과 죄인에 대한 이야기를 깔아둔다. 그리고 이는 모든 일의 원흉인 홀리 존스가 남편과 자신의 행위를 '신에게 대적하는 행위'로 선언하고 있는 점, 그리고 갖혀 있는 아이들, 미로를 풀면 집에 보내준다는 납치범(홀리와 그의 남편), 미로에 집착하는 과거의 피해자, 사실상 피해자인 알렉스를 가해자로 보고 감금하고 고문하는 켈러의 모습 등에서 드러나는 '갇혀있다'에 대한 반복적인 이미지들은 간과하기 어려울 정도로 영화 전반에 깔려 있으며, 사건과 이미지들은 서로 연관 복잡한 구조를 구축한다.


일단 제목에서부터 접근을 해보겠다. 왜 제목은 '죄수들'(Prisoners)인가. 왜 죄수(Prisoner)라는 단수가 아니라 '죄수들'이라는 복수의 형태로 서술되어 있을까. 물론 잡혀서 갇힌 아이들은 두명이므로 이들을 지칭하는데 있어서 복수의 형태로 서술하는 것이 맞겠지만, 자세히 잘 살펴보면 영화는 '갇혀 있는' 사람들이나 감금의 이미지와 직접적인 연관을 가진 사람들이 영화 곳곳에 깔려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 뿐만 아니라, 스스로 교도관으로 일했었다고 밝히는 켈러, 과거에 소년원에 있었던 로키, 이미 감금되어 있는 피해자지만 켈러에 의해서 두번 감금되어 고문당하는 알렉스, 과거의 납치 경험에 사로잡혀서 유괴된 아이들의 옷으로 다시금 그 행위를 반복하는 피해자까지. 심지어 원흉인 홀리의 남편은 이미 죽고 없는데, 그의 망령에 사로잡혀있다는 점에서 모두는 그에게 '감금'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미로의 이미지는 이를 구체화시킨다. 자식을 암으로 잃은 홀리 부부는 자신의 아이를 빼앗은 신에게서 다시 아이를 빼앗아온다. 그리고는 납치한 아이들에게 미로를 던져주고는 이렇게 이야기한다:미로를 다 풀면 집에 갈 수 있다, 라고. 사실, 이는 영화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선언이다. 이 해결하기 힘든 난제를 과연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죄'의 미로 속에서(영화 속 선교 라디오에서는 인간은 모두 죄인이기에 고통 받는다고 선언한다) 진실이라는 출구를 향해서 어떻게 나올 것인가. 그렇기에 영화속의 인물들은 모두 죄수들(Prisoners)이다. 


진실에 대한 추구, 어찌보면 수사물의 가장 기본이자 핵심이라고 할 수 있으며 혹자는 이러한 진실(두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에 대한 추구의 과정을 다룬 프리즈너스를 보고 살인의 추억을 연상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살인의 추억이 전적으로 '추억'과 '회상'이라는 색감과 디테일을 통해서 살인사건과 함께 시대 자체를 재구성했다면, 프리즈너스는 진실이라는 미로를 어떻게 풀을 것인가를 두고 두 남자, 켈러와 로키의 서로 다른 접근법을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켈러는 미로 속에서 미로의 해답을 찾고자 한 인간이며, 로키는 미로의 바깥에서 미로의 해답을 찾고자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물론 서로는 서로에 대해서 좋아하지 않지만, 그 둘은 진실을 향한 열렬한 탐구자라는 측면에서 서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먼저 켈러의 경우, 그의 해결방법은 전적으로 잘못되기는 했지만, 전적으로 인간적이다. 자신의 자식을 찾기 위해서 용의자를 고문하는 아버지. 휴 잭맨은 켈러 도버라는 케릭터의 절박함과 분노, 다급함, 마지막으로 그의 피로함을 정말로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이 켈러라는 인물은 유괴사건이라는 죄의 미로 속으로 직접 뛰어든다. 이는 바로 사실 피해자이자 '죄수'인 알렉스를 납치해서 고문하는 것으로 귀결되는데, 켈러의 전직인 교도관, 즉 죄수를 감시하는 '간수'라는 이미지와 자신이 싫어하는 공간으로서의 아버지의 집(아버지는 자신의 집에서 자살하였고, 켈러는 이를 방치한 것처럼 보인다)이자 감옥의 이미지 맞물려 들어가면서 상당히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진실로 가는 열쇠를 쥐고 있으면서도 그는 그 진실에 도달하지 못하는데, 그의 물음 자체가 잘못된 것(피해자가 아닌 아이들을 납치한 용의자로서 알렉스를 전제함)이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그러한 행위를 통해서 자신조차 미로에 갇힌 '죄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알렉스 옆에 꿇어앉아서 주기도문을 읊다가 '자신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부분에서 넘어가지 못하는 것은, 그 자신 역시 죄인이며 이 죄는 씻겨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드러나는 그의 인간적 고뇌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죄의 미로에서 빠져나가는 '구원', 아이들을 찾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로키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전적으로 '외부자'이다. 물론 켈러만큼은 아니지만, 그 역시도 죄의 미로 속에서 구원이자 진실을 찾아내기를 간절히 희망한다.(그의 손등에 세겨진 MAZE, 즉 미로라는 문신을 보라) 그러나 그의 방법은 철저하게 넓은 시야에서 바라보는데, 알렉스가 용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결론내린 로키가 다양한 접근방식(성범죄자 탐문, 수상한 인물을 쫒는다던가 등등)을 통해서 사건의 큰 그림을 맞춰나가는 과정은 상당히 정석적이다. 그리고 이 정석적인 방법은 동시에 주변 사람들과 대비되는데, 모든 것을 분절적으로 바라보는(특히 과거의 피해자의 집을 탐문했을 때 나온 미로의 이미지를 두고 동료들과 벌인 대화라던가) 인물들과 다르게 로키는 이 모든 것이 어떠한 맥락이 있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퍼즐 조각들은 맞춰지지 않은체로 그를 괴롭힐 뿐이다.


재밌는 점은, 이 둘 중에서 가장 먼저 미로의 끝에 도달한 사람은 바로 켈러라는 것이다. 그는 알렉스의 말(알렉스는 알렉스가 아니다)과 구출된 조이의 말(아저씨가 거기 있었어요)을 토대로 범인이 홀리라는 진실을 찾아낸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죄인이기 때문에(무고한 알렉스를 고문하였으므로) 벌을 받아야하는데, 그 벌이란 영원히 미로 속에 갇혀서 자신의 딸을 보지 못하는 형벌이다. 그러나 동시에 알렉스의 고문 덕분에 로키는 자신의 마지막 퍼즐 조각을 발견하고 켈러의 딸을 구출하는데 성공한다. 그렇기에 영화의 끝은 의미심장하다. 모든 것이 끝난 후, 홀리의 집에서 피해자들을 발굴하다 퇴근하는 법의학팀을 바라보던 로키는 희미한 호루라기 소리(켈러의 호루라기)를 듣는다. 구덩이(=미로) 속에 갇혀 영원히 발견되지 않을 죄인인 켈러와 미로 바깥에서 진실을 보는 로키의 대비. 진실이라는 구원에 도달한 자와 도달하지 못한 자. 


영화 프리즈너스는 짜임새 있는 구조와 몰입감 있는 이야기로 관객들을 매료하지만, 정작 그것이 만들어내는 미학적인 지점들은 너무 복잡하거나 섬세해서 관객들로 하여금 따라오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 구석이 있다. 또한 몇몇 부분에 있어선 과도하게  불친절한 모습을(켈러와 아버지의 관계라던가) 보여주었는데, 영화가 좀더 친절해도 괜찮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이런저런 아쉬운 점들에도 불구하고, 프리즈너스는 잘만든 스릴러 영화다. 그것은 요즘 영화들이 잊고 있었던 전통적인 서사와 잘짜여진 두개의 플룻, 그리고 흡입력 있는 이야기에 나름의 미학까지 주목할만한 부분이 많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화는 지나치게 섬세하고 복잡하다. 좀더 맥락을 가다듬고 이미지를 뚜렷하고 구체적으로 제시하였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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