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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이 감상 역시 모대학 과제 레포트로 제출된 것입니다.


사막의 라이온은 20세기 초기에 벌어졌던 이탈리아와 리비아 사이의 20년 전쟁을 다루고 있다. 이 영화는 실화이며 등장인물도 역사적 실존 인물의 실명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 20세기 초, 당시 끊임없이 벌어졌던 강대국의 제국주의 전쟁은 아프리카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영국은 이집트를, 프랑스는 튀니지아를, 스페인은 모로코를 점령했다. 그런데 이탈리아는 1910년부터 리비아를 침공하였으나 29년까지 교착상태에 빠진다. 그러자 무솔리니는 새 지후관 그라치아니를 파견한다.


한편 그의 상관 베드윈족의 지도자 오마르 무크타르로서 전직은 교사이며 적을 물리치는 것만이 평화로 가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코란의 정신을 이어받아총을 들고 나선 탁원한 전술가이다. 이탈리아군에 의한 무자비한 양민학살이 지속되지만 무크타르는 사막전과 산악전에서 뛰어난 전술로 현대병기로 무장한 이탈리아군을 계속 패퇴시킨다. 평화라는 미명하에 작전상의 협상이 벌어지고 전쟁은 계속된다. 결국 이탈리아군은 리비아 사막 수백 마일에 4천 명의 인부를 동원해 수천 톤의 철조망 작업을 행하영 베드윈족 5천명을 강제 수용소에 수용하고 무크타르를 생포해 공개리에 교수형에 처함으로서 1931 9 16일 전쟁을 종결한다.


 사막의 라이온은 제국주의 열강 시기에 있었던 식민지 지역민들의 저항들을 다룬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사실, 20년간 리비아에서 이탈리아를 상대로 싸운 오마르 무크타르의 이야기는 어떤 의미에서 전세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반 제국주의 비정규군, 파르티잔의 사례이자 표본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무크타르와 그의 반제국주의 파르티잔이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중요한 구심점으로 내세운 점은 눈여겨 볼만하다. 이는 이슬람이 그들의 역사를 통해 입증된 무력과 확장에 특화되어 있는 종교이기에 무장 파르티잔들의 전술적 교리로써 기능한 것이 아니라, 기계적이고 효율적이며 제국주의적 폭력에 맞서 싸우는 평화적이고 전통적인 가치를 위한 지역민들이 내세울 수 있는 가치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종교는 지역민들의 문화 공동체를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며, 이는 이슬람이라는 문화가 이러한 파르티잔의 문화를 부추기기 때문이 아니라 종교라는 구심점이 지역민들을 뭉치고 조직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만드는 기제로 작동한다:레바논 같은 이슬람-기독교 갈등 지역에서는 기독교 민병대가, 미얀마에서는 이슬람에 대항하기 위해서 불교도들이 무기를 들고 민병대를 조직한다. 이슬람이 폭력적인 종교라기 보다는 종교가 인간과 지역, 그리고 국가와 국가를 넘어서 세계에 끼치는 영향력이 사람을 조직적으로 행동하게 만든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우리는 이슬람 부흥의 역사가 정복전쟁의 역사, ‘한 손에는 칼, 다른 한 손에는 코란을이라는 화전양면 정책의 결과물로 보고,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폭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종교라고 쉽게 판단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만약 무력적이고 호전적인 확장만으로 이루어진 종교라면 수많은 사람들이 매료될 리가 없다는 점이다. 물론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발원했던 역사적인 특성상 코란과 교리에 많은 군사적이고 호전적인 부분들이 들어있을 수 밖에 없었고, 이는 당시의 맥락을 감안하여서 재해석하여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슬람 파르티잔들에게 있어서 아주 극명한 대립을 발견할 수 있는 사례가 있다: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주도하였으며 판지시르의 사자라 불렸던 아흐마드 샤 마수드와 소련-아프간 전쟁 이후 그에 대립하였던 극단적 이슬람주의자 탈레반이다. 마수드는 아프간 전쟁 중에 이슬람 원리주의자로서 압도적인 물량과 기술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프간 무자헤딘들을 이끌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진정한 이슬람 원리주의자답게 그는 저항하지 않는 자, 아이, 여자에게는 손을 대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아프간 전후 이후를 생각하며 여성의 교육과 권리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수피즘 책을 들고다니며 읽는 등 다른 사상에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그에 반해 같은이슬람 원리주의자 탈레반들은 익히 알려진대로 수많은 인권 탄압과 유적 파괴, 학살, 테러 등의 행위를 자행하거나 방조하였다.


어떻게 이슬람 원리주의자라는 두 집단이 서로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것일까? 그것은 아주 세밀하지만 중요한 차이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슬람은(엄밀하게 이야기해서 모든 종교가 그러하겠지만)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는 메시지를 갖고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전달하는 전통과 경전은 만들어진 그 시대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전통과 경전이 만들어진 시대가 갖는 권위는 결과적으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막는 닫혀있는 폐쇄적인 해석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문제는 종교의 본질은 장소와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매세지 그 자체이며,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경전과 전통은 그저 눈에 보이는 무언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의 경전이나 그 어떤 텍스트, 이야기, 전통 등은 현재 시대의 맥락에 따라서 재해석되고 다시 이해되어야 한다. 경전에서 메시지 그 자체를 재해석해서 발굴해내지 않는 한, 경전에 적혀있는 가르침은 책 사이에 끼워져서 향기와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재해석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곡해의 가능성을 수반한다. 멀리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슬람-레반트 국가, 통칭 IS가 코란의 말씀대로 어린이 십자가형, 성노예, 대량 학살 등을 자행하고 있으며 분명 코란에 조항 자체로도 어긋나는 행위도 포함되는데도 이를 행하는 것은 이러한 곡해의 문제가 갖고 있는 위험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균형을 이룰 수만 있다면, 오마르가 이야기했었던 것처럼 중요한 것은 균형을 맞추는 것이라 했듯이,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현실, 율법과 가르침 등의 사이에서 능동적인 균형을 맞추는 게 가능하다면 종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더 이상 사람의 삶을 구속하는 기제가 아닌 삶의 구심점이자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는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아흐마드 샤 마수드들의 말을 인용하며 끝마치고자 한다.

 

 

어떻게 아이와 여자를 죽이는 것이 지하드란 말인가?

-아흐마드 샤 마수드.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이 감상문은 모대학 과제 레포트로 제출된 것입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는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이다. 영화는 먼저 독일군 점령지인 폴란드의 크라코우에 기회주의자인 오스카 쉰들러가 폴란드계 유대인이 경영하는 그릇 공장을 인수하러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공장을 인수하기 위해 나치 당원이 되어 SS요원들에게 여자, , 담배등을 뇌물로 바치며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공장을 인수하고, 인건비 한푼 안들이고 유대인을 이용하면서 한편으로는 유대인 회계사인 스턴의 도움을 받아 공장을 운영하여 큰 돈을 벌게 된다. 쉰들러는 성공가도를 달리며 큰 돈을 벌게 되나 나치의 유대인 학살 행위를 목격하게 되면서 그는 바뀌게 된다.


그러한 쉰들러의 현실 직시는 마침내 그의 양심을 움직이고 유대인을 강제 노동 수용소로부터 구해내기로 결심하게 된다. 문제는 이들 일명쉰들러의 유대인들을 어떻게 구해낼 것인가였는데 노동수용소 장교에게 뇌물을 주고 구해내기로 계획을 잡는다. 그리고는 그들을 독일군 점령지인 크라코우로부터 탈출시켜 쉰들러의 고향으로 옮길 계획을 하고, 스턴과 함께 유대인 명단을 만들게 된다. 그러한 모든 계획은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마침내 1,100명의 유대인을 폴란드로부터 구해내게 된다.


쉰들러 리스트는 훌륭한 휴먼드라마이다. 자극없이 절제된 이야기와 카메라 워크, 그리고 흑백의 모노톤을 통해서 빛바랜 이야기를 구성하려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시도는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갖고 있었던 껄끄러움이 쉰들러 리스트에도 그대로 드러난다: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살아남은 평범한 미국인 라이언 일병이 살았던 다사다난한 미국을 어떻게 보았을 것이며, 특히 베트남전이라는 불의를 그가 어떻게 보았을까? 이를 쉰들러 리스트에 역으로 적용하여 본다면, 학살의 아픔을 갖고 있는 유대인들은 레바논 전의 샤브라-샤틸라 수용소 학살 사건이나 중동전쟁의 역사를 어떻게 보았을까?로 바꾸어 볼 수 있을 것이다이렇게 반인륜적인 범죄행위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나치가 자행한 반인륜적 범죄를 팔레스타인을 위시한 주변국가에게 그대로 되돌려주고 있다. 팔레스타인과의 연이은 충돌, 혹은 레바논전 당시의 샤브라 샤틸라 수용소 학살 사건 등등 되찾은 시온의 역사는 그들이 발 붙일 땅을 찾는 과정에 겪었던 고난의 역사를 주변국에게 투영하여 돌려주려 하는 것 마냥 잔혹하며 무자비함으로 점철되어 있다.


혹자는 유대인들의 이러한 성향을 자신의 땅을 떠나 2000년간 전세계를 떠돌아다녔던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의 역사에 비추어 볼 것이다. 유대인들은 2000년 동안 전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수많은 곳에 뿌리를 내렸음에도 유대인이란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수많은 민족들과 부족들이 세상이 바뀌고 시대가 바뀌어감에 따라 사라져갔지만, 유대인은 그들의 정체성을 끝까지 지켜내는데 성공했다. 이는 그들의 종교와 가르침에 기반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가라타니 고진은 유대교는 최초로 국가와 사회가 멸망해도 살아남는 신의 개념을 만들어내었다고 평가한다) 혹은 유대인이 유럽이라는 세계에서 타자로서 살아남기 위해서 결국은 그런 강력한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이라면 아무도 하지 않는 고리대업을 하면서 유대자본을 형성하고 강력한 경영정신으로 무장한 상인 집단이 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느쪽이든 간에, 유대인이란 유럽을 넘어서 오랫동안 전세계의 타자였었다. 그들은 동화되지 않으면서, 그들이 누구인지를 잊지 않았던 민족이었다.


하지만 역으로 그러한 타자로서의 유대인이 갖고 있는 특수성은 우리 아닌 것에 대한 적개심을 내포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일례로 수업시간 중 일부 감상한 지붕위의 바이올린처럼, 자신이 자신으로 유지할 수 있는 전통과 전통바깥의 존재들, 예를 들어 황제라든가 외부 마을 사람들에 대한 인식은 외부자에 대한 폐쇄적인 불신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어떤 사회이든 경직되면 경직될수록 외부에 대한 불신과 증오가 강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의 믿음처럼, 자신들은 하나님에게서 선택받았으며 언젠가 그들의 땅을 수복할 수 있다는 믿음은 결국 외부의 사회에 대해서 나 이외에 상관없는 것들이라는 사고를 심어주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어찌되었든, 그들은 그들이 2000년 동안 돌아가기 원했던 가나안의 땅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돌아온 것이라고 물으면 본인은 그에 대해서 회의적으로 생각한다. 유대민족은 다시 돌아왔지만 돌아온 이후로 지금까지 주변국과 수많은 민족의 피와 눈물을 흩뿌리며 그 땅을 지켜내고 있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그들은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그들의 고향에서 그들은 완벽한 타자이다. 그들이 떠난 뒤 20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들의 고향에서 살고 있었던 이방인들’(상식적으로 본다면 이들이 원주민이겠지만)을 몰아내고자 하고 있기에 그들 자신이 바로 그들의 고향에 있어서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이자 이방인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이 이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비극은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바로 유대교의 내부에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이 왜 하나님에게 선택받았는가?’라는 것이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유대인이 하나님에게 선택을 받을 특별한 이유또는 서사적 당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그저 그들은 선택받았기에 선택받은 자이다 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이 스스로 선택받았다고 믿음으로서 유대인은 유럽 역사와 사회에 있어서 타자로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점은 유대인만이 유럽 사회에 있어서 단 하나뿐인 타자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유럽 사회에는 집시가 있었다, 현명한 여자(Witch)가 있었다, 장애인, 고아, 과부, 정신병자 등등의 다양한 타자가 있었다. 타자들은 사회에서 무력하게 우리 집단 또는 다수 집단으로 포섭되고 배제되어 왔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포섭되기를 거부하고 끝까지 그들 자신으로 남아있었으며 이는 사회 윤리에 있어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타자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라는 문제이다. 사회나 집단은 항상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자신과 똑같은 색으로 물들이고자 한다. 다름이야말로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며 배격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은 그 다름을 스스로의 정체성으로 삼고, 감내하며 인고하여 끝까지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들의 고난의 역사는 확장하여 본다면 전세계의 소수자들과 타자들의 역사. 발터 벤야민이 역사에 있어서 비상상황이란 없었다. 역사는 언제나 비상상황이었다라는 명제를 통해서 주장하였던 것은 2차세계대전이 갖고 있었던 유일한 잔혹성이 아니라 전세계 역사에 내포되어있었던잔혹성 자체였었다. , 유대인의 역사는 유대인만의 역사가 아닌 전세계가 타자를 향해서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가?’라는 것으로 비추어볼 수 있다. 어떻게 본다면, 유대인이야말로 타자의 운명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서 사명을 띄고 신에게 선택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쓴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 재판을 전세계 인류에 대한 범죄로 규정하고 재판을 했어야 했다고 주장하였다. 예루살렘과 유대 민족의 법정이 아이히만을 유대민족만을 위한 광대와 괴물로 만들고 있는 동안, 유대인 학살이 갖는 가장 근원적인 문제, ‘사회에 소속되지 않은 타자를 향해서 기계적이고 효율적인 배제를 도외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재밌는 점은 쉰들러 리스트가 보여주는 이야기는 타자와 함께 살기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스카 쉰들러는 성인도, 지식인도, 위대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전쟁으로 한탕 벌어보려고 했었던 부패한 상인이었으며 여자와 돈을 밝히는 속물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그가 벌었던 전재산을 쏟아부어가면서 1100여명의 유대인을 구하고, 패전 후 도망치기 전에 자신들이 구했던 사람들 앞에서 이 금뱃지로 두명을 더 구할 수 있었는데이 차로 열명을 더 구할 수 있었는데…!’라고 울부짖는다. 3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그는 확연하게 변하였다:그것은 바로 그가 유대인 학살의 아픔에 공감하였다는 지극히 단순하며 인간적인 능력에 기초하였기 때문이었다.


오스카 쉰들러가 보여주는 것은 선의 평범성의 개념이다. 생각하지 않는 평범한 악의 개념과 다르게, 오스카 쉰들러는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믿음이나 엄격한 도덕적 잣대, 혹은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유대인들이 겪었던 수천년의 고난에 대해서, 더 나아가서 유대인과 유대교가 걸었던 수난의 역사를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중요한 단초를 제공하였다. 그것은 바로 타자를 배제하지 않고 함께 산다는 것이 그리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과 세계 곳곳에서 마주하고 있는 수많은 비극들을 해결할 수 있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실마리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끝으로 이스라엘에 묻힌 오스카 쉰들러의 묘비에 적힌 어구를 인용하며 마무리를 짓도록 하겠다.

 

 

 

오스카 쉰들러는 흔해빠진 기회주의자요 부패한 사업가였다. 그러나 거대한 악이 세상을 점령하는 것처럼 보일 때 그 악에 대항해서 사람의 생명을 구한 것은 귀족도 지식인도 종교인도 아닌 부패한 기회주의자 오스카 쉰들러였다.

 

그의 영혼에 안식과 축복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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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지 마사유키라는 이름은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생소할 것이다:그는 2008년 망념의 잠드를 감독했으며, 2012년 후세-말하지 못한 내사랑을 감독하였고, 이 둘 이외에는 감독을 맡은 작품이 없다. 게다가 사실 이 두 작품은 일반적인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있어서 생소한 작품들인데, 흥행 측면에서 크게 재미를 보지 못했으며 재미 자체로만 본다면 재미있다고 이야기하기에는 조금은 무리가 있는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망념의 잠드와 후세라는 두 작품 만으로도 미야지 마사유키는 다른 애니메이션 감독들과는 다른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망념의 잠드와 후세의 서사가 갖는 특징은 피해자-가해자의 이분법적이며 대칭적인 이야기 구조를 무너뜨리는데 주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를 극단적인 대결이 아닌 중지와 화해로 마무리 지음으로서, 애니메이션은 스펙타클이나 볼거리를 주는 재미가 아닌 독특한 이야기의 중지로 귀결이 된다. 망념의 잠드에서는 아키유키와 히루켄 황제가 대결하는 장면에서 한쪽(희망)이 다른 한쪽(절망)을 쓰러뜨리는 것이 아닌, 산 자의 희망을 대표하는 아키유키가 자신의 이름을 이름없는 죽은 자들의 집합인 히루켄 황제에게 줌으로서 이름을 받지 못한 폭력의 희생자들에 대해 화해의 악수를 먼저 청한다. 후세에서는 전설적인 이야기속의 괴물과 영웅의 대결을 재현하는 시노와 쇼군의 싸움이, 어느 한쪽의 승리로 귀결되는 것이 아닌 시노가 쇼군을 마무리 짓지 않음으로써 끝난다.(네녀석 혼을 빨아먹었다간 나까지 기분이 나빠질거 같아) 이 독특한 중지의 미학은 일반적인 대중문화 서사와는 차별적이라 할 수 있다:한쪽이 다른 한쪽을 쓰러뜨리고, 그 과정을 볼거리로 구축하여 관객에게 시각적인 쾌감을 선사하는 일반적인 대중문화의 스펙타클을 거부한다. 하지만, 이 차별적인 지점이, 관객들에게 있어서는 '도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봐야하는가?'라는 지루함과 짜증의 형태로 드러날 수 있다는 점에서, 미야지 마사유키의 세계관은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미야지 마사유키의 세계관과 미학이 갖는 독특함이란, 제임스 그레이의 작품 세계와 많은 유사점을 가지며,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제임스 그레이의 작품 세계를 분석해야 할 것이다. 일찍이, 어느 평론가는 그의 작품 세계를 '축축하고 무거운 우울함'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 우울함과 축축함은 하나의 중력을 구성하여 극중의 케릭터와 관객들을 옭아멘다. 이 중력과 축축한 우울함의 미학이란, 제임스 그레이의 개인사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제임스 그레이는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아버지는 내게 이야기했다. 너는 부유한 가정 출신이 아니니 영화 감독은 못될 것이라고. 그것은 아버지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했기에 했었던 이야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영화감독이 되었다. 여기에 한가지 중요한 비밀이 있다:가족에는 애정어린 지원과 무시무시한 감정의 파괴가 공존한다는 것을" 이 애정과 파괴의 상반되며 극단적인 것처럼 보이는 두 가치관이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에서는 충돌하는 동시에 공존하며, 그것은 다른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미학을 만들어낸다.


제임스 그레이의 투 러버스와 리틀 오데사를 예로 들어보자:이 두 영화는 아주 클리셰적인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범죄자는 불현듯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오며(리틀 오데사), 실연의 고통을 가진 남자는 두 여인과 사랑에 빠지면서 혼란을 겪게 된다.(투 러버스) 하지만, 일반 장르적 클리셰들과 이야기들과 다르게, 영화에는 무시할 수 없는 '색체'가 존재한다:이 두 영화는 디제시스 바깥에서 쓰이는 BGM들(서사와 직접적으로 연관을 맺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들 단성 성가 같은 BGM들은 어떤 의미에서 유대교의 성가를 연상케 한다.)과 어떤 이야기 내에서 '유의미한' 화소로 존재하지 않는 러시아 유대인들의 문화들이 배경으로 자리잡는다.(제임스 그레이는 러시아 유대계 가정 출신이다.) 하지만, 이러한 러시아 유대계가 갖는 문화적 특수성은 어떤 민족주의적인 이야기로 귀결되지 않는다. 폴 윌레만이 '영국 흑인 영화가 영국 흑인 민족주의적이지는 않다'라고 서술하였듯이, 이들의 배경은 '민족' 이데올로기를 구성하지 않는다. 즉, 민족이라는 배경이 서사의 주요한 동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폴 윌레만이 주목한 것은, '다문화'라는 개념자체가 하나의 폭압적인 개념으로 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우리가 다문화 가정이라는 사례를 볼 때, 다문화 가정에 속하는 사람들은 '평소에 입지 않는' 전통 복식을 입고 나와서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즉, 다문화라는 개념 자체가 분명하게 구획되고 구분되어지는 문화적 정체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문화가 아니라 문화의 탈을 쓴 하나의 '울타리'이다:문화란 만나기 시작하는 순간 섞이고 거부하는 등의 다양한 상호작용을 갖는다. 과연 순수하게 현재의 문화로부터 구분되는 '전통문화' 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는가? 그런 점에서 제임스 그레이의 유대문화는 민족이라는 커뮤니티를 이데올로기적으로 구성하지 않지만, 그 커뮤니티가 실존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다뤄내고 있다. 이에 반대되는 사례는 최초의 유성영화였던 재즈 싱어를 예로 들 수 있겠는데, 랍비였던 아버지와 흑인 분장을 하고 재즈가수 질을 했던 아들 사이의 갈등 속에서, 전통문화라는 분명하게 구획지어진 '선'과 '자리'를 주고, 결국은 아들이 아버지의 랍비직을 계승한다는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아버지로의 전통문화로의 회귀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재즈 싱어의 전통문화와 신세대 문화는 이데올로기 적으로 재편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는 후술할 랑시에르의 미학에 대한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그렇다면 왜 제임스 그레이는 이러한 유대민족의 문화를 영화에 분명한 배경으로 깔아두려 한 것일까? 이러한 유대민족의 문화를 주변에 깔아둠으로서 극 내의 케릭터가 편안함을 느끼면서 동시에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게 하기 위한 장치다. 이 배경은 케릭터를 젖어들게 만들며, 동시에 중력으로서 땅으로 끌어내리려 한다:왜 투 러버스의 주인공은 가족을 떠나서 비유대인인 미쉘과 도망을 치려 하는 것이며, 왜 리틀 오데사의 주인공은 편안함을 느끼는 공간인 리틀 오데사를 예전에 떠났었던 것일까? 이는 위에서 제임스 그레이의 발언을 대입해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중력은, 안착한 자들에게 있어서 안락함과 편안함을 주지만 동시에 더이상 날아오르지 못하게 만드는 파괴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주인공들은 이 중력에 대해서 양가적인 감정을 느낀다:그들은 그들의 커뮤니티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중력의 무거움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하기도 한다. 이 두 감정은 일반적인 대중문화 서사에서 드러나는 방향성과 선호가 아닌, 양가적이고 공존하며 동시에 구획되거나 구분되어질 수 없는 중요한 두 감정이기에, 케릭터들은 어찌할 수 없는 우울에 사로잡힌다. 이는 영화내에서 분명하게 깔리고 있는 유대문화라는 배경이, 그들을 유대문화의 색으로 물들이며 동시에 그들을 축축하고 무겁게 사로잡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제임스 그레이의 작품들을 유대문화라는 독특한 문화적 배경에 근거해서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하지만, 분명한 것은 제임스 그레이의 이 두 작품들은 우열이나 분명한 구획을 정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의 우울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들은 아주 평범한 장르영화적 클리셰를 이야기라는 측면이 아닌 분위기라는 측면에서 재구성하고, 관객을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로 몰고 들어간다. 투 러버스의 마지막 장면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는데, 과연 주인공은 떠나버린 연인과 함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지금 여기있는 그의 연인과 함께 있는 것일까? 영화는 분명한 해답을 주지 않으며, 관객은 안정과 변화, 안착과 떠남, 사랑과 이별 등의 상반된 관계의 감정 사이에서 팽팽한 긴장관계를 느끼며, 보통은 구획되고 구분되어질 상반된 감정이 충만해짐을 느낀다. 


이렇게 서로 상반된 감정의 충만함, 동시에 이 두 감정과 방향성에 대해서 선호나 구획지음, 구분 등의 위치를 부여하지 않고 대등하게 다뤄낸다는 점에서 미야지 마사유키의 두 작품 역시 비슷하다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제임스 그레이의 감수성이 좀더 미묘한 순간들과 어찌할 수 없는 우울과 중력에 젖어들어감을 다뤄내는데 초점을 맞췄다면, 미야지 마사유키의 두 작품들은 대중문화 서사의 스펙타클과 도덕적 이야기를 거부함으로서 이를 구현해낸다. 잠드의 경우에는, 서브 플롯의 마지막에서 아키유키의 아버지는 폭탄테러의 가해자와 자신이 머리에 총을 쏴서 쓰러뜨린 군소속 지휘관을 함께 간호하며 살아간다. 후세에서는 모든 일의 원흉인 쇼군의 징벌을 포기한 뒤 에필로그에서 악역인 쇼군은 극중의 강박적인 모습을 벗어던지고 편안한 모습으로 재등장하며, 동시에 도덕적인 징벌을 요구하는 서브플롯을 은연중에 관객에게 제시할 뿐 그것을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음(이테츠루의 아들이 목잘려서 저잣거리에 난 것은 관객들이 손쉽게 분석해낼 수 있는 정보이나, 그것은 구체적인 이야기의 화소로서 드러나지는 않는다)으로서 묘한 이야기를 구축한다. 즉, 미야지 마사유키는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단죄와 징벌을 거부하며, 그보다 좀더 거시적인 측면에서 문제를 접근하고자 한다:폭력의 중지와 증오의 연쇄를 끊어내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함께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말이다. 


그렇기에, 미야지 마사유키의 거시적이며 분명한 목표에 의해서 서사는 재배치된다:극에서 적을 향한 폭력과 징벌을 위한 스펙타클 그리고 도덕적인 카타르시스는 배제되고, 피해자-가해자가 뒤섞이며 전투와 클라이맥스 장면들은 비극적인 순간들을 반복하는 시지푸스의 영웅들의 격돌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과정에서 관객들은 알 수 없는 독특한 감정에 사로잡히는데, 그것은 카타르시스가 아닌 비극에 사로잡혀서 폭력을 반복하는 케릭터들의 우울이 밖으로 스며나오는 일종의 디아스포라이다. 동시에 제임스 그레이의 케릭터들이 떠남과 안착함 사이에서 어찌할 수 없는 우울에 사로잡혀있었듯이, 미야지 마사유키의 작품들 역시 그러한 우울에 사로잡힌다:징벌도, 속죄도, 단죄도, 그 어느 것도 아닌, 명확하게 피해자와 가해자가 구별되지 않는 폭력의 순환 과 그로인한 우울 속에서 인물들은 빠져나가고자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미야지 마사유키 작품의 미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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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랜스(제임스 스튜어트 분)는 자신의 오래전 친구 톰(존 웨인 분)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텍사스의 신본이라는 작은 마을로 향하면서 회상에 잠긴다. 과거의 산본은 리버티 벨런스(리 마빈 분)라는 무법자 때문에 공포 분위기가 하루도 가실날이 없었다. 이 곳에 도착한 젊은 변호사 랜스는 법의 울타리 안에서 무법자를 옭아매려 하지만 여의치 않는데, 이때 신본 마을에서 유일하게 리버티와 맞설 수 있는 톰은 오직 총만이 해결책임을 강조한다. 그들은 서로 의견차이를 보이며 티격태격하는데, 그 이면에는 할리라는 마을 처녀에 대한 질투심이 깔려있다. 점점 더 리버티의 만행은 심해지고 최후의 대결시간은 다가온다.


페드로 코스타는 존 포드에 대해서 이런 평가를 한적이 있었다:"어떻게 존 포드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나?  광활한 대지, 웅장한 산맥의 풍경처럼 누구나 좋아할 법한 것들이 거기에 있다. 단순하고 전통적인 방식의 삶이 주는 아름다움. 반동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존 포드의 영화에는 그런 단순한 것들의 가치가 담겨 있다. 몬테이로의 말을 빌리자면 '중요한 것은 어떻게 단순해질 것인가'다." 이 단순의 미학, 단순함의 찬미야말로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를 설명하는 키워드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는 이러한 단순의 미학을 통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었던 상식적인 서부극를 뒤집는다. 영화는 어둠에 사로잡힌 서부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법과 질서에 대한 갈구를 보여주지만, 모든 것이 끝난 이후에 늙어버린 사람들은 사라져버린 서부 개척시대의 미덕과 영웅 반추하며 그에 대한 아련함을 경험한다. 이러한 단순하지만 분명하게 대치되는 양가적인 감정을 영화는 능숙하게 다루어내며, 흑백영화만이 재현할 수 있는 깊은 '어둠'을 이용하여 컬러영화들은 쉽게 재현할 수 없는 미학을 구축한다.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가 보여주는 서부의 세계는 일반적인 서부극과는 벗어나있다:서부극에서 서부라는 공간은 모든 것이 허용되어있는 자유로운 세계, 방아쇠를 당기고 결정하는 자가 법이며, 무법인 지대인 동시에 미국의 찬란했던 개척정신이 극에 달한 시대다. 하지만,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에서 서부는 그와 정반대의 세계로, 무법의 암흑과 어둠의 지배하는 세계이며,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선량한 시민들이 괴롭힘을 당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는 기존의 서부극에서 서부를 드러내는 방식인 '광활한 자연의 풍광'과 대치되는 방식으로 구현된다:늙은 랜스가 호레이쇼 그릴리의 명언(서부로 가라, 젊은이들이여. 가서 명성과 부와 모험을 찾으라)을 인용하면서 회상을 하는 순간, 그는 야만적으로 총을 쏘며 마차를 가로막는 리버티 벨런스와 만난다. 그리고 랜스가 리버티와 첫만남을 갖는 시간은 '밤'이다. 이처럼, 영화는 기회의 땅 서부를 찾아 떠나라는 전통적인 격언을 박살내면서 강도와 부당한 폭력이 일어나는 공간으로서 서부를 재현하고, 그것을 칠흑같은 암흑으로 표현한다: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흑백영화만이 가능한 깊이를 알 수 없는 암흑의 묘사를 통해 광활한 자연을 대체하고 서부의 본질처럼 묘사하였던 다른 서부극과는 차별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 속의 사건들은 모두 밤에 일어나지 않는다:밤이라는 시공간의 대척점에 언제나 '낮'이 존재한다. 그리고 영화는 근면한 삶을 살며 정직하게 생계를 꾸려나가는 일반인들과 그들의 삶을 낮에 배치함으로서, 무법과 폭력에 대비되는 질서와 균형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마을을 꾸리고 가혹한 서부의 자연과 인디언이라는 외부에 맞서 싸우면서 자신의 삶을 지켜내는 이 근면한 사람들은 투표와 자신들을 대변해줄 대표자를 선출함으로서 무법천지인 서부라는 공간에 질서를 부여하려 한다. 이러한 낮이라는 시공간은 어둠을 대변하는 리버티 벨런스조차도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들며(네놈들 모두 밤에 보자), 심지어 리버티와 그 졸개들이 희화화 시키는(투표장에서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 유쾌한 힘을 가진 공간이다:단순하고 착한 사람들의 저력. 하지만 밤이 되면, 이들은 개척 공동체를 위협하는 진정한 공포로 화하게 된다.


신본을 둘러싼 무법자-개척민들의 갈등에 끼어드는 랜스라는 인물은 이 공동체에 '법과 질서'를 가져다주는 대변자인 동시에 법과 질서의 화신 그 자체이다:뻔한 설정이긴 하지만 그는 변호사이기에 법을 잘 알며, 무능한 보안관이 리버티를 두려워해서 리버티 검거를 관할권을 핑계로 거부하려하자, 그는 법전 속에서 관할권에 대한 법조문을 찾아내면서까지 리버티의 징벌을 요구한다. 이와같이 무법이 판을 치는 서부시대에 고리타분할 정도로 질서와 법을 추구하는 인물이 바로 랜스라는 인물이다. 하지만, 랜스를 단순하게 법과 질서를 서부에 가져오는 인물로는 한정지을 수 없을 것이다. 영화 내에서 그는 학교를 연다:그리고 이 학교에서 전통적인 WASP 주민들 뿐만 아니라 히스페닉과 심지어 흑인 하인까지 같이 랜스의 가르침을 받는다. 랜스가 헌법에 의해서 모두가 평등하며 모두에게 주권이 있고 그러한 권리에 의해 투표할 수 있다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미국적인 공동체'(백인 뿐만 아니라 이주민들까지 포함을 한)이 무엇인지, 그리고 더 나아가서 헌법으로 표현되는 미국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랜스의 목표는 단순한 교육을 통한 계몽보다 더 나아간다. 그는 개척민들을 대표하고, 그들을 위한 '주'를 만들고자 한다. 하지만 왜 주인가? 왜 법인가? 주라는 경계가 생겨나기 전의 신본이라는 공간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공간이다. 따라서, 그 어떤 법도 적용받지 못하며 또한 법에 의해서 보호받지 못한다. 그것은 리버티에게 폭력으로 고통받았던 랜스가 내놓은 신본의 주민들을 위한 해결책이다:헌법에 명시되었듯이 법에 의해서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면, 그 법이 이 땅에 강림하도록 하여라. 재밌는 점은 법의 보호를 갈구하는 자들이 존재하는 동시에, 그러한 '법의 없음'을 이용하는 대목장주의 존재(화면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가 신본의 주민들과 대립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리버티 벨런스를 고용하고는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신본과 그 일대를 '법이 없는 공간'으로 남겨두려 한다. 이들은 단순하며 착한 사람들이란 신본의 주민들과 대척되는 집단이다:영화의 마지막, 주를 대표하는 사람을 선출하기 위해 웅변을 준비하는 웅변가를 보자. 그는 자신이 연설을 준비하였지만, 그것이 이번에는 필요없다고 외치면서 자신의 연설문을 구겨버린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이 펼쳐본 구겨진 연설문에는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다. 이러한 가식과 허영이야말로, 근면하고 성실하며 착한 신본의 주민들과 대척되는 지점이자 미국적 가치와는 동떨어진 존재들로 볼 수 있다. 즉, 서부시대의 무법지대라는 장소와 시공간을 둘러싸고, 두개의 서로 다른 존재들이 대립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법이라는 테마를 두고, 영화는 무법자와 무법지대라는 시공간이 밤과 리버티 벨런스처럼 사악하고 폭력으로 가득차있다고 강변하지 않는다. 존 웨인이 연기한 톰 도니펀이라는 능글능글한 마초는, 우리가 익히 아는 거칠고 강인한 서부의 영웅 케릭터의 전형이다. 하지만, 랜스와 톰의 관계는 그렇게 순탄치만은 않다. 먼저, 랜스는 톰이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하며, 폭력이나 사용하는 야만인이라 생각한다:스테이크를 두고 리버티와 톰이 서로를 총으로 쏴서 죽일뻔한 상황을 보고 랜스가 화를 내는 것은 남자의 자존심 같은 것을 세우기 위해서 서로를 향해 총을 뽑는 무법자들의 어처구니 없음 때문이었다. 동시에 톰은 랜스를 '순례자'라 부르며, 그를 비웃는다:톰은 서부에는 서부만의 룰이 있으며, 그것은 얼마나 총을 빠르게 뽑는가라는 문제로 귀결된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톰은 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는 랜스를 맨몸으로 무모한 도전을 감행하는 순례자라고 비웃는다. 하지만, 랜스에게 있어서 폭력으로는 그 어떠한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그가 만들려는 세계는 총을 먼저 뽑는 폭력이 법인 세계가 아닌, 헌법이라는 조문에 적혀있는 미국인의 이상이자 가치관이 실현된 공동체 그 자체이며, 그것은 폭력으로는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톰은 랜스와 대립하지 않는다:오히려, 그는 랜스를 향한 비웃음 뒤에서 랜스를 조력하는 조력자다. 랜스를 구해준 것도 톰이고, 주를 대표하는 후보를 뽑을 때도 랜스의 추천을 사양하며 랜스를 주대표 후보로 추천한 것도 톰이었다. 하지만, 랜스와 정반대의 인물이(능글맞은 서부의 마초 vs 동부에서 온 법과 질서의 순례자) 왜 랜스를 도와주는 것일까? 톰은 그러한 '세련된' 행위들이(법과 질서, 누군가를 대표한다는 것)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잘 안다. 그렇기에 그는 랜스(법과 질서)에게 자신의 자리를 양보한다. 톰은 능글맞은 서부의 사나이이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선한 사람이며(영화는 선인장 꽃 등의 장치들을 이용해서 그의 상냥함을 강조한다) 이런 배려를 통해서 자신의 시대(무법시대인 서부시대)를 마무리짓기 위해서 랜스와의 '세대교체'를 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밤을 지배하는 리버티 벨런스의 폭력은 랜스의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아무도 그를 가로막지 못한다는 분노로 랜스는 리버티 벨런스를 쏴서 죽여버린다. 이로써, 질서와 규칙에 피가 묻는다. 주의회 대표를 결정하는 자리에서 대지주를 대변하는 상대편이 랜스를 어떻게 비난했던가? 그들은 랜스를 선량한 시민을 쏴서 죽인 살인마로 매도한다. 하지만, 우리는 리버티 벨런스가 선량한 시민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랜스가 무거운 마음을 감추고 회장을 빠져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결과적으로 그 역시 폭력을 통해서 질서를 가져왔었고 자신이 만들고자 했던 공동체에 크나큰 원죄를 지웠기 때문이었다(이것이 너무 거창하다고 생각한다면, 그의 도덕적 신념과 자기완결성에 흠집이 났다고도 할 수 있겠다) 과연 피로 세워진 질서와 법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여기서 리버티 벨런스를 쐈다는 행위 자체는 상당히 의미심장하다:리버티 벨런스Liberty Valance라는 이름은, 자유의 균형Liberty Balance라는 단어와 발음이 비슷하며 한글자 차이이다. 물론, 리버티라는 케릭터 자체는 무법자의 흉포함을 드러내는 존재이며, '자유의 균형추'로서 작용한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법과 질서를 대변하는 랜스가 자유라는 이름을 가진 악역을 쏴죽인 것은 의미심장한 행위이다. 법은 자유로운 무법자를 쏴죽이면서 질서를 불러일으켰다. 이는 질서가 갖는 원죄일까? 칼 슈미트가 주권자가 결정을 통해 정상-비정상을 구분하고 비정상을 배제하여 정상을 도출한다고 주권권력과 법의 개념을 설명하였듯이, 랜스라는 법의 대변자 역시 리버티라는 무법자를 죽임으로서 법을 도출해낸것에 불과한게 아닐까? 그리고, '폭력'의 행사자라는 측면에서 법과 무법자는 모두 동일한 존재가 아닐까? 그렇기에 리버티 벨런스를 쏜다는 행위 자체는, 단순하게 악역을 제거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무법의 시대를 끝내고, 법의 시대를 불러일으키는 것, 하지만 그것이 랜스가 꿈꾸었듯이 평화로운 방식이 아닌 폭력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가 추구하고 지켜왔던 모든 것을 송두리째 위협한다. 주변인들은 정의가 실현된 것에 환호하지만, 랜스가 느끼는 껄끄러움과 문제의식은 단순하게 양심의 문제를 넘어서게 되며 영화는 리버티와의 대치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상황으로 빠져든다.


결국, 랜스는 떠나려 하지만, 떠나려는 그의 앞을 톰이 가로막는다. 그리고 그가 이야기한다:자네는 너무 많이 생각해, 그리고 너무 많이 말해. 게다가 자넨 리버티 벨런스를 쏘지 않았어. 그리고 영화는 리버티 벨런스의 살해장면을 재구성한다. 리버티와 대치하는 랜스를 길건너의 어둠속에서 톰과 그의 조수가 바라본다. 그리고 검은 어둠 속에서 랜스가 총을 쏘려는 순간에 맞춰서, 톰이 리버티를 쏴서 죽인다. 결국 리버티는 톰이 쏴서 죽인 것이며, 랜스는 '아무도' 쏴서 죽이지 못한 것이었다. 


이 사건의 재구성 장면이야말로, 영화 최고의 명장면이다:어둠은 단순학 폭력이 지배하는 세계를 드러내는 것을 넘어서, '기록될 수 없는 역사의 진실'이 된다. 처음 리버티 벨런스와 랜스의 대결 장면에서 관객은 정당한 대결로 랜스가 리버티를 쏴죽이고, 서부극의 전통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불빛 아래서 이루어진 랜스와 리버티의 대결을 바라보고 개입한 제 3자의 존재(톰)가 리버티를 쏴죽임으로서, 서부극의 정당한 결투라는 이미지를 부숴버린다. 왜 톰은 이런 비겁한 행위를 했는가? 톰은 이야기한다:냉혈 살인자라, 난 그렇게 하고 살 수 있어...할리는 자네 여자야. 자네가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쳤으니, 이젠 읽고 쓸 거리를 주게. 이는 무법자가 법과 질서를 향해서 주는 최후의 배려이다:무법자는 스스로 무법의 시대를 끝내고 비겁하고 냉혹한 살인자가 됨으로서, 그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 한 때 그의 여자였던 랜스의 연인, 공동체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리버티 벨런스를 쏜 진짜 영웅은 퇴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같은 존 포드 감독의 수색자나, 여타 다른 서부극과는 다른 방식이다. 보통의 서부극에서 영웅은 자연속으로 사라진다.(흔히들 이야기하는 석양을 향해 달리는 엔딩) 이는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한 영웅은 문제가 사라지고 법과 질서가 다시 자리잡은 일상의 세계에 있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서부의 영웅들은 일상을 뒤로하고 자신들이 속했었던 풍경 속으로 사라져간다. 하지만, 톰은 그렇지 않는다:주지사 투표가 열리는 시간적 배경, 랜스가 리버티와 대치했던 한밤중, 그리고 그날밤을 회상하며 랜스에게 이야기하는 톰의 고백 등은 모두 밤이라는 시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누군가 이야기하였듯이 '역사는 밤에 쓰여지는 것'이라는 명제처럼, 영화는 후반부에 폭력과 어둠이 지배하는 밤의 이미지 위에 역사가 이루어지는 시공간과 역사가 기록되지 않은 어둠이란 이미지를 덧칠한다. 그리고, 진정한 영웅은 진실을 가르쳐주고서는 자신이 받아야하는 찬사(물론 대중은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 랜스를 향해 환호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리버티 벨런스를 '진짜로 쏜' 사나이 톰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를 뒤로 한체, 회장을 퇴장한다. 그가 향하는 곳은 자신이 속해있었던 광활한 자연이 아닌 더이상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역사로 기록되지 않은 심연 속이다.


그리고 랜스의 회상은 끝이 난다:그는 영웅을 기억한다. 마지막 무법자, 그리고 마땅히 존경받아야 했던 자가 맞이한 쓸쓸한 최후에 대해서. 랜스는 영웅이 존경받았으면 하고, 자신의 이야기의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신문에 실리지 않는다. 그것은, '전설'은 '사실'이 될 수 없는 현실의 문제다. 하지만, 역사의 어둠속에 묻혀버린 진실을 랜스와 할리는 기억하며, 그리고 그러한 시대의 아름다움을 애잔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렇기에 랜스가 다시 신본으로 돌아와서 변호사를 개업할까 라고 할리와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의 기원(미국)이 서부에 있음을, 그리고 그것에 향수를 느끼기에 다시 돌아가고 싶어함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은 끝나버렸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지만, 서부시대라는 무법의 시대에 대해서 느끼는 양가적인 감정이 영화의 마지막에 공존한다.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는 아름답고 위대한 작품이다. 지금에서 본다면, 이 단순함의 아름다움은 정치적 보수성과 보수의 가치를 그대로 내새우고 있는 지점이며, 존 포드가 미국의 탄생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서부시대를 통해서 재구성한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정치적 보수성이 껄끄럽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 단순하지만 아름다우며 동시에 공감할 수 있게 다가온다는 점에서 영화가 갖는 힘은 무시할 수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부극의 문법을 비틀어서, 서부극을 넘어서며 서부시대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영화의 이야기는 아름답다.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는 그런 점에서 명작의 반열에 든 작품이라 편할 수 있을 것이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인간의 과학적 오만이 잉태한 두려운 미래가 다가온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존재로부터 인류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일찍이 멋진 신세계의 저자, 올더스 헉슬리는 그의 멋진 신세계 1947년판 서문에 놓고 이러한 아쉬움을 표출했다:세계는 핵의 시대로 이행하였으며, 그리고 나는 과학의 이러한 파괴적이면서 경이로운 힘을 소설에 넣지 않은것이 아쉽다고 생각한다, 라고.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이 떨어진 이후로 인류에게 있어 핵은 그야말로 '신의 힘' 그 자체였다. 핵은 전세계를 파괴할 수 있는 재앙적인 힘(핵무기, ICBM 등)인 동시에, 인류에게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약속하는 기적적인 힘(원자력 발전)이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원자력이라는 기적과 재앙이 합쳐진 전지전능한 힘이 '태양의 힘이 내 손안에 있도다'(닥터 옥토퍼스, 스파이더맨 2, 물론 이 경우에는 핵융합이지만)라는 인류의 자만과 합쳐서 현대사는 핵이라는 힘의 남용을 불러일으켰고, 그 결과 우리는 만드는 힘이든 파괴하는 힘이든, 넘치는 힘에 둘러싸여 까닥 잘못하면 파멸할 수 있는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체르노빌 사태, 스리마일 원전 사태, 도호쿠 쓰나미 및 후쿠시마 원전 사태 등등. 이러한 위협들은 우리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져준다. 과연, 우리가 핵을 통제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라고 믿고 있는 것일까?


원작 쇼와 고지라가 출발하는 것은 바로 이 핵에 대한 공포였다:핵폭탄을 직접 맞은 핵에 대한 일본인의 공포와 통제할 수 없는 과학에 대한 공포(옥시젼 디스트로이어를 만들고는 그 힘에 경악하며 끝내는 자살하는 세라자와 박사라던가)가 묻어나오는 작품이었다. 이후에 다양한 시리즈의 전개와 함께 고지라는 다양한 케릭터성을 갖게 되었지만, 고지라 시리즈의 본질이자 원천은 '핵이라는 힘에 대한 공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 그것이 인간이 손에 들고 보아라, 이것이 바로 태양의 힘이다! 라고 외치지만 그것이 손을 벗어났을 때의 무력감과 재앙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참치를 쳐묵하며 인류와 참치 생태계 존망을 놓고 자웅을 겨루던 롤랜드 에머리히의 고질라(1998)와 다르게, 올해의 고질라(2014)는 바로 그 지점에서 고지라가 가졌던 공포와 헐리웃 블록버스터의 문법을 결합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아쉽게도, 본인은 참치먹는 고지라를 제외하면, 쇼와 고지라 원판도 보지 못했다:그렇기에 이 감상글은 필연적으로 한계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그점에 있어서 읽는 분들께 양해를 구한다.)


고지라 분석에 앞서서, 먼저 이 영화에 걸맞는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도대체 괴수, 괴물이란 무엇인가? 일찍이 바타이유는 인간과 동물의 구분을 두고 독특한 논리의 이론을 전개하였다. 인류는 노동을 통해서 동물과 구분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의 육체성은 여전히 동물에 사로잡혀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폭력에 대한 충동과 성욕, 식욕에 시달리며 이것은 인류가 노동을 통해 쌓아올린 질서를 위협한다. 그렇기에 인류는 금기를 통해서 이러한 동물적인 욕구, '폭력'(무질서한 힘의 분출)을 통제하려 한다. 하지만 동물은 다르다:동물은 어디서든지 섹스를 하며, 사냥을 하고, 폭력을 행사한다. 하지만 구시대의 인류들은 동물들 역시 인간을 옭아메고 있는 금기를 이해하지 못할리 없다고 보고, 금기의 제한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나드는 동물을 '신성한' 존재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서 괴물은 탄생한다:동물에게 있어 폭력이 하나의 삶의 방식이었다면, 인간의 상상력으로 탄생한 괴물에게 있어 폭력은 존재양식이자 하나의 은유이다. 인간과 동물 사이의 그로테스크한 결합(미노타우르스 같은)이나 생명력의 과도한 분출(머리를 자르면 또다른 머리가 솟아나오는 히드라 같은)의 형태로, 동물의 신성함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하여 자연적인 동물의 모습을 벗어난, 무질서한 힘의 표출인 '폭력'을 행사하기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정향진화한 존재들이 바로 '괴물'들이었다. 그리고 이 괴물들은 종교가, 영웅이 이 세계에 질서를 가져오기 전의 세계를 지배하는 '신'이었다. 이 신들은 질서가 잡히기 전의 인류가 이해하지 못했던 세계, 그 자체였으며 이 신들은 인류와 함께 세계를 거닐었고 경외의 대상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질서가 괴물을 대체한다:아도르노는 영웅의 모험(오딧세이아)을 통해서 영웅이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가져온다고 보았으며, 보들리야르는 영웅이 죽인 괴물의 피에서부터 문명이 솟아나온다고 보았다. 


(이푸 투안의 토포필리아에 따르면, 가장 민감한 오감을 가졌던 인디언들도 '존재할리 없는' 괴물을 인지했었다고 한다:물론,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문화'에 의해서 인식이 재구축되며 없는 것을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문화의 힘은 강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찌본다면 실제적으로도 고대의 인간들은 '괴물'과 함께 살았을지도 모른다:실존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인식범위 내에서 그 괴물은 실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명이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괴물을 그리워한다:킹콩(2005)를 보자. 문명화된 인간이 가지지 못하는 문명 이전의 '마지막 순수성'의 상징으로서 킹콩은 문명으로부터 온 여인과 순수한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최후의 괴물, 최후의 야만인이라는 고귀한 지위를 차지했던 킹콩은 문명의 정점인 뉴욕으로 끌려와서 조롱거리가 되고 결국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서 문명의 손에 의해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괴물은 파괴적인 무질서이며, 문명은 질서에 의해서 만들어진 존재이기에 그 둘이 한 공간에서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아바타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인간이 점점 태초의 무질서함을 향해서 그리움을 표출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다양한 형태의 '괴물'과 생태계의 형태로 드러나는 것은 인류가 문명에 대해서 느끼는 피로감과 문명이 만들어내는 광기에 대한 좌절감이 드러나는 지점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고질라(2014) 역시 바로 문명에 대한 피로감과 광기(과연 우리가 핵이 불러온 이 괴물들을 통제하고 막을 수 있는가? 극중 핵으로 등장한 위협을 핵폭탄으로 다뤄내려는 인류의 오만함 등등)에서 시작한다:하지만 고질라가 자연으로 회귀할 것을 요구하는 수많은 유사 귀농(?) 영화와 다른 점은, 괴물과 인간 사이에 있어서 유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괴물들은 거대한 재앙이라는 것이다. 고지라와 무토는 인류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그래왔고, 영화가 진행되는 그 시점에서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존재들이다. 원판 쇼와 고지라가 인간의 과오, 핵실험을 통해서 만들어진 존재였다면 2014년의 고질라와 무토는 자연의 일부이자 핵분열에 대한 자연의 매카니즘으로서 인간의 이해범위를 아득하게 능가해버린다. 하지만 2014년판 고지라와 무토, 그리고 기존의 고지라 시리즈들이(참치먹는 고질라까지 포함해서) 갖는 공통점은 바로 '핵'이라는 키워드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고지라 시리즈는 그 자체야말로 원자력 시대의 '신화'이다:인류는 핵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1945년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및 수많은 원자력 관련 사건들로 불가능한 것으로 증명되었으며, 핵 그자체는 하나의 '괴물'이 되었다. 그리고 생명력이 폭발할듯한 원자력의 이미지로부터, 고지라들이 탄생하였다:특히 2014년판의 경우, 핵의 광기넘치는 생명력의 분출(방사능 오염과 그것의 지속시간)을 먹어치우며 번식하는 '무토'의 존재와 그러한 광기 넘치는 생명력에도 불구하고 수만년의 세월에 걸쳐서 스스로 자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연의 대변자 '고지라'의 존재가 갈라져나온 것이다. 물론, 왜 고지라가 무토를 사냥하는가? 라는 지점에서 영화는 다소 작위적인 지점(그들, 자연의 자정작용과 광기넘치는 핵 에너지가 싸우게 내버려두어라Let them fight)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무토-고지라, 핵의 광기와 자연의 자정작용의 사이에서 인류는 무기력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핵을 둘러싼 두 힘의 격돌, 무토와 고지라를 두고 인류가 취하는 경외와 공포, 핵이 우리를 파괴할 수 있다는 공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그런 광기넘치는 핵의 에너지를 억제하고 있다는 경외가 격돌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고지라의 문법을 헐리웃 영화의 문법에 접목시킨다:영화의 러닝타임 도중, 관객은 보통의 헐리웃 영화에서는 접하지 못할 당혹스러운 두 시퀸스를 만나게 된다. 첫번째는 하와이에서 수컷 무토와 고지라가 처음으로 대면하는 장면이며, 두번째는 고지라와 무토 한 쌍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재격돌하는 장면일 것이다. 첫번째 장면은 고지라의 포효와 함께, 곧바로 주인공의 아들이 고지라와 무토가 싸우고 있는 장면을 TV로 촬영한 것을 보고 있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두번째 장면에선,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한 고지라가 무토와 격돌하는 순간, 주인공 아내가 공포에 질린 눈으로 그들을 올려다보는 그 순간에서 쉘터의 문이 닫히면서 전투 시퀸스 자체를 끊어버린다. 만약 이것이 일반적인 헐리웃 영화였다면, 이 둘의 싸움을 근거리에서 잡아내어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었을 것이다:이미 퍼시픽 림에서 괴수와 거대로봇의 격돌이라는 점으로 서브컬처와 헐리웃 영화의 문법이 서로 아름답게 융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고지라는 충분히 좋은 선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부함으로서, 뭔가 다른 노림수가 있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영화는 그러한 의도적인 끊기와 함께 파괴된 현장을 보여주는 것과 괴수의 전체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자연재해가 휩쓸고 지나간것처럼 인류가 쌓아올린 문명이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장면들과 함께, 하나의 카메라 내에 담아내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괴수'를 묘사하고 싶은 것처럼 보이는 연출들은 위에서 이야기한 기묘한 시퀸스 끊기와 함께 독특한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또한 고지라의 카메라 동선은 기존의 비슷한 영화들(클로버필드나 퍼시픽 림, 우주전쟁 같은)과 다르다. 기존의 헐리웃의 괴수물은 재난을 하나의 스펙타클로 만들어낸다:카메라의 동선은 위협당하는 인물들을 따라 아슬아슬하게 전개하지만, 그러한 아슬아슬한 위험들에서 드러나는 넘쳐나는 정보량을 관객에게 상황이 이해할 수 있게끔, 그리고 분명하게 빠져나가겠지만 영화속의 인물과 함께 아슬아슬함을 느낄 수 있게끔 만드는 것이 우선 목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고지라는 그런 '아슬아슬한' 감각마저도 거부한다.(물론 그것이 영화가 노리는 바와 절충되지 못해서, 영화를 붕떠버리게 만드는 문제를 만든다:이는 후술하겠다)


영화의 이 기묘한 지점들은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다음과 같은 시점의 특징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고지라와 무토를 바라보는 시선이 고지라와 무토의 '키높이'나 그들의 움직임을 가장 역동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신체부위(꼬리나 날개 같은), 혹은 이 모든 싸움을 느긋하고 화려하게 조망할 수 있는 시점이 아닌, '인간'의 시점에서 올려다보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물론 높은 곳에서 조망하는 시점도 존재하지 않느냐, 라고 반문하실 분도 있겠지만 그것은 비행기, 헬기 같은 장소에서 내려다보는 것이며, 이마저도 '한 장면에 다 들어오지 못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무토, 특히 고지라의 전체 모습을 한번에 조망할 수 없다. 고지라와 무토가 휘두르는 무지막지한 폭력앞에서 인간은 왜소할 뿐이며, 모든 고지라와 무토의 관측 장면은 항상 주변의 '인간을 포함'함으로서 인간을 넘어선 보편부당한 카메라의 시점이 아닌, 왜소한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핵과 자연의 충돌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경이적인 폭력의 분출을 목도하는 형식이 된다.


그렇기에, 카메라가 다루어내고자 하는 고지라와 무토의 이미지는 문명 이전의 신들, 신화속의 괴물들의 이미지와 흡사하다:그것은 통제할 수 없는 원자력 에너지의 분출이자 인간이 경외시하며 두려움에 가득찬 눈으로 바라보는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올려다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원자력이라는 신화적인 이미지, 통제할 수 없는 에너지와 결합하면서 인류문명이 통제할 수 없는 기록조차 희미한 신화 이전의 괴물들 불러일으켰다는 공포와 절망감, 그리고 인류는 이해할 수 없는 자연의 자정작용(고지라)과 핵의 파괴성(무토)이 격돌하는 자연의 섭리를 목도하는 경외감이 극을 지배한다. 이는 괴물은 문명에 의해서 몰락할 수 밖에 없다고 하거나 우리가 지향해야하는 방향이란 야만적인 문명이 아닌 고귀한 괴물들의 이미지라고 선언하는 대중문화의 서사와 다르게, 고질라 2014년 판에서는 문명은 이 괴물들을 막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는 '겸손함'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경외감과 공포, 겸손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영화를 기존의 고질라 시리즈의 문법을 헐리웃 스케일에 접목시켜서 진지한 형태로 구현한다:이것은 그렇기에 퍼시픽 림과는 상극에 있는 영화다. 물론 두 영화 모두 과거의 서브컬처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서브컬처의 클리셰와 미학을 가벼운 것으로 만들어서 데자뷰를 불러일으키는 영화를 만드는데 집중한 퍼시픽림과 다르게, 고질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고지라 시리즈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영화에 접목시키고자 한다.


이로써, 앞서 이야기한 두 시퀸스의 기묘함이 설명이 된다:첫번째 장면에서, 고지라와 수컷 무토의 첫만남을 매스미디어의 형식으로 스쳐지나가듯이 묘사한 것은 이 둘의 전설적인 첫 등장에 대한 하나의 이야기로 묘사하는 지점이라 볼 수 있다. 전설이 탄생하는 순간, 그 전설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전파된다. 이 경우에 있어서, 이 둘의 만남이 처음으로 대중에게 알려지며(그전까지 무토나 고지라의 존재는 극비였다), 대중는 그들을 경외와 공포로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두번째 장면이야말로 고질라 2014 버전의 미학을 압축하는 백미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들이 분출하는 폭력을 피하기 위해서 인간이 쉘터로 숨어들 때, 고지라와 무토가 서로 맞붙는 장면을 '올려다보는' 동시에 그 화면을 '끊어내버리는 것', 경외감과 함께 그것에 대한 호기심이 아닌 두려움에 가득찬 채로 쉘터문을 닫음으로서, 원시인들이 야수를 피하듯이 현대인들이 고지라와 무토라는 재앙을 피하는 무력감, 경외감, 공포감을 한장면에 압축한다.


그렇기에, 영화는 전적으로 재앙과 신화적인 괴물로서의 고질라를 드러내려고 한다. 하지만, 고지라와 무토를 다뤄내는 카메라가 아닌, 인간의 이야기에서는 영화는 상당히 미숙한 지점을 드러낸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무의미하게 소모될 뿐이며, 주인공과 그 가족은 극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할 뿐이다(물론 이는 고지라나 무토와 맞서싸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다만 인간이 들러리일 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들러리 역활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재앙을 맞이하는 군중을 다뤄내는 장면에서조차 인물의 동선이나 다뤄내는 방식, 그리고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지점에서 상당히 어설펐기에 초중반에서 결전이 일어나는 후반부까지 영화가 늘어진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으며 이는 매우 치명적인 문제로 보여진다. 그렇기에 현재 사람들 사이에서 고질라의 평이 극과 극으로 나뉘는 것도,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다. 


하지만, 인간이 주로 등장하는 장면에 있어서 상당히 의미심장한 지점이 있다. 먼저 주인공의 '직업'이다:주인공은 폭탄 해체 전문가이며, 핵폭탄의 타이머를 직접 설정하였기에 자신이라면 60초만에 그것을 해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피력하기도 한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부상을 입은 몸으로 보트를 간신히 샌프란시스코의 해안에서 멀리 떨어뜨리고는 의식이 희미해지는 중에 핵폭탄이 터지는 것을 목도한다:핵폭탄 해제는 실패로 끝났다. 인류가 핵을 해체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은 그저 오만해 불과하다는 듯이, 영화의 마지막 고지라가 기진맥진해서 쓰러지는 장면과 핵폭발 장면을 교차시킨다. 또다른 하나는 헤일로 강하 장면이다:이 시퀸스는 군종목사의 기도로 시작된다. 마치 종교적인 제의를 거치는 듯한 엄숙한 음악(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모노리스 테마 BGM)과 핏빛 플래어, 그리고 원시의 혼돈속으로 뛰어드는 듯한 묘사는 아름답다 못해 장엄함까지 느껴질 정도이다. 


결론적으로 고질라는 또 좋아할만한 사람만 좋아하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아직 감독에게는 미숙한 점들이 보이며, 단순하게 스펙타클을 감상하기에는 영화는 괴수영화라는 서브컬처 미학의 비중을 너무 높게 잡아버렸다. 물론 현재 관객들에게 있어서 큰 흥행몰이를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사람들이 이에 대해서 극단적으로 상반된 평가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게 보인다. 하지만 고질라가 의미가 있는 지점은 그 특유의 겸손함과 함께 괴물을 한때 태초의 혼돈을 거닐었던 신의 모습으로 그려내려 한 고전적인 미학을 헐리웃 대자본과 결합시켜 살려내려 한 감독의 노력에 있으며, 그렇기에 그 결점이 아주 뚜렷하더라도 좋아할만한 사람들은 충분히 좋아할만한 작품임에는 분명하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시드는 유명인사들의 바이러스를 열혈팬들에게 판매하는 클리닉에서 근무하고 있다. 남들 몰래 자신도 유명인들의 바이러스를 주입하면서 심지어 불법 유통까지 시키던 시드는, 자신이 주입했던 하나 가이스트라는 여배우의 바이러스로 인해 서서히 죽어 가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제 17회 부산국제영화제)


보통 예술에 있어서, 예술가의 가족 사이에서 작품관은 쉽사리 공유되는 것이 아니다:물론, 예술을 쉽게 접하는 '환경' 자체가 예술과 관련해서 예민한 감수성을 기르는데 도움을 주기도 하며 예술가 '가족'을 형성하기도 한다. 바흐 일가나, 요한 스트라우스 1세와 2세, 뒤마 부자 등등 대를 이어서 예술을 하는 예술가들도 꽤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문제는 미야자키 고로-하야오 사이의 부자갈등의 케이스나 아버지 뒤마의 여성편력을 보고 도덕적인 내용의 춘희를 썼던 아들 뒤마의 케이스를 고려해본다면 예술가 가족이 '공통된' 주제의식을, 특히 선대의 주제의식과 미학을 따라가는 형태를 취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아들인 브랜든 크로넨버그의 데뷔작 안티바이럴은 대단히 기묘한 작품이다:최근의 데이빗 크로넨버그가 초창기 B급 SF 호러 영화를 만들었던 시절의 주제의식에서 표현양식을 제외하고는 드라마와 다양한 장르의 형태로 옮겨갔다면, 아들 브랜든 크로넨버그의 안티바이럴은 아버지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초창기 B급 SF호러 영화에 근접한 주제의식과 미학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아들 크로넨버그와 아버지 크로넨버그 사이에 '분명한' 차이점이 존재하긴 하며, 이는 밑에서 자세하게 다루고자 한다.


안티바이럴이 집중하고 있는 소재는 '질병'이다. 주인공인 시드는 특별한 클리닉에서 '질병'을 판다. 하지만 이 질병은 '특별'한데, 유명인이 겪었던 질병이며 팬덤은 이 질병에 감염됨으로서 유명인과 '유대감'을 느낀다. 그리고 시드 역시 자신의 소비자들과 유사한 기묘한 유대감에 중독되어있으며, 한나 가이스트(재밌게도 '가이스트'라는 단어는 독어로 '정신'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와 유대감을 느끼고자 그녀의 질병을 자신의 몸에 주입하다 결국 크나큰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이러한 '뒤틀려있는' 대중의 유명인을 향한 관심사를 풍자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 하다:유명인의 세포로 만든 배양육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등의 엽기적인 유명인 파생상품이 넘쳐나며, TV에서는 과격할정도로 선정적인 가십성 뉴스들을 방송한다. 단순하게 본다면, 안티바이럴의 영화 미학은 전적으로 과격한 세태에 대한 풍자를 그로테스크한 형태, '자본주의의 병자'(실제적인 의미에서)라는 악의가득한 이미지로 풀어낸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를 좀더 파고들어간다면 아들 크로넨버그가 안티바이럴을 통해서 달성하고 한 미학이 아버지 크로넨버그가 초기에 성취하였던 육체와 이물질의 결합과 그 과정과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시작하기에 앞서서, 우리는 먼저 이러한 질문을 던져보아야한다:과연 '질병'이란 무엇인가?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의 질병에 대한 챕터를 할애하고 문학에 드러난 질병의 이미지를 분석한 적이 있다. 특히 결핵의 경우, 고진은 결핵이 근대문학에 있어서 가장 많이 쓰이는 메타포의 하나로서 결핵이 갖는 문학적인 이미지의 독특함이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고진은 결핵과 그 결핵의 메타포가 갖는 특징에 주목하였다:결핵은 근대의 병원체의 발견(비록 처음 발견했을 때 코흐가 잘못 발견한 것이긴 하지만)에 의해서 주목받기 시작한 질병 중 하나이다. 또한 전근대의 전염병의 파멸적인 속성과는 다르며(전근대의 전염병은 하수 시스템의 정비로 소멸되었다), 결핵이 갖는 특수한 이미지들, 즉 '야만적인 건강함'과는 다른 '창백하며 우울한 내면으로 파고들어 타인의 접근을 거부하는 듯한' 결핵환자들의 이미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핵이라는 질병이 병원균이라는 특수한 원인에 의해서 발병된다는 속성이 발견됨으로 인해 결핵은 근대문학에 있어서 하나의 메타포로 각광받게 되었다.


하지만 결핵의 문학에서 다루는 감상주의적인 속성과 다르게, 현실의 결핵은 그저 하나의 고통스러운 질병에 불과하다. 또한, 결핵은 단순하게 결핵 병원균에 의해서 발병되는 질병이 아니다:우리는 매일 여타 다른 균들과 함께 결핵균에 노출된다. 하지만 우리가 결핵에 쉽게 걸리지 않는 것은 결핵이란 질병원에 노출되는 것 이외에도 우리의 건강상태, 질병원에 대한 노출도, 그리고 여태까지 유전을 통해서 이어받은 결핵에 대한 내성(아프리카에 사는 사람들이 말라리아에 높은 내성을 갖는 특성인 변형된 적혈구를 그 특성이 없는 사람이 말라리아에 걸려 죽음으로서, 배제-선택에 의한 유전으로 내성을 이어받았듯이) 등등의 다양한 요인들이 개입하여 생겨난 결과물이 바로 질병이란 현상이다. 즉, 우리의 믿음과 다르게, 질병은 질병원 자체의 절대적 원인(물론 질병원이 있어야 질병은 생긴다. 그것은 주의해야 한다)에서 비롯되지 않는다:고진은 이러한 병원체-병원의 관계에 대한 믿음을 신학적인 믿음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그렇기에 근대문학에 있어서 질병에 대한 메타포, 그리고 그 병원체에 대한 신화는 원래 있던 것을 발견 한 것이 아닌 결핵이라는 것을 '재발견 및 재정의'한 하나의 이미지라 볼 수 있다.(흥미로운 것은 시드의 창백한 병자적 이미지와 한나 가이스트의 가련한 폐병 환자적인 이미지가 전술한 창백한 병자, 결핵환자의 이미지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가족끼리 전염되는 감기처럼, 같은 공간에 있어도, 심지어 같은 병원균에 노출되더라도 감기라는 질병이 발병되는지 혹은 어떤식으로 발병되는지 어떤 증상이 특징적으로 드러나는지 여부가 다 달라진다면(물론 유념해야하는 것은 그것이 완벽하게 예측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하지만 동일한 현상이 반복되는 것 역시 아니다. 과학적인 측면에서는 그것은 여전히 허용 범위 내에 들어있는 것이지만, 이 영화 내에서 팬들이 소비하는 이미지는 그런 '허용범위'의 문제가 아닌 완벽하게 '동일한' 무언가에 가깝다) 과연 영화내에서 보여주는 '동일한 질병을 공유한다'라는 행위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또한 엔지니어링되어 소비자에게 주입되면 곧바로 발화되는 형태의 질병이 어떻게 원본의 질병, 다양한 원인이 겹쳐져서 만들어지는 유명인들의 질병과 '동일시' 될 수 있단 말인가? 위에서도 지적하였듯이 질병이란 하나의 이미지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질병 클리닉은 질병이 병원체와 함께 다양한 변인의 복합적인 결합 현상임에도 불구하고(유명인이 걸린 질병이란 질병원에 다양한 원인이 결합한 복합적 결정체라면), 그것을 바이러스라는 형태로 물화시켜 복제하고 100% 똑같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게 엔지니어링 하며, 심지어는 기존의 질병이 갖고 있는 전염 가능성을 삭제하고 '복제방지'를 걸어놓는 형태로 대량생산한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안티바이럴이 질병에 대해서 취하는 태도는 시뮬라시옹적이다:시드와 클리닉이 파는 유명인의 질병이란 상품은 실제 유명인들이 겪는 질병과는 다른 질병이란 '이미지'에서 파생된 파생 이미지이다. 그리고 유명인의 질병을 공유한다는 것은 유명인과의 관계맺음에 대한 믿음이자 환상이다. 이 환상을 실현하기 위한 주술행위로서 생명공학이 들어온다:이들이 만든 질병은 대량생산이 가능하며 100% 기능하는(분명, 그것이 100%기능한다는 이야기는 영화 내에사 공공연하게 드러나진 않는다:하지만, 상품이 100% 기능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있을까?) 상품이며 이미지이다. 하지만, 이 만들어진 질병은 유명인이 경험하는 질병과 동일한 질병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도 언급한 내용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들은 이 질병을 공유하고 소비하는가?


영화 내에 드러나는 다른 장치를 통해서 보면 이는 좀더 명확하게 드러난다:열성적인 팬들은 유명인의 유전자를 이용해서 만든 배양육을 먹어치운다. 하지만 이 뭉글뭉글하고 기분 나쁜 근세포 덩어리가 어떻게 '유명인'과 접점이 생길 수 있는가? 유명인의 유전자로 만들었기에 유명인과의 접점이 생긴다는 것이다:즉, 유명인의 본질은 유명인이라는 인간 그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유전자'라는 물질로 해체되고 쪼개질 수 있는 '무언가'라는 믿음이 이러한 역겨운 행위를 가능케하는 것이다. 유명인의 존재와 그에 빠지는 팬덤에 대해 발터 벤야민이 실존하지 않는 '아우라'를 숭배하는 행위라 비판했었던 것이 이제는 보들리야르 식으로 존재하지 않는 유명인의 본질-아우라를 보이지 않는 단위의 유전자나 또는 병원체로 신비화시키고 그것이 본질이라고 믿는 것으로 악화된다. 그리고 팬이 유명인의 질병을 공유하는 행위조차 마찬가지이다:유명인이 경험하는 질병과 고통이 그것을 상품으로 소비하는 경험과 등치될 수 없음에도 그것이 연결되었다는 믿음 자체가, 질병이라는 이미지를 소비하는 기반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질병에 의해서 변화하는 신체와 고통은(포진 바이러스가 입가에 난 팬처럼) 이러한 믿음의 '증거'이다.


그리고 여기서 아들 크로넨버그와 아버지 크로넨버그의 접점이 생긴다:일찍이 보들리야르가 시뮬라시옹에서 한 챕터를 할애하면서 JG 발라드의 크래쉬를 분석하며 '시뮬라시옹 시대의 걸작'이라 찬미하였으며, 아버지 크로넨버그는 발라드리안이자 발라드 특유의 '이질적인 두 존재의 상호침투'(열기와 인간의 결합, 역진화-물에 잠긴 세계, 차와 인간의 섹스-크래쉬 등등)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아버지 크로넨버그가 크래쉬를 통해서 집대성한 섹스의 이미지는, '하고 있지만 전적으로 행해지지 않는 섹스' 그 자체이며, 그런 점에서 시뮬라시옹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안티바이럴에서 다시 반복되는데, 시드가 볼&태서의 특별 제조된 바이러스에 감염된 한나 가이스트의 피로 인해 한나와 함께 천천히 죽어갈 때, 서로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점에서 감정적인 유대가 맺어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서는 어떠한 '드라마'가 발생하지 않는다. 극중 시드와 한나 사이에는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거리가 존재하며, 죽어가는 창백한 한나를 앞에 두고 시드가 취하는 그로테스크한 태도(마치 목을 조르려는듯이 손을 뻗는 장면과 그 행위의 멈춤 또는 좌절)는 이 둘의 관계가 단순하게 유명인을 사랑하는 팬과 유명인 사이의 관계가 아님을 알 수 있게 된다. 또한 그는 현실의 한나보다는 꿈속의 한나 가이스트에 더 친밀한 유대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반복되는 꿈의 이미지와 피를 뽑는 행위를 꿈속에서 하는 것 등):유대감에 대한 강력한 '증거'를 몸에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증거'에 집착할 뿐 실제의 원본을 보면 차게 식어버리는 이 기묘한 '팬심'이야말로 영화의 주제의식을 꿰뚫는다.


아들 크로넨버그가 안티바이럴에서 질병과 유명인을 소비하는 그로테스크한 방법론은 아버지 크로넨버그의 초기작들과 유사하며 그 '증거'를 몸에 드러내는데 집중한다:브루드에서 정신병이 육체의 일부로서 발화되는 모습이나, 스캐너스에서 스케너의 정신이 육체와 기계에 융합하며, 데드 링어에서는 쌍둥이가 완벽한 타자인 서로를 완벽하게 싱크로나이즈 하려는 시도를 하는 등등은 안티바이럴의 표현방법, 유명인의 DNA로 만들어진 유사 육체를 먹는다던가 유명인의 질병이 그로테스크하게 온몸을 지배하는 모습(특히 시드의 경우, 너무 많은 유명인의 질병을 몸에 보유함으로 인해 완전히 망가져버렸다는 인상마저 준다)과 맥이 닿아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 크로넨버그와 달리 아들 크로넨버그의 안티바이럴은 사진을 전공한 이력의 특수성이 그의 영화를 지배한다:마치 세계는 진공포장된 것처럼 병적일 정도로 정돈되어 있으며 미장센도 편집증에 걸린 것처럼 보일 정도로 대칭되어 있다. 혹자의 표현을 따르자면, '카메라로 배운 세계'가 영화 내에 그려진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안티바이럴의 영상은 인공성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그리고 그러한 인공적인 영상미에 대한 집착이(물론 주제의식에 의해서 의도되었기는 하겠지만), 아들 크로넨버그와 아버지 크로넨버그를 구분하는 주요한 기준으로 보여진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본다면, 아들 크로넨버그의 안티바이럴은 아버지 크로넨버그의 초기작의 훌륭한 재림이라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유념해야하는 점은 아버지 크로넨버그는 이미 자신의 초기작을 넘어서 어디론가 향해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육체 또는 정신과 이물질의 결합, 폭력과 섹스는 여전히 아버지 크로넨버그의 주제의식이지만, 그것은 그로테스크한 육체의 변화를 뛰어넘어 사람을 뒤흔드는 '드라마'의 형태로 이행하였다. 스파이더의 거미와 오이디푸스 컴플랙스의 이미지, 폭력의 역사의 일반적인 중산층 가정 이면에 숨겨진 폭력의 내력, 이스턴 프라미스의 동구와 서구의 만남 등등을 통해 드러나는 아버지 크로넨버그의 미학은, 마치 데인저러스 메소드에서 '나는 그 이상을 보고 싶다.'라고 이야기하는 신경쇠약에 걸린 융의 이미지에 맞닿아있는 듯 하다:아버지 크로넨버그는 '융합' 이후에 어떻게 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지를 보고 싶어한다. 그리고 지금 현재까지 걸어온 길로 보자면 아버지 크로넨버그는 꾸준하고 성실하게 걸어온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들 크로넨버그는 어떨까? 안티바이럴은, 아버지의 영향을 강력하게 부정함(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아버지 영화의 이미지를 분명하게 자기 영화에 삽입한다:음부가 기형인 배우에 대한 이야기는 데드링어에 대한 분명한 오마주이다)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게도 성공적인 첫걸음이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물론 호불호가 갈리는 평이 많지만, 어찌되었든 본인은 성공적이라 보고 싶다) 그렇다면 아들 크로넨버그는 어디로 갈 것인가? 단순하게 아버지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 아니면 자신만의 길을 걸어갈 것인가?


여기서 아들 크로넨버그의 행보를 논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안티바이럴이 스플라이스와 같이 고전적인 B급 SF 호러를 원하는 사람들의 목마름을 충족시키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결말에서 드러내는 '악의'는 영화를 잊을 수 없는 무언가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기회가 된다면 꼭 보시길.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은, 단순하게 ‘근대문학사’라는 지점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저서가 아니다:고진은 일본에 문학이라는 개념이 수입되면서 생겼던 여러 잡음들, 그리고 그 잡음들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소위 근대성이라 불리는 개념이 근대성이 발전하는 유럽이라는 중심부가 아닌 일본이라는 주변부에서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관찰함으로서 과연 근대성이 무엇인가? 라는 지점을 탐구하는 저서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고진은 이러한 ‘문학’의 개념을 아주 기초적인 지점에서 해체한다. 풍경과 내면의 발견, 어떻게 아동이라는 개념이 문학의 일부가 되는지, 그리고 이 글에서 인용해서 다루고자 하는 ‘구성’의 문제 또한 그러하다.


구성이란, 이야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핵심된 시선(3인칭 전지적 작가의 시점)이나 흐름을 통칭하는 것이다: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나의 시점, 그리고 하나의 흐름을 따라서 ‘총체적’으로 보는 것이 가능할까? 고진은 이를 ‘원근법’의 발전사에 따라서 구성이라는 개념을 해체한다. 보통 원근법은 근대적인 화풍의 발달에 따라 ‘최초’로 발명된 것으로 해석되며, 세계를 바라보는 유일한, 그리고 정확한 시선으로 인지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서양의 원근법 이전에도 서양에는 ‘원근법’의 개념이 존재하였으며 서양의 바깥에는 원근법과 다른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 존재하였다.  원근법이란,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세계를 인지하는 방법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동양의 산수화를 예로 들어보자:동양의 산수화는 일반적으로 깊이감의 부재, 원근법에 맞지않는 묘사 등으로 인해서 현대의 우리가 느끼기에는 ‘부정확한’ 그림으로 인지되기 쉽다. 그러나, 산수화를 잘 살펴본다면 동양의 산수화는 산을 묘사한 부분부분의 디테일들이 섬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서양의 풍경화가 소실점에 의해서 그림을 ‘사람이 보는 듯한’ 광경을 연출하는데 집중하였다면, 동양의 산수화는 화가가 ‘전체를 돌아보며’ 그 풍경을 하나의 세계로 압축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이푸 투안의 토포필리아의 내용을 인용해서 풀이하자면, 문화는 주변의 세계를 인지하는 방법 및 그것에 대해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미학에 영향을 미치며, 오감이 민감한 인디언이 가상의 괴물을 두려워하며 그것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이나 미국인들이 자신의 영토에 대해서 느끼는 감상이 변화하는 지점까지, 현대 원근법과 미학에 익숙해진 우리에게는 낮설고 생소한 인지 방식들은 여전히 외부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짧게 다루고자 하는 것은 문학에서의 시선과 구성, 그리고 영화에서의 연관성과 그것을 페드로 코스타의 뼈에 연결시켜서 보는 것이다. 문학에서의 시선과 구성은 영화에게도 영향을 미쳤으며, 근대의 영화에 있어서 카메라의 움직임은 영화의 내용을 꿰뚫어보는 보편부당한 움직임을 전제하고 있다. 설령, 카메라가 인간의 내면을 꿰뚫어볼 수 없다 하더라도, 감독은 컷 내부에 인물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장치들을 집어넣고 그것을 미장센의 형태로 구현함으로서 통일된 미학과 아름다움을 심고자 한다.


하지만 페드로 코스타의 뼈는 그런 지점이 거의 없다:물론 기가 막히는 인물의 분절과 컷의 분절(절묘한 지점에서 계단을 이용해서 인물 사이의 막을 형성하는)들은 가끔식 존재하나, 감상자에게 있어서 뼈라는 영화는 ‘이해하기 힘든’ 영화이다. 서사는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아이의 탄생과 아이를 맡아주려고 떠돌아다니는 젊은 아버지, 자살을 시도하는 여인, 그리고 그 여인의 친구), 관객들은 이 영화에서 일반적인 ‘재미’나 감동을 느끼기에는 무리가 있어보인다. 또한 서사의 완결 역시, 별다른 설명이나 동기 없이 급작스럽게 마무리 되는것처럼 느껴진다.


영화를 감상하는데 있어서 느껴지는 껄끄러움은, 뼈라는 영화가 영화의 기본적인 공식을 거의 대부분 깨부수고 있거나 지키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가상선을 넘으면서 컷을 급작스럽게 바꾸거나, 일반적인 영화였다면 컷을 나누거나 다양한 기법들을 썼을 부분(클로즈업 같은)에서 전혀 기교를 부리지 않고 하나의 시점에서 관조하듯이 영화를 촬영함으로서 관객에게 낮섬을 유도한다. 또한 인물이 피로를 느끼며 멍하게 앉아있는 오프닝 시퀸스로부터 시작되는 영화의 도입부의 장면 연출이 어떤 정합성 없이 극 내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며, 이야기는 어떤 순서나 설명, 하나의 ‘결론’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아닌 무질서하게 전개되다 끝을 맞이하기에 관객들은 혼란스럽게 느껴질만한 지점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을 설명해줄 수 있는 지점이 존재한다:뼈라는 영화의 장르는 ‘다큐 픽션’으로 구분된다. 이 장르 구분 역시 대단히 혼란스럽다고 볼 수 있는데, 도대체 사실을 다루는 ‘다큐멘터리’와 허구 그 자체인 ‘픽션’이 하나의 단어에서 결합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다큐 픽션이야말로 페드로 코스타의 뼈라는 영화를 정의 내릴 수 있는 가장 알맞은 단어라 할 수 있다. 뼈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대부분 포르투갈의 빈민촌 출신의 사람들로서, 뼈라는 영화가 보여주는 배경과 이야기의 삶을 ‘그대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어떤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배우들이 아닌(물론 뼈에서는 그런 배우가 한명 존재하긴 한다) 사람들이 영화에서 자신의 삶을 그대로 연기, 아니 재연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과연 순수한 ‘허구’일까, 아니면 ‘사실’일까? 어찌보면, 사실과 허구란 서로 상반되는 모순어의 관계가 아니라 ‘상존’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닐까?


다큐픽션의 관점에서 본다면, 페드로 코스타의 뼈가 노리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위에서도 다루었듯이, 하나의 결론이 존재하며 그 결론을 향해서 일사분란하게 나아가는 근대 문학의 ‘구성’과 다르게, 인간의 삶과 이야기란 그런 구성에서 ‘벗어나있는’ 지점도 충분히 많다. 그렇기에 뼈는 그러한 구성과 그 구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카메라의 움직임에서 탈피한다. 카메라는 각각의 인물의 심리를 잡아낼 뿐, 그것을 설명하지 않는다:인위적인 설명을 배제하고 거기에 인물들의 심리를 주변의 소리에 짓눌리며 피로감을 느끼는 인물의 모습을 ‘형상화’하여 영상에 무게감을 부여하기도 한다. 어떤 지점에서는 이 장면들은 ‘형상화’라고 보기에는 미묘하기도 하다:도대체 이들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전혀 연기 수업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뚜렷한 목적지 없는 이야기 속에서 드러내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렇게도 볼 수 있다:페드로 코스타 감독은 이 영화에서 포르투갈 빈민들의 삶 그 자체를 그려내려고 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페드로 코스타가 뼈를 통해서 빈민들을 바라보는 시각이란 따스한 부성애적인 시선이나 사회비판적인 시선이 아닌 그 사람들의 삶 그 자체에 침투하고 삶 자체를 재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페드로 코스타는 다큐멘터리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의 무언가를 선택함으로서 자신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그러한 결과물인 뼈는 근대적인 카메라와 이야기의 구도를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인물들이 자신의 삶에서 느끼는 복잡미묘한 감정들을 채워넣는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미디엄에 올린 글입니다.


세계 최고 부호 마담 D.의 피살사건! 범인은 전설적인 호텔 지배인이자 그녀의 연인 구스타브?! 1927년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어느 날, 세계 최고 부호 ‘마담 D.(틸다 스윈튼)’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다녀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의 살인을 당한다. 그녀는 유언을 통해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명화 ‘사과를 든 소년’을 전설적인 호텔 지배인이자 연인 ‘구스타브(랄프 파인즈)’ 앞으로 남긴다. 마담 D.의 유산을 노리고 있던 그의 아들 ‘드미트리(애드리언 브로디)’는 구스타브를 졸지에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게 되고, 구스타브는 충실한 호텔 로비보이 ‘제로(토리 레볼로리)’와 함께 누명을 벗기기 위한 기상천외한 모험을 시작한다. 한편, 드미트리는 그녀의 유품과 함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까지 차지하기 위해 무자비한 킬러 ‘조플링(윌렘 대포)’를 고용하기에 이르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시작은 이렇다:먼저, 한 작가의 묘지 앞에서 여성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라는 소설을 읽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그리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작가는, ‘소설은 끝없이 영감을 얻어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닌, 인물들에게서 영감을 받아 소설을 쓰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자신이 영감을 받은 실화와 인물을 이야기하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거기서 젊은 작가는, 무스타파를 만나고 무스타파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소유하게 된 경위를 듣게 되고, 다시 영화는 1927년의 과거로 돌아가게 된다. 이와 같이 영화에는 4개의 층위(현재-늙은 소설가가 소설을 집필하는 시점-젊은 소설가가 늙은 제로 무스타파에게서 이야기를 듣는 시점-실제 영화의 내용인 구스타프와 제로의 모험의 시점)가 존재한다. 물론, 영화가 주로 머무르는 층위는 구스타프의 이야기와 늙은 제로의 이야기지만, 어째서 이렇게 복잡한 시공간의 층위를 쌓아올린 것일까?


감독 웨스 엔더슨은 특유의 연출방식을 통해서, ‘어른을 위한 동화’를 만들어내는데 초점을 맞추는 감독이다. 그의 전작인 문 라이즈 킹덤의 경우에는, 아이들이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카메라는 약간 삐딱하게 엇나가있으며, 단순하게 가출하는 고전 명작 동화를 재현하는 것이 아닌 강박적으로 구현되어 있는 영화 내의 세계와 미장센들, 어린이를 다루고 있는것처럼 보이지만 분명하게 함의를 갖고 있는 어른들의 이야기들을 배경에 깔아둠으로서 그것이 단순하게 좋았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노골적으로 숨겨놓고(분명하게 거기 존재하는 경찰 서장과 어머니 사이의 불륜 관계를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 그것을 보는 어른 관객들이 즐기게 만드는 것이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도 그러한 연장선상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다:강박적으로 짜여져 있는 미장센과 영화의 세계, 그리고 인물들의 강박적인 행동과 표정 등등. 하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도 거기에 어떤 긴장관계를 부여하지 않는(꼬마애들이 키스를 하다가 발기된 성기를 확인하지만, 그것이 성적인 긴장감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 같은) 문라이즈 킹덤과는 다르다. 여전히 미학적으로 맞닿아 있으며 ‘추억’을 다루고는 있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은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강하게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웨스 엔더슨 특유의 강박적인 대칭으로 가득차 있다. 이것은 극단적인 ‘양식미’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양식미가 그 시대의 특징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웨스 엔더슨이 영화 내에서 영상으로 다루어내는 이 영상미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지점’에서 그러하다는 점에서 강박적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건물이나 컷 내의 구도들은 그러한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지만, 인물들이 컷 내에서 움직이는 동선이나 행위들 자체도 그 강박적인 영상미에 지배당하고 있다. 심지어, 인물들의 행위들마저도 강박적인 대칭에 의해서 지배당한다:이 영화의 주인공인 구스타프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인데, 구스타프가 마담 D의 살해용의로 감옥에 들어갔을 때, 매번 직원들 아침식사 때 하던 연설과 시 읊기를 사환인 제로를 시켜서 하게 하는 지점이라던가, 장면과 분위기에 맞지않게 시를 읊고 향수를 뿌리는 지점 등에서 그의 강박증적인 인물상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구스타프가 컨시어지 연합을 소환할 때, 다들 다른 상황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서로가 하는 행위 자체가 강박증적으로 유사한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구스타프-제로, 컨시어지-사환의 대칭적인 관계, 무슨 일을 하고 있든 컨시어지 연합의 전화가 온 순간에 거기에 화답하는 존재 등등)


물론 풍경이나 인물들의 강박적인 행동은 이미 전작 문라이즈 킹덤에서도 웨스 엔더슨이 영화를 만들어내는데 쓴 핵심적인 도구이긴 하다. 하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문라이즈 킹덤과 대비되는 지점은, 이 강박적인 행동과 대칭성에 대한 집착이 양식미를 만들어내는 지점을 넘어서 영화의 구조(4개의 층위로 구성된)의 영향을 받아서 관객들에게 ‘화학적인 변화’를 보여주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엄밀하게 본다면 문라이즈 킹덤 역시 그러하긴 하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경우에는 그것을 전면에 제시함으로서 전작과 다른 차별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미 전작인 문라이즈 킹덤에서도 그랬었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도 폭력이나 성에 있어서 대단히 무심한듯 시크하게 이야기를 넘겨버린다:컨시어지 구스타프는 호텔을 찾아오는 노부인들과 바람을 피는 바람둥이였으며, 나이가 84세인 마담 D와는 19년에 걸친 연인 사이였다(구스타프 왈, 나는 그거보다 더 늙은 여자랑도 자봤어) 하지만 그를 둘러싼 염문이나 섹스에 대한 묘사는, 그야말로 ‘지나가듯이’(마치 페이지를 넘기듯이 슥슥 넘어가는 컷들) 넘어갈 뿐이다. 또한 살인에 있어서도, 사람을 직접적으로 죽이는 장면이나 폭력이 휘둘러지는 지점을 노골적으로 숨겨버림(탈옥중에 간부와 동귀어진 하는 탈옥 동료의 최후 라던가)으로서 마치 그것이 주요하지 않은 것처럼 묘사한다. 분명,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있어서 폭력과 섹스는 중요한 모티브 중에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노골적으로’ 숨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장면이 있다:사과를 든 소년을 챙기는 구스타프와 제로는 그림이 놓인 자리가 텅 비자 그 자리에 전혀 어울리지도 않고 저속한 ‘자위하는 레즈비언들’ 그림을 걸어놓고는 자리를 떠난다. 그림을 도둑질하는 장면에 있어서도, 그들은 ‘그림이 비어있는 자리’를 채워넣는 강박증적인 행동에 집착하는데 이들의 행위는 다소 우스꽝스러워 보일지는 모르지만 어떤 확고한 ‘원칙’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심지어 마지막 클라이막스의 군인들의 총격씬 마저도, 그것이 후술할 구스타프의 최후와 비교하여 보았을 때 총을 쏘는, 정당한 적을 향한 폭력을 원칙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면서 우스꽝스럽게 재현한다는 점에서 구스타프와 같은 시대의 인물임을 드러낸다)그리고 영화 내의 인물들이 강박증적으로 사로잡힌 원칙이란, 일종의 ‘균형감각’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구스타프 처럼, 영화 내부의 인물들은 앞에서는 세련되고 엄격한 호텔 컨시어지처럼 행동하지만 뒤에서는 노부인들과 섹스하며 그녀들을 ‘비계’에 비유하는, 다소 모순된 인물상을 취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구스타프는 어느 한 극단으로 가지 않은 체, 천박함과 우아함 사이에서 일종의 ‘양식미’를 지킨다. 그리고 이 양식에 집착함으로서, 그들은 어느 한 극단(섹스나 폭력 같은)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또한 이 양식미란, 구스타프가 어디에 가더라도 적용된다:심지어 구스타프가 마담 D 살해 누명을 뒤집어 쓰고 감옥에 가서도, 그는 그 나름대로의 품위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품위를 지키려는 구스타프에 대해서, 세계는 그를 존중하는 형식으로 화답한다:구스타프에게 옥수수 죽을 받은 뒤에 탈옥을 간수에게 밀고하려는 죄수를 조용하게 제압하는 것으로 보답하는 동료 죄수나, 동료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컨시어지 연합, 과거의 친절을 생각해서 제로의 3등급 비자를 특별히 허가해주는 군장교 등등. 심지어, 이들은 이 우스꽝스러운 ‘품위 지키기’를 삶의 양식으로 받아들인다:형무소에 있던 구스타프가 자신의 연설과 함께 기나긴 시를 동봉했을 때, 제로는 ‘이거 너무 기니까 그냥 들으면서 먹죠?’라고 이야기하고 호텔 직원들은 식사를 시작한다. 이와 같이, 강요된 품위지키기도 아니며, 허세기는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역겨움을 유발하는 허세가 아닌 천박함과 우아함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우스꽝스럽지만 사랑스러우며 동시에 어딘가 아련한, 신사다움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 시대의 마지막 신사로서 구스타프를 제시한다:탱크가 국경을 넘고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음에도 자신의 연인의 장례식을 참석하는 모습이라던가(속물적인 동시에  연인에 대한 예의), 탈옥을 하고 뒤에 말도 안되는 요구로 제로를 괴롭히다가도 자신의 예의에 어긋난 말에 대해 사과를 하며, 쫒기는 와중에서도 마담 D에 대한 충정을 지킨 집사에 대해서 잠시나마 묵념의 시간을 갖는 등등의 우스꽝스럽지만 동시에 예의와 양식을 존중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시대의 마지막 신사의 우스꽝스러운 모험은 마담 D의 유산을 물려받으면서 완결나는듯 하다:늙은 제로 무스타파의 표현대로, 구스타프는 품위가 있고 적당히 공허했던 시대의 최후의 신사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최후는 불현듯 찾아온다:총천연색과 대칭적인 구조로 폭발할거 같았던 스크린은 갑자기 아련한 흑백으로 전환되며, 다시 열차 검문에서 제로 무스타파는 넝마주이 비자를 제시했다는 이유로 열차바깥으로 끌려나갈 위험에 처한다. 그에 대해 구스타프는 과거 군인이 자신과의 특별한 관계 때문에 주었던 특별통행증을 제시하며 사태를 무마하려 하지만, 군인은 무뚝뚝하게 그 통행증을 찢어버리고 구스타프는 이 무례함에 반발하여 맞서싸우는 시점에서 갑자기 회상은 끝나버리고 만다. 


그 사건 도중, 구스타프는 총을 맞아 숨지게 된다:예의와 양식에 대한 존중이 불현듯 끝나버린 야만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실제로도 영화의 시작은 세계대전과 함께 시작했으며, 영화의 마지막인 구스타프의 죽음도 역사적으로 봤을 때는 세계대전의 도중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카메라에 담지 않는다:늙어버리고 구스타프에게 물려받은 재산 이외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제로 무스타파의 아련한 표정과 함께, 시대의 마지막 신사이자 예의가 사라져 버림을 슬퍼한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바꿔서, 이제는 너무 낡아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지키는 제로 무스타파의 모습은 그런 시대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음을 슬퍼하는 과거 신사의 마지막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영화를 복잡한 다층 구조로 구성한 것은, 1930년대에서부터 현재까지 관통하는 시간축을 통해, 잃어버렸던 예의와 양식에 대한 미학과 그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그 우스꽝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단순하게 웃기다기 보다는 어딘가 애잔하며 슬프다:그것은 서구 문명이 잃어버렸던 예절과 양식에 대한 존중이 사라졌음을 쓸쓸하게 반추하기 때문이다.




"거칠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신사답지 않으면 살아갈 자격이 없다."

Play back, 필립 말로.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노예 12년은 훌륭한 영화다:굳이 아카데미 수상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영화 자체가 갖고 있는 담백하지만 묵직한 묘사는 관객으로 하여금 노예제에 대한 불편함을 느끼게 만드는데 충분하다. 하지만, 노예제가 구시대의 유산이 되고, 인종차별 및 인종에 대한 증오가 주요한 ‘범죄’가 되어버린 현대에서 과거의 노예제를 굳이 현 시점에서 다루어야할 필요가 있을까? 시드니 포이티어의 초대받지 못한 손님(1967) 처럼, 어떤 인종차별적인 편견을 깨뜨리기 위한 계몽적인 영화는 그 목적을 상당부분 달성하였기에 대중문화에 있어서 효력을 상실한 것 처럼 보인다. 또한 과거에 비해서 인종차별은, 그것이 아주 주요한 문제임에 분명하지만(그리고 충분하게 우리가 대처하고 있지 않다는 것 또한 숙지하여야 한다),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과거의 문제를 현재에 그대로 대입하기에는 문제가 있는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에, 실화에 바탕하고 있음이 뚜렷한 노예 12년가 그런 ‘과거에 이랬다더라’ 식의 계몽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영화였다면, 이정도로 파문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으리라 본다.


노예 12년이 갖고 있는 특징을 다루기 위해서는 다른 영화와 비교해보아야한다. 노예제를 다룬 아예 다른 영화지만, 노예 12년과 장고:분노의 추적자(Django Unchained, 2012)를 서로 비교해보면, 이 두 영화가 노예제를 다루는 시선에 있어서 어떤 뚜렷한 차이점을 발견해낼 수 있다. 육체와 그에 가해지는 어마무지한 폭력이라는 점에서 장고와 노예 12년은 같은 테마를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고는 그것을 선정적인 내용(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긴 하지만)과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궤변과 역겨움으로 포장한 뒤, 그것을 향해 정당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파괴와 해방의 카타르시스를 주는데 집중하였다면, 노예 12년은 그런 폭력과 폭력을 향한 분노,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으로부터 빗겨나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장고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폭력을 직설적으로 드러냄으로서 불편함(물론 그것이 마지막에는 파괴와 살육으로 해방감을 심어주지만)을 주는데 주저하지 않았다면, 노예 12년의 카메라는 육체에 가해지는 폭력으로부터 빗겨나있음으로서 심지어 관객을 어느정도 ‘편안’하게 만든다. 이런 기묘한 편안함, 혹은 빗겨나있음이야말로 노예 12년의 핵심된 미학이며 그리고 다른 인종차별-노예제를 다룬 영화들에 비해서 더 높게 비상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노예 12년이 기초하고 있는 독특한 묘사는, 분명하게 섞일 수 없는 두 개의 세계가 육신이라는 매게를 통해 겹쳐지는 지점을 통해서 하나의 공간에 화하는 것을 통해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영화의 초반 시퀸스, 사탕수수 농장에서 고된 노역을 하고 피로한 육신을 누인 솔로몬(플렛)이 옆자리에 누은 여인에게서 성적인 유혹을 받는다. 솔로몬이 보이는 미적지근한 반응에 여인은 돌아서며, 솔로몬은 자신과 자신의 아내가 침대에 누워있는 장면을 회상한다. 이 두 시공간은 전적으로 만날 수 없는 평행함(노예로서의 삶-자유민으로서의 삶)을 드러내며, 이 두 시공간의 평행함은 솔로몬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구체화 되며 영화 내내 이러한 평행함이 드러난다. 이는 분명하게 섞일 수 없는 세계가 솔로몬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만나는 점에서, 영화 장고에서 무고한 피해자이면서 정당한 가해자로 등장하는 장고의 존재와는 차별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평행함은 솔로몬 뿐만 아니라 노예제가 노예라는 인간의 육체에 가하는 폭력을 다루는데 있어서도 주된 표현방법으로 작용한다. 노예제가 인간의 육체를 두고 가혹한 행위를 벌이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노동, 체벌, 고문, 원치 않은 섹스 등등. 노예 12년도 그런 지점에 주목한다. 하지만, 그것을 가해자의 가학성과 피해자의 고통이라는 지점에서 선정적으로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펫시와 앱스가 갖는 성관계를 보자. 어떠한 교감도 이루어지지 않은체로 혼자 몸을 움직이는 앱스와 그것을 묵묵히 받아내는 펫시의 관계는, 인간들이 서로 할 수 있는 가장 내밀한 형태의 교류인 성관계를 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콘돔보다도 더 두꺼운 ‘막’으로 가로막혀 있다. 심지어, 앱스가 피스톤 운동을 끝마친 뒤 펫시의 목석같은 반응을 보고 뺨을 후려갈길 때도, 그러한 갑작스러운 폭력마저도 펫시에게 있어서는 ‘받아들임’의 대상이 되며 거기에는 ‘되받아침’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가해자의 가학성이나 피해자의 고통을 선정적으로 포장하지 않은 노예 12년은 가해자-피해자의 관계라기 보다는 인간-사물의 관계에 더 알맞다고 보여진다. 실제로도 앱스의 이웃농장에 사는 노예 정부는 펫시에게 이렇게 충고한다:주인(앱스)이 너를 사물처럼 대하더라도 그걸 받아들여라. 그리고, 너와 주인 사이의 애정을 공개적으로 과시함으로서 나처럼 노예 생활을 탈출해라. 노예는 하나의 사물이다:인간이 아닌 완벽한 객체이며, 앱스가 광기에 사로잡혀 한밤중에 노예들을 깨워서 춤을 추라고 강요하는 것에 어떠한 되받아침 없이 수용하면서 무기력하게 춤을 추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노예들이다. 그런 사물로서 노예가 인간으로 끌어올려지는 것은 이원화된 세계, 사물로서의 노예의 세계와 인간으로서의 주인들의 세계에서 노예가 인간으로 끌어올려짐(애정의 공개화를 통한 탈출)을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볼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한 객체화의 구도를 선정적이진 않지만 이후 밑에서 다룰 노예제를 직간접적으로 반대하는 코드들을 삽입함으로서, 노예제를 비판한다.


노예 12년이 마주하고 있는 문제는, 죽어도 되는 인간, 인간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호모 사케르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이미 호모 사케르가 출발하고 있는 전제가 의미있는 삶과 없는 삶으로서의 조에-비오스의 구분, 아테네 폴리스 내부의 시민과 ‘노예’-외국인을 구분하기 위한 명제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호모 사케르의 문법이야말로 노예 12년이 다루고자한 문제 의식에 걸맞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영화 역시 그러한 지점들을 드러내는데, 단순히 남부의 노동집약적인 플랜테이션에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한 노예제뿐만 아니라 인간이 되지 못한 인간으로서의 노예, 그리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반명제로서의 육체이자 인간이 아닌 노예의 존재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앱스를 예로 들어보자:인간쓰래기임이 자명하며 부인에게까지 멸시받는 앱스가 자신의 인간다움, 남자다움을 과시할 수 있는 지점은 자신을 괴롭히는 아내에게 맞서는 것이 아닌 노예를 학대하는 지점에서 드러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또한 전적으로 그럴 자격이 없어보이는 앱스가 주일에 노예를 모아두고, 성경 말씀을 인용하는 지점은(너희는 두드려 맞을 것이다) 인간이 되지 못한 노예들에게 노예들은 가질 수 없는 인간의 문화를 보여주고 인간이 비인간에게 인간이 무엇인지를 설파하는 지점으로 작용하게 된다.(재밌는 점은 솔로몬은 글을 읽을 줄 알며, 그것이 그러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는 후술할 내용과 맞물리는 부분이다)하지만 과연 노예에게, 인간의 특질이라 할 수 있는 문화나 감수성이 존재하지 않을까? 영화는 노예들의 노동요와 가스펠을 극전반 은연중에 깔아둠으로서, 노예주들이 갖고 있는 문화와 대비되는, 억압받는 인간이자 절대 객체화 될 수 없는 인간들을 그려낸다.



이러한 과정 중에서 솔로몬(이자 플랫)은 극의 서사를 구축하는 중심이자 두 세계의 경계, 그리고 서로 만날 수 없는 ‘막’으로 등장한다: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자유인이지만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노예가 된 그는 노예도, 자유인도 아닌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은 인간이다. 또한 글자를 알고, 지식을 안다는 점, 그리고 특출난 능력을 보여준다는 점(바이올린 연주 같은)에서 처음부터 교육받을 권리도 없었던 노예들과는 차별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앱스가 노예를 밤에 춤추게 시킬 때, 솔로몬의 위치는 춤추는 노예가 아닌 연주하는 노예로서 그 위치가 집단으로부터 빗겨나있다고 할 수 있다)그리고 처음부터 그렇게 살았어야 하는 노예들과 다르게,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노예인척 한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자세는 결과적으로는 일반 대중이라 할 수 있는 ‘노예’에 섞여들지 못하게 함으로서 그를 겉도는 하나의 관찰자로 만든다. 이런 그의 시선을 보여주듯이 카메라는 폭력으로부터 ‘살짝 비켜나간’ 지점을 만들어냄으로서, 그가 폭력의 직접적인 희생자가 아닌 하나의 관찰자인 것처럼 묘사한다:탈주 노예를 목메달때 그 장면에서 솔로몬의 시선을 따라 노예의 죽음을 ‘배경’으로 처리하는 지점 등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관찰자적 위치에도 불구하고 그가 피해자가 될 거 같은 아슬아슬한 감각은 호모 사케르, 처분 당해도 상관없는 인간이라는 지점을 강력하게 드러내는 지점이라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아슬아슬한’ 감각을 통해서 영화는 이야기를 단순한 노예 유람이 아닌 극적 긴장이 살아있는 지점을 확보하게 된다.


솔로몬이라는 인물을 따라 진행되는 노예 12년의 이야기는 전적으로 오딧세이아의 형식을 따른다. 솔로몬이 살았던 세계는, 물론 그것이 연출된 것이긴 하지만, 노예제-인종차별이나 그로 인한 비극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며 백인과 흑인이 한 레스토랑에서 같이 술을 먹고 음식을 먹는 그당시 세계라고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공정하며 ‘현대적인’ 세계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남부라는 야만과 폭력의 세계가 존재한다:중요한 것은, 그 두 세계가 완전히 분리되어있는 것이 아닌, 하나의 시공간에 ‘공존’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가 안락하며 공정한 집과 북부의 세계로부터 쫒겨나서 어두운 세계인 남부로 쫒겨나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며(실제로도 귀환에 성공했으니) 그 여정을 견뎌내는 지점은 전 세계를 ‘돌아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솔로몬은 오딧세우스가 신화적인 공포와 야만에 대면한 것과 유사하게 세계의 공포와 야만에 대면하고 거기서 살아남고자 한다. 


하지만, 오딧세우스가 영웅으로서 신화적 폭력에 맞서고 집으로 계몽을 가져다 주는 존재였다면, 솔로몬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낮춤으로서 살아남고자 하는 ‘소시민적’인 존재이며 카메라 역시 그런 소시민이자 어디에도 낄 수 없는 솔로몬의 존재를 따라간다. 그는 심지어 노예와  자신을 분리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하기도 하는데, 확장해서 본다면 이는 ‘관객’의 입장과도 맞닿아있다고 볼 수 있다:과연 노예 12년의 시대가 우리의 시대에 그대로 부합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이미 과거가 아니지 않은가? 그렇기에 이는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며, 우린 그저 지나가는 관객에 불과하다:물론, 영화가 다루고 있는 역사는 분명 과거의 역사이다. 하지만, 영화가 다루고 있는 문제, 호모 사케르나 죽어도 되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여전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안락한 세계(북부)로부터 내쫒겨져서 지옥같은 세계(남부)를 바라보는 관객(솔로몬)이라는 지점에서 영화의 문법을 확대해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재밌는 점은 그런 그가 점점 그런 노예 대중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노예가 죽자, 그 죽은 노예를 위해서 노예 대중이 가스펠을 부르는 것에 솔로몬이 참여하는 지점, 노예가 가질 수 있는 몇안되는 원시적인 문화에 자신의 육체를 리듬에 맞춰서 거기 동조하는 지점에서 그는 단순한 관찰자가 아닌 ‘대중’의 일부분이 된다. 그것은, 어떤 새로운 가능성이, 맞닿아있으며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일말의 실마리로도 볼 수 있을까?)



하지만, 솔로몬은 돌아간다:역사에 따르면 그는 영원히 노예제에 의해서 고통받지 않으며, 돌아와서 그의 저서 ‘노예 12년’을 저술해야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는 이 실화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알고 있기에, 결말에 있어서 일말의 ‘희망’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노예 12년에서 가장 잔인한 장면은 바로 이 지점에서 등장한다:영화의 마지막, 노예의 이름인 플랫이 아닌 12년 만에 되찾은 이름인 솔로몬으로, 노예라는 물건에서 다시 인간으로 들어올려지는 지점에서 솔로몬의 여정은 끝이 난다. 하지만 앱스에게 학대받고 동시에 앱스의 아내에게 까지 학대받는 펫시가 솔로몬을 붙잡을 때, 솔로몬은 어떠한 것도 해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제 솔로몬은 북부와 남부, 인간이 사는 세계와 노예가 고통받는 세계의 이원화된 세계의 경계에 선 것이 아닌 완전히 북부-인간이 사는 세계의 주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카메라는 일말의 동정도 없이 냉정하게 그를 따라가며, 여전히 앱스에게 고통받을 노예들과 뒤에 남겨질 수 밖에 없기에 희망조차 잃어버린체 무너져버리는 펫시를 ‘배경’으로 다룰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솔로몬의 여정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것도 끝맺음을 맞이하지 못한’ 끔찍한 찝찝함을 느끼게 된다. 오딧세우스는 오딧세이아의 끝에서, 세계의 질서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솔로몬은 세계가 여전히 끔찍한 상태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음을 확인하고 도망치듯이 집으로 돌아올 뿐이다.


그렇기에 12년만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솔로몬이, 가족에게 미안하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가족’을 향한 것이 아니다:그것은 자신이 버리고 떠나온 모든 것을 향한 ‘사죄’인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솔로몬이 노예 12년을 써야 했었던 문제의식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안락한 삶을 살고 있지만, 여전히 이 세계의 이면에는 부조리에 의해서 고통받는 인간 미만의 인간들이 있다. 솔로몬이 무기력하게 돌아와서 그 광경을 잊지 못해 자신의 남은 생을 노예제 철폐에 헌신하였듯이, 우리 역시도 그런 되돌아봄과 우리의 세계가 아닌 그 밑바닥에 있는 인간 미만의 인간들의 세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영화는 간접적으로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노예 12년은 단순하게 인종차별과 노예제에 대한 역사적인 계몽과 고발에 대한 이야기를 뛰어넘어서, 현재의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어머니와 나는 같은 피를 나누어 가졌다기보단 어쩐지 똑같은 울음소리를

가진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김경주, ‘주저흔’


영화 만신은 나라무당이라 불리우는 만신 김금화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이며 독특한 형식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만신 김금화의 일생을 본인의 진술과 나레이터의 나레이션, 그리고 배우들의 재연을 통해서 재구성하는 영화 만신은 특이하게도 무당이라는 ‘미신’을 다큐멘터리라는 ‘사실’을 다루는 형식으로서 다루려 한다. 또한, 영화는 시간 순서대로의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그 과거의 재연과 현실 자료영상을 과거-현재-미래가 서로 교차한다:김금화가 내림굿을 받을 때, 그녀의 미래의 모습이 스쳐지나가듯이 그녀에게 예지를 내리며, 그녀가 굿을 한 자료영상은 그녀의 인생사와 함께 교차되어 등장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듯이 보여진다. 다큐멘터리라는, 정보의 보존과 전달이라는 영화 장르(http://ko.wikipedia.org/wiki/다큐멘터리_영화)를 영화 만신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서로 간섭하며 정보를 재구성하려 하고 있기에 다큐멘터리로서 만신을 바라본다면 대단히 생소하고 낯설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영화가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의 소재로서 무당을 바라보는, 샤머니즘을 바라보는 시각은 독특하다:이것이 종교인가? 혹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과학으로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초자연적인 세계의 단면을 드러내는 것일까? 영화는 이런 선정적인 서사에 빠지지 않는다. 차력쇼로서 무당이 작두를 타는 자료화면처럼, 영화는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이야기를 단순한 호기심 위주로 소모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는다. 만신이 기초하고 있는 서사는 무당과 굿에 대해 매료됨, 그리고 그것에 대한 향수이다:눈파란 서양인들이 만신 김금화에게 내림굿을 받는 장면에서 일반적인 한국인이라면 거부감을 느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째서 우리보다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그들이 미개하게 작두나 타는 무당에게 내림굿, 강신무를 받는 것일까? 영화는 그것이 사실임(진짜 무속적 신이 존재하는 것)을 강변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한때 우리에게도 있었고 서양인들에게도 있었으며, 동시에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내려오는 원시적인 믿음, 세계 어디에나 존재하는 근원적이며 원시적인 것에 대한 향수로서 샤머니즘, 무당을 다루어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샤머니즘의 미학에 따라서 영화의 서사를 배열한다:작두를 타는자, 귀신의 세계도 인간의 세계에도 머물 수 없는 무당이란 존재가 작두 위라는 아슬아슬한 시공간 위에서만 자신의 존재, 그리고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만신 내에서 인용한 민속학자의 견해를 재인용해보면, 무당의 신체야말로 과거(귀신들), 현재, 그리고 미래(예지몽 같은)가 한꺼번에 존재하는 시공간인 것이다. 그렇기에, 만신 김금화의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서로에게 간섭을 하면서 하나의 이야기를 구축하게 되는 것이다. 즉, 영화는 전반적으로 샤머니즘에서의 샤먼, 무당이라는 존재의 특징을 영화 전반의 구조에 적용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가 김금화라는 무당의 육신과 그녀의 인생내력을 통해서 구축하려하는 것은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을 그대로 경험한 전통문화 그 자체인 것이다.


이런 지점에서 김금화가 보여주는 전통 문화, 굿이라는 전통예술은 독특한 미학을 보여준다:예로부터 ‘신은 인간에게 내렸으되, (먹고살기 위해서는)재주는 네가 배워야한다’(노름마치에서 인용)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굿이란 단순하게 신내림과 작두타기로써만 행해지는 무언가가 아니다. 그것에는 형식이 존재하며, 또한 그 형식 와중에 무당은 관객(굿을 보는)들의 상황에 맞춰서 굿을 풀어나가야한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근대적 무대예술과 다르게 굿은 관객과의 참여, 그리고 극을 풀어나가는 무당의 역량 역시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경계가 불분명하고 자연스럽게 굿이라는 무대를 이끌어가야하는 김금화의 굿은, 어떤 의미에서 김금화라는 인물의 삶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굿을 할 때, 굿이 시작도 끝도 그 구분이 모호하다. 그녀는 일상속에서 자연스럽게 노래를 하며, 자연스럽게 노래를 끝마친다. 그리고 이는 무대의 개념이 모호하고 관객과 공연자 사이의 교류를 중요시여기는 전통예술 전반에 적용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전통예술을 예술로서 따로 보존하고자 했던 현대적 개념의 예술가들이 아닌 삶과 함께 예술을 하고, 그것으로 밥을 벌어먹고 살았고, 그것에 의해서 탄압받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함께 살기를 희망했던 광대, 기생, 판소리꾼, 한량, 사당패, 무당 등등의 이야기들은 결국은 전통예술이 겪었던 근현대사의 혼돈의 영향을 그대로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영화는 그런 분절적인 시공간의 구분인 과거-현재-미래를 무너뜨리고 김금화의 삶들을 서로를 교차시키면서 스스로 ‘굿’이 되기를 희망한다. 해방 이후, 혼돈스러웠던 정국에서부터 천대받았던 무당의 삶과 6.25 전쟁과 분단현실, 그리고 죽은 넋을 위로하는 굿이 교차한다. 그리고 무당이라는 이유로 이혼당했던 김금화가 시간이 지난 뒤에 전남편과 만나는 장면에서는 남편과 처가 만나는 형식의 대동굿의 영상을 겹쳐 보이게 한다. 미신 타파를 외치던 새마을 운동에 의해서 도망치듯이 굿을 하고 굿으로 쌓인 울분을 굿으로 풀어내며, 굿을 하던 중에 기독교에게 까지 박해를 받던 이야기까지 굿은 이 모든 주요한 사건의 핵심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영화는 굿이 행해지는 시공간을 통해서 이런식으로 영화는 한 맺힌 과거와 현재, 그러한 앙금들이 삭아서 가라앉은 미래(동시에 현재)를 하나의 시공간에 넣음으로서, 이 거대한 타임라인을 하나의 덩어리로 뭉치려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영화는 역사의 질곡을 한데 모아서 그 상처를 치유하려는 씻김굿을 내리고자 한다. 그렇기에,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하게 김금화 라는 만신, 무당의 이야기가 아니다:영화 만신은 하나의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한다.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렸고, 외면하였지만 다시금 되찾고자 하는 것을 한 사람의 인생의 끄트머리에서 다시금 재조명하고 그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자 하는 초혼의 과정인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의미에서 만신은 다큐멘터리의 경계 내에서 머물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알렝 레네의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다룬 다큐멘터리 밤과 안개나 범죄에 있어서 진실을 밝혀내고자 영화외적이며 사회적인 시도를 보였던 에롤 모리스의 가늘고 푸른선과 같이, 다큐멘터리가 다루는 어떤 사건이란 단순하게 객관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것만으로 부족할 때가 있다. 파트리시오 구즈만 감독의 다큐멘터리 ‘빛을 향한 그리움’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말이다:다큐멘터리 영화가 다루려고 하는 것은 엄밀한 사실의 전달을 넘어서 그 시대나 사건, 현상, 상황이 가졌던 어떤 특징 그 자체라고도 볼 수 있다. 빛을 향한 그리움에서, 천문학과 민주주의를 향한 사람들의 노력과 고난들, 그리고 아타카마 사막 어딘가에 묻혀있을 자신들의 가족을 찾는 사람들의 형용할 수 없는 슬픔까지 다뤘던 것처럼 말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칠레 천문학과 민주주의를 다루는 것이 아닌 사실의 전달이 아닌 별과 사람, 천문학과 민주주의, 그리고 우리와 같이 질곡으로 가득찬 칠레 근현대사 그 자체인 것이다. 그렇기에 무당과 그녀가 살았던 삶의 질곡을 굿이라는 시공간을 통해서 과거-현재-미래의 틀을 부수고 그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고 화해하고자 하는 것은 그녀가 살아왔던 삶과 전통 예술을 다뤄내는 방식으로 있어서 적합한 방식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만신의 마지막은 애잔하다:무당을 위한 도구들을 만들기 위해서 어린 김금화가 쇠를 모으러 마을을 돌아다닌다. 그리고 여기에는 단순히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미래의 자신들, 스쳐지나갔던 사람들, 심지어는 자기 자신과 카메라 프레임 바깥의 스태프들까지 쇠를 모으는데 참여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스스로 마지막에 굿이 되기를 선택한다:단지 김금화의 삶을 메타 시공간적으로 다뤄내는 것이 아닌, 영화 스스로도 프레임 바깥이 아닌 프레임 안으로 걸어들어오면서 모두가 맞닿아있는, 죽은자 산자가 어울려 노는 굿판에 걸맞게 프레임 내부와 외부의 모두가 만나고 화해하는 굿의 미학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미학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분절되어있는 시공간이 굿 이라는 예외적인 시공간을 통해서 만났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일뿐이며 그것이 일반적인 상황이 될 수 없다. 그렇기에 배우들과 김금화 본인 모두 어린 김금화를 남겨둔체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진다. 그 애잔함, 신명나게 놀고 화해하기 위해서 모두 모였지만 다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라는 것, 한 인물의 삶의 끄트머리에서 그것들을 다 모아서 다시 돌아보는 아련한 슬픔은 어쩌면 김금화 본인과 굿이라는 장르를 떠나서 전통예술이라는 미학 전체로 확대해서 볼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멸종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종의 울음소리가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나는 멸종하지 않을 것이다

-김경주, ‘우주로 날아가는 방 5'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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