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그래비티 스포일러도 있습니다.



마진콜로 데뷔한 JC 챈더 감독의 신작이자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 아니 '단독 출연'(......)의 영화 올 이즈 로스트는 그래비티와 비슷한 장르인 재난 생존물이다. 바다에서 홀홀단신으로 포류당한 남자가 살아남기 위해서 분투한다는 정석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듯한 올 이즈 로스트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관객들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영화는 단 한명의 인물로, 독백도 대사도 배경이야기에 심지어 관객이 호응할만한 드라마조차 없는 없는 뼈대만 남은 앙상한 구조로 전개한다. 그렇기에 올 이즈 로스트는 재난 영화 장르의 공식을 거부하면서 새롭고 기묘하며 독특한 경지에 도달한다. 


재난-생존의 코드가 대중문화의 큰 흐름으로 자리잡게 된 데는 현재의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극복할 수 없는 상황들과 그 속에서 살아남기라는 시대적 특수성이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대중문화에 있어서 생존 코드는 상당히 기묘한 전제를 내포하고 있다;상황이 해결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재난 속에 빠진 사람에게 이야기는 '그럼에도 살아라'라고 명령한다. 물론, '그럼에도 살아라'라고 선언하는 이 정언명령이 전적으로 틀렸다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재난-생존의 코드가 인간의 모든 것을 빼앗는 상황을 만들어내면서도, 마지막에 와서는 삶을 긍정하고 '다시 돌아가서 살아라'라고 외치는 것일까? 


그런 기묘한 지점들은 분명 존재한다. 그래비티를 예로 들어보자. 스톤 박사는 친구도 가족도 없이, 자식을 잃은 뒤로는 지구의 희미한 중력에 사로잡혀 부유하는 인간형이다. 그런 그녀가 재난을 이겨내고 다시 인간과 지구 중력이라는 세계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동인이 되는 것은 바로 코왈스키의 존재이다. 물론, 그런 중력에 의해서 다시 지구로 안착하는 과정이 무중력을 중력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닌, '숨어있는 중력의 재발견'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영화 그래비티는 인간의 영성을 긍정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영성을 재확인하고 스톤이 재탄생함에 있어서 코왈스키의 묘사는 대단히 적기 때문에, 어찌보면 감독이 인위적으로 이야기에 삽입하여 만들어낸 극중 장치 쪽에 가깝다는 것 역시도 부정할 수 없다. 즉, 스톤의 재탄생과 귀환은 개연성에 따라서 전개되기 보다는 감독에 의해 의도된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래비티가 그렇다고 나쁜 영화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위와 같은 지점 때문에 그래비티에는 그러한 한계가 있다.(또한 개인적으로 그래비티보다는 다른 방향으로 나간 칠드런 오브 맨이 훨씬 더 좋다고 생각한다) 재밌는 점은, 올 이즈 로스트가 도달하는 지점들은 그러한 지점에서 멀리떨어졌거나, 혹은 정반대라고 볼 수 있는 위치라는 것이다.


올 이즈 로스트는 주인공(심지어 케릭터의 이름조차 없다. 크레딧에서는 Our Man으로 나옴)에게서 모든 것을 거세한다;그의 삶, 가족, 삶의 목표, 살아가야할 동력, 외부적 요인에서 심지어는 그의 언어(영화에서 대사는 총 4번 밖에 나오지 않는다)까지. 그렇기에 이 남자는 전통적인 재난-생존물과 다르게 살아서 돌아가야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서 돌아가야할 이유가 없어짐으로 인해서, 영화는 역설적이게도 온전히 생존을 위한 그의 행위만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로버트 레드포드라는 대배우의 연륜이 빛을 발한다. 기본적으로 대사도 없이 오직 행동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해야하는, 기본적으로 출중한 연기력을 밑바탕에 깔아야지 가능한 배역을 로버트 레드포드는 훌륭하게 소화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로버트 레드포드가 보여주는 노년의 완숙한 이미지는 영화를 독특한 방향으로 이끈다. 만약 이 남자의 역활을 젊은 배우나 마초 이미지의 배우가 맡았을 때, 젊음에서 나오는 생명력, 강인함에 의해서 영화는 어떤 자연 대 인간의 대립구도, 그 속에서 살아남는 인간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조차도 거부한다. 레드포드의 연기는 그에게 닥친 모든 재난을 안으로 삭히고 가라앉힌 뒤에 사태에 대처하는 완숙함을 보여준다. 영화 내내 이 남자는 전혀 다급하지도, 허둥대지도 않는다. 그리고 상황에 능숙하게 대처하면서 사태를 해쳐나가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상황과 맥락의 거세, 그리고 레드포드의 완숙한 노년의 이미지와 출중한 연기가 맞물려 들어감으로써, 영화는 전적으로 '삶의 은유'로서 기능하게 된다:재난이 닥쳐오고, 이 재난을 해쳐나가는 것은 오로지 나 혼자 뿐이다. 거기에는 외부적인 요인(살라고 소리치는 명령)은 사라지고, 살아남는 것이 당연한 행위가 된다. 그렇기에 올 이즈 로스트가 지극히 뼈대만 남긴 묘사를 통해 도달하는 '생존'의 명제는 다른 영화들보다 더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하지만, 동시에 올 이즈 로스트는 혼자만으로 살아갈 수 없음을 강력하게 설파한다. 이 영화에서 재밌는 점은 주인공을 더욱더 큰 위협으로 몰고가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적'인 실수들(처음 잠을 자다 일어나는 시퀸스, 폭풍우에 머리를 부딪혀서 기절하거나, 자다가 배를 놓치거나, 혹은 불로 자기가 여기 있음을 알리려다가 자기 구명보트에 불을 지른다던가)이라는 것이다. 이는 역경에 대처하는 그의 노련함이나 완숙함과는 무관하게 그의 상황을 옥죄어온다. 그렇기에 전적으로 혼자인 그가 재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타인의 존재(구조)를 간절하게 원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는 타인의 존재에 대한 감수성을 드러내는 지점이 아니다. 오히려 육본의를 꺼내들 때 그 속에서 카드가 꽂혀있는 것을 본 그가 카드를 열어보려다 마는 것에서 드러나듯이 영화는 그런 드라마를 거부하며, 뼈대만 남아있으며 앙상한 이야기를 통해 생존과 살아가는데 있어 타인이 절실하며 필요한 지점들을 드러낸다.


감독은 이 뼈대만 남은 이야기를 지루하지 않게, 오히려 몰입감 있게 그려낸다. 마진콜에서 별다른 스펙타클 없이 부드럽게 진행되는 일련의 사건들을 몰입감 있게 다루었지만, 이번 올 이즈 로스트는 그러한 장점들과 함께 독특한 영상대비를 보여준다. 영화는 바다에 있어서 기묘할 정도로 정적인 아름다움을 부여하는데, 오프닝 시퀸스에서 드러나는 컨테이너의 모습(주인공의 요트를 박살 낸), 요트가 침몰해서 사라질때의 바다의 모습, 구명보트에 실려서 표류할 때 구명보트 밑에서 펼쳐지는 물고기들의 소우주(작은 물고기-큰 물고기-그리고 상어)까지. 어떤 점에서 영화는 자연을 절대적 타자로 상정하고 그의 모습과 대비시킴으로서 그가 인간세계로 돌아와야하는 것을 역설한다고도 볼 수 있다.


올 이즈 로스트는 그렇기에 독특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물론 이것이 전적으로 새로운 작품이며, 재난-생존물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올 이즈 로스트는 그 자체로도 훌륭한 영화이며 재난-생존 영화를 이야기할 때 꼭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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