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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어머니와 나는 같은 피를 나누어 가졌다기보단 어쩐지 똑같은 울음소리를

가진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김경주, ‘주저흔’


영화 만신은 나라무당이라 불리우는 만신 김금화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이며 독특한 형식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만신 김금화의 일생을 본인의 진술과 나레이터의 나레이션, 그리고 배우들의 재연을 통해서 재구성하는 영화 만신은 특이하게도 무당이라는 ‘미신’을 다큐멘터리라는 ‘사실’을 다루는 형식으로서 다루려 한다. 또한, 영화는 시간 순서대로의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그 과거의 재연과 현실 자료영상을 과거-현재-미래가 서로 교차한다:김금화가 내림굿을 받을 때, 그녀의 미래의 모습이 스쳐지나가듯이 그녀에게 예지를 내리며, 그녀가 굿을 한 자료영상은 그녀의 인생사와 함께 교차되어 등장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듯이 보여진다. 다큐멘터리라는, 정보의 보존과 전달이라는 영화 장르(http://ko.wikipedia.org/wiki/다큐멘터리_영화)를 영화 만신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서로 간섭하며 정보를 재구성하려 하고 있기에 다큐멘터리로서 만신을 바라본다면 대단히 생소하고 낯설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영화가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의 소재로서 무당을 바라보는, 샤머니즘을 바라보는 시각은 독특하다:이것이 종교인가? 혹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과학으로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초자연적인 세계의 단면을 드러내는 것일까? 영화는 이런 선정적인 서사에 빠지지 않는다. 차력쇼로서 무당이 작두를 타는 자료화면처럼, 영화는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이야기를 단순한 호기심 위주로 소모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는다. 만신이 기초하고 있는 서사는 무당과 굿에 대해 매료됨, 그리고 그것에 대한 향수이다:눈파란 서양인들이 만신 김금화에게 내림굿을 받는 장면에서 일반적인 한국인이라면 거부감을 느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째서 우리보다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그들이 미개하게 작두나 타는 무당에게 내림굿, 강신무를 받는 것일까? 영화는 그것이 사실임(진짜 무속적 신이 존재하는 것)을 강변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한때 우리에게도 있었고 서양인들에게도 있었으며, 동시에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내려오는 원시적인 믿음, 세계 어디에나 존재하는 근원적이며 원시적인 것에 대한 향수로서 샤머니즘, 무당을 다루어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샤머니즘의 미학에 따라서 영화의 서사를 배열한다:작두를 타는자, 귀신의 세계도 인간의 세계에도 머물 수 없는 무당이란 존재가 작두 위라는 아슬아슬한 시공간 위에서만 자신의 존재, 그리고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만신 내에서 인용한 민속학자의 견해를 재인용해보면, 무당의 신체야말로 과거(귀신들), 현재, 그리고 미래(예지몽 같은)가 한꺼번에 존재하는 시공간인 것이다. 그렇기에, 만신 김금화의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서로에게 간섭을 하면서 하나의 이야기를 구축하게 되는 것이다. 즉, 영화는 전반적으로 샤머니즘에서의 샤먼, 무당이라는 존재의 특징을 영화 전반의 구조에 적용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가 김금화라는 무당의 육신과 그녀의 인생내력을 통해서 구축하려하는 것은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을 그대로 경험한 전통문화 그 자체인 것이다.


이런 지점에서 김금화가 보여주는 전통 문화, 굿이라는 전통예술은 독특한 미학을 보여준다:예로부터 ‘신은 인간에게 내렸으되, (먹고살기 위해서는)재주는 네가 배워야한다’(노름마치에서 인용)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굿이란 단순하게 신내림과 작두타기로써만 행해지는 무언가가 아니다. 그것에는 형식이 존재하며, 또한 그 형식 와중에 무당은 관객(굿을 보는)들의 상황에 맞춰서 굿을 풀어나가야한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근대적 무대예술과 다르게 굿은 관객과의 참여, 그리고 극을 풀어나가는 무당의 역량 역시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경계가 불분명하고 자연스럽게 굿이라는 무대를 이끌어가야하는 김금화의 굿은, 어떤 의미에서 김금화라는 인물의 삶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굿을 할 때, 굿이 시작도 끝도 그 구분이 모호하다. 그녀는 일상속에서 자연스럽게 노래를 하며, 자연스럽게 노래를 끝마친다. 그리고 이는 무대의 개념이 모호하고 관객과 공연자 사이의 교류를 중요시여기는 전통예술 전반에 적용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전통예술을 예술로서 따로 보존하고자 했던 현대적 개념의 예술가들이 아닌 삶과 함께 예술을 하고, 그것으로 밥을 벌어먹고 살았고, 그것에 의해서 탄압받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함께 살기를 희망했던 광대, 기생, 판소리꾼, 한량, 사당패, 무당 등등의 이야기들은 결국은 전통예술이 겪었던 근현대사의 혼돈의 영향을 그대로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영화는 그런 분절적인 시공간의 구분인 과거-현재-미래를 무너뜨리고 김금화의 삶들을 서로를 교차시키면서 스스로 ‘굿’이 되기를 희망한다. 해방 이후, 혼돈스러웠던 정국에서부터 천대받았던 무당의 삶과 6.25 전쟁과 분단현실, 그리고 죽은 넋을 위로하는 굿이 교차한다. 그리고 무당이라는 이유로 이혼당했던 김금화가 시간이 지난 뒤에 전남편과 만나는 장면에서는 남편과 처가 만나는 형식의 대동굿의 영상을 겹쳐 보이게 한다. 미신 타파를 외치던 새마을 운동에 의해서 도망치듯이 굿을 하고 굿으로 쌓인 울분을 굿으로 풀어내며, 굿을 하던 중에 기독교에게 까지 박해를 받던 이야기까지 굿은 이 모든 주요한 사건의 핵심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영화는 굿이 행해지는 시공간을 통해서 이런식으로 영화는 한 맺힌 과거와 현재, 그러한 앙금들이 삭아서 가라앉은 미래(동시에 현재)를 하나의 시공간에 넣음으로서, 이 거대한 타임라인을 하나의 덩어리로 뭉치려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영화는 역사의 질곡을 한데 모아서 그 상처를 치유하려는 씻김굿을 내리고자 한다. 그렇기에,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하게 김금화 라는 만신, 무당의 이야기가 아니다:영화 만신은 하나의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한다.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렸고, 외면하였지만 다시금 되찾고자 하는 것을 한 사람의 인생의 끄트머리에서 다시금 재조명하고 그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자 하는 초혼의 과정인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의미에서 만신은 다큐멘터리의 경계 내에서 머물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알렝 레네의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다룬 다큐멘터리 밤과 안개나 범죄에 있어서 진실을 밝혀내고자 영화외적이며 사회적인 시도를 보였던 에롤 모리스의 가늘고 푸른선과 같이, 다큐멘터리가 다루는 어떤 사건이란 단순하게 객관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것만으로 부족할 때가 있다. 파트리시오 구즈만 감독의 다큐멘터리 ‘빛을 향한 그리움’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말이다:다큐멘터리 영화가 다루려고 하는 것은 엄밀한 사실의 전달을 넘어서 그 시대나 사건, 현상, 상황이 가졌던 어떤 특징 그 자체라고도 볼 수 있다. 빛을 향한 그리움에서, 천문학과 민주주의를 향한 사람들의 노력과 고난들, 그리고 아타카마 사막 어딘가에 묻혀있을 자신들의 가족을 찾는 사람들의 형용할 수 없는 슬픔까지 다뤘던 것처럼 말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칠레 천문학과 민주주의를 다루는 것이 아닌 사실의 전달이 아닌 별과 사람, 천문학과 민주주의, 그리고 우리와 같이 질곡으로 가득찬 칠레 근현대사 그 자체인 것이다. 그렇기에 무당과 그녀가 살았던 삶의 질곡을 굿이라는 시공간을 통해서 과거-현재-미래의 틀을 부수고 그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고 화해하고자 하는 것은 그녀가 살아왔던 삶과 전통 예술을 다뤄내는 방식으로 있어서 적합한 방식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만신의 마지막은 애잔하다:무당을 위한 도구들을 만들기 위해서 어린 김금화가 쇠를 모으러 마을을 돌아다닌다. 그리고 여기에는 단순히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미래의 자신들, 스쳐지나갔던 사람들, 심지어는 자기 자신과 카메라 프레임 바깥의 스태프들까지 쇠를 모으는데 참여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스스로 마지막에 굿이 되기를 선택한다:단지 김금화의 삶을 메타 시공간적으로 다뤄내는 것이 아닌, 영화 스스로도 프레임 바깥이 아닌 프레임 안으로 걸어들어오면서 모두가 맞닿아있는, 죽은자 산자가 어울려 노는 굿판에 걸맞게 프레임 내부와 외부의 모두가 만나고 화해하는 굿의 미학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미학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분절되어있는 시공간이 굿 이라는 예외적인 시공간을 통해서 만났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일뿐이며 그것이 일반적인 상황이 될 수 없다. 그렇기에 배우들과 김금화 본인 모두 어린 김금화를 남겨둔체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진다. 그 애잔함, 신명나게 놀고 화해하기 위해서 모두 모였지만 다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라는 것, 한 인물의 삶의 끄트머리에서 그것들을 다 모아서 다시 돌아보는 아련한 슬픔은 어쩌면 김금화 본인과 굿이라는 장르를 떠나서 전통예술이라는 미학 전체로 확대해서 볼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멸종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종의 울음소리가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나는 멸종하지 않을 것이다

-김경주, ‘우주로 날아가는 방 5' 중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https://medium.com/p/c277ee49fa33 를 블로그에 맞게 편집한 글입니다.



고스트 앤 다크니스(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7746) 라는 영화를 아는가? 여기서 발 킬머는 마이클 더글라스와 함께 아프리카 오지의 낯선땅에서 철도 공사를 방해하는 차보의 전설적인 식인 사자 ‘고스트’와 ‘다크니스’를 사냥해서 제거하려고 한다. 발 킬머는 고스트를 사냥하는데 성공하지만(다크니스가 먼저 사냥당했을 수도 있다, 본인으로서도 기억이 가물가물한지라) 남은 사자가 마이클 더글라스를 물어죽여버리고, 발 킬머는 여기로 오고 있는 아내와 아이가 남은 사자에게 물려 죽는 악몽을 꾼다. 결국 두려움과 마주한 발 킬머는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남은 사자를 사냥하는데 성공하고, 자신의 아내와 아이를 어떠한 위협없이 아프리카 땅에서 맞이한다. 


사실, 영화 자체의 재미는 그냥저냥이었던 고스트 앤 다크니스에 대해서 엉뚱한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과연 식인 사자 고스트와 다크니스는 동물이었을까, 아니면 괴물이었을까? 상당히 기묘한 질문이다. 고스트와 다크니스는, 명백하게도, 사자들이다. 그들은 현대적인 영화에서 등장하는 특수효과로 만들어진 상상의 동물이나 B급 호러 영화의 하위장르로서의 크리처물들에 나오는 괴물들과는 명백하게 다르며, 실화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극중에서 수백명을 물어죽이고, 자신의 배우자를 죽였기에 나도 네녀석의 동료와 배우자를 물어죽이고 복수하겠다 라는 공포로 당당하게 도발하고 선언하는 이 사자들을 ‘동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부분은 상당히 미묘하다. 그것을 뚜렷하게 구분하기 위해서는 먼저 동물과 괴물의 차이를 분명하게 나누어야 할 것이다.


…제물은 동물이라는 이유 때문에 벌써 신성했다. 신성이란 폭력과 관련된 저주를 거침없이 표현하는 것을 말하는데, 동물은 저주를 주저없이 선동하며 폭력을 포기하지 않으니 신성한 존재였다. 원시인들은 동물도 기본적 규칙을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으며, 폭력과 충동 자체가 이미 규칙의 위반임을 모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잘 알면서도 동물은 근본적으로 규칙을 위반하는, 다시 말해 의식적이고도 절대적으로 그것을 위반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바타이유, 에로티즘.


바타이유는 인간이 ‘노동’이라는 조직화 방식으로서 삶을 살아가기로 선택한 그 시점에서부터, 인간은 비생산적인 성에 대한 충동이나 파괴적인 폭력을 금기로서 금지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하지만 성에 대한 금기와 폭력에 대한 금기로 금지되었어도, 인간의 어둡고 은밀한 욕망은 여전히 존재할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은 특별한 상황에서의 ‘금기의 위반’을 통해서 분출된다고 보았다:살해에 대한 금기는 전세계 공통이지만, 그것이 전쟁 등에서 살해를 인정하는 지점, 즉 전쟁에서의 살해를 속죄하는 과정을 통해서 금기의 위반을 인정하는 지점에서 말이다.(바타이유는 금기는 ‘위반되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하기 까지 하였다) 하지만 동물은 다르다:동물은 그러한 금기가 존재하지 않으며, 폭력(물리적/물질적의미의 폭력이 아닌 무질서한, 질서를 파괴하는 의미에서의 폭력)이란 그들의 삶의 방법론 그 자체였다. 그들은 아무렇게나 먹이를 사냥하고 죽이고 먹고 교미를 한다. 인간이 그런 행위들을 했을 경우, 금기를 위반했다는 원죄의식에 시달릴 수 밖에 없는 지점에서 동물들은 어떠한 거리낌도 없이 자유로운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금기를 자유롭게 위반하는 그들을 신성시 하지만, 그들을 두려워할 수 밖에 없다: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질서를 세웠고, 그것을 통해서 살아간다.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인간 내부에 내재된 폭력성(섹스를 향한 파괴적 충동과 타자를 죽이려는 살해충동)이며, 인간은 동물과도 같이 살 수 없다는 지점에 동물의 폭력은 경외의 대상인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괴물은 거기서 탄생한다:그것은 인간 내부의 폭력성을 동물의 형태, 폭력을 행사하는데 있어서 거리낌이 없는 형태로 결합된 것이다. 즉 괴물이란 동물과 인간의 기묘한 형태의 결합인 것이다. 스핑크스를 예로 들어보자:머리는 사람이며, 사자의 몸통, 조류의 날개를 단 이 기묘한 괴물은 문을 지키며 여행자에게 수수깨끼를 던진다. 그리고 답을 맞추지 못한 자를 잡아먹는다. 만약 동물이었다면, 그들이 이런 양식화된 행위(수수깨끼를 던지고, 틀리는 자만을 잡아먹는다)를 했을까? 이 괴물은 동물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양식화 되어있으며 스핑크스가 행하는 폭력은 영웅(오이디푸스)이 넘어서야하는 통과의례이자 금기를 위반하는 존재(사람을 잡아먹는)이며 동시에 살해-식인의 폭력에 대한 공포를 드러내는 존재이다. 물론, 다양한 동물들의 결합의 결과물들로서의 괴물도 존재하며, 이들이 드러내는 폭력과 공포는 좀더 직관적이다:미궁 속에 사는 반인반우 미노타우로스, 수십개의 머리를 가진 히드라, 머리 셋 달린 마견 케르베로스 등등. 



그로테스크한 것은 감각적으로 표상할 수 있는 것을 최고도로 고양시킨 것이다…이러한 의미에서 그로테스크한 형상물들은 동시에 한 시대의 넘쳐흐르는 기운의 표현이다….물론 그로테스크한 것의 원동력을 두고 보면 이와는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점이 있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퇴폐적인 시대나 병적인 두뇌를 가진 자들도 그로테스크한 형상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이 경우 그로테스크한 것은 퇴폐적 시대와 병적 개인들에게는 세계와 삶의 문제들이 해결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에 대한 충격적인 반작용의 표현이다…이 두경향 가운데 어느 경향이 창조적 추진력으로서의 그로테스크한 판타지의 배후에 있는가 하는 것은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에두아르트 푹스, 당조의 조형예술;발터 벤야민, 수집가이자 역사가 에두아르트 푹스에서 재인용.


하지만 과거의 신화시대의 괴물들과 현대의 괴물들은 다른 형식으로 만들어진다. 과거의 괴물들이 동물과 인간의 결합을 통해서 인간이 갖고 있는 동물성을 이미지화 시키는데 주력했다면 현대의 괴물들은 산업화된 대중문화인 영화와 특수효과, 분장이 일반화된 세계에서 그로테스크함을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졌다. 괴물들은 이제 단순한 인간과 동물의 결합을 뛰어넘어서, 기능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더이상, 괴물은 동물의 형태에 얽메일 필요가 없어졌다.새로운 특수효과 기술의 등장은 그들의 모티브이자 원형인 동물로부터 괴물을 해방시키면서도 동시에 '사실적'인 괴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괴물은, 점점 더 순수한 '폭력'의 형태에 가까워졌다:에두아르트 푹스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꿈틀거리는 시대의 에너지가 극단화된 괴물인 것이다. 그리고 괴물의 미학에는, 인간이 느끼는 폭력에 대한 공포가 폭력이라는 에너지가 꿈틀거리는 그로테스크의 형태로 구체화되며, 그것은 괴물들의 신체나 특징적인 '기능적 기믹'의 형태로 자신의 특징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다시 고스트 앤 다크니스로 돌아와보자:이 점에서 명백히도, 고스트와 다크니스는 괴물이라고 볼 수 있다. 철길이라는 서구의 문명이 아프리카라는 미개한 검은대륙을 계몽시키고자 할 때, 최초이자 최후의 장애물로서 유령Ghost과 어둠Darkness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서구문명의 마지막 저항세력으로서, 이성과 대영제국의 최전선에서 부딪히게 되며, 발킬머가 사냥한 것은 대화나 타협이나 계몽의 대상이 아닌 이성 너머에 존재하는 미개한 야만의 신화이자 폭력을 행사하는 최후의 괴물인 것이다. 물론 그들은 현대 영화나 특수효과적인 의미에서 괴물은 아니다: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현대와 근대, 혹은 그 너머의 고대적인 의미에서의 괴물이 서로 맞닿아 있는 무언가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에일리언.=>기능적인 아름다움과 그로테스크함. 성기의 은유. 좀더 살펴보자면 대단히 모순적인 괴물-비정상적인 호전성, 이해불가능한 생식 방식, 기묘한 형태의 공격방식과 자기 모순(산성 피)//하지만 아름답다, 왜? 디자인이 잘되었다 등등. 괴물의 미학이란, 인간을 기능적으로 괴롭히기 위한 그로테스크 성에서 시작된다->그것은 인간의 폭력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 그것들 모두 인간의 ‘은유’으로부터 출발하였다/동시에 그 존재가 영화내 서사에서 기능하는 것도 하나의 인간을 드러내는 지표이다:에일리언 2, 나쁜 엄마 대 착한 엄마의 구도. 썅년과 자식을 지키지 못한 어머니의 사투. 여성성의 이중성? 인간과 폭력 그 자체의 대결.


"그것은 완벽한 생명체다. 전혀 도덕적 거리낌없이 순수한 살육을 할 수 있으며, 신체적으로도 완벽히 전투형인 생명체이다. 인간이 그 생명체와 정면으로 맞서서 승리할 가능성은 제로다. 그리고 나는 그 순수한 잔인성을 존경한다."

- 에일리언 


괴물에 대한 두가지 예시를 들어보겠다. 현대적 괴물의 직관적이고 유명한 사례는 에일리언의 제노모프가 있다. HR 기거가 디자인 초안을 맡은 제노모프의 모습은 남성의 성기 형태를 연상케하는 머리를 한 끈적거리는 모습을 한 불쾌한 모양새다. 그리고 이 불쾌한 괴물이 나오는 에일리언은 SF 영화와 괴물영화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악명높은 디자인들(이중턱, 뼈가 겉으로 튀어나온 듯한 외골격 스러운 몸매들, 강산성 피 등등)과 별개로 에일리언에서 이 제노모프라는 괴물이 갖는 독특한 지점은 바로 독특한 생식 방식과 이해불가능할 정도의 호전성이다:숙주의 몸에 들어가서 숙주의 DNA를 바탕으로 새로운 특성과 형태를 가진 괴물이 되는 번거로운 지점이나(물론, 설정의 사실성에 테클을 거는 것이 아니다;하지만 우리가 제노모프의 번식에 대한 첫인상이란, 도대체 저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이유가 뭘까? 이다), 제노모프의 호전성이란 어떻게 소통조차 되지 않은 사악하고 지능적인 존재로서의 제노모프를 상정하고 있는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제노모프의 번식 행위는, 어떤 '필터링'의 과정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제노모프의 번식 행위란 숙주가 되는 대상 생명체로부터 폭력만을 걸러내기 위해서 숙주에게로 잠입한 뒤에(페이스 허거) 그 숙주의 폭력을 응축하여 밖으로 튀어나온다(체스트 버스터) 제노모프의 그로테스크함은, 그런 생식과정을 통해서 폭력을 응축해서 배출한다는데 있으며, 그렇기에 제노모프는 각각의 숙주의 모습에 근거하고 있지만 숙주와는 동떨어져있는, 꿈틀거리는 폭력의 모습으로서 그로테스크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지점에서 제노모프의 미학은 기묘한 지점을 만들어낸다:2편을 예로 들어보자.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자식을 잃은 어머니 리플리는 어머니를 잃은 소녀를 구하기 위해서 퀸 에일리언과 파워로더를 타고 사투를 벌인다. 이 과정에서 리플리는 퀸 에일리언을 썅년Bitch이라 부른다:물론 리플리의 욕설이 문자 의미 그대로 퀸 에일리언이 여성이기 때문에 어울리는 욕설이기도 하나, 여기서는 고아인 뉴트를 지키고 자신의 자식을 지키지 못했던 어머니 리플리와 제노모프의 어머니로서 자신의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자식들의 복수를 위해서 싸우는 퀸 에일리언의 모습이 '여성성'이라는 공통분모 아래서 서로 빛과 어둠과 같이 극명하게 분리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노모프의 생식과정이 대상의 폭력성을 응축시켜서 배출시킨다고 본다면, 퀸 에일리언이야말로 리플리의 분신같은 존재이자, 모성이 갖고 있는 폭력성과 어둠을 응축시켜놓은 존재라고 볼 수 있다(모성은 항상 아름다운 무언가가 아니다:봉준호 감독의 마더는 그런 지점에서 대단히 날카로운 지점을 만들어낸다)


더 씽의 경우는 조금 독특하다:더 씽의 문제삼고 있는 것은 '폭력의 전염'의 문제이다. 물론 제노모프 역시 그런 폭력의 전염을 시공간적으로 형상화시킨다. 그들은 어떻게 만들었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는 형태로 공간을 자신의 형태로 '전염'시키고는, 그 자리가 우리의 영토이다 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에일리언 2에서처럼, 그 공간에서 제노모프들은 일방적으로 해병대를 학살하면서 그 폭력이 단순히 상징적인 공간이 아님을 드러낸다. 하지만 더 씽에서의 폭력의 전염은 신체강탈자의 문법을 변용하면서 출발한다:우리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우리가 아닌, 원래의 존재들을 감금하고는 원래의 존재들인척 하면서 음모를 주도하는 신체강탈자들의 클리셰는 1960년대 '우리 주변에 숨어있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공포'를 드러내는데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더 씽은 신체강탈자의 클리셰나 모호하고 도회적인(타인에 대한) 공포에 초점을 맞추는게 아니다:더 씽이 드러내는 폭력에 대한 공포는 원초적이다. 더 씽의 신체강탈자들은 전혀 신사적이지 않다. 그들의 개종방식은 그 자체로 폭력이며, 기괴한 형태로의 신체의 융합과 뒤틀림을 유발하며 그 자체가 유쾌하지도 않을 뿐더러 고통스럽게 묘사함으로서 그로테스크한 생명력을 발산한다:주인공인 맥크레디는 괴물의 세포 하나 하나가 모두 하나의 생명체로서 살아있다는 가설을 세우고는 혈액 검사법(피를 뽑아서 불을 붙여보는 것)을 통해서 괴물을 가려낼 수 있다고 보는 지점에서 그들은 세포 하나 하나가 살아있는 '폭력'의 화신 그 자체인 것이다.


하지만 더 씽의 폭력이 더 무서운 것은, 기저에 숨겨진 기묘한 신체의 변형과 파괴의 표면은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더 씽에서 괴물이 인간의 모습을 할 수 있으며 심지어 개종자조차도 자신이 개종되었을 사실을 모를 수도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는 시점은 이미 '늦은' 상태다:그들에게는 개종자들을 찾아낼 방법도, 전염을 격리시켜서 확산을 방지할 수 있는 방법조차도 남아있지 않다. 그들에게 있어 남은 것이란 오로지 모두가 멸망할 것이라는 숙명적인 종말 뿐이며, 이 끔찍한 종말과 폭력의 변주곡에서 심지어 주인공인 멕크레디마저도 의심의 대상이 된다(그는 추락한 헬기에서 겨우 살아남았다:과연 그는 살아남는데 성공한 것일까, 아니면 그들중 하나일까?) 인간 내부의 꿈틀거리는 폭력의 그로테스크함과 서로를 불신하며 파멸을 향해서 착실히 나아가는 형태의 종말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더 씽은 괴물이라는 존재의 폭력성과 인간의 근원적인 공포(인간 내면에 숨어있는 폭력)를 다룬 걸작이라 칭송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씽 리메이크-프리퀼 작품의 경우에는 대부분 더 씽 원판을 따르지만, 세밀하지만 아주 중요한 지점에서 차이가 난다:더 씽의 원판의 경우, 주인공인 멕크레디 조차도 믿을 수 없는 인물로 설정함으로서 인간 불신을 향한 파국은 더욱 깊어진다. 그러나 리메이크-프리퀼 작의 경우에는 믿을 수 있는 구심점적인 인물을 설정하고, 동시에 우리가 그녀의 동선을 모두 파악할 수 있었고, 그녀가 감염으로부터 안전하다는 사실을 확답받는 인물이라는 지점을 관객들에게 확보해주면서 안전장치를 만든다. 또한 원판이 세포 하나 하나가 폭력에 가득찬 존재를 가려내는데 원시적인 폭력, 불이라는 기제를 사용하여 그것을 가려내고자 한데 반해, 리메이크-프리퀼은 치아의 충전물, 즉 인공적인 요소가 존재하는가의 유무로 괴물과 인간을 분리하려고 한다. 많은 지점에서 리메이크는 원판의 밑도 끝도 없는 공포들을 뒤집어서 안전한 지점으로 만들면서, 영화를 원판에 비해서 안전한 공포영화가 되었지만 그 자신을 한발 물러나는 지점을 통해서 원판에 대한 존경과 함께 교활하게 자신의 몸을 움츠리고 사리는 기묘한 영화가 되었다) 


오늘날 동물들의 괴물성을 만든 것은 그들에 대한 모든 폭력을 흡수함으로서이다. ‘내밀성’(바타이유에게서)의 폭력인 제물로서의 폭력에, 떨어진 거리의 폭력인 감상주의적인 폭력이 뒤를 잇는다.


괴물성이란 그 의미를 바꾸었다. 원래는 공포와 미혹의 대상인 짐승들의 괴물성이란 결코 부정적 의미가 아니라 항상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제물과 신화, 맹수와 격투하는 투사, 그리고 우리의 꿈과 환상 속에서 교환과 은유의 대상인 짐승들의 괴물성이었다. 이러한 괴물성은 모든 위협과 변형에 있어서 풍부하고, 인간들의 살아있는 문화속으로 내밀히 녹아들어갔으며 그래서 인간과 동물들 사이의 결연의 한 형태인 이 괴물성을 우리는 공연장의 괴물성과 교환해버렸다…(중략)


옛날에는 영웅이 짐승, 용, 괴물을 죽였다. 그러면 그 흘러퍼진 피로부터 식물들이, 인간들이 문명이 탄생하였다. 오늘날은 짐승인 킹콩이 산업적인 대도시들을 박살내러 오고, 실제적인 모든 괴물성이 축출되어버리고 괴물성과의 계약을 파기하였기에(이 계약이 킹콩 영화에서는 여자의 원시적 증여로 표현되었다) 죽어버린 우리의 문명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기 위하여 온다. 


-보들리야르, 시뮬라시옹.


하지만 이런 괴물 영화의 조류에 있어서 새로운 흐름이 등장하기 시작한다:피터 잭슨의 킹콩 리메이크 버전의 마지막 장면을 보자. 괴물인 킹콩은 자신이 사랑한 연인 앞에서 비행기의 기총사격을 맞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떨어져 죽는다. 그렇게 죽은 괴물을 보고 인물은 이렇게 평한다:비행기가 죽인게 아니에요, 미녀가 야수를 죽인거죠. 이 영화에 있어서 거대 유인원 킹콩은 원시의 자연이 존재하는 밀림에서 거주하다가, 미녀를 따라서 문명의 한복판으로 온 뒤 조롱감이 되고 놀림감이 되다가(묶여서 전시되는) 문명의 폭력 앞에서 사라진다. 킹콩 역시, 폭력의 상징이자 폭력의 발현으로서 괴물이다(그가 티렉스의 턱뼈를 쑤셔넣어 죽이는 지점을 보라. 폭력과 에너지의 과잉으로서의 괴물, 킹콩) 하지만, 그는 제거되거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아니다:오히려 그는 진정한 사랑의 이해자이며,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세상을 향해 싸우는 로멘티스트다. 오히려, 미녀(여주인공)가 배우라는 지점을 통해서 쇼비지니스와 영화라는 기만과 거짓과 대비되는 원시이자 우리가 잃어버린 태초적 사랑을 향한 그리움이 킹콩을 통해서 형상화된다고도 볼 수 있으며, 원시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파괴하는 것은 문명 그 자체임을 암시하는 상징으로서도 작용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괴물은, 기묘한 지점을 만들어낸다:그들은 폭력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렸기에' 그리워하는 폭력 또는 폭력과 인간의 질서 사이의 조화로웠었던 가상의 과거를 향한 향수를 드러내는 지점이다. 현대적인 물질 문명과 기계문명에 의해서 거세당하고 삭제되었던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폭력, 그것을 향한 그리움이 괴물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고귀하며, 바타이유가 이야기한 고귀한 존재로서의 동물과는 또다른 지점에서 고귀하다:금기를 자유롭게 어기는 자유로운 존재이자 금기의 위반자이자 표지로서의 괴물과 동물이 아닌,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갖고 있는 존재로서의 동물이자 괴물이다. 이 둘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경외로서의 괴물의 폭력에 대해서 우리는 거기에 매료되지만, 인간은 그 지점에 맞닿을 수 없다. 인간은 폭력에 대한 금기를 위반할 수 있지만, 그것에 대한 원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자유롭게 폭력을 행사하고 그것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동물 또는 괴물과 동일한 존재가 될 수 없다. 하지만 향수로서의 괴물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서 느끼는 아련한 추억이자 환지통Phantom Pain으로서, 심지어 극단적인 경우에는 문명을 박살내고 우리가 잃어버렸던 과거를 다시 살려야한다는 미학으로도 귀결되기도 한다. 그것은 질서를 파괴하는 폭력과 질서 사이의 조화로운 상태를 상정하고 있으며, 폭력 역시 삶의 일부이지만 삶 그 자체는 아닌 무언가로서 표지되기 때문이다. 즉, 이런 괴물들은 앞서 다루었던것과는 다른 독특한 형태로 인간과 동물이 결합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고대의 인간, 폭력과 질서과 조화를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가상의(그것이 과연 존재할까? 아니 존재했었던 적이 있었을까?) 존재로서 동물과 인간의 결합인 괴물인 것이다.(쉬운 예로 고귀한 드래곤 같은 기믹을 생각하시면 편하다)


영화 아바타는, 그런 지점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향수로 가득차 있다. 지구는 환경오염으로 인해 파괴되었으며, 네이티브 아메리칸 철학에서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 나비족의 생활과 나비족의 철학은 자연과 함께하는 삶 그 자체인듯 하다. 그리고 모든 자연과 인간은 맞닿아있다 라는 나비족의 철학은 모든 동물-식물-나비족이 물질적으로 연결되어 소통하는 USB(달리 이거말고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의 형태로 드러난다. 여기서 나비족이 사는 세계는 기반하고 있는 세계는 괴물들의 세계다:그들의 생태계는 우리와 다르며, 그들은 인간이나 지구의 생물체보다 더 빠르고 강하며 치명적이다. 하지만, 그들의 세계는 우리가 잃어버린 자연의 '또다른 원형'이자 '파생실재'이다. 그 내부에서 동작하는 기제란 기본적으로 '자연과 인간은 하나'라는 한때 미국을 구성하였지만 미국이 잃어버린(아바타는 헐리웃 영화이다) 네이티브 아메리카의 철학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주인공은 과격한 선택을 취한다: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또다시 여기서 되풀이하며 잃어버리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인간의 육신을 버리고 나비족의 육신을 취하면서 끝나는 아바타의 결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윤리적인 문제나 다양한 문제를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향한 향수와 그리움의 미학이 압도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랑이 끝났다고 믿는 순간, 그에게 두 여자가 다가왔다. 사랑하던 약혼녀와 이별한 뒤 자살까지 시도한 '레너드(호아킨 피닉스)' 앞에 그를 지켜주고 싶다고 말하는 다정한 성격의 '산드라(비네사 쇼)'와 이웃인 치명적인 미모의 소유자 '미쉘(기네스 펠트로)'이 나타난다. 그리고 '미쉘'에게 이미 다른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점점 그녀에게 빠져드는 '레너드'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는데... (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리틀 오데사와 위 오운 더 나이트 등등을 만들었던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투 러버스는 정말로 '전형적'인 영화이다:영화는 부유한 유부남과 아슬아슬한 연애를 하고 있으면서도 레너드에게 서슴없이 기대는 자유분방한 미쉘과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을 가족과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는 안정적인 산드라 사이에서 어느쪽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임스 그레이는 그러한 전형성을 비틀어버리며, 그 비틈은 상당히 기묘한 형태로 완성된다. 제임스 그레이의 투 러버스는 마치 엇박자와도 같은 영화다:영화가 서사나 컷의 배치, 영상의 편집을 극적인 결말을 위해서 통일되게 구성하였다면, 투 러버스는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극적인 '하나의' 결말을 향해서 영화를 구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투 러버스는 극적인 통일성, 하나의 선택이라는 결말을 짓부수고 그 밖으로 탈출함으로서 전작인 리틀 오데사의 독특한 미학(슬픔의 확산과 폭력의 중지)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영화에 들어가기 앞서서 먼저 분명하게 지적해야하는 점이 있다. 투 러버스는 어떤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제임스 그레이 감독 개인사가 녹아들어 있지만, 동시에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백야'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하였다.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닌 기묘한 시공간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기적같은 만남과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다루고 있는 백야는 그 신비로움 체험과 그 사랑의 경험이 주는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지점에서 투 러버스 역시 백야의 경험의 연장선상에 있다:두 여인을 한번에 사랑하는 것, 하지만 그것이 어떤 양측 모두를 소유하고 싶은 기만이나 진실된 사랑을 선택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닌 레너드라는 인간의 삶에서 두 여인을 만남으로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해서 다루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렇기에 어느 한쪽 여인(산드라/미쉘)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두 여인에 대해서 동등하게, 그리고 그들과의 사랑이 어떤식으로 레너드의 인생을 변화시키는가에 대해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

먼저 영화의 도입부를 보자:느릿한 시간의 흐름과 함께, 레너드가 물속으로 뛰어든다. 고요히 물속에서 잠겨가던 그는 전 약혼녀의 환영을 본 뒤에 살려달라고 발버둥친다.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점은 구조를 받은 뒤, 그가 '나는 물에 (뛰어든게 아니라) 빠진거에요'라고 주장하는 지점이다. 어째서 그는 물에 뛰어든게 아니라 '빠졌다'라는 수동태를 쓰는가? 이는 그의 현재 상태(우울증도 있겠지만)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빠져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그의 케릭터, 사진을 통해서 구체화된다:그는 흑백 풍경 사진을 찍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어째서 흑백 풍경사진만을 찍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발터 벤야민이 사진에 있어서 제목이란 사진예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고 설파한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사진에 있어서 제목짓기가 가장 중요한 것은 범죄현장의 사진처럼 모든 요소와 맥락들이 그 사진에 숨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목을 통해서 구체화되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어떠한 의미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레너드라는 인물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겉으로는 멀쩡한 인물이다(주변인들에게 위트있게 대하는 그를 보라) 하지만, 그의 겉으로의 멀쩡함 속에는 약혼녀와의 비극적 이별과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내적 결함(유전자의 문제)이 존재한다. 그러한 문제를 다루는 그의 방식은 '숨김'이다. 그것을 그가 찍은 흑백의 풍경사진처럼, 자신의 프레임 내부로 인물을 들이지 않으면서(재밌는 점은 과거의 그가 남긴 유일한 인물 사진이 그의 약혼녀 사진 뿐이라는 것이다. 유일하게 그가 그의 세계 내부로, 그리고 증거를 남긴 인물) 빛바랬으며 비밀스럽기까지 한 풍경사진을 찍음으로서 자신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레너드와 다른 인물들의 관계는 레너드가 사는 아파트로 구체화된다. 모든 주요한 만남들은 아파트의 공간들에서 이루어진다:부모와 함께사는 아파트와 레너드의 방, 그리고 레너드의 이웃이자 창문으로 훔쳐볼 수 있는 가까운, 하지만 떨어져있는 공간으로서 미쉘의 아파트, 미쉘과 만나는 공간으로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옥상 등등. 여기서 주목할 점은 미쉘의 아파트와 레너드의 방 사이의 관계이다. 초기에 레너드는 미쉘의 아파트를 훔쳐보며, 그녀의 삶을 엿본다. 하지만 이는 관음증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타자를 향한 관심에 가까우며, 클라이맥스 직전 미쉘이 레너드의 방을 바라봄으로서 서로가 서로를 응시하는 지점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간적 구분과 함께, 레너드가 경험하는 사랑 역시 두가지로 구분이 된다. 첫번째로 미쉘은 첫눈에 반한 사랑이자(그녀가 아파트를 떠난 뒤에 눈 구멍으로 훔쳐보는 그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상처받은 인간형이다:그녀는 약을 하고, 불안정하며, 레너드의 감정을 알면서도 레너드에게 감정적으로 기댄다. 하지만 미쉘의 대척점에 있는 산드라는 가족을 중시하며, 안정적이며, 레너드에게 안정적인 사랑을 준다. 하지만 유념해야하는 것은 산드라의 사랑, 혹은 그 배경에 깔려있는 조건의 문제다. 분명 산드라와 레너드의 교제는 가족간의 의도된(경제적인 문제) 것이긴 하지만 진실되다. 그러나 제임스 그레이 감독은 가족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했다:"아버지는 나에게 영화감독이 되지 말라고 하셨다. 물론 그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다. 하지만 그는 틀렸다. 나는 감독이 됐다. 모든 가족의 내부에는 무시무시한 감정적 지원과 감정적 파괴라는 양면이 숨어있다." 산드라의 사랑 역시 그러하다. 그녀의 사랑은 가족의 사랑처럼 따스한 것이지만 동시에 중력과도 같이 레너드를 옭아멘다. 산드라의 가족, 레너드의 가족 역시 그를 모두 사랑하지만, 가업을 잇고 그 어디에 갈 수 없는 구속감이 레너드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레너드가 미쉘을 사랑하는 것은 영화의 서사상 당연한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레너드의 방이라는 레너드의 내밀한 공간에서 레너드와 사랑을 나눈 것은 미쉘이 아니라 산드라이다:미쉘은, 그야말로 방문자처럼 레너드의 아파트를 스쳐지나가듯이 갈 뿐이다. 미쉘이 자신과 사귀는 유부남이 과연 좋은 사람인지 봐달라고 레너드를 저녁식사에 초대했을 때, 레너드는 미쉘의 빰을 부드럽게 스치는 미쉘의 연인의 손길을 본다. 미쉘을 보고 첫눈에 반했지만, 거기에는 레너드를 위한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는 미쉘이 연인과 함께 오페라를 보러갔을 때, 오페라를 틀고는 가족들의 사진 앞에서 산드라와 키스를 한다:여기서 오페라는, 미쉘을 향한 감정의 잔향 같은 존재이다. 여전히 미쉘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음에도 산드라와 사랑을 나누는 것은, 미쉘에 대한 복수심 같은 문제가 아니다:그것은 미쉘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 그 다음날 미쉘을 만났을 때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거절 받기에 물러서는 것이다. 그리고, 산드라와 사랑을 함으로서, 그의 흑백사진 속으로 '사람'이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된다(산드라 동생의 성인식) 이는 그의 인생이 산드라에 의해서 점차 변화함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와 미쉘의 인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픈 미쉘의 전화를 받고 레너드가 그녀를 데리고 병원에 가고, 거기서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미쉘은 유부남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으나 유산했다는 것을. 이 지점에서부터 레너드는 그녀를 향한 사랑의 감정이 다시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의 아파트에 미쉘이 들어갔듯이 레너드 역시 그녀의 아파트에 들어가며, 그녀의 팔에 글자로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적는다. 이는 레너드의 상처받았던 경험에 기반한다:정상적인 사람은 상처받은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그에게 결함이 있다는걸 알고 떠났던 약혼녀처럼, 만약 그녀가 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고 유산했다는 것을 알면 그 남자는 어쩔 것인가? 그에게는 이미 가족과 자신의 인생이 있다. 레너드가 보기에는 그녀는 그 사랑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 오로지 상처받은 자가 상처받은 자를 구원할 수 있기에 레너드는 그녀를 사랑할 수 있는 동력을 다시 얻는다. 

하지만 레너드의 열렬한 구애에 미쉘은 이렇게 묻는다:당신, 나를 정말 사랑하는건가요? 사실 레너드의 사랑은 자기 경험이자, 자신의 거울적인 존재로서 사랑에 의해 상처받고 구원받지 못했던 과거를 구원하기 위한 시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나르시즘적인 사랑이 아니다:이는 서로의 상처를 햟아주는 짐승들의 피로하면서도 편안한 안식에 가깝다. 그리고 이 또한 사랑이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소설 백야의 비극적 엔딩(연인이 떠난줄 알고 나스첸카와 이어지려는 찰나에, 연인이 되돌아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과연 상처받은 사람은 상처받은 사람만이 구원할 수 있는가? 그렇기에 레너드가 사랑을 고백하고 미쉘과 섹스하는 장면은 서로를 열렬하게 갈구하지만 극에서의 온도(겨울, 야외의 옥상)는 쉽게 사그라질듯이 꺼지며, 어디까지나 상처받은 두명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는 지점이다. 그리고 레너드 역시 그것을 안다:그녀의 방에서 그녀에게 키스할듯이 몸을 숙이다가 멈춰서 돌아선다.


재밌는 점은 미쉘을 향한 레너드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레너드는 여전히 산드라의 사랑의 사정권에 잡혀있다. 미쉘에게 사랑을 고백하기 전 시퀸스에서 레너드는 산드라에게 사랑에 대한 이야기, 곁에 있어주고 싶고 당신의 그대로를 사랑한다는 산드라의 이야기가 레너드의 미쉘을 향한 고백에서도 드러난다. 이는 일종의 사랑의 디아스포라(확산)이다:레너드는 산드라를 통해서, 상처받은 자신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그렇기에 산드라가 이야기했던 말들과 사랑이, 레너드가 미쉘을 향한 사랑에서도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은 양쪽을 향한 기만이 아니라, 자신의 일상을 넘어서 자신의 상처와 화해하기(미쉘) 위한 단단한 대지로서 가족애와 안정적인, 발돋움하기 위한 중력과도 같은 사랑(산드라)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에 상처받은 자들은 자신들의 세계에서 떠나서 새로운 곳에서 출발을 모색한다. 그리고 가족간의 관계와 비지니스가 걸려있는 중요한 문제(양측 가족은 산드라와 레너드가 결혼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어머니는 그들의 떠남을 축복한다:위에서 이야기했지만, 가족은 단순히 속박하는 공간이 아니다. 좀더 복잡하게, 그들은 구성원인 레너드를 속박하지만(세탁소 문제 및 산드라와의 연애를 장려하는 것) 그를 사랑한다. 그렇기에 그가 떠나는 순간에, 그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행복을 빌며 그를 떠나보낸다.  


하지만 백야의 비극적 결말을 떠올려보자:나스첸카와 주인공 사이의 사랑이 성립되려는 찰나, 나스첸카의 연인이 그녀에게로 돌아옴으로서 모든 것이 틀어지고 만다. 모든 것은 꿈처럼 사라져버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레너드의 착각, 상처받은 자만이 상처받은 자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은 미쉘의 연인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미쉘에게로 돌아오는 그 지점에서 무너지게 된다. 넓고 자유로운 옥상과 겨울날의 애잔한 풍경과 대비되게, 한밤의 지상 1층에서 만나는 그들은 백야에서 이야기한 신비한 시공간인 백야와 대비되는 아침과도 같은 시공간을 만들어낸다. 이제 그들의 사랑도 꿈에서 깰 시간이 온 것이다. 미쉘은 떠나고, 레너드만이 남아서 검은 밤바다를 바라보며 눈물 짓는다. 이는 또다시 첫 시퀸스의 반복이다:심연의 어둠과도 같은 밤바다를 마주하면서 그는 마치 빠질것 같은 아슬아슬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산드라에게 선물받은 장갑이 떨어져서 파도에 떠밀려서 돌아오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그는 다시 돌아온다. 미쉘에게 선물하려고 했었던 반지를 들고 그것을 산드라에게 선물한다.


산드라에게 선물하는 그는 조용히 눈물 짓는다:과연 그는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걸까? 떠나간 사랑? 아니면 여기 있는 사랑? 그래서 그는 행복한걸까, 슬픈걸까? 우리는 알 수없다. 분명한 것은 백야의 마지막 글귀처럼, 그는 평생 경험할 수 없는 무언가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오, 하느님! 한순간 동안이나마 지속되었던 지극한 행복이여! 인간의 일생이 그것이면 족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이 시간은 마치 영원한 것처럼 느껴진다:극에서 스쳐가는 연인의 손길, 살갗에 대고 쓰는 이야기들, 키스할듯이 굽히다가 물러서는 모습, 가족들 사진 앞에서 키스하는 모습 등등 그런 장면들이 다른 장면들과 차이나는 템포를 보여주면서 엇박자처럼, 마치 그 시간이 영원히 지속될것처럼 느껴지게 감독이 장면들을 연출했던 것처럼, 그 장면들이 그 순간과 맞닿아있음에 머무르고 설명을 하지 않음으로서, 제임스 그레이 특유의 유보의 미학을 완성시킨다. 그리고 이 마지막 장면에서 어느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 그의 내면에서 넘쳐흐르는 무언가, 그리고 그 감정적 충만함과 미묘하면서도 신비로운 지점을 만들어내면서도 영화 투 러버스는 자신의 미학을 완성시킨다:그는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그 어디에도 없는 그 지점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처럼,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지는 그 지점에서 우리는 쉽게 경험할 수 없는 감정의 동요와 아름다움을 느낀다. 



오, 하느님. 한순간이나마 경험했었던 신비로운 사랑이여! 인간의 일생이 그런 사랑이면 족하지 않겠는가...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73517 를 참조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아도, 기억은 흔적을 남긴다...아마드는 4년 째 별거 중인 마리와 이혼하기 위해 파리로 향한다. 오랜만에 찾아 간 그녀의 집에는 전남편 사이에서 낳은 두 명의 딸과, 곧 마리와 결혼하는 사미르, 그리고 사미르의 불만투성이 아들이 있다. 한편, 아마드는 자꾸만 엇나가는 큰 딸 루시에게 사미르의 전 부인이 현재 혼수 상태이며, 그것이 엄마 마리 때문이라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는 상당히 기묘한 영화다:어떤 진실(왜 루시는 엄마인 마리에게 화를 내며, 그 뒤에 숨겨져있는 진실이란 무엇인가)을 쫒아가는듯이 보이지만, 동시에 그 진실은 어떠한 '해결'로 귀결되지 아니한다. 어떤 반전이나 진실이 명백한 변화와 결과를 불러오는 보통의 영화들과 다르게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는 배경음악이나 인위적인 구성을 최대한 배제하면서 관객에게 있는 그대로의 일상을 보여주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감독은 일상을 재현하는 듯 하면서도 그 아래에 아주 세심한 서사구조를 깔아두고 있다. 재밌는 점은 원제인 le passe(=The Past)라는 '과거'라는 단순한 명사와 다르게 한국에서 개봉한 제목은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라는 것이다:왜 단순하게 '과거'라는 제목을 쓰지 않고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라는 선언으로 제목을 구성한 것일까? 영화는 전적으로 다루는 지점은 '과거'와 '현재'의 관계이다. 하지만 한국어 제목이 선언하는 지점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라는 것은 단순히 영화가 '과거'라는 소재를 쓰는 것을 넘어서,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드러내는 중요한 관계로서의 선언을 볼 수 있는 지점이 있다.


과거를 다루는데 있어서 영화는 이야기를 낯설게 만드는데 주력한다:아메드는 전처와 별거이후 4년만에 테헤란에서 파리로 전처를 만나러 온 '이방인'이다. 그는 사미르와 마리의 관계에 끼어든 낯선 자이며, 동시에 그가 없는 동안 진행된 그들만의 인생(마리와 자신의 가족들)에 있어서도 이방인이기도 하다. 심지어 그가 과거에 살았던 그의 집을 사미르가 자신의 '색'으로 꾸미는 등의 모습을 통해서 그에게 한때 친숙했던 공간은 낯섬의 형태로 다가오며, 이후의 서사에서는 그조차도 그 가족에 있어서 '자나가는 사람'이었다는 것(그는 루시와 그녀의 동생의 생부가 아니다;아메드 역시도 마리가 재혼한 남자중 하나였을 뿐이었다)이 드러나면서 극대화된다. 그는 시공간적으로 두 곳에 걸터앉아있는데(현재 살고 있는 테헤란-과거에 살았던 공간인 파리), 현재 영화가 일어나는 시공간(파리)은 그가 어떤 유의미한 세계를 창출하기 위해서 머무는 공간이 아닌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 돌아온 공간'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 파리라는 시공간은 머무는 곳이 아닌 '거쳐가는 공간'이자 '떠나야 하는' 공간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과거의 문제(가족-사미르 사이의 오해와 진실)가 해결되는 순간, 모든 것을 뒤로한체 다시 테헤란으로 떠난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아메드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오프닝 시퀸스에서 관객은 일종의 낯섬을 느낀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리와 공항에 도착한 아메드는 과연 어떤 관계인가? 친구? 연인? 아니면 부부? 영화는 이들이 이혼 소송중이며, 4년전부터 이미 별거하였다는 이야기는 어떤 충격적인 전개나 복선, 암시등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 일상의 언어 속에서 조금조금씩 그 정체를 드러내는 형태로 나타난다. 영화는 이런점에서 관객을 이야기에 대해서 친절함을 보여주지 않는다:오히려 관객은 극에 있어서 이야기를 듣는 청자가 아닌, 기묘한 상황에 내던져진 낯선 이방인이다. 이런 지점에서 영화는 독특한 진행을 보여주는데, 몇몇 장면에서는 관객이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듣는 것이 아닌, 내부의 공간에서 외부의 공간에서 대화를 하는 인물들을 보고 있기만 하는 형태를 드러내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과거의 잔향이자 여파Aftermath이다:모든 중요한 사건들은 이미 과거에 일어났었거나(과거완료), 혹은 과거에서 지금까지 여파를 미치는(현재완료)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관객에게 영화는 마치 괴멸적인 핵전쟁 이후 수천년이 지난 지구를 돌아보는 포스트아포칼립스의 장르처럼 다가온다. 물론 어떠한 의도에 따라 사건 이후에 오밀조밀하게 재구성되며 관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미학적으로 재구성된 종말 이후의 세계와 다르게, 영화는 자신의 의도를 감추고 숨기면서 일상을 따라서 덤덤하게 진행될 뿐이다. 그리고 영화는 인물들이 과거를 찾아서 진실을 재확인하지만, 그것이 어떤 결정적으로 '현재'를 변화시키지 않는것처럼 묘사한다:오히려 그렇기에, 영화는 삶에 있어서 현재-과거의 관계를 새롭게 재조명한다.


영화는 이러한 현재-과거의 관계를 작은 구조로 쪼개서 영화 내에 반복적으로 삽입한다. 가장 뚜렷한 지점은 인물들의 동선과 행동이다:비단 아메드 뿐만 아니라, 극 내에서 모든 인물들은 어떤 행위를 한 뒤에 그 장소를 떠났다가 다시 불현듯 다시 돌아온다. 예를 들어서 루시가 집에 들어오지 않자, 사미르와 아메드, 그리고 마리가 루시를 찾겠다고 대화를 장면을 보자:마리와 아메드는 중요한 정보가 담긴 대화(루시는 사미르의 아내 셀린이 자살한 이유가 사미르와 마리의 불륜때문이었다고 알고 있다)를 진행한다. 이 동안 사미르는 이 대화의 낯선 이방인으로서 공간에서 공간으로 이동(차 키를 찾으러 움직임)하면서 전혀 의도치 않은 방식으로 이 둘의 대화를 방해한다. 영화는 이런식으로 갔다가-다시 돌아옴이라는 행동 구조를 많은 곳에 깔아놓는다.


또다른 재밌는 지점은 영화의 컷의 편집 방법이다:몇몇 장면에서 컷의 배경음은(영화는 마지막까지 배경음악을 쓰지 않는다) 그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리가 집에 있는 장면을 보여주다가도 갑자기 낯선 배경음이 들리더니, 영화는 사미르와 그의 아들이 지하철이 타고 있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이런 지점에서 영화는 배경음을 마치 '잔향'처럼 장면-장면 사이를 연결시키는 독특한 장치로 사용한다. 이는 영화의 내용과도 잘 어울린다. 영화가 다루고 있는 지점은 전적으로 아오야마 신지가 이야기한 '삶의 노이즈가 낀 영화'를 재현하는 것이다:과거의 사건들의 노이즈는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그것은 어떤 그들을 적극적으로 괴롭히는 '망령'의 형태가 아니다. 물론 그로 인해서 그들이 고통받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사건(사미르 아내 셀린의 자살시도)은 이미 과거의 일로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은 그저 그 사건의 머나먼 반향일 뿐이다. 그리고 이는 멀리서 들려오는 천둥처럼 시끄럽지는 않지만 묵직하게 인물들을 뒤흔든다.


영화는 이렇게 과거의 잔향이 지배하고 있으며, 이야기는 그 과거의 잔향을 따라 도덕적 책임을 추궁하기 위한 여정을 따라간다:루시는 셀린의 자살시도의 원인을 사미르와 마리 사이의 관계라고 고발한다. 하지만, 이후 사미르는 셀린의 자살이 우울증과 불행한 사건(얼룩이 묻은 옷에 대한 클레임) 때문이라고 항변하며, 루시는 사미르와 마리 사이의 연애편지를 자신이 보냈다고 토로한다. 하지만, 셀린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루시의 증언과 다르게 셀린은 전화를 받은적이 없었으며 셀린에게 있어서 사미르와 관계를 의심받았던 나이마가 셀린인척하면서 셀린에게 소소한 복수를 꾸몄다고 진술한다. 하지만, 영화는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를 일부러 누락시킴으로서 모든 과거의 진실을 드러내지 않는다:셀린은 과연 누구에게 화가 나서 자살시도를 한걸까? 나이마? 아니면 사미르와 마리? 이 모든 과거 사건의 인과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인 셀린은 자살시도 이후 코마에 빠져서 병원에 누워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뿐이다. 


결국 영화는 그것이 누구의 잘못이라고 단정적으로 선언하지 않는다. 마치 양파처럼 벗기면 벗길수록 더 많은 진실이 드러나며, 책임 소재는 더욱 불분명해진다. 영화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미래에 있어서 뒤돌아보아서 정리하기 위한 곳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리와 되돌아봄의 시간은, 아메드라는 이방인과 이혼이라는 정리의 시간을 통해서 드러난다:그는 자신의 현재(테헤란)에서 과거(파리)를 정리하기 위해서 과거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이방인으로서의 '친절함'을 드러내는데, 한때 가족이었던 그들(마리와 그녀의 딸들, 그리고 심지어는 사미르와 그의 자식에게까지)을 위해서 과거의 진실을 뒤쫒아서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과연 그들은 구원받았을까? 글쌔, 일단 확실한 것은 그들이 '구원'이라는 성스러운(완벽한) 상태에 도달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여전히 그들은 과거(코마 상태에 빠진 셀린)에 붙잡혀있다:다만, 그것은 이제 각자가 생각하는 방식의 죄의식(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한 루시, 문제를 외면하고 있었던 사미르-마리)에서 벗어나서 모두가 짊어져야 하는 문제로 화했다.


하지만 아메드는 떠나야한다:친구가 이야기했듯이, 그는 과거와 현재, 파리와 테헤란, 둘 중 어느 한쪽만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그의 현재로 돌아간다. 그것은 마리와의 관계는 과거의 것이며, 과거에 자신이 왜 떠나야했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는 아메드에 대해서 마리가 그 이야기를 듣기를 거부하는 형태로 드러난다. 하지만 자신의 현재인 테헤란으로 돌아간 아메드와 다르게, 사미르의 현재와 과거는 모두 파리에 존재한다:그렇기에 영화는 기묘한 결말로 도달한다. 과연 코마상태에서 영원히 알 수 없는 과거이자, 결혼을 했으면서도 자신에게 관심조차 안쏟은 생판 남이라 생각했던 셀린에게 사미르는 그녀가 한때 좋아했었던 향수를 뿌리고 그녀와 소통을 시도한다:하지만 왜 향수인가? 영화는 '(코마상태에 빠져있어도) 후각은 마지막까지 남아있으니까요'라는 의사의 말로 이를 정당화시키지만, 좀더 근본적으로는 후각이라는 감각의 특징에 기초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시각, 청각에 비해서 후각은 그 은은한 잔향이 오래 남는다:냄새란, 오랫동안 그 장소에 머물면 그 장소에 베어들어 그 장소의 일부가 된다. 그렇기에 후각은 금방사라지는 시각의 잔상이나 청각의 잔향보다 더 오랫동안 살아남는다. 사미르가 셀린이 좋아했던 향수를 뿌리고 그녀와 소통을 시도하는 것은 닿을 수 없는 과거와 화해하기 위한 그의 의지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의지에 부합하듯이 셀린은 그의 말에 화답해서 손을 부여잡는다. 이로써 영화는 막을 내린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는 대단히 독특한 영화다:영화는 화려한 드라마나 서사 장치를 이용하지 않고, 진실을 끝도 없이 밝히고 누군가를 무한히 고발하고 책임의 굴레를 씌우지 않는다. 대신에 묵직하게 남는 여운과도 함께, 영화는 삶의 일부를 훌륭하게 재현한다. 물론 그것은 삶 그 자체를 재현하는 것이 아닌, 삶의 일부분을 메타포의 형태로서 재현함으로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과거와 화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여주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꼭 보시길.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도쿄의 고급스러운 바에서 돈을 받고 남자들을 상대하는 아키코(타카나시 린)는 그녀의 비밀스런 일상을 모른 채 그녀에게 집착하는 남자친구 노리아키(카세 료)로 인해 쫓기듯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낸다. 어느 날 밤, 오랫동안 알고 지낸 히로시로부터 누군가의 집을 방문하라는 제안을 받게 되고, 아키코는 그곳에서 노교수 타카시(오쿠노 타다시)를 만난다. 오래 전부터 자신을 아는 듯 대하는 타카시와 이야기하며 편안함을 느낀 아키코는 자연스러운 대화를 이어가며 하룻밤을 보낸다. 다음 날, 아키코를 학교에 데려다 주던 길에 타카시는 우연히 노리아키를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는 노리아키의 집요한 시선이 주변을 맴도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 사랑에 빠진 것처럼은 기묘한 영화다. 제목인 '사랑에 빠진 것처럼' 때문에 영화 내용이 마치 누군가 사랑에 빠지고 그것이 성공/실패를 하는 과정을 보여줄 것처럼 기대되지만, 정작 영화는 24시간도 채 되지않는 짧은 시간동안의 이야기를 다루며, 러닝타임 동안 인간들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 결과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오히려 파국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영화 제목인 사랑에 빠진 것처럼과 별개로, 영화는 전적으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관객들은 이 모든 것이 파국적인 결말에 도달한 이후 나오는 엘라 피츠제럴드의 '사랑에 빠진 것처럼'을 삽입하면서 이 제목에 숨겨진 의미를 깨닫게 된다:곡의 우아함과 아름다움 뒤에 숨겨져 있는, 영화 전반에 깔린 감독의 냉소와 악의에 대해서 말이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이 보여주는 시공간은 전적으로 도시문명의 그것과 일치한다:오프닝 시퀸스에서 시작되는 도회적이고 깔끔한 바의 이미지와 그 후에 이어지는 노교수의 집으로 가는 길까지. 하지만, 영화는 도시문명의 파노라마를 보여주는데 초점을 맞추지 않고, 오히려 가장 내밀한 형태의 공간-자동차나 집이나 방 같은-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아키코가 자동차에 앉아 피곤한 몸을 기대고 바깥의 화려한 네온사인을 바라보는 장면들이나 자동차를 타고 움직이는 지점에서 드러나듯이, 영화는 자동차라는 공간 내부에서 자동차 바깥을 바라보거나 혹은 자동차 바깥에서 오로지 자동차 내부만을 보여주는 식의 영상 연출을 보여줌으로써 이 작품에서 거대한 도시문명은 사라지고 내밀한 개인의 이야기만 남게 된다. 또한 타카시가 '전화'라는 수단으로만 바깥 세계와 소통하는 지점도 그런 분절적이며 내밀한 시공간을 드러내는 지점이라 볼 수 있다.


영화는 이 개인들의 내밀한 공간으로 시선을 돌림으로서, 이들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하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인물들이 만나서 화학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닌, 동어반복적인 언어의 사용을 통해서 자신만을 드러내는 것 뿐이다. 처음 타카시와 만난 아키코가 그와 벌이는 대화의 형식에 주목해보자. 타카시는 끝없이 거실이라는 공간에서 서서 저녁을 먹자고 주장하며, 아키코는 침실로 들어가서 졸리니 자자는 이야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그것은 소통이 되지 않아서 생기는 갈등으로 이어지지 않으며, 어디까지나 동어반복적인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반복되다가 결국 소통에 대한 포기(타카시가 저녁을 포기하는 걸로)로 이어지게 된다. 이 장면에 있어서 '타카시의 집'이라는 공간을 공유하는 아키코-타카시마저도, 거실과 침실이라는 공간에 따로 존재할 뿐이며, 심지어 같은 침실에 있을 때조차 타카시는 의자에, 그리고 아키코는 침대에(또한 그녀는 TV에 비쳐진 이미지로만 존재할 뿐이다) 있을 뿐이다. 


그리고, 아키코의 남친인 노리아키가 타카시와 처음 만나는 장면을 보자:여기서도 노리아키와 타카시는 타카시의 차라는 공간을 같이 점유하면서도 조수석과 운전석이라는 별개의 공간에 머무른다. 그리고 영화는 지속적으로 이들을 다룰때 '분절적인' 컷으로 각자의 이야기에 침잠하게 만든다. 이 장면에서 노리아키는 거의 정신병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자친구인 아키코에 대한 집착과 망상(결혼 하면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된다 라는)에 사로잡혀 있는데, 노리아키-타카시의 대화에 있어서 서로가 만나거나 합의할 수 없는 평행선을 끊임없이 그릴뿐이다. 심지어 타카시와 노리아키가 타고 있는 승용차에 아키코까지 가세하는 장면에서, 각자 운전석-조수석-뒷좌석이라는 각자의 공간에 존재하면서 서로 맞닿지 않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식의 도시문명에서의 내밀한 공간과 그 속에서조차 소통이 되지 않은체 분절적으로 존재하는 인간들을 다루면서 영화는 도시문명의 소통되지 않음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멜빌 식의 자신의 의지에 의한 실존주의적인 고독, 혹은 앞서 다루었던 문라이팅의 중간자적 고독과는 다르게 사랑에 빠진 것처럼의 고독은 전적으로 '다른 의미'에서 자신의 내부로 파고든다. 아키코가 자신의 친구가 해준 농담을 듣고는 그게 왜 재밌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지만, 동시에 타카시의 집에가서 그 농담을 재밌다는 듯이 들려주는 아키코의 모습에서 드러난다:그것은 일종의 '동어반복'인데, 그 언어가 갖고 있는 함의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것이 마치 '자신의 언어인양' 떠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들은 극 내에서 자기 이야기만을 반복한다:하지만 그들은 전적으로 언어로 소통하지 않는다. 마치 후반부에 노리아키에게 맞은 아키코를 보면서 그로테스크한 친절함을 보여주는 옆집 아줌마처럼 말이다:집에서 나오지 않는 그녀가 작은 창문에 머리만 내밀고 타인의 불행에 아랑곳 없이 혼자 떠들고 혼자 미소짓는 이 감당하기 힘든 미친 광경이야말로 극을 지배하는 정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동어반복적이며 무의미한 소통은 노리아키가 아키코를 향해서 보여주는 광적인 집착이나 타카시가 생판 남인 아키코에게 부모 같은 친절함을 보여주는 지점에서 기묘한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아키코라는 타인을 향한 강렬한 감정이지만(동시에 성적이지 않다. 영화는 성적인 이야기를 거세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기한다고 볼 수 있는데, 타카시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는 지점이 섹스에 대한 암시를 드러낼 수도 있지만, 그런 지점을 없애고 그 자리에 소통의 부재만을 남겨놓는다) 그것은 전적으로 타인'에 대한' 감정이 아닌 '자기 자신에 의거한' 감정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완전한 파국에 도달한 엔딩에서 나오는 엘라 피츠제럴드의 '사랑에 빠진 것처럼'이 흘러나오면서 분명해진다.



Lately, I find myself gazing at stars

hearing guitars like someone in love

Sometimes the things I do astound me,

mostly whenever you're around me.


최근에 나는 별들을 바라보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죠

누군가 사랑에 빠진 것을 연주하는 기타 연주를 들으면서요.

때때로 주변의 사건들이 날 놀라게 만들어요.

대부분은 당신이 근처에 있을 때구요.



Lately I seem to walk as though I had wings,

bump into things like someone in love.

Each time I look at you,I'm limp as a glove,

and feeling like someone in love.


나는 날개가 있지만 최근에는 걸어다니는 것 같아요,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여기저기 부딪히죠.

매번 그때마다 전 당신을 바라보고, 마치 졸도할 것만 같아요,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요.


-엘라 피츠제럴드, Like someone in Love



이 노래의 가사에서, 모든 것은 '나'에 맞춰져 있다:나는 당신을 보고 사랑에 빠진 것과도 같은 기분을 느낀다. 여기서 '타인'은 사랑의 유의미한 형태소가 아니다. '타인'은 단순하게 대상으로서, 일종의 자극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사랑에 빠진 것은 타인에 대한 갈구가 아니라,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자기 자신으로 파고드는 일종의 '나르시즘'인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타인을 향해서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을 빙자한 자위를 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감독이 제시하는 것은, 이들의 기묘한 하루를 보여줌으로서, 현대 도시 문명에 대한 가장 악의적인 조소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영화 사랑에 빠진 것처럼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갈등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동어반복적인 언어를 통해서 최악의 조소를 문명을 향해 보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제목에서부터 사기를 치고 있는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마지막 삽입곡을 통해서 자신의 악의와 조소를 완성시킨다:그것은 소통조차 안되는 현대 도시문명에 대한 숨겨진, 하지만 강렬한 악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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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습니다.


1981월 11월, 폴란드 전기기사인 노박은 3명의 인부 볼스키, 바나샥, 쿠데이를 이끌고 런던에 밀입국한다. 폴란드인 사장의 런던 아파트를 수리하기 위해서다. 사장은 그들이 런던에서 한달간 일하는 대가로 바르샤바에서의 일년치 급여에 해당하는 보수를 주기로 한다. 그래도 사장은 값싼 폴란드 임금 덕분에 엄청나게 싼 경비에 목적을 달성하게 되는 것이다. 사장은 노박에게만 이 사실을 알려준다. 매일 중노동을 하는 그들의 유일한 낙은 매주 토요일 바르샤바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다. 그러나 전화통화에서 노박은 아내 안나와 사장의 관계를 의심하게 된다. 그러던 중 폴란드에서는 자유노조연합을 진압하는 군사혁명이 일어나서 전화도 항공편도 다 끊겨버리고 만다. 노박은 이 사실을 세 남자에게 숨기고, 묵묵히 작업을 진행시킨다.(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예르지 스콜라모프스키의 문라이팅은 기묘한 영화다:이 영화는 감성적인 멜로드라마라고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나 메말라있으며, 부조리한 블랙 코미디 영화라고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나 씁쓸하다. 오히려 에센셜 킬링처럼, 감독 본인은 이 영화에 대해서 어떠한 정치적 함의나 의도를 넣으려 하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정치적인 목소리를 극도로 거세하고 실존적인 이야기를 다룸으로서 정치적인 문제를 깊숙하게 파고들었던 에센셜 킬링처럼, 문라이팅 역시 전혀 정치적이지도 사회적이지도 않은 인간의 실존적 문제를 다루면서 역설적으로 자신이 의도한 것 이상의 이야기를 영화속에서 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 누군가는 이 영화에서 공산주의-자본주의의 만남을 볼수도 있고, 혹은 자본가-중간계급-노동자의 관계를, 또는 단순하게 거짓말으로 인해서 사람과의 관계를 파탄내고 자신마저 망가지는 소시민의 이야기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라이팅의 강점은, 이러한 이야기를 하나의 틀에 정형화시키지 않고 컨텍스트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는 것이다:마치 헤오도토스가 포로가 된 파라오의 이야기를 남김으로서 후대에게 해석의 여지가 있는, 뼈대만 남은 이야기를 남긴것처럼 말이다.


문라이팅은 1인극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그것은 한명만 나오고, 한명만 연기를 하는 1인극의 개념이라기 보다는, 극에 있어서 '유의미한 존재'가 한명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1인극이다. 이를 가장 심화시키는 것은 주인공 노박의 '나레이션'이다. 영화는 노박의 관점에서, 노박의 생각을 차분한 나레이션으로 끊임없이 드러낸다. 그리고 그의 미묘한 감정과 생각의 변화를 잡아냄으로서 그는 극의 중심이자 핵심으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나레이션 뿐만 아니라, 영화는 노박에게 기묘한 위치를 제공함으로서 그를 부각한다. 노박은 극중 유일하게 영어를 할 수 있는 폴란드 인부(또한 그는 동료들과 어울리지도 못한다)이며, 그는 유일하게 보스와 통화를 하고 지시를 받는 인물이고, 동시에 예산을 관리하고 배분하며 일을 처리하는 '중간자'이다. 동시에 그러한 지점들 때문에 노박은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노박은 고독하다:하지만 유념해야하는 점은 노박이 느끼는 고독은 멜빌식의 '안으로 침잠하는' 고독이 아니다. 오히려, 노박이 느끼는 고독은 현실적 압박속에서 '소외'당하기에 느끼는 고독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극외부에서 얼굴도 목소리도 없는 존재인 '보스'로부터 명령을 받는다. 이 존재조차 불확실하지만 가장 강력한 권력자인 보스로부터 노박은 명령을 받지만, 동시에 그는 보스가 자신의 처인 안나를 유혹하려는게 아닌가라고 의심을 한다. 그렇기에 보스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랑하는 처인 안나조차도 노박은 외부적 압박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동시에 인부들과 노박이 같은 커뮤니티를 형성하지 못하는 것은, 보스와 비밀을 공유하는 노박의 위치(사실 폴란드인 임금이 싸기에 싸게 부려먹는 것이라는)와 작업을 강제하기 위해서 노박이 끊임없이 외부사정에 대해 거짓말 하는 것이 강력하게 작용한다. 또한 공산주의 국가에서온 노박은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철저한 이방인이다. 하지만 마치 테마파크에 놀러온것처럼 유쾌하게 자기들끼리 지내는 인부들과 다르게, 노박은 자본주의 세계의 인간들이 공산주의 세계에 대해서 갖는 편견과 그들의 언어를 인지한다. 그렇기에 노박은 이 세계에서 철저하게 소외당한다. 끊임없이 외부에서 소외당해 내부로 밀려나는 노박의 이런 케릭터성은, 소시민적이며 동시에 도시문명속에서 사는 일반적인 인간을 상정한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폴란드에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서 모든 연락과 교통이 두절되자 노박이 거짓말로 인부를 통제해서 자신의 세계를 유지하려 한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볼 수 있다. 그에게는 외부에 기댈 수 있는 존재란 존재하지 않으며, 소시민적인 그는 자신보다 낮은 사람들(동료 인부들)과 연대할 수 있는 용기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는 진실(고국에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것)을 숨기고 그것이 드러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면서 자신의 작은 세계(보스의 집을 개축하는 것)를 지키려 한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더 비참해진다. 낯선 타국에서 사기에 도둑질을 하며, 인부들의 임금으로 공사를 강행하는 등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더할나위 없이 비참해지며, 동시에 '뻔뻔'해진다:영화의 클라이막스에서 베테랑 사환을 능숙하게 속여넘기는 그의 뻔뻔함은 더이상 인부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슈퍼마켓에서 영수증으로 사기를 치면서 걸릴까 전전긍긍하는 소시민의 모습을 벗어던진 무언가이다. 


이런 소시민의 실존적 고독과 붕괴를 영화는 '소리'라는 독특한 기제를 이용해서 풀어낸다. 예르지 스콜라모프스키는 소리에 대해서 독특한 감각으로 접근하는 감독이다. 그가 감독한 현대의 노이즈들과 파괴적이며 주술적인 원시 소리의 대비를 그려낸 외침이라던가, 소통의 부재를 굉음 섞인 노이즈의 형태로 풀어낸 에센셜 킬링 등등에서 '소리'는 영화를 구성하는 중요한 기제로 작용하였다. 문라이팅 역시 마찬가지이다:인물의 내밀한 심리를 풀어내는 기제로 나레이션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효과음이나 BGM이 아닌 '일상의 노이즈'들이 주인공의 심리상태를 묘사한다. 가령, 사환에게 호감을 갖고 자전거를 타고가는 장면에서는 노박이 단조롭고 거칠지만 업템포로 짧게 부는 휘파람 소리(정확하게 휘파람소리인지는 모르곘지만 하여간 그 비슷한)를 낸다던가, 사포기를 돌리면서 나는 굉음과 함께 영어를 못알아듣는 인부들을 향해 불만을 표시하는 옆집 주인의 고함을 통해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보여준다던가(이는 극 내에서 지속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꾸준하게 보여지는 지점이다), 혹은 크리스마스날 흥청망청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는 인부들과 대조적으로 브라운관이 고장난 TV앞에서 TV방송을 라디오 방송마냥 소리만 들으면서 브라운관 앞에서 잠을 청하는 노박의 모습 등등에서 소리는 중요한 이미지로 등장한다.


이러한 소리의 이미지는, 시각적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거기 항상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각적 이미지와 다른 독특한 감각을 전달한다. 극 내부에서 존재하지 않는 안나와 보스처럼, 소리는 어디에 존재하지만 구체적인 출처를 파악할 수 없다. 그렇기에 소리는, 극을 포위하는 동시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서 기묘한 위치를 선점하게 된다:소리는 시시각각 노박을 압박하고 포위하지만, 동시에 그는 그것을 향해 맞받아치거나 저항할 수 없다. 오히려 저항이 불가능해짐으로서 그의 소외를 심화시키는 기제로 작용되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그들은 꿈을 갖고 영국에 와서 집에 도착한 모습과 대비되게 한밤중에 카트를 끌고 폴란드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6시간에 걸쳐 히드로 공항까지 걸어간다:카트의 덜덜거리는 굉음소리와 함께, 노박과 인부들의 관계가 거의 파탄났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폴란드에 돌아가기 앞서 노박은 자신의 거짓말을 밝혀야 한다. 그리고 그의 고백과 함께, 형식만 남은체 너덜너덜해진 커뮤니티는 완전한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이 파국은 제멋대로 굴러가는 카트의 굉음과 함께 끝을 맺는다.


문라이팅은 예르지 스콜라모프스키라는 감독이 그린 독특한 드라마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아오야마 신지가 이야기한 문자의미 그대로의 '삶의 노이즈가 낀' 세계를 보여주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있는지 조차 몰라서 안타까운 감독이라 할 수 있는데(에센셜 킬링의 경우 국내 정식 수입조차 되지 않았다...), 그의 영화들은 여러 지점에서 생각할 것이 많다고 본인은 생각해본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https://medium.com/p/fa9dadff3f37 를 블로그로 옮긴 글입니다.


늑대인간은 인간 내면에 숨겨진 ‘야성’에 대한 하나의 메타포로서, 오랫동안 신화에서 전설로, 전설에서 민담으로, 그리고 이야기에서 대중문화의 코드로서 기능해왔다. 보름달이 떠오르는 달밤이면(서양에서는 보름달에는 광기를 불러일으킨다는 일종의 미신이 존재한다), 사람 안에 숨어있던 야성이 울부짖으며 깨어난다. 그리고 늑대인간들은 자신의 야성을 억제하지 못하고 희생양을 찾아서 어슬렁거린다. 이들은 거의 불사에 가까운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은으로 된 무기가 아니면 상처조차 입힐수 없다는 설정이 항상 따라다닌다.


현재 가장 위와 같이 알려진, 대중적인 ‘늑대인간’의 코드는 수많은 바리에이션을 기반으로 헐리웃이 정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늑대인간의 코드가 지금까지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보들리야르는 괴물을 ‘인간과 동물이 결합한 무언가’라고 규정하였다. 즉, 괴물에서 드러나는 그로테스크함이란, 인간과 인간이 아닌 무언가의 결합을 통해서 인간도 동물도 아닌 그 어중간함, 동시에 인간도 괴물도 될 수 있는 이 쌍방향적인 그로테스크함이 드러나는 무언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늑대인간이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괴물’이다:흡혈귀가 성병(카밀라 같은)/역병(노스페라투의 이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제노포비아(그들은 모두 머나먼 타국에서 왔다)의 결합이었고, 프랑켄슈타인이 과학과 인간의 그로테스크한 결합(시체를 기워서 만든 인조인간)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늑대인간은 인간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야수성’을 야수의 이미지와 함께 합쳐버린 무언가(털복숭이 괴물이 두발로 걸어다니며 늑대의 울음소리를 내는)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늑대인간은 인간과 인간 내부의 흉포한 동물과의 사투이며, 이 사투는 동시에 인간이 늑대인간을 사냥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는 인간 내부의 야성을 배제하는 행위로도 볼 수 있으며, 동시에 ‘인간’을 규정하는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왜 파트타임(?)으로만 활동하는 이 불쌍한 괴물을 은으로 만든 무기라는 귀찮은 방식을 이용해서 죽여야하는걸까? 후세:말하지 못한 내 사랑(공교롭게도 여기서 사냥당하는 이들 역시도 늑대인간이다)에서는 늑대인간 사냥을 인간의 순수성을 확보하기 위한 행위로 간주한다. 즉, 늑대인간을 죽임으로서, 순수하지 못한 것(늑대-인간 사이의 어중간한 것)을 죽이는 행위를 통해서 인간은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통의 작품에서, 늑대인간을 죽이는 것은 일종의 ‘도덕적’이자 ‘근대성’의 문제로 귀결되는 듯 하다:물론 거기에는 늑대인간이 살인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커뮤니티를 지키기 위해서 결국은 늑대인간을 죽여야 한다는 당연한 논리도 성립이 가능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도덕성이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야수성을 쓰러뜨리는 것, 그렇기에 욕망이나 야수성을 제거하고 인간으로 회귀하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지도 않을까?


그런 점에서 하울링은 정말로 독특한 늑대인간 영화다:하울링의 오프닝 시퀸스는 노이즈 낀 다양한 TV 화상들이 뒤범벅되면서 시작된다. 마치 거기에 어떠한 의미도 존재하지 않을 거 같은 노이즈들 속에서, 영화는 영화의 주요한 줄거리 복선들을 깔아둔다. 마치, 혼란스러운 이미지의 홍수로 구성된 대중문화 속에 숨어서 꿈틀거리고 있는 욕망들처럼 말이다. 그리고 주인공과 늑대인간이 처음으로 조우하는 장면을 포르노와 그 뒤에 숨어서 속삭이는 인간의 형태로 묘사한 것, 그리고 피해자로 나오는 주인공을 마치 관음하는듯이 흝어보는 대중의 모습은 단순히 현대에 늑대인간이 나와서 소동을 벌이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될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하울링은 전통적인 늑대인간 서사를 거부한다:물론 하울링에서도 늑대인간들은 컬트를 구성해서 세상으로부터 숨어지낸다. 하지만 하울링이 현대적인 해석을 거쳐서 새로운 지점을 만들어낸 것은, 그들이 사회와 상호작용하는 방식이다. 초반에 늑대인간과 조우해서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주인공을 그들의 컬트로 끌어들이는 방식, 즉 희생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그들은 정신의학의 탈을 이용한다. 그리고 요양원같은 대안공동체를 꾸며놓고서는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들을 끌어들여서 늑대인간 공동체의 일원으로 포섭한다:이 요양원 커뮤니티에서 주인공과 함께 친하게 지냈던 여인이 클라이맥스에서 정신과 치료중에서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은 늑대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늑대인간이 되는 장면을 보자. 그리고 도시에서 떨어져있는 자연이지만, 동시에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완전히 숨어있는 공동체가 아닌, 세계의 연장으로서의 요양공동체) 그들만의 세계 역시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그렇기에 단순히 ‘물어서 동료를 만드는 것’ 이상으로 하울링은 기묘한 명제를 제시한다:늑대인간은 더이상 세계와 동떨어져서 인간의 이성체계에 저항하는 반테제가 아닌, 시스템의 ‘일부’이다. 그것은 초반의 TV의 노이즈 낀 영상 기저에 깔려있는 일관된 ‘욕망’에 기초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 욕망은 분석의 대상(정신의학)이며 사냥당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되고 표출되는 무언가가 된다:늑대인간들의 기묘한 커뮤니티는 더이상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죽이지 않고, 교외에서 자기가 키우는 소들을 죽이는 것만으로 자신의 파괴 욕구를 관리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인간과 공존할 수 없는 ‘무언가’이다:하울링이 혁신적이면서 동시에 ‘보수적’인 것은 그것이 갖는 파괴적인 속성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영화 중반에 늑대인간 커뮤니티에 속한 한 여인에게 유혹을 받은 주인공의 남편이 늑대에게 물린 후에, 다시 그 여인을 찾아가 격렬한 정사를 나누는 장면은 대단히 에로틱하다. 하지만 그런 정사도중에 이들은 그로테스크한 모습의 늑대인간으로 변하며 이들의 정사는 섹스가 아닌 파괴적인 폭력으로 변화하게 된다. 에로티시즘과 함께 파괴적인 그로테스크를 섞음으로서, 영화는 이들이 절대로 어떤 ‘대안’이라던가,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 무언가는 아니라고 선언해버린다. 또한 영화의 마지막에서는 이 늑대인간 커뮤니티가 실패로 끝나는 모습을 보여준다:대안적 커뮤니티로서의 이념을 제시한 정신과 의사가 가장 먼저 은탄환에 목숨을 잃고, 그리고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는 듯한 뉘앙스(고맙네라는 대사)에서 드러난다. 이는 인간이 욕망에 휘둘리게 되면, 결국은 모든 것은 파멸하게 될 것이다 라는 영화의 선언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울링의 결론은 전통적이다:하지만 동시에 여태까지의 전통적인 늑대인간물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늑대인간에게 물린 주인공은, 진실을 고발한다:늑대인간은 실존하며, 그들은 이 시스템의 일부로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들은 같이 살 수 있는 공동체의 일부가 아닌 시스템을 파괴할 수 있는 위협세력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이, 주인공은 카메라 앞에서 스스로 늑대인간이 되며 구슬픈 울음소리와 함께 동료의 은탄환에 의해서 ‘안락사’당한다. 하지만, 주인공의 절절한 고발을 사람들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오히려 세상에 TV에서 저런것도 하다니 말세야, 재미도 없는데 말이지 라고 웃어넘겨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TV를 보는 늑대인간 커뮤니티의 생존자가 웃으면서 레어 스테이크를 주문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늑대인간 커뮤니티는 다시 한번 원점에서 출발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와 함께.


(이 글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데, 본인이 정석적인 늑대인간 영화를 거의 본게 없다는 것이다:20세기 초반의 헐리웃 늑대인간 영화라던가, 혹은 과거의 늑대인간 물들 말이다. 직접적으로 보고 언급하는 ‘후세’나 몇몇 예시들은 오히려 본인이 생각하는 스테레오 타입에서는 상당히 떨어져있는 작품인데, 머릿속으롯 스테레오 타입을 상정하고 글을 만들어낸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하필이면 글을 80%정도 완성한 단계에서 나버리고 말았다…그렇기에 하울링은 어찌보면 대단한 작품이 아닐지도 모른다. 혹은 본인이 맥락 자체를 잘못 짚어낸걸지도 모르고. 그렇기에 이 글은 하나의 지표로서 남겨두는 것일 뿐,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주시길 바란다. 이상.)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자신을 닮은 똑똑한 아들, 그리고 사랑스러운 아내와 함께 만족스러운 삶을 누리고 있는 성공한 비즈니스맨 료타는 어느 날 병원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6년 간 키운 아들이 자신의 친자가 아니고 병원에서 바뀐 아이라는 것. 료타는 삶의 방식이 너무나도 다른 친자의 가족들을 만나고 자신과 아들의 관계를 돌아보면서 고민과 갈등에 빠지게 되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보통 가족을 소재로 다루는 영화들의 기본 전제는 이러한듯 하다:파괴 뒤에 창조 있으리라. 수많은 작품들은 가족이라는 커뮤니티를 파괴직전까지 몰고 간다. 그러고는, 그속에서 가족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그것을 토대로 가족을 재구축한다. 예외 사례(킬러조 같은 극단적 파국)도 존재하긴 하지만, 가족을 주요 소재로 다루는 영화들의 기본 특징들은 이렇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이런 와중에 가족에 대해서 가장 담담한 시선이자 통념을 거부하고 뼈대만 남은 가족을 보여주는 작품들, 예를 들어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아버지는 살인마야!)나 기요시의 도쿄 소나타(원래 남남인 인간들이 남남으로 돌아간것 뿐이야) 같은 작품조차도 가장 극단적으로 가족을 파괴하려고 위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영화들을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다만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그런 '극적인' 서사를 거부하며 이러한 영화 경향들과 대척점에 놓이는 특이한 케이스라 할 수 있다. 영화의 이야기는 담담한 카메라를 따라서 자연스럽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마지막으로 서서히 점진적으로 변화한다. 다큐멘터리 감독 경력이 있던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러한 과정을 어떠한 극적인 서사나 장치를 거부하면서도 세밀하게, 하지만 희미하진 않게 영화를 구성한다. 자칫 잘못하면 가족이 무엇인가를 두고 감독의 일방적인 설교 또는 신파극이 될 수 있었던 이야기를,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케릭터들을 존중하면서 열려있는 결말로, 과연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로 풀어내는데 성공한다.


먼저 제목인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극의 시작이 뒤바뀐 아이들에서부터 시작하긴 하지만, 이는 어떤 파국을 향해서 달려나가는 사건이 아니다:이는 '변화'이자 가족이란 개념을 향한 '문제제기'이다. 과연 피가 섞여있지 않아도 가족이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면 왜 제목이 '그렇게 가족이 된다'가 아니라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일까? 이는 기묘하게도 서로의 아이가 바뀌었다는 것을 인지한 다음, 그 충격에 대해서 케이타의 가족이나 류세이의 가족 모두가 천천히 그 충격과 변화에 적응하고 받아들이지만(일련의 단계를 통해서 뒤바뀐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는 것), 정작 료타만이 이 충격에서 가장 혼란스러워하고 공황을 겪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라는 것은, 료타가 가족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가를 핵심 키워드로 제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료타라는 케릭터가 혈연에 기초하고 있는 가족이라는 개념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다. 물론, 전통적인 혈연에 근거한 가족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기본적인 형태이며, 동시에 료타는 자신의 친어머니(그의 어머니는 새어머니였다)를 찾아서 가출한 전력이 있는 등 혈육의 정에 대해서 목말라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료타가 갖고 있었던 가족의 개념은 그 나름의 사랑이 깔려있기는 하지만, 어딘가 자기중심적이고 기계적이며 삭막한 부분이 있다:극후반 친아들인 류세이를 집에 데려왔을 때, 류세이에게 여기서 살때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정한 규칙을 이야기하는 부분이라던가, 케이타에게 저쪽(친부모)과 함께 살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임무'의 형태로 이야기한다던가, 혹은 류세이의 부모를(구체적이진 않지만, 그들이 경제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은 극의 은연중에 깔려있다. 또한 류세이의 부모가 경제적으로 가장 낙후된 군마현에 사는 것은 강렬하지는 않지만 은연중에 정치/경제적인 텍스트를 깔아뒀다고도 볼 수 있다) 바라보는 료타의 시선 등에서 드러난다. 재밌는 점은 영화는 이러한 지점을 '가부장적이고 정치 경제적인' 형태로 드러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구체적인 대립 형태'를 거부한다. 이는 정치/경제적인 가족관계에 대한 클리셰를 피하고 료타의 케릭터를 정형화된 틀에 넣기를 거부하는 감독의 의지로 보여진다.


하지만, 류세이를 집에 데려온 이후에 류세이가 왜 자신들을 아버지와 어머니로 불러야하는가에 대해서 료타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을 보자:애시당초에 어린아이에게 설명하지 못할 정도로 명확한 개념이나 확실한 타당성을 가진게 아니라면, 그 명제 자체는 경계 자체가 애매모호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료타는 자신의 확고하지만 동시에 불확실한 '혈연'의 개념 때문에 갈등하고 고뇌하며, 이는 그의 엘리트적이며 워커홀릭적인 삶과 맞물려서 그에게 피곤함과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가족을 위해서, 피가 이어진 아들과 아들의 미래를 위해서 노력하지만 불현듯 찾아온 불청객과도 같은 소식(뒤바뀐 자식)은 그의 인생과 가족관 모두를 뒤바꿔버린다. 


영화는 그러한 애매한 지점을, 실험을 위해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수목림에 비유한다:원래 실험을 위해서 만들어진 수목림에서 15년 동안 땅속에서 지내는 매미 유충이 허물을 벗고 태어나며, 하나의 '자연'을 형성한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자연이 자연이라 할 수 있을까? 영화는 하나의 커뮤니티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그 개념의 '진품성'은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한다:중요한 것은, 그 커뮤니티를 유지하기 위해서 들였던 노력들, 그리고 그 속에서 서로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료타 이외의 부모들이 그 충격속에서도 아주 자연스럽게 그 변화를 받아들이고 거기서 적응해나갔다면, 료타는 먼길을 돌아서 그 가족의 진품성이 중요한 것이 아닌 그 내에서 가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려고 했었던 과정들, 경험들, 그것들이 중요함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급작스럽지 않고 서서히 진행되는데, 자신의 새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 간의 자신이 잘못한 점을 사과한다던가, 스스로 혼란스럽다고 변호사 친구에게 토로한다든가 등의 행동을 통해서 드러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마지막은 피곤해서 자고 있었던 자신을 케이타가 사진으로 찍어서 사진기에 담아둔 것을 보고 케이타를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하고 다시 한번 가족이 되며 그렇게 (케이타의)아버지가 된다.


하지만 어찌보면 15분만에 끝낼수도 있는 뻔한 이야기(진품성이 중요한게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유지하려는 노력)를 영화가 2시간에 걸쳐서 점진적으로 하고자 한 것은, 가족에 대한 료타의 변화 이상을 이야기하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판 포스터를 보도록 하자.









이 포스터에서는 두 가족이 서로 동등하게, 나란히 서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재밌는 점은 영화에서 나온 이 장면은 두 가족이 거리를 두고, 서로 다른 형태의 포즈-케이타의 가족은 전형적인 중산층 가족의 정형화된 포즈를, 그리고 류세이의 가족은 자유분방한 포즈를-를 취하면서 두 가족을 극단적으로 대립시킨다. 이는 영화 내내 류세이의 가족과 함께 편하게 지내는 케이타와 아내한테 '그 가족과 떨어져 지내'라고 이야기하는 료타의 모습에서도 드러난다: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류세이 가족의 삶의 방식을 료타가 은연중에, 그리고 지속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바로 서로 섞일 수 없는 두 개의 세계가 섞이는 것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그렇기에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가족의 의미를 넘어서 '대안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서로 만나고 섞일 일이 없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서 기묘하게 꼬여버린 부모-자식의 관계를 보인다. 료타는 이러한 관념에 익숙치 않기에, 너무나 쉽게 이 속물적으로 보이는 타인들에게 크나큰 무례(제가 두 아이를 다 데리고 살겠습니다. 돈이라면 얼마라도 주겠습니다)를 저지르며, 영화 내내 지속적으로 류세이의 부모를 못마땅하게 쳐다본다. 하지만, 사회 엘리트인 료타가 영화를 통해서 경험하는 것은, 그런 어떤 정형화된 틀의 세계(내 자식은 뭐든지 잘해야하고-이는 혈연과 유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내 자식을 위해서 직장에서 불철주야 일하며, 열심히 일하고 유능한 인간이 되어서 성공가도를 달리는 것 등등)가 완벽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자신이 생각했던 혈연에 근거한 가족 개념도 포함해서) 그리고 가족이라는 커뮤니티는 단순히 나-아내-자식이라는 경계를 넘어서, 류세이 가족이라는 '타인'에게로까지 확대된다. 


이 확대과정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진행된다:이는 아이들이 뒤바뀐 것을 고지한 병원이 제시한 아이 '교환'의 프로세스에 의거한 것이다. 서로 만나서 안면을 트고, 그리고 서로의 집에 아이들을 교환해서 묵은 뒤에, 최종적으로 아이들을 교환하는 것. 물론, 이는 단순히 케이타-류세이에게만 해당되는 문제일 수도 있지만, 이 과정에서 서로의 가족들은 섞이게 되고 자연스럽게 서로의 삶에 관여하게 된다:케이타의 초등학교 입학식에 류세이의 아버지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켐코더를 들고 들어오는 지점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서로의 가족이 동등하게 서서 사진을 찍은 저 포스터는 영화의 중요한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마치 형제처럼, 두 가족이 동등하게 서서 사진을 찍는다는 것. 생면부지의 타인들이 모여서 마치 '가족인것처럼' 사진을 찍는 지점에서 이 영화는 단순히 혈연 중심의 가족 개념을 타파하는 이상, 가족이란 커뮤니티의 확장을 노리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의미심장하다:료타는 케이타를 자신의 진실한 자식으로 인정한다. 그리고 그렇게 (료타는 케이타의)아버지가 된다. 그렇다면 류세이는 어떠한가? 료타는 자신의 경직된 세계를 벗어던지고 류세이와 함께 연날리기 캠핑을 하기를 준비하면서 류세이의 아버지 역활을 맡는다. 그리고 그렇게 (료타는 류세이의)아버지가 된다. 또한 료타가 케이타와 함께 돌아왔을 때, 류세이의 동생들은 이렇게 물어본다:이제 '돌아가지' 않는거야? 이 말에는 류세이가 돌아가지 않음을 묻는 의미기도 하지만, 류세이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을 케이타의 집, 케이타의 가족으로 인지하는 지점이 있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류세이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면서 류세이는 '양측 모두'의 아이가 된다. 그리고 류세이의 부모는 자연스럽게 밥이나 먹자는 권유를 한다. 그렇기에, 그렇게 생면부지의 타인들은 하나의 가족이 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정말로 대단한 작품이다. 다큐멘터리의 객관적인 시선과 지극히 섬세한 카메라 워크가 맞물려 들어가면서도, 영화는 2시간이라는 러닝타임 내내 극의 탬포를 잃지 않고 관객들을 집중하게 만든다. 또한 인위적인 장치를 극도로 배제하면서도 극의 장면마다 필요한 상징적 구도들을 자연스럽게 집어넣는 등, 영화는 섬세하게 짜여진 아름다운 작품이 된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올해를 빛내는 아름다운 작품 중 하나며, 기회가 된다면 극장에서 꼭 보기를 추천한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미디엄에 쓴 글을 옮긴 것입니다.(https://medium.com/korean-medium-post/1a030169c4cc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죽일 수는 있지만, 희생 제물은 될 수 없는)를 법의 문법으로 보았다:그리고 이러한 기저에는 그리스 폴리스의 삶의 양식 조에(단순하게 살아있음)와 비오스(의미있는 삶)의 분리가 깔려있다고 아감벤은 자신의 저서 호모 사케르를 통해서 주장한다. 조에란 자연에서 단순히 태어나고 죽고 하는 것은 어떠한 가치 판단의 기준도 아닌, 단순하게 거기 있다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의미있는 삶, 비오스란, 그것의 태어남과 삶에 의미가 존재하고 동시에 중요하게 여겨진다. 아감벤은 폴리스에 있어서 시민과 함께 조에, 의미없는 삶들이 함께 살았음에 주목하였다. 아감벤은 즉, 비오스란 조에라는 ‘예외상황’을 통해서 규정된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외상황을 통한 자신의 규정’은 호모 사케르-맘대로 죽일 수 있지만, 희생물로 바쳐질 수 없는-의 법의 문법을 통해 실현된다:예를 들어보자. 사형의 경우, 사형수는 국가에 의해서 죽음을 선언받은 자들이다. 이들은 국가의 처분에 따라서 마음대로 죽임당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어떠한 숭고한 가치를 위한’희생물’은 될 수 없다. 그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헌법과 가치질서의 예외에 속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예외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헌법적 가치질서이자 주권권력의 결정을 ‘재확립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이러한 문법은 법 바깥의 대중문화에서도 발견되는 문법이며, 역설적이게도 이는 호모 사케르의 문법이 법을 넘어서 대중문화 전반에, 즉 대중들이 공통으로 향유하고 있는 인식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이후로 대중문화 코드에 있어서 중요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좀비물은 호모 사케르의 문법과 많은 부분 유사점을 드러낸다:좀비는 ‘언제, 어디서,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이들은 어떠한 대의명분을 위해서 희생되는 존재는 아니다. 그들은 생존자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이기에 제거되어야 하며, 동시에 생존자들은 좀비 대재앙(그것이 소규모든 전지구적인 규모든) 속에서 ‘마지막 남은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서 좀비를 제거하고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좀비에게 감염되어 인간성을 상실하게 될 위기가 되면, ‘인간다운’ 최후를 맞이하길 원한다. 그리고 좀비와 구분되어, ‘살아갈 지어다’라는 주권적인 명령 하에서, 예외와 같은 동등한 상황(좀비)에 처하게 된다면 인간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자살할 것을 강요 ‘하는듯이’ 보여지는 지점이 있다.


(이는 ‘좀비와 함께살기’라는 명제가 좀비 코드에서는 ‘당연스럽게’ 거부당하는 것을 통해 드러난다. 좀비가 한때 인간이었으며, 우리는 그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이들과 함께 같이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작품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


그렇기에 좀비들은 좀비 아포칼립스에서 ‘인간’을 규정하는 외부이자 경계영역, 동시에 호모 사케르이며 산업사회에서의 대중의 등장과 대중에 대한 혐오와 공포를 묘사하는 지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썩어가는 육체라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육화된다. 또한 좀비가 되는 순간 인간은 그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것을 박탈당하게 된다:한때 누군가의 연인이었고, 가족이었고, 친구였던 존재는 좀비가 됨으로서 그런 존재의 모든것을 박탈당하고 마음껏 총으로 쏴죽일 수 있는 무언가가 된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서 끊임없이 죽여야 하는 외부, 살아있는 것도 아니지만 동시에 죽은 것도 아닌 죽지못한 육체들(Undead)이 바로 좀비인 것이다.


물론 좀비는 사람을 죽이고, 동시에 사람을 죽여서 자신을 증식시킨다:좀비는 일방적으로 죽일 수 있는 존재라고 보기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뒤집어서 생각하면, 좀비에게 있어서 인간 역시 ‘호모 사케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좀비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간을 죽여야 한다. 아니면 인간이 좀비를 모두 죽여버릴테니까. 하지만 동시에, 만약 좀비가 지구상 최후의 인간까지 죽어버린다면, 더이상 인간을 인간으로 규정하는 살아있는 지표가 남지 않게 된다면 좀비 역시도 더이상 ‘좀비’가 아니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좀비가 좀비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살아있는 인간’을 전제해야 한다. 이는 일종의 원환이다:서로가 서로를 규정하며 정의한다. 좀비는 인간을, 인간은 좀비를 죽임으로서 서로의 존재를 규정하고 확인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호모 사케르적 관계는 ‘쌍방향적’이다.


(물론 이 호모 사케르적인 관계를 거부하는 영화도 존재한다:새벽의 황당한 저주에서 주인공은 좀비가 되어가는 자신의 어머니를 좀비라고 부르길 ‘거부’한다. 우리가 좀비물의 장르 공식에 몰입해서 쉽게 잊어버리는 지점, 즉, 좀비로 변한 그들이 우리에게 있어서 형제고 가족이며 친구였음을 영화는 꿰뚫어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마지막에 좀비가 된 친구와 함께 살아가기를 선택함으로서, 원환을 꿰뚫어 보고 파괴하는 동력을 얻기를 원한다. 그렇기에 새벽의 황당한 저주는 장르에 대한 애정과 가장 날카로운 시선을 동시에 보내는, 정말로 ‘위대한’ 좀비 영화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다루고자 하는 스튜어트 고든 감독, 브라이언 유즈나 제작, 러브크래프트 원작의 1984년작 좀비오, 원제 리-애니메이터(되살리는 자, 시체소생자)는 이러한 좀비 장르의 공식을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영화에서 좀비는 더이상 감염-확산을 통해 대중을 구축하지 않는다. 오히려 혈청이라는 특수한 약물을 통해서 제한적으로나마 재생산되는 것이 좀비이며,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는 ‘좀비’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시체 소생자에서 중요한 것은 시체가 만들어내는 재앙이 아니라 시체를 소생시키는 자들(주인공과 허버트 웨스트)에 초점을 맞춘다.


원작을 쓴 H.P. 러브크래프트는 이 소설 원작을 통해서 그의 과학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는데 초점을 맞추었다:허버트 웨스트는 생물이란 어떤 존엄이 깃들지 않은 하나의 기계이며, 일정한 조건 하에서 되살릴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는 17년에 걸쳐 화자인 ‘나’와 함께 소생실험을 하기 위해, 동물에서 시체로, 시체에서 신선한 시체를 얻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심지어 1차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시체를 대량확보하려고 하는 등 온갖 미친짓을 감행한 끝에 결국 허버트 웨스트는 자신이 소생한 시체들에게 뜯겨져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끝없는 웨스트의 실험과 광기는 러브크래프트가 니알라토텝을 통해서 드러낸 과학에 대한 불신과 파괴적 속성의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 있다.


스튜어트 고든과 브라이언 유즈나는 이러한 러브크래프트의 원작을 B급 테이스트로 살려내는데 성공한다. 영화는 전적으로 저예산이긴 하지만, 허버트 웨스트 역을 맡은 제프리 콤즈의 명연과 시의적절한 음악, 그리고 리드미컬하고 그로테스크하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밌고 유쾌하게 영상을 구성하는데 성공한다.


기계적 신체와 계속 약물을 주입해서 되살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의학자(라기 보다는 미친놈)의 이야기를 쓴 러브크래프트의 광기들린 편견은, 위에서 이야기한 썩어가는 신체이자 인간을 위협하며 규정하는 호모 사케르로서의 좀비와 정반대이기는 하지만 맥락상 유사한 지점을 만들어낸다. 인트로에서 원작 소설에서 나에 해당되는 주인공이 죽은 환자를 두고 살려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부분, 허버트 웨스트가 죽은 고양이를 살려내는 것을 보고 그의 혈청에 매료되는 부분, 허버트 웨스트가 뇌사와 죽음의 경계를 두고 계속 끊임없이 죽음이라는 경계를 재규정하려는 부분, 마지막에 죽어버린 여주인공을 소름끼치는 미소와 함께 혈청으로 다시 살려내는 부분(동시에 이는 처음 주인공이 나온 시퀸스의 반복이자 변용이다)까지, 영화는 기존의 좀비영화의 문법과 다른 지점을 끊임없이 만들어냄으로서 기존의 좀비영화와 다른 ‘무언가’가 된다.


이러한 기묘한 지점들은 한병철이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를 비판한 지점과 맞물려 들어가면서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한병철은 조르조 아감벤이 모티브를 두고 있는 푸코의 생명정치를 ‘부정적’(제거, 살해, 학살 등등)인 부분에만 방점을 찍었다고 비판한다. 한병철의 문제의식은 ‘피로사회’나 ‘권력이란 무엇인가’에서도 드러나듯이, 기본적으로 개인과 사회를 움직이는 외부동력이 아닌 스스로 움직이는 ‘내부의 동력’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근대사회의 변화와 함께 후기-근대(Post-Modern), 성과 사회가 등장하게 되면서 외부적 가치를 내제화하고 그 내부동력들이 브레이크 없이 무한하게 폭주하는 상황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그렇기에 한병철은 이렇게 선언한다:현대사회는 조르조 아감벤이 선언한 절대적으로 죽일 수 있는 호모 사케르로 구성되는게 아니라, 절대적으로 ‘살아야 하는’ 호모 사케르의 존재가 지배하고 있다고. 이 절대적으로 살아야함은 죽음이 거세되고 끝없는 자기계발, 끝없는 건강, 끝없는 행복 등등의 무한히 팽창하는 동력과 가치관 속에서 인간 스스로를 끝없이 소모하다 못해 영혼의 무기력증, 우울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다시 시체 소생자들로 돌아와보자:그들이 시체를 살리려는 것은 ‘의미없는’ 죽음을 거부하고, 그 자리에 ‘의미있는 삶’을 채우고자 하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허버트 웨스트가 죽음의 경계를 끝없이 확장하고 옅게 만들려는 시도 또한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소생실험은 끝없이 실패하면서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소생실험의 피험자들은 폭력적이며, 계속 새로운 시체들을 만들어낼 뿐이다. 그렇기에 시체소생자들에 있어서 ‘좀비’란(누차 이야기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좀비라는 개념이 나오지 않는다) 절대적으로 살아야하는 존재인 호모 사케르이자, 죽은 것도 아니지만 동시에 살아 있는 것도 아닌 살지 못하는(Un-Life) 존재로서 육체이자 인간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폭력적인가? 이는 단순하게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으며 신체의 죽음과 함께 영혼은 떠나고 신체를 되살리는 작업과 과학 자체를 비웃으려는 러브크래프트의 허무주의적인 시선이 깔려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다른 작품 ‘바탈리언’이라는 B급 작품에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해보고자 한다:죽은 것이 살아있다는 것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근육과 각종 장기들이 뻣뻣하게 굳었은 상태에서, 그것을 ‘강제로’ 소생시켜 움직인다는 것은 그로테스크함을 넘어서 그 상태에 처한 피해자에게 있어 엄청난 고문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러한 고통은 자연스럽게 ‘타인’의 존재를 향한 분노와 파괴로 표출되게 된다. 영화 바탈리언에서 끝없이 타인의 신체와 피를 갈구하는 형태로 말이다.


그렇기에 시체소생자들은 일종의 ‘과잉생명’에 대한 이야기이자 과잉생명이 불러일으키는 재앙에 대한 이야기이다:한번 죽은 고양이를 다시 죽였는데 약물을 투입해서 또 살리거나, 참수한 시체를 머리 따로 몸통 따로 살려내며, 심지어는 약물을 과다투여해서 내장만 따로 살아움직이기는 극한의 그로테스크를 통해서, 죽음이라는 ‘정지’를 부정하였을 때 불러일으키는 재앙적 상황에 대한 일종의 경고로 바라볼 수도 있다. 또한, 끝없이 살아서 움직여야 하는 인간이 불러오게 되는 파괴적인 속성에 대한 경고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외딴 산골에서 할아버지에게 사냥을 배워 솜씨 좋은 사냥꾼으로 성장하고 있는 소녀 하마지. 무사가 되겠다면서 일찌감치 산골을 떠나 수도인 에도에서 살고 있는 오빠 도세츠.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신 뒤 혼자가 된 여동생의 소식을 전해 듣고, 자기가 보살펴줄 테니 에도로 오라고 편지를 보낸다. 도세츠의 집을 찾아 에도를 헤매던 중, 하마지는 죽은 개의 목이 즐비하게 놓여져 있는 광경에 충격을 받는다. 에도의 군주가 현상금을 걸어 인간(人)과 개(犬)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세(伏)'를 사냥하게 한 뒤, 전리품으로 전시해 놓은 것이었다. 우연히 거리에서 만난 백발소년 시노의 도움으로 오빠를 무사히 만나게 된 하마지는 사냥꾼의 본능으로 후세를 쫓는다. 그리고 마침내 시노가 마지막 남은 후세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입장으로 다시 만나게 된 하마지와 시노! 이들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Homo Homini Lupus

(인간은 인간에게 있어 늑대다.-토마스 홉스)


홉스가 자신의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인간은 인간에게 있어 늑대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있어서 위협이라는 것이라 보는 것이 통상적인 분석이다. 하지만 조르조 아감벤은 자신의 저서 호모 사케르에 있어서 이 '인간은 인간에게 있어 늑대다'라는 명제를 기묘하게 분석을 한다:과거 게르만 전통에 따르면 늑대 머리가 씌워지는 처벌을 받는 자들이 있었다. 이들을 죽이는 것은 공식적으로 처벌을 받지 않았다. 아감벤은 이러한 관습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호모 사케르'의 문법을 끌어들인다:호모 사케르, 신성한 인간으로 선언된 자는 그 누구나 죽일 수 있지만 이 신성한 인간은 제물로 바쳐질 수 없다. 이 '누구나 죽일 수 없지만 희생물로 바쳐질 수 없는, 그럼에도 신성한'이란 호모 사케르의 명제를 아감벤은 법의 본질로 본다. 


아감벤은 법을 지배하는 호모 사케르의 문법을 그리스 폴리스의 삶의 양식 조에(단순하게 살아있음)와 비오스(의미있는 삶)를 통해서 분석한다. 조에란 자연에서 단순히 태어나고 죽고 하는 것은 어떠한 가치 판단의 기준도 아닌, 단순하게 거기 있다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의미있는 삶, 비오스란, 그것의 태어남과 삶에 의미가 존재하고 동시에 중요하게 여겨진다. 아감벤은 폴리스에 있어서 시민과 함께 조에, 의미없는 삶들이 함께 살았음에 주목하였다. 아감벤은 즉, 비오스란 조에라는 '예외상황'을 통해서 규정된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외상황을 통한 자신의 규정'은 호모 사케르-맘대로 죽일 수 있지만, 희생물로 바쳐질 수 없는-의 법의 문법을 통해 실현된다:예를 들어보자:사형의 경우, 사형수는 국가에 의해서 죽음을 선언받은 자들이다. 이들은 국가의 처분에 따라서 마음대로 죽임당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어떠한 숭고한 가치를 위한'희생물'은 될 수 없다. 그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헌법과 가치질서의 예외에 속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예외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헌법적 가치질서를 '재확립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인간에게 있어서 늑대다'는 이런 의미다:인간은 타인(인간)이란 존재, 예외상황을 통해서 규정된다. 타인을 배제함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다(나치즘의 유대인 학살과도 같은) 아감벤은 이러한 호모 사케르의 문법, '예외상황'이자 '법이 유보되는 지점들'의 확대와 그러한 예외상황이 실현되는 공간으로서의 '수용소'에 주목했다. 


후세-말하지 못한 내 사랑은 어찌보면 '호모 사케르'의 문법을 파악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지점을 만들어내려는 작품처럼 보인다. 물론 본인으로서는 사토미 팔견전이라는 후세의 모티브, 극장판의 원작소설도 못 읽어 본 상태에서 이러한 평가를 내리는 것이기 때문에 맥락상으로 누락되는 지점들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망념의 잠드 감독인 미야지 마사유키가 감독으로 참여했다는 점, 그리고 이미지나 이야기에 있어서 잠드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판단되는 지점이 있기에 이 글에서는 그러한 지점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분석하고자 한다.


후세에서 모든 사건의 원인은 쇼군의 후세 사냥 명령이다. 하지만, 왜 후세를 사냥해야 하는가? 후세가 인간에게 해로운 존재라서? 물론 후세는 인간의 영혼을 먹는다. 하지만 영혼을 먹지 않고 인간들 틈에 숨어서 사람처럼 살기를 택하는 후세들(이테츠루와 그녀의 아들)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후세를 사냥해야 하는가? 재밌게도 작품은 여기서 후세의 기원과 그 기원의 이야기에 푹 빠져있는 쇼군을 내세운다. 인간인 후세히메와 개인 야츠후사 사이의 사랑의 산물인 후세(늑대인간)는 아버지인 사토미 요시자네에게서 쫒겨나게 된다. 개항 직전의 상황에서 쇼군은 위태로운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함을 이야기속의 요시자네의 자신을 대입하여 극복하려 한다:즉, 외부의 것에 의해서 더렵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순수하지 못한 것을 제거한다. 그것이 바로 후세 사냥의 원인이었다. 즉, 쇼군은 자신의 존재를 순수하지 못한 후세를 죽임으로서 입증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기에 개도 인간도 아닌, 죽일 수 있지만 동시에 그것이 어떤 의미있는 목적을 위해서 받쳐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후세의 죽음은 '인간이 의미있는 인간으로 정의하기 위한 예외사항'의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후세의 기본 모티브는 철저하게 '호모 사케르'적이며 '인간은 인간에게 있어 늑대'다:후세는 사회에 있어 인간도, 개도 아니기 때문에 죽음으로서만 그 가치를 다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후세가 인간의 영혼에 목말라 하는 것, 그것은 후세에게 있어서도 인간은 '죽음'으로서 의미가 있는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작품은 일방적인 폭력이라기 보다는 서로가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는 긴장상황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쌍방향적인 호모 사케르적 전제를 깔고 시작하는 작품은 상당히 재밌는 지점을 통해서 이러한 문제 상황을 풀어나가고자 한다:그것은 바로 여자도 남자도 아닌 여자와 남자도 여자도 아닌 남자의 사랑을 통해서이다. 주인공인 하마지는 여자 사냥꾼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를 '여자'로 인지하지는 않는다. 오로지 그녀를 여자로 인지하는 자는 후세인 시노 뿐이다: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가부키 배우인 시노는 곱상한 외모와 함께 무대에서 '여성'으로 등장한다(과거 가부키 무대에서는 여자가 올라오는 것이 금기였기 때문) 즉, 시노는 인간도 개도 아닌 동시에, 여자도 남성도 아닌 기묘한 위치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작품에서 강조점을 맞추는 것은 '인간도 개도 아닌' 존재로서의 후세다:마지막에 하마지가 시노를 긍정하는 지점도, 인간도 개도 아니지만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긍정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지막에 하마지는 머리를 푼다:그녀의 남자다운 행동양식 자체는 변화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은연중에 거부하고 있었던 여성성을 그녀가 받아들임으로서 거부가 아닌 화해, 함께 살아가기를 선택함을 은연중에 암시한 것이다.


즉, 작품은 개도 인간도 아닌, 여자도 남자도 아닌, 심지어는 쇼군으로서의 정체성과 자기 자신으로서의 정체성, 눈이 멀어서 스스로 글을 쓸 수 없는 글쟁이 등등 그 어느쪽에도 끼지 못하는 변두리의 인간들이 서로 만나고 사랑하며 다투는 이야기다:그렇기에 극의 마지막 클라이막스는 일종의 대화합의 장이기도 하다. 에도의 화제 앞에서, 다양한 계층의 인간들은 힘을 합쳐서 화재에 저항한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이러한 거대한 폭력의 '인과'의 흐름을 끊어낼 수 없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마지막 동력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하마지가 마지막에 시노에게 편지를 전달하는 것, 후세와 인간이 서로 죽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기 위해서 죽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지점을 만들어낸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점들은 미야지 마사유키 감독의 데뷔작이자 전작인 망념의 잠드에서도 뚜렷한 지점이다:죽은 자와 함께 살게된 존재, 잠드가 끝없는 폭력의 순환고리를 어떻게 끊어내는가, 그리고 폭력의 문법이 끝날 때까지 나는 희망을 갖고 인내하고 기다리겠다 라고 선언하는 지점에서 망념의 잠드와 후세는 연결고리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망념의 잠드가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을 본즈라는 고퀄리티의 작화를 바탕으로 엄청난 스펙타클로 그려냈다면, 후세의 미학은 철저하게 소품적이다.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지만, 동시에 그러한 만남은 소소한 만남이며 마지막 화제와 갈등, 싸움에서조차 많은 예산이 들어갔다기 보다는 예산이 적게 들어간 지점이 눈에 보인다.


하지만, 이 둘은 많은 점에서 또다른 공통점들을 지닌다:혹자는 장르 문법을 인용하면서 독특한 질감과 내용을 통해서 우울의 디아스포라를 만들어내는 제임스 그래이와 망념의 잠드의 마지막을 이어서 보기도 했다. 망념의 잠드의 마지막은 엄청난 전투와 클라이맥스, 그 뒤에 절망에게서 희망이 승리를 쟁취하는 카타르시스를 그려내기를 거부한다. 대신에 아키유키는 히루켄 황제에게 화해의 손을 내민다:자신의 이름을 줌으로서, 히루켄 황제와 함께 살기를 꾀하는 것이다. 이런 불현듯 찾아오는 폭력의 중단이 후세의 마지막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시노와 쇼군의 싸움은 어떠한 결착으로 이어지지 않는다:오히려 쇼군의 목숨을 쥔 시노가 죽이기를 거부함으로서 폭력은 멈춘다. 감독은 주역과 악역에 대해서 똑같은 평등한 시선을 보내고, 그들의 갈등 자체가 아닌 갈등의 거대한 인과, 순환고리에 주목한다. 그렇기에 그 모든 것이 끝났기에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인)인 쇼군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바라던 안식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장르적인 클라이맥스의 거부와 함께, 작품은 세세하게 장르 공식을 파괴하는데 주력한다:사냥은 통하는 것이다, 라고 선언하는 초반 시퀸스에서 하마지는 통하는 순간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방아쇠를 당긴다. 하마지가 처음 상경한 뒤 이곳 저곳을 해매면서 평화로운 에도의 정경을 묘사하는 지점에서 잘린 후세의 머리를 전시하는 장면을 삽입하거나, 시노가 자신의 동포를 죽인 현상금 사냥꾼의 한쪽 눈을 빼앗는 지점 등등에서 폭력은 불현듯, 낯설게 삽입되어 들어온다. 그러면서 동시에 영화는 멜로드라마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멜로드라마'를 거부한다:이테츠루의 아이가 죽어서 목이 잘렸다는 이야기(전해지지 않은 편지, 시노가 이테츠루에게 아들에 대해서 말못하는 지점, 어째서 이렇게 어린 늑대까지 죽였냐고 하마지가 일갈했던 지점, 시노의 격렬한 분노 등등에서)는 아주 명백하지만 극 내에서 그것은 이야기의 형태로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자극적인 소재'를 극은 회피함으로서 이야기를 담담하게 만들어낸다. 이것은 클라이맥스에 있어서 결정적인 폭력을 거부하는 지점 등과 명확하게 맞물려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장르적 공식을 거부하는 지점을 바탕으로, 모든 케릭터들은 평등해진다:남자도 여자도 아닌 여사냥꾼과 늑대도 인간도 아닌 가부키 남자 배우, 변두리 빈민촌에서 한탕하기를 바라는 속물적이지만 인간적인 오빠와 홀아비와 아들 등으로 구성된 빈민촌 이웃들, 유명한 이야기꾼과 그의 손녀, 심지어는 이 모든 것의 원흉과 현상금 사냥꾼까지. 극은 일방적으로 악과 선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어떤 의미에서 극은 그렇기에 '공정'하다.


결론적으로 후세-말하지 못한 내 사랑은 감독인 미야지 마사유키의 가능성을 보여준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물론 이것이 모티브-소설 원작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가, 는 알 수 없기에 이것이 전적으로 감독의 재량이자 역량이라고 드러난다고는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망념의 잠드의 연장선상에서, 후세는 아쉬운 부분도 있었지만(스펙타클의 부족함), 동시에 경계가 희미한 변두리 인간들의 이야기를 장르적 공식을 묘하게 뒤틀고 거부하는 동시에 평등하게 다루고 있다는 지점에서 후세는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를 스타일적인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유아사 마사유키와 함께 감독 미야지 마사유키는 앞으로 기대가 되는 감독이라고 볼 수 있다. 








덧.원래 제목은 후세-철포 소녀의 사냥이야기 였으나, 국내에서 후세-말하지 못한 내 사랑으로 이야기를 바꾸었다. 

하지만 본인은 원제 보다는 번역한 제목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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