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외딴 산골에서 할아버지에게 사냥을 배워 솜씨 좋은 사냥꾼으로 성장하고 있는 소녀 하마지. 무사가 되겠다면서 일찌감치 산골을 떠나 수도인 에도에서 살고 있는 오빠 도세츠.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신 뒤 혼자가 된 여동생의 소식을 전해 듣고, 자기가 보살펴줄 테니 에도로 오라고 편지를 보낸다. 도세츠의 집을 찾아 에도를 헤매던 중, 하마지는 죽은 개의 목이 즐비하게 놓여져 있는 광경에 충격을 받는다. 에도의 군주가 현상금을 걸어 인간(人)과 개(犬)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세(伏)'를 사냥하게 한 뒤, 전리품으로 전시해 놓은 것이었다. 우연히 거리에서 만난 백발소년 시노의 도움으로 오빠를 무사히 만나게 된 하마지는 사냥꾼의 본능으로 후세를 쫓는다. 그리고 마침내 시노가 마지막 남은 후세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입장으로 다시 만나게 된 하마지와 시노! 이들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Homo Homini Lupus

(인간은 인간에게 있어 늑대다.-토마스 홉스)


홉스가 자신의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인간은 인간에게 있어 늑대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있어서 위협이라는 것이라 보는 것이 통상적인 분석이다. 하지만 조르조 아감벤은 자신의 저서 호모 사케르에 있어서 이 '인간은 인간에게 있어 늑대다'라는 명제를 기묘하게 분석을 한다:과거 게르만 전통에 따르면 늑대 머리가 씌워지는 처벌을 받는 자들이 있었다. 이들을 죽이는 것은 공식적으로 처벌을 받지 않았다. 아감벤은 이러한 관습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호모 사케르'의 문법을 끌어들인다:호모 사케르, 신성한 인간으로 선언된 자는 그 누구나 죽일 수 있지만 이 신성한 인간은 제물로 바쳐질 수 없다. 이 '누구나 죽일 수 없지만 희생물로 바쳐질 수 없는, 그럼에도 신성한'이란 호모 사케르의 명제를 아감벤은 법의 본질로 본다. 


아감벤은 법을 지배하는 호모 사케르의 문법을 그리스 폴리스의 삶의 양식 조에(단순하게 살아있음)와 비오스(의미있는 삶)를 통해서 분석한다. 조에란 자연에서 단순히 태어나고 죽고 하는 것은 어떠한 가치 판단의 기준도 아닌, 단순하게 거기 있다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의미있는 삶, 비오스란, 그것의 태어남과 삶에 의미가 존재하고 동시에 중요하게 여겨진다. 아감벤은 폴리스에 있어서 시민과 함께 조에, 의미없는 삶들이 함께 살았음에 주목하였다. 아감벤은 즉, 비오스란 조에라는 '예외상황'을 통해서 규정된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외상황을 통한 자신의 규정'은 호모 사케르-맘대로 죽일 수 있지만, 희생물로 바쳐질 수 없는-의 법의 문법을 통해 실현된다:예를 들어보자:사형의 경우, 사형수는 국가에 의해서 죽음을 선언받은 자들이다. 이들은 국가의 처분에 따라서 마음대로 죽임당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어떠한 숭고한 가치를 위한'희생물'은 될 수 없다. 그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헌법과 가치질서의 예외에 속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예외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헌법적 가치질서를 '재확립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인간에게 있어서 늑대다'는 이런 의미다:인간은 타인(인간)이란 존재, 예외상황을 통해서 규정된다. 타인을 배제함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다(나치즘의 유대인 학살과도 같은) 아감벤은 이러한 호모 사케르의 문법, '예외상황'이자 '법이 유보되는 지점들'의 확대와 그러한 예외상황이 실현되는 공간으로서의 '수용소'에 주목했다. 


후세-말하지 못한 내 사랑은 어찌보면 '호모 사케르'의 문법을 파악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지점을 만들어내려는 작품처럼 보인다. 물론 본인으로서는 사토미 팔견전이라는 후세의 모티브, 극장판의 원작소설도 못 읽어 본 상태에서 이러한 평가를 내리는 것이기 때문에 맥락상으로 누락되는 지점들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망념의 잠드 감독인 미야지 마사유키가 감독으로 참여했다는 점, 그리고 이미지나 이야기에 있어서 잠드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판단되는 지점이 있기에 이 글에서는 그러한 지점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분석하고자 한다.


후세에서 모든 사건의 원인은 쇼군의 후세 사냥 명령이다. 하지만, 왜 후세를 사냥해야 하는가? 후세가 인간에게 해로운 존재라서? 물론 후세는 인간의 영혼을 먹는다. 하지만 영혼을 먹지 않고 인간들 틈에 숨어서 사람처럼 살기를 택하는 후세들(이테츠루와 그녀의 아들)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후세를 사냥해야 하는가? 재밌게도 작품은 여기서 후세의 기원과 그 기원의 이야기에 푹 빠져있는 쇼군을 내세운다. 인간인 후세히메와 개인 야츠후사 사이의 사랑의 산물인 후세(늑대인간)는 아버지인 사토미 요시자네에게서 쫒겨나게 된다. 개항 직전의 상황에서 쇼군은 위태로운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함을 이야기속의 요시자네의 자신을 대입하여 극복하려 한다:즉, 외부의 것에 의해서 더렵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순수하지 못한 것을 제거한다. 그것이 바로 후세 사냥의 원인이었다. 즉, 쇼군은 자신의 존재를 순수하지 못한 후세를 죽임으로서 입증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기에 개도 인간도 아닌, 죽일 수 있지만 동시에 그것이 어떤 의미있는 목적을 위해서 받쳐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후세의 죽음은 '인간이 의미있는 인간으로 정의하기 위한 예외사항'의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후세의 기본 모티브는 철저하게 '호모 사케르'적이며 '인간은 인간에게 있어 늑대'다:후세는 사회에 있어 인간도, 개도 아니기 때문에 죽음으로서만 그 가치를 다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후세가 인간의 영혼에 목말라 하는 것, 그것은 후세에게 있어서도 인간은 '죽음'으로서 의미가 있는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작품은 일방적인 폭력이라기 보다는 서로가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는 긴장상황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쌍방향적인 호모 사케르적 전제를 깔고 시작하는 작품은 상당히 재밌는 지점을 통해서 이러한 문제 상황을 풀어나가고자 한다:그것은 바로 여자도 남자도 아닌 여자와 남자도 여자도 아닌 남자의 사랑을 통해서이다. 주인공인 하마지는 여자 사냥꾼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를 '여자'로 인지하지는 않는다. 오로지 그녀를 여자로 인지하는 자는 후세인 시노 뿐이다: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가부키 배우인 시노는 곱상한 외모와 함께 무대에서 '여성'으로 등장한다(과거 가부키 무대에서는 여자가 올라오는 것이 금기였기 때문) 즉, 시노는 인간도 개도 아닌 동시에, 여자도 남성도 아닌 기묘한 위치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작품에서 강조점을 맞추는 것은 '인간도 개도 아닌' 존재로서의 후세다:마지막에 하마지가 시노를 긍정하는 지점도, 인간도 개도 아니지만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긍정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지막에 하마지는 머리를 푼다:그녀의 남자다운 행동양식 자체는 변화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은연중에 거부하고 있었던 여성성을 그녀가 받아들임으로서 거부가 아닌 화해, 함께 살아가기를 선택함을 은연중에 암시한 것이다.


즉, 작품은 개도 인간도 아닌, 여자도 남자도 아닌, 심지어는 쇼군으로서의 정체성과 자기 자신으로서의 정체성, 눈이 멀어서 스스로 글을 쓸 수 없는 글쟁이 등등 그 어느쪽에도 끼지 못하는 변두리의 인간들이 서로 만나고 사랑하며 다투는 이야기다:그렇기에 극의 마지막 클라이막스는 일종의 대화합의 장이기도 하다. 에도의 화제 앞에서, 다양한 계층의 인간들은 힘을 합쳐서 화재에 저항한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이러한 거대한 폭력의 '인과'의 흐름을 끊어낼 수 없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마지막 동력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하마지가 마지막에 시노에게 편지를 전달하는 것, 후세와 인간이 서로 죽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기 위해서 죽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지점을 만들어낸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점들은 미야지 마사유키 감독의 데뷔작이자 전작인 망념의 잠드에서도 뚜렷한 지점이다:죽은 자와 함께 살게된 존재, 잠드가 끝없는 폭력의 순환고리를 어떻게 끊어내는가, 그리고 폭력의 문법이 끝날 때까지 나는 희망을 갖고 인내하고 기다리겠다 라고 선언하는 지점에서 망념의 잠드와 후세는 연결고리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망념의 잠드가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을 본즈라는 고퀄리티의 작화를 바탕으로 엄청난 스펙타클로 그려냈다면, 후세의 미학은 철저하게 소품적이다.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지만, 동시에 그러한 만남은 소소한 만남이며 마지막 화제와 갈등, 싸움에서조차 많은 예산이 들어갔다기 보다는 예산이 적게 들어간 지점이 눈에 보인다.


하지만, 이 둘은 많은 점에서 또다른 공통점들을 지닌다:혹자는 장르 문법을 인용하면서 독특한 질감과 내용을 통해서 우울의 디아스포라를 만들어내는 제임스 그래이와 망념의 잠드의 마지막을 이어서 보기도 했다. 망념의 잠드의 마지막은 엄청난 전투와 클라이맥스, 그 뒤에 절망에게서 희망이 승리를 쟁취하는 카타르시스를 그려내기를 거부한다. 대신에 아키유키는 히루켄 황제에게 화해의 손을 내민다:자신의 이름을 줌으로서, 히루켄 황제와 함께 살기를 꾀하는 것이다. 이런 불현듯 찾아오는 폭력의 중단이 후세의 마지막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시노와 쇼군의 싸움은 어떠한 결착으로 이어지지 않는다:오히려 쇼군의 목숨을 쥔 시노가 죽이기를 거부함으로서 폭력은 멈춘다. 감독은 주역과 악역에 대해서 똑같은 평등한 시선을 보내고, 그들의 갈등 자체가 아닌 갈등의 거대한 인과, 순환고리에 주목한다. 그렇기에 그 모든 것이 끝났기에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인)인 쇼군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바라던 안식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장르적인 클라이맥스의 거부와 함께, 작품은 세세하게 장르 공식을 파괴하는데 주력한다:사냥은 통하는 것이다, 라고 선언하는 초반 시퀸스에서 하마지는 통하는 순간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방아쇠를 당긴다. 하마지가 처음 상경한 뒤 이곳 저곳을 해매면서 평화로운 에도의 정경을 묘사하는 지점에서 잘린 후세의 머리를 전시하는 장면을 삽입하거나, 시노가 자신의 동포를 죽인 현상금 사냥꾼의 한쪽 눈을 빼앗는 지점 등등에서 폭력은 불현듯, 낯설게 삽입되어 들어온다. 그러면서 동시에 영화는 멜로드라마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멜로드라마'를 거부한다:이테츠루의 아이가 죽어서 목이 잘렸다는 이야기(전해지지 않은 편지, 시노가 이테츠루에게 아들에 대해서 말못하는 지점, 어째서 이렇게 어린 늑대까지 죽였냐고 하마지가 일갈했던 지점, 시노의 격렬한 분노 등등에서)는 아주 명백하지만 극 내에서 그것은 이야기의 형태로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자극적인 소재'를 극은 회피함으로서 이야기를 담담하게 만들어낸다. 이것은 클라이맥스에 있어서 결정적인 폭력을 거부하는 지점 등과 명확하게 맞물려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장르적 공식을 거부하는 지점을 바탕으로, 모든 케릭터들은 평등해진다:남자도 여자도 아닌 여사냥꾼과 늑대도 인간도 아닌 가부키 남자 배우, 변두리 빈민촌에서 한탕하기를 바라는 속물적이지만 인간적인 오빠와 홀아비와 아들 등으로 구성된 빈민촌 이웃들, 유명한 이야기꾼과 그의 손녀, 심지어는 이 모든 것의 원흉과 현상금 사냥꾼까지. 극은 일방적으로 악과 선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어떤 의미에서 극은 그렇기에 '공정'하다.


결론적으로 후세-말하지 못한 내 사랑은 감독인 미야지 마사유키의 가능성을 보여준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물론 이것이 모티브-소설 원작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가, 는 알 수 없기에 이것이 전적으로 감독의 재량이자 역량이라고 드러난다고는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망념의 잠드의 연장선상에서, 후세는 아쉬운 부분도 있었지만(스펙타클의 부족함), 동시에 경계가 희미한 변두리 인간들의 이야기를 장르적 공식을 묘하게 뒤틀고 거부하는 동시에 평등하게 다루고 있다는 지점에서 후세는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를 스타일적인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유아사 마사유키와 함께 감독 미야지 마사유키는 앞으로 기대가 되는 감독이라고 볼 수 있다. 








덧.원래 제목은 후세-철포 소녀의 사냥이야기 였으나, 국내에서 후세-말하지 못한 내 사랑으로 이야기를 바꾸었다. 

하지만 본인은 원제 보다는 번역한 제목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