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방송국 프로듀서 제임스 발라드(James Ballard: 제임스 스페이더 분). 그는 애인 캐서린(Catherine Ballard: 데보라 웅거)과 기이한 성생활을 즐긴다. 이들은 서로의 성적인 문제, 특히 불륜 행각에 자극을 받는 묘한 관계다. 어느날 제임스는 운전도중 여의사 헬렌 레밍턴(Helen Remington: 홀리 헌터)의 차와 충돌한다. 충격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린 제임스의 옆에는 충돌로 튕겨져 나온 헬렌의 남편이 거꾸로 처박힌 채 죽어 있다. 제임스는 사고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헬렌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야릇한 성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러면서 자동차 충돌 사고에 숨어있는 위험, 섹스, 죽음 사이의 이상한 관계 속으로 빨려들어간다.(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J.G 발라드 원작,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영화 크래쉬는 그야말로 도발적인 영화다. 영화에 있어서 서사는 거세되어 있으며, 케릭터 묘사 역시 거의 전무하다. 영화는 상징, 은유 조차도 거부하며 단일하면서 이미지 모두를 관통하는 해석조차도 통용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영화 내에서 본이 자신의 작업이 과학에 의한 신체의 변형이라고 주장을 하다가, 갑자기 이를 뒤집어서 섹스와 죽음의 쾌락에 대한 작업이라고 이야기한다. 도대체 무엇이 진실인가?) 그리고 영화는 전통적인 서사와 이미지를 뭉그러뜨리고 거세한 자리에 섹스의 이미지를 확대-재생산 하여 채워넣는다. 그렇기에 설명만 들으면 영화 크래쉬는 '포르노'와 다를바 없어보인다. 심지어는 크로넨버그의 감독 에이전시마저도 '당신 이런 영화 만들면 커리어 죄다 박살난다'라고 경고했을 정도로 영화는 도발적이며 수위가 높다.


하지만 크레쉬는 포르노가 아니다;이게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섹스와 쾌락에 빠져드는 인간군상만을 다루고, 서사를 배제하여 섹스의 선정적인 이미지로 채워넣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성적인 '자극'을 주는데 천착하지 않는다. 오히려 보는 사람으로서 뜨악하게 만드는 경악스러운 이미지의 향연이며, 당시 칸느 심사위원장을 맡은 마틴 스콜세지는 정말로 뻔뻔한 영화이자 도발이라 '칭송'하였고, 보들리야르는 원작에 대해서 '시뮬라시옹 시대의 걸작'이라 평가하기까지 하였다. 크레쉬가 지적하는 지점들은 그런 성이나 쾌락에 대한 담론을 넘어서는 강렬한 이미지의 연속을 통해서 쾌락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종말' 그 자체를 다루고 있다. 또한, 크로넨버그 필모그래피에 있어서 원작자인 발라드가 얼마나 그의 영화 세계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출발점' 같은 영화다.


크래쉬를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보들리야르의 시뮬라시옹 담론을 들고 오는 것은 매우 적절해보인다.(심지어 보들리야르는 자신의 시뮬라시옹에서 JG 발라드의 원작 크래쉬에 대해서 무려 한챕터를 활용하기까지 한다) 기본적으로 보들리야르가 시뮬라시옹을 통해서 지적하는 지점들은 다음과 같다;시뮬라시옹에 따르면 현대사회는 실재에서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이미지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파생실재에 의해서 만들어진다(사건은 보도에 의해서 발생한다) 이러한 파생실재의 사회에서의 시뮬라시옹의 존재는 과거 정신분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동력인 '무의식'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가령 당신이 어떤 행동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이 행동의 원인을 당신의 '무의식'이라고 설명할 때, 그 '무의식'이란 무엇인가? 무의식이란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것, 내가 알 수 없는 것이다;무의식은 실체에서 벗어난 하나의 '이미지'이다. 그렇기에 이 '무의식에 근거한 정신분석'은 그 스스로 빠져나올수 없는 미로속(파생실재가 파생실재를 만들어내는)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기 때문에 위험하다. 보들리야르가 이야기한 시뮬라시옹이란 것은 바로 그러한 지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그리고 이러한 파생실재들이 힘을 얻는 것은 바로 이런 파생실재들의 연쇄라는 본질을 '숨기는 것'이며 이 와중에 진실은 함열(블랙홀 처럼)되어 사라진다;마치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보도하고 크게 알림으로서 정치의 부정적인 뉘앙스를 제거하고 긍정적인 정치가 실존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그런 지점들처럼 말이다.


영화 크레쉬는 바로 그런 지점에서 높게 비상한다. 원작은 그러한 행위를 기계적이고 학술적인 언어를 이용해서 섹스의 에로티시즘을 거세하고 인간-인간, 인간-기계의 결합을 묘사하며, 그러한 결합에 의해서 인간들이 쾌락과 섹스에 천착하지만 섹스 자체가 사라지는 것을 묘사했다. 하지만 영화판은 그러한 묘사 자체를 할 수 없다. 매체 특성상, 소설은 서술을 통해서 모든 것이 드러나지만 영화는 서술이 아닌 보여주는 매체이기 때문에 원작의 질감을 살릴 수 없는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크로넨버그는 이러한 난제를 연출이라는 정공법으로 훌륭하게, 그리고 우직하게 꿰뚫고 들어가서 해결한다.


크래쉬에서 섹스는 전적으로 행해지지 않는 무언가이다. 이는 섹스의 정의를 행위에 놓느냐 아니면 행위자끼리의 육체적-정신적 결합에 놓느냐에 따라서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영화가 다루는 섹스의 질감은, 타인을 향한 열망이나 열정, 욕정에 기반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타인의 육체도 큰 문제가 되지 아니한다;이들의 섹스는 전적으로 자신 내부로 함열되어 응축되는 무언가이며 그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비정상적인 탐구이다. 주인공 부부인 제임스-케서린의 기묘한 관계(부부는 부부지만, 서로의 섹스 관계에 대해서는 터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감정이 식어있는 듯한 기묘한 광경들), 본과 만난 이후 케서린이 본에 대한 망상을 펼치면서 오르가즘을 느끼지만 동시에 뒤에서 피스톤질하는 제임스는 별개의 오르가즘을 느끼는 듯한 미묘한 거리감을 느끼게 만드는 광경들, 서로의 성기를 만지지만 시선은 서로에게 고정되지 않은체 자동차 충돌을 재현하는 비디오 테이프에 초점을 맞춰서 마치 애무가 아닌 자위를 하는 듯한 인간 군상 등등은 그러한 묘한 '거리감' 혹은 열정이 냉각되어 응축되어 들어가는 지점들을 지적한다;이들의 열정은 차갑게 식어서 자기 내부로 파고들며 섹스의 문제는 전적으로 나-타자의 문제가 아닌 나만의 문제가 된다. 그렇기에 크래쉬의 질감은, 마치 사정한 뒤에 차게 식어서 남아버린 정액과도 같은 끈적하고 불쾌한 무언가를 연상케 만든다.


이러한 파충류적 질감은 다양한 형태의 섹스(인간의 신체의 연장인 자동차를 박살내는 행위, 흉터와 보철에 대한 페티쉬, 동성애, 강간, 여장 등등)는 자극적인 소재에 천착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냉정하고 불쾌하고 끈적거리는 시선으로 다뤄지는 온갖 극단적인 형태의 섹스들은, 이들의 문제가 본질적으로 만천하에 드러내버린다;인간들의 파괴적이고 비정상적인 쾌락, 파생실재적인 이미지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 말이다. 예를들면 본이 강간하듯이 캐서린과 관계를 맺은 뒤, 제임스가 탐하는 것은 본이 케서린에게 거칠게 남긴 손자국이었으며, 분명히 고통스러울법한 흉터를 애무하자 희열을 느끼는 장면들, 그리고 자동차 사고와 충돌에서 쾌락을 얻는 인간 군상들까지. 그렇기에 이들이 벌이고 있는 행태들은 전적으로 시뮬라시옹적이다;인물들은 섹스에서 파생된 파생실재에 대한 탐닉과 탐구를 한다,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 섹스는 함열되어 사라진다. 그리고 이러한 진실은, 그들이 하는 '행위'에 의해서 전적으로 가려진다. 


영화는 이러한 파생실제를 탐닉하는 인간들이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곳은 치명적인 파멸, 죽음이다;프로이트가 지적했던 섹스의 쾌락과 죽음이라는 양가적인 지점들, 사드가 소돔 120일에서 보여주었던 과도한 섹스에서 파괴적인 섹스로의 변화까지. 하지만, 크래쉬가 도달하는 지점은 이들의 불같은 열정과 동력에의한 끓어오르는 지옥이 아니다. 자신 내부로 응축하여 타인의 버튼만을 탐하는 냉정한 파충류 인간들의 이성적이고 숙명적인 파멸이다. 본이 죽고 난 뒤에, 자기들끼리 자동차 충돌을 재현하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상처입은 케서린의 육신을 애무하며, '다음에는...다음번에는 될거야...'라고 속삭이는 제임스의 모습은 결국 파생실재의 연쇄의 끝, 죽음에 도달한 인간의 파멸인 것이다. 


크래쉬는 누군가 그랬고, 이 블로그에서 계속 인용하고는 있지만 크로넨버그야말로 이 시대의 섹스영화의 1인자라 할 수 있는 최고의 지점들을 보여준다. 섹스에 탐닉하는 파충류-인간들 보여주는 크래쉬의 지점들은 인간과 물건 또는 기계와 결합하는 지점에 대한 크로넨버그의 탐구가 섹스라는 수단을 통해서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발라드의 팬이라고 불려지는 크로넨버그가 발라드의 독특한 작품관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를 알아볼 수 있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발라드가 크래쉬를 통해서 어떤 '종말'을 예견하였다면, 크로넨버그는 거기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현재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해본다(폭력의 역사나 데인저러스 메소드 같은)


결론적으로 크래쉬는 대단히 도발적인 영화다. 여러 생각할거리를 던져주는 영화며, 완성도 있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이 영화 좋으니까 보세요 라고 추천할 수 없는 그러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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