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 스포일러 있습니다.

인류사를 돌이켜보면, 우리가 '다른 문화'와 '우리 문화'를 다원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얼마되지 않았다. 고대와 중세의 신화들은 지역과 부족 단위로 쪼개져 있었고, 세상에 대한 설명은 지역적이었다. 심지어 같은 신화와 종교를 믿는 부족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같은 뿌리를 두되 다른 신화와 해석을 믿는 타인으로 분화되었다. 볼 수 있는 세계가 한정되고, 교류할 수 있는 반경이 작기 때문에 중세와 고대 사회는 현대사회에 비교해서 지역적이고 특수하며 폐쇄적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특수성과 폐쇄성이 현대 사회에 비해 중세와 고대사회가 더 '다양하고 잘게 쪼개진 사회'가 될 수 있었다는 점도 존재한다: 현대사회가 세계적이고 과학에 기반한 해석, 보편적인 인권에 대한 믿음 등에 기반하여 '보편적인 뿌리 위에 세워진 다양성'이라는 가치 체계를 만들었다면, 고대와 중세는 오로지 '우리 이외에는 존재할 수 없는/혹은 무가치한' 가치 체계에 기반하여 자기 믿음을 수립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고대 중세 사회의 개개인이 타인과 타문화를 받아들이는 방식과 별개로 고대 중세 사회가 갖는 다양한 집단으로 만들어진 스펙트럼이란 현대사회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비유하자면 현대사회가 빛이 다양한 색상과 파장을 지닌 스펙트럼으로 구성되어있다는 걸 안 상태에서 빛을 다양성을 지닌 구조체로 인식한다면, 고대 중세 사회는 빛의 한 색상만 보고 그것이 빛의 전체라고 인식하는 경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흥미로운 부분은 빛이란 서로 다른 색상(붉은색이다, 푸른색이다)이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섞이거나 충돌할 때 발생하는 일들일 것이다.

로버트 애거스 감독의 노스맨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모티브가 된 암레트 왕자의 전설을 베이스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하지만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기독교 중세 봉건 왕조의 이미지를 베이스로 한 4대 비극의 햄릿과 다르게 영화는 바이킹 문화권인 암레트 왕자의 원전 이야기를 다루는데 주력한다. 감독의 주 관심사가 현대 이전의 시대(더 위치 - 중세~근대, 라이트하우스 - 근대)의 이미지들을 다루는 것인만큼, 바이킹 문화를 다루는 노스맨 역시 감독의 주 관심사의 연장선에 놓인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노스맨은 감독의 전작들(더 위치, 라이트하우스)에 비해서 미학과 서사적으로 더욱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

노스맨은 기본적으로 신화를 다루는 작품이다. 하지만 노스맨의 '신화'의 개념은 대중매체에서 다루는 신화의 개념과는 완전히 다르다. 일반적으로 대중문화에서 신화란 '존재하지 않은 것에 대한 동경'이라 할 수 있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 같은 작품들은 특수효과나 분장들을 이용해서 이 세상에 없는 것들을 묘사한다. 기괴한 것, 웅장한 것, 아름다운 것 등등 인간의 상상력과 첨단 기술들이 신화적 세계를 구축하는데 사용되었다. 노스맨에도 그러한 비현실적인 요소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노스맨의 신화에 대한 묘사는 존재하지 않은 것에 대한 동경과 거리가 멀다.

노스맨의 신화적 이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화가 고대 ~ 중세 사회의 사람들에게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고대~중세인들에게 있어서 신화란 단순히 거대한 것과 아름다운 것, 위대한 것에 대한 동경이 아니었다. 신화는 세계를 인식하는 도구였다. 대중문화와 신화의 관계를 논한 조셉 켐벨의 신화학이나 기독교와 이단 종교 사이의 관계를 다룬 프레이저의 황금가지, 인간의 믿음과 공간이 어떠한 관계를 갖는가에 대한 공간 미학 담론 토포필리아까지, 수많은 저서들과 분석들이 과거인들의 신화가 그저 단순한 우상숭배나 미개한 믿음이 아닌 그 시대의 사유방식을 다룬다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고대인들의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 복잡한 속성들이 있지만, 그중 여기서 눈여겨 보고자 하는 것은 신화의 '강박적'인 속성일 것이다. 신화에서의 강박이란 신화가 정의내리고 있는 구조에 대한 집착이자 모든 것을 그 구조 아래 묶고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마치 주문처럼, 반복적이고 특정한 언어 사용을 통해 자연과 정령, 더 고차원적인 존재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인간의 강한 믿음이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그 믿음은 신화적 구조 아래서 보상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로버트 애거스의 작품들은 현대 이전의 인물 군상들의 심리와 세계를 강박적인 이미지의 구조로 재해석하고 다룸으로써 현대인들도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게끔 만드는데 맞추고 있다. 더 위치에서는 주인공에 대한 기독교적인 차별과 착취로 어떻게 근~중세 시대의 여성이 마녀가 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었는지를, 라이트하우스에서는 고립된 환경에서 어떻게 근대인들이 미쳐가는지를 다루었다. 이들 작품의 핵심은 현대 이전의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생각하고 세상을 바라보았다'였고, 더 나아가서 그것을 단순히 대사나 서사가 아닌 이미지의 형태로 구현하여 여타 작품들과 다른 독자적인 작품들을 구축하였다. 

노스맨 역시 그런 작품이다. 분화하는 화산을 보여주며 이야기의 끝을 암시하는 영화는 대칭적인 이미지들과 상징들을 보여주면서 신화 이전의 강박을, 더 나아가 강박이 어떻게 신화를 구축하는지를 보여준다. 많은 장면에서 이는 두드러지는데, 대표적인 장면은 영화의 초반 시퀸스에서 아버지가 삼촌에게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보면서 암레트가 주문처럼(아버지에게 복수하고, 어머니를 구하고, 원수를 죽인다) 자기 암시를 거는 부분일 것이다. 강박적으로 자신의 사명을 되새김질하면서 먼 바다로 출항하는 장면에서 장면은 바다로 나가는 바위가 좌우로 놓여 있어 마치 소년 암레트가 관문을 지나 어른이 되는듯한 이미지를 형성한다. 또한 그 좌우 대칭의 구조를 통해서 반복적이고 대칭적인 구조와 강박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도 주력한다.

노스맨에서의 신화의 강박증은 비단 작품의 컷이나 주인공의 심리를 구성하는 것 이상의 영향력이 있다. 그것은 신화와 세계를 설명하는 방식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노스맨에서도 신화를 다룰 때 필수로 등장하는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러한 방법이 다소 모호하게 그려진다는 것이 흥미롭다:가령, 복수를 위한 칼을 가지기 위해 시체와 사투를 벌이는 장면은 컷의 모호한 구성(되살아난 시체의 목을 내려친 후, 카메라 움직임을 통해 칼을 줍는 첫 상황으로 돌아와 마치 그것이 인물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환상처럼 다루었다)이라든가, 처마에 묶인 암레트를 구하는 까마귀(오딘은 지혜를 얻기 위해 세계수에 스스로를 교수형하였으며, 까마귀는 오딘의 상징이기도 했다) 같은 것들은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암시하지만 그것이 실제 초자연적인지 아니면 그저 인물의 믿음에 따라 세상을 그렇게 해석한 것인지 알 수 없게끔하는 모호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모호함이 신화의 장엄함과 위대함보다도 신화의 가장 뼈대라 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강박적인 믿음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는 암레트 왕자의 복수극을 영화는 여러 신화를 믿는 공동체의 충돌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암레트는 오딘을 주신으로 믿는 오딘 계열을 따르지만, 복수의 대상인 삼촌은 오딘이 아닌 여신 프레이야를 믿는 모습을 보여준다. 신화를 분석하는 일부 학계에서는 원래 아스 계열(오딘이 주신인)과 바냐르 계열(프레이야가 주신인)이 서로 나뉘어져있다가 합쳐진 것으로 해석하는데(구체적인 근거가 없기에 어디까지나 가설로만 존재하는 학설이다), 영화는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암레트와 삼촌의 대립을 남성적인 오딘과 여성적인 프레이야의 대립으로 치환시킨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이 암레트의 어머니다. 어머니를 구하겠다는 암레트의 다짐은 사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배신하고 삼촌을 끌어들여 왕위를 찬탈했다는 사실에 무너진다. 세계에 대한 하나의 설명(아버지에 대한 복수, 어머니의 구출, 배신자의 복수)이 무너지는 순간인데, 영화는 도입부의 어머니 방의 장면과 아버지의 가르침(여자는 방에 비밀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 교차하면서 복선을 깔아두었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그것이 하나의 문화권 내에서도 모계(어머니와 프레이야를 모시는 바나르 신족 계열)와 부계(아버지와 오딘을 모시는 아스 신족 계열)의 싸움으로 치환되어 들어온다. 하나의 세계와 사건을 두고 두가지 상반된 진실이 충돌한다는 점을 감독은 일종의 고대인들의 다문화(?)적 관점으로 다뤄내고 있다.

하지만 노스맨이 로버트 애저스의 다른 영화보다 뛰어난 점은 비단 이미지만 제공하는 것이 아닌 그것을 묶어서 하나의 독특한 메세지로 만드는데 있다. 세계를 설명하는 신화와 기저에 깔린 강박은 새로운 해석을 만나면서 흔들리고 새로운 탈출구를 찾는다. 암레트와 같이 노예로 팔려온 슬라브 족 여인이 그의 복수를 돕는 과정에서 사랑에 빠지고, 그 복수와 파멸이라는 결말에서 다른 길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녀 역시 암레트의 미래를 점칠 때 신화적인 관점을 곁들여서 바라본다는 것인데, 북구 신화가 아닌 슬라브 계통의 신화에 근거하여 신탁을 듣는다. 서로 다른 두 믿음을 가진 세계가 화합하여 공존하는 점에서 신화적 이미지가 가진 편협함과 강박을 넘어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극의 클라이맥스에서 암레트는 여인이 자신의 쌍둥이 자식을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이 본 신탁을 재해석한다:처음에 그는 주신 오딘의 신탁에 따라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어머니를 구출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여인이 자식을 회임한 후에는 자신의 원수인 삼촌으로부터 자식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위협을 제거하는 것으로 변화한다. 강박적인 세계관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닌 자식이라는 새로운 가능성과 미래를 발견하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해석으로 바뀔 가능성을 가진 운명을 재해석 하여 바뀌지 않는 결말을 가진 숙명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점은 신화와 삶을 받아들이는 고대인의 독특한 시각이자 삶에 대한 페이소스를 느끼게 만든다.

그렇기에 로버트 애저스의 영화 노스맨은 신화적 이미지의 재해석을 뛰어넘는다. 그것은 고대인들이 신화를 남겼을 때, 가장 근저에 남아있는 세계를 향한 강박과 삶에 대한 희로애락, 그리고 더 나아가서 다른 문화를 받아들여 성숙해지고 더 나아가서 끝에 남은 파국을 담담하게 받아들여 뒷세대에게 자신의 유산을 남기는 거대한 드라마다. 노스맨은 강렬하고도 강박적인 이미지를 제공하는 동시에 그 이미지로부터 벗어나며 그것을 성숙하게 받아들이는 고대인을 다룸으로써 대중문화에서 신화들을 교차하여 재해석한다. 이전작들이 이미지를 정교하게 다루는데 집중하였다면, 이제 감독은 자신이 잘하는 것을 넘어서 이미지로 독특한 감수성과 공감대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많은 감독들이 자신이 잘하는 것에 천착하다 커리어를 마무리 짓는걸 생각한다면 로버트 애저스는 노스맨을 통해 한 층 더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론을 내리자면, 노스맨은 훌륭한 영화다. 물론 캐스팅에 비해서 대중적이지 않은 이미지와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고, 일반적인 신화를 다룬 영화를 생각한다면 대단히 낯설고 생소할 것이다. 그러나 그 낯섬과 생소함 속에서 영화는 신화의 근저에 깔려있는 감수성을 다루고, 그것을 신화의 특수성이 아닌 좀더 인간사의 보편 타당한 경험으로 승화시키는데 주력한다.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은 아닐진 몰라도, 노스맨은 대단히 인상적이고 한번쯤은 감상해보는 것을 추천하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