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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애니에 대한 잡생각


1.시험준비기간에 게임하기는 좀 뭐해서, 그냥 미루어두었던 창궁의 파프너를 감상 완료했습니다. 평가를 하자면, 그림체 때문에 은근히 숨겨진 명작이랄까, 내가 왜 이 작품을 여태까지 스킵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좀 아쉬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2.구조적으로 13화 기준으로 초반부-중반부-중후반부-후반부 이렇게 4단계로 구성 되어있는데, 끝까지 보고 나면 '아 구조적으로 훌륭하게 짜여져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초반부에 갑작스런 페스튬과의 인카운터와 죽어가는 등장인물들과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주인공 카즈키, 그리고 중반부에는 카즈키가 섬이라는 유토피아를 나가서 진실을 보고 자신이 있을 장소를 깨닫습니다. 중후반부에서는 카즈키를 비롯한 파프너의 파일럿들과 섬의 어른들 사이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마지막 후반부에는 그러한 깨달음과 공감대를 통해 인류와 페스튬, 그리고 세계와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와 이유를 확립하게 됩니다.

초반 13화와 후반 13화가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고, 초반부의 암울함과 후반부의 희망의 사이에서 적절하게 균형을 맞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냥 막장같이 암울하지도, 유치하게 밝지도 않고 그 중간에서 중도를 유지하는 것이 이 애니의 진정한 묘미라고 저는 봅니다. 

3.포스트 에바(Post Eva, 에반게리온 이후의 작품들)의 작품에 있어 가장 큰 문제점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어려운 철학용어나 설정을 함부로 남용한다는 것입니다. 창궁의 파프너도 복잡함이 아슬아슬 하게 위험수위를 오가고 있지만, 작품 내내 스토리만 잘 따라갔다면 크게 문제가 없을 정도의 이야기를 유지합니다. 사실 작품에서 이야기하는 철학은 일종의 세계와 나의 존재론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이야기를 어렵게 꼬아서 이야기 안하고 직설적으로 풀어내는 것이 이 작품의 백미라면 백미입니다. 물론 너무 직설적이어서 유치하다는 느낌을 줄지 모르지만, 묘하게 초반 13화의 암울함이 거기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어서 직설적이지만 유치하지 않게 느껴집니다.

개인적으로 방대한 양의 상징과 심리학적 분석,신화적 구조의 왜곡 변형, 프로이트 적인데다가 자기 부정적인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에반게리온(요즘 신화 관련 레포트 때문에 분석 중입니다)에 비해서는 창궁의 파프너는 정말이지 양반입니다(.....)

개인적으로 카논이 했던 대사 "예전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여기 존재한다."가 가장 마음에 와닿더군요.
(어떤 의미에서는 카즈키 만큼의 성격 변화가 일어난 케릭터 이니....)

4.거대 로봇물이니 메카나 전투 장면도 애니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일단, 작화가 나빴다 좋았다를 떠나서 묘하게 전투가 묘하게 박력이 없다는 게 좀 흠이군요. 메카닉 디자인도 솔직히 인상적이라기 보다는, 보고 있으면 그냥 나중에 정들게 되는 그런 타입입니다(.....)

5.이 애니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인물 작화. 까놓고 이야기해서 창궁의 파프나 최고의 안티는 히라이 히사시. 그냥 제 상상이지만, 히라이 히사시가 케릭터 디자인만 안 맡았어도 이거 감상한 사람이 1.5 배로 늘었을 듯...

6.개인적으로는 추천작품입니다. 스토리나 내용, 케릭터도 괜찮고, 전투나 메카 디자인도 어느 정도 유지 되고, 다만 케릭터 디자인만 눈감고 참을 수 있다면(.....) 한번쯤 도전해도 괜찮을 작품입니다.


덧.그래도 초반 3화는 에반게리온하고 너무 겹쳤어....
덧2.나중에 정식 리뷰 갑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이번 슈로대 K 발매 기념으로 보고 있는 작품들이 3개 있습니다. 일전에 보고 있던 창성의 아쿠에리온, 그리고 창궁의 파프너와 신혼합체 고단나, 이렇게 3개입니다. 이 3개중에서 가장 병신 같은 작품을 꼽으라면 창성의 아쿠에리온이고, 가장 잘만들었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을 고르라면 창궁의 파프너겠군요. 사실, 별로 기대하지 않다가 보니까 평이 더 좋은 것일수도 있습니다만, 객관적으로도 잘 만든 작품입니다.

-작품 자체는 전형적인 포스트 에바(Post Eva, 에반게리온 이후의 나온 비슷한 컨셉의 작품들)입니다. 인류를 위협하는 적과 완전히 수세에 몰린 인류,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 만든 인간형 최종 병기, 이를 조종하는 소년 소녀들, 그리고 특유의 존재론적 혹은 인간관계론적 고민까지, 창궁의 파프너는 에반게리온의 코드를 많은 부분에서 차용하고 있습니다. 첫 1, 2화만 놓고 본다면 '이거 에반게리온 판박이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의 주요한 비판 중 하나가 바로 에반게리온의 복제품이며 아류고 그렇기 때문에 에반게리온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까놓고 이야기해서, 이런식으로 에반게리온의 아류작이라고 비판하기 시작하면 끝도 한도 없습니다. 전에 나온 작품에게서 영향을 받지 않고서는 새로운 작품도 나오지 않는 법이니까요. 게다가 이런식의 논리를 확대하면 마징가 Z 이후로는 어떠한 메카닉물도 나와서는 안되며, 퍼스트 건담 이후로 나온 일명 리얼계 로봇물들은 죄다 건담의 아류이고, 데즈카 오사무 이후의 만화가는 다 사이비라는 결론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일단 작품을 놓고 작품 자체가 어떤지를 본 다음에 그 작품의 좋은 점을 인정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궁의 파프너는 잘 만든 작품입니다. 포스트 에바가 가지는 코드를 넘어서 자기만의 색체가 있는 작품이니까요. 에반게리온이 주된 테마를 '소통'에 초점을 맞추어 놓았다면, 창궁의 파프너는 '생존'에 초점을 맞춥니다. 평온했던 섬의 일상이 단 한순간에 무너지면서 소년 소녀들이 알고 있던 현실은 완전히 무너집니다. 평온해보이던 타츠미야 섬은 사실 대 페스튬 요격 요새였고, 믿었던(?) 친구는 자신의 친구보다 파프너가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자신들은 알고 보니 인공 자궁에서 만들어져서 길러지는 새로운 인류였으며, 타츠미야 섬은 전세계를 등진 존재라는 것,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는 이미 멸망한 것 등등 주인공들에게 있어 일상은 순식간에 비일상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렇게 창궁의 파프너는 살아남기 위해서 전세계를 등지고, 아이들에게 파프너를 타고 싸움을 강요할 수 밖에 없는 부조리한 상황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싸움에 내몰린 아이들은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추억하면서 앞으로 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나가면 나갈수록 점점 예전의 자신들에게서 멀어지게 됩니다. 또한 싸움에서 이기고 살아남는 것, 그것이 언제나 살아남는 사람에게 있어서 행복이 될 수 없다는 것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애니는 적절하게 서술하고 있으며, 이야기 구조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음악이나 컷들을 적절하게 배치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상황에서는 대단히 찌질해 보일수도 있는 주인공들의 행동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 일단 페스튬이라는 적도 흥미로운 적이기는 합니다만, 현재까지 제가 감상한 분량(~14화 까지)에서는 별다른 특별한 정보가 공개되지 않아서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겠습니다. 여태까지 제가 쭉 보아온 애니의 적들과 다르게 '당신은 거기 있습니까?'라는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지고 다니더군요. 다만 문제는 멘트가 그거 하나 밖에 없어서, 나중에는 듣는 사람이 지겨울 정도입니다(.....) 그래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창궁의 파프너는 많은 부분에 있어서 북구 신화를 차용하고 있습니다. 브륜힐데 시스템, 발키리의 바위굴, 그리고 파프너 뒤의 넘버링이 독어인 점은 창궁의 파프너가 독일 및 북구 신화에서 모티브를 차용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성경 및 기독교적인 부분에서 모티브를 따왔고, 라제폰은 이집트 신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점을 생각하면 나중에 '신화라는 텍스트로 본 포스트 에바'라는 분석도 가능하겠군요.

-이 애니 감상에 있어서 유일하게 거슬리는 부분은 바로 케릭터 디자인과 작화입니다. 건담 시드, 시드 데스티니의 히라이 히사시, 이걸로 게임 셋입니다(......) 이 사람의 특징은 케릭터가 3종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해어 스타일만 바꾼 키라 클론, 여자, 그리고 보통 사람(.......) 사람이 그림을 그리면 좀 개성있게 그릴 것이지, 생겨먹은 게 죄다 그놈이 그놈같고 저놈이 저놈같으니 문제입니다. 물론 최근작 히로익 에이지는 좀 나은거 같습니다만, 저는 지금 히로익 에이지를 보는게 아니라 창궁의 파프너를 보고 있는 것이거든요(......)

작화는 붕괴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좋다고도 할 수 없는 미묘한 경계에 있습니다. Xebec이 뭐 그렇게 작화력이 나쁜 건 아니지만, 창궁의 파프너는 객관적으로 좋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무너지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선은 유지해주고 있으니 감지덕지 하고 보고 있는 중.

잘하면 罪惡業에서 다룰지도?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식령 제로는 동명의 라이트 노벨인 식령의 이전 시간대를 다루고 있는 프리퀼 작품입니다. 많은 작품에서 써먹은 '퇴마'라는 코드를 중심으로 한 작품인 식령 제로는 자칫 잘못하면 그렇고 그런 평범한 작품이 될 뻔하지만, 이러한 클리셰를 탄탄한 시나리오로 극복하고 있습니다. 주 내용은 퇴마사 가문에 태어나서 사상 최강의 식령 백예를 봉인하는 퇴마사 집안 츠지미야 가에 태어난 숙명을 이어가는 츠지미야 카구라라는 소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애니의 주 내용은 '평범한 소녀 였던 카구라가 어떻게 퇴마사로 거듭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져 있습니다.

애니는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현재-과거-현재라는 구조를 보여줍니다. 이런 구조는 여기 저기서 많이 써먹는 구조이기도 하죠. 애니의 처음, 애니는 퇴마사 동료들을 배신한 요미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요미의 변절을 카구라는 받아들이지 못하죠. 여기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요미와 카구라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요미는 왜 변절 하였는가? 이런 식의 질문을 시작하면서 던지는 것이죠.

초반 이후에는 카구라와 요미, 이 둘의 행복한 순간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는 초반의 비극적인 부분을 강화합니다. 그 내용만으로는 도대체 왜 초반에 요미가 카구라를 증오하는지에 대해서 감을 잡을 수 없습니다. 아니, 그보다 왜 증오하는지 그 자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같은 목표를 보고, 서로를 친 가족처럼 감싸며,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는 그들의 엇갈릴 이유는 없다고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파고들 틈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파고들 틈이 없는 그 관계를 단 한순간에 반전시키고, 요미라는 인물을 타락시키면서 애니는 결말로 다다르게 됩니다.

애니가 막바지에 이를 때, 요미는 그녀의 인생 자체가 무너지게 됩니다. 도저히 겉잡을 수 없이요.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고, 이사야마 가의 후계자를 빼앗기고, 아버지가 맡긴 사자왕을 빼앗기고, 마지막으로 약혼자인 노리유키가 떠나게 됩니다. 그녀의 인생을 완벽하게 박살이 난 셈이지요. 이는 모두 살생석이 요미를 더 이상 이사야먀 요미가 아닌 살생석에 이끌여 자신의 욕망대로 움직이는 괴물로 만들기 위한 책략인 것입니다. 초반의 행복했던 그녀의 모습과 대비되면서, 그녀의 비극을 심화시키죠. 그리고 그러한 책략은 그녀를 약하게 하고, 그 틈을 파고 들자는 살생석의 계략은 완벽하게 맞아 떨어집니다. 결국, 요미는 살생석의 유혹을 못이겨 괴물이 됩니다.

그와 반대로 애니의 초중반, 카구라는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면 안 되는 것들을 없애고,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퇴마사의 의무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녀는 그저 평범한 소녀입니다. 임무 중에 스쳐지나간 여자가 자살해서 망령이 되자 그녀를 똑바로 베지 못하고, 좋아했던 양호실 선생에 망량이 붙어서 카테고리 D가 된 것을 죽였을 때, 그녀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죠. 그리고 퇴마사인 아버지를 받아들이는데 껄끄러워 합니다.

하지만 요미가 괴물이 되고, 요미에 의해서 아버지가 죽게 되자 카구라는 퇴마사인 아버지와 자신의 사명을 이해합니다. 그것은 자신밖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숙명, 누군가 해야만 하는 의무라는 점을요. 결국 카구라는 요미를 죽이고 퇴마사로 거듭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요미는 그녀의 중요한 것들을 잃게 되죠. 그리고 그러한 비애와 슬픔을 짊어지게 됩니다.

식령 제로는 이러한 비극의 탄생 과정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평범한 소녀ㅡ언니를 사랑하고, 친구와 어울리고 싶으며, 과자 먹는 것을 좋아하는ㅡ가 비극적인 숙명을 받아들이고 퇴마사가 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또한 카구라가 퇴마사가 되면서, 그녀의 인생이 전과 다르게 되었는가 라는 점도 잘 보여줍니다. 요미를 베어버린 카구라에게 있어서, 요미를 베기 전과 베고 난 후의 인생은 도저히 같을 수 없으니까요.

이러한 점에서 식령 제로는 훌륭한 작품입니다. 시나리오의 완급도 훌륭하며, 이야기에 있어서 군더더기도 없고, 비교적 짧은 시간에 케릭터의 행동과 그 동기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작품 자체로는 완결성이 없다는 점ㅡ물론 카구라가 퇴마사가 되는 동기는 설명하지만, 구미호와 살생석에 대한 이야기는 완결성이 없으니ㅡ에서 좀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하지만, 원작 이전의 프리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이야기 구조입니다. 따라서 식령 제로는 괜찮은 작품입니다. 식령 제로 때문에 원작 식령을 읽고 싶어질 정도이니 말 다한 셈이죠.

덧. 저는 Blood+가 이런 구조를 따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덧2.술 마시고 머리가 어질어질 한 상태에서 쓴 리뷰입니다.
좀 이상하더라도 이해해 주시길;;;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여기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자전거 선수지만 형보다는 뛰어나지 못했고, 군대를 갔다왔더니 형이 자신의 애인을 차지하였습니다. 게다가 고향은 답답하고 따분하며 지루하며 메마른 토지밖에 없는 절망적인 공간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향을 뛰쳐나옵니다. 그리고 그는 타지에서 자전거 선수가 되었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자전거 경주 중에 자신의 고향을 지나게 됩니다. 하필이면 그 날이 자기 예전 애인과 형의 결혼날이었고, 설상가상으로 그는 '저 놈 잘라버려'라는 스폰서의 말을 듣습니다. 게다가 우리편을 이기게 하기 위해 도발하러 앞으로 나섰다가, 우리편은 중도탈락하고 자신이 가장 선두에 서서 후발 그룹에게 쫒기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이렇게 나스 안달루시아의 여름은 그런 사면초가의 기묘한 상황에서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 귀향을 하게 된 자전거 선수 페페의 이야기입니다.  

-이 애니의 가장 멋진점은 자전거 경주와 페페의 상황과 과거가 한데 어우러진다는 것입니다. 제가 위에서 설명드린 페페의 상황은 철저하게 페페의 외부의 관점에서 설명됩니다. 예전 고향에서 페페에게 있었던 일들을 다른 제 3자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면서 페페의 자전거 경주 장면을 보여줍니다. 페페 자신이 과거의 있었던 일을 직접적으로 회상하지는 않지만, 예전에 있었던 일이나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주변 인물들이 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페페의 심경 또한 이러하지 않을까? 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거죠. 게다가 자전거 경주가 점점 치열해지면서 우리는 페페가 과거에 자기보다 더 뛰어난 형에 대한 일종의 컴플랙스와 애인을 빼앗긴 것에 대한 어떤 한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러면서 자전거 레이스는 절정에 치닫게 됩니다. 

-안달루시아로 돌아오는 레이스에서 페페는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진짜 돌아가기 싫은 그런 심정이었을 겁니다. 사실 날짜 타이밍도 안좋게 자기 전 애인과 형이 결혼하는 날에 고향으로 들어오는 레이스를 한다면 더더욱 싫겠죠. 자기가 고향을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이니까요. 거기에 자신을 자르라는 스폰서와 우리편을 이기기 위해서 도발하러 앞으로 나갔다가 맨 앞에 혼자 서서 온갖 레이서들에게 추격을 받게 된다면 아마 그건 인생에 있어서 최악의 날 중 하나일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상황이 마치 인생에 대한 비유같이 느껴졌습니다. 누구나 자기 인생에서 피하고 싶은 기억이나 추억이 있습니다. 페페 에게는 그것이 자기 고향, 안달루시아라는 공간이죠. 그리고 그러한 기억과 정면으로 마주할 때, 여기에 자기 인생의 최악의 순간들이 겹칠 때 사람은 어떻게 행동할까요? 그냥 다 때려치고 포기할까요? 망연자실하고 대충 행동할까요? 아닙니다. 인생은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 못됩니다. 마치 레이스 처럼,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 닥쳐와도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페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페페의 배경을 시청자들이 이해하게되는 그 순간, 페페는 마지막 구간에 들어가고 애니는 클라이맥스에 들어갑니다. 마치 그의 갈등 또한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는듯이 말이죠. 그리고 자전거 레이스는 끝이 나고 페페는 가까스로 1등을 차지하게 됩니다.

-사실,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서 힘든 순간이 있고 그걸 극복하고 난 다음에는 그 순간은 하나의 추억이 됩니다. 페페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고향이라는 공간과 자전거 레이스라는 경험이었겠죠. 하지만 페페 자신은 고향을 버리고 자전거 선수가 되었지만, 고향은 그를 따스하게 맞아줍니다. 마치 고향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의 한 구절인 '그대를 기다리는 고향, 아무것도 없는 고향 안달루시아'처럼 말이죠. 그리고 페페는 자신의 고향과 과거를 받아들입니다. 뭐, 엄밀히 이야기해서 그가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그 자신이 고향을 완전히 버릴 수 없다는ㅡ애인과의 이별 후의 페페가 언덕에 오르고 나서 행동을 보았을 때ㅡ 사실 자체인 것이죠. 결국 그의 인생에 있어서 최악의 순간(자전거 레이스 중의 해프닝)과 부정하고 싶은 공간(형과 전 애인이 결혼한 공간인 고향)은 그에게 발목을 잡는 장애물이 아닌, 흑백 사진과 같은 추억이 됩니다.

후에 그는 계속되는 레이스 중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자리에서 자기 고향 안달루시아의 명물인 가지 절임과 와인을 맛있게 먹습니다. 뭐, 페페 나름대로의 과거와 현재를 받아들이는 하나의 방법이 아니었나 싶군요^^


덧.이 작품은 2003년 칸느 영화제 비경쟁 부분에 나갔다는군요.
덧2. 지브리 제작의 작화 스타일이 느껴지더군요.
덧3.어떤 의미로는 대단히 향토색이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이었습니다.
덧4.술마시고 리뷰쓰기는 처음이네요 ㅎㅎ;;
게임 이야기/기획 기사
주의!

이 글은 에르고 프록시를 극도로 비판하는 글입니다. 만약 에르고 프록시를 재밌게 보셨다던가, 인생 최고의 걸작이었다 라고 하시는 분들은 살포시 백스페이스를 눌러주시기 부탁드립니다. 나름대로 동생한테 퇴고까지 맡기고 좀 글을 순화시키려고 했는데 그래도 글이 험악하게 나오는군요;;





罪惡業 4부-에르고 프록시:세상이 망하더라도 난 에르고 프록시를 까야겠어!

누구나 자신이 여태까지 본 소설, 시, 영화, 애니 등을 통틀어서 최악이었다고 꼽을 수 있는 작품이 있을 겁니다. 친구들하고 농담삼아 술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의외로 가지가지 작품들이 나오더군요. 4000만 대국민 낚시를 벌인 디워, 임달영이 시나리오를 쓴 한국형 미디어 믹스 프로젝트 제로의 게임 버전(한국 게임 스팟 평점이 2.0이었지 아마...), 양판소(양산형 판타지 소설)의 일반적인 질에도 미치지 못하는 쓰레기 같은 판타지 소설 등등...다양한 게임과 애니, 소설들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있어서 진정한 최악은 단 하나, 에르고 프록시 하나뿐입니다.

술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니까, 한 친구가 그러더군요. "어? 그거 각종 커뮤니티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 아니야?"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 작품을 제 인생 최악의 작품으로 뽑습니다. 그 작품은 그런 평가를 받아서는 안 되고, 받을 수도 없는 작품입니다. 그냥 망작이 될 뻔한 작품이, '나는 내일 세상이 망하더라도 그걸 까야겠습니다' 수준으로 격상(?)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에르고 프록시는 위치헌터 로빈의 무라세 슈코 감독이 만든 작품으로, 그 자체만 본다면 평범한 SF 액션 스릴러 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돔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돔 밖의 황폐한 환경, 자아를 가진 로봇을 만들어내는 코기토 바이러스, 그리고 인간에게 지혜를 주고 돔이라는 거주 환경을 만들게 한 존재 프록시(대리인)들...이러한 세계에서 과연 프록시는 무엇이고 인류는 어쩌다 이러한 환경에 처하게 되었는가? 이 질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서 기나긴 여행을 떠나는 주인공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또한 또다른 주인공인 빈센트의 자아찾기도 이 과정에 들어가겠군요)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록시 원을 만나게 되죠. 사실, 애니에 쓰인 상징, 구조 등은 나름대로 괜찮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좀 더 엄밀하게 이야기 하면 잘 만든 애니가 될 '뻔'했지요. 사실 에르고 프록시는 잘 만든 애니와 사람을 짜증나게 만드는 애니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절실히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여러분은 애니, 소설, 영화 등을 볼 때 가장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까? 케릭터? 주제의식? 영상미? 아니면 서비스 씬이 많은가 여부? 사실, 고전 소설이든 대중 문학이든 아니면 아주 먼 옛날의 전설이나 신화든 간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재미'와 '감동'입니다. 이 세상에 문학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작품, 그것이 고상한 목적에서 쓰여 진 순수 문학이든 그냥 좀 팔아먹고 갔다버릴 목적으로 쓰인 싸구려 대중 문학이라도 읽는 동안 '재미와 감동'이 없다면 그 작품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여러분의 귀중한 시간을 투자해서 읽은 작품이 어떤 감동이나, 재미를 주지 못했다면 그 작품은 어떤 의미로든 간에 실패한 것입니다.

근데 이게 에르고 프록시와 무슨 관련이 있냐 원래 작품이라는 것은 보는 사람마다 다 다르게 이해하고, 재미나 감동 역시 대단히 주관적인 요소가 아니냐고요? 뭐, 일반론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작품이든 모든 사람이 똑같은 감동과 재미를 느낀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르고 프록시가 변호받을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에르고 프록시는 절대로 좋게 평가 받지 못할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작품의 태도입니다.

일단 어떤 문학 작품이든 간에,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구조를 띕니다. 추상적으로 이야기 하면 재미가 없으니, 한번 상황을 가정해보죠. 여러분은 지금 오후의 따스한 햇볕이 드는 조용한 카페에 앉아있다고 상상해보세요(아니면 술자리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앞에는 여러분에게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겠다는 사람이 앉아 있습니다. 자기에게 커피 한잔(또는 술 한잔)을 사주면 정말 기가 막힌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하죠. 그러면 여러분은 이야기에 혹해서(혹은 시간이 남아돌았다던가), 그 사람에게 커피를 사주고 이야기를 듣고자 합니다. 그 사람은 이제 자기가 알고 있는 이야기ㅡ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에서부터 무서운 이야기까지 아무거나 생각하시면 됩니다ㅡ를 들려줍니다. 뭐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 여러분은 여러 생각이 들 겁니다. '좋은 이야기인데?'에서부터 '에이 별론데 이거?'까지요.

이것은 문학이라는 장르 자체에 통용되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문학 장르든 간에 작가나 화자가 작품 밖의 여러분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을 취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작품을 만들 때, 자신의 독자, 청자, 시청자 등을 생각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야 합니다. 당연히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독자 등이니까요. 그리고 이건 어찌보면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아무리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더라도 청자를 생각해서 그걸 돌려 이야기하거나 청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래요. 그러한 기본적인 룰 안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면 그 작품은 그래도 기본 이상은 하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에르고 프록시는? 제가 본 작품들 중에서 가장 짜증나는 태도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마치 깐죽거리는 인간이 와서, 자기 이야기를 두서도 없이 막 늘어놓고 거기에다가 자기는 그 이야기가 정말 재밌다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재밌을 거라고 착각을 합니다. 이해를 못했다고 하니까 "그것도 이해 못하냐?"라고 한 다음에 그냥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거기에다가 다 이야기가 끝난뒤 "이거 후속작도 생각하고 있어"라고 이야기합니다.

혹자는 이렇게 이야기 할 수도 있겠죠. "워낙이 복잡한 상징을 이용하니까 그럴 수도 있는거 아니냐?" 저는 그것에 대해서 단연코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도대체 에르고 프록시가 무슨 칸느 영화제나 베니스 영화제에 나갈 정도로 대단한 작품인가요? 혹은 알레한드로 조드르프스키가 만드는 초현실주의 영화의 연장선상에 있는 애니인가요? 게다가 그런 소위 작품성 있거나 상징을 쓰는 복잡한 작품들도 보고 난 다음에는 어떤 충격이나 감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근데 에르고 프록시는 전혀 그런게 없습니다. 게다가 솔직히 일본 애니 중에서도 나름대로 주제의식이나 분위기를 잡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작품 중에 잘 만든 작품들은 절대로 자기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무시하는 작품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고 에르고 프록시가 이미지만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작품도 아닙니다. 남은 건 오직 발상과 분위기인데, 이 발상도 이야기나 주제하고 따로 놀고 있습니다.

따라서 에르고 프록시의 문제점은 애니메이션의 이야기나 발상이 안 좋은게 아니라 애니를 진행하는 작가와 제작사입니다. 사실 주인공들이 나와서 똥폼 잡으면서 심각하게 고민하는 척 해도, 아무리 진지한 분위기와 멋진 아이디어들이 나와도 이 작품에서 캐릭터들이나 이야기 구조는 그러한 고민을 뒷받침하지 않습니다. 애시당초부터 이 애니의 목적은 자기 머릿속의 망상을 풀어내는데 있는거지, 시청자들에게 이야기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니까요. 게다가 애니 내에 쓸데없이 많은 실험은 이야기를 더 산만하게 만들고, 사람을 짜증나게 만듭니다.

사실 제가 위에서 짚은 정도에서만 에르고 프록시의 문제점이 끝났으면 제 인생에서 더 이상 에르고 프록시를 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에르고 프록시는 두가지 죄를 더 저지릅니다. 그것은 에르고 프록시만의 잘못이 아니라 무라세 슈코와 감상자들의 죄이기도 한데, 하나는 무라세 슈코가 위치헌터 로빈이라는 걸출한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인간들이 에르고 프록시가 마치 대단한 작품성을 가진 애니처럼 평가한다는 것이죠.

무라세 슈코의 위치헌터 로빈은 에르고 프록시의 대칭에 있는 작품입니다. 이야기는 대단히 잘난 척 하지 않고 로빈의 감성에 초점을 맞추고, 게다가 사근사근 조용하게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반면 에르고 프록시는 먼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한 다음에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죠. '도대체 내가 이 애니를 보는거지? 완전히 자기 마음대로만 이야기하고 있잖아!' 그렇습니다. 위치헌터 로빈을 보고 난 다음에 이 애니를 본다는 것은....거의 재앙입니다. 사실 같은 감독의 작품을 본다는 것이 원래 전작의 감성을 느끼고 싶어서 아니겠습니까? 근데 그걸 정 반대로 달려나간다는 것은 시청자에게 큰 반칙과 죄를 범하는 것이죠.

그리고 에르고 프록시는 이상하게 시청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런 경향이 에르고 프록시를 본 사람들의 전반적인 경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제가 처음 에르고 프록시를 본 다음, 국내 최대의 애니 커뮤니티에서 에르고 프록시의 평을 확인했습니다. 반응이 둘로 나뉘는데, 하나는 '이게 뭔소리인지 난 알아먹을 수 없다'와 또 하나는 '에르고 프록시 대단히 철학적인 작품임. 까지 마삼.'이었습니다. 후자쪽이 더 비중이 높았습니다. 사실 사람들 반응이 이정도 였으면 그냥 웃고 그런가 보다 하면서 넘어갈려고 했습니다. 뭐, 원래 사람이 생각한다고 모든 것이 제 뜻대로 되는 게 아니지만 제가 정말로 열받아버린 부분은 작년 어느 회지에 실린 에르고 프록시 분석 글이었습니다. 마치 그 글은 에르고 프록시의 모든 요소를 다 조목조목 분석한 글이었는데, 그 애니를 분노하면서 끝까지 모든 내용을 머리에 새겨넣은 저도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런 글을 쓰는거야? 애니를 보면서 받아쓰기라도 하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봤을 때는 에르고 프록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심각하게 이상하고 지루한 이야기를 끝까지 봄으로써 자신을 고문하는 것을 즐기는 메저키스트, 또 하나는 그냥 머리는 쓰기 싫은데 잘난 척은 하고 싶고, 근데 에르고 프록시라는 작품을 보고 '이거야! 이걸로 나는 잘난 척을 할 수 있게 되었어!'라고 날뛰는 사람들 중 하나일 겁니다. 아니면 저 자아도취에 빠져있는 이상한 작품을 좋아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전 이 작품이 싫습니다. 그냥 싫은 게 아니라, 이 세상에서 그 존재를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로요. 그건 아마 저의 과민반응이기도 하겠지만, 정말 이 작품은 여러 가지 악몽같은 요소들이 섞여서 만들어진 재앙같은 존재입니다.



덧.동생이 그러더군요. "형, 형 리뷰쓰는 투가 마치 듀나 같아!"
아, 그건 좀 미묘한데;;;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기획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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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앞서서

 워낙이 좋아하는 작품이다 보니까, 글을 쓰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되는군요. 사실, 건그레이브는 과장 좀 보태서 제 인생에 있어서 뛰어난 작품들 중 하나입니다. 물론 객관적으로 이거 보다 더 좋은 작품도 많죠. 하지만, 뭐랄까 지금봐도 참 여러생각이 드는 애니입니다. 쓸쓸한 분위기, 친구, 인생 등등...뭐, 단순한 애니를 보면서 별의별 이상한 생각을 다 하면서 본다고 비웃을 분들 많으리라 생각하지만, 당시 재수 시작 당시 뇌리에 박히는 내용을 보여준 것이 바로 건 그레이브였습니다.(그러고 보니 재수 할때 본 것들은 다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군요.)

 그래서인지 몰라도, 건그레이브를 죄악업 칼럼에서 다루려하니까, 심경이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안그래도 재수 시절보다 어려운 한해를 보내고 있는 와중에 이런 글을 쓰려니까 여러 잡상들이 들었구요. 뭐, 결과적으로 그러한 요소들을 배제하고, 애니 자체에 대한 글을 쓰려 노력했고, 장장 A4 5장에 걸친 칼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결론을 내면서 눈시울이 붉어지더군요.  

2부 건그레이브:순수의 비가

과거 PS2 시절 캡콤이 만들었던 스타일리쉬 액션 게임이 2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Devil May Cry 시리즈였고, 나머지 하나는 건그레이브였죠. 사실 DMC 같은 경우에는 성공을 거두어서 지금까지도 그 시리즈가 나오고 있지만, 건그레이브는 PS2 때 후속작 O.D(Over Dose)까지만 나오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애니판 건그레이브는 그러한 PS2 게임인 1편이 나오고 Over Dose가 나오기 이전 그 사이에 나온 매드하우스 제작의 애니입니다.

사실, 원작 게임을 해보고 애니를 본 사람들은 이 애니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이 감상한다면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애시당초부터 원작 게임이 지향했던 게임의 컨셉은 '스타일리쉬하게 총을 쏘면서, 모든 것을 파괴하는'이라는 것이었고, 게임 제작자도 '그레이브가 탄창을 갈아끼지 않는 이유는 탄창을 갈아끼면 멋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라고 밝힐 정도로 과도한 파괴와 살상의 미학을 추구하던 게임이었습니다. 그러나 애니로 넘어가면서, 이러한 원작 게임의 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작품이 탄생한 것입니다. 애니의 내용의 절반 이상은 비욘드 더 그레이브의 인간 시절의 이야기 브랜든 히트의 이야기 분량이고, 그레이브는 폼난다기 보다는 구질구질하고 우울해졌으며, 애니 내에서는 총알이 다 떨어져서 탄창까지 갈아끼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본다면 원작 게임에서 큰 인상을 받은 사람들은 당황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건그레이브는 원작보다 더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원작이 과거 친구였던 그레이브와 해리의 현재의 싸움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애니는 과거와 현재를 통해서 '인물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선택의 과정을 대단히 훌륭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암흑가 사람들의 우정과 배신 등을 다룬 장르를 우리는 흔히 '느와르'라고 칭하는데, 느와르 장르가 인물의 감정묘사 등에 약한 애니 장르에서는 힘듭니다. 그러나 건그레이브는 그러한 애니라는 매체적인 한계를 뛰어넘어서 애니에서 보기 힘든 느와르 장르로 대단한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흔히 보통 느와르 장르에 있어서 악은 배신입니다. 암흑가는 언제 어디서 누군가의 손에 죽을지도 모르는 곳입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따라서 배신이라는 행위는 오로지 죽음으로서 밖에 속죄할 수 없습니다. 느와르 장르에 있어서 믿음과 배신이라는 코드는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있어서 많이 쓰여지고 있습니다. 다만, 건그레이브의 독특한 점은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주동력이 배신에 대한 응징인 복수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질문과 대답입니다. ‘도대체 왜 그랬는가’, ‘왜 우리는 이러고 있는가’,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라는 질문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사실, 객관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브랜든과 해리는 서로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해리는 브랜든과 빅데디를 위시한 밀레니엄의 믿음을 배신하였고, 브랜든은 해리와 자신과 함께한 동지들-특히 쿠가시라 분지-의 믿음을 배신했습니다. 하지만, 또다른 입장에서 본다면, 해리와 브랜든은 각자의 신념에 충실했습니다. 해리는 자신의 ‘자유’라는 신념에, 브랜든은 밀레니엄의 신조에 말이죠. 그렇게 본다면, 그 어느 누구도 잘못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레이브가 애니 첫화에서 읇조리듯이, ‘어디서...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라는 것처럼 어떻게 본다면, 이 죄와 악은 처음도 끝도 없는, 머리와 꼬리가 물린 우로보로스와 같은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해리 맥도웰이란 인물은 건그레이브에서 브랜든 히트에 대항하는 일종의 악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가 악인일까요? 일단 해리의 역할은 극중에서는 악역이 맞습니다. 애니 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면서 미카의 어머니를 죽이고, 자기에게 대항하는 세력들을 숙청하고 억누르며, 살아있는 인간을 잡아서 괴물로 만드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모습을 볼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과연 그가 단순한 악인으로 그레이브에 반대되는 역할이라고 보기는 대단히 문제가 많습니다. 우리는 애니 초반부, 해리가 브랜든에게 했던 대사 '자유롭게 되자, 브랜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실, 처음 그는 그냥 머리가 대단히 잘 돌아가는 3류 양아치에 불과했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고, 그러한 자유를 위한 힘을 쟁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친구들이 너무나 허무하게 죽어버린 충격에서부터 가속화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리는 밀레니엄에 들어간 후, 더 많은 권력을 얻기 위해서 위로 올라가길 원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밀레니엄의 이념과 신조보다는 자신에게 열린 자유의 가능성을 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유를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브랜든과 함께 나누길 원하죠. 하지만, 그의 무차별적인 팽창과 조직의 이념과 신조에 반하는 행동들은 결국 조직의 창립자이자 수장인 빅 데디에게 후계자로 인정받지 못하게 됩니다. 해리는 결국 빅 데디의 명령에 따라 자신을 죽이려 했던 브랜든을 죽이고, 빅 데디를 죽임으로서 밀레니엄이라는 조직의 최상부에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원했던 무소불위의 권력을 얻게 됩니다.

사실, 기존의 악역이나 악인들이 처음에는 순수한 이상을 추구하다가 후에는 변절하거나 망가지는(예를 들어서, 건X소드의 갈고리 손톱 남자의 마지막이라던가) 케이스가 많았습니다만, 해리 같은 경우는 거의 끝까지 자기 원칙에 대해서 일관됩니다. 그가 후에 밀레니엄의 보스가 된 후에, 그의 자유의 대원칙인 ‘원하는 만큼 빼앗고, 원하는 만큼 나누어 주겠다.’에 충실합니다. 경쟁자들이나 자신에게 대항하는 판사를 눈하나 깜작하지 않고 죽이는 동시에, 고아원에 가서 어린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는 모습은 해리의 가식적인 모습이라기 보다는 그가 추구한 진정한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리는 브랜든의 배신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망설였던 브랜든을 자기 손으로 죽이고, 그에게 조직의 배신자라는 누명을 뒤집어 씌웁니다. 해리에게 있어서, 브랜든의 배신은 곧 자신과 조직에 대한 배신으로 보여질 수 밖에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레이브가 등장했을 때, 그를 과거의 망령 취급합니다. 그레이브는 해리에게 있어서 그저 지나가버린 과거이고, 그러한 과거가 자신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가 십 몇 년 가까이 쌓아올린 부와 권력은 과거의 망령의 등장으로 무너지게 됩니다. 결국, 해리는 스스로가 배신했던 과거에 의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잃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 비유가 마음에 듭니다. 사실, 해리의 파멸을 불러온 것은 다름아닌 해리 그 자신이니까요. 결과적으로 그가 죽였던 브랜든이 망령으로 돌아와서 그의 모든 것을 무너뜨립니다.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모든 것이 결국은 너무나 쉽게 허망하게 사라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브랜든은 어떨까요? 브랜든은 동네 양아치 시절 절친했던 친구들이 죽고, 그 후 해리를 따라서 밀레니엄에 들어갑니다. 사실, 해리는 밀레니엄을 통해서 자신의 가능성과 자유를 보았다면, 브랜든은 역으로 조직의 신념을 깨달아갑니다. 빅 데디가 조직을 세우면서 삼았던 이상, 그것은 바로 ‘지킨다’(守る)입니다. 자신과 자신을 믿는 가족(Family)들을 외부의 적으로부터 지키는 것, 그것이 빅 데디의 밀레니엄이었고, 브랜든이 이해한 밀레니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빅 데디와 해리, 그리고 마리아를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밀레니엄의 스위퍼, 즉 살수(殺手)가 됩니다.

하지만, 그도 사랑하는 자들을 지키기 위해서 밀레니엄에 깊이 발담그면 발을 담글수록, 역설적으로 지키려는 자들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그는 사랑하는 자들을 지키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고, 온갖 더러운 일을 맡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순수하지 못하다고 특히, 그를 사랑한 마리아와의 관계는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사랑하는 자들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순수를 버렸다고 할 수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합니다. 이는 자신이 순수하지 못하다는 자괴감과 함께, 자신과 관련되면 결국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칠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런 그의 신념도 해리의 조직에 대한 배신으로 흔들리게 됩니다. 그가 지키려고 했던 해리가 역으로 자신의 신념인 조직을 그 근간서부터 문란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빅 데디가 만약 해리가 조직을 배신하는 행위를 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라고 물었을때 가차없이 제거하겠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지요. 하지만, 결정적인 기회가 있었을 때 브랜든은 해리를 쏘지 못합니다. 분명히 자신의 신념과 기대를 배신한 것은 해리였고, 해리로 인해서 조직이 흔들리게 되는 것을 뻔히 잘 알면서 말이죠. 결국 브랜든은 자신에게 총을 겨눈 브랜든이 자신을 배신하였다고 생각하는 해리의 손에 죽게 됩니다.

그 후의 브랜든의 네크로라이즈화 된 모습인 비욘드 더 그레이브는 닥터 T가 이야기 하듯이, 브랜든이라는 사람은 죽고, 여기 있는 사람은 무덤에서 일어난 망령(Beyond The Grave, 무덤을 넘어선 자)입니다. 해리가 자신을 죽일 것을 미리 예견한 브랜든이 해리를 다시 원래 조직의 신념 체계내로 끌어들이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초 강경수이지요. 하지만, 해리의 배신 이후 죽어서까지 조직에 충성하려는 브랜든의 유지를 본 빅 데디는 그러한 브랜든의 모습에 가슴 아파하면서 닥터 T에게 더 이상 브랜든을 깨우지 말라고 합니다. 하지만, 영원히 잠들뻔한 브랜든을 깨운 것은 다름 아닌 해리였습니다.

오랫동안 잠들었기 때문에 기억에 혼선을 겪는 그레이브에게 남은 것은 조직의 신념, '지킨다'와 그 지킬 대상인 마리아와 빅 데디의 딸 미카였습니다. 그는 차례로 밀려오는 조직과 과거의 자신의 친우들-해리를 위시한 발라드버드 리, 밥 파운드멕스, 베어 워큰, 쿠가시라 분지-을 차례로 묻어버립니다. 어떻게 보면, 과거의 조직의 신념을 배신한 죄를 과거의 망령인 그레이브가 과거를 대신해서 처형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애니에서 비추어지는 그들의 싸움은 악과 선의 대립이 아닌, 뭔가 다른 것입니다. 떠오르는 희미한 햇빛을 받으면서 폐허 속에서 죽어간 밥 파운드맥스, 아무도 없는 철로에서 석양을 받아가면서 죽었던 발라드버드 리, 눈 오는 폐허에 죽은 베어 워큰,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무도 없는 폐허가 된 밀레니엄 본사에서 쓸쓸히 죽은 쿠가시라 분지. 이들의 죽음은 전형적인 악인의 죽음과 질서의 회복의 이미지보다는 허무의 이미지에 가깝습니다. 그 중 브랜든에게 가장 의지했던 쿠가시라 분지는 그레이브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왜 해리를 배신했느냐? 당신은 해리와 함께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었느냐?

결국은 브랜든 시절의 기억이 싸움을 통해서 돌아오기 시작한 그레이브도 혼란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조직의 신념, 그리고 지킬 것을 지킨다는 자신의 신념에 의해서 행동한 그였지만, 그러한 복수와 처벌의 과정에서 그는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낍니다. 아니, 사실 그는 처음부터 잘못되었다고 느꼈습니다(애니의 첫부분의 그레이브의 독백)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 무엇이 잘못된걸까? 그는 마지막 복수의 대상인 해리를 남겨두고 갈등합니다. 자신이 처음에 생각했던 조직과 이상은 이런식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레이브가 그의 복수를 거의 끝내가고 있을 무렵, 해리는 자신이 이루어낸 모든 것들이 허망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엄청난 양의 재산과 권력, 그리고 심지어는 사랑하는 아내까지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마지막 발악으로 오그맨을 이용해서 자신을 배신한 조직을 향해서 공격을 가하지만, 그 공격조차 내부의 배신자(해리 입장에서 본다면)에 의해서 허망하게 무화되어버리고 맙니다. 해리는 도망치면서 생각합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걸까? 그는 도주중 그레이브를 만납니다. 그리고 그들이 시작되었던 시작점, 최초의 장소로 되돌아갑니다. 저는 이 비유가 마음에 들어요. 목숨을 걸고 언제나 함께 해왔지만, 결국은 해어지게 된 두 친구가 다시 자신들의 첫 시작점으로 돌아와서 서로를 대면하는 것, 서로의 마지막 장소를 처음 시작한 장소에서 맞이하는 것이라 볼 수 있으니까요. 해리가 묻습니다. 그때 왜 쏘지 않았냐?

왜 쏘지 않았는가? 네가 나를 쏘았으면, 자신의 신념과 조직을 지킬 수 있었는데 왜 쏘지 않았는가? 결국 네가 이야기 하고 싶은게 뭐냐? 그 질문의 끝에 브랜든이 이야기 합니다.


너를 쏠 수 없었다.


그렇습니다. 몇 십년만에 망령이 되어서 돌아온 브랜든이, 자신의 신념, 조직, 모든 것을 버려가면서까지 해리에게 내놓은 대답은 자신의 친우를 쏠 수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풀게 됩니다. 하지만 현실은 냉엄하죠. 조직은 해리를 제거하기 위해서 집을 포위합니다. 결국, 그들은 마지막으로 내몰립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를 위해서, 서로의 머리에 총을 겨눕니다. 다시, 다시 한번 원점으로 회귀하자. 조직, 신념, 자유 등의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서로에게 순수했던 옛날로.

결론적으로 건그레이브에 있어서 죄와 악은 순수하지 못한 것입니다. 서로에게 순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파에 너무 찌들었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한 것이죠. 그러한 잘못들에 대해서, 건그레이브가 내놓은 결말은 처음, 순수로의 회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애니 마지막에 브랜든과 해리가 만났던 첫 시점으로 돌아가는 점은 여러 가지로 감동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 둘이 세상에게서 버림받았을지언정, 마지막에 진정한 우정이라는 순수를 되찾은 것이니까요. 그들이 저 세상에 가서 평화롭기를 빕니다.


Rest In Peace, Brandon & Harry



덧. 작년에 마지막화만 보면서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덧.첫화 제목이 '황혼의 파괴자들',
 그리고 마지막화 제목이 '파괴자들의 황혼'입니다.
제목 정한 센스가 멋지더군요.

덧.이건 그냥 제 망상일수도 있지만,
건그레이브가 일종의 인생에 대한 메타포처럼 느껴지더군요.

덧.진짜, 원래 대사는 '해리를 쏠 수 있을리가 없잖아?'인데,
머릿속에 그 대사가 박히더군요.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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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전 정보 없이 봤다가 뒤통수를 심각하게 맞은 작품입니다. 사실, 원래 저는 동생이나 여기저기서 정보를 알아본 다음에 영화를 보러다닙니다만, 이번같이 간단하게 '칸느에서 대상을 받을 뻔한 애니메이션'(대상은 프랑스 영화 '교실'이 받았습니다), '감독의 경험에서 비롯되는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영화' 정도로 알고 가서 봤는데...아주 심하게 뒤통수를 맞은 듯한 느낌입니다. 정확한 장르는 다큐멘터리+애니메이션...입니다만, 과연 그렇게 단순하게 장르를 규정 지을수 있는지가 의문이군요.

2.일단 개인적 체험과 역사적인 체험이 만난다는 구도 자체는 과거 이란 여성이 자신의 수기를 토대로 만든 애니메이션 '페르세폴리스'와 비견될 수 있으나, 페르세폴리스가 그러한 경험을 일종의 동화의 형태로 표현을 했다면, '바시르와 왈츠를'은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고수 합니다. 즉, 레바논 전쟁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음을 깨달은 감독 자신이 자신의 기억을 계속 되짚어 올라가는 형식의 다큐멘터리 처럼 말이죠. 그러나 매체가 인위적인 느낌을 내는 애니메이션이다 보니까, 다큐멘터리라기 보다는 일종의 페이크 다큐(블레어 위치와 같은)의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다큐멘터리라는 영화 장르 자체가 현실적인 사실을 지향하는데 비해서, '바시르와 왈츠를'은 개인적인 경험과 초현실주의적인 이미지와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전쟁에서의 개인적인 체험을 초현실적으로 다루어내는 전쟁 드라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단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바시르와 왈츠를'의 대부분의 밑그림은 실제 촬영한 필름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으며, 여기에 셀 애니메이션, 3D 애니메이션, 플레시 애니메이션, 컷아웃 기법 등을 동원해서 제작한 작품입니다. 즉, 이 애니메이션(이라고 하기는 이제 미묘해졌지만)은 진짜 실제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느끼는 대부분의 생각이나 감정은 일차적으로 자신과 스크린 사이의 차이가 있음을 그 근저에 두고 발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니를 보는 내내, 우리는 감독 아리 폴만의 초현실적인 과거 경험이 일종의 허구라고 생각하면서 영화를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실제 감독이 겪었던 일이었든 아니었든 말이죠. 그리고 그러한 전쟁에 얽힌 초현실주의적인 환상이나 회상을 개인적인 경험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은 그러한 개인적인 초현실주의적인 체험과 경험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사브라와 샤틸라에서 일어난 팔랑헤 당원들의 팔레스타인 난민 학살 사건에 연결되게 됩니다. 그 사건을 당시 취재했던 리포터의 이야기와 여러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서 그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합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레바논 전쟁 당시의 기억 상실의 원인이 감독 자신이 그 광경에서 목격한 충격적인 장면들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부분에서 영화는 갑자기 현실로 돌아옵니다. 당시 리포터가 찍었던 사브라와 샤틸라 수용소의 학살 후 폐허 장면을 말이죠. 이렇게 영화는 개인적인 초현실적인 이미지와 체험에서 시작해서 팔레스타인 학살이라는 사회적인 경험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3. 어떻게 보면 이건 심각한 장르의 반칙입니다. 마치, K-1 선수가 싸우다가 칼이나 총같은 흉기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과 같은 수준입니다. 사실,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애니를 만든 페르세폴리스 같은 경우도 처음부터 끝까지 동화라는 장르에서 벗어나지 않았죠. 하지만 '바시르와 왈츠를'은 이러한 장르를 뒤집으면서(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이러한 '반전'은 제작 단계나 기법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보는 관객에게 경악 또는 충격, 혹은 불쾌감('나는 애니를 보러 온거지, 다큐멘터리를 보러온게 아니라고!' 라는 식의 불쾌감)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감독이 의도했던 바를 철저하게 애니메이션이나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서 내었으면 어떻게 될까요? 애니메이션의 경우는 감독의 개인적인 경험을 열심히 다루다가 개인적인 트라우마로 결부지으면서 끝나게 될 것이고, 다큐멘터리 같은 경우는 열심히 사회적인 경험과 역사를 이야기 하다가 개인적인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한 채 끝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바시르와 왈츠를'은 그러한 사회적 개인적인 체험이 결과적으로 만나게 되면서 다른 전쟁 다큐멘터리나 영화와 다른 독특한 체험을 하게 만듭니다.

 결과적으로 이야기해서 여러분이 이 영화를 보고 어떤 충격을 받았다면, 이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신겁니다. 사실, 전쟁 영화나 드라마, 다큐멘터리가 넘쳐나고, 그런 영화를 보고나서 '아 그런가 보다'하고 넘기는 이 세상에서 그러한 작품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는 자체에서 이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니까요.

4.그래서 저는 이 작품을 'There Will Be Blood'와 더불어서 올해 최고의 영화로 꼽고 싶습니다. 애니메이션으로서 대단히 독특한 영상미와 더불어서, 작품이 이야기하고 싶은 매세지, 주제, 그 방법 까지 모두다 인상적이었던 작품이니까요. 한국에 정식으로 수입이 되었으니, DVD가 나오길 기다릴 뿐입니다.



덧1.해변가에서 조명탄이 터지면서 아리와 동료들이 일어서는 장면은
올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중 하나였습니다.
덧2.동아리 사람들과 함께 갔다가, 사람들 반응을 보고 절망했습니다 ㅠㅠ
역시 저는 스노비즘인건가요;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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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하고 있냐!)

마크로스 OVA 시리즈

이제 이 긴 글도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습니다. 마크로스 시리즈는 OVA가 크게 2작품이 있습니다. 하나는 마크로스 2-LOVERS AGAIN의 대 참패를 만회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마크로스 플러스, 다른 하나는 마크로스 탄생 20주년을 기념해서 원작 마크로스 이전의 통합 전쟁을 다룬 마크로스 제로입니다. OVA(마크로스 7 다이나마이트 제외)로 나온 마크로스 시리즈는 OVA간의 서로 공통된 특징이 있다기 보다는 각각의 독특한 아우라를 풍기고 있기 때문에, 개별의 작품을 각각 따로 감상하고 이해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덧. 2편은...묻지 마세요; 이건 거의 재앙입니다; 나중에 마크로스 사가 다루고 난 다음에 여러분의 열렬한 호응이 있으면(?) 같이 다루도록 하지요.


마크로스 플러스(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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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로스 플러스는 마크로스 2의 처참한 참패로 자신의 작품과 세계관이 영원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 카와모리 쇼지와 그 제작진들이 마크로스 시리즈로 복귀한 작품입니다. 마크로스 플러스가 나오고 난 다음에 마크로스 7이 나오고, 마크로스 7 방영 중에 OVA 버전을 수정, 편집, 약간의 내용적인 추가를 한 마크로스 플러스 극장판이 나왔습니다. 마크로스 플러스(이하 플러스)는 현재까지(마크로스 F 제외) 나온 마크로스 시리즈 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며, 원작 마크로스의 훌륭한 재해석과 변용을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 받습니다. 저 또한 플러스가 마크로스 시리즈의 코드인 드라마적인 요소(삼각관계), 음악, 화려한 전투 장면과 메카닉을 독특하게 변용하여서, 원작의 코드를 성인취향의 느낌으로 재정립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드라마적인 요소에서 가장 독특한 점은 바로 주인공들의 삼각관계가 현재형이 아니라 과거형으로 진행이 된다는 점입니다. 주인공들인 이사무, 뮨, 갈드의 삼각관계는 오래전 그들이 고등학교를 다녔을 때, 이미 그 결론이 난 상태였습니다. 즉, 플러스에서는 그 때 결론이 나지 않은 과거를 현재에서 풀어낸다는 느낌으로 진행을 하고, 그 과거를 묘한 노스텔지어와 쓸쓸함으로 보여줍니다. 이는 과거의 순수했던 자신들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주인공들의 모습, 청소년을 지나서 어느덧 장년이 되어버린 자신들에 대한 씁쓸한 심정을 덤덤하게 같이 그려내어 플러스의 분위기를 확실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과거의 갈등을 토대로 서로 치고 받고 싸우는 갈드와 이사무의 모습은 작품 내의 미묘한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는데 큰 영향을 주더군요. 이는 카우보이 비밥, 사무라이 참프루를 감독한 와타나베 신이치로가 카와모리 쇼지와 함께 공동 감독을 맡았기 때문이라고 저는 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일면 카우보이 비밥의 아우라가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음악적인 측면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점에서는 플러스도 기존의 마크로스 시리즈와 비슷합니다. 다만, 그것이 더 어둡고 성인취향으로 묘사되었다는 것이 큰 특징입니다. 일단, 플러스에서의 여주인공인 뮨은 당연히(?) 가수입니다. 형식적으로는 우주 최초의 인공지능 아이돌 샤론 애플의 매니저 겸 프로듀서로 나옵니다. 그러나 실상은 아직 인공지능이 완성되지 않은 샤론의 대역으로 뮨이 노래를 부르고 동작을 하여서 샤론이 움직이고 노래부를 수 있었다는 것이죠. 또한 OVA에서는 모호하게 표현이 되었지만, 샤론의 노래는 사람을 홀리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일종의 집단 최면과 같은 것인데, 이사무가 처음 갔던 샤론의 콘서트에서 보여준 관객들의 반응을 보면 느낄수 있습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샤론이 SDF-1 (원작에 나왔던 마크로스)을 점거하고 마크로스 시티의 시민들을 모두 집단 최면에 빠뜨리게 됩니다. 이와 같이 기존의 마크로스 시리즈에서 아이돌이나 가수에 대해 많은 부분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한데 비해서, 플러스는 강하게 아이돌의 어두운 측면과 그에 속아 넘어가는 대중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합니다. 결국, 마지막에 이사무가 샤론을 파괴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뮨이 고등학교 때 불렀던 노래였던 것은 세상과 사람을 구하는 것은 어른의 상술이 아니라 어릴 때의 순수라고 주장하는 카와모리 쇼지와 와타나베 신이치로 감독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플러스의 또다른 특이점은 바로 주인공과 스토리의 주요한 갈등이 VF-11 선더볼트의 후속 기종 경쟁을 두고 일어난다는 점입니다.(그리고 최초로 프로토 컬쳐 뒤치닥 거리를 하지 않은 마크로스 시리즈입니다.) 이사무는 YF-19, 갈드는 YF-21의 전속 테스트 파일럿으로 배속되면서, 서로가 자기 편이 이기기 위해서 노력하면서 동시에 뮨에 대한 미묘하게 찌질한 신경전을 펼치는 점, 그리고 파일럿의 하늘을 동경하는 순수한 갈망(이사무 쪽이 이 경향을 강하게 보여줍니다.)등, 후속 기종 선발을 위한 경합이라는 소재를 이용해서 동시에 여러 가지 갈등이나 이야기를 풀어내는 모습을 괜찮았습니다. 또한 마지막에 인공지능을 이용한 고스트가 갑자기 선더볼트의 후속기종으로 발탁되는 것도 위에서 이야기한 플러스라는 작품의 분위기-인간의 순수에 대한 갈망, 혹은 갈등과 감정이 기업의 장삿속 앞에서 너무나도 쉽게 무너지는 허무함-를 형성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플러스는 원작 마크로스에 대한 훌륭한 변용입니다. 마크로스의 코드를 좀 더 성인 취향으로 바꾼 점, 지금까지의 마크로스와는 다른 독특한 분위기와 설정으로 원작 마크로스를 뛰어 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입니다. 다만 문제는 이게 너무 짧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풀어낼 건덕지가 많은 이야기를 단 4화에 소화해내기 위해서 몇몇 세부적인 설정을 잘라내서 이야기가 뚝뚝 끊긴다는 느낌을 받았고, 동시에 삼각관계를 일방적인 한명의 잘못으로 몰고 가는 식으로 대충 마무리 지어버려서 많은 아쉬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플러스는 지금까지 나온 마크로스 시리즈 중에서 가장 훌륭한 변용이며, 동시에 가장 독특한 마크로스입니다.

덧.갈드 지못미 ㅠㅠ

마크로스 제로(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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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마크로스 방영 20주년으로 만들어진 OVA입니다. 마크로스 시리즈의 원작자이자 감독인 카와모리 쇼지가 스스로 이번 작의 컨셉은 '전설'로 정하고, 원작 마크로스 전의 통합전쟁 당시 평화로운 섬에 있는 고대 유물을 둘러싼 통합군과 반통합군의 치열한 싸움과 원주민 무녀와 파일럿 간의 연애를 그려내는 작품입니다. 일단 OVA 자체의 완성도는 그럭저럭 괜찮았으나, 원작 설정 파괴 등으로 마크로스 팬들 사이에서는 미묘한 평가를 받는 작품입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도 마크로스 시리즈 중에서 가장 이질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크로스 제로는 마크로스 시리즈의 공통 특징인 연애, 음악, 화려한 비행기 전투라는 3요소가 다 나오지만, 이상하게 변형이 되거나 축소되어서 나오는 것이 이번 작 마크로스 제로입니다.

제로에서 연애나 삼각관계는 거의 비중이 없다시피 합니다. 4화에 미묘한 감정 표현까지 담아낸 플러스에 비해서, 제로는 삼각관계가 형성되려다가 마는 듯한 미묘한 광경을 보여줍니다. 처음 제가 보았을 때, 저는 신을 두고 자매인 사라와 마오가 삼각 관계를 펼칠 것이다라는 추측을 했었는데, 초반 1~2화에서는 마오가 관계를 주도하고, 사라는 전혀 관심 없는거 처럼 굴더니, 3화에서 마오를 그냥 병원으로 관광 보내서 갑자기 사라와 신을 맺어지게 만드는 건 미묘하더군요. 이야기를 더 전개할 수도 있었지만, 귀찮아서랄까, 아니면 이야기를 5화에 다 구겨넣기 위해서 였을까, 어느쪽이든 간에 플러스나 옛 마크로스와 비교해보았을때 아쉬운 전개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제로에서는 다른 마크로스와 다르게 음악이라는 요소가 매우 적게 나옵니다. 물론 카와모리 쇼지는 과거 원시의 무녀나 무당들은 노래와 춤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거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아이돌과 같은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고 보고, 마을의 무녀인 사라의 노래를 중요한 소재로 쓰려합니다. 그러나 제로에서는 노래 자체가 이야기 전개에 중요한 요소가 아닌, 사라의 힘, 노래가 가지고 있는 힘에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를 진행을 하기 때문에, 기존의 '노래를 부르고자 하는 진실된 마음이 결국은 외계인에게 닿게 된다'라는 컨셉에서 '그냥 히로인이 부르는 노래가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걍 만사형통인거다.'라는 컨셉으로 바뀌니까 노래의 비중은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마크로스 7도 '주인공 바사라의 사기적인 능력이 노래에 적용이 되기 때문에 노래가 이야기 전개에 중요한 요소이다'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한 컨셉을 넘어서 바사라의 노래에 대한 진실성(중간에 바사라가 자신의 노래가 가지는 힘 때문에 갈등하는 장면)과 그러한 노래의 힘 보다 주인공 묘사에 힘을 쓴 덕분에 노래와 주인공의 묘사가 조화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로에서는 사라의 비중이 갑자기 3화 이후 마오의 갑작스런 퇴장으로 올라가더니, 정식 히로인으로 등극해버리고, 히로인으로서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새인간 각성과 함께 그냥 우주로 날아가버립니다. 그렇게 됨으로서, 사라와 노래라는 소재보다는 사라의 능력이 강조된 듯한 느낌입니다.

제로는 결과적으로 카와모리 쇼지의 개인적 취향이 묻어나오는 작품입니다. 어찌보면 원 마크로스 시리즈보다 지구소녀 아르주나의 계보를 이어가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드는 작품인데, 마얀 섬으로 대표되는 반문명 사회와 물질문명의 문제,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분쟁과 갈등의 씨앗이 결국 인류를 멸망으로 몰고 갈 것이라는 이야기는 기존 마크로스 시리즈 보다는 아르주나 쪽에 가까운 이야기입니다. 특히 초반 마오-신과 사라 사이의 물질 문명의 이기 vs 전통의 삶이나 마얀 섬이 전쟁터가 되는 부분, 이 모든 갈등의 단초가 사라의 과거였다라는 점 등에서는 이런 감독의 성향이 강하게 드러나더군요. 저는 이러한 이야기의 비중이 적어도 애니 내에서 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래서 마크로스 팬으로서 참 미묘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제로는 카와모리 쇼지 감독의 개인적 취향으로 마크로스 시리즈에서 벗어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뭐, 이런 작품이 있어서 마크로스의 명성에 큰 흠이 되었다 까지는 아니지만, 원작 팬으로서는 조금 실망 할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또한 원작 이전의 과거로 회귀하여, 설정을 제멋대로 바꾸어서 원작의 설정과 큰 차이가 있다는 것도 하나의 문제로 작용합니다.(이를 설명하는 적당한 이론이 있지만, 다음회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번작 F에서는 제로를 정식 사가로 끌어오는데다가 중요한 모티브로 쓰려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어서 미묘해지고 있습니다. 결론은, 작화나 이야기의 완성도에 있어서는 평작 이상의 애니이긴 하지만, 마크로스 시리즈라는 전체적 맥락에서는 이단에 가깝다 정도군요.

덧.5화 마지막에 쾨니히니 몬스터가 반응탄을 쏜 장면에서 마시던 맥주를 뿜을뻔 했습니다;
덧2.참고로 플러스, 제로 한국에 나온 DVD는 다 불법 복제판입니다. 사는 것이 다운 받아보는거랑 비슷하다는...



이로써 여태까지 나온 마크로스 OVA까지 다루었고, 다음 회에서는 설정 및 마크로스 F에 대한 리뷰를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2편 리뷰는 여러분의 호응을 보아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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