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들어가면서
애니 감상은 이미 5개월 전에 끝이난 작품이지만, 이것저것 생각할 거리도 많았고, 도대체 어떤 틀에 기초해서 리뷰를 써야 할지 막막했었다. 처음 글을 요한 갈퉁의 평화 이론에 근거해서 전개하려고 했으나, 거의 반 논문처럼 변해버린 리뷰를 보고는 기겁해서 중도하차(.....)하였다. 여러 가지 분석틀이나 글 구조를 생각했었지만, 결국은 조셉 켐벨의 영웅 신화 구조를 통해서 분석하기로 결정했다.
1.세계로의 입문
여기 한 소년이 있다. 세계 정세나 전략적인 측면에서 아무 의미도 가지지 않는 조그마한 섬에서 태어나 자라고, 친구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곤란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는 등의 평범한 삶은 살았다. 항상 타고 다니던 통학 버스에서 자살 테러가 일어난 그 날까지는.
망념의 잠드는 이렇게 시작된다. 여타 다른 애니메이션과 같이 갑작스런 사건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서 주인공은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새로운 세계로의 여정은 그 성격이 각기 다르다. 어떤 이에게는 모험의 길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세계를 구원하는 길이고, 혹은 복수의 길이다. 각자는 자신만의 사명을 띄고 원래 속한 공간을 떠나 새로운 세계, 비일상적이고 비정상적인 세계로 나선다.
망념의 잠드가 다른 작품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아키유키가 일상을 떠나 당도한 세계는 보통 사람들이 잊어버린 공간이다. 전쟁과 차별, 증오, 죽음, 테러 등의 비극적인 사건이 넘쳐나는 세계, 그러나 그것은 세계의 일부이자 세계의 추한 면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러한 타인의 고통과 비극을 쉽사리 잊어버린다. 심지어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을 '소비재'로써 소비한다. 수잔 손텍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미지 과잉의 세계에서는 타인의 고통은 스펙터클로 변해버린다고.
망념의 잠드의 세계 또한 그렇다. 세계는 남과 북으로 나뉘어서 싸우고, 폭력과 차별은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통학버스에서 일어난 자폭테러는 아키유키에게 일상적인 세계의 이면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 사건을 통해 아키유키의 몸에 죽은 자의 혼인 히루코가 깃들고, 그는 잠드, 일상적인 세계와 어두운 세계의 양쪽을 동시에 아우르는 존재로 화한다.
그가 처음 잠드로 화했을 때, 그는 무의식 중에 자신을 공격하는 인형과 전투를 벌이고 폭주하여 돌로 변해 죽을 위기에 처한다. 이 때, 나키아미가 아키유키에게 외친다.
살고 싶다면, 그렇게 맹세하라!
이는 의미심장한 말이다. 이는 돌이 되어 죽어가는 아키유키에게 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죽어서 원혼이 된 히루코에게 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잠드란 존재 자체가 죽음과 삶의 양면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키유키는 소망한다. 살고 싶다고.
나키아미는 아키유키를 데리고 센탄도를 떠난다. 이는 아키유키에게 있어서 기나긴 모험의 시작이었다.
2.소명의 인식
처음 잔바니 호에 승선한 아키유키는 자신이 왜 일상을 떠나야 하는지를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자신의 소명에 대해서 반항한다. 이는 영웅의 모험에 있어서 자신의 소명을 거부하는 단계인 것이다. 물론 영웅은 결과적으로 소명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으나, 아키유키가 소명을 거부하는 경우는 좀 특이하다. 아키유키는 위대한 영웅의 자질을 가진 사람이 아닌 평범한 학생이었고, 그의 생각에는 자신과 무관한 폭탄테러에 휘말린 다음 영문도 모른체 이역만리 우편선에 끌려와서 이상한 생활을 강요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왼팔에 깃든 존재, 히루코와의 공존을 배워나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소명을 알아간다.
아키유키가 받아들인 히루코는 전쟁으로 죽은 사람의 원혼이다. 산 사람에게 히루코가 깃들게 되면, 인간은 죽은 자의 원념에 휩싸이고 잠드-다른 말로는 人形(히토카타)-로 화한다. 그렇기에 잠드란 존재는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에 서있는 중재자이다. 자신의 팔에 깃든 히루코 존자 자체를 받아들이고 잠드는 히루코와 공존할 수도 있다. 하지만 히루코에서 나오는 원념 및 부정적인 감정만을 받아들인다면 산 자가 죽은 자에게 먹혀서 살아있는 자신을 잊고 돌이 되어 죽을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과 히루코, 이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잠드가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다.
아키유키의 팔에 깃든 원념이 누구인지는 작중에서 분명히 밝혀지지는 않기 때문에, 오히려 아키유키의 팔에 깃든 히루코는 전쟁에서 죽은 일반적인 사람들을 지칭한다고 보는게 좋을 것이다. 즉, 아키유키가 잔바니 호에서 히루코와 자신 사이의 공존을 배워나가는 과정은 일반적인 세계 및 산 사람과 전쟁으로 죽은 사람이나 전쟁의 비극 사이를 어떻게 중재하고 조정하는가의 문제이다.
잔바니호 승선 초기에 아키유키는 '자신이 왜 여기있는가?' 에 대해서 반항한다. 이는 영웅에 있어서 소명의 거부이기도 하지만, 자신에게 깃든 다른 존재 혹은 세상에 만연한 비극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사실 이는 아키유키만의 이기심이 아닌, 일반적인 사람들의 당연한 반응이다. 왜 내가 생판 모르는 사람의 고통을 이해해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나는 나 하나, 가족 챙겨서 살기도 바쁜 인간이라고.
하지만 비극은 외면할 수 없고, 설령 외면한다 하더라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인간은 그러한 비극을 화해할 수 밖에 없다. 아키유키가 잔바니 호에서 배운 것은 보통의 세계에서 부정당한 존재들과의 화해였다. 그리고 아키유키는 자신에게 깃든 또다른 존재를 긍정하면서 새로운 존재, 잠드로 화한다. 그리고 그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 하나의 기적이자 희망ㅡ망자와 산 자를 아우르고, 이들을 중재하여 세계를 평화로 이끈다ㅡ이 된다.
3.귀환의 실패와 위기
아키유키가 자신의 소명을 깨닫고 히루코와의 조화를 이루어내었을 때, 그는 나키아미와 함께 자신의 고향 센탄도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깨달음을 얻은 영웅이 자신이 떠나온 일상적 세계와 조우하고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귀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고향에서 마주친 것은 일상의 이면에 감추어진 부정적 기운과 존재ㅡ후루이치의 잠드화ㅡ였다. 그는 친구와의 대면 이후, 나키아미를 도망치게 하기 위해 스스로 미끼가 된다. 그리고 그는 군의 ASP에 요격당해서 살아있는 자신과 기억을 잃는다.
영웅의 귀환 단계에서 영웅이 귀환을 거부하거나 귀환의 과정에서 외부적인 시련이 흔히 존재한다. 하지만, 아키유키가 겪은 경우는 독특하다 할 수 있다. 이는 귀환의 거부나 외부의 시련에서 오는 갈등이 아닌, 자신이 깨달음을 전파하려는 일상적 세계 자체로부터 거부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아키유키에게 그 어떤 시련보다도 더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결국 이로 인해 아키유키는 잠드의 가면을 뒤집어 쓰고, 자아를 잃는 고통을 겪는다.
이러한 절망 속에 빠진 아키유키를 구원하는 것은 바로 아키유키의 친구, 니시무라 하루이다. 그녀는 아키유키가 센탄도를 떠난 뒤에도 계속 그와 소통하고 싶어하고, 자신의 생각이나 마음이 그에게 닿기를 기원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하루는 아키유키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아키유키를 만나기 위해서 군에 입대하기도 한다.
하루가 아키유키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목소리가 도달하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것은 단순히 아키유키에 대한 연모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다른 존재와 간절하게 소통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하루의 소망은 타자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폭력이 만연하며, 타인과의 소통이 단절된 세계에서 아키유키와는 다른 또 하나의 작은 희망이다.
그러한 그녀의 소망은 그녀에게 세계의 이면을 보여준다. 아키유키의 목소리, 잠드나 인형의 감정들, 그리고 모든 비극의 상징이자 북쪽을 대표하는 히루켄 황제까지. 이렇게 그녀는 다른 인물들 보다 세계의 비극이나 문제점들을 똑바로 바라보고 판단하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녀는 정상의 세계에서 비정상으로 몰리고, 위기에 처한다.
가까스로 그 위기에서 탈출한 그녀는 다양한 조력자와 북쪽으로의 모험을 통해서 아키유키에게 도달한다. 아키유키가 자아를 잊고 추락하는 도중, 하루는 아키유키의 이름을 힘껏 부르고, 아키유키는 다시 자아를 되찾는다. 하루의 소망이 아키유키를 다시 한번 구원한 것이다.
나머지 부분을 下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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