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고어Gore란 무엇인가. 고어란 영어의 오래된 표현 중, 엉겨붙은 피, 선혈을 표현하는 단어로부터 유래되었다. 피의 카니발 이후, 고어라는 장르는 B급 호러영화에서 일반 영화 전반으로 퍼져나갔다. 이제 인체 훼손과 파괴는 특정 서브컬처의 점유물은 아니다. 인간이라는 존엄성을 가진 인격체가 폭력이라는 프로세스를 통해 피와 근육, 뼈의 파편으로 분해되고 쪼게지는 그 모독의 미학은 대중에게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폭력이 존재하는 곳에는 그 증거물로 고어가 존재할 것이고, 대중매체가 폭력을 다룬다면 고어의 표현방법론은 계속해서 발전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좀 더 나아가보자:인간의 인격을 해체하고 모독하는데 있어서 폭력이란 '물리적'인 방법만이 존재하는 것일까. 한 인간이 인간 미만의 존재로 모독당하는 과정, 더 나아가서 그 과정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불쾌함이란 단지 물리적 고통을 넘어서, 사회 경제적인 빈곤이나 정신적인 질병, 인간과의 관계 등에서 다양하게 드러날 수 있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고어의 미학 범주에 넣진 않겠지만, 이러한 모독과 부패의 과정 역시 광의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고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광의의 고어, 인격체가 주변 환경에 의해서 찌그러 들고 부패하는 과정은 대중적이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폭력과 그 표현 방법론으로 고어는 일종의 '해방감'을 선사한다:현실에서 이루어지기 힘든 비현실적인 욕망(폭력적 욕망)의 실현을 위해 고어의 미학은 발전했다. 터져나가는 머리, 흘러나온 내장, 박살난 신체들은 인간의 어두운 욕망들을 충족하기 위한 미학으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한 인간이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박살나는 과정에서 대중이 일반적인 고어의 미학에서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없다. 이러한 모독과 파괴의 과정은 비일상적인 축제라고 이야기하기에는 현실의 재현에 가깝기 때문이다. 가난, 정신병, 사회적 차별 등은 여전히 현실이다. 그런 실제의 모독을 재현하는 것은 재미와 해방과 거리가 멀다. 

 

물론 이런 인간 모독의 과정을 다루는 작품들이 존재하기는 한다. 아트하우스 계열의 영화들이 그렇고, 여기서 간략하게 다루고자 하는 클린 쉐이븐 같은 작품들이 그러하다. 흥미롭게도 아트하우스 영화에서 사회적인 차별이나 정신병 같은 소재들이 벗어나고자 하는, 벡터가 있는 작품이었다면 클린 쉐이븐 같은 작품들은 가난과 정신병과 같은 것들이 '날 것 그 자체'로 묘사된다는 점에서 특징적인 작품이다.

 

클린 쉐이븐은 망가져버리고 낮게 짖눌려버린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다:클린 쉐이븐의 주인공은 조현병을 앓는 환자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입양된 자신의 딸을 찾기 위해서 머나먼 여정을 떠난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은 일반적인 맬로 드라마 같진 않다. 주인공은 계속해서 환청을 듣고, 편집증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가리기 위해 유리를 가리거나 뒤집으며, 더 나아가서는 실제 자신이 했는지 안했는지 조차 불분명한 상황들(아이를 살해하는 장면이라던가)의 환상에 시달린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서 영화는 밑바닥 삶을 메마른 시선으로 바라본다.

 

클린 쉐이븐의 미학은 쓰레기의 미학이다. 그리고 그 쓰레기들이란 인간 인격의 파괴된 잔여물, 광범위한 의미의 고어라 할 수 있다. 영화 속 세계는 주인공의 머릿속 마냥 난잡하고 무가치하며 흩어져있다. 그가 훔친 차, 도서관에서 흐트려놓은 책들, 잠시 들렀던 그의 부모의 집과 싸구려 모텔 등처럼 그의 주변 모든 것들은 지저분하게 눌어붙은 자국마냥 빛을 바라고 어지럽게 흐트러져있다. 이러한 어지럽고 지저분한 광경들은 인물들이 처해 있는 광경들이 그들이 어찌할 수 없는 환경에 놓여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는 여기에 어떤 감상조차 담지 않고 메마른 감수성으로 보여줌으로 마치 파괴되어버린 인간들의 모든걸 마치 로드킬 당한 고양이의 시체마냥 무덤덤하게 드러낸다.

 

흥미로운 점은 클린 쉐이븐에서 육체의 파괴와 정신의 파괴가 서로 교차되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일 것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몸에 도청장치가 삽입되었다고 믿고, 스스로 머리 가죽을 뜯어내거나 손톱을 파내고 그 밑에 있는 살점을 칼로 후벼 판다. 상당히 고통스러운 이 장면에서 보여주는 주인공의 태도는 흥미로운데, 자신의 조현병적인 집착에 그 행위가 주는 고통에 대해서 어떠한 반응을 하지도 않은채 차갑고 덤덤한 시선으로 자신의 행위를 응시한다. 자신을 파괴하는 과정, 자신의 신체조차 조현병적인 망상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쓰레기처럼 다룬다는 점에서 그의 정신은 파괴되고 부패되어 분해되어간다.

 

하지만 그런 그가 딸 앞에서 어떻게든 정상임을 유지하려 하는 모습을 영화는 극적으로 다루지 않지만, 동시에 영화 내내 보여준 부패되고 망가져버린 그의 삶과 정신 속에서 어떻게든 딸 앞에서 논리와 이성을 지키고 딸을 되찾으려 하는 시도 자체는 영화의 미학에 대비되어 더 극명하게 두드러진다. 하지만 바로 그 다음, 딸을 죽였다고 오해한 형사에 의해서 버려지는 쓰레기처럼 죽어버린다.

 

클린 쉐이븐은 인간과 쓰레기가 같이 뒹굴면서 그것이 결국은 '신뢰할 수 없는 주인공=쓰레기=박살난 인격'이라는 미학을 완성시키지만, 그러한 미학에도 불구하고 딸을 찾아나서는 그 과정에서 일말의 가능성과 그것이 부정되는 순간을 메마르게 다뤄낸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어떤 드라마보다도 특이한 감수성이 충만한 영화라 할 수 있는데, 쓰레기와 같은 풍경과 메마른 감상주의 사이에서 줄다리기 하면서 불쾌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묘한 인상을 준다. 마지막 딸이 아버지가 죽은 과정을 모두 목격하고도 죽어버린 아버지를 추억하며 무전을 하는 장면은 기분 나쁘게 메마른 영화에 남겨진 오아시스 같은 장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