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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1990년대의 극장판 공각기동대는 세계적인 일본 애니메이션의 붐을 일으키는데 큰 영향을 준 작품입니다. 공각기동대는 인간이 기계와 결합하고 인간이 인간적 한계를 뛰어넘게 되었을 때 과연 인간은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가 라는 철학적인 주제와 독특한 설정으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죠.

공각기동대:Stand Alone Complex(이하 SAC)는 그러한 극장판 공각기동대의 설정과 케릭터를 베이스로 만들어진 TVA입니다. 일면 원작의 명성을 등에 업고 인기를 벌어보려는 수작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계화 된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보여준 극장판과 달리 TVA는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회 문제와 정치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보여줍니다. 결론적으로 TVA는 원작의 명성에 전혀 모자라지 않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요즘 SF 작품이 Science Fantasy 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과학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인간의 판타지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주된 경향이죠. 하지만 공각기동대는 SF, 즉 Science Fiction 이라는 장르에 충실합니다. 과학을 통해 세계와 사회, 개인은 어떻게 바뀌는가, 거기서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등의 문제를 충분히 잘 보여줍니다. 특히 SAC는 현대 사회문제(정확히는 일본의 사회 문제)를 SF적인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보통의 SF 장르 작품이 보여주지 못하는 경지에 도달합니다.

SAC의 전반적인 주재는 Stand Alone Complex입니다. 현대로 들어오면서 과거의 농경 및 유목사회에서의 생존을 위한 연대나 유대의 끈에서 사회 구성원들은 자유로워졌습니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인간들은 역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주었던 집단이나 사상, 종교로부터 해방되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채로 파편화되고 고립됩니다. 이런 고립된 상황에서 인간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대입할만한 대상을 찾고 방황합니다. 그리고 SAC에서처럼 웃는 남자나 개별 11인 같은 영웅이나 행동의 모범이 될 만한 대상을 찾아내면 그러한 대상에 자신을 대입하고 모방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전혀 관련 없는 사람들의 동 목적적인 행위의 발생, 즉 Stand Alone Complex라는 겁니다.

SAC는 주체적이지 못한 인간이 자신의 주체성을 찾기 위한 홀로서기의 작업(Stand Alone)입니다. 이는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정신적으로 빈곤한 현대인들에게 쉽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현대인들은 일련의 SAC 현상에서 자신이 취하고 싶은 이미지만을 취한다는 겁니다. ‘웃는 남자’ 사건에서는 사건의 본질과는 관계없이 자신이 원하는 현대사회의 영웅의 이미지를 확대 재생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개별 11인’ 같은 경우에는 아예 대중이 원하는 모습의 영웅을 만들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이끌려는 악역이 등장하기도 했죠.

그렇다면 ‘왜 작품 내의 사람들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움에도 불구하고 SAC와 같은 현상에 말려드는가?’ 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이는 현대인들이 이미지 생산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이미지를 소비하는 객체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스스로 이미지를 생산하지 못하고 원본을 모방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이러한 원본의 모방자들에 반해, 이 작품의 주인공인 공안 9과는 SAC 현상의 숨겨진 진실을 바라봅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 난 것인가? 이 사건의 진정한 본질은 무엇인가? 그들은 SAC 현상의 본질까지 파고들고, 자신들이 일하는 정부 내부의 위협과 공격에도 불구하고 목숨과 명예를 버리면서 까지 자신들이 추구하는 정의를 실현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정의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죠. 그렇기에 작품에서 그들은 숨은 영웅입니다.





카마미야 감독은 공안 9과의 모습을 통해서 현대사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이미지를 단순히 소비하지 말고 이미지 너머의 본질을 보라, 자신의 정의를 묵묵히 수행하라, 조직에 굴복하지 말고 소신을 지켜라 등등... 그들은 그들 자신이 바로 고유한 원본이며 독특한 존재입니다. 즉, 작품을 통해 감독이 이야기하고 싶은 바는 현대 사회에서 이미지의 객체가 아닌 주체적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소신을 가지고 스스로 주체로 거듭나라 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감독은 스스로도 그러한 주체적인 인간은 현대 사회라는 시스템에 맞지 않다고 봅니다. 1기에서 공안 9과를 파괴하면서까지 전뇌 경화 백신에 대한 비리를 밝혀냈음에도 불구하고 9과에게 명예회복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 2기에서는 조국에 핵이 떨어지는 상황을 막아냈지만 본질적인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 등은 결과적으로 공안 9과의 존재가 이 현대 사회에 있어서 인정될 수 없는 존재라고 감독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정부 조직과 일반 대중들, 난민, 해커, 마피아 등등 그 어느 곳에도 속해있을 수 없는 영원한 사회와 조직의 아웃사이더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3기 극장판에서 주인공은 스스로 조직의 한계를 절감하고 조직을 나와서 독자적으로 행동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 또한 마지막에 가서는 주인공 스스로가 개인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조직으로 복귀하는 듯한 암시를 줍니다. 즉 공안 9과, 혹은 주체적 개인들은 조직의 일부가 될 수 없지만, 자신들의 이상을 위해서 조직을 떠날 수도 없는 그러한 딜레마의 빠져 있습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Endless Gig(끝나지 않는 연주, Gig이 연주라는 의미가 있습니다)입니다. 현대사회라는 시스템의 결함이 만들어낸 SAC 현상, 그리고 거기서 벗어나 정확히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정의를 수행하는 사람들, 하지만 주체적인 개인은 시스템에 편입되지 못하고, 본질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스템은 다시 SAC 현상을 만들어내고... 현대사회란 결국 이러한 돌고 도는 순환 고리 안에 갇혀있다는 것이 감독의 주장입니다.

작품은 이러한 일련의 주제 의식들을 추상적인 스토리가 아닌 구체적인 사회 현상이나 상징적인 상황을 통해 풀어냅니다. 덕분에 작품은 추상적인 스토리에 갇혀 해매지 않고 주제의식을 간결하고 명료하게 전달하는데 성공합니다. 또한 공안 9과라는 특수한 조직이 처한 독특한 정치적 상황과 조직 사이의 긴장을 통해서 스토리의 긴장감과 템포를 적절하게 조절하여,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이야기를 재밌게 풀어내는데도 성공합니다. 여기에 사이보그나 전뇌, 네트 등의 SF 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하구요.





결론적으로, 공각기동대 Stand Alone Complex는 재미와 주제의식을 둘 다 성공적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약간의 흠이 있다면 2기의 국제 역학관계라던가 정치적인 설정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비위를 심히 거슬리게 할 만한 여지가 충분히 있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도 나름 중요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따로 글을 쓰고 있으니 언급하지는 않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점을 빼고 본다면 SAC는 대단히 훌륭한 작품입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꼭 감상하시라고 강력히 추천합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 '그랜 토리노'는 명백한 보수주의 영화입니다. 보수적이면서 꽉 막힌 노인네가 이민자 아이에게 미국적 가치관을 가르치고, 이를 통해서 미국을 물려준다는 내용의 영화는 언뜻 보면 미국적 가치관의 재생산과 미국 우월주의에 대한 이야기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랜 토리노의 강점은 그러한 맹점에서 비켜나서 납득이 되는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랜 토리노의 스토리는 단순합니다. 노인이 아이를 만나고, 아이에게 자신의 가치를 전수한 다음, 아이를 위해 죽습니다. 오히려 영화는 스토리 보다는 영화적인 상황과 은유를 통해서 영화적인 깊이를 더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 아내를 잃은 노인의 쓸쓸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미국적인 가치를 위해 한국전에 참전하였고, 자동차 공장에서 조립공으로 성실히 일했으며, 아내를 사랑했고, 미국 차를 몰고 다니고, 미국적 가치를 숭상하고 이민자들과 그의 문화를 경멸합니다. 영락없는 미국인의 전형이죠.

하지만, 노인은 고독합니다. 아무도 자신의 가치관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존중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일제 차를 몰고 다니는 자식들은 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서 아버지 집을 차지하려고 하고, 손녀는 할아버지의 자부심이자 보물인 그랜 토리노에만 눈독을 들이죠. 즉, 이는 구세대가 쌓아온 미국이라는 가치관은 업신여겨지고, 미국이 가진 부와 권력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모습을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런 와중에서 노인은 소년을 만납니다. 처음에는 동네 양아치의 협박에서 소년을 구해준 것이지만(역설적이게도 노인은 소년을 구하려는 것이 아닌 자신의 집을 지키기 위해서였죠), 차츰 이웃에 사는 이민자 가족과 친하게 지내게 되면서 그들과 교류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없는 소년에게 아버지 적인 존재가 되어서 소년에게 세상을 사는 방법을 가르키기 시작합니다.

현대 미국 사회는 이제 백인 주류가 아닌, 아메리칸 드림을 쫒아 전세계에서 흘러 들어온 다양한 인종 민족 그룹에 의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영화는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영화에서 노인 이외에는 백인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노인이 사는 마을에는 더 이상 노인 이외에는 백인이 살지 않죠. 심지어는 이민자가 '너는 왜 다른 백인처럼 나가지 않냐?'라고 묻기까지 합니다. 이제 미국은 백인이 아닌 다양한 민족 그룹에 의한 다원적 사회가 되어간다는 것이죠.

하지만, 소위 아메리칸 드림은 이민자 사회를 왜곡합니다. 기존의 이민자 고유의 사회나 가치를 무너뜨리고 싸구려 저질 미국적 가치에 물들게 합니다. 마약이나 방탕, 음주 등등 이는 미국이 그들에게 있어 기회가 아닌 하나의 독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영화에서는 소년의 사촌 형이나 그 친구들이 이런 타락한 가치관에 물든 이민자 2세대들로 나옵니다. 그리고 스스로 소년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소년을 타락시키려 하죠.

이럴 때, 노인이 소년의 보호자가 되기를 자처합니다. 소년에게 미국적 가치를 가르키고, 미국이 주는 기회와 평등을 누리게 하려 도움을 주죠. 이로써 노인과 소년 사이에는 유사 가족관계가 형성됩니다. 아버지가 없는 소년에게 노인이 아버지 역할을 맡고, 소년은 노인의 가치를 이어받아 정신적인 아들이 되는거죠. 이 영화에서 가족이란 단어는 중요한 키워드인데, 가족은 사회적 가치의 전수자이자, 자식 세대의 보호자이고, 하나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노인과 소년 사이의 관계는 미국이라는 세계가 어떻게 전승되고 보존되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영화는 담담하면서 차분하게 전개해 나갑니다. 특이한 점은 미국이 과거에 저질렀던 과오들(자기들이 진 베트남 전쟁이 아니라, 이겼던 한국전을 통해)에 대해 영화는 '그건 우리가 명백하게 잘못한거야'라고 담담하게 고백합니다. 게다가, 미국이 미국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아버지 미국의 죄는 아버지 대에서 끊어야한다는(노인의 순교) 영화의 주장은 최근 미국 영화 중에서 가장 솔직하고도 납득이 가는 이야기였습니다.

영화 자체는 미국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지키자는 보수주의적인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적인 화법이나 이에 대한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생각은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저로써도 수긍이 됩니다. 어쩌면 이제는 미국 영화계의 거장으로 자리 잡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저력일지도 모르겠네요.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도박은 인류 최악의 발명품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무런 노력 없이 확률이나 운만으로 일확천금을 한다는 발상 자체에서부터 사회의 통념에 상당히 이단적이기도 하고, 도박 자체의 중독성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패가망신하게 하는 악영향을 가지고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수많은 국가에서 도박을 금지하거나 제한을 두죠. 하지만, 싱가포르의 건국자가 말했기를 "중국인에게 모든 것을 시킬 수 있었어도, 단 하나 마작(도박의 일종)은 끊게 할 수 없었다"와 같이 도박은 적어도 인류가 모두 성인군자가 되거나, 멸망하기 전까지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후쿠모토 화백의 도박묵시룩 카이지는 이러한 도박에 대해서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만화는 한 명의 인간 쓰레기가 극단적인 상황에서 도박을 통해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고, 기사회생하고, 살아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절망적인 도박의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도박 중독자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작품에 있어서 거대한 스토리 라인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데, 현재까지 40권 까지 나온 작품 자체가 총 열 손가락에 꼽을 에피소드로 구성되어있다는 점에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도박묵시룩 카이지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그림체입니다. 요즘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각지고 투박한, 좀 강하게 이야기하자면 조악한 그림체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하지만, 이 조악한 그림체야 말로 카이지의 매력입니다. 도박에 중독된 인간들의 왜곡된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던가, 도박 패에 희비가 엇갈려서 울렁거리거나 무너지는 인간들의 모습들을 뭉크의 그림 '절규'처럼 사람까지 일렁거리게 하는 등 도박 중독자들의 희비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카이지에서 그림체는 하나의 매력포인트로 작용한다는 것도 이를 입증합니다.

카이지에서 각각의 에피소드는 도박에서 이기고 지는 희비와 파멸을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한 에피소드가 만화책 몇 권에 이어서 진행되는 만큼, 이야기의 템포가 느려지거나 맥이 빠질 수 있다는 단점도 있지만, 작품에서는 이를 시원시원한 연출과 직설적인 묘사로 커버하고 있습니다. 또한 작품의 에피소드의 완급 자체가 훌륭해서, 이길 것 같으면 거기서 한번 뒤집어서 위기가 찾아오고, 다시 위기가 기회가 되고... 이런 식으로 진행이 됩니다.

사실, 작품에서 도박은 단순히 도박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작가는 도박이란 것에 대해 묘한 철학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도박이 우리 인생의 상황을 극단적인 형태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에스포와르 호의 가위 바위 보 카드 게임은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이 서로 속고 속이는 상황을, 리조트에서 외나무 다리 레이스는 각자 홀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들 사이의 실존적인 고독을, E 카드 게임은 버러지 처럼 기면서 사는 인간들의 반항심을 등등...이런식으로 도박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처할 수 있는 상황을 극단적으로 암시하는 도구로 작용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도박 묵시룩 카이지의 이야기는 단순한 도박 중독자의 도박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인생에 대한 메타포인 거죠. 물론 최근 에피소드인 17보 마작 같은 경우에는 마작이란 소재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샛길 인생을 살아온 인간의 병적 심리를 그려냈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작품의 큰 흐름 내에 존재하는거죠.

이러한 큰 흐름속에서 카이지는 작은 버러지 같은 존재입니다. 그는 생과 사가 걸린 도박이 아니면 제대로 집중도 하지 못하는 인간이죠. 하지만, 도박이나 승부에 있어서는 사람이 180도 바뀝니다. 또한 도박에 있어서 속임수를 쓰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양심이나 도덕관념에 충실하고, 강자 앞에서는 강하고 약자 앞에서는 자신을 굽힐 줄 아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구요. 어떻게 보면, 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향점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큰 승부에서 상대방의 속임수에 굴하지 않고 승부하는 모습, 그러면서 자신의 원칙을 지키는 그런 모습이 투영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만화는 현재 17보 마작 에피소드가 끝나고, 재애 그룹 회장 아들과의 승부로 들어섰습니다. 사실 만화가 40권 정도가 되니까 점점 승부가 복잡해지고, 늘어진다는 느낌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박 묵시룩 카이지는 훌륭한 만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오노 나츠메는 창작 동인계에서 활동하다 '라 퀀타 카메라'로 데뷔하여 낫 심플과 리스토란테 파라디조 등의 작품을 내고 유명해진 만화가입니다. 보통의 일본 만화가들과 다른 독특한 그림체와 담담한 스토리 라인 등의 특색을 가지고 있는 만화가이며, 국내에는 대부분의 책들이 소개되었습니다. 저도 예전부터 이 작가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작품을 구해서 보려고 했으나, 여건이 맞지 않아 못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개강날에 동방에 가보니까 국내에 나온 오노 나츠메 작품이 다 있더군요. 후배 덕분에 좋은 만화보고 두 작품을 한꺼번에 다루는 더블 리뷰를 쓰게 되었습니다.



Not Simple




개인적으로 오노 나츠메라는 작가를 알게 된 계기가 Laika 님의 블로그에 올라온 낫 심플 의 평가와 단행본 중의 한컷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때 받았던 느낌은 '케모노즈메를 서양풍으로 그려내면 이렇게 될까?'라는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실제 감상은 첫 느낌과는 많이 다르지만요.

낫 심플은 행복해질 수 없었던 한 남자의 불우한 인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세한 스토리는 미리 니름이 되어서 자제하겠지만, 한 남자가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는 불행으로 떨어지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스토리 자체가 대단히 자극적이고 감상적인 부분이 많다고 할 수 있지만, 낫 심플은 그러한 자극적인 부분에 대한 묘사를 극도로 자제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극도로 건조한 컷 구성을 통해서 작품은 그런 비극으로부터 한발자국 떨어져서 이야기를 관망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를 관망하는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케릭터의 감정은 잘 살려내고 있죠.

이렇게 상반된 효과('이야기를 관망하는 분위기'와 '케릭터의 감정 묘사')를 동시에 드러낼 수 있는 이유는 오노 나츠메의 독특한 그림체 덕분입니다. 전반적으로 거친 묘사와 동시에 우수에 찬 큰 눈동자(근래 일본 만화의 주류인 소위 '눈알 괴물'과는 다른)와 케릭터에 대한 훌륭한 묘사를 통해서 두가지의 상반된 효과를 동시에 얻어낸 것이죠. 그렇기에 작품은 전반적으로 무미건조하지만, 따스한 느낌이 들죠.

사실상 작품은 거의 대부분을 주인공의 우울했던 인생에 맞추고는 있지만, 과거로 회귀해서 보여주는 마지막 엔딩 장면(사랑의 징조)을 통해 긴 여운을 주는데 성공합니다. 작품의 이야기로 보았을 때는 비중이 상당히 작은 이야기였지만, 이를 처음과 마지막에 언급함으로써 그의 비극적인 인생을 부각시키면서 동시에 오묘한 기분이 드는 엔딩을 만들어냅니다. 어찌보면 누나를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점점 불행해지는 그에게 단 한순간 행복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면이었으니까요.

'낫 심플'은 자칫 단순 신파성 멜로로 흐를 수 있는 이야기를 독특한 묘사와 구조를 통해 깊은 여운을 주는 작품으로 승화시키는데 성공합니다.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 감상하고 넘어가야할 만화라고 생각합니다.



리스토란테 파라디조




리스토란테 파라디조는 위에서 리뷰한 '낫 심플'에 비하면 가벼운 로맨스 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신사와 젊은 여인이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가 주요 내용인 '리스토란테 파라디조'는 어찌보면 현재 동인녀들의 트렌드(노신사, 안경 등)와 많은 부분 맞닿아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덕분에 리스토란테 파라디조는 애니화까지 되었고, 실제 많은 사람들이 오노 나츠메의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축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랑을 위해 자식을 떠난 어머니와 이에 화가 나서 어머니를 쫒아온 딸 사이의 갈등의 축과 노신사와 딸 사이의 미묘한 연애 감정에 대한 축으로 나뉩니다. 재밌는 점은 서로 연관성이 없는 듯한 두 개의 이야기 축이 '사랑'이라는 공통된 소재를 통해서 만나게 됩니다. 딸은 노신사와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점점 사랑에 빠진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고, 어머니는 그런 딸의 모습을 보면서 딸에 대해 점점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리스토란테 파라디조는 낫 심플에 비해서 대단히 밝고 유쾌합니다. 적당한 유머도 있고, 운치도 있는 편이죠. 그리고 이탈리아 음식 문화나 분위기를 잘 살려내었습니다. 이는 작가가 이탈리아 유학생활을 했을때 느꼈던 것들을 작품에 옮긴 것입니다. 재밌는 점은 리스토란테 파라디조는 일반적인 연애 만화보다는 덜 자극적인 스토리와 분위기를 냅니다. 극적인 사건이랄 것이 없고, 극중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작은 소소한 사건들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은 대단히 일상적인 일들을 풀어낸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사실, 저는 낫 심플 쪽이 리스토란테 파라디조보다 좋다고 하겠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스토란테 파라디조도 괜찮은 작품입니다. 사실 만화책 분량하고 애니 분량하고 어떻게 매치가 되는지 좀 의문스럽기는 하지만(만화책은 아주 깔끔하고 짧게 끝내더군요), 만화책 내용 그대로 간다고 하면 애니메이션도 볼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림체 쪽에서는 거친 질감을 잘 살려낸 만화책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하지만요.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영화 국가대표는 한국 스키점프 국가 대표팀에 대한 실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무주 동계 올림픽을 위해서 동계 올림픽 개최지 후보 자격을 획득하기 위해서 급조한 스키 점프 국가대표 팀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동계 올림픽에 나갔는지, 그리고 그들이 국내에서 국제 대회에서 어떻게 질시를 받았는지와 이를 어떻게 극복하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작품의 스토리 구조는 전형적인 신파물에 가깝습니다. 자신의 친부모에 대한 애증을 가지고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해외 입양아, 바보 동생에 귀머거리 할머니를 부양해야하는 소년 가장, 약 때문에 선수 자격을 박탈당한 나이트클럽 웨이터, 특기도 없이 아버지 음식점 중국인 여종업원을 사랑하는 중졸 학력 보유자 등 전형적으로 세상이 갖다 버린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말도 안되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동계 올림픽 대비를 하고, 무주가 개최지 선정에서 탈락하자 곧바로 대표팀이 해채되어 자비로 올림픽 출전까지 하는 등 많은 고난을 겪고 좌절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고난을 극복하고 스키점프라는 스포츠를 통해서 당당하게 세상으로 나섭니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 점은 바로 영화의 주제이자 핵심인 '국가대표'라는 명예입니다. '국가대표'란 한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국가대표란 사람들이 중졸학력자, 약물중독자 양아치, 소년가장, 수출 입양아[각주:1]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아이러니컬한 일입니다. 그들은 사회에서 이용 당하고, 이용가치가 사라지자 버려진 존재들이죠. 그런 사람들이 한 국가를 대표해서 세계로 나선 것입니다.

사실, 이들은 국가대표로써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영화의 처음에서부터, 영화 마지막 나가노 올림픽 이후에도 그들은 국가대표가 아닌 찐따 취급을 받습니다. 원래부터 동계 올림픽 유치를 위해서 급조되고 사용가치가 다 되면 갖다 버릴 존재들이었으니까요. 이는 대한민국 근현대사, 아니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이야기입니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대한민국에서 서민들은 윗사람들의 편의에 의해 사용되는 소비재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이들의 명예이자 멍에인 '국가대표'는 다시 한번 재해석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국가'를 대표해서 올림픽에 나선 것이 아닌, '우리'를 대표해서 올림픽에 나선 것이라구요. 따라서 그들이 심판의 편파판정, 미국의 텃세, 한국 올림픽 위원회의 미지원, 세상의 질시를 극복하고 세계 사람들 앞에서 박수를 받는 장면은 동시에 우리를 위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아무도 도와주지도 않고 세상의 멸시를 받아가면서 단물 쪽쪽 빨아먹고 사람을 헌신짝처럼 갖다버리는 인간들을 넘어서서 우리 대한민국을 여기까지 이끌어온 무명의 사람들에 대한 찬사인 것입니다.

솔직히, 국가대표는 한국판 블록버스터의 전형입니다. 일반적이거나 덜 떨어진 인간이 영웅이 된다는 너무나 전형적인 구도를 따라갑니다. 하지만, 영화의 완급이나 적절한 개그 장면들, 그리고 마지막 긴장감 있는 스키 점프 장면 등을 통해서 영화에 완성도를 높이는데 성공합니다. 영화 마지막의 자막은 사람의 마음을 찡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구요. 따라서 국가대표는 상당히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덧.영화의 클라이맥스, 형의 부상으로 바보 동생이 스키 점프를 해야하는 상황이 옵니다. 그러나 동생은 점프대에서 내려다 본 올림픽 경기장에 압박감을 느끼고 안으로 들어오죠. 그러자 형이 동생을 붙잡고 소리치는 한 마디.

"니가 뛰어야 내가 군대를 안 간단 말이야!"

....대한민국 영화의 금기(?)가 하나 깨지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상황 자체는 정말 웃기다기 보다는 대단히 진지해서 그닥 문제될 게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엄청나게 공감이 되더군요(......)



  1. 해외 입양아는 돈받고 팔려가는 경우도 꽤 있었습니다. 영화속에서도 그런식으로 표현이 되죠. [본문으로]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감독한 호소다 감독의 신작 섬머 워즈는 가족 드라마+SF+로멘스 등이 복합적으로 결합된 작품입니다. 여름방학 선배와 함께 친가에 내려가서 선배의 연인 역할을 하는 주인공이 시끌벅적한 대가족이 만나면서 생기는 해프닝과 OZ라는 가상 공간을 중심으로 일어난 사이버 테러가 이야기의 두 축으로 나뉘어서 진행됩니다. 처음에는 별개였던 이야기가 점점 맞물려 들어가면서 하나의 이야기가 됩니다.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가족'입니다. 처음 주인공이 나츠키 선배의 본가로 가는 도중, 동행하는 선배의 가족들이 점점 늘어나는 인상적인 인트로에서 OZ에서 일어나는 사이버 테러의 대항하는 마지막까지, 거의 대부분의 가족들(혹은 가족의 지인)은 극중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이는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인 OZ라는 최첨단 가상공간 및 모든 일의 주범 해킹 A.I 러브머신과는 극명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가족이란 것은 우리의 역사 이전에서부터 존재해왔으며, 혈연 및 지연으로 인간을 결속시킨 인류 최초의 커뮤니케이션 집단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섬머 워즈는 OZ라는 최첨단 커뮤니케이션과 가족 및 지연이라는 구식 커뮤니케이션 사이의 전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도 가족의 핵심이자 가장인 나츠키의 할머니는 OZ에서 러브머신이 일으킨 일련의 사건을 전쟁이라 보고,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관계를 맺어온 지인들에게 현상황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로써 OZ에서 일어난 문제가 현실에 직접적으로 미치는 것을 막습니다.

얼핏 이 장면은 '나츠키의 할머니는 대단한 인물이다'라는 환상을 심어주기 쉬운데, 실상 우리 일상 속에서도 이런 장면은 찾아보기 쉽습니다. 누군가 '사람이 자기 아는 사람을 따라 3명만 건너뛰어도 전세계 사람과 소통할 수 있다'라는 지적했던 것처럼,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지연은 엄청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각주:1] 그렇기에, 나츠키의 할머니는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만났던 사람들과 관계를 원활하게 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는거죠. OZ에서 일어난 사이버 테러가 현실에서 실질적인 사상자를 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구식 관계와 신식 관계 사이의 1차전은 구식 관계의 승리로 끝납니다.

그렇기에 사이버 테러의 범인이자 해킹 A.I 인 러브머신은 나츠키의 할머니를 제거[각주:2]하여 인적 네트워크의 접점을 제거합니다. 실상, '이성적'인 A.I의 입장에서 본다면 네트워크의 접점이자 구심점인 가장을 제거하면 자연스럽게 네트워크가 붕괴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또한 가족들도 할머니의 죽음으로 큰 실의와 좌절에 빠지구요.

하지만, '가족'이란 쉽게 무너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나츠키의 가족들도 그러한 슬픔을 넘어서 가족 사이의 유대를 확고히 하고, 러브머신에 대항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부터 가족들은 각자 자신의 직업과 특기를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자위대에 근무하는 사람은 군용 안테나를 공수해오고, 전자상가 관련 일을 하는 사람은 연산을 위한 슈퍼 컴퓨터를 공수하고, 슈퍼컴퓨터의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서 어부인 사람이 배를 끌고 오기까지 하는 등 각자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작품에서 신식 커뮤니케이션을 마냥 부정적인 것만으로 그려내지는 않습니다. 작품의 마지막, 나츠키의 가족의 힘만으로 러브머신에 대항할 수 없게 되자, 전세계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장면은 새로운 기술과 커뮤니케이션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사람을 하나로 모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힘없는 다수가 결집했을 때 얼마나 큰 힘을 낼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섬머워즈는 위와 같은 대립 구도를 어려운 소재나 표현을 끌어들이지 않고 쉽게, 그러면서 동시에 인상적이면서 재밌게 표현합니다. 가족 간의 화해와 단합을 보여주는 마지막 일전을 앞둔 식사 장면[각주:3]이나, 가족들이 처해있는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야구 중개 장면, 그리고 마지막 이 작품의 진정한 명장면이자 백미인 고스톱 장면 등등... 그 외에도 섬머 워즈에는 멋진 장면들이 많습니다. 이야기 완급도 훌륭하고, 재미도 있고 잔잔한 감동도 있는 작품입니다. 올 여름 개봉한 일본 극장판 애니메이션 중에서는 꼭 봐야하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덧1.실상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가족이라는 소재가 중요하게 등장한 적이 많았지만, 이렇게 대가족을 중심 소재로 삼은 케이스는 거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재밌는 게, 이러한 일본의 대가족의 이미지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대가족의 이미지와 많은 점에서 유사하다는 점입니다. 어떤 점에서는 대가족이란 이미지가 세계적으로 어떤 공통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나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덧2.여태까지 나온 애니메이션 중에서 가족이 같이 밥을 먹는 장면을 정말 잘 잡아낸 애니메이션이라고 평하고 싶습니다.

덧3.어떻게 보면, 주인공이 대가족의 구성원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서는 스토리로도 볼 수 있군요.

  1. 실상, 한국이나 몇몇 나라에서는 이러한 지연이 폐쇄적인 커뮤니티를 형성하여 사회발전을 저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연이라는 것이 많은 순기능을 가지고 있을 뿐더러, 사람이 존재하는 한 이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본문으로]
  2. 실제 러브 머신이 할머니를 죽인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러브머신이 나츠키 가족의 존재를 눈치채는 부분 뒤에 돌아가셨으니 그렇게 생각해도 좋을거 같습니다. [본문으로]
  3. 특히 할아버지의 첩의 자식이자 러브머신 개발을 담당한 와비스케가 마지막 식사 장면에서 식탁에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장면을 통해서 그와 가족이 서로 화해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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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제가 감상했던 영화 중에 가장 놀랍고도 대단한 다섯 작품을 꼽는다면, 거기에는 꼭 WALL-E가 들어갑니다. 주인공인 두 로봇이 서로의 이름인 WALL-E와 EVE 만을 불러서 거의 모든 감정 표현을 할 뿐만 아니라, 고전 로멘틱 영화의 기법이나 화법을 애니메이션에 효과적으로 적용하여 '애니메이션이 이런 세세한 감정 묘사도 가능하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 작품입니다. 사실,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 자체가 그래픽이나 그림 등에 기반한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드는데는 훌륭하지만, 정작 케릭터의 감정이나 미묘한 심리묘사를 하기에는 부적합한 경향이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 자체가 과장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케릭터의 감정에 이입하지 못하는 막을 칩니다.

 WALL-E는 그러한 애니메이션의 장르상의 한계를 멋지게 극복한 작품입니다. 인간도 아닌 고철덩이 로봇이 인간보다 더 풍부한 감정을 가지고 이를 표현하는 모습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로봇과 로봇 사이의 로멘스를 고전 무성 영화의 기법을 들고와서(다양한 몸동작과 표정) 표현하는 부분도 대단했구요. 그렇기에 이번작 업 도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업'이 그러한 기대를 훌륭하게 충족시킨 작품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WALL-E를 픽사의 신작 애니메이션 '업'은 노인인 칼이 먼저 세상을 뜬 아내의 소망을 들어주기 위해 집을 풍선에 매달아서 파라다이스 폭포로 향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도중에 러셀을 만나게 되면서 일이 꼬이게 됩니다. 영화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칼과 러셀이 서로 알아가고, 갈등하고, 화해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는 전작의 좋은 점을 그대로 가져오고 있습니다. 업은 WALL-E에서처럼 대사와 과장을 절제하고 카메라 워크 및 작품 속의 소재를 이용해서 이야기와 감정묘사를 표현합니다. 또한 이번작 업도 전작과 비슷하게 복고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WALL-E가 로봇들의 아날로그 적인 사랑을 그려내면서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를 드러내었다면, 업은 복고적인 느낌의 음악과 스토리(할아버지와 소년이 있는데, 서로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다가 화해하고 친구가 된다)를 차용하고 있습니다. 

 '업'의 주제는 '인생'입니다. 인생의 막바지에서 어두운 현실에서 벗어나 자신의 어릴적 꿈(동시에 아내의 꿈)을 이루기 위해 남아메리카로 떠난 칼의 이야기와 상황을 통해서 인생 그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물론 '인생'이라는 소재 자체가 쉬운 소재가 아니고, 포커스를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서는 이야기가 천차만별로 나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업'은 복잡한 이야기나 상징을 끌어들이지 않고도 인생이란 주제에 대해서 멋지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내용이 바로 남아메리카에 도착하고 나서 풍선의 헬륨가스가 점점 빠져서 가라앉는 집을 메고 어떻게든 파라다이스 폭포로 가려는 부분입니다. 실제 우리 인생에서도 이런 상황은 종종 발생합니다. 계속해서 현실에 밀려서 잃어버린 꿈이 점점 실현 가능성을 잃게 되어 갈 때, 사람들은 초조해지고 큰 부담이 됩니다. 이를 영화 내에서는 등에 점점 내려앉는 집을 메고 가는 기묘한 상황으로 표현하였고, 이는 단순하지만 대단히 효과적이고 인상적입니다.

 여기에 칼과 러셀의 모험을 방해하는 대적자가 나타납니다. 그는 어릴적 칼의 우상이었던 찰스 먼츠죠. 그는 꿈을 위해서 파라다이스 폭포로 왔고, 희귀 새를 붙잡아서 자신의 꿈이 틀리지 않았음을 세상에 증명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는 번번히 실패해서 거의 70년 동안 일상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파라다이스 폭포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는 꿈에 사로잡혀 인생을 망쳐버린 사람을 보여주는데, 그는 자신의 꿈을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화석과 말하는 개들에 둘러쌓인 그의 모습에서 과거와 꿈에 사로잡힌 쓸쓸한 늙은이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는 칼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데, 그도 어렸을 적 아내의 모험일지를 보고 과거의 꿈을 위해서 집을 풍선에 매달아서 남아메리카로 왔으며 어떤 당면 과제(러셀을 집으로 보낸다던가, 케빈을 도와준다던가 등)보다도 자신과 엘리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칼과 찰스의 차이점은 칼에게는 러셀이라는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칼이 자신이 모험을 떠나게 하는데 결심을 주었던 부인의 모험 일지의 '앞으로 해야 할 일' 부분에 자신과의 소중했던 추억이 담긴 것을 보고 '중요한건 꿈이 아니라, 현재다'라는 걸 깨닿게 됩니다. 그렇기에 그는 꿈에 안착했던 집을 다시 띄워서 러셀을 도우러 가죠. 영화 마지막, 자신의 할일을 다한 집이 점점 구름 아래로 가라앉는 모습을 보면서 칼이 '집은 그냥 집일 뿐이란다'라고 하는 장면은 그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영화 '업'은 멋진 작품입니다. 상업성이나 재미로서도 훌륭하고 긴장의 완급도 잘 되어 있으며, 장면 장면 적절하게 개그를 집어넣어서 사람들을 웃길줄 압니다. 하지만, 그러한 이면에 '업'은 진득한 페이소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웃긴 장면이든, 진지한 장면이든 영화는 목에 힘주지 않고도 충분히 주제나 이야기를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저는 영화 '업'을 WALL-E와 비견될만한 명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덧.영화는 훌륭했지만, 영화보러온 초딩은 훌륭하지 않습니다. 영화에 몰입하고 있는데 초딩들이
영화관 전세낸 마냥 소리지르는 거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엔딩을 보면서
감동하고 있는중에 "끝났다!"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더군요.
영화 보는 도중에 살의와 전의가 끓어오르던 적도 오랜만이었습니다.

덧2.WALL-E에서도 인상적인 엔딩 크레딧을 보여주었는데, 업도 그렇더군요.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존댓말을 생략하겠습니다.

리뷰: http://leviathan.tistory.com/970
코멘트:http://leviathan.tistory.com/971

 사실 영화를 보고난 뒤, 상당히 격한 리뷰를 썻다. 게다가 추가 포스팅까지 대단히 격하게 썼다. 하지만 어느 누군가에게 화가 단단히 나더라도, 그 다음날에까지 그 사람에게 머리 끝까지 화나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나 또한 다시 한번 생각해보니, 영화 평가에 있어서 약간 과했다는 생각이 들기는 들었다(실상, 나는 영화에 열받은 것이 아니라, 감독과의 인터뷰에 열받아 있었던 것이었다. 그건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한가지는 명확히 해두어야 한다. 이 영화는 내 인생의 최악의 영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대한 평가를 좀 달리하고자 하는 것은 영화의 문법이나 표현에 대한 것이다. 실상 여태까지의 호러 영화들은 이미지나 포장된 형태의 가학성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가학성은 호러영화의 중요한 코드 중 하나이고(동시에 거의 모든 대중 문화의 코드의 중요 코드이다), 우리가 공포영화를 보는 이유이다. 뭔가 기분 나쁜 명제이기는 하지만, 사실이다. 만약에 우리 자신이 선하다면, 공포영화에서 살인마가 사람을 죽이는 것이나 주인공들이 살인마를 처단하는 줄거리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공포영화 자체가 없어질 것이다.

 이게 단순히 현대사회가 인간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어서가 아니다. 인간 자체가 뒤틀리고 폭력적인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인간은 과거 두발로 걷기 시작했을 때 부터 지금까지 서로를 죽이고 괴롭히는 다양한 방법들을 개발해왔다. 즉, 호러영화는 그런 인간의 상상력에다가 영화적인 허구성을 입히고 이를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우리가 희생자들을 죽이고 동시에 영화의 끝에 다시 질서를 회복하면서 우리의 파괴적이고 뒤틀린 본성을 충족시킨다.(비단 호러영화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때 가학성은 현실과 동떨어진 왜곡된 형태나 비사실적인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 그것은 관객과 영화 속 살인 사이의 거리를 넓히면서 관객을 영화속으로 끌어들이지 않고 동시에 관객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효과를 지닌다.

 하지만 마터스는 다르다. 우리는 난생처음으로 영화 속에서 실제적인 가학을 만나게 된다. 우리의 상상속에서 뒤틀리고, 현실과 동떨어진 형태의 가학이 아닌 실제적인 형태의 가학을. 게다가 이는 휴유증이 매우 커서 한 소녀를 미치게 만들어서 15년 동안 기괴한 형태로 비틀린 여인을 보게 만들고 자해하게 만든다거나, 자아를 붕괴시키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이러한 가학의 원인을 말도 안되는 것으로 설정하기는 했지만(이 영화에서 종교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해탈은 외부적인 요인에서 비롯되지 않고, 자기 내부에서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그와 별개로 주인공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극사실적이다.

 혹자는 프랑스의 익스트리미티(극단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돌이킬수 없는' 등의 작품으로 인간의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 조류가 여기에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마터스가 관객에 대해 가지는 파괴력은 관객을 영화속으로 끌어들여서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관객을 영화 밖으로 내보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덕분에 관객은 100분 이상을 주인공들에게 감정이입을 하고(왜냐면 주인공이 겪는 고통은 너무나 실제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녀의 가죽이 벗겨지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처참한 육체와 같이 영화속에 봉인된다. 어떤 공포영화도, 아니 어떤 대중문화도 감히 시도할 수 없었던 금기의 영역(관객은 영원히 영화 속에 갇힐 지어다, 아멘)으로 마터스는 들어선 것이다.

 그렇다면, 제목인 마터스(Matyers)의 의미, 목격자들 순교자들의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이렇게 본다. 바로 여러분들이 가해자고 주인공들은 그 가해자에 의해 순교당한 인간들이라고. 여러분들은 도저히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이유(표 값내고, 영화 속에서 사람이 죽는걸 보러왔지!)로 다양하고 뒤틀린 고통을 주인공들에게 부여한다. 그리고 동시에 주인공들은 그 고통 속에서 서서히 익사해 간다. 천천히, 사실적으로. 하지만, 마터스는 동시에 가해자들(즉, 우리)에게 큰 벌을 내린다. 그것은 관객들이 주인공들과 함께 그 고통속에 갇히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마터스는 정말 대단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 영화가 대단히, 너무나도, 끔직하게 싫다. 왜냐고? 마터스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관객들에게 극 사실적이며 잔인한 고어 장면을 보여주고(누군가는 엑스텐션보다 덜 잔인하다고 하지만, 현실적이란 의미에서는 더 잔인하다) 관객들을 영화라는 무간지옥에 빠뜨려 버렸다. 이는 여태까지 우리가 접하지 못한 새로운 자극이다. 그리고 새로운 자극은 언제나 그랬듯이(인정하기는 싫지만) 돈이 된다.

 이미 감독이 헐리웃으로 넘어갔다는 점에서 나의 우려는 점점 현실화 되고 있다. 위에서 이야기하였듯이, 호러영화는 인간의 뒤틀린 심산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러한 뒤틀린 정신 속에서도 인간은 일상으로 돌아가길 꿈꾼다. 따라서 많은 수의 호러영화들이 비일상을 넘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거나 희망을 보여주는 결말을 취하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을 그러한 뒤틀린 정신 속에 가두어 버리고 꺼내지 않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그리고 이것으로 돈을 벌고 시대의 조류가 되는것이 과연 인간에게 괜찮은 일인가의 문제에 대해서 나는 회의적으로 생각한다. 누군가 그랬듯이, 한쪽 날개로는 날 수 없기 때문이고, 인간은 광기로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상, 인간은 이미 너무 많은 자극을 받고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자극의 한계를 넘었다는 느낌마저도 든다. '마터스'는 내게 그 자극을 넘어선 미지의 지평선 너머를 보여준 작품이다. 하지만, 그 프론티어는 뒤틀린 뭉크 그림의 '절규'처럼 나에게 절망만을 안겨주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편의상 존댓말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쿠아리스'는 지알로 영화(피와 살이 난무하는 이탈리아 표 호러영화)의 걸작으로 뽑히는 영화다. 이미 수많은 호러영화 팬들이 이 영화에 대해서 평가하고 극찬하였으며, 다양한 각도에서 많은 분석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기존의 분석은 잠시 옆으로 제쳐두고, 조금 다른 분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아쿠아리스의 올빼미 살인마, 어빙 윌리스는 얼핏 보기에는 기존의 슬래셔 물에 나오는 미치광이 연쇄살인마처럼 보인다. 하지만, 미치광이 연쇄살인마들이 살인의 동기나 법칙이 있었는데 반해서 어빙 윌리스는 그러한 패턴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어느 누가 연쇄살인마에게 구차한 이유가 붙기를 바라겠는가? 그냥 러닝 타임 내내 살인마가 나와서 가오 잡아주고, 토막내고 내장을 끄집어 내다가 결국 마지막에 자기보다 덩치도 작고 약한 여자 혹은 청소년 기타 등등 에게 쳐발린 다음에 마지막 장면에서 후속작을 암시하는 듯한 묘한 엔딩으로 마무리 지으면 이미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호러 영화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아쿠아리스는 뭔가 좀 다르다. 주인공들은 살인자가 정신병원에서 탈출하고 동료 베티를 무참히 살해한 뒤에, 밀폐된 극장에 남아서 각본을 살인마에 맞게 뜯어 고치면서(흥행을 위해서, 이 얼마나 달콤 살벌한 낱말인가!) 연극을 연습한다. 물론, 관객의 예상대로 살인마는 이미 폐쇄된 극장에 들어와있는 상태. 하지만, 살인마가 극장에 들어와서 먼저 한 일은 살인이 아니라 올빼미 가면과 무대 의상을 훔쳐서 무대위로 올라온 것이었다.

 왜 살인마 어빙 윌리스는 극장에 들어오자 마자 한 일이 무대에 오른 것일까? 영화는 살인마에 대한 배경 설명을 거의 해주지 않는다. 그가 예전에 연극배우였다는 것, 그리고 그가 16명을 참살한 미치광이 연쇄살인마라는 것 외에는. 하지만, 그가 진짜 미치광이 살인마였다면, 무대 위에서의 첫 살인(물론 영화에서 첫 살인은 아니지만) 이전에 수많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차별 살인을 행하지 않은 것일까?

 영화는 직접적인 언급을 회피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추론은 가능하다. 영화에서 살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베티의 살인, 나머지 하나는 살인마가 의상을 훔쳐입은 뒤에 무대 위에서 벌인 살인과 그 이후에 일어난 살인들. 이 두 살인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누군가가 '죽음'에 대해서 언급했다는 점이다. 먼저 베티와 일리시아가 병원에서 극장으로 돌아올 때, 베티는 어빙 윌러스가 벌인 살인 행각에 대해서 낱낱이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그녀는 입에 곡괭이가 처박혀서 죽게 된다(말 조심을 하라, 라는 경고?) 그리고 무대 위에서 살인 장면을 연습하던 중, 살인마가 의상을 훔쳐입고 쭈삣거리면서 무대위에 올랐을 때, 연출가는 소리친다. "뭐하는거야? 어서 그녀를 죽이라구!"

 그렇다면 왜 어빙 월리스는 사람을 먼저 죽이지 않고, 상대방이 살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을 때 발동이 걸려서 살인을 저지른 것일까? 이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는 연극배우였다. 하지만, 그 역시 영화에 나왔던 배우들처럼 무명의 가난한 배우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뜨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남들과 다르게 튀면 된다. 어떻게? 그래서 그는 영화 속의 배우들처럼 폭력과 섹스가 난무하는 자극적인 연극에 출연한다. 하지만, 그래도 뜨는 건 쉽지 않다. 그리고 그는 점점 미쳐간다. 점점 명성에 대한 강박관념이 심해져가고, 그는 결국 자신의 배역(아마도 살인마 역이었으리라)에 몰입한다. 결국 그는 미친다. 연극과 현실을 왔다갔다 하면서, 그는 현실에서 연극 속의 살인마 역을 충실히 재현한다. 따라서 '살인'이란 단어는 그에게 연극의 배역(살인마)에 몰입하게 하는 키워드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떴다'. 물론 그게 진짜 뜬거냐고 물어보면 할말 없지만. 그래도 그는 미치고나서도 투철한 직업정신(?)에 불타오른다. 탈출하자마자 간 장소가 바로 연극 무대였고, 심지어는 무대의상을 훔쳐서 쓰고 무대 위로 올라온다. 그러자 연출가가 소리친다. "뭐하는거야? 어서 그녀를 죽이라구!" 죽인다구? 그거야 말로 내 전공이지! 그리고 살인마는 자신의 역할을 아주 충실하게 수행한다.

 사실, 이러한 상황은 관객인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는 호러 영화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공포, 살인, 절망, 귀신 등등. 하지만 영화는 1/3이 지나도록 살인 장면은 커녕 가난한 3류 배우들의 고난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각주:1]. 이런 상황에서 결국 살인마가 무대위로 오른다. 하지만 그는 무대 뒤에서 주저한다. 관객들은 외친다. "젠장! 네가 진짜 살인마면 빨리 당장 무대 위로 튀어나와서 사람을 죽이란 말이야!" 그리고 살인마는 화답한다. 기꺼이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살인마가 무대 위에 오르고 제 2막이 시작된다.

 그 이후 영화는 살인마가 '무대'라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연습을 하기 위해 모인 배우들을 다양한 공구로 참살하는 내용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희생자'인 배우들은 '살인자'인 배우를 피해 이리저리 '무대'를 도망다닌다[각주:2]. 사실 '아쿠아리스'의 희생자들은 여타 공포영화의 희생자들과 같은 바보같은 짓거리는 하지 않는다. 그들은 뭉쳐다니며, 무장을 하고, 계획적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그들은 무대를 살아나갈 수가 없다. 왜냐고? 아직 러닝타임 90분을 채우기에는 시간이 모자르기 때문이다. 




 결국, 연약한 여주인공을 남겨두고 모두 죽게 된다. 그리고 영화의 하이라이트. 살인마는 무대 위에 자신이 죽인 시체들을 가지런히 정리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편안히 앉아 휴식을 취한다. 마치 '오늘도 보람찬 하루를 보냈어'라는 느낌으로. 사실 그럴만도 하다. 그는 연출가(동시에 관객)의 주문을 충실히 수행했다. 다 죽였으니까. 따라서 그가 시체 사이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은 자신의 의무를 다한 것과 동시에, 자신의 한 일(맡은 역할에 충실한 것?)에 대한 자부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살인마가 너무 역할에 충실해서 주인공까지 다 죽여버린다면, 그건 살인마로서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 살인마는 여주인공을 죽이려다가 여주인공 손에 죽는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서 여주인공을 죽이려 하지만, 양미간에 총알을 맞고 결국은 '완벽한 죽음'을 맞이한다[각주:3] 하지만 엔딩 크레딧이 오르기 전, 살인마는 카메라를 향해서 씨익 미소를 짓는다. 누구를 향해, 무엇 때문에? 설마 후속편이라도 낼 생각인가?

 아니다. 살인마는 관객에게 미소를 지은 것이다. 그리고 관객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다.



 이제 만족하셨습니까?



사족.
 영화 기술적인 완성도로 이야기하자면, 아쿠아리스는 괜찮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지금봐도 훌륭한 시점이나 표현들이 많이 있다. 물론 80년대 특유의 신디사이저 풍의 음악이나 분위기는 좀 어색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런 점을 제외하더라도 영화적 완성도는 딱히 흠 잡을 때가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수억 달러를 쳐박아 넣어서 2시간 동안 저질 농담과 허접한 카메라 워크로 사람 지루하게 만드는 마X클 베X 같은 감독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 요즘 영화 감독들은 옛날 영화좀 보고 배워야 한다.

사족2.
 영화 포스터에는 도끼로 수족관을 깨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도끼로 수족관을 깨는 장면은 커녕 수족관이 단 한번, 그것도 별 의미 없이 쏨팽가리(맞나?)를 포커스로 맞추는 장면만 나온다.




  1. 주1.물론 나는 그것이 영화의 네러티브를 흐트러트린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 분위기를 비참하고 암울하게 만드는데 일조한다 [본문으로]
  2. 주2.이것이 영화란 것을 생각하면 재밌는 구조이다. 배우들은 극중에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흔히 호러영화에 있어서 희생자-살인마의 역할을 분담하여 무대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으로]
  3. 주3.이것도 살인마의 주요 본분 중에 하나이다. [본문으로]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1.엔하위키를 보다가 배틀스타 겔럭티카 관련 항목을 보고 난 뒤에 끌려서 시즌 0를 감상하였습니다. 원래 미드같은 건 잘 찾아보지도 않고 기대도 하지않는 편이지만, 시즌 0 자체로는 대단히 좋은편입니다. 원작은 20년전에 했었던 동명의 드라마로, 몇년전인가 뜬금없이 원작의 리메이크인 시즌 0를 방영하면서 큰 인기를 끌었고, 현재 시즌 4로 완결이 났습니다만...시즌 4 평이 참 뭐랄까...

특이하게 보기전에 이미 4기까지 다 네타 당한 상태에서 보는 작품입니다(.....)

2.스토리는 인류가 자신들이 만들어낸 기계인 사일런과의 전쟁에서 패해 거의 멸망당한 인류가 자신들의 선조가 살았다는 전설상의 행성 지구를 찾아서 긴여정을 떠난다는 것이 주 내용입니다. 시즌 0는 12 식민지에 살았던 인류가 사일런의 침공에 의해서 한순간에 멸망하는 모습과 그 와중에서 배틀스타 겔럭티카와 기타 생존자들이 살아남어서 결집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마크로스 원작이 연상되는 작품입니다. 멸망한 인류, 압도적인 외계의 힘,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인류, 그리고 생존자 사이에서 생기는 여러가지 에피소드들을 다루고 있다는 측면에서 마크로스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마크로스가 가벼운 연애 드라마를 지향했던 것과 달리 배틀스타 겔럭티카는 어두운 정치물 및 종교물을 지향합니다.

3.배틀스타 겔럭티카의 모티브는 거의 대부분 성서에서 차용하고 있습니다. 성서의 엑소더스(인류가 멸망한 뒤에 인류 선조가 태어난 땅이자 약속된 땅인 지구로 정처없이 떠나는 모습), 유대인 12부족(12개의 식민지와 12개의 사일런 타입), 에덴 동산(인간이 떠나온 공간, 지구), 모세(아다마 제독?) 등등 다양한 성서적 이미지와 스토리를 차용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야기 자체는 후반부로 갈수록 SF물이라기 보다는 종교물에 가까워진다고 하니, 이는 확신범인 셈.

4.마지막으로 가이우스 발터, 이 찌질한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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