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제가 감상했던 영화 중에 가장 놀랍고도 대단한 다섯 작품을 꼽는다면, 거기에는 꼭 WALL-E가 들어갑니다. 주인공인 두 로봇이 서로의 이름인 WALL-E와 EVE 만을 불러서 거의 모든 감정 표현을 할 뿐만 아니라, 고전 로멘틱 영화의 기법이나 화법을 애니메이션에 효과적으로 적용하여 '애니메이션이 이런 세세한 감정 묘사도 가능하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 작품입니다. 사실,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 자체가 그래픽이나 그림 등에 기반한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드는데는 훌륭하지만, 정작 케릭터의 감정이나 미묘한 심리묘사를 하기에는 부적합한 경향이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 자체가 과장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케릭터의 감정에 이입하지 못하는 막을 칩니다.
WALL-E는 그러한 애니메이션의 장르상의 한계를 멋지게 극복한 작품입니다. 인간도 아닌 고철덩이 로봇이 인간보다 더 풍부한 감정을 가지고 이를 표현하는 모습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로봇과 로봇 사이의 로멘스를 고전 무성 영화의 기법을 들고와서(다양한 몸동작과 표정) 표현하는 부분도 대단했구요. 그렇기에 이번작 업 도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업'이 그러한 기대를 훌륭하게 충족시킨 작품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WALL-E를 픽사의 신작 애니메이션 '업'은 노인인 칼이 먼저 세상을 뜬 아내의 소망을 들어주기 위해 집을 풍선에 매달아서 파라다이스 폭포로 향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도중에 러셀을 만나게 되면서 일이 꼬이게 됩니다. 영화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칼과 러셀이 서로 알아가고, 갈등하고, 화해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는 전작의 좋은 점을 그대로 가져오고 있습니다. 업은 WALL-E에서처럼 대사와 과장을 절제하고 카메라 워크 및 작품 속의 소재를 이용해서 이야기와 감정묘사를 표현합니다. 또한 이번작 업도 전작과 비슷하게 복고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WALL-E가 로봇들의 아날로그 적인 사랑을 그려내면서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를 드러내었다면, 업은 복고적인 느낌의 음악과 스토리(할아버지와 소년이 있는데, 서로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다가 화해하고 친구가 된다)를 차용하고 있습니다.
'업'의 주제는 '인생'입니다. 인생의 막바지에서 어두운 현실에서 벗어나 자신의 어릴적 꿈(동시에 아내의 꿈)을 이루기 위해 남아메리카로 떠난 칼의 이야기와 상황을 통해서 인생 그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물론 '인생'이라는 소재 자체가 쉬운 소재가 아니고, 포커스를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서는 이야기가 천차만별로 나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업'은 복잡한 이야기나 상징을 끌어들이지 않고도 인생이란 주제에 대해서 멋지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내용이 바로 남아메리카에 도착하고 나서 풍선의 헬륨가스가 점점 빠져서 가라앉는 집을 메고 어떻게든 파라다이스 폭포로 가려는 부분입니다. 실제 우리 인생에서도 이런 상황은 종종 발생합니다. 계속해서 현실에 밀려서 잃어버린 꿈이 점점 실현 가능성을 잃게 되어 갈 때, 사람들은 초조해지고 큰 부담이 됩니다. 이를 영화 내에서는 등에 점점 내려앉는 집을 메고 가는 기묘한 상황으로 표현하였고, 이는 단순하지만 대단히 효과적이고 인상적입니다.
여기에 칼과 러셀의 모험을 방해하는 대적자가 나타납니다. 그는 어릴적 칼의 우상이었던 찰스 먼츠죠. 그는 꿈을 위해서 파라다이스 폭포로 왔고, 희귀 새를 붙잡아서 자신의 꿈이 틀리지 않았음을 세상에 증명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는 번번히 실패해서 거의 70년 동안 일상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파라다이스 폭포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는 꿈에 사로잡혀 인생을 망쳐버린 사람을 보여주는데, 그는 자신의 꿈을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화석과 말하는 개들에 둘러쌓인 그의 모습에서 과거와 꿈에 사로잡힌 쓸쓸한 늙은이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는 칼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데, 그도 어렸을 적 아내의 모험일지를 보고 과거의 꿈을 위해서 집을 풍선에 매달아서 남아메리카로 왔으며 어떤 당면 과제(러셀을 집으로 보낸다던가, 케빈을 도와준다던가 등)보다도 자신과 엘리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칼과 찰스의 차이점은 칼에게는 러셀이라는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칼이 자신이 모험을 떠나게 하는데 결심을 주었던 부인의 모험 일지의 '앞으로 해야 할 일' 부분에 자신과의 소중했던 추억이 담긴 것을 보고 '중요한건 꿈이 아니라, 현재다'라는 걸 깨닿게 됩니다. 그렇기에 그는 꿈에 안착했던 집을 다시 띄워서 러셀을 도우러 가죠. 영화 마지막, 자신의 할일을 다한 집이 점점 구름 아래로 가라앉는 모습을 보면서 칼이 '집은 그냥 집일 뿐이란다'라고 하는 장면은 그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영화 '업'은 멋진 작품입니다. 상업성이나 재미로서도 훌륭하고 긴장의 완급도 잘 되어 있으며, 장면 장면 적절하게 개그를 집어넣어서 사람들을 웃길줄 압니다. 하지만, 그러한 이면에 '업'은 진득한 페이소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웃긴 장면이든, 진지한 장면이든 영화는 목에 힘주지 않고도 충분히 주제나 이야기를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저는 영화 '업'을 WALL-E와 비견될만한 명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덧.영화는 훌륭했지만, 영화보러온 초딩은 훌륭하지 않습니다. 영화에 몰입하고 있는데 초딩들이
영화관 전세낸 마냥 소리지르는 거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엔딩을 보면서
감동하고 있는중에 "끝났다!"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더군요.
영화 보는 도중에 살의와 전의가 끓어오르던 적도 오랜만이었습니다.
덧2.WALL-E에서도 인상적인 엔딩 크레딧을 보여주었는데, 업도 그렇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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