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끔찍한 유년기와 전쟁 트라우마로 늘 자살을 꿈꾸는 청부업자 ‘조’. 유력 인사들의 비밀스러운 뒷일을 해결해주며 고통으로 얼룩진 하루하루를 버텨내던 어느 날, 상원 의원의 딸 ‘니나’를 찾아 달라는 의뢰를 받고 소녀를 찾아내지만 납치사건에 연루된 거물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렇게 다시 사라진 소녀를 구하기 위해 나서는데… (영화 시놉시스)


린 램지의 영화 모번 켈러는 인상적인 시퀸스를 지니고 있다:집에 돌아온 주인공 모번 켈러는 집에 돌아오자 자살한 남자친구의 시신을 발견한다. 그의 유서와 소설을 확인한 주인공은 일상생활을 하다 불현듯 남자친구의 시신을 욕조에 넣고 톱으로 절단한다. 이때 '나는 당신에게 과하게 집착하고 있어요', 라는 내용의 가사가 나오면서 영화는 관객을 심란함과 혼란속으로 몰아넣는다. 왜 모번 켈러는 남자친구의 시신을 토막내는가. 그리고 이 뜬금없는 기괴한 음악 인용과 장면의 인용은 대체 어떤 의미인가. 이러한 모번 켈러의 도입 시퀸스는 린 램지의 영화 모두를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미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린 램지 감독의 신작이다. 위의 시놉시스에 적힌대로, 큰 이야기는 한때 유행하였던 테이큰이나 아저씨와 같은 액션 장르 영화 공식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실제 구성은 장르 영화적이지도 않고, 심지어는 영화에는 기승전결을 구성하는 최소한의 요건만을 남겨둔 채로 서사를 구성한다. 90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동안 영화는 크게 일곱 가지의 사건(조의 등장 - 상원의원의 의뢰 - 니나와의 만남과 구출 - 니나의 납치 - 주변 인물들의 죽음 - 주지사의 추격 - 니나의 재구출과 엔딩)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이 일곱가지의 사건들은 서사로써 밀접하게 이어져서 이야기를 구성하기 보다는 주인공인 조의 환영과 심리상태를 묘사하기 위한 일종의 방아쇠 역할을 한다. 또한 이는 린 램지가 모번 켈러 첫 시퀸스에서 보여주었던 장면과 상황을 구성하는 미학과 밀접하게 맞물린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를 구성하는 미학의 핵심은 영화적이다:산업화된 매체인 영화는 음악과 영상, 배우의 연기가 재조립을 통해서 구성된다. 벤야민이 예로 들었듯이, 몸싸움을 벌이다가 창문을 통해 도망가는 액션 시퀸스의 장면이 몸싸움-창문으로 뛰어내림이라는 시간적 순서에 따라서 촬영을 진행하는 것이 아닌 먼저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장면을 촬영한 후, 몸싸움 장면을 촬영한 후 이를 편집작업을 통해서 마치 '하나의 장면'처럼 연결시키는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영화라는 매체의 특징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속에서 이미지와 장면들은 꼭 같은 시공간에 얽메여있을 필요가 없다:때로는 편집 작업과 쇼트, 앵글 등을 통해 서사의 흐름이나 논리적 흐름을 뛰어넘어서 창작자의 맥락과 의도에 따라서 자유롭게 재조합될 수 있다. 그렇기에 영화 속에서 시공간은 서사라는 하나의 방향성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 컷의 편집과 삽입, 쇼트의 분절 등을 통해서 새로운 시공간으로 변화한다. 


다시 모번 켈러의 장면으로 돌아와보자:어째서 주인공은 영화의 중반 뜬금없이 자살한 남자 친구의 시체를 욕조에서 토막내었을까. 이 장면은 서사라는 일방향적인 시공간의 흐름에서 접근한다면 불가해한 장면이다. 하지만 이 장면은 꼭 그래야한다는 당위성은 없지만, 동시에 모번 켈러라는 개인이 서사를 넘어서(남자친구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넘어서) 영화의 장면을 지배하는 강렬한 기괴함을 선사한다. 즉, 이 장면은 서사라는 흐름에서 벗어나면서 사건에 대한 개인의 인상/사건을 대하는 인물의 태도를 강력하게 드러낸다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장면에서 인물은 서사를 넘어서 영화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강렬한 무언가가 된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 역시도 동일한 미학이 적용된다. 이는 조의 어머니가 킬러들의 손에 죽은 뒤, 자신 나름대로 장례를 지내러 호수로 떠나 자살을 시도하는 조의 모습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일반적인 서사 구조였다면, 이러한 장례의 과정 자체가 극의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요소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서사라는 시공간의 흐름을 거부하고 개인의 이야기로 침잠하는 구조를 보여줌으로써, 이미지가 작품을 지배하는 구조를 구축한다. 즉, 이 작품에서 서사는 개인의 심리와 행동을 전개하기 위한 최소 당위에 불과하다. 모번 켈러가 그러했고, 이 작품이 그러했듯이 가장 중요하게 눈여겨 봐야할 점은 바로 조라는 인물의 심리 상태가 전체 영화의 미학을 어떻게 구성하는가이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폭력의 피해자들에 대한 영화다. 조는 영화 내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로부터 학대받았은 기억과 군인으로 복무했을 때의 경험들의 플래시백(컨테이너에 쌓인 시체들, 초코바 하나 떄문에 총맞고 죽은 어린아이가 일으키는 다리의 사후경직)으로 고통받는다. 그리고 영화는 이러한 플래시백을 환청과 환몽의 형태로 재구성한다. 그리고 환몽과 환청은 자기파괴의 이미지, 특히 질식의 이미지와 밀접하게 맞닿아있다:영화의 첫 시퀸스에서 조는 의뢰를 해결한 후, 침대에 누워서 비닐봉지를 뒤집어쓰고 자신을 스스로 질식시킨다. 질식 특유의 내부에서부터 타들어가는 고통은 어떻게 본다면 그가 겪고 있는 트라우마의 성질을 드러내는 부분이자, 동시에 '숨을 쉬고 싶다'라는 원초적인 욕망을 드러낸다. 그리고 환청과 환몽은 조가 숨을 쉬지 못하게끔 만드는 '물'과 같은 존재다:그는 스스로의 머릿속의 이미지속에 갇혀있는 존재이며, 끊임없이 자기를 파괴하고자 하는 충동에 질식당한다. 


하지만 조라는 인물을 피해자가 가해자가 된다는 단순한 역할의 클리셰로 이어지진 않는다. 우선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폭력 영화의 테마를 취하면서도,장르 영화의 문법을 전혀 따르지 않는다:예를 들어, 조가 처음으로 니나를 매춘굴에서 구해내는 시퀸스를 보자. 이 시퀸스에서 린 램지는 CCTV의 화면들로 쇼트들로 구성하였고, 조가 경비원과 아동성애자를 죽이는 폭력의 과정을 삭제한 채 오로지 결과(쓰려져있는 사람들)만을 무미건조하게 담아내며, 카메라 역시 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닌 조를 무미건조하게 관찰하듯이 쇼트에서 쇼트로 이동하는(cctv에서 cctv로) 이어내어 마치 시공간 자체가 끊기고 날아가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런식으로 영화에서 폭력은 때로는 과정 없이 결과만(집에서 어머니를 살해한 두명의 암살자를 총으로 제압하는 과정이라던가), 혹은 그 결과조차도 삭제되어있는 경우(예를 들어 약속시간에 늦은 조력자를 조가 구타하는 장면)들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영화에서의 폭력이라는 테마가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오히려 영화에서 집중하는 것은 폭력의 원인과 과정이 아닌 '결과와 여진'이다.





조는 자신의 폭력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호텔방에서 부패경찰을 목졸라 죽일 장면에서도 그의 살인은 천장에 달린 거울에 비춰진 이미지 형태로 묘사되며,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별장의 인물들을 하나씩 제압할 때조차 폭력의 과정 묘사없이 분절된 컷들이 연결되고 반복되며 어지러이 흩어진다. 오히려 흥미로운 점은 폭력이 끝나고 난 뒤에 조가 취하는 태도일 것이다:예를 들어, 자신의 집에 침입한 암살자 중 한명에게 치명상을 입힌 조는 암살자에게 약을 먹이고 옆에 누워서 함께 노래를 흥얼거린다. 이 기괴한 장면에서 조는 이상하게도 암살자가 어머니를 죽였다는 사실보다도 폭력의 피해자로 죽어가는 암살자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기괴한 장면이 뜬금없다던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닌, 영화 전체의 미학에 맞물려 들어간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그렇다면 이미지화 되거나(CCTV나 거울상) 쇼트에서 잘려나간(클라이맥스에서 저택의 경호원들을 제거하는 시퀸스) 조의 폭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의 직업과 깊은 연관을 갖는다:그는 소아성애자들로부터 피해자들을 구하는 청부업자다. 그의 행위는 피해자를 구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하려는(어린 시절 무력하게 당했었던) 행위인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구원을 위해 휘두르는 폭력이 이미지화 되었다는 점은 그가 경험하는 환몽과 환청의 연장선상에서 보아야할 것이다. 즉, 그가 휘두르는 폭력은 그를 구원하는 것(피해자를 구하는 것)이 아닌 그의 환청과 환몽과 같이 그를 질식시키는 요인이 된다. 역설적이게도 그가 구원을 향해서 더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그는 더 끔찍한 악순환의 고리로 빠져들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현듯 폭력을 멈추고 자신이 죽인 피해자 옆에서 누워서 함께 노래를 부르고 손을 잡는 것은 어떻게 보면 조라는 인물의 동인(피해자를 구하고자 하는 것)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장면이다.


조가 니나를 구하려 하는 것 역시 자신의 트라우마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고 구원을 추구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그의 환청과 환시에서 뚜렷하게 얼굴을 가진 인물로 등장하는 사람들(어린 시절 조, 어머니, 그리고 니나)은 모두 폭력의 피해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그는 피해자인 니나를 구하는데 실패한다:니나는 이미 모든 일의 원흉인 주지사의 목을 면도날로 그어 죽였으며, 그녀 역시도 조와 같이 폭력이 남긴 트라우마에 갇혀버린 피해자가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조가 니나에게 괜찮다고 이야기한 것이 아닌, 니나가 조에게 괜찮다고 이야기를 한 점이다:그녀 역시도 조가 어째서 그렇게 필사적으로 자신을 따라왔는지 알고 있었다. 이 장면에서 폭력의 피해자로써 그들은 기묘한 유대감을 갖는다.


하지만 정작 주지사를 죽이고 폭력으로부터 해방되었음에도 그들이 가야할 목표는 없었으며, 니나는 조와 같은 인물(트라우마와 폭력의 순환)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에 무관심한 세계는 폭력의 피해자들을 없는 존재인냥 취급하며 행복하게 흘러갈 뿐이었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라는 제목의 선언은 폭력의 피해자들이 폭력의 경험에 갇혀서 살아갈 뿐이다. 그리고 조는 니나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식당에서 권총으로 자살하는 환상을 보게 된다:불현듯 터져나오는 총성과 흘러나오는 뇌수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행복하고 밝을 뿐이다. 이 순간 폭력의 피해자들은 스스로를 트라우마로부터 구해내는데 실패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니나가 자리로 돌아오고, 조에게 말을 건다:밖은 아름다우니, 어디론가 떠나자고. 그 순간 그들은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린다. 카메라에서 순식간에 사라짐으로써 피해자들은 그들 자신을 드디어 질식할 것 같은 세계와 트라우마의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폭력이라는 테마를 피해자의 관점에 맞추어 훌륭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여기에는 어떤 장르적 클리셰(폭력에 물든 순정 마초 같은)도 없고, 미화도 없다. 하지만 세부적인 디테일들과 쇼트의 구성, 개인화된 이미지들을 배치해둠으로써 영화는 피해자의 경험을 개인적이고 내밀한 것으로 만들되 동시에 관객 모두에게까지 전달하게끔 만든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영화 매체의 경험을 잘 다뤄낸 작품이며, 영화관에서 볼 기회가 있다면 꼭 보기를 추천한다.




덧. 번역이 매우 훌륭하다. 모번 켈러도 그러하고, 린 램지의 영화에서는 흘러나오는 노래의 가사가 

장면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데, 번역가는 그런 부분들을 캐치해서 자막을 구성하였다. 


덧2. 흥미롭게도 폭력의 가해자이자 원흉의 이미지를 상당히 추상적이지만 분명하게 구성하기도 하였다.

니나를 납치할 때 보여지는 부패 경찰의 뱃지, 암살자의 성조기 버튼, 그리고 노래 가사나 인형의 집을 건드리는 손의 존재까지.




잡담/개인적인 이야기



쉐오툼 리뷰 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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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스퀘어 에닉스의 RPG 프랜차이즈 라인업은 두가지로 나뉜다:첫번째는 파이널 판타지 같이 대자본이 들어가는  게임이고, 두번째는 실험적이고 복고적인 컨셉의 게임이다. 여기서 눈여겨 봐야하는 것은 두번째 부류의 게임들이다. 전자의 부류가 미래를 바라보고 비전을 추구하였다면, 후자는 과거의 명작 게임들을 벤치마킹하면서 복고적인 분위기를 추구하였다. 이는 자사 브랜드를 관리하기 위한 전형적인 투트랙 전략이라 할 수 있으며, 후자의 경우는 대다수는 아니지만 확고한 취향을 갖고 있는 플레이어를 공략하기 위한 브랜드라 할 수 있다. 


근래 스퀘어 에닉스의 틈새 시장을 공략하는 브랜드 중 가장 대표적인 예는 브레이버리 디폴트 시리즈일 것이다:파이널 판타지 외전 빛의 4전사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실리콘 스튜디오의 브레이버리 디폴트는 고전적인 아트워크와 스토리라인과 함께 파이널 판타지의 잡 시스템에 브레이브/디폴트이란 턴 전투의 새로운 해석을 차용하였으며, 여기에 기존의 RPG에서 찾아볼 수 없는 흥미로운 멀티플레이 요소를 도입하였다. 또한 게임 체험판을 사전에 배포하여 플레이어들의 피드백을 본편에 반영하는 등 상당히 독특한 전략을 취하였으며, 그 결과는 대흥행까지는 아니더라도 수많은 플레이어를 매료시키고 평단의 좋은 반응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그외에도 사가 스칼렛 그레이스와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옥토패스 트래블러도 이 부류에 들어갈 것이다.


옥토패스 트래블러가 처음 공개되었을 당시에는 사람들은 상당히 엇갈리는 반응을 보였다. 분명 트레일러에서 보여준 부분은 복고 지향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지만, 이 게임이 어느정도 규모의 게임인지(풀 프라이스? 아니면 인디 게임과 같은 소품류?) 알 수 없었고 안그래도 성능과 관련된 이슈들이 불거지면서 스위치에는 제대로 된 그래픽과 스케일의 RPG 하나 안나온다는 반응이 나오기도 하였다. 하지만 옥토패스 트래블러는 브레이버리 디폴트와 같이 게임 체험판을 공개하고 어떤 게임인지 대중에게 게임 플래이로 어필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관심과 반응을 조금씩 끌어모으기 시작하였다. 발매 이후, 다소 호불호가 엇갈리는 분위기가 있었긴 하지만, 옥토패스 트래블러는 전세계 1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신규 IP 치고는 괄목할만한 성과였으며, 기본적으로 옥토패스 트래블러가 매력적인 게임임을 반증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옥토패스 트래블러는 8명의 주인공의 8개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고전적인 턴제 전투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RPG다. 우선 눈여겨 봐야하는 점은 옥토패스 트래블러의 구성이다. 게임은 서로 다른 테마를 가진 8명의 주인공이 각자의 모험을 펼치는 옴니버스식의 구성을 취하고 있다. 한 케릭터 당 스토리는 4챕터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나의 챕터는 약 한시간 정도의 분량의 컷씬과 던전으로 구성되었다. 4시간은 RPG 스토리로서 절대적으로 짧은 쪽에 속하지만, 8명의 이야기인 만큼 전체 스토리 클리어까지 32시간이 걸린다는 것은 의외로 긴 분량을 자랑한다. 이러한 시도 자체는 근래 찾아보기 드문 독특한 시도할 수 있다.


하지만 옥토패스 트래블러의 실험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가 시리즈나 라이브 어 라이브 같이 실험적인 구조이긴 했지만 하나의 큰 이야기가 아닌 케릭터와 테마를 긴밀하게 엮어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은 이전에도 존재했었던 방식이다. 이는 RPG라는 장르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이들 게임들은 거대한 세계와 플레이어가 상호작용하며 그야말로 이야기에 있어서 역할Role을 강조하는 RPG 장르 특성에 초점을 맞춰서 플레이어의 분신이 되는 케릭터를 중심으로 게임의 모든 것을 구성한 것이다. 일찍이 사가 시리즈가 시리즈의 정체성을 '사람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은 절대로 주류가 될 수 없었다. 이유는 단순하게도 다양한 케릭터와 관점에 초점을 맞춰서 세계와 이야기를 구성하는 순간, 구성해야하는 게임 콘텐츠가 여타 게임보다 배로 늘어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가 최신작 스칼렛 그레이스의 경우에도, 모든 이야기를 다 보고 사건의 진상에 접근하려면 총 4회차를 클리어해야하며, 이는 요즘 게임의 트랜드에 정면으로 반하는(10~20시간 내외에서 클리어 가능한 싱글플레이 게임) 부분이다.


옥토패스 트래블러의 실험은 이러한 고전의 흐름을 어떻게든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서 할 수 있는 수준으로 다듬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옥토패스 트래블러에 있어서 각각 케릭터들은 테마를 대표한다. 이들 테마는 단순하지만 확고하다:복수, 공동체의 헌신, 구원, 신뢰 등등 모든 테마들은 클리셰적이며 모든 이야기는 예측가능하다. 그러나 클리셰라 해서 이야기의 뒤가 궁금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전반적으로 옥토패스 트래블러의 각 케릭터별 이야기들은 단순하지만 잘 작동하는 편이다. 그리고 몇몇은 상당히 인상적이기도 하다:예를 들어 프림로즈의 스토리 라인의 경우, 아버지의 복수를 실행하는 강인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야기는 원수들을 하나씩 추적해서 죽인다는 류의 단순한 이야기지만, 이야기의 마지막에 복수를 위해서 인내했던 괴로움에 대해서 다뤄내면서 이야기에 나름대로 쓴 맛을 더해주고 있다. 각각의 케릭터들은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만의 개성을 갖게 된다.


옥토패스 트래블러는 여기에 독특한 기믹을 부여한다. 옥토패스 트래블러는 각 케릭터들마다 갖고 있는 고유한 패스 액션이란 기믹을 통해 게임 내의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체계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학자인 사이러스는 관찰을 통해서 각 NPC들의 뒷 이야기들을 알아낼 수 있고, 올베릭은 NPC에게 결투를 걸어서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다. 옥토패스 트래블러에서 이러한 과정들은 과거 RPG에서 경험했던 요소들을 독특한 방식으로 재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과거 RPG에서 사람들은 길거리에 있는 NPC들에게 말을 걸어서 게임에 대한 정보와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얻어내고는 하였다. 옥토패스 트래블러에서도 패스 액션은 마을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서 발동시킬 수 있고, 이는 단순하지만 직관적이며 잘 작동한다. 패스 액션은 일견 단순해보이지만, NPC들과 세계에 대한 뒷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게임의 세계와 테마를 확장하는 역할을 잘 수행한다.




전투는 옥토패스 트래블러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콘텐츠이다. 옥토패스 트래블러의 전투는 턴제를 기반으로 8명의 케릭터 중 4명의 케릭터를 조합하여서 파티를 짜서 진행하게끔 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고전적인 턴제 전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게임으로, 흥미롭게도 같은 유통사의 다른 개발사(옥토패스 트래블러는 천주와 아키바 시리즈의 어콰이어가, 브레이버리 디폴트 시리즈는 실리콘 스튜디오가 만들었다)와 유사한 컨셉을 보유한다. 하지만 세부적인 부분에서 옥토패스 트래블러는 브레이버리 디폴트 시리즈와 다르다. 브레이버리 디폴트 시리즈의 전투 개념은 한 턴의 시간 및 기회의 확장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게임의 전투는 브레이브 액션과 디폴트 액션을 통해 한 턴에 여분의 행동을 소비하거나 다음 턴을 위해 행동을 저축하는 등, 일종의 턴에 대한 부채와 수입을 관리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턴에 정말로 다양한 행동들이 이루어지며, 어떤 행동은 여러 개의 턴(또는 브레이브 액션)을 소비하기도 한다. 


그러나 옥토패스 트래블러는 한 턴에 얼마나 많은 행동을 할 수 있는가? 가 아닌, 한 턴에에 얼마나 플레이어의 행동을 응축하는가가 관건이다. 게임에서 한 턴에 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뿐이다. 그러나 플레이어는 턴마다 쌓이는 BP를 소비해서 이 행동의 효과를 스케일링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BP를 소비하지 않으면 가해지는 데미지가 300정도 수준이라면, BP를 최대로 소비하였을 때 플레이어가 가할 수 있는 데미지는 1200 정도 수준으로 데미지가 스케일링 된다. 이처럼 한 턴에 얼마나 행동을 효율적으로 응축시키는가가 전투 시스템의 핵심이다.


이를 위해서 브레이크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모든 적들에게는 약점이 있고, 이 약점에 데미지를 가해서 방어를 벗겨내면 적은 한 턴 동안 행동 기회를 잃고 스턴이 걸리게 되며 데미지가 강하게 들어간다. 하지만 이 게임에서 약점을 벗겨내는 행동에는 제한이 있다. 물리속성의 공격은 각 약점별로 최대 4회(스킬의 경우, 더많은 회수로 공격할 수 있지만 명중률이 보장되지 않고 되는 무기가 있고 안되는 무기가 있다)뿐이며, 마법으로는 2~3회가 최대다. 이 회수를 유념하여 케릭터 조합을 짜는 것이 중요하다. 


약점을 찌르기 위해서는 케릭터와 잡 조합을 전략적으로 짜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옥토패스 트래블러는 브레이버리 디폴트와 비슷하게 잡 시스템을 차용하고 있다. 하지만 브레이버리 디폴트는 두개의 잡을 자유롭게 조합할 수 있지만, 옥토패스 트래블러에는 케릭터 기본 잡 이외에 하나의 잡만 착용할 수 있으며 각 케릭터별로는 중복된 잡을 부여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파티를 짤 때 케릭터들과 잡의 조합을 신중히 고려해야한다. 특히 잡별로 공략할 수 있는 약점들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각각의 파티는 케릭터별로 역할을 분명히 정하고 컨셉을 맞춰야 한다. 이렇게 케릭터의 컨셉을 공고하게 잡고 파티를 구성하는 것은 이 게임에 있어서 상당히 재밌는 부분이다.


이렇게 옥토패스 트래블러의 전투는 몇몇 제약조건들을 부여함으로써 플레이어가 신중하게 전투를 진행하게끔 만들었다. 특히 보스나 적들의 기믹들이 다양하고, 고전적인 RPG에서 찾아볼 수 있는 즉사나 상태이상 패턴 등은 단순히 강력한 화력으로 전투를 압도할 수 없게끔 구성해놨다. 게임을 최대한 풀어나가기 위해서 게임 내 시스템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옥토패스 트래블러의 전투는 매력적이다.



하지만 옥토패스 트래블러에는 많은 리뷰어와 플레이어들이 지적한 심각한 문제가 있다:그건 바로 8명의 주인공들이 서로의 이야기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엄밀하게 이야기한다면, 이들은 서로의 스토리와 행적에 대해서 나름대로 이야기를 하고 의견을 교류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곁다리에 불과하며, 정해진 조건에서 버튼을 눌러서 확인하지 않으면 이벤트를 확인할 수도 없다. 중요한 점은 8명의 주인공들의 메인 스토리에는 서로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전무하며, 8개의 스토리는 완벽하게 별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었다. 사가 시리즈나 라이브 어 라이브 같은 게임들이 다양한 케릭터들의 이야기들이 한 데 모여서 거대한 이야기를 구성하였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옥토패스 트래블러의 이야기는 게임 전체를 관통하는 테마가 부족하다는 문제가 있다. 물론 히든 보스의 존재와 맞물린 이야기를 통해 모든 케릭터의 스토리가 이어져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기는 하지만, 그러한 반전이 드러나는데는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 문제가 있고 반전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통일된 테마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게임의 근본적인 한계다:옥토패스 트래블러는 애시당초에 거대한 게임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게임을 플레이하다보면 게임의 작은 스케일이 느껴지는 부분들이 많다. 마을의 숫자나 NPC의 숫자, 던전의 규모 등등은 게임이 상당히 작게 만들어졌음을 시사한다. 물론 전투 중에 조우하는 적들이나 적들의 패턴들, 보스의 패턴들은 다양한 편이긴 하다. 하지만 적들이나 플레이어의 케릭터들은 그대로 서있고, 복잡한 애니메이션 없이 이펙트만 움직이는 형태의 그래픽 구조다 보니 게임에 있어서 아이디어는 많이 들어갔을지언정 예산이나 시간이 많이 투자되었다고 보기 힘든 부분이 있다. 


한 케릭터 당 여타 케릭터의 개입없이 4시간이라는 스토리를 할당한 것도 이러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보여진다:한 케릭터를 설명하고 완결짓는데는 4시간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다른 케릭터가 개입하면 어떻게 될까? 8명의 케릭터가 서로의 스토리에 개입하여 이야기가 복합적인 형태로 구성된다면 단순하게 경우의 수만 따져봐도 엄청날 것이며 이에 요구되는 스크립트나 콘텐츠의 분량도 엄청나게 증가할 것이다. 옥토패스 트래블러는 대신 콘텐츠의 단순함을 숨기기 위해서 레벨링 구간을 도입하였는데, 스토리 별로 권장 레벨을 설정해두고 8명의 케릭터를 고루 키워서 게임을 진행하게끔 강제하였다. 또한 패스 액션 등의 NPC와의 상호작용, 서브퀘스트 라인의 불친절한 부분은 단순하지만 플레이어가 모든 것을 일일이 하나씩 눌러보고 실험할 수 밖에 없는 구조를 채택하여 필연적으로 시간이 소비되게끔 만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들은 예산이 적게들어간 부분을 숨기기 위한 속임수 장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속임수들이 잘 작동하여서 게임을 끝까지 플레이하게 만드는 것은 제작자들의 노련함이 묻어나오는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옥토패스 트래블러의 이러한 부분들은 분명 호불호가 심하게 갈릴 수 있다:사람들은 분명 RPG에 있어서 하나의 테마와 거대한 이야기, 클라이맥스를 즐기고자 한다. 플레이어 자신의 행위로 인해서 거대한 세계가 바뀌고 여운에 잠기는 것, 그것이 RPG를 끝까지 플레이하게 만드는 핵심 동력이다. 하지만 옥토패스 트래블러에는 그러한 요소가 부족하다. 8명의 케릭터들의 이야기는 충분히 매력적이고 잘 작동하지만, 굳이 그걸 8명이나 집어넣을 필요가 있었느냐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느정도 사실이기도 하다. 오히려 8명이기 때문에 이야기가 더 산만해지지 않았나라는 의구심도 있고, 숫자를 줄이고 더 집중하였으면 더 매력적인 게임이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들기도 한다. 


그래픽과 BGM 측면에서 옥토패스 트래블러는 상당히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우선 이 게임은 도트풍의 그래픽 스타일을 지향하지만, 언리얼 4 엔진을 사용하고 있다. 상당히 괴리감이 느껴지는 부분이긴 하지만, 전투 이펙트나 브레이크 시의 이펙트를 생각해보면 일견 납득되는 부분들도 있다. 게임은 애니메이션을 최대한 적게 쓰되, 플레이어가 극적으로 느낄만한 부분(브레이크 시의 이펙트라던가)에는 상당한 노력과 정성을 들여 연출과 이펙트를 구성하였다. 덕분에 분명 도트풍의 복고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매우 인상적인 그래픽을 보여준다. BGM은 연출의 고양감을 한껏 끌어올리고 있으며, 한 곡 한 곡 버릴것 없이 매우 인상적이다.


결론적으로 옥토패스 트래블러는 게임의 특징(옴니버스+소소한 규모)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구매를 강력하게 추천하는 타이틀이다. 이 게임에는 거대한 규모는 존재하지 않지만, 모든 것은 계획된 대로 잘 작동되는 편이다. 하지만 거대한 규모의 게임을 원하거나 하나의 통일된 이야기를 원한다면, 이 게임을 선택하는 것은 그렇게 현명한 선택은 아닐 것이다.



게임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락스테디 게임즈가 만든 배트맨 아캄 시리즈가 게임 업계 및 서브컬처 전반에 끼친 영향은 막대했다. 이전까지 나왔던 많은 케릭터 게임들은 영화나 만화의 마이너 타이업 게임으로써 프랜차이즈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아캄 시리즈는 모든 것을 뒤집어 엎었다:아캄 어사일럼은 처음 등장하였을 시, 오롯이 '배트맨이란 케릭터는 누구인가'에 초점을 맞춰놓고 게임을 구성하였다. 전투와 잠입, 수사 등의 다양한 요소들은 새롭지는 않았지만 배트맨이라는 케릭터와 맞물리면서 유기적인 시너지를 냈었고 아캄 시티에서 아캄 나이트로 이어지면서 이야기를 발전시키고 3부작을 훌륭하게 마무리 지었다. 아캄 시리즈의 성공은 수많은 미국 만화 팬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하였다:과연 아캄 시리즈의 성공이 다른 만화 케릭터로 옮겨갈 수 있을까? 배트맨이 그러했었던 것처럼 다른 만화 케릭터를 플레이어가 조작하고 경험해볼 수 있을까?


마블의 스파이더맨(2018)은 아캄 시리즈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전에도 스파이더맨은 게임들이 있었다:소니에서 나왔던 영화 삼부작에 맞춰서 게임이 나오거나, 쉐터드 디멘션즈, 레고 마블 히어로즈 시리즈나, 이런 게임들은 항상 있어왔다. 하지만 영화나 만화의 타이인 작품이 아닌,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하고 트리플 A의 규모에 맞춰서 게임을 만든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스파이더맨을 개발한 인섬니악 게임즈는 이미 라쳇 앤 클랭크나 인퍼머스 같은 프랜차이즈로 검증된 커리어를 갖고 있으며, 업계에서는 소니의 퍼스트 파티라는 타이틀과 이점을 갖고 있는 회사였다. 락스테디가 아캄 시리즈 이전까지 크게 유명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마블의 스파이더맨은 배트맨과 아캄 시리즈로 선두를 빼앗긴 마블이 절치부심하고 소니와 합작하여 만들어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게임의 완성도 역시 들어간 노력과 자본에 아깝지 않다고 평할 수 있다.


마블의 스파이더맨은 기본적으로 오픈월드의 장르를 취하고 있다. 게임은 뉴욕이라는 도회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여기저기 할 거리를 흩뿌리고 플레이어가 자유롭게 할 거리를 선택하게 만드는 구조다. 하지만 일반적인 오픈월드 게임에 비해서는 다소 간소화된 부분들이 있다:예를 들어 GTA5의 경우, 플레이어는 군중 속의 일원으로 거리를 함께 누비며 사고를 치거나 운전을 하거나 등의 활동을 한다. 하지만 스파이더맨의 경우에는 군중의 일원이 아닌 마천루의 꼭대기에서 거리를 내려다 보는 영웅 스파이더맨으로써 활동한다. 콘텐츠의 많고 적음을 떠나, 군중과 상호작용 요소가 대부분 삭제되었기에 일반적인 오픈월드 게임과는 다소 다른 부분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마블의 스파이더맨은 일반적인 오픈월드 게임보다는 아캄 시리즈, 특히 아캄 나이트의 고담 시와 상당히 유사한 측면이 있다:아캄 나이트에서 고담 시에는 군중이 존재하지 않으며, 도시는 거대하고 할 것들은 많지만 개발자들이 기획 해놓은 방식으로만 플레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소 정형적인 부분들이 있다. 스파이더맨 역시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는 오픈월드의 구조를 취하고 있지만, 콘텐츠의 배분이나 소비 구조는 기획자가 설정해놓은대로만 즐길 수 있다는 측면에서 아캄 나이트를 연상케하는 구석들이 많다.


그러나 스파이더맨은 아캄 나이트, 아니 여타 오픈월드 게임이나 케릭터 게임 등을 넘어서는 매력적인 장점을 갖고 있다. 그것은 바로 스파이더맨의 전매 특허인 거미줄을 활용한 파쿠르 요소다. 원작 만화에서 스파이더맨은 마천루 사이로 거미줄을 쏘면서 자유롭게 이동한다:스파이더맨은 때로는 투석하듯이 웹슬링을 하거나, 짧게 거미줄을 쏴서 자신을 끌어당기거나, 양 손과 거미줄을 이용해서 자신의 몸을 급격하게 끌어당기는 등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스파이더맨의 움직임은 마천루라는 도회적인 풍경과 맞물려 오랜 시간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지만, 게임으로 구현하기 어려웠다는 문제가 있었다. 인섬니악은 바로 이 부분에서 트리플 A 급 게임 다운 발상으로 문제를 해결하였다:마블의 스파이더맨 2018은 모든 도시의 빌딩에 상호작용할 수 있는 난간 등의 디테일을 집어넣고 플레이어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끔 만들었다. 하지만 인썸니악 게임즈는 스파이더맨을 통해 단순히 난잡하게 디테일으로만 채워넣은 것이 아닌, 직관적인 조작으로도 다양한 동작을 수행할 수 있게끔 만들어서 단순히 움직임만으로도 즐거운 게임을 만들어내었다.


스파이더맨의 파쿠르 요소의 핵심은 '가속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파쿠르는 이러한 요소를 감안하여 설계되어 있으며, 사용하는 버튼에 따라서 크게 3가지 범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스파이더맨은 오른쪽 트리거 버튼을 이용해서 기본적인 파쿠르와 웹슬링 상태로 이행할 수 있다. 이 상태에서는 플레이어가 공중에서 거미줄을 쏘아 진자 운동을 하며, 가속을 얻으면 얻을수록 더 멀리 더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데 이것이 기본적인 이동의 핵심이다. 또한 이 상태에서 벽을 타고 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웹슬링은 주변 지형에 영향을 강하게 받고,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거나 웹슬링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때가 있다. 본 게임에서 가속은 고도와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최대가속을 유지하기 위해서 고도를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 때 사용하는 것이 점프(X) 버튼을 이용한 웹 집이다. 웹 집은 주변의 높은 지형지물이 없어서 웹슬링 상태로 이행하지 않더라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최대 고도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준다. 또한 빌딩을 타고 달릴 때, 맨 끝 난간에서 X버튼을 타이밍 좋게 누르면 달리던 속도를 유지하면서 옥상 층을 빠르게 빠져나갈 수 있다. 


마지막은 난간이나 돌출부를 오른쪽+왼쪽 트리거를 눌러서 끌어당겨서 수평하게 먼거리를 이동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속도를 빠르게 얻을 수 있지만, 최고 속도를 얻는데 상당한 조작을 필요로 하며(타이밍 좋게 X를 눌러야 한다던가), 고도를 유지하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웹슬링이나 벽타기를 통해 고도를 끌어올리거나 웹집으로 고도를 유지해줄 필요가 있다. 종합하자면 플레이어는 최고 속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모든 파쿠르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사용해야 하며, 게임은 이를 직관적으로 구성하였다. 특히 어크의 원버튼 파쿠르와 비교해보자면 스파이더맨의 파쿠르 시스템은 상당히 흥미롭다 할 수 있다:버튼 하나로 파쿠르 모드로 나뉘어지는 어크는 벽타기 등의 파쿠르가 상당히 단순화되었다. 무언가 자유롭게 할 수 있는것처럼 보이더라도, 어크는 플레이어가 잡을 수 있는 난간이나 뛰어넘을 수 있는 플랫폼이 정형화되어 있다. 그러나 스파이더맨은 파쿠르 요소를 3 버튼으로 쪼게서 플레이어가 조작하는 요소를 늘리는 동시에, 직관적으로 접근한 덕분에 조작이 난잡하지 않으면서 다양한 것을 시도할 수 있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스파이더맨은 이러한 시스템을 통해 더이상 정해져있는 난간이나 플랫폼에 얽메일 필요 없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이 덕분에 스파이더맨은 그저 빌딩 사이를 움직이는 것만으로 즐겁다. 


스파이더맨의 전투 시스템은 아캄 시리즈의 프리플로우 시스템을 따르고 있다. 플레이어는 주먹 버튼을 누르는 것만으로 전투 중 물흐르듯이 매우 간단하게 적을 공격할 수 있다. 하지만 스파이더맨은 아캄 시리즈를 그대로 이식하지 않고, 전투에 3차원 공간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아캄 시리즈와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우선 플레이어는 에어 런치로 적을 공중에 띄워넣고 공격을 가할 수 있는데, 이는 아캄 시리즈보다는 데빌 메이 크라이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스타일리쉬 액션 개념에 가깝다. 물론 별도의 조작없이 버튼을 길게 누르는 것만으로 적을 띄울 수 있고, 살짝 텀을 두고 공격을 누르는 것만으로 공콤이 이어지게끔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게임의 일부로써 훌륭하게 작동하고 있다.


스파이더맨에서 공중전은 단순히 스타일리쉬한 게임 플레이를 넘어서 시스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우선, 게임은 아캄 시리즈와 달리 총을 든 적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총의 사선에서 벗어나야하는 순간이 많다. 또한 위협적인 적들을 피하고, 한 명을 집중공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CC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처음에 아캄 시리즈를 하듯이 플레이를 하면(회피 위주의 지상전 플레이), 게임은 다소 어렵게 느껴질 구석이 많다. 피하기 어려운 공격들이 많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을 공중으로 끌어올려서 한 명씩 격파하고, 공중 회피를 자주 사용한다면 난이도가 그럭저럭 할만한 수준까지 떨어지게 된다. 기본적으로 스파이더맨은 3차원의 공간에서 전투를 할 것을 요구하며, 그 배경으로 거대한 필드나 입체적인 공간들(빌딩 옥상이나 이런 곳)을 제공하며 자유로운 움직임을 구사하기 때문에 전투는 아캄이나 여타 게임들과 비교하여 자유롭고 상쾌한 느낌이다.


스파이더맨은 또한 웹슈터 이외에도 다양한 도구들을 이용해서 전투를 풀어나갈 수 있으며, 이는 상당히 중요하다:적의 체력과 상관없이 적을 바닥이나 벽에 거미줄로 고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도구 하나 하나의 성능은 매우 뛰어나며, 쓰는 재미가 있지만 다양한 도구를 조합해서 사용하는 것은 상당히 불편하게 구성되어 있다. 우선 도구 휠을 띄워서 도구를 일일이 지정해줘야 하는 부분이 있고, 웹슈터를 제외하면 도구들은 무작위로 보충되기 때문이다. 자주 쓰는 도구 몇개라도 단축키로 지정해놓고 빠르게 불러낼 수 있었다면, 다양한 방법으로 전투를 이끌어나갈 수 있었을 건데 아쉬운 부분이 있다.


스토리 부분에서 마블의 스파이더맨은 아캄을 훌륭하게 벤치마킹하였다. 아캄 시리즈의 근본적인 테마는 배트맨이 누구인가?이다. 이 테마를 위해서 배트맨의 대적자들인 빌런을 배치하고, 배트맨에게 개인적인 재난과 시련을 주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확고한 케릭터를 정립한다. 스파이더맨도 유사하다. 게임은 존경했던 멘토 옥타비아누스가 어떻게 망가지게 되는지, 실제 악이라 할 수 있는 오스본은 처벌받지 않고, 스파이더맨의 소중한 사람들이 위협받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소시민 피터 파커와 스파이더맨의 고뇌를 동시에 다뤄내고 있다. 게임이 전반적으로 빌런을 아껴서 아쉽다는 느낌은 있지만, 큰 틀에서의 스토리는 스파이더맨이란 영웅이 어떤 존재인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만 본다면 스파이더맨은 훌륭한 트리플 A 게임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스파이더맨에는 게임 외적으로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그것은 바로 아캄 시리즈를 너무 의식하고 벤치마킹한 나머지 몇몇 부분에서는 카피켓이라 할 수 있을 정도고 게임을 배낀 것이다. 트리플 A 게임은 자본이 많이 들어가기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성공한 작품의 공식을 이식하는 것은 상당히 흔한 일이다. 하지만 유비소프트의 게임 프랜차이즈들이 서로를 모방하고 배끼더라도, 어느정도는 프랜차이즈의 성격에 맞게 시스템을 개수하는 것처럼 그대로 모방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스파이더맨의 몇몇 미션들이나 장면들은 '그대로 배낀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스파이더맨이 스콜피온의 독에 당해서 해독제를 만들고 도시를 활보하는 미션 같은 경우가 있다:이 장면은 분명히 아캄 시티에서도 비슷한 시퀸스가 있었으며, 심지어 연출도 비슷하다. 그외에도 라디오 타워 개방을 위해 주파수를 맞추는 부분 등의 자잘한 부분에서도 아캄 시리즈의 요소를 그대로 들고온 경우를 볼 수 있다.


또다른 예는 잠입 미션이다:전반적으로 스파이더맨의 잠입 요소는 본편의 파쿠르나 전투에 비교하여 보았을 때, 깊이가 얕고 사족에 가깝다. 아캄 시리즈에서 잠입 파트가 배트맨이란 케릭터가 공포로 적을 지배한다는 컨셉을 구현하는 주요한 연출과 게임 플레이였다면, 스파이더맨에서 잠입은 뭔가 그 컨셉이나 당위성이 부족하다. 심지어 몇몇 서브 미션의 경우, 잠입 플레이와 전투 플레이가 상충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예를 들어 창고 제압 미션의 경우, 첫번째 웨이브의 적들을 잠입으로 모두 처리할 시 두번째 웨이브가 시작되면서 곧바로 적들이 스파이더맨의 존재를 인지하고 공격을 가한다. 보통의 잠입 및 제압 플레이의 경우, 웨이브가 가산되더라도 잠입상태를 유지한채로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스파이더맨의 잠입 플레이는 뭔가 전체 게임 플레이에서 겉돈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차라리 이런 부분에서 과감하게 잠입을 쳐냈다면 게임은 좀더 깔끔하고 괜찮아졌으리라 본다.


결론을 내리자면, 스파이더맨은 아캄 시리즈의 좋은 점을 최대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면서 재밌는 게임을 만들어낸 경우라 할 수 있다. 오픈월드 게임치고 클리어 후의 콘텐츠가 부족하다는 평가도 간혹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스파이더맨이라는 게임의 분량이 부족하거나 재미를 퇴색시키지는 않는다. 다만 아캄 시리즈를 이전에 플레이했던 사람들에게 스파이더맨은 즐거우면서도 동시에 묘한 기시감이 들어서 당혹스러움이 느껴지는 게임이기도 하다. 지금은 큰 문제가 되진 않겠지만, 추후에도 이런식으로 후속작을 만들면 어떤식으로든 스파이더맨의 개성과 배트맨의 개성 사이에서 충돌하여 완성도가 떨어질수도 있다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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