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애니’는 일주일 전 돌아가신 엄마의 유령이 집에 나타나는 것을 느낀다. 애니가 엄마와 닮았다며 접근한 수상한 이웃 ‘조안’을 통해 엄마의 비밀을 발견하고, 자신이 엄마와 똑같은 일을 저질렀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애니의 엄마로부터 시작돼 아들 ‘피터’와 딸 ‘찰리’에게까지 이어진 저주의 실체가 정체를 드러내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그리스 비극의 핵심은 비범한 인물이 신들의 시기와 질투를 사 피할 수 없는 파멸을 맞이하는 것이다. 극 중에 나오는 아킬레우스의 파멸을 보라:그는 온갖 불길한 전조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나아갔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잃는 파국을 맞이한다. 하지만, 동시에 영화는 이러한 의문을 제기한다:만약 아킬레우스가 자신이 향해가는 파국의 결과를 알았다면, 혹은 그에게 더 많은 선택지가 주어졌더라면 그 비극은 과연 덜 비극적이었을까?

 

유전은 일반적은 호러영화와는 결이 다른 작품이다. 우선, 이 영화에는 호러 영화 장르 특유의 점프 스케어가 거의 없다. 영화는 차분하고 불길한 시선으로 한 가족이 어떻게 기이한 파멸을 맞이하는지를 다룰 뿐이다. 몇몇 관점에서 본다면, 유전은 공포 영화보다도 그리스 비극에 가까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가족들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불가해한 징조들을 목도하지만, 그것으로부터 맞서 싸우거나 도망치지 않으며 심지어 파멸을 스스로 실현(강령의식을 하는 등)한다. 오히려 공포 영화를 오랫동안 보아온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 가족들이 참으로 답답(?)하다고 느껴질 부분도 많다.

 

하지만 역으로 접근해보자:어째서 이 가족은 파멸에 도달하는가, 혹은 파멸에 도달할 수 밖에 없을까? 고대 그리스 비극의 핵심은 무엇을 해도 파멸할 수 밖에 없는 영웅의 운명(일리아드의 아킬레우스 같이)이었다. 그리고 유전에서 공포의 핵심은 점프 스케어로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파멸을 피할 수 없다'라는 메세지를 관객들에게 각인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메세지의 한 가운데는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있다.

 

애니가 처음 모임에서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관객들은 그녀의 가족사가 광기와 죽음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울증으로 굶어죽은 아버지, 해리감 정체 장애로 오랫동안 고통받다 죽은 어머니, 정신분열증으로 자살한 오빠, 기이한 행동을 하는 찰리와 몽유병을 겪는 자신까지, 자신의 가족 핏줄 속에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끔찍한 무언가가 기어다니는 인상을 준다. 정신병력이 환경과 유전의 영향을 강하게 받긴 하지만, 영화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그런 '과학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유전의 핵심은 불길한 이미지들이 서로 유추되어 파멸의 연쇄를 만들어낸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꿰뚫어보는 것은 '가족은 서로 닮는다'라는 오래된 명제가 숨어있다. 영화 유전에서 이 명제는 연역이나 귀납이 아닌, 유비추리(서로 비슷한 명제들을 통해서 비슷한 결론을 내리는)의 영역이다. 애니가 빠지는 가족의 내력에 대한 집착와 잃어버린 가족에 대한 행동들은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어머니가 찰리와 피터에게 했었던 것과 유사하다. 하지만 정신 질환을 앓는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애니는 남들에게 보이지 않지만 자신에게만 보이는 명백한 사건의 흐름을 볼 수 있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논리적인 개연성을 가진 서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 불길한 이미지들을 보여주면서 애니의 광기를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만든다. 

애니의 광기는 그리스 비극과 분명하게 다르다:그리스 비극의 핵심은 영웅이 파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그렇듯이, 평범한 인간을 뛰어넘은 그가 아무리 발악하고 노력하더라도 자신의 어머니와 동침하게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유전에서 가족의 파멸에 집착하여 점점 미쳐가는 애니는 그렇지 않다. 그녀는 비범하지도 않고, 우리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다소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정도일 뿐이다. 바로 이 부분이 유전을 공포 영화로 만드는 부분이다:가족에 대한 집착과 주변 환경에서 보여지는 불길한 이미지와 징조들은 평범한 사람들도 주변에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평범한 것들이다. 마치 특별할 것 없는 모든 것들이 일상을 옥죄어오며 파괴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유전은 점프 스케어나 끔찍한 이미지 없이도 두려운 공포 영화가 될 수 있었다.

 

연출관점에서 본다면, 유전은 이를 독특한 카메라 연출을 통해서 이루어낸다:마치 정물을 다루는 듯한 카메라의 움직임은 영화 속의 세계를 불길한 시선으로 관조한다. 그리고 애니의 직업인 미니어처 조형사라는 점은 유전의 카메라 연출을 독특하게 변주시키는 요소로 작용한다. 무언가 불길한 일이 일어날 때마다, 동일한 상황으로 구성되어 있는 미니어처들을 카메라는 고요하게 관조하고 들여다본다. 마치 똑같은 일이 다시금 반복되고 일어난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영화는 극 내에 동일한 상황을 복제하여 이것이 단순한 장면이 아닌 불길한 서사의 일부인 것처럼 구성을 한다. 

 

결론적으로 유전은 독특한 공포영화고, 단순하 불길함만으로 이야기와 공포를 이끌어나갈 수 있다는 것을 훌륭하게 보여준 사례라다. 공포 영화에 익숙치 않은 사람이라도, 이 영화를 충분히 즐길수 있고, 그리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