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이야기

 

-아는가? 왜 칼에 칼집이 있는지?
-칼의 참 뜻은 죽이는 게 아닌 살리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네 칼은 너무 예리하니 칼집 속에 잘 넣어둬라.
-제 칼집은 바로 사부님이시죠. 사부님이 계시면 함부로 못 덤빕니다.
-너를 담기 버겁구나.

-왕가위, <일대종사> (2013)

미국을 대표하는 대중문화 장르에 서부극이 있다면 아시아권, 특히 중국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대중문화 장르에는 무협이 있을 것이다. 굽이치는 강과 봉우리들의 배경삼아 무공을 연마한 영웅과 협객들이 자웅을 겨루고 교우 관계를 맺는 무협의 전통은 거슬러 올라가면 수호지로부터 시작하여 김용의 무협소설을 거쳐 고전적인 홍콩 무협영화와 중국 무협영화, 그리고 왕가위의 무협영화나 이안의 와호장룡과 같은 재해석물, 현대적인 중국 무협(드라마와 영화 등등)까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중국의 무협 문화는 서부극보다도 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거대한 체계를 구축한 대중문화 장르이며, 중국의 다른 문화(시서화 같은 유교문화권 특유의 문화 체계 등등)들과 밀접한 연관을 지으면서 다른 대중문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미학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렇기에 무협과 관련된 전통을 여타 다른 대중문화 전통과 엮어서 접근하는 시도도 많았었다. 한국 영화의 전통에서 바라본다면 류승완 감독의 아라한 장풍 대작전이나 최동훈 감독의 전우치 같은 작품들이 대표적일 것이다. 이들을 중국에서 비롯된 무협의 정통 적자로 볼 수는 없겠지만, 그들 나름대로 재해석한 무협의 전통과 그들이 창작하면서 쌓았던 배경지식들은 분명 무협의 스펙트럼을 넓히는데 기여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명일방주 역시 무협의 전통을 모바일 소셜 게임과 서브컬처 전통 아래서 재해석한 독특함을 보여준다.

명일방주를 논하기에 앞서서 먼저 무협물의 전통이 무엇인지를 논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무협물은 인간이 육체와 내공을 극한으로 단련하여 상대와 무를 겨루는 것을 기본 포멧으로 삼고 있으며, 대중적인 무협물의 인식 역시 그러하다. 하지만 이는 무협武俠에 있어서 반절인 무武만 다루고 있는 정의다. 무협물의 중요한 요인과 인물 동력은 협俠이라 하는 특유의 관계망에서 비롯된다.

협의 관계론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강호江湖라는 공간을 먼저 다루어야 할 것이다. 강호江湖는 한자어 그대로를 풀이하자면 강과 호수를 의미한다. 하지만 강과 호수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라는 측면은 무협을 벗어난 범유교~중화 문화적인 전통에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몇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강호라는 단어는 춘추전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장자가 이야기한 魚相忘乎江湖(어상망호강호, 물고기는 강호에서 서로를 잊고), 人相忘乎道術(인상망호도술, 사람은 도에서 서로를 잊는다)라는 표현에서 등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당나라 시인 육구몽은 스스로를 강호산인江湖散人이라 자처하였는데, 이 칭호는 속인과 교류하지 않으며 강호를 떠돌아다니며 살았던 그의 삶의 자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또한 정철의 관동별곡에서 "江湖애 病이 깁퍼 竹林의 누엇더니(=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었더니)"라는 문구가 있는데 여기서 강호를 자연이나 속세를 벗어난 공간으로 해석한다. 춘추전국 시대 장자에서 조선시대 송강 정철까지 강호라는 단어는 중화 문화와 유교 문화의 영향을 받는 문화권에서는 합의된 해석이 있었는데, 그것은 자연이자 속세를 벗어난 공간이라는 것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속세를 벗어난 공간'으로써의 강호가 중앙집권적인 중국 고대 국가들의 힘이 미치지 않는 '무법지대'를 동시에 의미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무협물의 시조라고 불리는 수호지가 무법자들 집단인 양산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무협의 시작이 바로 무법이라는 점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애시당초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무武라는 형태의 폭력을 수단으로 삼는 것 자체가 폭력을 황실과 왕조의 명분 질서 아래 재편하여 법과 기관을 구성하고, 권력과 정당성을 독점하여 통치하는 아시아 전근대 국가의 법 통치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전근대의 한계상, 모든 곳에는 황실과 왕조의 통치가 미칠 수 없었고 그러한 공백에 자연 그대로의 강호가 존재할 수 있었다. 즉, 속세를 등진다는 것은 번잡한 세상사를 등진다는 것 외에도 황실과 왕조의 통치 질서 변두리로 가서 은둔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서부극의 무법 지대인 서부와 무협의 강호는 맥이 닿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규칙의 존재 여부에 따라 이 둘은 극명한 차이를 보여주기도 한다. 서부극에서 서부는 그야말로 공백의 공간, 가능성의 공간이다. 황무지는 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자유, 법 바깥에서 생과 사를 결정하는 강력한 권력과 기존 사회의 질서를 넘어서는 힘이 존재한다. 물론 그것이 서부극의 전부는 아니지만, 중요한 점은 서부극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법과 제도, 사회의 부제와 그것을 채워넣는 인물들의 힘일 것이다. 그러나 무협에서 강호라는 공간은 단순한 '부재'와 그것을 채워넣는 힘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협俠의 관계론이 대두된다. 강호에 조정 질서가 들어오지 않더라도, 거기에는 느슨한 사회 체계가 존재한다. 강호의 질서는 협의 질서이며, 원초적인 호혜적인 질서다. 은을 받으면 그것을 은인에게 갚고, 해를 입으면 원수에게 복수로 갚는다. 모든 것은 인간 관계로부터 시작되며, 인간 관계로 끝난다. 부모의 원수, 기인을 만나며 사사를 받고, 사사 받은 문파로부터 새로운 인간관계가 형성 되며 적 또한 함께 늘어난다. 단순한 관계론이지만, 주체와 그 사람들이 걸어온 역사로 인해서 단순한 관계망이 아닌 복잡한 생태계를 형성한다. 힘과 질서의 공백을 총을 쥔 무법자가 채워넣는 서부극과 다르게 이미 무협에서는 법과 정부는 없을지라도 인간관계로 구성된 독특한 사회 질서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무협의 핵심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인간사의 희로애락을 다루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단순히 이야기하자면 사람에게 상처 입고, 사람에게 덕을 보고, 그것을 마땅히 돌려줘야 하는 사람들에게 돌려주는 장르지만, 무협은 인간 관계에 초점을 맞춘 덕분에 여타 대중문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인간 관계에서 발전된 완숙미와 여운, 혹은 인간사에게서 느끼는 염세와 자조 등 다양한 감정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이 중국의 오래된 역사와 전통, 문화의 영향과 합쳐지면서 풍부한 레퍼런스를 갖게 된다.

 

 

모든 무협영화들이 그렇지 않지만, 이런 완숙미가 드러나는 몇몇 예를 보자:소오강호의 이야기는 강호를 떠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무림 비공(규화보전)이 적혀있는 책과 휘말리게 되면서 시작된다. 주인공들은 초반에 무림을 떠나려 하는 두 강호의 선배를 만나는데, 여기서 소오강호지곡笑傲江湖之曲이라는 곡의 악보와 규화보전이 서로 뒤바뀌게 되면서 사건이 발생한다. 앞으로는 근엄한척 하지만 강한 힘을 얻기 위해서 제자를 버리는 주인공의 위선자 스승이나 다양한 인물 군상들이 주인공과 엮이게 되고, 주인공은 기연을 얻어 독고구검을 깨치고 마지막에 스승을 물리치며 강호를 떠나게 된다. 여기서 '강호의 속박을 비웃어버린다笑傲江湖'라는 이름을 가진 곡의 악보를 두고 사람들이 무림 비공이라 잘못 속아서 서로 힘대결을 하는 웃지못할 상황들은 그야말로 강호의 민낯을 다룸과 동시에 인간사의 아귀다툼을 초월해버린듯이 이야기하는 완숙미가 훌륭한 작품이었다.

서극의 칼(원전은 장철 감독의 독비도로, 김용의 신조협려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은 좀 더 독특하다. 여성의 독백으로 시작해서 끝나는 영화는 주인공이 아버지의 복수와 오른팔을 잃어버린 후, 독특한 전개를 보여준다. 주인공은 외팔의 상태에서 반쯤 불타버린 무공 비급을 얻게 되는데, 아무리 연마해도 팔을 한쪽을 잃어버린 자신의 처지와 반쯤 타버린 비공 때문에 반푼어치 깨달음 밖에 못얻는다고 분노한다. 하지만 그러한 처지에도 주인공은 그 처지에서 깨달음을 얻어 비공도 아닌 자신의 무를 창시하여 원수를 쓰러뜨리고 멀리 여정을 떠난다. 서극의 칼은 결함과 그것을 극복하는 것에 대한 진한 페이소스가 있는 영화로 원전인 신조협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무협이 단순히 무예를 겨루는 장르가 아닌 인간사와 인간관계를 베이스로 한 작품임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왕가위의 동사서독이나 일대종사, 허우샤오셴의 자객 섭은낭, 이안의 와호장룡 등등의 기라성 같은 작품들이 무협의 장르 문법을 깊이있게 보여주었다. 물론 일반적인 무협에서도 이러한 장르적 문법(무로써 강호를 종횡무진 거니며, 협의 정신으로 사람과 만나다)을 다루었다.

하지만 근래의 중국 본토의 무협물들은 이러한 무협물의 장르 문법과 다소 동떨어져있는데, 이는 장이머우의 영웅의 등장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사기의 자객열전에서 모티브를 얻은 영웅은 진시황의 천하통일과 진시황을 암살하려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흥미로운 점은 진시황을 암살하려는 자객이 마지막에 진시황의 천하통일 대업의 뜻을 이해하고 자신의 복수하고자 하는 감정을 내려놓고 진시황을 살려주는데, 이것이 일견 무협의 문법과 맞닿아있는 것처럼 보이면서 그것과 동떨어져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즉, 자신의 감정이나 인간사의 은원보다 더 거대한 가치(=천하통일)가 존재하는 것을 알고 그것을 내려놓는 것은 협의 관계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웅은 고전적 무협의 종말로도 볼 수 있는 작품인데, 이후 나오는 중국 대중문화의 무협이 중앙 진출하여 조정의 이야기를 다루는 경우들이 많다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무협의 문법에서 보자면 이질적인 일들이 발생한 것인데, 서부극으로 따지면 법과 정부가 존재하는 워싱턴 D.C.를 배경으로 무법자들이 총을 쏘며 돌아다니는 것과 유사하다 할 수 있다. 말은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나온다면 그것의 저의가 의심될 수 밖에 없는 묘사다.

 

 

그러면 위와 같은 논의를 전제로 하고 명일방주로 돌아가보자. 가장 노골적인 무협의 인용인 염국의 사이드 스토리들(장진주 같은)을 제외한다면 명시적으로 무협 문법을 접합하여 스토리를 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잘 살펴본다면 뼈대가 되는 부분에서 무협의 이야기와 깊이 맞닿아 있다. 명일방주의 스토리는 기본적으로 메인스트림으로부터 살짝 벗어나 있으며 동시에 재능있는(그것이 무력이든, 아니면 다른 형태의 재능이든) 오퍼레이터들이 로도스 아일랜드라는 성긴 연대를 통해서 의를 행하는 것에 있다. 세상의 부조리는 거대하고 복잡하고 뿌리깊고 이들은 강하긴 하지만 그들의 힘만으로는 그것을 바꾸기엔 너무나 모자라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를 행한다는 목표를 갖고 움직이는 것인데, 그 목표를 위한 구심점이 박사라 하는 한 인물의 인품과 인간관계라는 점은 독특한 부분이다. 즉, 이들은 질서와 규율, 위계가 아닌 박사라는 구심점을 둔 성긴 인간관계에 기반(≒ 협)하여 법이 없는 틈새 공간(≒ 강호)에서 실력 행사(≒ 무)로 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추상적으로 놓고만 보면 무협의 문법과 묘하게 맞닿아 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명일방주의 이야기는 전적으로 법과 질서가 외면한 사람들(광석병 감염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소외된 사람들을 둘러싼 세계는 현실 세계의 거대한 우화로 구성되어 있다. 세계 신흥 초 강대국 컬럼비아(=미국), 오래된 강국 빅토리아(=영국), 동방의 강자 염국(=중국)과 경제의 중심 도시 용문(=홍콩), 넓은 영토를 지닌 북방 제국 우르수스(=러시아), 광륜을 가진 천사들이 만든 세계종교의 도시 라테라노(=바티칸, 가톨릭),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핍박 받는 민족 카즈델(=유대인)까지, 명일방주는 현실세계의 분쟁과 갈등을 그대로 옮기기 위해서 정말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러한 분쟁과 갈등 사이의 무법지대와 그레이존을 경험한 자들이 다양한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로도스 아일랜드의 일원이 되어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 명일방주 이야기의 핵심이다. 독특한 점은 무협의 강호가 법과 질서가 없이 인간관계만으로 이루어진 공간이었다면, 명일방주는 법과 질서가 없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이 의를 행하기 위해서 인간관계를 주축으로 한 대안 공동체로 강호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대다수 오퍼레이터들이 현실의 문제를 온몸으로 경험한다는 것인데, 법과 질서가 없는 곳의 폭력을 경험하긴 했지만 거기서 좌절하여 염세로 빠져들어 강호를 지향하는 것이 아닌 법 바깥에 서서 사회 내부를 지향한다는 점일 것이다. 이런 부분은 무협물의 양태와 다르지만, 의를 추구한다는 의협義俠의 전통에서 보면 무협의 변주로도 읽힐 수 있다:강호의 협의 네트워크 내에서도 단순히 협을 넘어서 더 큰 대의를 따른다는 의협의 관점이 강호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도 공경을 받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로도스 아일랜드의 오퍼레이터들과 박사는 단순히 사회에 편입되고자 하는 것도, 사회를 스스로 대체하자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주변부에 머무르며 의협을 행하는 것도 상당히 흥미로운 양태이다. 고전적인 무협에서 강호인이 조정일에 크게 관여하지 않은 것은 일종의 강호와 속세 사이의 벽세우기의 전통으로 접근할 수 있는데, 고전 무협 특유의 '분수를 안다'라는 관념과 일맥상통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명일방주의 인물들은 여타 서브컬처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성숙미가 보여진다. 인물들은 이미 법이 없는 곳에서 구르고 굴러 산전수전을 다 겪었고, 회의론자들이 무엇을 회의론적으로 바라보는지조차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반동인물마저도 공감 가능하게끔 묘사하고(프로스트노바, 패트리어트와 세뇌 전 탈룰라, 가이딩 어헤드의 안도아인 같은), 주역 인물들마저도 서로의 입장 차이 때문에 갈등하는(액트 1,2의 첸과 아미야의 관계처럼)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를 추구하는 주역 인물들의 곧은 자세일 것이다. 명일방주는 상당히 성숙한 자세로 인간관계를 다루고 있고, 이러한 태도는 중국 무협에서 보여주는 인간사에 대한 관조와 통찰과 상당히 맞닿아 있다. 물론 명일방주의 이야기가 대단히 사변적이고 사변적인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끝난다는 점에서 대단히 편의주의적인 부분들이 있지만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자들의 이야기를 매력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중심에는 박사라는 인물이 있다. 천재적인 지휘 능력과 놀라운 지식을 보유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이 박사라는 사람이 갖고 있는 인망일 것이다. 서로 다른 곳에서 다른 경험을 하거나 심지어는 적대한 이력이 있는 인물들이 박사를 구심점으로 모이는 것은 코레류 게임(칸코레나 소녀전선 같이 케릭터들을 모으고)에서 주역 인물들에 사람들이 호감을 갖는 문법이 독특하게 변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인 코레류 게임에서의 주역 인물이 이성(절대다수가 여성인)으로부터 유사 연애감정 ~ 연애감정을 갖는것과 달리, 명일방주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박사가 보여주는 통찰력과 로도스 아일랜드가 추구하는 의에 대한 믿음을 신뢰하며 그의 지휘를 따른다.

이는 무협에서 협의 관계망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는데, 단순히 무협에서 무공이 높냐 낮냐로 판단하는 것이 아닌 그 사람의 성품 됨됨이를 따지는 것, 그걸로 인해 마치 향기로운 난초에 나비가 이끌리는 것처럼 사람이 자연스럽게 모이는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의를 행하는 명분 이상으로 서로 어울릴 수 없는 반동 세력들 마저도 박사라는 인간 아래 모일 수 있는 것이다. 

게임에 대한 부분은 추후 별도 리뷰로 다루겠지만, 명일방주는 무협의 현대 서브컬처적인 변주인 동시에 세상사를 축소하여 거기에 넣고 의를 행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보겠다는 야심을 가진 작품이기도 하다. 물론 모든 것이 성공적이진 않고(탈룰라에 관한 스토리 텔링이나), 모바일 게임의 한계 상 지나치게 텍스트에 의존해 사변적인 묘사에 천착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명일방주 스토리는 훌륭하고 매력적인 부분들이 분명 존재하고, 무엇보다 게임을 하는 동안 사람을 끓어오르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그렇기에 그만한 가치가 있는 스토리텔링이라 평하고 싶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 스포일러 있습니다.

인류사를 돌이켜보면, 우리가 '다른 문화'와 '우리 문화'를 다원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얼마되지 않았다. 고대와 중세의 신화들은 지역과 부족 단위로 쪼개져 있었고, 세상에 대한 설명은 지역적이었다. 심지어 같은 신화와 종교를 믿는 부족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같은 뿌리를 두되 다른 신화와 해석을 믿는 타인으로 분화되었다. 볼 수 있는 세계가 한정되고, 교류할 수 있는 반경이 작기 때문에 중세와 고대 사회는 현대사회에 비교해서 지역적이고 특수하며 폐쇄적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특수성과 폐쇄성이 현대 사회에 비해 중세와 고대사회가 더 '다양하고 잘게 쪼개진 사회'가 될 수 있었다는 점도 존재한다: 현대사회가 세계적이고 과학에 기반한 해석, 보편적인 인권에 대한 믿음 등에 기반하여 '보편적인 뿌리 위에 세워진 다양성'이라는 가치 체계를 만들었다면, 고대와 중세는 오로지 '우리 이외에는 존재할 수 없는/혹은 무가치한' 가치 체계에 기반하여 자기 믿음을 수립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고대 중세 사회의 개개인이 타인과 타문화를 받아들이는 방식과 별개로 고대 중세 사회가 갖는 다양한 집단으로 만들어진 스펙트럼이란 현대사회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비유하자면 현대사회가 빛이 다양한 색상과 파장을 지닌 스펙트럼으로 구성되어있다는 걸 안 상태에서 빛을 다양성을 지닌 구조체로 인식한다면, 고대 중세 사회는 빛의 한 색상만 보고 그것이 빛의 전체라고 인식하는 경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흥미로운 부분은 빛이란 서로 다른 색상(붉은색이다, 푸른색이다)이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섞이거나 충돌할 때 발생하는 일들일 것이다.

로버트 애거스 감독의 노스맨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모티브가 된 암레트 왕자의 전설을 베이스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하지만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기독교 중세 봉건 왕조의 이미지를 베이스로 한 4대 비극의 햄릿과 다르게 영화는 바이킹 문화권인 암레트 왕자의 원전 이야기를 다루는데 주력한다. 감독의 주 관심사가 현대 이전의 시대(더 위치 - 중세~근대, 라이트하우스 - 근대)의 이미지들을 다루는 것인만큼, 바이킹 문화를 다루는 노스맨 역시 감독의 주 관심사의 연장선에 놓인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노스맨은 감독의 전작들(더 위치, 라이트하우스)에 비해서 미학과 서사적으로 더욱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

노스맨은 기본적으로 신화를 다루는 작품이다. 하지만 노스맨의 '신화'의 개념은 대중매체에서 다루는 신화의 개념과는 완전히 다르다. 일반적으로 대중문화에서 신화란 '존재하지 않은 것에 대한 동경'이라 할 수 있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 같은 작품들은 특수효과나 분장들을 이용해서 이 세상에 없는 것들을 묘사한다. 기괴한 것, 웅장한 것, 아름다운 것 등등 인간의 상상력과 첨단 기술들이 신화적 세계를 구축하는데 사용되었다. 노스맨에도 그러한 비현실적인 요소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노스맨의 신화에 대한 묘사는 존재하지 않은 것에 대한 동경과 거리가 멀다.

노스맨의 신화적 이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화가 고대 ~ 중세 사회의 사람들에게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고대~중세인들에게 있어서 신화란 단순히 거대한 것과 아름다운 것, 위대한 것에 대한 동경이 아니었다. 신화는 세계를 인식하는 도구였다. 대중문화와 신화의 관계를 논한 조셉 켐벨의 신화학이나 기독교와 이단 종교 사이의 관계를 다룬 프레이저의 황금가지, 인간의 믿음과 공간이 어떠한 관계를 갖는가에 대한 공간 미학 담론 토포필리아까지, 수많은 저서들과 분석들이 과거인들의 신화가 그저 단순한 우상숭배나 미개한 믿음이 아닌 그 시대의 사유방식을 다룬다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고대인들의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 복잡한 속성들이 있지만, 그중 여기서 눈여겨 보고자 하는 것은 신화의 '강박적'인 속성일 것이다. 신화에서의 강박이란 신화가 정의내리고 있는 구조에 대한 집착이자 모든 것을 그 구조 아래 묶고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마치 주문처럼, 반복적이고 특정한 언어 사용을 통해 자연과 정령, 더 고차원적인 존재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인간의 강한 믿음이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그 믿음은 신화적 구조 아래서 보상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로버트 애거스의 작품들은 현대 이전의 인물 군상들의 심리와 세계를 강박적인 이미지의 구조로 재해석하고 다룸으로써 현대인들도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게끔 만드는데 맞추고 있다. 더 위치에서는 주인공에 대한 기독교적인 차별과 착취로 어떻게 근~중세 시대의 여성이 마녀가 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었는지를, 라이트하우스에서는 고립된 환경에서 어떻게 근대인들이 미쳐가는지를 다루었다. 이들 작품의 핵심은 현대 이전의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생각하고 세상을 바라보았다'였고, 더 나아가서 그것을 단순히 대사나 서사가 아닌 이미지의 형태로 구현하여 여타 작품들과 다른 독자적인 작품들을 구축하였다. 

노스맨 역시 그런 작품이다. 분화하는 화산을 보여주며 이야기의 끝을 암시하는 영화는 대칭적인 이미지들과 상징들을 보여주면서 신화 이전의 강박을, 더 나아가 강박이 어떻게 신화를 구축하는지를 보여준다. 많은 장면에서 이는 두드러지는데, 대표적인 장면은 영화의 초반 시퀸스에서 아버지가 삼촌에게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보면서 암레트가 주문처럼(아버지에게 복수하고, 어머니를 구하고, 원수를 죽인다) 자기 암시를 거는 부분일 것이다. 강박적으로 자신의 사명을 되새김질하면서 먼 바다로 출항하는 장면에서 장면은 바다로 나가는 바위가 좌우로 놓여 있어 마치 소년 암레트가 관문을 지나 어른이 되는듯한 이미지를 형성한다. 또한 그 좌우 대칭의 구조를 통해서 반복적이고 대칭적인 구조와 강박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도 주력한다.

노스맨에서의 신화의 강박증은 비단 작품의 컷이나 주인공의 심리를 구성하는 것 이상의 영향력이 있다. 그것은 신화와 세계를 설명하는 방식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노스맨에서도 신화를 다룰 때 필수로 등장하는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러한 방법이 다소 모호하게 그려진다는 것이 흥미롭다:가령, 복수를 위한 칼을 가지기 위해 시체와 사투를 벌이는 장면은 컷의 모호한 구성(되살아난 시체의 목을 내려친 후, 카메라 움직임을 통해 칼을 줍는 첫 상황으로 돌아와 마치 그것이 인물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환상처럼 다루었다)이라든가, 처마에 묶인 암레트를 구하는 까마귀(오딘은 지혜를 얻기 위해 세계수에 스스로를 교수형하였으며, 까마귀는 오딘의 상징이기도 했다) 같은 것들은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암시하지만 그것이 실제 초자연적인지 아니면 그저 인물의 믿음에 따라 세상을 그렇게 해석한 것인지 알 수 없게끔하는 모호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모호함이 신화의 장엄함과 위대함보다도 신화의 가장 뼈대라 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강박적인 믿음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는 암레트 왕자의 복수극을 영화는 여러 신화를 믿는 공동체의 충돌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암레트는 오딘을 주신으로 믿는 오딘 계열을 따르지만, 복수의 대상인 삼촌은 오딘이 아닌 여신 프레이야를 믿는 모습을 보여준다. 신화를 분석하는 일부 학계에서는 원래 아스 계열(오딘이 주신인)과 바냐르 계열(프레이야가 주신인)이 서로 나뉘어져있다가 합쳐진 것으로 해석하는데(구체적인 근거가 없기에 어디까지나 가설로만 존재하는 학설이다), 영화는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암레트와 삼촌의 대립을 남성적인 오딘과 여성적인 프레이야의 대립으로 치환시킨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이 암레트의 어머니다. 어머니를 구하겠다는 암레트의 다짐은 사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배신하고 삼촌을 끌어들여 왕위를 찬탈했다는 사실에 무너진다. 세계에 대한 하나의 설명(아버지에 대한 복수, 어머니의 구출, 배신자의 복수)이 무너지는 순간인데, 영화는 도입부의 어머니 방의 장면과 아버지의 가르침(여자는 방에 비밀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 교차하면서 복선을 깔아두었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그것이 하나의 문화권 내에서도 모계(어머니와 프레이야를 모시는 바나르 신족 계열)와 부계(아버지와 오딘을 모시는 아스 신족 계열)의 싸움으로 치환되어 들어온다. 하나의 세계와 사건을 두고 두가지 상반된 진실이 충돌한다는 점을 감독은 일종의 고대인들의 다문화(?)적 관점으로 다뤄내고 있다.

하지만 노스맨이 로버트 애저스의 다른 영화보다 뛰어난 점은 비단 이미지만 제공하는 것이 아닌 그것을 묶어서 하나의 독특한 메세지로 만드는데 있다. 세계를 설명하는 신화와 기저에 깔린 강박은 새로운 해석을 만나면서 흔들리고 새로운 탈출구를 찾는다. 암레트와 같이 노예로 팔려온 슬라브 족 여인이 그의 복수를 돕는 과정에서 사랑에 빠지고, 그 복수와 파멸이라는 결말에서 다른 길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녀 역시 암레트의 미래를 점칠 때 신화적인 관점을 곁들여서 바라본다는 것인데, 북구 신화가 아닌 슬라브 계통의 신화에 근거하여 신탁을 듣는다. 서로 다른 두 믿음을 가진 세계가 화합하여 공존하는 점에서 신화적 이미지가 가진 편협함과 강박을 넘어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극의 클라이맥스에서 암레트는 여인이 자신의 쌍둥이 자식을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이 본 신탁을 재해석한다:처음에 그는 주신 오딘의 신탁에 따라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어머니를 구출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여인이 자식을 회임한 후에는 자신의 원수인 삼촌으로부터 자식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위협을 제거하는 것으로 변화한다. 강박적인 세계관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닌 자식이라는 새로운 가능성과 미래를 발견하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해석으로 바뀔 가능성을 가진 운명을 재해석 하여 바뀌지 않는 결말을 가진 숙명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점은 신화와 삶을 받아들이는 고대인의 독특한 시각이자 삶에 대한 페이소스를 느끼게 만든다.

그렇기에 로버트 애저스의 영화 노스맨은 신화적 이미지의 재해석을 뛰어넘는다. 그것은 고대인들이 신화를 남겼을 때, 가장 근저에 남아있는 세계를 향한 강박과 삶에 대한 희로애락, 그리고 더 나아가서 다른 문화를 받아들여 성숙해지고 더 나아가서 끝에 남은 파국을 담담하게 받아들여 뒷세대에게 자신의 유산을 남기는 거대한 드라마다. 노스맨은 강렬하고도 강박적인 이미지를 제공하는 동시에 그 이미지로부터 벗어나며 그것을 성숙하게 받아들이는 고대인을 다룸으로써 대중문화에서 신화들을 교차하여 재해석한다. 이전작들이 이미지를 정교하게 다루는데 집중하였다면, 이제 감독은 자신이 잘하는 것을 넘어서 이미지로 독특한 감수성과 공감대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많은 감독들이 자신이 잘하는 것에 천착하다 커리어를 마무리 짓는걸 생각한다면 로버트 애저스는 노스맨을 통해 한 층 더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론을 내리자면, 노스맨은 훌륭한 영화다. 물론 캐스팅에 비해서 대중적이지 않은 이미지와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고, 일반적인 신화를 다룬 영화를 생각한다면 대단히 낯설고 생소할 것이다. 그러나 그 낯섬과 생소함 속에서 영화는 신화의 근저에 깔려있는 감수성을 다루고, 그것을 신화의 특수성이 아닌 좀더 인간사의 보편 타당한 경험으로 승화시키는데 주력한다.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은 아닐진 몰라도, 노스맨은 대단히 인상적이고 한번쯤은 감상해보는 것을 추천하는 영화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범인류사와 지방사의 관계는 단순히 부분과 집합의 관계로 정의내릴 수 없다. 어떤 범인류사의 흐름들은 지방사에서 발견되지 아니하며, 어떤 지방사의 사건들은 그 지방만의 특수한 사건들로만 끝난다. 그렇기 때문에 범인류사와 지방사는 서로 논리적으로 등치 불가능하며 서로의 정합성을 담보하지 않는 독립적인 명제다. 하지만 그러한 범인류사와 지방사를 뒤집어서 등치시키는 예술작품들이 있다:그러한 작품들은 논리적으로 등치될 수 없는 두 명제를 등치시킴으로 이런 예술 작품들은 단순히 한 지방, 집단, 개인의 경험이 아닌 범인류적인 경험과 공감을 끌어내는 작품으로 승화되기도 한다. 


이 논의는 논리학적으로 성립이 불가능한 두 명제, 범인류 보편사를 지방사로 특수화하기, 혹은 지방의 특수사를 범인류사로 보편화하기라는 모순적 명제가 예술 작품의 미학 내에서는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모순적 명제들이 참으로 성립할 수 있는데는 우리가 보편적이라고 생각하거나 특수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명제와 조건에 대한 숙고와 통찰력, 더 나아가서 각 보편 명제와 특수 명제 사이의 논리적 관계망을 뛰어넘는 유비추리적 관계망, 미학적 통찰력과 감상, 공감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요컨데 뛰어난 예술적 통찰과 미학적 성취는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명제들을 연결하고 이들을 관통하는 주제와 담론을 생산한다.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은 에드워드 양이 감독하고 대만 계엄령 시절을 다루는 영화다. 영화는 최초의 대만 청소년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진 작품이고, 어떻게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이야기로 다루면서 중국 본토에서 도망나온 사람들의 암울했던 삶을 이야기한다. 흥미로운 점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 영화 팬들 사이에서 차지하는 위치일 것이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한국의 영화 커뮤니티에서 오랫동안 명작으로 칭송받았을 뿐만 아니라 마틴 스콜세지가 복원을 지원했을 정도로 영화팬들 사이에서 이 영화에 대한 공감대는 대만을 넘어서 전세계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기법이나 이야기를 다루는 관점에서 훌륭한 영화였다. 영화는 막막한 미래와 암울한 대만의 분위기를 섬세한 필치로 훌륭하게 다뤄낸다. 예를 들어 청소년 시절의 풋풋한 이미지와 대만의 암울한 상황(지나가는 탱크, 행군하는 군대, 군복을 입은 교련 선생 등등)들을 같은 컷 안에 배치하되 문이나 버스의 차창 같은 하나의 막을 두어 분절시키는 구조를 취하여 주인공들의 청소년 드라마를 둘러 쌓고 있는 암울한 시대상을 드러낸다. 그 외에도 대만을 지배했던 일제의 유산들을 소품처럼 배치하거나, 미국 문화에 대한 동경과 막연한 탈출구로써의 도미 유학, 지식인의 사상검증과 청소년 계층의 갱스터 문화 등등 다양한 것들을 다룬다. 그것들이 산만하게 흩어지지 않고 하나의 영화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4시간의 러닝 타임이 지루하지 않고 흥미진진하다.


허나 흥미로운 점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 대한 세계적인 찬사일 것이다:분명 영화는 기법적으로 잘 만들어진 부분들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근 40년간의 대만의 계엄령 시절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의 감수성은 대단히 특수한 부분들이 있다. 그러나 눈여겨 보아야할 점은 이 영화가 대단히 특수한 감수성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깊이있게 다루었기 때문에 역으로 세계적으로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부분이 생겼다는 것이다.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에서 가장 의외인 부분은 이 영화가 기본적으로 '갱스터' 영화라는 점일 것이다. 아이들은 다른 학교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불량 서클을 만들고, 거기서 별명으로 서로를 부르면서 친밀감을 갖는다. 그러나 영화는 이를 단순한 탈선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영화속에서 아이들은 아이들의 세계에서, 어른들은 어른들의 세계에 갖혀 사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위에서 언급한 한 공간을 둘러싼 두 층위의 현실처럼 이 둘은 서로 섞이진 않지만 서로에게 어느정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부모 계층은 때로 자식 세대에게 가르침을 주거나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하지만(주인공 아버지가 주인공과 나란히 서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부모 세대는 이미 시대의 어두운 부분들(사상검증이나 변화해버린 주변 환경, 먹고 살아야하는 어른으로서의 책임 등)을 감당하기 벅찬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공백에 동년배들의 변두리 문화가 들어선다. 영화는 이들이 무대를 잡고 장사를 하거나, 미국 팝송을 부르거나, 당구를 치는 등 마치 '어른인 것마냥' 행동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장면들이 보여주는 것은 이들이 어디까지나 청소년들의 영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도 암시한다. 가장 단적인 부분들이 '폭력'에 대한 부분들이다. 영화에서 청소년 갱들이 서로를 린치하는 장면들이 나오긴 하지만, 이들의 폭력들은 대단히 부드럽다. 반대의 사례를 뽑는다면 한국의 말죽거리 잔혹사 같은 작품이 있을 것이다. 그 시대를 다루는 한국 영화의 폭력의 사실성과 극단성에 비교해본다면, 이들의 폭력은 어딘가 어설프다. 물론 그것이 점점 고조되면서 살인까지 도달하는 것이 영화의 핵심이긴 말이다.


이런 점들 때문에 영화는 갱스터 영화라는 측면에서 단순히 대만사라는 지방사에서 세계사적인 보편성과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게 되었다. 사회의 변화와 혼란, 부모세대 권위의 몰락,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대체 문화들(갱스터에서 서브컬처, 대안 집단 등등)은 세계사의 큰 흐름에서도 자주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넓은 의미에서 대체 문화는 어떻게 본다면 반항인 동시에 그 권위의 공백을 채우는 존재였다. 다른 영화 예재들을 보자. 전설적인 영화 대부는 주인공은 부모의 부도덕한 불법 비즈니스 왕국을 물려받기 싫어하는 반항아에서 왕국의 적장자로 떠오르는 이야기를 다룬다. 살아남기 위해서 뭐든지 해야 했었던 이민자 사회의 어둠과 결국 부모세대를 그대로 따라갈 수 밖에 없는 숙명론까지 대부 시리즈는 그저 범죄 영화의 교과서를 넘어서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는 공감대를 만들었다. 핵심은 각각의 지방적인 영역들(역사, 문화, 이야기, 전설 등등)에 대한 깊은 통찰은 때로는 인간에 맞닿아있는 근원적인 본질들을 건드렸기 때문에 단순히 지방이나 지엽적인 이야기를 넘어서는 번뜩임을 보여주었다.


다시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으로 돌아와보자. 영화는 그러한 시대가 갖고 있는 공백을 채워넣기 위해서 젊은 세대가 방황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디에도 갈 수 없었다:소년 갱들과의 알력이나 방황이나 이러한 이야기들은 결국 근원적인 공허를 채워넣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은 사랑에 집착한다. 하지만 그 사랑은 그가 생각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공허와 방황 끝에서 소년은 우발적으로 소녀를 살해한다. 이는 대만의 젊은 세대에 대한 은유(탈출구 없이 스스로 파멸할 수 밖에 없는)인 동시에, 섬세한 영혼을 가졌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기도 한 것이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맨(2022)은 엑스 미카나와 서던 리치 영화를 찍었던 알렉스 가랜드의 신작이다. 이야기는 간단하다:폭력적이고 가스라이팅을 하던 남편이 아내 앞에서 자살을 하고, 아내는 기분 전환을 위해 시골으로 휴양을 갔다가 초자연적인 현상을 맞이한다. 불쾌한 남성의 미소가 알려주듯이, 영화는 유해한 남성성을 소재로 한 영화다. 엑스 마키나나 어떻게 보면 서던 리치까지 여성의 관점과 이야기를 다루어내려고 한 감독의 일관성이 느껴지는 부분인데, 멘은 그것이 매우 노골적이다. 2000 ~ 2010년 이후로 수위로 떠오른 여성 혐오와 유해한 남성성,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려는 멘은 한가한 영국의 시골과 아름다운 풍광들, 고대의 이미지와 종교, 더 나아가서 문자 의미 그대로 재생산되는 남성성의 유해함을 하나로 엮으려는 야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까지 성공적이진 않다.

멘은 유해한 남성성의 그로테스크함을 드러내는데 집중하고 있다. 물론 영화는 장면마다 유해한 남성성에 대한 사례들을 충실하게 넣어두었고, 이것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감 불쾌한 느낌을 주게 만든다. 시골에 도착하는 시퀸스를 예로 들어 보자: 사과를 주워먹는 주인공을 보면서 금지된 과일이니 먹지 말라고 이야기하며 불쾌해하다가 갑자기 농담이라고 이야기하는 제프리의 모습은 기록으로 남은 가장 오래된 가스라이팅인 성경의 선악과(=사과)에 대한 이야기다. 제프리의 수동 공격성이나 은연중에 드러나는 여성에 대한 편견들 등등은 이 영화가 무엇을 다루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스토커하는 알몸의 남성의 그로테스크함, 종교적인 이야기를 들먹이며 가스라이팅을 하는 신부, 이유없이 여성에게 욕하는 소년, 스토커를 죄없이 풀어주는 경찰 등등까지 모든 것이 유해한 남성성의 전형들이다.

영화는 이러한 유해한 남성성들(소년 역을 제외하고)을 하나의 배우(제프리 역의 배우)에게 1인 다역을 맡김으로써 '결국은 하나의 남성성의 전형'에 집중한다. 이 부분은 성공적이라 할 수 있는데 다양한 아키타입들이 같은 페이스를 공유함으로 유해한 남성성이라는 분명한 이미지를 관객에게 심어주는데 성공한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보여지는 유해한 남성성의 재생산 장면은 문자의미 그대로 이 영화의 모든 내용을 집약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멘에서 눈여겨 볼 또다른 점들은 영국 시골의 자연풍광을 영상으로 잡아내는 감독의 시선이다. 멘에서 보여지는 영국 시골의 풍광은 유해한 남성성의 '역사성'을 부여한다. 폐허가 된 터널, 교회, 흐르는 구름과 밭들, 더 나아가서 석상과 흩날리는 민들레 씨앗, 썩어가는 사슴의 사체 등등을 유해한 남성성 테마 아래 하나로 엮는다. 흩날리는 민들레 씨앗을 일종의 정액과 정자의 메타포로 이용하여 사슴의 사체 새까만 눈구멍 속으로 들어가서 석조에 새겨진 고대 남성의 이미지로 이어지는 장면 등 상당히 강렬하다. 이는 감독의 전작인 서던 리치에서 보여준 강렬한 이미지를 이어받은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영화의 강점이 거기서 끝난다는 것이다. 이미지는 강렬하지만 이것을 하나로 묶는 맥락Context는 상당히 부족하다. 엑스 마키나의 예를 들어보자. 엑스 마키나는 인형의 집을 SF와 가이노이드(여성형 안드로이드)라는 아키타입, 그리고 백마 탄 왕자라는 판타지를 뒤트는데 집중한다. 영화는 여성 서사와 남성성의 유해함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그것을 너무 크게 벌리지 않고 유기적으로 잘 엮어냈다. 엑스 마키나에서 중요한 부분은 자신을 구해주려는 판타지(성적인 것과 함께)를 가진 남성을 거부하고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을 선택하는 주동적인 여성 주인공을 설정했다는 것이다. 이 주동적인 여성의 존재가 엑스 마키나의 성정치적인 맥락들(남성의 시선으로 극을 이어나가다가 반전을 맞이하는 것)을 완성하며 무기질의 영상 톤과 서사를 유기적으로 엮어낸다.

하지만 멘은 그렇지 못하다. 멘에서 여성 주인공은 유해한 남성성의 피해자이지만, 남성성의 가해에 맞서서 그 여성 주인공을 위한 서사는 마련되지 않았다. 멘에서 여성 주인공의 서사는 자살한 남편을 떨쳐내는 과정이다. 클라이맥스에서 유해한 남성성이 재생산되는 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유해한 남성성은 고대(알몸의 남성)로부터 중세(성경과 종교)로, 그리고 현대의 시스템(경찰)으로까지 이어자고, 여성에 대한 구애와 사랑, 왜곡된 관계에의 요구로 이어진다. 그것이 남성의 출산과 재생산을 거쳐서 자살한 남편으로 이어지는 장면은 그로테스크하지만 유해한 남성성이란 분명한 메세지를 제공한다. 그러나 문제는 영화가 유해한 남성성에 천착하여 그의 대척점인 여성 주인공을 단순한 피해자으로만 느껴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분명히 친구가 이야기했듯이 '그 망할 남자놈의 거시기를 도끼로 잘라주겠어'라고 한 말을 주인공이 실현 했으리라 보여지는 엔딩의 장면은 전혀 카타르시스가 느껴지지 않는다. 분명 유해한 남성성의 재생산을 보여주면서 성기 절단씬을 보여주지 않은데는 어떤 '모호성'을 엔딩에 주기 위한 감독의 복안이 있으리라 느껴지긴 하지만, 그러기에는 영화의 맥락은 풍광의 모호한 이미지들과 남성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에 묻혀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유해한 남성성의 반대편에 놓여있는 여성 주인공에 대한 서사가 강하게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점에서 멘은 샘 페킨파의 인간 혐오 영화 스트로우 독의 남성 혐오 버전이라 할 수 있다. 멘과 비슷하게 영국 시골을 배경으로 한 스트로우 독에서 샘 페킨파가 여성을 혐오하긴 했지만 남성 마초의 파괴성과 광기로 모든 것이 파괴되는 것을 다루었고, 멘 역시도 여성을 향한 남성의 유해함과 그로테스크에 맞서 여성이 남성의 성기를 도끼로 절단한다로 결론 내리기 때문이다. 다만 스트로우 독 자체가 갖고 있었던 깊은 니힐리즘이 영화의 완성도와 별개로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준것에 반해, 멘의 유해한 남성성의 재생산이란 그로테스크한 씬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 어딘가 밋밋하다. 스트로우 독이 샘 패킨파의 니힐리즘과 인간 혐오이라는 강렬한 테마에 갖고 있었던 것에 반해, 멘의 테마는 분명 그로테스크하긴 하지만 어딘가 트위터의 '핸냄저 썰 푼다 ㅡㅡ' 수준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이는 영화 멘이 결국 위에서 이야기한 주동 세력과 반동 세력 모든 것을 관통하는 중요한 테마 없이 한쪽을 향한 혐오로 구성하였기 때문이다. 엑스 마키나처럼 유해한 남성성의 대척점에 저 너머를 바라보는 희망과 비전, 혹은 그것 조차 압도하는 공허함과 분노가 있었다면 영화가 그로테스크 이상의 가치를 지닐 수 있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멘은 남성성의 그로테스크함과 기분 나쁜 부분들을 잘 다루고 있긴 하지만, 그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강렬한 이미지들과 풍광들은 존재하지만 여성 주인공의 서사를 무게감있게 다루지 않은 부분이 패착이라 할 수 있다. 서던 리치나 엑스 마키나 같은 작품들을 찍은 감독인 만큼 그 다음 작들은 기대해볼만 하지만, 이후에는 좀 더 작품에 더 먼 곳을 바라볼 수 있는 복안을 두고 작품을 만들었으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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