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다소 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마츠모토 타이요의 작품에서는 영웅이라는 테마가 중요하게 등장한다:논리와 규칙을 뛰어넘는 자로서의 영웅. 마츠모토 타이요는 어린아이가 믿을법한 동화 속 세계의 영웅들이 현실의 무서움을, 고통을 뛰어넘어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마츠모토 타이요는 그 영웅의 어두운 속성마저도 세심하게 케치해낸다. 넘버 파이브에서 파이브는 자신의 전우이자 형제였던 자들을 한명 한명 사냥해나간다. 철콘 근크리트에서 쿠로는 시로가 없는 세계에서 홀로 폭주한다. 타이요는 자칫 잘못하면 무거워지거나 복잡해지는 이야기를 특유의 흑백의 이분법적인 세계에서 세밀하게 캐치해내며, 어린이들의 발상과 상상력에 기반해서 작품을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마츠모토 타이요는 세상의 복잡한 이야기들을 유치하지만 모두가 공감할 수 있고 단순하게 다뤄내어 공감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만화가다.


그리고 유아사 마사아키는 마인드 게임과 케모노즈메, 다다미 넉장반 세계일주를 만들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애니메이션 세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한 감독이다. 그의 애니메이션은 표현과 선들이 자연스럽게 변화하며, 다른 영상 장르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애니메이션 만의 독특한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그에게 있어 이미지는 자유롭게 변화하며 모든 것들에 생명을 부여한다. 그렇기에 살아있지 않은 것에 생명을 부여한다는 의미에서 애니메이션의 어원인 Animate(강신하다, 살아 움직이게 만들다)라는 표현에 가장 적합한 감성을 가진 감독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마츠모토 타이요의 핑퐁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다고 하였을 때, 어떻게 보면 정말로 준비된 감독이 작품을 맡았다 평할 수 있었다.


핑퐁 애니메이션은 마츠모토 타이요의 핑퐁 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옮긴 작품이다. 하지만 유아사 마사아키가 만들어내는 핑퐁의 애니메이션은 그저 만화 버전의 복제라고 할 수는 없다. 흥미로운 점은 핑퐁 애니메이션은 핑퐁 만화버전의 '대척점'에 서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츠모토 타이요의 핑퐁은 전적으로 영웅은 일반적인 사람들, 우리라 할 수 없으며 영웅은 떠나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조용히 일상에 남아 날아오르는 영웅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비관론이나 열패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마츠모토 타이요는 고요히 영웅과 이를 둘러싼 사람들, 그리고 영웅이 날아오르는 과정을 담담히 서술한다. 그의 매마른 필치로 서술되는 그림들은 어딘가 황량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그 속에는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있다:타이요는 순간 순간 중요한 장면을 선의 굵기로, 동적인 필치로 감상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는 장면들을 연출한다. 마츠모토 타이요는 분명 영웅을 긍정한다. 모든 논리와 규칙을 뛰어넘는 자, 가장 필요할 때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주며 영감을 주는 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어떤 패배주의적 감상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영웅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수 없다. 그렇기에 타이요는 고요히 영웅이 없는 세계를 그려낸다. 쓸쓸한 바닷가에서 바닷가 너머의 영웅을 반추하면서 말이다.


흑백의 매마른 색조속에서 표현되는 만화 핑퐁의 세계는 애니메이션의 세계로 넘어오면서 총천연색의 새로운 맥락을 지니게 된다. 즉, 매체적 차이에서 오는 맥락의 변화로 인해 우리는 마츠모토 타이요의 핑퐁을 똑같이 애니메이션에서 재현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리고 유아사 마사아키는 그것을 정확하게 이해한다. 유아사의 위대함은 그 장르적 차이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시대의 변화(핑퐁 원작은 90년대 후반의 그려진 작품이지만, 유아사의 작품은 2010년대에 만들어졌다)를 작품에 교묘하게 접합시키며, 더 나아가 약간의 뉘앙스 차이로 마치 동전의 양면 같은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었다는 것이다. 수많은 창작자들이 원작보다 더 나은 원작을 만들겠답시고 재앙을 불러일으켰던 걸 생각한다면, 유아사의 태도는 실로 존경스럽다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유아사의 핑퐁은 기본적으로 타이요의 핑퐁과 똑같이 영웅에 대한 믿음을 공유한다. 영웅은 존재한다. 영웅은 우리가 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며 우리와 함께한다는 것을 긍정한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타이요의 핑퐁은 흑백의 세계로 이를 묘사하는데 반해서, 유아사의 핑퐁은 이를 천연색으로 묘사를 한다. 그렇기에 타이요의 핑퐁에는 없는 독특한 생기가 유아사의 핑퐁에는 흐르게 된다. 그리고 유아사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이미지와 사고의 흐름은 이를 더욱 가속시킨다. 만화의 칸들을 연상시키듯이 분절되는 시퀸스 내에서 컷을 하나하나 구성하며 독특한 리듬을 만들어내며, 탁구공과 라켓이 내는 경쾌한 소리의 리듬은 마치 작품이 살아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심어준다. 후반으로 갈수록 유아사의 핑퐁은 탁구공이 오고가는 시퀸스를 애니메이션, 아니 심지어 영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롱테이크로 만들어냄으로써 작품을 보는 감상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주게 된다.


타이요가 어딘가 메마른 감성으로 이를 묘사하는데 집중하였다면, 유아사의 총천연색 자유로운 감성이 우리에게 심어주는 것은 일종의 축제이다:유아사의 핑퐁은 핑퐁이라는 작품 자체를 거대한 축제로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현실의 메마른 논리 속에서 한 명 두 명 조용히 사라졌던 타이요의 핑퐁과 다르게 모두에게 공평하게 참여의 기회를 주려 한다. 바로 '탁구'로 하나되는 세계, 꿈과 희망이 존재하는 세계에 대해서 말이다. 재밌는 점은 타이요가 꿈과 희망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오지 않음을 긍정하는 것을 유아사 역시도 긍정한다는 것이다:결국 페코는 카자마에게 날개가 있음을 증명하였지만, 카자마은 호시노 만큼 날아오를 수 없다. 스마일 역시도 마찬가지며, 결말 역시 다른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뀐 것일까?


유아사는 총천연색의 세계와 함꼐 아주 세밀한 디테일들을 틀어버림으로써 결말의 뉘앙스를 180도 바꾸는데 성공한다. 극 중 모든 인물들은 탁구라는 매체 아래 묶여있으며, 각자의 삶을 산다. 모두가 영웅이 되진 않는다. 하지만 영웅이 꾸는 꿈을 함께 꾸며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유아사는 믿는다. 그렇기에 지나간 세월을 반추하며 다시끔 여름(페코와 스마일이 탁구 대회에 나갔던)이 온다고 이야기하는 타이요의 핑퐁과 다르게, 유아사의 핑퐁은 다시금 (축제의) 여름이 온다고 이야기한다. 장르적 특성을 십분활용함으로써 디테일을 바꿈으로써, 유아사 마사아키는 동일한 작품을 별도의 시나리오 수정 없이 완벽하게 대칭되는 작품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아니 내게 있어서 많은 부분을 시사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본인은 본인 인생에 가장 힘든 순간에 유아사 마사아키의 다다미 넉장반 세계일주를 보았고, 이를 글로 풀어낸 적이 있었다(http://leviathan.tistory.com/1501 5년전의 일이다) 그리고 직장을 다니고 있는 지금, 어떻게 글을 쓰고 컨텐츠를 소비할 것인가 고민하는 본인에게 핑퐁은 불현듯 다시 돌아왔다(물론 이걸 본 건 재작년의 일이었다...) 마치 운명처럼 말이다. 본인이나 이 글을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서브컬처는 그저 즐기고 잊어버리는 단순한 흥미거리가 아닐 것이다. 본인이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삶의 중요한 순간에 함께한 작품이 있었다는 것을, 설령 그것이 내 인생을 바꾸진 못했더라도 그 순간에 함께 하고 영감을 주었다는 점만으로 영원히 기억될 작품이 있었다는 것은 정말로 크나큰 축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비록 영웅이 될 수 없을지라도, 영웅과 함께 꿈을 꾸고 같은 것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 유아사의 핑퐁은 서브컬처의 세대라 할 수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 영원히 기억될 시대의 작품이라 평하고 싶다. 


끝으로 핑퐁 애니메이션의 오프닝과 가사를 함꼐 올리며 글을 끝내도록 하겠다.








새로운 시대가 왔는데도 바짝 쫄아서 나오려 하지 않아.
길이 너무 곧게 뻗어서 도망칠수도 없어.
선택에도 길이 없어서(명상중!)
혼자서는 뭘 하고 싶은지 알 수 없어서(망상중!)

자신과 타인을 비교해서 자기를 구석으로 몰아넣어

나는 세계에 단 한명뿐이야,
언제나 세계에 단 한명뿐이야.

그런데 하는게 좀...

나만 할 수 있는 일 같은건 없을지도 모르지만

아무것도 안 한채 사라질거야?
아무것도 안 한채 사라질거냐고?
아무것도 안 한채 사라질거 같냐고!

뭐라든! 언제든! 기분 좋은 일을 알고 싶은것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