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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위 짤방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일단 장난은 그만두고...영화 푸시는 참 뭐랄까, 모호한 작품입니다. 작품의 목표는 초능력자 배틀물인데, 정작 내용은 스릴러(?)를 지향합니다. 그리고 그 스릴러도 제대로 된 스릴러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이로인해서 영화는 하나의 구심점을 잃고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덕분에 스릴러와 배틀물 사이의 어정쩡한 위치를 차지해서, 어중간한 내용이 되어버리죠.

푸시는 크게 9종류의 초능력자가 있습니다. 미래를 보는 워쳐, 물건을 움직이는 무버, 기억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푸셔 등등...이렇게 다양한 초능력자들이 등장하고 각자의 능력을 이용해서 숨 막히는 추격전과 두뇌 싸움을 벌인다.....가 영화가 지향하는 컨셉입니다. 근데 이것이 영화 푸시의 첫 번째 실수입니다. 일단 푸시에서 나오는 9종류의 초능력자들은 죄다 어디선가 나온 능력자들이거든요. 대단히 식상한 소재일뿐더러, 이미 다른 영화에서는 소재에 대한 장르적인 깊은 고찰이 된 상태(ex.엑스멘 등)입니다. 단지 종합 선물 세트처럼 어디서 나온 놈들을 죄다 모아놓고 특수효과 좀 넣었다고 해서 재밌는 액션 영화가 만들어지는게 아니죠.

그 다음으로 영화가 포커스를 맞추는 것은 ‘과연 주인공이 워쳐에 의해 예지된대로 죽지 않고, 히로인을 구할 수 있을까?’ 입니다. 그래서 주인공들은 머리를 막 굴리죠. 어떡하면 워쳐에 의해서 결정된 예지를 고칠 수 있을까? 영화 내내 악역들은 ‘난 니네의 죽음을 알고 있지 메롱’하면서 약을 올리고, 주인공들의 행동범위도 적들의 워쳐들이나 주인공들이 예지하는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영화는 여기서 두 번째 실수를 하는데, 주인공들은 적들이 그냥 '메롱'하는걸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어떻게 하면 피할까'를 열심히 궁리를 합니다. 뭐, 궁리하는 거 까지는 좋은데, 여태까지 주사위 도박이나 하면서 양아치처럼 살아온 주인공이 어떠한 초능력자도 하지 못한 '워쳐의 예지를 깨뜨린다'라는 난제를 너무나 쉽게 해결합니다. 그냥 '워쳐의 예지는 불확정성에 의해 깨지니까, 계획을 세우고 기억을 지운다.'라는 것만으로요. 감독은 이러한 명제에 대해서 대단히 심취한 나머지 이 부분을 대단히 강조합니다. 주인공들이 적들을 속이는 부분을요. 근데 솔직히 그 부분을 보는 제 입장에서는 '알겠으니까, 극장에서 보는 보람이 있게 좀 두드려 부수고 싸우라고!'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러한 두가지 실수 덕분에 영화 푸시는 이도 저도 아닌 묘한 위치에 서게 됩니다. 초능력자물다운 능력자들의 힘겨루기나 대결도 제대로 나오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이 영화를 뭐하러 보러 가야하나요? 사실 이 영화의 가치는 다코타 패닝이 아역이 아니라 청소년의 역할을 맡은 감격스러운(?) 첫 번째 영화라는 점입니다. 뭐, 연기도 무난하게 그럭저럭 하는 편이고, 나름 귀엽다고도 할 수 있으니 다코타 패닝을 위해서 콜라와 돈을 소비할 수 있다는 열성 팬들은 보셔도 상관 없을거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푸시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덕분에 망한 작품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난뒤에 감독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군요. '제발 부탁인데, 영화를 만들면서 자기가 플롯 짜놓고 자아도취하는 짓거리 좀 하지말고 하나만 확실히 해!' 라고요.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영화 더 레슬러는 퇴물 레슬러 랜디와 그의 변두리 인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980년대 한 때 프로레슬링이 유행할 때 그는 잘 나가는 레슬러였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프로레슬링이 쇠퇴하면서 같이 퇴물이 되어버립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랜디는 심장에 문제가 오게 되고, 이를 계기로 레슬링을 관두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여태까지 자신이 살아왔던 인생을 반추하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쌓으려 합니다. 하지만 랜디는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시 링으로 돌아가고, 그의 생애 마지막 경기를 벌이게 됩니다.


이와 같이 레슬러는 구태의연한 신파물의 스토리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한 때 잘나갔지만 이제는 완전히 퇴물이 된 주인공. 그리고 그 주인공이 걸린 고칠 수 없는 병. 어릴 때 버리고 떠났던 자식. 프로레슬링의 세계 바깥에서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여인 등등...이와 같이 전형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신파적인 코드를 기저에 깔고 있다고 해서 더 레슬러가 평범한 3류 신파물이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식상한 스토리와 소재를 이용함에도 불구하고, 더 레슬러는 관객들에게 식상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쥐고 흔듭니다.


더 레슬러와 비슷한 컨셉을 가지고 있는 영화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이준익 감독의 음악 3부작(저는 패배자 3부작 이라고 부르지만)ㅡ라디오스타, 즐거운 인생, 님은 먼 곳에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신파 코드를 끌어오면서도 동시에 신파 코드 그 자체를 뛰어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신파와 인생에 대한 철학, 혹은 이들에 대한 따뜻한 감성이 근저에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태의연한 소재를 끌어오면서도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죠.


더 레슬러와 이준익 감독의 음악 3부작 사이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랜디가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철저히 소외당했다는 것입니다. 이준익 감독의 음악 3부작에서는 적어도 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일말의 희망, 일탈 같은 부분을 남겨두었지만, 더 레슬러에서 데런 아르노프스키 감독은 주인공인 랜디를 세상에서 소외시킵니다. 몇 년만에 찾은 딸과는 좋지 않게 해어지게 되고, 클럽에서 서로 좋아하던 스트리퍼 댄서와는 이어지지 못했으며, 은퇴한 뒤에 동네 샐러드 바에서 일하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 때문에 상처 받습니다. 결국 이로 인해서 랜디는 자신이 있을 곳이 링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링 위로 올라섭니다.


이러한 과정을 감독인 데런 아르노프스키는 대단히 저자극적으로 보여줍니다. 몇몇 극적인 사건들도 일말의 호들갑 없이 담담한 시점으로 보여주고 있고, 일상생활 등을 거친 핸드핼드의 카메라를 통해서 사실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는 그의 예전 작품이었던 레퀴엠(2000, 관련 리뷰는 여기)과 극단적으로 대조됩니다. 레퀴엠에서는 온갖 MTV 스타일의 자극적인 카메라 기법을 동원해서 현대 사회의 중독에 대한 고찰을 드러내었지만, 더 레슬러에서는 그러한 촬영 기법을 핸드헬드 이외에 거의 쓰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데런 아르노프스키 감독은 현실적인 영화 분위기에 랜디와 세상 사이의 간극을 드러내는 영화적인 장치를 적절하게 삽입합니다. 이는 그가 그리워하는 그의 전성기인 1980년대와 현대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면서 완성됩니다. 일례로 랜디가 자신의 이름을 딴 NES(혹은 우리나라 일본 등지에서는 FC로 알려진) 게임을 동네 꼬마를 불러서 할 때, 동네 꼬마는 콜 오브 듀티 4 이야기를 하죠. 어찌보면 80년대를 풍미했던 NES가 현재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완전히 퇴물이 된 것이고, 랜디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잘 드러냅니다. 그리고 랜디의 트레일러의 붙어있던 영 엥거스의 AC/DC 포스터와 딸의 집에 붙어있던 Vampire Weekend(2008년에 유행한 밴드 중 하나) 포스터 등등 랜디와 현재 세상의 간극을 잘 보여주는 영화적 소품이 많습니다. 그리고 미장센 또한 이러한 랜디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데 일조하죠.


그러나 감독의 적절한 연출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미키 루크의 연기입니다. 원래 주인공 역에 실베스타 스텔론이나 니콜라스 케이지를 후보로 두었지만, 결과적으로 미키 루크가 주인공으로 정해졌죠. 만약 실베스타 스텔론이나 니콜라스 케이지가 주인공을 맡았으면, 이 영화는 절대로 지금 같은 완성도를 보여주지 못할 겁니다. 한 때, 1980년대의 나인 하프 위크 등에 출연, 색스 심볼로서 느끼함과 근육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미키 루크. 하지만 1990년대 이후로는 마약과 문란한 사생활 문제로 완벽하게 망가지게 되었고, 더 이상 배우로써 재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물론 2000년대 이후로 신시티에 등장해서 배우로서 아직 살아있음을 보여주었지만, 만화적 이미지가 주된 영화인 신시티에서는 연기의 완성도를 논할 부분이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레슬러에서 미키 루크는 말 그대로 퇴물입니다. 80년대의 탄탄한 근육과 매끈한 피부, 잘생긴 얼굴, 말총머리 등 한 때 섹스 심볼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은 모두 망가져서 나옵니다. 축축 늘어진 근육과 주름 잡힌 얼굴, 푸석푸석한 머리까지, 물론 어느정도 분장은 한 것이겠지만, 보는 사람들은 '과거의 미키 루크가 망가졌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망가진 모습이야 말로 랜디 역에 어울리는(미키 루크 본인에게는 좀 미안한 이야기지만)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내에서 미키 루크는 완벽한 망가진 중년 퇴물 레슬러의 모습입니다. 그러면서 이 영화에 어울리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죠. 덤덤하게 저자극적인, 그러면서 자신의 감정이나 성격을 스크린에 서있는 것만으로 드러낼 수 있는 놀라운 경지의 연기를 보여줍니다. 이는 더 레슬러의 랜디와 미키 루크 본인이 걸어온 삶이 결과적으로 같다고 할 수 있기에, 미키 루크가 자신의 인생경험을 이입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미키 루크=랜디'의 공식은 영화의 마지막 랜디가 링 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연설을 할 때, 가장 극적으로 드러납니다. 자신이 한때 젊어서는 뭣도 모르고 설쳤고 좀 더 순탄하게 살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은 이제 완전히 퇴물이 되었고 더 이상 갈 데도 없게 되었지만 결국 링 위에서 관객들의 받은 환호를 잊지 못해 돌아온 랜디. 이는 랜디의 자기 고백이자 동시에 미키 루크의 자기 고백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분이야 말로, 이 영화의 백미이자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링 위에서 마무리를 짓기 위해서 뛰어내리는 랜디의 모습을 끝으로 스텝롤이 오르고, 브루스 스프링턴의 'The Wrestler'가 흘러나옵니다. 이 노래를 끝으로 리뷰를 마치고자 합니다.

 

Bruce Springsteen "The Wrestler" - Official Video



Have you ever seen a one trick pony in the field so happy and free?
-당신은 벌판 위에서 묘기 부리는 행복하고 자유로운 조랑말을 본 적이 있나요?
If you've ever seen a one trick pony then you've seen me
-당신이 그 묘기 부리는 조랑말을 보았다면, 당신은 나를 본 것입니다.
Have you ever seen a one-legged dog making its way down the street?
-당신이 외발인 개가 거리를 내려가는 것을 본 적 이 있습니까?
If you've ever seen a one-legged dog then you've seen me
-당신이 그 외발 개를 보았다면, 당신은 나를 본 것입니다.

Then you've seen me, I come and stand at every door
-당신은 나를 보았고, 나는 와서 모든 문 앞에 섰죠.
Then you've seen me, I always leave with less than I had before
-당신은 나를 보았고, 나는 항상 잃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Then you've seen me, bet I can make you smile when the blood, it hits the floor
-당신은 나를 보았고, 나는 내가 피투성이가 되었을 때 당신을 미소짓게 할 수 있죠.
Tell me, fan, can you ask for anything more?
-이야기해보세요, 더 이상 당신이 뭘 더 물어볼 수 있죠?
Tell me can you ask for anything more?
-이야기해보세요, 당신이 뭘 더 물어볼 수 있죠?

Have you ever seen a scarecrow filled with nothing but dust and wheat?
-당신은 먼지와 밀짚단 밖에 없는 허수아비를 본 적이 있습니까?
If you've ever seen that scarecrow then you've seen me
-당신이 그 허수아비를 보았다면, 당신은 나를 본 겁니다.
Have you ever seen a one-armed man punching at nothing but the breeze?
-당신은 항상 헛손질하는 외팔이 복서를 본적이 있습니까?
If you've ever seen a one-armed man then you've seen me
-당신이 그 외팔이를 보았다면, 당신은 나를 본 겁니다.

Then you've seen me, I come and stand at every door
-당신은 나를 보았고, 나는 와서 모든 문 앞에 섰죠.
Then you've seen me, I always leave with less than I had before
-당신은 나를 보았고, 나는 항상 잃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Then you've seen me, bet I can make you smile when the blood, it hits the floor
-당신은 나를 보았고, 나는 내가 피투성이가 되었을 때 당신을 미소짓게 할 수 있죠.
Tell me, friend, can you ask for anything more?
-이야기해보세요, 더 이상 당신이 뭘 더 물어볼 수 있죠?
Tell me can you ask for anything more?
-이야기해보세요, 당신이 뭘 더 물어볼 수 있죠?

These things that have comforted me, I drive away
-나를 안락한 것들을 모두 갖다 버렸네.
This place that is my home I cannot pay
-내 집이라 할 수 있는 이곳은 내게 더 이상 감당이 안되네.
My only faith's in the broken bones and bruises I display
-내 유일한 신념은 내가 보여주는 부러진 뼈와 멍에 있다네.

Have you ever seen a one-legged man trying to dance his way free?
-당신은 한 다리로 자유롭게 춤추려는 외다리 사나이를 본 적이 있습니까?
If you've ever seen a one-legged man then you've seen me
-당신이 그 외다리를 보았다면, 당신은 나를 본 겁니다.


덧1.아.. 가사 번역 뭔가 어색해ㅠㅠㅠㅠ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사실, '300' 감독인 잭 스나이더가 신작인 왓치맨의 메가폰을 잡았다고 들었을 때, 저는 이번작 왓치맨에 대해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왓치맨이라는 원작 자체가 대단히 다원적이고 중층적인 의미를 지닌 작품이고, 분위기 자체가 300이라는 스타일과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저번 시사회에서 원작자인 알랜 무어가 영화에 대해서 심한 불평을 늘어놓았다는 점과 메타 크리틱에서 100점 만점에 50점을 웃도는 평균도 또 다른 문제점이었습니다.

그래도 백문이불여일견. 직접 보기 전까지는 이 작품이 어떤지 알 수 없는 것이고, 국내 시사회 이후 나온 평론들도 생각보다 괜찮았기 때문에(듀나 같은 경우에는 다른 건 다 괜찮았지만, 너무 원작 그 자체를 옮겨놓아서 영화적인 맛이 떨어진다고 불평을 했죠), 오늘 친구들과 함께 용산 아이맥스 개봉 레이드를 뛰었습니다.

일단, 영화 자체는 원작에 충실합니다. 아니 풀어서 이야기를 하자면, 왓치맨이라는 중층적 의미를 가진 만화를 영화로 옮기는 과정에서 선택과 집중을 했고, 그 결과 원작을 충실히 구현해 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과정에서 원작이 가지는 묘한 느낌이나 다의성 등의 많은 장점들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적절한 선에서 원작 구현을 해내는데 성공합니다.

영화는 원작의 가장 큰 스토리 흐름을 따라갑니다. 그것은 코미디언의 죽음과 함께 시작과 함께 드러나는 음모이죠. 이러한 스토리는 '과연 슈퍼 히어로 등의 개인이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던집니다. 인간의 본성 자체가 악한데, 도대체 슈퍼 히어로가 할 수 있는게 뭔가? 영화 왓치맨은 이러한 과정을 은퇴한 히어로들(몇몇은 현역이기도 했지만)을 보여주면서 그들의 무력감과 히어로 코스튬 중독·도착증(나이트 아울과 미스 주피터가 충동적으로 히어로 코스튬을 입고 사람을 구한 뒤에 격렬한 관계를 가지는 장면, 혹은 로어셰크의 마스크 집착증 등)을 보여주고, 마지막 애드리언 바이트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도대체 우리가 한 게 뭐지?

아무 것도 없죠. 세상은 여전히 개판 5분전이고, 인간들은 도저히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슈퍼 히어로는 정부의 꼭두각시이며(닥터 맨하탄과 코미디언), 인격적으로 결함이 있으며, 절대 주류 세상에 낄 수 없습니다. 자기 인생과 모든 것을 갖다 받쳐서 세상을 구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한 거죠. 역설적이게도, 바이트는 인류의 공동의 적(원작에서는 외계인이었지만, 영화에서는 닥터 맨하탄)을 설정함으로써 인류를 공동의 적 앞에서 뭉치게 만듭니다. 아이러니한 일이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영화는 군더더기 없이 보여줍니다. 그러한 군더더기를 많이 제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2시간 40분 가까이 되는 건 원작이 좀 대단하다고도 할 수 있죠. 그래도 영화를 보는 내내 지루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영화는 잘 만들어 졌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각각의 케릭터를 살리는데는 실패합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원작에서만큼의 깊은 케릭터성을 가진 케릭터를 만드는데 실패합니다. 물론 영화는 케릭터성을 살리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충분히 합니다. 적절한 플래시백과 독백 등등 영화가 동원할 수 있는 기법들을 다 동원하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작 만화에서 보여주는 장면에 비해서는 썩 성공적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원작의 포스가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원작에서는 각각의 챕터 사이에 작품 내의 초대 나이트 아울이 쓴 자서전이나 인터뷰 자료 등을 첨부해서 이야기의 흐름과 또 다른 객관적인 시점을 만들어내고, 거기에서 케릭터의 깊이를 부여합니다. 그러한 작품내의 자료 또한 왓치맨이라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키포인트인 것이죠. 그러나 영화에서는 이를 제대로 살릴 길이 없습니다. 아예 나레이션으로 처리하거나, 뭐 영화와 다른 흐름을 지닌 이야기를 삽입을 해야하는데...이는 영화의 통일성을 해칠 수 있습니다. 또한 작품의 분위기를 살리는 이야기들-신문에 연재되는 만화나 정신과 의사 이야기 등-도 개봉버전에서는 짤렸더군요. 이 부분도 많이 아쉬웠습니다.

왓치맨은 괜찮은 영화입니다. 다만 원작이 워낙이 대단한 나머지 영화가 빛이 바랠 수밖에 없더군요. 잭 스나이더가 원작에 되도록 충실하게 하려고 많이 애를 쓴 거 같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영화 그 자체로는 그럭저럭 괜찮은 영화니 기회가 되시면 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습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안녕 소년! 난 간지 브래드라고 한다!)

에...'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오늘 친구와 함께 보고 왔습니다. 개인적인 소감으로는 참 복잡 미묘한 작품이더군요. 주된 내용은 80세의 모습으로 태어나서 점점 나이를 거꾸로 먹어가는 밴자민 버튼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밴자민 버튼의 일생 을 그려내면서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영화의 내용이죠.

사실, 영화 티저가 처음 공개되었을 때, 저는 여러 가지 의미로 많은 기대를 했었습니다. 일단 세븐, 조디악 감독인 데이빗 핀처의 신작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는 그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인생에 대한 깊은 우화가 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아쉽게도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에서는 그러한 상황 자체가 제가 기대한 것과 반대로 다가오더군요.

벤자민 버튼은 80세의 모습으로 태어났지만, 그의 정신은 평범한 사람의 정신과 똑같습니다. 나이를 역으로 먹는다는 상황을 제외 한다면요. 즉, 일반적인 사람이 나이를 먹어가는 것은 벤자민 버튼이 젊어지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그 상황에서 오는 메리트를 잃어버리고 평범한 인생 역정극이 됩니다. 비유를 하자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메멘토가 사실 정방향으로 필름을 찍은 것을 역순으로 배열해서 특이한 효과를 도출해놓은 사실을 알고, 이를 머릿속에서 다시 재편집을 해서 정방향으로 놓았을 때 슬픈 블랙 코미디 영화가 되어버리는 것 처럼요. 뭐, 이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코미디 영화라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의 상황이 가지는 특징은 그의 인생이 의외로 평범하게 진행(?)된다는 점에서 많은 부분 빛을 바랩니다.

물론 벤자민 버튼이 그가 가지는 특수한 상황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는 특수한 상황은 그에게 인생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가르쳐줍니다. 하지만 의외로 벤자민 버튼이 그의 특징으로 인해서 바깥 세상과 갈등하는 부분은 적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주변 사람들을 잘 둔 탓도 있지만, 그의 인생에 있어서 큰 사건이나 고난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의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면 대단히 축복받은 인생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그렇다고 벤자민 버튼의 인생이 그의 특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고만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늙어지는데, 자기 혼자만 젊어지는 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젊어지는 대상이 브래드 피트라는 점입니다. 사실, 이 영화에서 브래드 피트는 연기를 잘 합니다. 인생 경험이 많은 눈빛을 보여준다던가 등은 좋았는데, 이 사람이 뭘 하면 등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거 같은 느낌이 들어서 문제입니다(......) 20대를 넘어서면서(겉 나이로는 50~60), 이 사람이 옷을 입고 다니는게 완전히 어디 광고에 나올법한 이미지와 포스를 풍기면서 나오기 시작하면 '아 이거 좀 아닌데?' 싶더군요. 즉, 브레드 피트의 연기 보다는 그가 풍기는 오라가 작품에 안 어울린다는 느낌입니다. 그러니까 밴자민 버튼이 '나이를 거꾸로 먹어가는 특수한 상황에 처한 밴자민 버튼'이 아니라 '나이를 거꾸로 먹어가는 광고 선전에 나올 법한 브레드 피트'로 보여진다는 거죠(안젤리나 졸리는 '체인즐링'에서 자기 이미지를 죽이는데 성공했는데, 반성해라 브레드 피트!)

영화 내의 화면 구성이나 이미지 등은 적절합니다. 담담하고 차분하며 현실적인 분위기죠. 다만 문제는 너무 현실적이기 때문에 그의 독특한 상황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합니다. 상황도 상황인데, 좀 초현실적인 이미지나 분위기로 나가도 솔직히 좀 상관없지 않았나 싶을 정도니까요. 동화적인 부분과 현실적인 부분, 그 양쪽 경계에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묘한 위치에 서있기 때문에 이 영화는 참 보는 사람도 복잡 미묘한 느낌을 들게 만들더군요. 인생에 대한 이미지나 동화적인 느낌을 잔뜩 집어넣고 벤자민 버튼의 특수한 상황을 잘 살려서 동화적인 작품을 만든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특수한 상황이 고난과 역경이 되어서 이를 넘어서는 과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비교적 축복받은 인생을 살다간 사람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으니, 이 둘 중 하나를 기대하고 본 사람으로써는 미묘할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렇다고 영화가 완전히 망쳐졌다던가 이상한 작품이 된건 아닙니다. 영화는 '당신의 상황이 무엇이든 간에 당신의 삶을 살아라'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었겠죠.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과정이 별다른 감흥이 없게 진행되었다는 점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호불호가 극심히 갈릴 영화라고 생각은 됩니다만, 일단 저는 썩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신작인 체인질링을 보고 왔습니다. 처음에는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만, 어느 블로그에서 '밀양의 대척점에 있는 영화'라고 해서 관심이 생겼습니다. 솔직히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는 어렸을 때 본 용서받지 못할 자(The Unforgiven)의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을 제외하고는 본적이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뭐, 같이 간 가족들은 또다른 클린트 이스트우드 스타일의 영화라고 평을 합니다만, 저는 그 차분한 분위기가 좋더군요.

영화는 실종되었던 자신의 아이가 실종된지 몇달만에 다른 아이로 바뀌어져 돌아온 싱글맘 크리스틴의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영화는 주인공인 크리스틴이 자기 자식을 되찾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여타 영화들과는 달리 이 과정이 대단히 담담하게 표현됩니다. 크리스티는 대단히 극한의 상황ㅡ경찰은 그녀, 경찰에게 대들었다고 정신병원도 가고, 실종된 아들은 사실 연쇄살인범이 납치해서 죽이기 까지ㅡ에서의 감정은 담담하면서 마음에 와닿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는 '어머니 VS 온 세상'의 대립구도를 보여주는데, 온 세상이 '그 놈이 니 아들이다 or 아들은 죽었다 받아들여라'라고 어머니에게 압박을 가하지만 끝까지 굴하지 않는 내용을 보여줍니다. 어찌보면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대단히 답답한(혹은 애처로운) 상황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심정을 신파적이지 않으면서도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또다른 특징은 당연 섹시 스타 안젤리나 졸리의 연기 변신입니다. 솔직히 작년의 원티드(Wanted, 2008)를 생각하면 '이사람이 그사람인가?'라고 느껴질 정도로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진정한 1930년대의 능력있는 싱글맘의 모습이더군요. 부모님은 영화속 크리스틴 '안젤리나 졸리 많이 늙었네'라고 하셨지만, 저는 '안젤리나 졸리가 배우로서의 관록이 붙었다'라고 이야기 하고 싶군요. 영화 내에서 드러나는 배우의 오라는 단순한 분장이나 특수효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배우의 경험과 몰입에서 우러나옵니다. 체인질링에서 안젤리나 졸리는 그러한 크리스틴의 분위기를 잘 살려내었습니다. 특히 정신병원에서 겨우 나오고 난 뒤 자신의 자식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반쯤 넉이 나간 모습을 단지 버스 차장에 앉아 멍하니 앉아 있는 부분은 압권이더군요.

하여간, 대단히 좋은 작품입니다. 2시간 2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지루하지 않으면서 자극적이지 않고, 드라마도 좋으니까요. 원래 처음 미국에 나왔을 때 꽤나 악평을 들었는데, 왜 그런 평이 나왔는지 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영화관에서 이런 잔잔한 드라마를 보는 것도 나름 나쁘지 않군요 ㅎㅎ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리뷰



원래는 감상예정에 들어있지 않은 작품입니다만, 어쩌다 보니 가족 극장으로 부모님과 함께 보게 되었습니다. 이게 제가 감상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두 번째 작품(첫번째는 이스턴 프라미스)인데, 여러 가지 의미에서 대단히 충격적인 작품입니다. 당시 1980년대에 이런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에서부터 주제나 이를 표현하는 방식까지 지금 봐도 놀랍다고 할 수 있더군요.

영화는 포르노 TV 체널을 운영하고 있는 맥스가 비디오드롬이라는 스너프(실제 사람을 고문하고 죽이는 영상물)를 보게 되면서 환상을 보게 되고, 그의 인생이 어떻게 파괴되는가를 보여줍니다. 처음 주인공인 맥스가 이 스너프 프로그램인 비디오드롬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비디오드롬이 대단히 자극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모든 것이 짜여진 각본대로의 이루어지는 허구라고 봅니다. 하지만 그 후, 그가 비디오드롬이 극본이나 각본대로 연기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스너프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이렇게 이야기하죠. "왜 그런 모험을 하는거지? 가짜로 하는 것이 실제보다 덜 위험하고 비용이 덜 들잖아?"

영화 내에서 비디오드롬이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스너프가 아니라 철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철학은 바로 '더 강한 자극'입니다. 즉, 스너프라는 그 살인의 기록 자체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목적인 더 강한 자극입니다. 브라이언 오블리비언(Oblivion, 망각이라는 의미입니다.) 교수는 이를 텔레비전과 결부시켜 '텔레비전은 인간의 망막이며, 그것은 단순히 보는 것 이상이다.'라고 암시를 하죠. 그리고 TV에서 일어나는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은 오감과 다른 인간이 새로운 감각이 될 것이며 비디오드롬은 그러한 새로운 감각을 위한 자극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인간의 새로운 자극은 인간을 실제와 환상, 이 둘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들고 주어진 프로그램(테이프, 비디오드롬)에 순응하는 광신도적인 인간을 만들어 냅니다.

이러한 '더 강한 자극'은 주인공인 맥스의 신체와 기계의 결합으로 이어집니다(총과 손의 결합, 그리고 비디오와 인간의 결합) 애시당초부터 인간은 그러한 자극을 받아들이기에 적절하지 않으니, 그러한 자극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새로운 감각을 수용하는 과정입니다. 거기에 이러한 비디오를 위시한 새로운 매체들, 이것이 기술의 발전에서 왔다는 것과 인간과 기계의 이질적인 결합은 결과적 인간을 파괴할 수 밖에 없다는 크로넨버그 감독의 지론도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계와 결합한 주인공은 처음에는 베리의 명령을 따르다가, 오블리비언 교수의 딸에 의해서 프로그램이 바뀌니까 역으로 베리를 공격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결국은 기계와의 결합을 통해서 인간성이 사라지고 자극에 따라 움직이는 수동적인 인간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는 인간의 감각 기관과 정보 능력을 확장시키는 미디어라는 새로운 기계 감각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이러한 담론이 대단히 발달하였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놀라운 주제는 아니지만, 20년전 비디오라는 매체가 점점 보급되기 시작하였을 때 크로넨버그는 이러한 혜안을 가지고 기술 문명을 경계한 점은 대단히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이 무너지는 과정과 그 폭력을 자극적이지 않지만 대단히 인상깊게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아버립니다. 총에서 기계가 자라나서 주인공의 팔과 결합하는 부분, 주인공의 배에 비디오 데크가 생기는 것 등은 그런 부분을 잘 보여주는 대단히 인상깊은 장면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맥스가 스스로의 머리에 총을 겨누면서 "Long Live With New Flesh"이라 말하고 자살합니다. 결과적으로 인간성이 없어진 인간은 스스로 자멸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말입니다. 근데 그것이 지금 이 시대에도 먹힌다는 것이 더 무섭네요.


덧.글이 너무 길어지는거 같아서 그냥 갈아엎은 글입니다. 뭔가 많이 부족한듯;


 

잡담/사색의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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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s is Zodiac speaking

'조디악'(2007)은 지난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사이에 일어난 조디악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룬 영화입니다. 여기서 조디악이란 이름은 범인이 신문사에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의 이름을 조디악이라 밝혀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실제 조디악 연쇄 살인 사건은 범인이 잡히지 않은 채로 사건이 종결되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사건입니다.    

 영화 '조디악'은 이러한 실제 수사기록과 조디악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룬 책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류의 영화들은 대부분, 실제 수사 기록 등을 사용하여서 최대한 영화를 객관적으로 만들고, 그리고 그런 객관적인 사실과 사실 사이에 영화적인 상상력을 덧붙입니다. 물론 '조디악' 또한 그러한 영화 공식을 충분히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제 사건에 바탕을 둔, '조디악' 이전의 영화들과 '조디악' 사이에는 가장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과거, '조디악'과 같은 영화들은 그 사건의 연관된 사람들의 감정이나 생각을 따라가면서,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라는 영화적인 상상력을 덧붙이는 형식을 띄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살인의 추억'을 들 수가 있습니다. '살인의 추억'같은 영화는 이러한 영화 중에서 아주 잘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송강호가 가장 범인이라고 의심이 되는 용의자를 잡고 '진짜 네가 아니란 말이야?'라고 묻을 때, 관객들은 바로 그 상황에서 송강호와 같은 입장에서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조디악'은 '살인의 추억과는 정반대의 미덕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관객의 감정이입하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물론 '조디악'에서도 물론 가장 유력한 용의자(그리고 실제 사건에서도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나오고, 살인범에 대한 추리가 계속해서 나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어느것 하나도 영화 내에서는 지지 받지를 못합니다. 즉, 주인공(조디악 관련 책을 쓴 작가)이 거의 마지막에 그 사건 담당 형사에게 자신의 추리를 보여주며 '이 놈이 범인인 것 같다.'라는 순간, 형사는 곧바로 '당신 주장은 일리가 있지만, 증거가 없다'라고 반박합니다. 계속 이런식으로 누군가가 증거나 그 추리를 내고 살인 사건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라는 믿음을 등장인물과 관객이 공유하게 되는 순간, 곧바로 누군가에게 반박 당하게 되고, 현실(아직도 조디악 관련 사건이 해결되지 않았고, 사건에 관련된 정황 증거들이 불확실하다는 현실)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 결과, 관객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와 자기 자신을 동화 시킬 수 없게 되고, 영화 밖에 관찰자로서 남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동안, 사람들은 어떤 살인사건에 대한 추억을 본다기 보다는, 살인 사건에 관한 기억을 보는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게 바로 영화 '조디악'의 가장 큰 미덕이자 장점입니다. 애시당초부터 관객들에게 자신의 관점을, 생각을, 추리를 강요하지 않고 오로지 사실만을 덤덤하게 보여줄 뿐입니다.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것 같은 기분입니다. 그 결과, 관객들은 영화를 통해서 조디악 사건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디악'은 확실히 잘 만든 영화입니다. 영화를 좋아한다면, 한 번쯤 봐도 나쁘지 않을 영화입니다. 그러나 보실 때, 주의 하셔야 하는 점은 이 영화를 그냥 평범한 '스릴러'라고 보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영화라기 보다는 조디악 연쇄살인 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로서 영화를 이해하시고 보는 게, 영화를 감상하는데 크게 지장이 없을거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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