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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가렛 에드워즈 감독의 고질라 2014 감상은 여기서 확인해주시길(http://leviathan.tistory.com/1865)


2009년, 태양계에서 외계생명체의 존재가능성을 발견한 우주 탐사선이 외계 샘플을 채취해 지구로 귀화하던 중 멕시코에 추락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후 나타나기 시작한 괴생명체로 인해 나라의 절반이 감염구역으로 지정되어 격리되고. 그로부터 6년 후. 삼류 사진가 ‘앤드류’(스쿳 맥네이리)는 멕시코 인근으로 여행을 떠난 출판사 사장의 딸 ‘샘’(휘트니 에이블)을 집까지 안전하게 데려오라는 임무를 맡는다. 샘과 함께 크루즈를 타고 미국으로 오는 간단한 임무로 시작된 그들의 여정은 여권을 도둑 맞으며 크루즈에 오르지 못하고, 어떻게든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감염구역의 중심을 지나가야 하는 최악의 위기를 맞는다. 무방비 상태로 감염구역을 지나가던 그들은 ‘괴생명체’와 맞닥뜨리게 되는데…(네이버 영화)


영화 몬스터즈는 솔직하게 아주 잘 만들었다고 평하기는 힘든 영화이다:드라마는 어딘가 붕뜬것 같이 추상적이며, 극에 있어 긴장감은 없고(물론 의도한 것이라지만), 장르 영화로 보기에도 어딘가 비정형적인 면모가 강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몬스터즈는 편하게 앉아서 시간 때우기용으로 보기에는 부적합한 영화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훌륭한 영화가 아니더라도 매력적이고 흥미로우며 동시에 의미심장한 지점이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다:영화 고질라 2014의 감독으로 더 잘 알려진 가렛 에드워즈의 데뷔작인 몬스터즈는 고질라 2014에서 드러난 괴수영화에 대한 그의 독특한 미학과 접근법이 그저 맨땅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다소간의 아쉬움이 묻어나오는 이 작품은 독특한 미학 덕분에 괴수영화라는 장르영화 자체에 애정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영화라고도 볼 수 있다.


영화의 도입부 시퀸스를 보자:영화는 야간 투시 카메라로 미군들은 발키리의 비행을 콧노래로 흥얼거리다 갑작스럽게 거대한 괴수와 조우하고 교전을 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괴물과의 교전에서 밀리는 미군들이 공습 지원을 요청한 후에 철수하고 와중에 부상을 입은 민간인과 울부짖는 괴수, 그리고 미사일이 폭발하면서 '괴물들Monsters'이라는 제목이 등장한다. 이렇게 본다면 영화는 인간과 괴물들 사이의 폭력적인 갈등을 다루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90분 남짓한 러닝타임 동안 이런 격렬한 장면은 다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의 전체적인 톤은 덤덤하고 일상적이면서 동시에 기묘한 무언가에 가깝다.


그렇다면 영화가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첫번째 시퀸스의 이질성은 괴물에 대한 '상식'에 가깝다. 우리가 전쟁영화나 괴물영화에서 자주 보듯이, 전쟁이나 괴물이라는 스펙타클에 대한 전형성을 구현한 지점이 바로 첫 시퀸스라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전형적인 스펙타클이 아니다. 첫번째 시퀸스 이후, 카메라는 주인공인 사진가 앤드류에게로 초점을 돌린다. 그는 사진가다:사장의 딸인 샘에게 이야기 하듯이 그는 사진을 찍어서 생계를 유지한다. 하지만 그가 찍는 것은 괴수가 부수고 난 뒤의 '여파Aftermath'들이다. 무너진 건물과 잔해, 폐허, 그리고 아이들이나 사람들의 모습들 등등. 


영화는 앤드류의 사진처럼 영화 전반에 괴수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보다는 괴수를 감추고 일상을 보여주고자 노력을 한다. 텍시기사의 표현대로 '괴물이 오더라도 달리 갈곳이 있습니까? 여기서 살아야죠'라고 하듯이, 사람들은 괴물의 위협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면서 산다. 어찌보면 그들의 삶은 괴물 이전이나 이후나 다름없이 느껴질 정도이다: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해맑게 웃으면서 산다. 하지만 그들의 삶에서 괴물의 존재는 완전히 지워질 수 없다:격리구역을 건너기 전의 마을에서 보듯이, 거대한 철벽과 죽은 사람들의 기록들, 폐허가 된 과거의 흔적들은 그들의 이질적인 동시에 삶의 일부로 존재하고 있다. 그렇기에 몬스터즈에서 괴수는 정말로 기묘한 존재이다:직접적으로 그들이 카메라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다. 괴수의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공기 중에, 삶 중에, 사람들의 일상에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몬스터즈의 괴수는 전적으로 '타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괴물들은 도시문명을 파괴하고, 인류를 구원/파멸하기 위해서 원시의 어둠속에서 문명의 빛으로 진격하는 여타 작품들의 괴물과는 전혀 다르다. 엄밀하게 본다면 몬스터즈의 괴물들은 전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아젠다'가 없다:그들은 놀라운 크기와 경이로운 번식속도를 가진 채로 거기에 존재할 뿐이다. 그들의 존재로 인해서 인간의 삶은 완벽하게 바뀌게 된다. 가장 큰 변화는 통제불가능하고 이해불가능한 외계에서 온 타자에 대한 공포다. 인간은 그들을 막기 위해서 인류역사상 가장 거대한 방벽을, 그리고 격리구역의 건설을,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방독면'을 들고다니면서 외부의 오염에 대비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가 진정으로 인류에게 위협이 되는 것일까? 영화는 명확한 해답을 내리지 않는다.(그렇기에 영화 속의 괴수는 아젠다가 없다:타자와 함께 살아야 한다/죽여야 한다의 부재) 대신에 영화는 그것이 우리가 무조건적인 공포의 대상으로 삼기에는 우리가 이들에 대해서 너무나 모른다는 것을 암시한다:앤드류는 오랫동안 괴물들의 시체와 사람들의 일상을 찍어왔다. 하지만 그와 샘이 직접적으로 괴물을 보게 된 것은 그들의 위험천만한 귀국의 여로를 통해서 였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괴물들이 탄생하는 과정을(나무에 심어놓은 포자가 강물로 흘러들어가, 다시 그들이 태어난 장소로 돌아오는 것처럼), 그들이 갖고 있는 야생의 흉포함을(조우한 사람들을 죽여버리는 괴물, 파괴된 마을), 그리고 괴롭히지 않으면 인간에 대해서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점(밀수꾼들의 증언)을 배우게 된다. 그 이전까지 이들에게 있어서 괴물은 TV와 사진이라는 작은 프레임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리고 공기 중에만 떠돌아다니는 모호하고 추상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하지만 밀입국의 여정을 통해서 그들은 괴물이 어떤 존재임을 바라보고, 그것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직시하게 된다.


그리고 이 여정 중에 앤드류와 샘의 관계 역시 변화한다. 이들은 처음 서로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서먹한 타인의 관계에서 마지막엔 진심을 이야기할 수 있는 관계(집에 돌아가기 싫어요, 사실 샘의 이러한 감정은 영화 전반에 깔려있다. 그것이 직접적으로 발현되지 않을 뿐)로 발전한다. 그리고 이러한 화학적 변화의 촉매에는 '괴물'이 자리잡고 있다:그들의 여정 자체가 TV 스크린과 사진이라는 프레임 내부에 갇혀있던 괴물들을 실제로 만나고 목도하는 과정이었으며, 괴물과 같은 공간을 점유하는 경험을 통해서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바깥의 타자를 확인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을 한 그들이 어떻게 마지막에서 용기를 내어 서로의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되었을까? 그것은 괴물이 더이상 타자를 넘어서 이제 '경이와 신비'를 내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괴물의 빛나는 촉수가 서로를 더듬고는 어둠속으로 조용히 사라지는 신비한 장면을 통해서, 타자가 갖는 경이와 신비에 매료되고 타자(괴물들을, 그리고 샘과 앤드류는 각자를)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괴물은 공포와 함께 신비와 경이가 공존하는 존재로 화한다.


타자로서의 위험과 신비를 동시에 갖고 있는 몬스터즈의 괴물들은 고질라 2014의 미학과도 맞닿아있다:괴물들에게는 아젠다가 없으며, 그저 거기에 존재할 뿐이다. 고질라와 무토가 인간의 이해범위를 아득하게 넘어선 채로 그저 그들의 본성대로 싸울 뿐이라면, 6년전에 불현듯 지구에 나타난 이 외계생명체들 역시 그저 거기에 존재하고 생명체로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감독은 그러한 타자적 존재로서의 괴물들을 직접적인 스펙타클이 아닌 분위기와 공기중의 존재감으로서 인간에게 신비와 경이, 공포를 자아내게 만든다. 


물론 영화는 몇몇 부분에서 뚜렷한 한계를 갖는다. 드라마 측면에서 영화는 어딘가 애매모호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왜 마지막에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는지에 대한 섬세한 대사의 선택과 연기가 뒷받침 되었다면 결말 부분이 더 인상적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여지껏 다른 장르 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함을 갖고 있다. 그러한 독특함이 고질라 2014를 만들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리고 이는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게 될지 기대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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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야기




젤다의 전설은 왜 젤다의 전설인가? 이는 대단한 난제이다:젤다의 전설의 주인공은 링크이다. 게이머는 링크(이름을 정할 수 있지만 디폴트 네임은 링크이다)를 조작해서 게임을 진행하고 젤다를 구하고, 마왕 가논드로프를 무찌른다. 하지만 왜 타이틀에는 '젤다'를 먼저 내세우는가? 일단 젤다가 게임 내 세계에 있어서 중요한 축(지혜의 트라이포스의 소유자)을 담당하고 있고, 평범한 소년인 링크가 젤다와 엮이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납득이 안되는 제목은 아니다. 하지만, 젤다의 전설이라는 제목이 갖고 있는 문제는 납득이 안되는 것의 문제가 아닌 '직관적이지 않다'라는 문제이다. 대부분의 게이머들은 젤다의 전설에 나오는 초록 모자 소년이 젤다라고 착각해본 경험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이 착각은 유구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해서, 세계적인 패러디 코드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이기도 하다. 


왜 그렇다면 젤다의 전설은 젤다의 전설인가? 그것이 꼭 젤다의 전설이면 안되는 이유는 없지만, 젤다의 전설이라는 제목이 갖고 오는 해프닝을 고려해볼 때 저 제목의 센스는 뭔가 통상적인 상식에서 벗어나 있다는 느낌도 준다. 아오누마 프로듀서는 이러한 타이틀의 선정을 두고 이런 말을 한적도 있다.



아오누마 프로듀서 : 왜 유저가 조작하는 주인공은 링크인데 타이틀은 젤다의 전설인가... 정말 인터뷰를 할 때마다 듣는 질문이긴 한데요.


처음 젤다의 전설을 만든 사람이 미야모토 시게루 전무이사인데, 그 사람은 약간 심사가 꼬인 성격의 사람이라 할까요(웃음). 저도 트릭을 좋아한다고 인터뷰에서 말하긴 했는데 미야모토 전무이사는 무언가를 할 때 스트레이트하게 하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라서 어떻게든 뒤틀어서 변화를 주고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주인공이 링크인데 제목도 링크의 전설이면 그냥 게임 내용 그대로라서 재미가 없잖습니까. 하지만 링크가 주인공인데 제목이 젤다의 전설인 부분에서부터 트릭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는 편이 더 재밌잖아? 라는 생각의 결과물이 젤다의 전설이라는 타이틀이고, 지금까지도 그 타이틀은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출처:http://bbs1.ruliweb.daum.net/gaia/do/ruliweb/default/news/547/read?articleId=1234&objCate1=&bbsId=G007&searchKey=subjectNcontent&itemGroupId=&itemId=&sortKey=depth&searchValue=%EC%A0%A4%EB%8B%A4%EC%9D%98&platformId=&pageIndex=1)




어떻게 본다면, 한 천재의 괴팍한 호승심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미야모토 시게루는 닌텐도를 이끌고 있는 살아있는 전설 중의 한명으로서 개발이 상당히 진척된 게임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뒤집어 엎어서 다시 만든다는 밥상뒤집기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새벽 2시에 벌떡 일어나서 팀원들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으니 회사로 집합하라'라고 이야기하는 괴짜기도 하다(어떻게 보면 최악의 상사일지도) 그런 그라면, 링크가 주인공이라도 젤다가 주인공인 것처럼 게임의 제목에 장난질을 친것이라 본다 해도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조금 다르게 접근하고자 한다. 익히 알려진대로, 젤다의 시간축은 시간의 오카리나를 기점으로 크게 3개로 나뉘어진다:시간의 오카리나의 링크, 통칭 시공의 용자가 마왕 가논드로프를 쓰러뜨렸으나 가논이 다시 부활했을 때 돌아오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대현자들이 물속에 세계를 가라앉힌 바람의 텍트의 시간대, 시공의 용자가 다시 미래로 돌아온 뒤에 하이랄에 평화가 찾아온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는 황혼의 공주 시간대, 아예 시공의 용자가  패배한 신들의 트라이포스 시간대. 공식 설정집인 하이랄 히스토리아가 나오기 전까지 젤다의 전설 시리즈의 순서는 항상 팬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였다. 하지만, 정답은 생겼지만 여전히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다:왜 세계는 두개도 아니고 3가지의 시간대로 쪼개져버린 것일까? 테마만 공유하는 각기 다른 이야기라고 분절시키면 되는데 왜 '만약에'라는 요소를 굳이 강조해서 거대한 하나의 이야기 안에 충돌되는 다양한 작품들을 우겨넣으려 했을까?


의문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모든 젤다의 전설은 각기 각자만의 고유한 그래픽 테마를 갖고 있다. 바람의 텍트는 고양이 눈 젤다라는 독특한 그래픽 스타일을 정립시켰다. 하지만 황혼의 공주에서는 이러한 카툰 스타일의 그래픽을 집어던지고 디테일하고 어두운 분위기의 그래픽으로 바꾸었다. 그렇기에 한 때는 젤다의 전설을 '바람의 텍트류-툰 젤다'와 '황혼의 공주류-리얼 젤다'로 분류하기도 했었다:스카이워드 소드가 나오기 전까지는. 이제는 스카이워드 소드와 함께 신들의 트라이포스 2 가 나오면서 사실상 저 이원화된 구분도 폐기된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그래픽 스타일로 젤다를 구분하는 방법론에서 특기할만한 부분은 프랜차이즈 내에서도 게임은 '다양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라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사실 하나의 프랜차이즈에 다양한 면모와 정체성을 갖는 것은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콜옵 시리즈도 블랙옵스-모던워페어-어드밴스드 워페어로 3가지의 정체성이 서로 교차 반복되기도 한다. 하지만, 콜옵 시리즈처럼 과격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것도 세 회사가 번갈아가면서 게임을 만들기에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젤다의 전설은 하나의 디렉터가 하나의 팀을 감독해서 일사분란하게 만드는 게임이라 할 수 있다:이 게임은 그때 그때 유행이나 트렌드를 따라서 만든다고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나 역사와 전통이 오래된 게임이다.


이러한 일련의 분열적인 젤다의 전설의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이렇게 접근해보자:젤다의 전설이라는 게임의 핵심은 바로 '모험'의 경험과 감각을 구현하는 것이다.(관련 내용은 여기에서 확인해주시기 바란다. 본인의 바람의 텍트 리뷰) 그리고 모든 모험의 이야기들은 비슷한 공통 요소들을 보유한다:주인공이 있고 극복해야할 시련이 있으며, 그리고 그들은 전설이 된다. 젤다의 전설 역시 마찬가지이며, 이 프랜차이즈에 있어 이야기란 모험이라는 프랜차이즈의 핵심 키워드를 구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큰 밑바탕에 가깝다:젤다의 전설은 이야기에 있어서 기본 모티브가 동일하다. 주인공은 초록색 모자를 쓴 링크고, 젤다는 공주고, 가논은 마왕이다. 복잡한 반전이나 플롯의 전개가 없는 것도 어떻게 보면 젤다의 전설 시리즈의 전통이라 할 수 있다(물론 그 전통을 어겨서 반전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리고 이러한 전통을 통해서, 게이머는 수십년 된 프랜차이즈의 전통과 함께 모험을 떠나게 된다.


아오누마는 하이랄 히스토리아 말미에 '무엇을 플래이할 것인가'를 최우선에 둔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기에 게임의 스토리와 분위기가 그때그때 상황 따라서 달라진다고도 볼 수 있지만, 모험이 젤다의 전설에서 핵심이라면 이렇게도 접근할 수 있다:모든 모험 이야기는 똑같이 구술될 수 없다. 세계를 구하는 용자 링크라도, 바람을 거슬러서 바다를 항해하는 링크와 빛-그림자를 오가는 링크가 똑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탁월한 이야기꾼이라면 각기 다른 형태로 진행되는 모험의 이야기들을 똑같은 톤으로 서술하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거칠고 잔인하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탁월한 이야기꾼의 재능이다. 젤다의 전설이 게임 플래이에 따라서 그래픽과 분위기를 바꾸는 것은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젤다의 전설의 역사개변 같은 경우에는 개발자 편의주의적인 부분으로도 볼 수 있다:실제 하이랄 히스토리아 발간 이전 닌텐도 파워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미야모토 시게루는 지금과는 다른, 어떤 의미에서 지금과도 맥이 닿아있지만, 연대기를 정설로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오히려 이렇게 각 게임마다 각기 다른 이야기와 모험을 다루어내는 것이 젤다의 전설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작품들이 큰 프랜차이즈 아래서 통합적이라기 보다는 분열적으로 내비치는 것이 정상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닌텐도가 이러한 분열적인 작품들을 하나의 시간대 안에 통합시키고자 한 것, IF라는 요소를 무리하게 끌어들이면서 작품에게 통합적인 성격을 부여하려 한 것은 그것이 가져다 주는 설명보다도 '왜 이렇게 복잡하게라도 정리를 하려 하는가?'라는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공통된 역사와 시열대를 추구하는 것은, 게이머-링크라는 수평적인 관계뿐만 아니라 게이머와 프랜차이즈 사이의 유대감을 공고하게 하려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앞서서 이야기한 것처럼 젤다의 전설의 핵심은 모험 그 자체이다. 그리고 이 모험은 1986년 젤다의 전설 첫 작품이 나온 이후 근 30년 가까이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다. 1961년 최초의 비디오 게임 스페이스 워 이래로 비디오 게임은 약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대중에게 사랑받고 있으며, 젤다의 전설은 그중 절반 이상을 함께 해온 역사적인 작품인 것이다. 그러한 역사가 오로지 게임 바깥에서만 존재한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그렇기에 그 경험의 일부로서, 게이머가 현재하고 있는 이 모험이 과거의 모험으로부터 계승되었으며, 훗날의 모험으로도 이어지는 감각을 주고자 무리하게 게임의 역사를 하나의 시열대에 통합시키려 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왜 링크가 주인공인데 젤다의 전설일까? 우리는 이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젤다의 전설에서 링크는 주인공의 디폴트 네임, 즉 이름을 정하지 않았을 때 자동으로 정해지는 이름인 것이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링크는 수많은 녹색 용자들 중의 한 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링크에게 각자의 이름을 붙이며(혹은 짖궂은 사람은 진짜 '젤다'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링크Link라는 이름의 어원 자체도 '이어준다'라는 의미이기에 이를 통해 링크가 게이머와 하이랄을 잇는 가교의 역할을 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어떻게 본다면 기본적으로 무색무취를 지향하는 링크라는 인물보다도 게이머에게 더 인상적으로 다가올 것은 하이랄이라는 세계, 그리고 모험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젤다'라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게이머에게 있어서 독자적인 '링크'라는 인물을 내새우기 보다는 모험의 시작이자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젤다를 내새우는 것, 그렇기에 '젤다로부터/로 인해 시작되는 이야기=젤다의 전설'이란 제목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잡담



아파서 뻗어있었습니다 ㅠ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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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깊은 물을 솥의 물이 끓음 같게 하며 바다를 기름병 같이 다루는도다.

그것의 뒤에서 빛나는 물줄기가 나오니 그는 깊은 바다를 백발로 만드는구나.

세상에는 그것과 비할 것이 없으니 그것은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지음 받았구나.


-욥기 41:31 에서 33






〈리바이어던〉은 황홀하고 생생한 다큐멘터리로 당신을 상업화된 어업의 위험한 세계로 깊숙이 데려갈 것이다. 제작자들은 뉴 잉글랜드의 해안 – 허먼 멜빌의 『백경』 에 영감을 주었던 장소 – 의 예측불허의 파도 속을 항해하는 거대한 어선에 동승하여, 어부들의 거칠고 힘든 세계를 무시무시하면서 동시에 아름답게 포착했다. [제5회 DMZ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


레비아탄은 구약성서 욥기에 나오는 거대한 바다 괴수를 의미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성서의 악마들이나 괴수가 그러하듯이, 레비아탄 역시 성서 이전의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 레비아탄은 기원전 19세기에서 12세기 사이에 존재했었다고 알려진 우가라트 왕국의 신화에 나오는 존재로서, 바알신에 의해서 격퇴당하는 존재로서 그려진다. 유대교와 기독교가 지금까지도 존재하는 현대적인 종교의 표본으로 볼 수 있다면, 레비아탄이나 베헤모스 같은 존재들은 근대적 종교(물론 근대적이라 해도 2000년 이상 되었지만) 이전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그것은 인간이 인격신을 섬기기 전에, 인간 내부에 내재된 폭력과 동물의 형태가 서로 결합한 성스러운 존재, 자연에 매료된 인간이 만들어낸 원시적 신앙의 잔재인 '괴물'인 것이다.


(http://leviathan.tistory.com/1845 에서 괴물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간략하게 기록해두었다)


다큐멘터리 레비아탄 역시 이러한 미학에 기원을 두고 있다. 즉, 영화가 구현하고자 하는 것은 '문명 이전의 원시적 삶의 아름다움'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는 어떠한 설명없이 담담하게 바다 위에서 어부들이 물고기를 잡고 손질하는 과정을 약 90분 동안 그려낸다. 그러나 레비아탄은 그 90분 동안 어떠한 메세지도 전달하려 하지 않으면서도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데 성공한다:출렁거리는 바다와 황홀한 어둠, 물소리와 피에 물든 물거품, 그리고 갈매기 때들까지. 레비아탄은 영상과 미학적으로 놀라운 쾌거이며, 관객들에게 원시의 황홀함을 선사하는 아름다운 다큐멘터리라 할 수 있다.


레비아탄이 어떤 쾌거를 거두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장르적'으로 그나마 유사한 작품과 비교해보아야 할 것이다. 디스커버리 채널의 유명한 프로그램인 '생명을 건 포획Deadliest Catch'은 대게잡이 어선과 그 선원들의 삶을 그려낸 프로그램으로서 디스커버리 채널의 간판 프로그램 중 하나이다. 어떻게 본다면, 바다위에서 일어나는 조업활동을 다룬다는 측면에서 레비아탄과 생명을 건 포획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둘이 도달하고 있는 결론은 완벽하게 다르다:생명을 건 포획은 전적으로 '인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게나 바다의 문제가 아니라, 그 위에서 웃고 울고 하는 선원들의 이야기가 중요하게 그려진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이야기는 바다라는 공간보다는 배 위에서 일어나는 '드라마'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레비아탄은 생명을 건 포획과는 완벽하게 다르다:레비아탄에게 있어서 인간의 '드라마'는 완벽하게 거세된다. 어부들은 침묵 또는 꼭 필요한 정도의 말만 하며, 그들이 누구인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등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은 영화 내에서 전혀 다뤄지지 않는다. 또한 영화는 배 위뿐만 아니라 배 주변의 바다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도 많은 초점을 맞추며, 갑판 위에서부터 갑판 바닥, 크레인까지 다양한 각도로 바다와 조업활동을 다뤄낸다. 인간이 중심이 되었던 생명을 건 포획과는 다르게 레비아탄은 조업활동과 바다라는 거대하고 포괄적인 세계를 그려내고자 한다.


재밌는 점은 레비아탄에 대해서 사람들이 느끼는 일종의 '거북함'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부정할 수 없다:생선 손질을 할 때 잘려나가는 생선의 머리와 무자비함까지 느껴질 정도로 세토막 나는 홍어(라고 생각된다)의 모습들, 그리고 손질된 생선을 바다로 흘려보낼 때의 핏물과 다양한 부유물들, 죽어가는 생선의 모습들 등등 레비아탄은 사람들이 거북하게 느낄만한 장면들을 어떠한 안전장치도 없이 쏘아보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가학성으로는 이어지지 않는다:가학성이란 누군가를 가해하겠다는 의도가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레비아탄에 있어서 그런 의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껴진다:피비린내 나는 잔혹한 장면 다음에는 물소리와 고요함, 그리고 리드미컬한 움직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접근할 수도 있다. 레비아탄이 보여주는 바다는 생명력이 과잉으로 넘치고 꿈틀거리는 공간이다. 그로테스크함을 '에너지가 과잉으로 흘러넘치는 모습'이라고 누군가는 정의내리기도 하였다. 레비아탄의 바다는 리드미컬한 바다의 움직임과 함께 배 위에서 일어나는 죽음과 삶, 그것이 바다라는 공간에서 아우러질 때의 황홀한 아름다움을 한꺼번에 포착한다:이러한 것이 가장 극대화된 순간이 바로 생선을 손질한 부속물과 핏물이 바다로 버려질 때, 바다가 선홍색으로 물드는 동시에 수면 바깥으로 언뜻 무수히 많은 갈메기 때들이 잡히는 장면이다. 죽음과 생명이 바다라는 장소에서 무심하게 어우러지며, 이 압도적인 아름다움은 원시 인류가 매료되었던 원시적인 괴물과 자연의 이미지에 맥이 닿아있다고도 볼 수 있다. 레비아탄에 있어서 바다와 물은 모든 것이 한 곳에서 만나는 공간이자 매게체이며, 인간이 원시적 황홀함을 느끼는 미학적 공간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를 아름답게 구현함으로서 관객에게 충격적이고도 놀라운 감정을 제공하는데 성공한다.


또한 레비아탄이 드러내고 있는 재밌는 부분은 바로 다큐멘터리가 촬영되는 방식일 것이다. 어떤 영화든 영화를 찍는 '촬영자'의 존재는 관찰당하는 피사체의 움직임을 변화하게 만든다. 앞서 언급한 생명을 건 포획으로 돌아가 보자. 물론 이 프로그램이 레비아탄과 지향하는 바가 정반대라는 것은 앞서 밝혔지만, 여기서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촬영자와 피사체 사이의 관계이다:이 프로그램에서 선원들은 끊임없이 조업 활동에 대한 자신의 코멘트와 함께, 인간적인 감정, 희노애락을 지속적으로 드러낸다. 촬영자와 피사체 사이의 이 끈끈한 유대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기 위한 프로그램의 취지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카메라를 의식하고 만들어진 '꾸며진 리얼리즘'이라는 측면에서 소위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갖고 있는 선정성과 한계를 갖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레비아탄은 다르다:이 다큐멘터리에서 피사체들은 카메라를 신경쓰지 않는다. 오히려 카메라를 들고 있는(아마도 머리에 헤드셋 형태로 붙인 카메라라 추정된다) 사람마저도 조업활동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카메라가 선원들의 얼굴을 극단적으로 클로즈업 하는 순간에도 선원들은 당혹스러워하거나 카메라를 의식하는 행동을 보여주지 않는다. 레비아탄에서 카메라는 바다위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조업활동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그것은 '카메라를 의식하고 현장감을 연기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정반대로 카메라 자체가 없다는 듯이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는 촬영자가 피사체의 삶에 놀라울 정도로 동화되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레비아탄이 촬영되는 카메라의 앵글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새로운 각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영화에 있어서 인간은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만큼 주제로부터 자유로워져서 다양한 곳에서 카메라를 설치하고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순하게 그런 주제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을 넘어서, 몇몇 장면들은 정말이지 절묘한 타이밍에 촬영되었다. 이는 제작자들이 자신이 촬영하고자 하는 대상과 주제에 대해서 깊은 탐구를 하고 고민을 하였기에, 의도적으로 카메라를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설치하고 기록하였기에 가능한 것이라 보아야 한다. 즉, 레비아탄의 이 원시적이고도 아름다운 세계는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재발견되었다'라는 표현이 적확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레비아탄은 놀라운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바다와 어둠, 리드미컬한 바다의 움직임, 삶과 죽음이 어우러지는 황홀함 등의 이미지를 재발견하여 하나의 영상으로 묶어내었다. 어떤 의미에서 레비아탄은 훌륭한 시에 비유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영화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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