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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습니다.


인간의 과학적 오만이 잉태한 두려운 미래가 다가온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존재로부터 인류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일찍이 멋진 신세계의 저자, 올더스 헉슬리는 그의 멋진 신세계 1947년판 서문에 놓고 이러한 아쉬움을 표출했다:세계는 핵의 시대로 이행하였으며, 그리고 나는 과학의 이러한 파괴적이면서 경이로운 힘을 소설에 넣지 않은것이 아쉽다고 생각한다, 라고.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이 떨어진 이후로 인류에게 있어 핵은 그야말로 '신의 힘' 그 자체였다. 핵은 전세계를 파괴할 수 있는 재앙적인 힘(핵무기, ICBM 등)인 동시에, 인류에게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약속하는 기적적인 힘(원자력 발전)이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원자력이라는 기적과 재앙이 합쳐진 전지전능한 힘이 '태양의 힘이 내 손안에 있도다'(닥터 옥토퍼스, 스파이더맨 2, 물론 이 경우에는 핵융합이지만)라는 인류의 자만과 합쳐서 현대사는 핵이라는 힘의 남용을 불러일으켰고, 그 결과 우리는 만드는 힘이든 파괴하는 힘이든, 넘치는 힘에 둘러싸여 까닥 잘못하면 파멸할 수 있는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체르노빌 사태, 스리마일 원전 사태, 도호쿠 쓰나미 및 후쿠시마 원전 사태 등등. 이러한 위협들은 우리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져준다. 과연, 우리가 핵을 통제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라고 믿고 있는 것일까?


원작 쇼와 고지라가 출발하는 것은 바로 이 핵에 대한 공포였다:핵폭탄을 직접 맞은 핵에 대한 일본인의 공포와 통제할 수 없는 과학에 대한 공포(옥시젼 디스트로이어를 만들고는 그 힘에 경악하며 끝내는 자살하는 세라자와 박사라던가)가 묻어나오는 작품이었다. 이후에 다양한 시리즈의 전개와 함께 고지라는 다양한 케릭터성을 갖게 되었지만, 고지라 시리즈의 본질이자 원천은 '핵이라는 힘에 대한 공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 그것이 인간이 손에 들고 보아라, 이것이 바로 태양의 힘이다! 라고 외치지만 그것이 손을 벗어났을 때의 무력감과 재앙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참치를 쳐묵하며 인류와 참치 생태계 존망을 놓고 자웅을 겨루던 롤랜드 에머리히의 고질라(1998)와 다르게, 올해의 고질라(2014)는 바로 그 지점에서 고지라가 가졌던 공포와 헐리웃 블록버스터의 문법을 결합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아쉽게도, 본인은 참치먹는 고지라를 제외하면, 쇼와 고지라 원판도 보지 못했다:그렇기에 이 감상글은 필연적으로 한계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그점에 있어서 읽는 분들께 양해를 구한다.)


고지라 분석에 앞서서, 먼저 이 영화에 걸맞는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도대체 괴수, 괴물이란 무엇인가? 일찍이 바타이유는 인간과 동물의 구분을 두고 독특한 논리의 이론을 전개하였다. 인류는 노동을 통해서 동물과 구분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의 육체성은 여전히 동물에 사로잡혀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폭력에 대한 충동과 성욕, 식욕에 시달리며 이것은 인류가 노동을 통해 쌓아올린 질서를 위협한다. 그렇기에 인류는 금기를 통해서 이러한 동물적인 욕구, '폭력'(무질서한 힘의 분출)을 통제하려 한다. 하지만 동물은 다르다:동물은 어디서든지 섹스를 하며, 사냥을 하고, 폭력을 행사한다. 하지만 구시대의 인류들은 동물들 역시 인간을 옭아메고 있는 금기를 이해하지 못할리 없다고 보고, 금기의 제한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나드는 동물을 '신성한' 존재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서 괴물은 탄생한다:동물에게 있어 폭력이 하나의 삶의 방식이었다면, 인간의 상상력으로 탄생한 괴물에게 있어 폭력은 존재양식이자 하나의 은유이다. 인간과 동물 사이의 그로테스크한 결합(미노타우르스 같은)이나 생명력의 과도한 분출(머리를 자르면 또다른 머리가 솟아나오는 히드라 같은)의 형태로, 동물의 신성함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하여 자연적인 동물의 모습을 벗어난, 무질서한 힘의 표출인 '폭력'을 행사하기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정향진화한 존재들이 바로 '괴물'들이었다. 그리고 이 괴물들은 종교가, 영웅이 이 세계에 질서를 가져오기 전의 세계를 지배하는 '신'이었다. 이 신들은 질서가 잡히기 전의 인류가 이해하지 못했던 세계, 그 자체였으며 이 신들은 인류와 함께 세계를 거닐었고 경외의 대상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질서가 괴물을 대체한다:아도르노는 영웅의 모험(오딧세이아)을 통해서 영웅이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가져온다고 보았으며, 보들리야르는 영웅이 죽인 괴물의 피에서부터 문명이 솟아나온다고 보았다. 


(이푸 투안의 토포필리아에 따르면, 가장 민감한 오감을 가졌던 인디언들도 '존재할리 없는' 괴물을 인지했었다고 한다:물론,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문화'에 의해서 인식이 재구축되며 없는 것을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문화의 힘은 강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찌본다면 실제적으로도 고대의 인간들은 '괴물'과 함께 살았을지도 모른다:실존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인식범위 내에서 그 괴물은 실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명이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괴물을 그리워한다:킹콩(2005)를 보자. 문명화된 인간이 가지지 못하는 문명 이전의 '마지막 순수성'의 상징으로서 킹콩은 문명으로부터 온 여인과 순수한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최후의 괴물, 최후의 야만인이라는 고귀한 지위를 차지했던 킹콩은 문명의 정점인 뉴욕으로 끌려와서 조롱거리가 되고 결국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서 문명의 손에 의해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괴물은 파괴적인 무질서이며, 문명은 질서에 의해서 만들어진 존재이기에 그 둘이 한 공간에서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아바타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인간이 점점 태초의 무질서함을 향해서 그리움을 표출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다양한 형태의 '괴물'과 생태계의 형태로 드러나는 것은 인류가 문명에 대해서 느끼는 피로감과 문명이 만들어내는 광기에 대한 좌절감이 드러나는 지점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고질라(2014) 역시 바로 문명에 대한 피로감과 광기(과연 우리가 핵이 불러온 이 괴물들을 통제하고 막을 수 있는가? 극중 핵으로 등장한 위협을 핵폭탄으로 다뤄내려는 인류의 오만함 등등)에서 시작한다:하지만 고질라가 자연으로 회귀할 것을 요구하는 수많은 유사 귀농(?) 영화와 다른 점은, 괴물과 인간 사이에 있어서 유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괴물들은 거대한 재앙이라는 것이다. 고지라와 무토는 인류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그래왔고, 영화가 진행되는 그 시점에서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존재들이다. 원판 쇼와 고지라가 인간의 과오, 핵실험을 통해서 만들어진 존재였다면 2014년의 고질라와 무토는 자연의 일부이자 핵분열에 대한 자연의 매카니즘으로서 인간의 이해범위를 아득하게 능가해버린다. 하지만 2014년판 고지라와 무토, 그리고 기존의 고지라 시리즈들이(참치먹는 고질라까지 포함해서) 갖는 공통점은 바로 '핵'이라는 키워드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고지라 시리즈는 그 자체야말로 원자력 시대의 '신화'이다:인류는 핵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1945년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및 수많은 원자력 관련 사건들로 불가능한 것으로 증명되었으며, 핵 그자체는 하나의 '괴물'이 되었다. 그리고 생명력이 폭발할듯한 원자력의 이미지로부터, 고지라들이 탄생하였다:특히 2014년판의 경우, 핵의 광기넘치는 생명력의 분출(방사능 오염과 그것의 지속시간)을 먹어치우며 번식하는 '무토'의 존재와 그러한 광기 넘치는 생명력에도 불구하고 수만년의 세월에 걸쳐서 스스로 자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연의 대변자 '고지라'의 존재가 갈라져나온 것이다. 물론, 왜 고지라가 무토를 사냥하는가? 라는 지점에서 영화는 다소 작위적인 지점(그들, 자연의 자정작용과 광기넘치는 핵 에너지가 싸우게 내버려두어라Let them fight)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무토-고지라, 핵의 광기와 자연의 자정작용의 사이에서 인류는 무기력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핵을 둘러싼 두 힘의 격돌, 무토와 고지라를 두고 인류가 취하는 경외와 공포, 핵이 우리를 파괴할 수 있다는 공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그런 광기넘치는 핵의 에너지를 억제하고 있다는 경외가 격돌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고지라의 문법을 헐리웃 영화의 문법에 접목시킨다:영화의 러닝타임 도중, 관객은 보통의 헐리웃 영화에서는 접하지 못할 당혹스러운 두 시퀸스를 만나게 된다. 첫번째는 하와이에서 수컷 무토와 고지라가 처음으로 대면하는 장면이며, 두번째는 고지라와 무토 한 쌍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재격돌하는 장면일 것이다. 첫번째 장면은 고지라의 포효와 함께, 곧바로 주인공의 아들이 고지라와 무토가 싸우고 있는 장면을 TV로 촬영한 것을 보고 있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두번째 장면에선,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한 고지라가 무토와 격돌하는 순간, 주인공 아내가 공포에 질린 눈으로 그들을 올려다보는 그 순간에서 쉘터의 문이 닫히면서 전투 시퀸스 자체를 끊어버린다. 만약 이것이 일반적인 헐리웃 영화였다면, 이 둘의 싸움을 근거리에서 잡아내어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었을 것이다:이미 퍼시픽 림에서 괴수와 거대로봇의 격돌이라는 점으로 서브컬처와 헐리웃 영화의 문법이 서로 아름답게 융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고지라는 충분히 좋은 선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부함으로서, 뭔가 다른 노림수가 있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영화는 그러한 의도적인 끊기와 함께 파괴된 현장을 보여주는 것과 괴수의 전체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자연재해가 휩쓸고 지나간것처럼 인류가 쌓아올린 문명이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장면들과 함께, 하나의 카메라 내에 담아내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괴수'를 묘사하고 싶은 것처럼 보이는 연출들은 위에서 이야기한 기묘한 시퀸스 끊기와 함께 독특한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또한 고지라의 카메라 동선은 기존의 비슷한 영화들(클로버필드나 퍼시픽 림, 우주전쟁 같은)과 다르다. 기존의 헐리웃의 괴수물은 재난을 하나의 스펙타클로 만들어낸다:카메라의 동선은 위협당하는 인물들을 따라 아슬아슬하게 전개하지만, 그러한 아슬아슬한 위험들에서 드러나는 넘쳐나는 정보량을 관객에게 상황이 이해할 수 있게끔, 그리고 분명하게 빠져나가겠지만 영화속의 인물과 함께 아슬아슬함을 느낄 수 있게끔 만드는 것이 우선 목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고지라는 그런 '아슬아슬한' 감각마저도 거부한다.(물론 그것이 영화가 노리는 바와 절충되지 못해서, 영화를 붕떠버리게 만드는 문제를 만든다:이는 후술하겠다)


영화의 이 기묘한 지점들은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다음과 같은 시점의 특징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고지라와 무토를 바라보는 시선이 고지라와 무토의 '키높이'나 그들의 움직임을 가장 역동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신체부위(꼬리나 날개 같은), 혹은 이 모든 싸움을 느긋하고 화려하게 조망할 수 있는 시점이 아닌, '인간'의 시점에서 올려다보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물론 높은 곳에서 조망하는 시점도 존재하지 않느냐, 라고 반문하실 분도 있겠지만 그것은 비행기, 헬기 같은 장소에서 내려다보는 것이며, 이마저도 '한 장면에 다 들어오지 못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무토, 특히 고지라의 전체 모습을 한번에 조망할 수 없다. 고지라와 무토가 휘두르는 무지막지한 폭력앞에서 인간은 왜소할 뿐이며, 모든 고지라와 무토의 관측 장면은 항상 주변의 '인간을 포함'함으로서 인간을 넘어선 보편부당한 카메라의 시점이 아닌, 왜소한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핵과 자연의 충돌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경이적인 폭력의 분출을 목도하는 형식이 된다.


그렇기에, 카메라가 다루어내고자 하는 고지라와 무토의 이미지는 문명 이전의 신들, 신화속의 괴물들의 이미지와 흡사하다:그것은 통제할 수 없는 원자력 에너지의 분출이자 인간이 경외시하며 두려움에 가득찬 눈으로 바라보는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올려다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원자력이라는 신화적인 이미지, 통제할 수 없는 에너지와 결합하면서 인류문명이 통제할 수 없는 기록조차 희미한 신화 이전의 괴물들 불러일으켰다는 공포와 절망감, 그리고 인류는 이해할 수 없는 자연의 자정작용(고지라)과 핵의 파괴성(무토)이 격돌하는 자연의 섭리를 목도하는 경외감이 극을 지배한다. 이는 괴물은 문명에 의해서 몰락할 수 밖에 없다고 하거나 우리가 지향해야하는 방향이란 야만적인 문명이 아닌 고귀한 괴물들의 이미지라고 선언하는 대중문화의 서사와 다르게, 고질라 2014년 판에서는 문명은 이 괴물들을 막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는 '겸손함'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경외감과 공포, 겸손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영화를 기존의 고질라 시리즈의 문법을 헐리웃 스케일에 접목시켜서 진지한 형태로 구현한다:이것은 그렇기에 퍼시픽 림과는 상극에 있는 영화다. 물론 두 영화 모두 과거의 서브컬처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서브컬처의 클리셰와 미학을 가벼운 것으로 만들어서 데자뷰를 불러일으키는 영화를 만드는데 집중한 퍼시픽림과 다르게, 고질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고지라 시리즈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영화에 접목시키고자 한다.


이로써, 앞서 이야기한 두 시퀸스의 기묘함이 설명이 된다:첫번째 장면에서, 고지라와 수컷 무토의 첫만남을 매스미디어의 형식으로 스쳐지나가듯이 묘사한 것은 이 둘의 전설적인 첫 등장에 대한 하나의 이야기로 묘사하는 지점이라 볼 수 있다. 전설이 탄생하는 순간, 그 전설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전파된다. 이 경우에 있어서, 이 둘의 만남이 처음으로 대중에게 알려지며(그전까지 무토나 고지라의 존재는 극비였다), 대중는 그들을 경외와 공포로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두번째 장면이야말로 고질라 2014 버전의 미학을 압축하는 백미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들이 분출하는 폭력을 피하기 위해서 인간이 쉘터로 숨어들 때, 고지라와 무토가 서로 맞붙는 장면을 '올려다보는' 동시에 그 화면을 '끊어내버리는 것', 경외감과 함께 그것에 대한 호기심이 아닌 두려움에 가득찬 채로 쉘터문을 닫음으로서, 원시인들이 야수를 피하듯이 현대인들이 고지라와 무토라는 재앙을 피하는 무력감, 경외감, 공포감을 한장면에 압축한다.


그렇기에, 영화는 전적으로 재앙과 신화적인 괴물로서의 고질라를 드러내려고 한다. 하지만, 고지라와 무토를 다뤄내는 카메라가 아닌, 인간의 이야기에서는 영화는 상당히 미숙한 지점을 드러낸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무의미하게 소모될 뿐이며, 주인공과 그 가족은 극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할 뿐이다(물론 이는 고지라나 무토와 맞서싸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다만 인간이 들러리일 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들러리 역활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재앙을 맞이하는 군중을 다뤄내는 장면에서조차 인물의 동선이나 다뤄내는 방식, 그리고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지점에서 상당히 어설펐기에 초중반에서 결전이 일어나는 후반부까지 영화가 늘어진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으며 이는 매우 치명적인 문제로 보여진다. 그렇기에 현재 사람들 사이에서 고질라의 평이 극과 극으로 나뉘는 것도,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다. 


하지만, 인간이 주로 등장하는 장면에 있어서 상당히 의미심장한 지점이 있다. 먼저 주인공의 '직업'이다:주인공은 폭탄 해체 전문가이며, 핵폭탄의 타이머를 직접 설정하였기에 자신이라면 60초만에 그것을 해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피력하기도 한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부상을 입은 몸으로 보트를 간신히 샌프란시스코의 해안에서 멀리 떨어뜨리고는 의식이 희미해지는 중에 핵폭탄이 터지는 것을 목도한다:핵폭탄 해제는 실패로 끝났다. 인류가 핵을 해체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은 그저 오만해 불과하다는 듯이, 영화의 마지막 고지라가 기진맥진해서 쓰러지는 장면과 핵폭발 장면을 교차시킨다. 또다른 하나는 헤일로 강하 장면이다:이 시퀸스는 군종목사의 기도로 시작된다. 마치 종교적인 제의를 거치는 듯한 엄숙한 음악(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모노리스 테마 BGM)과 핏빛 플래어, 그리고 원시의 혼돈속으로 뛰어드는 듯한 묘사는 아름답다 못해 장엄함까지 느껴질 정도이다. 


결론적으로 고질라는 또 좋아할만한 사람만 좋아하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아직 감독에게는 미숙한 점들이 보이며, 단순하게 스펙타클을 감상하기에는 영화는 괴수영화라는 서브컬처 미학의 비중을 너무 높게 잡아버렸다. 물론 현재 관객들에게 있어서 큰 흥행몰이를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사람들이 이에 대해서 극단적으로 상반된 평가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게 보인다. 하지만 고질라가 의미가 있는 지점은 그 특유의 겸손함과 함께 괴물을 한때 태초의 혼돈을 거닐었던 신의 모습으로 그려내려 한 고전적인 미학을 헐리웃 대자본과 결합시켜 살려내려 한 감독의 노력에 있으며, 그렇기에 그 결점이 아주 뚜렷하더라도 좋아할만한 사람들은 충분히 좋아할만한 작품임에는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