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https://medium.com/p/c277ee49fa33 를 블로그에 맞게 편집한 글입니다.



고스트 앤 다크니스(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7746) 라는 영화를 아는가? 여기서 발 킬머는 마이클 더글라스와 함께 아프리카 오지의 낯선땅에서 철도 공사를 방해하는 차보의 전설적인 식인 사자 ‘고스트’와 ‘다크니스’를 사냥해서 제거하려고 한다. 발 킬머는 고스트를 사냥하는데 성공하지만(다크니스가 먼저 사냥당했을 수도 있다, 본인으로서도 기억이 가물가물한지라) 남은 사자가 마이클 더글라스를 물어죽여버리고, 발 킬머는 여기로 오고 있는 아내와 아이가 남은 사자에게 물려 죽는 악몽을 꾼다. 결국 두려움과 마주한 발 킬머는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남은 사자를 사냥하는데 성공하고, 자신의 아내와 아이를 어떠한 위협없이 아프리카 땅에서 맞이한다. 


사실, 영화 자체의 재미는 그냥저냥이었던 고스트 앤 다크니스에 대해서 엉뚱한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과연 식인 사자 고스트와 다크니스는 동물이었을까, 아니면 괴물이었을까? 상당히 기묘한 질문이다. 고스트와 다크니스는, 명백하게도, 사자들이다. 그들은 현대적인 영화에서 등장하는 특수효과로 만들어진 상상의 동물이나 B급 호러 영화의 하위장르로서의 크리처물들에 나오는 괴물들과는 명백하게 다르며, 실화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극중에서 수백명을 물어죽이고, 자신의 배우자를 죽였기에 나도 네녀석의 동료와 배우자를 물어죽이고 복수하겠다 라는 공포로 당당하게 도발하고 선언하는 이 사자들을 ‘동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부분은 상당히 미묘하다. 그것을 뚜렷하게 구분하기 위해서는 먼저 동물과 괴물의 차이를 분명하게 나누어야 할 것이다.


…제물은 동물이라는 이유 때문에 벌써 신성했다. 신성이란 폭력과 관련된 저주를 거침없이 표현하는 것을 말하는데, 동물은 저주를 주저없이 선동하며 폭력을 포기하지 않으니 신성한 존재였다. 원시인들은 동물도 기본적 규칙을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으며, 폭력과 충동 자체가 이미 규칙의 위반임을 모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잘 알면서도 동물은 근본적으로 규칙을 위반하는, 다시 말해 의식적이고도 절대적으로 그것을 위반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바타이유, 에로티즘.


바타이유는 인간이 ‘노동’이라는 조직화 방식으로서 삶을 살아가기로 선택한 그 시점에서부터, 인간은 비생산적인 성에 대한 충동이나 파괴적인 폭력을 금기로서 금지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하지만 성에 대한 금기와 폭력에 대한 금기로 금지되었어도, 인간의 어둡고 은밀한 욕망은 여전히 존재할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은 특별한 상황에서의 ‘금기의 위반’을 통해서 분출된다고 보았다:살해에 대한 금기는 전세계 공통이지만, 그것이 전쟁 등에서 살해를 인정하는 지점, 즉 전쟁에서의 살해를 속죄하는 과정을 통해서 금기의 위반을 인정하는 지점에서 말이다.(바타이유는 금기는 ‘위반되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하기 까지 하였다) 하지만 동물은 다르다:동물은 그러한 금기가 존재하지 않으며, 폭력(물리적/물질적의미의 폭력이 아닌 무질서한, 질서를 파괴하는 의미에서의 폭력)이란 그들의 삶의 방법론 그 자체였다. 그들은 아무렇게나 먹이를 사냥하고 죽이고 먹고 교미를 한다. 인간이 그런 행위들을 했을 경우, 금기를 위반했다는 원죄의식에 시달릴 수 밖에 없는 지점에서 동물들은 어떠한 거리낌도 없이 자유로운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금기를 자유롭게 위반하는 그들을 신성시 하지만, 그들을 두려워할 수 밖에 없다: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질서를 세웠고, 그것을 통해서 살아간다.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인간 내부에 내재된 폭력성(섹스를 향한 파괴적 충동과 타자를 죽이려는 살해충동)이며, 인간은 동물과도 같이 살 수 없다는 지점에 동물의 폭력은 경외의 대상인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괴물은 거기서 탄생한다:그것은 인간 내부의 폭력성을 동물의 형태, 폭력을 행사하는데 있어서 거리낌이 없는 형태로 결합된 것이다. 즉 괴물이란 동물과 인간의 기묘한 형태의 결합인 것이다. 스핑크스를 예로 들어보자:머리는 사람이며, 사자의 몸통, 조류의 날개를 단 이 기묘한 괴물은 문을 지키며 여행자에게 수수깨끼를 던진다. 그리고 답을 맞추지 못한 자를 잡아먹는다. 만약 동물이었다면, 그들이 이런 양식화된 행위(수수깨끼를 던지고, 틀리는 자만을 잡아먹는다)를 했을까? 이 괴물은 동물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양식화 되어있으며 스핑크스가 행하는 폭력은 영웅(오이디푸스)이 넘어서야하는 통과의례이자 금기를 위반하는 존재(사람을 잡아먹는)이며 동시에 살해-식인의 폭력에 대한 공포를 드러내는 존재이다. 물론, 다양한 동물들의 결합의 결과물들로서의 괴물도 존재하며, 이들이 드러내는 폭력과 공포는 좀더 직관적이다:미궁 속에 사는 반인반우 미노타우로스, 수십개의 머리를 가진 히드라, 머리 셋 달린 마견 케르베로스 등등. 



그로테스크한 것은 감각적으로 표상할 수 있는 것을 최고도로 고양시킨 것이다…이러한 의미에서 그로테스크한 형상물들은 동시에 한 시대의 넘쳐흐르는 기운의 표현이다….물론 그로테스크한 것의 원동력을 두고 보면 이와는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점이 있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퇴폐적인 시대나 병적인 두뇌를 가진 자들도 그로테스크한 형상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이 경우 그로테스크한 것은 퇴폐적 시대와 병적 개인들에게는 세계와 삶의 문제들이 해결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에 대한 충격적인 반작용의 표현이다…이 두경향 가운데 어느 경향이 창조적 추진력으로서의 그로테스크한 판타지의 배후에 있는가 하는 것은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에두아르트 푹스, 당조의 조형예술;발터 벤야민, 수집가이자 역사가 에두아르트 푹스에서 재인용.


하지만 과거의 신화시대의 괴물들과 현대의 괴물들은 다른 형식으로 만들어진다. 과거의 괴물들이 동물과 인간의 결합을 통해서 인간이 갖고 있는 동물성을 이미지화 시키는데 주력했다면 현대의 괴물들은 산업화된 대중문화인 영화와 특수효과, 분장이 일반화된 세계에서 그로테스크함을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졌다. 괴물들은 이제 단순한 인간과 동물의 결합을 뛰어넘어서, 기능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더이상, 괴물은 동물의 형태에 얽메일 필요가 없어졌다.새로운 특수효과 기술의 등장은 그들의 모티브이자 원형인 동물로부터 괴물을 해방시키면서도 동시에 '사실적'인 괴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괴물은, 점점 더 순수한 '폭력'의 형태에 가까워졌다:에두아르트 푹스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꿈틀거리는 시대의 에너지가 극단화된 괴물인 것이다. 그리고 괴물의 미학에는, 인간이 느끼는 폭력에 대한 공포가 폭력이라는 에너지가 꿈틀거리는 그로테스크의 형태로 구체화되며, 그것은 괴물들의 신체나 특징적인 '기능적 기믹'의 형태로 자신의 특징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다시 고스트 앤 다크니스로 돌아와보자:이 점에서 명백히도, 고스트와 다크니스는 괴물이라고 볼 수 있다. 철길이라는 서구의 문명이 아프리카라는 미개한 검은대륙을 계몽시키고자 할 때, 최초이자 최후의 장애물로서 유령Ghost과 어둠Darkness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서구문명의 마지막 저항세력으로서, 이성과 대영제국의 최전선에서 부딪히게 되며, 발킬머가 사냥한 것은 대화나 타협이나 계몽의 대상이 아닌 이성 너머에 존재하는 미개한 야만의 신화이자 폭력을 행사하는 최후의 괴물인 것이다. 물론 그들은 현대 영화나 특수효과적인 의미에서 괴물은 아니다: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현대와 근대, 혹은 그 너머의 고대적인 의미에서의 괴물이 서로 맞닿아 있는 무언가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에일리언.=>기능적인 아름다움과 그로테스크함. 성기의 은유. 좀더 살펴보자면 대단히 모순적인 괴물-비정상적인 호전성, 이해불가능한 생식 방식, 기묘한 형태의 공격방식과 자기 모순(산성 피)//하지만 아름답다, 왜? 디자인이 잘되었다 등등. 괴물의 미학이란, 인간을 기능적으로 괴롭히기 위한 그로테스크 성에서 시작된다->그것은 인간의 폭력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 그것들 모두 인간의 ‘은유’으로부터 출발하였다/동시에 그 존재가 영화내 서사에서 기능하는 것도 하나의 인간을 드러내는 지표이다:에일리언 2, 나쁜 엄마 대 착한 엄마의 구도. 썅년과 자식을 지키지 못한 어머니의 사투. 여성성의 이중성? 인간과 폭력 그 자체의 대결.


"그것은 완벽한 생명체다. 전혀 도덕적 거리낌없이 순수한 살육을 할 수 있으며, 신체적으로도 완벽히 전투형인 생명체이다. 인간이 그 생명체와 정면으로 맞서서 승리할 가능성은 제로다. 그리고 나는 그 순수한 잔인성을 존경한다."

- 에일리언 


괴물에 대한 두가지 예시를 들어보겠다. 현대적 괴물의 직관적이고 유명한 사례는 에일리언의 제노모프가 있다. HR 기거가 디자인 초안을 맡은 제노모프의 모습은 남성의 성기 형태를 연상케하는 머리를 한 끈적거리는 모습을 한 불쾌한 모양새다. 그리고 이 불쾌한 괴물이 나오는 에일리언은 SF 영화와 괴물영화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악명높은 디자인들(이중턱, 뼈가 겉으로 튀어나온 듯한 외골격 스러운 몸매들, 강산성 피 등등)과 별개로 에일리언에서 이 제노모프라는 괴물이 갖는 독특한 지점은 바로 독특한 생식 방식과 이해불가능할 정도의 호전성이다:숙주의 몸에 들어가서 숙주의 DNA를 바탕으로 새로운 특성과 형태를 가진 괴물이 되는 번거로운 지점이나(물론, 설정의 사실성에 테클을 거는 것이 아니다;하지만 우리가 제노모프의 번식에 대한 첫인상이란, 도대체 저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이유가 뭘까? 이다), 제노모프의 호전성이란 어떻게 소통조차 되지 않은 사악하고 지능적인 존재로서의 제노모프를 상정하고 있는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제노모프의 번식 행위는, 어떤 '필터링'의 과정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제노모프의 번식 행위란 숙주가 되는 대상 생명체로부터 폭력만을 걸러내기 위해서 숙주에게로 잠입한 뒤에(페이스 허거) 그 숙주의 폭력을 응축하여 밖으로 튀어나온다(체스트 버스터) 제노모프의 그로테스크함은, 그런 생식과정을 통해서 폭력을 응축해서 배출한다는데 있으며, 그렇기에 제노모프는 각각의 숙주의 모습에 근거하고 있지만 숙주와는 동떨어져있는, 꿈틀거리는 폭력의 모습으로서 그로테스크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지점에서 제노모프의 미학은 기묘한 지점을 만들어낸다:2편을 예로 들어보자.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자식을 잃은 어머니 리플리는 어머니를 잃은 소녀를 구하기 위해서 퀸 에일리언과 파워로더를 타고 사투를 벌인다. 이 과정에서 리플리는 퀸 에일리언을 썅년Bitch이라 부른다:물론 리플리의 욕설이 문자 의미 그대로 퀸 에일리언이 여성이기 때문에 어울리는 욕설이기도 하나, 여기서는 고아인 뉴트를 지키고 자신의 자식을 지키지 못했던 어머니 리플리와 제노모프의 어머니로서 자신의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자식들의 복수를 위해서 싸우는 퀸 에일리언의 모습이 '여성성'이라는 공통분모 아래서 서로 빛과 어둠과 같이 극명하게 분리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노모프의 생식과정이 대상의 폭력성을 응축시켜서 배출시킨다고 본다면, 퀸 에일리언이야말로 리플리의 분신같은 존재이자, 모성이 갖고 있는 폭력성과 어둠을 응축시켜놓은 존재라고 볼 수 있다(모성은 항상 아름다운 무언가가 아니다:봉준호 감독의 마더는 그런 지점에서 대단히 날카로운 지점을 만들어낸다)


더 씽의 경우는 조금 독특하다:더 씽의 문제삼고 있는 것은 '폭력의 전염'의 문제이다. 물론 제노모프 역시 그런 폭력의 전염을 시공간적으로 형상화시킨다. 그들은 어떻게 만들었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는 형태로 공간을 자신의 형태로 '전염'시키고는, 그 자리가 우리의 영토이다 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에일리언 2에서처럼, 그 공간에서 제노모프들은 일방적으로 해병대를 학살하면서 그 폭력이 단순히 상징적인 공간이 아님을 드러낸다. 하지만 더 씽에서의 폭력의 전염은 신체강탈자의 문법을 변용하면서 출발한다:우리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우리가 아닌, 원래의 존재들을 감금하고는 원래의 존재들인척 하면서 음모를 주도하는 신체강탈자들의 클리셰는 1960년대 '우리 주변에 숨어있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공포'를 드러내는데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더 씽은 신체강탈자의 클리셰나 모호하고 도회적인(타인에 대한) 공포에 초점을 맞추는게 아니다:더 씽이 드러내는 폭력에 대한 공포는 원초적이다. 더 씽의 신체강탈자들은 전혀 신사적이지 않다. 그들의 개종방식은 그 자체로 폭력이며, 기괴한 형태로의 신체의 융합과 뒤틀림을 유발하며 그 자체가 유쾌하지도 않을 뿐더러 고통스럽게 묘사함으로서 그로테스크한 생명력을 발산한다:주인공인 맥크레디는 괴물의 세포 하나 하나가 모두 하나의 생명체로서 살아있다는 가설을 세우고는 혈액 검사법(피를 뽑아서 불을 붙여보는 것)을 통해서 괴물을 가려낼 수 있다고 보는 지점에서 그들은 세포 하나 하나가 살아있는 '폭력'의 화신 그 자체인 것이다.


하지만 더 씽의 폭력이 더 무서운 것은, 기저에 숨겨진 기묘한 신체의 변형과 파괴의 표면은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더 씽에서 괴물이 인간의 모습을 할 수 있으며 심지어 개종자조차도 자신이 개종되었을 사실을 모를 수도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는 시점은 이미 '늦은' 상태다:그들에게는 개종자들을 찾아낼 방법도, 전염을 격리시켜서 확산을 방지할 수 있는 방법조차도 남아있지 않다. 그들에게 있어 남은 것이란 오로지 모두가 멸망할 것이라는 숙명적인 종말 뿐이며, 이 끔찍한 종말과 폭력의 변주곡에서 심지어 주인공인 멕크레디마저도 의심의 대상이 된다(그는 추락한 헬기에서 겨우 살아남았다:과연 그는 살아남는데 성공한 것일까, 아니면 그들중 하나일까?) 인간 내부의 꿈틀거리는 폭력의 그로테스크함과 서로를 불신하며 파멸을 향해서 착실히 나아가는 형태의 종말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더 씽은 괴물이라는 존재의 폭력성과 인간의 근원적인 공포(인간 내면에 숨어있는 폭력)를 다룬 걸작이라 칭송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씽 리메이크-프리퀼 작품의 경우에는 대부분 더 씽 원판을 따르지만, 세밀하지만 아주 중요한 지점에서 차이가 난다:더 씽의 원판의 경우, 주인공인 멕크레디 조차도 믿을 수 없는 인물로 설정함으로서 인간 불신을 향한 파국은 더욱 깊어진다. 그러나 리메이크-프리퀼 작의 경우에는 믿을 수 있는 구심점적인 인물을 설정하고, 동시에 우리가 그녀의 동선을 모두 파악할 수 있었고, 그녀가 감염으로부터 안전하다는 사실을 확답받는 인물이라는 지점을 관객들에게 확보해주면서 안전장치를 만든다. 또한 원판이 세포 하나 하나가 폭력에 가득찬 존재를 가려내는데 원시적인 폭력, 불이라는 기제를 사용하여 그것을 가려내고자 한데 반해, 리메이크-프리퀼은 치아의 충전물, 즉 인공적인 요소가 존재하는가의 유무로 괴물과 인간을 분리하려고 한다. 많은 지점에서 리메이크는 원판의 밑도 끝도 없는 공포들을 뒤집어서 안전한 지점으로 만들면서, 영화를 원판에 비해서 안전한 공포영화가 되었지만 그 자신을 한발 물러나는 지점을 통해서 원판에 대한 존경과 함께 교활하게 자신의 몸을 움츠리고 사리는 기묘한 영화가 되었다) 


오늘날 동물들의 괴물성을 만든 것은 그들에 대한 모든 폭력을 흡수함으로서이다. ‘내밀성’(바타이유에게서)의 폭력인 제물로서의 폭력에, 떨어진 거리의 폭력인 감상주의적인 폭력이 뒤를 잇는다.


괴물성이란 그 의미를 바꾸었다. 원래는 공포와 미혹의 대상인 짐승들의 괴물성이란 결코 부정적 의미가 아니라 항상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제물과 신화, 맹수와 격투하는 투사, 그리고 우리의 꿈과 환상 속에서 교환과 은유의 대상인 짐승들의 괴물성이었다. 이러한 괴물성은 모든 위협과 변형에 있어서 풍부하고, 인간들의 살아있는 문화속으로 내밀히 녹아들어갔으며 그래서 인간과 동물들 사이의 결연의 한 형태인 이 괴물성을 우리는 공연장의 괴물성과 교환해버렸다…(중략)


옛날에는 영웅이 짐승, 용, 괴물을 죽였다. 그러면 그 흘러퍼진 피로부터 식물들이, 인간들이 문명이 탄생하였다. 오늘날은 짐승인 킹콩이 산업적인 대도시들을 박살내러 오고, 실제적인 모든 괴물성이 축출되어버리고 괴물성과의 계약을 파기하였기에(이 계약이 킹콩 영화에서는 여자의 원시적 증여로 표현되었다) 죽어버린 우리의 문명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기 위하여 온다. 


-보들리야르, 시뮬라시옹.


하지만 이런 괴물 영화의 조류에 있어서 새로운 흐름이 등장하기 시작한다:피터 잭슨의 킹콩 리메이크 버전의 마지막 장면을 보자. 괴물인 킹콩은 자신이 사랑한 연인 앞에서 비행기의 기총사격을 맞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떨어져 죽는다. 그렇게 죽은 괴물을 보고 인물은 이렇게 평한다:비행기가 죽인게 아니에요, 미녀가 야수를 죽인거죠. 이 영화에 있어서 거대 유인원 킹콩은 원시의 자연이 존재하는 밀림에서 거주하다가, 미녀를 따라서 문명의 한복판으로 온 뒤 조롱감이 되고 놀림감이 되다가(묶여서 전시되는) 문명의 폭력 앞에서 사라진다. 킹콩 역시, 폭력의 상징이자 폭력의 발현으로서 괴물이다(그가 티렉스의 턱뼈를 쑤셔넣어 죽이는 지점을 보라. 폭력과 에너지의 과잉으로서의 괴물, 킹콩) 하지만, 그는 제거되거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아니다:오히려 그는 진정한 사랑의 이해자이며,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세상을 향해 싸우는 로멘티스트다. 오히려, 미녀(여주인공)가 배우라는 지점을 통해서 쇼비지니스와 영화라는 기만과 거짓과 대비되는 원시이자 우리가 잃어버린 태초적 사랑을 향한 그리움이 킹콩을 통해서 형상화된다고도 볼 수 있으며, 원시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파괴하는 것은 문명 그 자체임을 암시하는 상징으로서도 작용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괴물은, 기묘한 지점을 만들어낸다:그들은 폭력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렸기에' 그리워하는 폭력 또는 폭력과 인간의 질서 사이의 조화로웠었던 가상의 과거를 향한 향수를 드러내는 지점이다. 현대적인 물질 문명과 기계문명에 의해서 거세당하고 삭제되었던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폭력, 그것을 향한 그리움이 괴물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고귀하며, 바타이유가 이야기한 고귀한 존재로서의 동물과는 또다른 지점에서 고귀하다:금기를 자유롭게 어기는 자유로운 존재이자 금기의 위반자이자 표지로서의 괴물과 동물이 아닌,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갖고 있는 존재로서의 동물이자 괴물이다. 이 둘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경외로서의 괴물의 폭력에 대해서 우리는 거기에 매료되지만, 인간은 그 지점에 맞닿을 수 없다. 인간은 폭력에 대한 금기를 위반할 수 있지만, 그것에 대한 원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자유롭게 폭력을 행사하고 그것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동물 또는 괴물과 동일한 존재가 될 수 없다. 하지만 향수로서의 괴물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서 느끼는 아련한 추억이자 환지통Phantom Pain으로서, 심지어 극단적인 경우에는 문명을 박살내고 우리가 잃어버렸던 과거를 다시 살려야한다는 미학으로도 귀결되기도 한다. 그것은 질서를 파괴하는 폭력과 질서 사이의 조화로운 상태를 상정하고 있으며, 폭력 역시 삶의 일부이지만 삶 그 자체는 아닌 무언가로서 표지되기 때문이다. 즉, 이런 괴물들은 앞서 다루었던것과는 다른 독특한 형태로 인간과 동물이 결합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고대의 인간, 폭력과 질서과 조화를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가상의(그것이 과연 존재할까? 아니 존재했었던 적이 있었을까?) 존재로서 동물과 인간의 결합인 괴물인 것이다.(쉬운 예로 고귀한 드래곤 같은 기믹을 생각하시면 편하다)


영화 아바타는, 그런 지점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향수로 가득차 있다. 지구는 환경오염으로 인해 파괴되었으며, 네이티브 아메리칸 철학에서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 나비족의 생활과 나비족의 철학은 자연과 함께하는 삶 그 자체인듯 하다. 그리고 모든 자연과 인간은 맞닿아있다 라는 나비족의 철학은 모든 동물-식물-나비족이 물질적으로 연결되어 소통하는 USB(달리 이거말고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의 형태로 드러난다. 여기서 나비족이 사는 세계는 기반하고 있는 세계는 괴물들의 세계다:그들의 생태계는 우리와 다르며, 그들은 인간이나 지구의 생물체보다 더 빠르고 강하며 치명적이다. 하지만, 그들의 세계는 우리가 잃어버린 자연의 '또다른 원형'이자 '파생실재'이다. 그 내부에서 동작하는 기제란 기본적으로 '자연과 인간은 하나'라는 한때 미국을 구성하였지만 미국이 잃어버린(아바타는 헐리웃 영화이다) 네이티브 아메리카의 철학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주인공은 과격한 선택을 취한다: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또다시 여기서 되풀이하며 잃어버리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인간의 육신을 버리고 나비족의 육신을 취하면서 끝나는 아바타의 결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윤리적인 문제나 다양한 문제를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향한 향수와 그리움의 미학이 압도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