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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늘 새해를 맞이할 때 올리는 음악,

Arcade Fire-Wake Up 입니다.

방문자분들 모두 2014년 한해 동안 원하시는 바 꼭 성취하시고 새해복 많이 받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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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자신을 닮은 똑똑한 아들, 그리고 사랑스러운 아내와 함께 만족스러운 삶을 누리고 있는 성공한 비즈니스맨 료타는 어느 날 병원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6년 간 키운 아들이 자신의 친자가 아니고 병원에서 바뀐 아이라는 것. 료타는 삶의 방식이 너무나도 다른 친자의 가족들을 만나고 자신과 아들의 관계를 돌아보면서 고민과 갈등에 빠지게 되는데…(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보통 가족을 소재로 다루는 영화들의 기본 전제는 이러한듯 하다:파괴 뒤에 창조 있으리라. 수많은 작품들은 가족이라는 커뮤니티를 파괴직전까지 몰고 간다. 그러고는, 그속에서 가족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그것을 토대로 가족을 재구축한다. 예외 사례(킬러조 같은 극단적 파국)도 존재하긴 하지만, 가족을 주요 소재로 다루는 영화들의 기본 특징들은 이렇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이런 와중에 가족에 대해서 가장 담담한 시선이자 통념을 거부하고 뼈대만 남은 가족을 보여주는 작품들, 예를 들어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아버지는 살인마야!)나 기요시의 도쿄 소나타(원래 남남인 인간들이 남남으로 돌아간것 뿐이야) 같은 작품조차도 가장 극단적으로 가족을 파괴하려고 위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영화들을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다만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그런 '극적인' 서사를 거부하며 이러한 영화 경향들과 대척점에 놓이는 특이한 케이스라 할 수 있다. 영화의 이야기는 담담한 카메라를 따라서 자연스럽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마지막으로 서서히 점진적으로 변화한다. 다큐멘터리 감독 경력이 있던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러한 과정을 어떠한 극적인 서사나 장치를 거부하면서도 세밀하게, 하지만 희미하진 않게 영화를 구성한다. 자칫 잘못하면 가족이 무엇인가를 두고 감독의 일방적인 설교 또는 신파극이 될 수 있었던 이야기를,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케릭터들을 존중하면서 열려있는 결말로, 과연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로 풀어내는데 성공한다.


먼저 제목인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극의 시작이 뒤바뀐 아이들에서부터 시작하긴 하지만, 이는 어떤 파국을 향해서 달려나가는 사건이 아니다:이는 '변화'이자 가족이란 개념을 향한 '문제제기'이다. 과연 피가 섞여있지 않아도 가족이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면 왜 제목이 '그렇게 가족이 된다'가 아니라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일까? 이는 기묘하게도 서로의 아이가 바뀌었다는 것을 인지한 다음, 그 충격에 대해서 케이타의 가족이나 류세이의 가족 모두가 천천히 그 충격과 변화에 적응하고 받아들이지만(일련의 단계를 통해서 뒤바뀐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는 것), 정작 료타만이 이 충격에서 가장 혼란스러워하고 공황을 겪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라는 것은, 료타가 가족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가를 핵심 키워드로 제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료타라는 케릭터가 혈연에 기초하고 있는 가족이라는 개념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다. 물론, 전통적인 혈연에 근거한 가족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기본적인 형태이며, 동시에 료타는 자신의 친어머니(그의 어머니는 새어머니였다)를 찾아서 가출한 전력이 있는 등 혈육의 정에 대해서 목말라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료타가 갖고 있었던 가족의 개념은 그 나름의 사랑이 깔려있기는 하지만, 어딘가 자기중심적이고 기계적이며 삭막한 부분이 있다:극후반 친아들인 류세이를 집에 데려왔을 때, 류세이에게 여기서 살때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정한 규칙을 이야기하는 부분이라던가, 케이타에게 저쪽(친부모)과 함께 살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임무'의 형태로 이야기한다던가, 혹은 류세이의 부모를(구체적이진 않지만, 그들이 경제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은 극의 은연중에 깔려있다. 또한 류세이의 부모가 경제적으로 가장 낙후된 군마현에 사는 것은 강렬하지는 않지만 은연중에 정치/경제적인 텍스트를 깔아뒀다고도 볼 수 있다) 바라보는 료타의 시선 등에서 드러난다. 재밌는 점은 영화는 이러한 지점을 '가부장적이고 정치 경제적인' 형태로 드러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구체적인 대립 형태'를 거부한다. 이는 정치/경제적인 가족관계에 대한 클리셰를 피하고 료타의 케릭터를 정형화된 틀에 넣기를 거부하는 감독의 의지로 보여진다.


하지만, 류세이를 집에 데려온 이후에 류세이가 왜 자신들을 아버지와 어머니로 불러야하는가에 대해서 료타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을 보자:애시당초에 어린아이에게 설명하지 못할 정도로 명확한 개념이나 확실한 타당성을 가진게 아니라면, 그 명제 자체는 경계 자체가 애매모호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료타는 자신의 확고하지만 동시에 불확실한 '혈연'의 개념 때문에 갈등하고 고뇌하며, 이는 그의 엘리트적이며 워커홀릭적인 삶과 맞물려서 그에게 피곤함과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가족을 위해서, 피가 이어진 아들과 아들의 미래를 위해서 노력하지만 불현듯 찾아온 불청객과도 같은 소식(뒤바뀐 자식)은 그의 인생과 가족관 모두를 뒤바꿔버린다. 


영화는 그러한 애매한 지점을, 실험을 위해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수목림에 비유한다:원래 실험을 위해서 만들어진 수목림에서 15년 동안 땅속에서 지내는 매미 유충이 허물을 벗고 태어나며, 하나의 '자연'을 형성한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자연이 자연이라 할 수 있을까? 영화는 하나의 커뮤니티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그 개념의 '진품성'은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한다:중요한 것은, 그 커뮤니티를 유지하기 위해서 들였던 노력들, 그리고 그 속에서 서로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료타 이외의 부모들이 그 충격속에서도 아주 자연스럽게 그 변화를 받아들이고 거기서 적응해나갔다면, 료타는 먼길을 돌아서 그 가족의 진품성이 중요한 것이 아닌 그 내에서 가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려고 했었던 과정들, 경험들, 그것들이 중요함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급작스럽지 않고 서서히 진행되는데, 자신의 새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 간의 자신이 잘못한 점을 사과한다던가, 스스로 혼란스럽다고 변호사 친구에게 토로한다든가 등의 행동을 통해서 드러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마지막은 피곤해서 자고 있었던 자신을 케이타가 사진으로 찍어서 사진기에 담아둔 것을 보고 케이타를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하고 다시 한번 가족이 되며 그렇게 (케이타의)아버지가 된다.


하지만 어찌보면 15분만에 끝낼수도 있는 뻔한 이야기(진품성이 중요한게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유지하려는 노력)를 영화가 2시간에 걸쳐서 점진적으로 하고자 한 것은, 가족에 대한 료타의 변화 이상을 이야기하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판 포스터를 보도록 하자.









이 포스터에서는 두 가족이 서로 동등하게, 나란히 서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재밌는 점은 영화에서 나온 이 장면은 두 가족이 거리를 두고, 서로 다른 형태의 포즈-케이타의 가족은 전형적인 중산층 가족의 정형화된 포즈를, 그리고 류세이의 가족은 자유분방한 포즈를-를 취하면서 두 가족을 극단적으로 대립시킨다. 이는 영화 내내 류세이의 가족과 함께 편하게 지내는 케이타와 아내한테 '그 가족과 떨어져 지내'라고 이야기하는 료타의 모습에서도 드러난다: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류세이 가족의 삶의 방식을 료타가 은연중에, 그리고 지속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바로 서로 섞일 수 없는 두 개의 세계가 섞이는 것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그렇기에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가족의 의미를 넘어서 '대안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서로 만나고 섞일 일이 없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서 기묘하게 꼬여버린 부모-자식의 관계를 보인다. 료타는 이러한 관념에 익숙치 않기에, 너무나 쉽게 이 속물적으로 보이는 타인들에게 크나큰 무례(제가 두 아이를 다 데리고 살겠습니다. 돈이라면 얼마라도 주겠습니다)를 저지르며, 영화 내내 지속적으로 류세이의 부모를 못마땅하게 쳐다본다. 하지만, 사회 엘리트인 료타가 영화를 통해서 경험하는 것은, 그런 어떤 정형화된 틀의 세계(내 자식은 뭐든지 잘해야하고-이는 혈연과 유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내 자식을 위해서 직장에서 불철주야 일하며, 열심히 일하고 유능한 인간이 되어서 성공가도를 달리는 것 등등)가 완벽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자신이 생각했던 혈연에 근거한 가족 개념도 포함해서) 그리고 가족이라는 커뮤니티는 단순히 나-아내-자식이라는 경계를 넘어서, 류세이 가족이라는 '타인'에게로까지 확대된다. 


이 확대과정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진행된다:이는 아이들이 뒤바뀐 것을 고지한 병원이 제시한 아이 '교환'의 프로세스에 의거한 것이다. 서로 만나서 안면을 트고, 그리고 서로의 집에 아이들을 교환해서 묵은 뒤에, 최종적으로 아이들을 교환하는 것. 물론, 이는 단순히 케이타-류세이에게만 해당되는 문제일 수도 있지만, 이 과정에서 서로의 가족들은 섞이게 되고 자연스럽게 서로의 삶에 관여하게 된다:케이타의 초등학교 입학식에 류세이의 아버지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켐코더를 들고 들어오는 지점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서로의 가족이 동등하게 서서 사진을 찍은 저 포스터는 영화의 중요한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마치 형제처럼, 두 가족이 동등하게 서서 사진을 찍는다는 것. 생면부지의 타인들이 모여서 마치 '가족인것처럼' 사진을 찍는 지점에서 이 영화는 단순히 혈연 중심의 가족 개념을 타파하는 이상, 가족이란 커뮤니티의 확장을 노리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의미심장하다:료타는 케이타를 자신의 진실한 자식으로 인정한다. 그리고 그렇게 (료타는 케이타의)아버지가 된다. 그렇다면 류세이는 어떠한가? 료타는 자신의 경직된 세계를 벗어던지고 류세이와 함께 연날리기 캠핑을 하기를 준비하면서 류세이의 아버지 역활을 맡는다. 그리고 그렇게 (료타는 류세이의)아버지가 된다. 또한 료타가 케이타와 함께 돌아왔을 때, 류세이의 동생들은 이렇게 물어본다:이제 '돌아가지' 않는거야? 이 말에는 류세이가 돌아가지 않음을 묻는 의미기도 하지만, 류세이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을 케이타의 집, 케이타의 가족으로 인지하는 지점이 있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류세이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면서 류세이는 '양측 모두'의 아이가 된다. 그리고 류세이의 부모는 자연스럽게 밥이나 먹자는 권유를 한다. 그렇기에, 그렇게 생면부지의 타인들은 하나의 가족이 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정말로 대단한 작품이다. 다큐멘터리의 객관적인 시선과 지극히 섬세한 카메라 워크가 맞물려 들어가면서도, 영화는 2시간이라는 러닝타임 내내 극의 탬포를 잃지 않고 관객들을 집중하게 만든다. 또한 인위적인 장치를 극도로 배제하면서도 극의 장면마다 필요한 상징적 구도들을 자연스럽게 집어넣는 등, 영화는 섬세하게 짜여진 아름다운 작품이 된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올해를 빛내는 아름다운 작품 중 하나며, 기회가 된다면 극장에서 꼭 보기를 추천한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미디엄에 쓴 글을 옮긴 것입니다.(https://medium.com/korean-medium-post/1a030169c4cc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죽일 수는 있지만, 희생 제물은 될 수 없는)를 법의 문법으로 보았다:그리고 이러한 기저에는 그리스 폴리스의 삶의 양식 조에(단순하게 살아있음)와 비오스(의미있는 삶)의 분리가 깔려있다고 아감벤은 자신의 저서 호모 사케르를 통해서 주장한다. 조에란 자연에서 단순히 태어나고 죽고 하는 것은 어떠한 가치 판단의 기준도 아닌, 단순하게 거기 있다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의미있는 삶, 비오스란, 그것의 태어남과 삶에 의미가 존재하고 동시에 중요하게 여겨진다. 아감벤은 폴리스에 있어서 시민과 함께 조에, 의미없는 삶들이 함께 살았음에 주목하였다. 아감벤은 즉, 비오스란 조에라는 ‘예외상황’을 통해서 규정된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외상황을 통한 자신의 규정’은 호모 사케르-맘대로 죽일 수 있지만, 희생물로 바쳐질 수 없는-의 법의 문법을 통해 실현된다:예를 들어보자. 사형의 경우, 사형수는 국가에 의해서 죽음을 선언받은 자들이다. 이들은 국가의 처분에 따라서 마음대로 죽임당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어떠한 숭고한 가치를 위한’희생물’은 될 수 없다. 그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헌법과 가치질서의 예외에 속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예외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헌법적 가치질서이자 주권권력의 결정을 ‘재확립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이러한 문법은 법 바깥의 대중문화에서도 발견되는 문법이며, 역설적이게도 이는 호모 사케르의 문법이 법을 넘어서 대중문화 전반에, 즉 대중들이 공통으로 향유하고 있는 인식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이후로 대중문화 코드에 있어서 중요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좀비물은 호모 사케르의 문법과 많은 부분 유사점을 드러낸다:좀비는 ‘언제, 어디서,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이들은 어떠한 대의명분을 위해서 희생되는 존재는 아니다. 그들은 생존자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이기에 제거되어야 하며, 동시에 생존자들은 좀비 대재앙(그것이 소규모든 전지구적인 규모든) 속에서 ‘마지막 남은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서 좀비를 제거하고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좀비에게 감염되어 인간성을 상실하게 될 위기가 되면, ‘인간다운’ 최후를 맞이하길 원한다. 그리고 좀비와 구분되어, ‘살아갈 지어다’라는 주권적인 명령 하에서, 예외와 같은 동등한 상황(좀비)에 처하게 된다면 인간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자살할 것을 강요 ‘하는듯이’ 보여지는 지점이 있다.


(이는 ‘좀비와 함께살기’라는 명제가 좀비 코드에서는 ‘당연스럽게’ 거부당하는 것을 통해 드러난다. 좀비가 한때 인간이었으며, 우리는 그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이들과 함께 같이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작품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


그렇기에 좀비들은 좀비 아포칼립스에서 ‘인간’을 규정하는 외부이자 경계영역, 동시에 호모 사케르이며 산업사회에서의 대중의 등장과 대중에 대한 혐오와 공포를 묘사하는 지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썩어가는 육체라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육화된다. 또한 좀비가 되는 순간 인간은 그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것을 박탈당하게 된다:한때 누군가의 연인이었고, 가족이었고, 친구였던 존재는 좀비가 됨으로서 그런 존재의 모든것을 박탈당하고 마음껏 총으로 쏴죽일 수 있는 무언가가 된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서 끊임없이 죽여야 하는 외부, 살아있는 것도 아니지만 동시에 죽은 것도 아닌 죽지못한 육체들(Undead)이 바로 좀비인 것이다.


물론 좀비는 사람을 죽이고, 동시에 사람을 죽여서 자신을 증식시킨다:좀비는 일방적으로 죽일 수 있는 존재라고 보기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뒤집어서 생각하면, 좀비에게 있어서 인간 역시 ‘호모 사케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좀비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간을 죽여야 한다. 아니면 인간이 좀비를 모두 죽여버릴테니까. 하지만 동시에, 만약 좀비가 지구상 최후의 인간까지 죽어버린다면, 더이상 인간을 인간으로 규정하는 살아있는 지표가 남지 않게 된다면 좀비 역시도 더이상 ‘좀비’가 아니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좀비가 좀비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살아있는 인간’을 전제해야 한다. 이는 일종의 원환이다:서로가 서로를 규정하며 정의한다. 좀비는 인간을, 인간은 좀비를 죽임으로서 서로의 존재를 규정하고 확인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호모 사케르적 관계는 ‘쌍방향적’이다.


(물론 이 호모 사케르적인 관계를 거부하는 영화도 존재한다:새벽의 황당한 저주에서 주인공은 좀비가 되어가는 자신의 어머니를 좀비라고 부르길 ‘거부’한다. 우리가 좀비물의 장르 공식에 몰입해서 쉽게 잊어버리는 지점, 즉, 좀비로 변한 그들이 우리에게 있어서 형제고 가족이며 친구였음을 영화는 꿰뚫어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마지막에 좀비가 된 친구와 함께 살아가기를 선택함으로서, 원환을 꿰뚫어 보고 파괴하는 동력을 얻기를 원한다. 그렇기에 새벽의 황당한 저주는 장르에 대한 애정과 가장 날카로운 시선을 동시에 보내는, 정말로 ‘위대한’ 좀비 영화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다루고자 하는 스튜어트 고든 감독, 브라이언 유즈나 제작, 러브크래프트 원작의 1984년작 좀비오, 원제 리-애니메이터(되살리는 자, 시체소생자)는 이러한 좀비 장르의 공식을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영화에서 좀비는 더이상 감염-확산을 통해 대중을 구축하지 않는다. 오히려 혈청이라는 특수한 약물을 통해서 제한적으로나마 재생산되는 것이 좀비이며,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는 ‘좀비’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시체 소생자에서 중요한 것은 시체가 만들어내는 재앙이 아니라 시체를 소생시키는 자들(주인공과 허버트 웨스트)에 초점을 맞춘다.


원작을 쓴 H.P. 러브크래프트는 이 소설 원작을 통해서 그의 과학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는데 초점을 맞추었다:허버트 웨스트는 생물이란 어떤 존엄이 깃들지 않은 하나의 기계이며, 일정한 조건 하에서 되살릴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는 17년에 걸쳐 화자인 ‘나’와 함께 소생실험을 하기 위해, 동물에서 시체로, 시체에서 신선한 시체를 얻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심지어 1차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시체를 대량확보하려고 하는 등 온갖 미친짓을 감행한 끝에 결국 허버트 웨스트는 자신이 소생한 시체들에게 뜯겨져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끝없는 웨스트의 실험과 광기는 러브크래프트가 니알라토텝을 통해서 드러낸 과학에 대한 불신과 파괴적 속성의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 있다.


스튜어트 고든과 브라이언 유즈나는 이러한 러브크래프트의 원작을 B급 테이스트로 살려내는데 성공한다. 영화는 전적으로 저예산이긴 하지만, 허버트 웨스트 역을 맡은 제프리 콤즈의 명연과 시의적절한 음악, 그리고 리드미컬하고 그로테스크하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밌고 유쾌하게 영상을 구성하는데 성공한다.


기계적 신체와 계속 약물을 주입해서 되살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의학자(라기 보다는 미친놈)의 이야기를 쓴 러브크래프트의 광기들린 편견은, 위에서 이야기한 썩어가는 신체이자 인간을 위협하며 규정하는 호모 사케르로서의 좀비와 정반대이기는 하지만 맥락상 유사한 지점을 만들어낸다. 인트로에서 원작 소설에서 나에 해당되는 주인공이 죽은 환자를 두고 살려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부분, 허버트 웨스트가 죽은 고양이를 살려내는 것을 보고 그의 혈청에 매료되는 부분, 허버트 웨스트가 뇌사와 죽음의 경계를 두고 계속 끊임없이 죽음이라는 경계를 재규정하려는 부분, 마지막에 죽어버린 여주인공을 소름끼치는 미소와 함께 혈청으로 다시 살려내는 부분(동시에 이는 처음 주인공이 나온 시퀸스의 반복이자 변용이다)까지, 영화는 기존의 좀비영화의 문법과 다른 지점을 끊임없이 만들어냄으로서 기존의 좀비영화와 다른 ‘무언가’가 된다.


이러한 기묘한 지점들은 한병철이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를 비판한 지점과 맞물려 들어가면서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한병철은 조르조 아감벤이 모티브를 두고 있는 푸코의 생명정치를 ‘부정적’(제거, 살해, 학살 등등)인 부분에만 방점을 찍었다고 비판한다. 한병철의 문제의식은 ‘피로사회’나 ‘권력이란 무엇인가’에서도 드러나듯이, 기본적으로 개인과 사회를 움직이는 외부동력이 아닌 스스로 움직이는 ‘내부의 동력’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근대사회의 변화와 함께 후기-근대(Post-Modern), 성과 사회가 등장하게 되면서 외부적 가치를 내제화하고 그 내부동력들이 브레이크 없이 무한하게 폭주하는 상황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그렇기에 한병철은 이렇게 선언한다:현대사회는 조르조 아감벤이 선언한 절대적으로 죽일 수 있는 호모 사케르로 구성되는게 아니라, 절대적으로 ‘살아야 하는’ 호모 사케르의 존재가 지배하고 있다고. 이 절대적으로 살아야함은 죽음이 거세되고 끝없는 자기계발, 끝없는 건강, 끝없는 행복 등등의 무한히 팽창하는 동력과 가치관 속에서 인간 스스로를 끝없이 소모하다 못해 영혼의 무기력증, 우울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다시 시체 소생자들로 돌아와보자:그들이 시체를 살리려는 것은 ‘의미없는’ 죽음을 거부하고, 그 자리에 ‘의미있는 삶’을 채우고자 하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허버트 웨스트가 죽음의 경계를 끝없이 확장하고 옅게 만들려는 시도 또한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소생실험은 끝없이 실패하면서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소생실험의 피험자들은 폭력적이며, 계속 새로운 시체들을 만들어낼 뿐이다. 그렇기에 시체소생자들에 있어서 ‘좀비’란(누차 이야기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좀비라는 개념이 나오지 않는다) 절대적으로 살아야하는 존재인 호모 사케르이자, 죽은 것도 아니지만 동시에 살아 있는 것도 아닌 살지 못하는(Un-Life) 존재로서 육체이자 인간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폭력적인가? 이는 단순하게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으며 신체의 죽음과 함께 영혼은 떠나고 신체를 되살리는 작업과 과학 자체를 비웃으려는 러브크래프트의 허무주의적인 시선이 깔려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다른 작품 ‘바탈리언’이라는 B급 작품에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해보고자 한다:죽은 것이 살아있다는 것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근육과 각종 장기들이 뻣뻣하게 굳었은 상태에서, 그것을 ‘강제로’ 소생시켜 움직인다는 것은 그로테스크함을 넘어서 그 상태에 처한 피해자에게 있어 엄청난 고문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러한 고통은 자연스럽게 ‘타인’의 존재를 향한 분노와 파괴로 표출되게 된다. 영화 바탈리언에서 끝없이 타인의 신체와 피를 갈구하는 형태로 말이다.


그렇기에 시체소생자들은 일종의 ‘과잉생명’에 대한 이야기이자 과잉생명이 불러일으키는 재앙에 대한 이야기이다:한번 죽은 고양이를 다시 죽였는데 약물을 투입해서 또 살리거나, 참수한 시체를 머리 따로 몸통 따로 살려내며, 심지어는 약물을 과다투여해서 내장만 따로 살아움직이기는 극한의 그로테스크를 통해서, 죽음이라는 ‘정지’를 부정하였을 때 불러일으키는 재앙적 상황에 대한 일종의 경고로 바라볼 수도 있다. 또한, 끝없이 살아서 움직여야 하는 인간이 불러오게 되는 파괴적인 속성에 대한 경고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게임 이야기/게임 리뷰




배틀필드 3는 야심차게, 그리고 시의적절하게 콜옵의 빈틈을 치고 들어온 게임이었다. 모던 워페어 3 개발 당시 인피니티 워드(현 리스폰 스튜디오)[각주:1]-액티비전 사이의 불화, 신생 개발팀을 땜빵으로 모던 3 제작에 투입하거나, 일어나는 불안감과 매너리즘에 대한 팬들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안일한 멀티플래이 트레일러를 공개하는 등, 콜옵의 주가는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력한 오브젝트 파괴 효과를 보여준 새로운 엔진 프로스트바이트와 훌륭한 트레일러, 그리고 '혁신적인' 멀티를 부르짖으면서 등장한 배필 3는 수많은 게이머들이 기대했던 마켓 체인저, 백마탄 초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멀티 베타보다도 못했던 콘솔판 그래픽과 팝인 현상들, 32인 멀티 밖에 안되었던 맥빠지는 콘솔 멀티, 팬들에게서 차라리 빼버리라는 이야기까지 들었던 싱글 스토리와 구성[각주:2], 프로스트바이트 버그 때문에 배틀필드 3는 결과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스스로 말한것을 지키지 못한 거짓말쟁이가 되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2년뒤, 차세대 런칭과 함께 배틀필드 4가 등장하게 된다:PC에서부터 현세대(Xbox 360, PS3)와 차세대(PS4, Xbox One)로 동시에 나온 배틀필드 4는, 현재 발매된 차세대 런칭작들 중에서는 차세대의 성능이 어떠한지를 경험할 수 있는 하나의 지표로서 중요한 역활을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배틀필드 4는, 인피니티 워드의 콜옵:고스트의 실패[각주:3]를 넘어서 게임 플래이나 배틀필드라는 프랜차이즈 자체가 콜옵을 뛰어넘고 차세대에서도 자신만의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여부를 판가름하는 주요한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리뷰는 PS4 버전으로 플래이한 뒤에 작성되었으며, 싱글은 절반 이상, 멀티는 6시간 정도 플래이한 뒤에 쓰여졌다.


PS4의 성능 향상으로 인해서, 배틀필드 4는 현세대 콘솔에서는 보여주지 못했던 많은 것을 보여주는데 성공한다. 가장 큰 변화점은 바로 그래픽 디테일 향상과 프레임의 향상. 싱글플래이의 경우 60프레임 고정이며, 멀티플래이의 경우 가변 프레임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이는 후술할 버그 문제가 있기에) 게임 로딩 등의 기술적인 이슈에 있어서는 큰 문제가 없다. 또한 전작의 프로스트바이트 2 엔진을 강화한 프로스트바이트 3 엔진은 놀라운 볼거리를 제공한다:멀티에서 Levolution이라 불리는 시스템은, 싱글에서 보여줬던 대규모 건물-지형 붕괴 연출을 멀티 스테이지에서 일으키고, 그로 인해서 전략적인 이점과 변화를 강조한다. 이 Levolution 시스템은-물론 PS3나 Xbox 360으로는 못봤지만- 혁신적인 무언가라고 하긴 힘들다.[각주:4] 오히려, 이 시스템이 보여주는 것은 멀티에서도 우리는 대규모 파괴 연출이 가능하다, 라는 다이스의 자신감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PS4에서 이러한 연출은 배틀필드 3에서 실망했던 본인조차도 아름답다고 느껴질 정도로 훌륭하다.


싱글 연출에 있어서, 프로스트바이트 3.0이라는 엔진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콜옵식의 클리프행어 연출을 보여주는 배틀필드 4는 차세대 기기에서 그 빛을 발한다:프로스트바이트라는 엔진 자체가 PC에서만 그 진면목을 보여줄 수 있었으며 콘솔에서는 제한적이거나 실망스러운 보여줄 수 밖에 없었다면, 차세대 기기에서는 PC와 거의 동등한 위치에서 게임 그래픽과 연출을 안정적으로(60프레임으로) 소화해낸다. 처음에는 이는 상당히 매력적인 지점이다. 마치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는 듯한 착각이 들면서, 차세대기로 즐길만한 게임으로서 배필 4가 손색이 없다고 믿게 될지도 모른다. 또한 멀티플래이의 스코어링 시스템과 망원경을 이용한 색적-분대원의 지원사격 시스템을 도입해서 싱글 게임에 적용시킨 점은, 싱글플레이를 멀티를 하기전의 하나의 튜토리얼로서 인식하는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주 잠시, 조금만 더 냉정해진다면 배틀필드 4는 단지 스케일만 크게 키운 콜옵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멀티가 인간과 진흙탕에서 싸우는 이전투구의 재미를 추구했다면, 싱글은 콜옵의 복도를 10~20배 정도 뻥튀기 해서 일직선으로 진행하는 지점만 만들어냈기에 다이스의 게임 디자인은 효과적이라고 할 수가 없다. 물론 다이스는 그 거대한 복도를 뭔가 오밀조밀하게 구성을 해보려고는 하지만[각주:5], 결과적으로 이는 거대한 복도에 불과하다:그 복도를 자동차를 몰고 가든, 탱크를 몰고 가든, 보트를 몰고 가든, 결국은 똑같을 뿐이다. 하지만 배필 4 싱글의 문제는 이러한 게임의 구조 자체가 혁명적이지 않다는 문제가 아니라, 게임 자체가 지루하기 그지 없다는 것이다:콜옵이 복도에서 이벤트가 일어나는 방으로, 그리고 다시 복도로, 이것을 무한히 반복하는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질리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스토리와 연출, 그리고 게속 패드를 붙잡고 '다음은 어떻게 될까?'라고 게이머를 몰입하게 만드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콜옵의 스토리가 거대한 사건의 시작과 끝에 자신이 있는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데 반해, 이런 아름다운 그래픽과 연출을 두고 배필 4가 싱글로 보여주는 것은 거의 재앙수준에 가깝다:게이머는 이해도 안되는 스토리[각주:6]를 따라서 무의미한 수만발의 총알과 수백개의 수류탄, 그리고 무너지는 건물과 먼지 사이를 유유자적하게 산책할 뿐이다.


실망스러운 싱글과 달리, 배틀필드 4의 멀티는 여전히 훌륭하다:거대한 스테이지를 배경으로 다양한 장비들을 활용해서 싸우는 것, 한마디로 통제 자체가 안되는 거대한 '개판'을 즐기는 재미이다. 하지만, 배필 3 콘솔판이 16:16이라는 제한적인 인원으로 전장을 재현하려 하다 실패하였고, PC판은 배필 전통의 64인 멀티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기존 시리즈가 갖고 있었던 매력점을 되찾고자 하지만, 기존 시리즈에 있어서 전략성의 배제(지휘관 모드의 삭제라던가, 분대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제한된다라던가)로 인해서 역설적이게도 '콜옵에 가까워져버린' 배틀필드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배틀필드 4는 기존의 전통적인 배틀필드 시리즈로 회귀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지휘관 시스템의 추가와 분대 정원의 확장, 분대 시스템 등의 조정을 통해서, 단순하게 32명이나 되는 통제되지 않는 인간들의 좌충우돌이 아닌 분업과 협업을 강조하는 지점을 만들어내고자 한다.[각주:7]


배틀필드 4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스테이지의 변화일 것이다. 물론 프로스트바이트 3.0을 이용해서 건물이 무너지고, 엄폐물이 박살나는 등의 다양한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전작과 다르게 이번작에서는 각각의 맵에서 서로 상호작용할 수 있는 오브젝트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자동차 차단기 같은 물건을 사용해서 차량이 이동하지 못하게 막는다던가 등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지점들이 생겨났다. 특히 위에서도 언급한 Levolution의 경우, 비록 그것이 스크립트에 의해서 만들어진 지점이기도 하고 연출적인 속성이 강하기는 하지만, 그 지점에 있는 적들을 한꺼번에 몰아내거나 지점을 점거하기 위한 새로운 루트를 확보할 수 있는 등의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지점들도 충분히 있다. 


PS4 버전의 경우, 이러한 새로 추가된 시스템들을 큰 문제없이 소화해낸다:물론 가변 프레임이기 때문에, 게임은 수많은 오브젝트가 모이거나 Levolution이 일어날 때는 심각할 정도로 뚝뚝 끊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현세대 콘솔과는 비교조차 안될 정도의 해상도와 그래픽 디테일, 효과 등등을 큰 버벅거림이나 텍스처 팝인 없이 즐길 수 있다는 점은 충분히 매력적이며, 기존의 콘솔에서는 성능 문제로 불가능했던 64인 멀티를 기본적으로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구입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배틀필드 4는 상당히 추천이 꺼려지는 타이틀이다:이는 현재 진행형으로 벌어지고 있는 '버그'문제 때문이다. EA가 각기 다른 3개의 로펌에게 소송을 현재진행형으로 당하고 있는[각주:8] 현 사태는, EA가 다이스에게 충분한 QA 시간을 주지않고 게임 발매를 강요한 정황들이 속속들이 포착되었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는 지점이다. 실제로 이러한 문제는 게임에서 무수히 많은 프리징과 튕김의 형태로 드러나는데, 현재 다이스는 모든 버그를 잡기전까지는 확장팩을 개발하지 않겠다고 공식 선언했으며 버그 잡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물론, 현재 PS4로 플래이를 해보면 플래이 불가능한 버그 자체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으나, 문제는 튕기는 것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본인 역시 플래이 도중에 튕기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결론적으로 배틀필드 4는 참으로 미묘한 게임이 되었다:누구말처럼, '재미는 있는데 추천은 할 수가 없는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싱글은 거지발싸개 같지만, 멀티는 정말 재밌고, 멀티가 재밌긴 하지만 버그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으며 심지어는 버그와 함께 DLC도 산더미처럼 쌓여있다는 점에서 아쉽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점들을 각오하고 산다면, 배틀필드 4는 재밌는 게임이다. 문제는 그런 점들을 각오하고 사기에는, 게임이 갖고 있는 그리고 게이머가 극복해야하는 결점은 너무나도 크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게임을 괜찮게 뽑아놓고 사람을 갈등하게 만드는 EA는 진심으로 자살을 추천한다.







  1. 현재 EA 산하에서 타이탄폴을 만들고 있으며, 재밌는 점은 인피니티 위드 자체가 EA와 못해먹겠다고 갈라져나온 제작자들의 모임이라는 것이다. [본문으로]
  2. 단지 보여주기 위해서 무의미한 미션들을 집어넣는, 극악한 미션 구성... [본문으로]
  3. 콜옵에 대해서 관대한 웹진들마저도 고스트를 잘근잘근 씹어놓았다. 물론 고스트는 판매량에서 월등하지만, 인피니티 워드의 콜옵은 그야말로(모던 3 이후로 좀 늦은 감이 있지만) 풍전등화라 할 수 있다. [본문으로]
  4. 맵에 변화는 일어난다, 하지만 맵 자체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에 비하면 Levolution의 연출은 확실히 보여주기 위한 '과잉'이라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5. 엄폐할 수 있는 지점이라던가, 숨겨진 아이템을 놓는다던가. [본문으로]
  6. 심지어 미션의 시작과 스토리의 시작이 서로 유리되어 있으며, 게이머는 이 거대한 판의 전체 그림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오히려 보여주기 위한 연출만 지속적으로 삽입할 뿐, 이야기는 유의미한 것이 되지 못한다. [본문으로]
  7. 물론 기존의 배필 3도 협업을 강조하는 스코어링 시스템을 보여주기는 했었다. 하지만 문제는 분대간은 커녕 분대 내에서도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아서 문제였다는 것이었다. [본문으로]
  8. http://bbs2.ruliweb.daum.net/gaia/do/ruliweb/default/ps/93/read?articleId=1275500&objCate1=&bbsId=G003&searchKey=subjectNcontent&itemGroupId=40&itemId=&sortKey=depth&searchValue=EA&platformId=&pageIndex=1 [본문으로]
게임 이야기




보통 게이머에게 있어서 가을과 겨울은 거대한 축제의 장이라고 볼 수 있다:상당히 조용했던 여름이 지나가면, 9월부터 11월까지는 대작들이 포진해있는 시즌이기 때문이며 전통적으로 콜 오브 듀티 시리즈가 11월달에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2013년 가을 시즌은 소프트웨어 자체로서는 작년에 비교하여서 상당히 조용했던(사실 작년도 그렇게까지 흥겨운 한해는 아니었다...) 시즌을 보냈었다. 이는 차세대 콘솔의 발표와 함께, 현세대냐 차세대냐를 두고 모두가 몸을 사리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플4 핸즈온은 올해가 지나기 전에 다루도록 하겠지만, 먼저 여기서는 올해 나왔던 현세대 게임만을 중점적으로 다루도록 하겠다.


2013년 가을은 GTA5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GTA5는 락스타가 엄청난 자본을 들여 만든 게임인 동시에, 그 투자를 1개월, 2개월 단위도 아닌 단 '며칠'만에 회수하여 수익을 낸 기록적인 게임이었으며 그 자체로도 재밌는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시리즈 최초로 공식한글화 되면서 GTA5는 저명한 코미디 프로에서까지 패러디를 만들 정도로 '사회적'인 인기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물론 그것이 상당히 적은 범위의 무언가라는 것은 인정해야겠지만, 방송에서 'GTA'라는 코드를 들고와서 그것을 소재로 코미디 코너를 만들었다는 점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GTA5가 올해의 게임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던 부분이자, 게임 역사에 있어서 유의미한 지점은 바로 하나의 세계를 압축하고 뒤틀어서 소우주로 만들고, 그것을 무대로 뛰노는 게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GTA5의 로스 산토스는 거대한 '편견'의 장이었다:미국인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미국, 이토 케이카쿠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미국 2에 대한 각종 악의 섞인 조롱과 편견을 하나의 패러디로 승화시켜서 그것을 우리가 실제 생활에서 보는 형식으로 압축해서 표현했다는 것이다:게이머는 게임 속에서 TV 애니메이션을 보고, 라디오를 듣고, 극장을 가거나 심지어는 스마트폰으로 세계내의 인터넷을 검색하는 등으로 GTA5의 세계에 있는 문화를 만날 수 있다. 이 문화들은 전적으로 기본 원형의 편견으로부터 모티브를 둔 패러디들이며, 게임은 이 패러디들을 치밀하게 구성하고 또 게임과 밀접하게 연관을 지음으로서(라디오 방송과 게임 스토리 진행의 밀접한 관련) 다른 게임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독특한 경험으로 승화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GTA5의 한계는, 그것이 너무나 뚜렷하고 빛나는 나머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GTA5는 다른 제작자들은 절대 꿈도 못꿀 예산과 시간, 그리고 노하우가 직접된 게임이다. 크레딧만 한시간 반짜리이며 제작비만 '억 달러 단위를 넘어가는 이 게임은, 확실히 역사적이며 기록적이긴 하지만 산업 자체로서 하나의 '표준'이 되기에는 무리가 있는것처럼 보인다. 물론 GTA5가 제시한 게임적인 재미와 그래픽 기술적인 지점들, 또는 게임 구조적인 지점, 세계를 구성하는 지점에서 많은 게임들이 영감을 얻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GTA5를 밴치마킹해서 거기서 아류가 나오고, 아류가 발전을 쌓아서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 자체는 어려워보인다. 왜냐하면 GTA5는 그 자체로 너무나 거대해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게임은 홀로 불타오르는 '태양'과도 같은 게임이라 할 수 있다:그 자체로는 찬란하지만, 그것은 가까이에 오는 모든 것을 불태워버린다.


물론 GTA5 이외에도 다양한 재밌는 게임들이 많이 나왔지만, GTA5나 게임 웹진들이 간과하고 있는 게임이 하나있다. 그것은 바로 포켓몬스터 XY이다. 본인은 올해 했던 게임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게임은 포켓몬스터 XY라 생각한다. 이는 그래픽적인 발전이나, 게임 시스템이 유저친화적으로 변해서가 아니다:포켓몬스터 XY의 위대함은, 전적으로 현재의 트랜드라 할 수 있는 '소셜'의 요소를 3DS라는 다소 제한된 환경을 극복하면서, 동시에 소셜 미디어적인 요소가 게임에 '유의미'하게, 그리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만나게 하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스마트폰의 양산형 소셜 게임들이 소셜에 대한 게이머들의 인식을 낮추고는 있지만, 플포/엑원이라는 콘솔에서조차 소셜미디어적인 요소들(특히 방송 같은)을 강조하는 지점에서 이미 소셜은 거대한 흐름이자 대세이며, 무시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되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든지 스마트폰으로 무선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환경을 바탕으로, 만남이라는 요소를 중요한 게임 요소로 내세우고 있는 소셜 게임들이, 사실상 뽑기 시스템이나 F2P 시스템을 이용해서 사람들 등쳐먹는데 혈안이 되어있는 점은 대단히 아쉬워보인다. 어쩌면 엄청난 가능성을 쥐고 있는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게임들은 이것을 두고 '무엇을 해야하는지' 이해를 못하고 있는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포켓몬스터 XY는 이를 시리즈 전통(내가 포켓몬을 키우고, 다른 사람과 교환하고, 대전한다)으로 재해석하면서 전 세계인들과 함께 플래이하는 소셜 미디어적인 환경을 구축하는데 성공한다. 오히려 포켓몬스터 XY는 스마트폰의 소셜 게임들보다 더 소셜 미디어적인 본질을 파악하고 있는것처럼 보인다:PSS 시스템은 전세계에서 포켓몬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지나가는 얼굴의 형태로 묘사하며, 타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프로모션 비디오를 만들 수 있고, 페북 같이 좋아요! 라고 찍어주기까지하며, 이제 더이상 서로 조건을 제시하며 교환을 하는 포켓몬 교환이 아닌 만남을 위한, 단순히 즐기기 위한 교환의 개념(미라클 교환)까지 추가되었다. 또한 시스템에 있어서 게임 입문 난이도를 낮추는 여러 조정과 이런 소셜 미디어적인 속성이 결합하면서 게임은 기존의 풍경과는 전혀 다른, 색다른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에 포켓몬 XY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포켓몬이며, 소셜 미디어와 게임의 유의미한 결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자세하게 다루지 않은 게임들도 많다. 재미로만 따진다면 GTA5, 또는 그 이상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어크 4나, 전통과 혁신 사이에서 조화를 꾀했지만 정작 스토리와 케릭터 해석에 있어서 큰 실수를 불러일으킨 스플린터 셀:블랙리스트, 다들 엄청난 것을 기대했지만 정작 이상한 게임이 되버린 비욘드 투 소울즈, 시리즈 최대의 변화를 불러일으키면서 캡콤의 건재함을 과시한 몬스터 헌터 4 등등까지, 각자 실패와 성공을 통해서 게임 산업/문화에 있어서 중요한 족적들을 남기고 있다. 앞으로, 2014년은 어떠한 게임들이, 어떠한 것들이 게임 산업과 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것인가. 그런 점에서 나는 내년이 기대된다고 할 수 있다.




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외딴 산골에서 할아버지에게 사냥을 배워 솜씨 좋은 사냥꾼으로 성장하고 있는 소녀 하마지. 무사가 되겠다면서 일찌감치 산골을 떠나 수도인 에도에서 살고 있는 오빠 도세츠.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신 뒤 혼자가 된 여동생의 소식을 전해 듣고, 자기가 보살펴줄 테니 에도로 오라고 편지를 보낸다. 도세츠의 집을 찾아 에도를 헤매던 중, 하마지는 죽은 개의 목이 즐비하게 놓여져 있는 광경에 충격을 받는다. 에도의 군주가 현상금을 걸어 인간(人)과 개(犬)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세(伏)'를 사냥하게 한 뒤, 전리품으로 전시해 놓은 것이었다. 우연히 거리에서 만난 백발소년 시노의 도움으로 오빠를 무사히 만나게 된 하마지는 사냥꾼의 본능으로 후세를 쫓는다. 그리고 마침내 시노가 마지막 남은 후세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입장으로 다시 만나게 된 하마지와 시노! 이들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네이버 영화 시놉시스)



Homo Homini Lupus

(인간은 인간에게 있어 늑대다.-토마스 홉스)


홉스가 자신의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인간은 인간에게 있어 늑대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있어서 위협이라는 것이라 보는 것이 통상적인 분석이다. 하지만 조르조 아감벤은 자신의 저서 호모 사케르에 있어서 이 '인간은 인간에게 있어 늑대다'라는 명제를 기묘하게 분석을 한다:과거 게르만 전통에 따르면 늑대 머리가 씌워지는 처벌을 받는 자들이 있었다. 이들을 죽이는 것은 공식적으로 처벌을 받지 않았다. 아감벤은 이러한 관습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호모 사케르'의 문법을 끌어들인다:호모 사케르, 신성한 인간으로 선언된 자는 그 누구나 죽일 수 있지만 이 신성한 인간은 제물로 바쳐질 수 없다. 이 '누구나 죽일 수 없지만 희생물로 바쳐질 수 없는, 그럼에도 신성한'이란 호모 사케르의 명제를 아감벤은 법의 본질로 본다. 


아감벤은 법을 지배하는 호모 사케르의 문법을 그리스 폴리스의 삶의 양식 조에(단순하게 살아있음)와 비오스(의미있는 삶)를 통해서 분석한다. 조에란 자연에서 단순히 태어나고 죽고 하는 것은 어떠한 가치 판단의 기준도 아닌, 단순하게 거기 있다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의미있는 삶, 비오스란, 그것의 태어남과 삶에 의미가 존재하고 동시에 중요하게 여겨진다. 아감벤은 폴리스에 있어서 시민과 함께 조에, 의미없는 삶들이 함께 살았음에 주목하였다. 아감벤은 즉, 비오스란 조에라는 '예외상황'을 통해서 규정된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외상황을 통한 자신의 규정'은 호모 사케르-맘대로 죽일 수 있지만, 희생물로 바쳐질 수 없는-의 법의 문법을 통해 실현된다:예를 들어보자:사형의 경우, 사형수는 국가에 의해서 죽음을 선언받은 자들이다. 이들은 국가의 처분에 따라서 마음대로 죽임당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어떠한 숭고한 가치를 위한'희생물'은 될 수 없다. 그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헌법과 가치질서의 예외에 속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예외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헌법적 가치질서를 '재확립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인간에게 있어서 늑대다'는 이런 의미다:인간은 타인(인간)이란 존재, 예외상황을 통해서 규정된다. 타인을 배제함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다(나치즘의 유대인 학살과도 같은) 아감벤은 이러한 호모 사케르의 문법, '예외상황'이자 '법이 유보되는 지점들'의 확대와 그러한 예외상황이 실현되는 공간으로서의 '수용소'에 주목했다. 


후세-말하지 못한 내 사랑은 어찌보면 '호모 사케르'의 문법을 파악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지점을 만들어내려는 작품처럼 보인다. 물론 본인으로서는 사토미 팔견전이라는 후세의 모티브, 극장판의 원작소설도 못 읽어 본 상태에서 이러한 평가를 내리는 것이기 때문에 맥락상으로 누락되는 지점들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망념의 잠드 감독인 미야지 마사유키가 감독으로 참여했다는 점, 그리고 이미지나 이야기에 있어서 잠드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판단되는 지점이 있기에 이 글에서는 그러한 지점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분석하고자 한다.


후세에서 모든 사건의 원인은 쇼군의 후세 사냥 명령이다. 하지만, 왜 후세를 사냥해야 하는가? 후세가 인간에게 해로운 존재라서? 물론 후세는 인간의 영혼을 먹는다. 하지만 영혼을 먹지 않고 인간들 틈에 숨어서 사람처럼 살기를 택하는 후세들(이테츠루와 그녀의 아들)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후세를 사냥해야 하는가? 재밌게도 작품은 여기서 후세의 기원과 그 기원의 이야기에 푹 빠져있는 쇼군을 내세운다. 인간인 후세히메와 개인 야츠후사 사이의 사랑의 산물인 후세(늑대인간)는 아버지인 사토미 요시자네에게서 쫒겨나게 된다. 개항 직전의 상황에서 쇼군은 위태로운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함을 이야기속의 요시자네의 자신을 대입하여 극복하려 한다:즉, 외부의 것에 의해서 더렵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순수하지 못한 것을 제거한다. 그것이 바로 후세 사냥의 원인이었다. 즉, 쇼군은 자신의 존재를 순수하지 못한 후세를 죽임으로서 입증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기에 개도 인간도 아닌, 죽일 수 있지만 동시에 그것이 어떤 의미있는 목적을 위해서 받쳐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후세의 죽음은 '인간이 의미있는 인간으로 정의하기 위한 예외사항'의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후세의 기본 모티브는 철저하게 '호모 사케르'적이며 '인간은 인간에게 있어 늑대'다:후세는 사회에 있어 인간도, 개도 아니기 때문에 죽음으로서만 그 가치를 다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후세가 인간의 영혼에 목말라 하는 것, 그것은 후세에게 있어서도 인간은 '죽음'으로서 의미가 있는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작품은 일방적인 폭력이라기 보다는 서로가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는 긴장상황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쌍방향적인 호모 사케르적 전제를 깔고 시작하는 작품은 상당히 재밌는 지점을 통해서 이러한 문제 상황을 풀어나가고자 한다:그것은 바로 여자도 남자도 아닌 여자와 남자도 여자도 아닌 남자의 사랑을 통해서이다. 주인공인 하마지는 여자 사냥꾼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를 '여자'로 인지하지는 않는다. 오로지 그녀를 여자로 인지하는 자는 후세인 시노 뿐이다: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가부키 배우인 시노는 곱상한 외모와 함께 무대에서 '여성'으로 등장한다(과거 가부키 무대에서는 여자가 올라오는 것이 금기였기 때문) 즉, 시노는 인간도 개도 아닌 동시에, 여자도 남성도 아닌 기묘한 위치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작품에서 강조점을 맞추는 것은 '인간도 개도 아닌' 존재로서의 후세다:마지막에 하마지가 시노를 긍정하는 지점도, 인간도 개도 아니지만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긍정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지막에 하마지는 머리를 푼다:그녀의 남자다운 행동양식 자체는 변화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은연중에 거부하고 있었던 여성성을 그녀가 받아들임으로서 거부가 아닌 화해, 함께 살아가기를 선택함을 은연중에 암시한 것이다.


즉, 작품은 개도 인간도 아닌, 여자도 남자도 아닌, 심지어는 쇼군으로서의 정체성과 자기 자신으로서의 정체성, 눈이 멀어서 스스로 글을 쓸 수 없는 글쟁이 등등 그 어느쪽에도 끼지 못하는 변두리의 인간들이 서로 만나고 사랑하며 다투는 이야기다:그렇기에 극의 마지막 클라이막스는 일종의 대화합의 장이기도 하다. 에도의 화제 앞에서, 다양한 계층의 인간들은 힘을 합쳐서 화재에 저항한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이러한 거대한 폭력의 '인과'의 흐름을 끊어낼 수 없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마지막 동력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하마지가 마지막에 시노에게 편지를 전달하는 것, 후세와 인간이 서로 죽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기 위해서 죽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지점을 만들어낸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점들은 미야지 마사유키 감독의 데뷔작이자 전작인 망념의 잠드에서도 뚜렷한 지점이다:죽은 자와 함께 살게된 존재, 잠드가 끝없는 폭력의 순환고리를 어떻게 끊어내는가, 그리고 폭력의 문법이 끝날 때까지 나는 희망을 갖고 인내하고 기다리겠다 라고 선언하는 지점에서 망념의 잠드와 후세는 연결고리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망념의 잠드가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을 본즈라는 고퀄리티의 작화를 바탕으로 엄청난 스펙타클로 그려냈다면, 후세의 미학은 철저하게 소품적이다.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지만, 동시에 그러한 만남은 소소한 만남이며 마지막 화제와 갈등, 싸움에서조차 많은 예산이 들어갔다기 보다는 예산이 적게 들어간 지점이 눈에 보인다.


하지만, 이 둘은 많은 점에서 또다른 공통점들을 지닌다:혹자는 장르 문법을 인용하면서 독특한 질감과 내용을 통해서 우울의 디아스포라를 만들어내는 제임스 그래이와 망념의 잠드의 마지막을 이어서 보기도 했다. 망념의 잠드의 마지막은 엄청난 전투와 클라이맥스, 그 뒤에 절망에게서 희망이 승리를 쟁취하는 카타르시스를 그려내기를 거부한다. 대신에 아키유키는 히루켄 황제에게 화해의 손을 내민다:자신의 이름을 줌으로서, 히루켄 황제와 함께 살기를 꾀하는 것이다. 이런 불현듯 찾아오는 폭력의 중단이 후세의 마지막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시노와 쇼군의 싸움은 어떠한 결착으로 이어지지 않는다:오히려 쇼군의 목숨을 쥔 시노가 죽이기를 거부함으로서 폭력은 멈춘다. 감독은 주역과 악역에 대해서 똑같은 평등한 시선을 보내고, 그들의 갈등 자체가 아닌 갈등의 거대한 인과, 순환고리에 주목한다. 그렇기에 그 모든 것이 끝났기에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인)인 쇼군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바라던 안식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장르적인 클라이맥스의 거부와 함께, 작품은 세세하게 장르 공식을 파괴하는데 주력한다:사냥은 통하는 것이다, 라고 선언하는 초반 시퀸스에서 하마지는 통하는 순간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방아쇠를 당긴다. 하마지가 처음 상경한 뒤 이곳 저곳을 해매면서 평화로운 에도의 정경을 묘사하는 지점에서 잘린 후세의 머리를 전시하는 장면을 삽입하거나, 시노가 자신의 동포를 죽인 현상금 사냥꾼의 한쪽 눈을 빼앗는 지점 등등에서 폭력은 불현듯, 낯설게 삽입되어 들어온다. 그러면서 동시에 영화는 멜로드라마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멜로드라마'를 거부한다:이테츠루의 아이가 죽어서 목이 잘렸다는 이야기(전해지지 않은 편지, 시노가 이테츠루에게 아들에 대해서 말못하는 지점, 어째서 이렇게 어린 늑대까지 죽였냐고 하마지가 일갈했던 지점, 시노의 격렬한 분노 등등에서)는 아주 명백하지만 극 내에서 그것은 이야기의 형태로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자극적인 소재'를 극은 회피함으로서 이야기를 담담하게 만들어낸다. 이것은 클라이맥스에 있어서 결정적인 폭력을 거부하는 지점 등과 명확하게 맞물려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장르적 공식을 거부하는 지점을 바탕으로, 모든 케릭터들은 평등해진다:남자도 여자도 아닌 여사냥꾼과 늑대도 인간도 아닌 가부키 남자 배우, 변두리 빈민촌에서 한탕하기를 바라는 속물적이지만 인간적인 오빠와 홀아비와 아들 등으로 구성된 빈민촌 이웃들, 유명한 이야기꾼과 그의 손녀, 심지어는 이 모든 것의 원흉과 현상금 사냥꾼까지. 극은 일방적으로 악과 선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어떤 의미에서 극은 그렇기에 '공정'하다.


결론적으로 후세-말하지 못한 내 사랑은 감독인 미야지 마사유키의 가능성을 보여준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물론 이것이 모티브-소설 원작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가, 는 알 수 없기에 이것이 전적으로 감독의 재량이자 역량이라고 드러난다고는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망념의 잠드의 연장선상에서, 후세는 아쉬운 부분도 있었지만(스펙타클의 부족함), 동시에 경계가 희미한 변두리 인간들의 이야기를 장르적 공식을 묘하게 뒤틀고 거부하는 동시에 평등하게 다루고 있다는 지점에서 후세는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를 스타일적인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유아사 마사유키와 함께 감독 미야지 마사유키는 앞으로 기대가 되는 감독이라고 볼 수 있다. 








덧.원래 제목은 후세-철포 소녀의 사냥이야기 였으나, 국내에서 후세-말하지 못한 내 사랑으로 이야기를 바꾸었다. 

하지만 본인은 원제 보다는 번역한 제목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게임 이야기





2013년이 끝나가고, 게이머들의 관심사는 올해의 게임(Game of the Year, GOTY)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물론 이는 매년 치뤄왔던 연례행사이기도 하지만, 올해는 유달리 더 각별한 관심이 모여지는 듯 하다. PS4와 엑스박스 원의 성공적인 런칭에 힘입어 사실상 한 게임기 세대가 끝나고 다음 세대가 시작되는 가운데 콘솔의 마지막을 어떤 게임들이 장식할까? 이번 세대 게임기로 나온 게임들은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었을까? 그렇기에 이번 올해의 게임은 각 게임기들에 있어서 중요한 성적표이자 이정표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본인은 이렇게도 생각해본다:'올해의 게임'이라는 타이틀에 있어서 우리는 너무나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게 아닐까하고. 괴테는 일찍이 "어떤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모든 것은 원래 더는 평가될 수가 없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렇기에 훌륭하게 잘만든 게임은 어떤 객관적인 수치에 의해서 '우열' 자체를 가릴수가 없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동시에 그것은 수많은 게임들, 성공작에서부터 실패작까지에 적용된다고도 본다. 그리고 벤야민은 엥겔스를 인용하면서, 역사를 변증법적으로 관찰하는 것, "역사는 그에게 어떤 구성의 대상이 되는데, 그 구성의 장소를 이루는 것은 공허한 시간이 아니라 특정한 시대, 특정한 삶, 그리고 특정한 작품이다"라고 서술한다:즉, 그렇기에 본인은 올해의 게임을 선정하고 그것을 하나의 중요한 지표로 고정하는 것, 즉 올해의 게임을 선정함으로서 역사에 있어서 한 작품(혹은 그 작품으로 대변되는 콘솔진영)이 '승리'하거나 혹은 '패배'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게이머가 게임을 하면서 게임 내에 흐르는 맥락을 보고 그것을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그렇기에 올해의 게임을 선정하는 것은 즐기기위한 축제로만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렇다면 본인에게 있어 올해는 어땠는가? 올해는 게이머로서는 상당히 기묘한 해였다. 기본적으로 게임이 가장 몰리는 시즌이 9월에서부터 11월이었다면, 이상하게 올해는 9월에서 11월달의 게임들이 가장 아쉬웠던 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차세대 콘솔에 대해서 다들 몸사리는 분위기가 지속되는듯 하는데,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올해 하반기는 작년에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지루했던 한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대신 상대적으로 상반기(1월에서부터 6월까지)는 즐길만한 게임들이 많이 나온 편이었다. 


여전히 상반기에 있어서 기억에 남고, 그리고 재밌었다고 생각나는 물건은 크게 2작품이었다:바이오쇼크 인피닛과 라스트 오브 어스. 바이오쇼크 인피닛의 경우, 전작에 비해 너무 많은 부분이 바뀌긴 했지만 전작의 매력을, 특히 스토리가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물론 그것이 완벽하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오히려 이야기의 모티브가 과거 보았던 노에인과 유사하다는 점에서는 어찌보면 바이오쇼크 인피닛의 경우 거대한 뒷북처럼 느껴지기도 했으며 엔딩은 해법을 제시한다기 보다는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바이오쇼크 인피닛은 그런 아쉬움을 뒤로하더라도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더 적극적으로 변한 전투 시스템과 콜롬비아라는 세계의 아름다운 비주얼, 만천하에 반전과 복선을 까발리고 그것을 이야기의 진행에 따라 차근차근 맞춰나가는 스토리, 그리고 결국은 어떤 선택을 해도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숙명론적인 엔딩까지. 


라스트 오브 어스는 평단과 대중의 심한 띄워주기 때문에 거부감을 느끼는 작품이긴 하지만, 라스트 오브 어스의 매력 자체는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무언가라고 생각을 해본다. 그것은 그래픽이나 전투 매커니즘의 문제가 아닌, 거대한 이야기(세계와 지구, 우주를 구하는)가 아니라 작은 서사로 카메라를 세밀하게 접근시키고, 거기에 걸맞는 디테일과 인물들의 묘사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라 할 수 있다:물론 모분께서는 그것을 세카이계(세계-사회-나의 구조에서 사회를 거세함으로서 거대한 세계와 보잘것 없는 나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거대한 세계에 잡아먹힐거 같은 느낌과 황홀경을 드러내는 그러한 일본 서브컬처의 흐름을 일컬음)적이며 동시에 그 엔딩마저도 세카이계적인 결론이라고 말씀하시긴 하셨지만(그리고 본인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본인이 라스트 오브 어스에 대해서 느끼는 거부감이란, 전적으로 대중의 파시즘적이라까지 할 수 있는 '열광' 때문이다:라오어는 전적으로 '새로운' 작품이 아니다. 어디 우주에서 외계인들이 내려와서 인간의 탈을 쓰고 게임회사 차려서 게임을 만든것도 아니고, 소니 사장이 시나이 산에 올라서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서 탄생한 무언가도 아니다. 라오어는 많은 부분을 그들의 선배로부터 차용하고 있다. 극단적인 HUD의 부재는 데드 스페이스로부터, 전반적인 스토리라인은 칠드런 오브 맨으로부터, 라오어의 전투 시스템들은 과거의 잠입게임으로부터 어느정도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라오어가 높이 솟아오르는 지점은 이걸 모두 섞어서 내밀하고 조밀한 무언가로 엮어냈다는 것이니까. 하지만, 라오어가 과대평가 받는다고 보는 것은, 라오어 자체의 가치보다 게임이 더 높은 평가를 받는게 아니라 라오어 자체가 마치 '고급문화'처럼 포장되는 그러한 지점들 때문일 것이다.(시민 케인이나 고급 스테이크 같은)


이 어이없는 과대포장은, 마치 게임이 게임을 넘어선듯한 무언가라는 뉘앙스를 만들어낸다. 이제는 영화광에서부터 영화를 잘 모르는 사람까지 시민 케인을 안다. 그렇기에 엠파이어지의 표현, 라오어는 게임의 시민 케인이 될 것이다, 라는 선언은 정말로 우스꽝스럽게 들린다:과연 모든 사람들이 라오어를 알게 되고 기억할 것인가? 라오어에는 게이머들은 인지하지 못하지만 아주 본질적인 한계가 존재한다:라오어는 좀비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좀비물이란, 결과적으로는 서브 컬처적으로 한정된 지점에 불과하며 그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는 사람도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라오어가 그런 좀비물이라는 장르적 '한계'를 뛰어넘고 있는가? 그건 절대적으로 아니다. 라오어가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처럼 세계를 충격에 빠뜨릴 정도의 장르적인 위력을 갖고 있는가? 라오어가 '28일 후' 나 '새벽의 저주'같이 장르의 표현 방식 자체를 새롭게 재정의할 정도로 혁명적인 지점을 보여주었는가? 본인이 판단하기로는 라오어는 본인이 적극적으로 차용한 이야기 모티브인 칠드런 오브 맨보다도 못하다:칠드런 오브 맨이 갖던 인류에 대한 영성의 실현이 과연 라오어에서도 일어났는가? 꼭 모티브 자체를 차용했다고 해서 같은 길을 걸을 필요는 없지만, 훌륭한 모티브를 차용하고도 점진적은 드라마의 쌓아올리기가 아닌 너무 극단적인 급전개(세계를 파괴하고 개인을 구한다)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지점도 있는 것이다.


라오어가 갖는 장르적 영향력이란, 결과적으로 카메라를 사적이고 내밀한 지점들로 돌린 것에 불과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리고 그조차도 마지막엔 너무나 급격하고 뜬금없으며, 심지어 그러한 결말조차도 모 분이 비웃듯이 '세카이계'적이다. 물론 그 전에 '대규모 자본을 들인' 이런 작품이 거의 전무했다는 점은, 블록버스터 게임에 있어서 새로운 공식의 가능성을 세웠다고 볼 수 있으나 문제는 라오어가 보여주는 표정 연기, 모션의 세밀함을 제외하고 게이머가 느끼는 감정적인 충격이 과거의 작품들인 스펙옵스나 워킹데드를 능가할 정도인가, 라고 물어보면 본인은 고개를 가로저을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상반기는 이렇게 두 작품. 라스트 오브 어스와 바이오쇼크 인피닛 정도가 기억에 남는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시리즈의 부활을 알린 툼레이더나 잘만들었는데도 은근히 묻힌 데빌 메이 크라이 같은것도 좋았었다.(데빌 메이 크라이는 가끔식 다시 꺼내서 해보곤 한다.) 물론 데드 스페이스 3 같은...리뷰에서 잔뜩 욕을 써놨으니 이정도로만 마무리 짓겠다. 





덧.다음에 다룰 하반기는 아마도 GTA5와 포켓몬XY 이야기가 주가될듯 합니다.







게임 이야기/게임 리뷰




*스포일러 있습니다.



잠입액션 게임 프랜차이즈에 있어서 양대산맥이 있다:스플린터 셀 시리즈와 메탈기어 시리즈. 이 둘은 잠입이라는 테마를 두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게임을 구축하는데, 메탈기어 시리즈가 MSX 시절의 아케이드 게임으로부터 그 게임 시스템을 이어받으면서 시리즈 및 시대에 맞게 게임을 추가하고 다듬고 재구성하는 쪽이라면, 스플린터 셀 시리즈는 고전 잠입게임인 씨프로부터 빛과 그림자, 소리를 이용한 잠입의 개념을 계승하여 그것을 극한의 형태의 시뮬레이션으로 구축한 쪽이라고 볼 수 있다.[각주:1] 그리고 이러한 '시뮬레이션'의 성격은 세번쨰 작품 카오스 이론에서 정점을 찍는다:소음, 노출도, 조명 강도 등에 따라서 좌우되는 잠입시스템과 복합적으로 구성된 맵구성 등등 카오스 이론은 시리즈의 정점을 찍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시리즈의 정점을 찍은 카오스 이론의 문제점은 바로 그 특유의 복잡성에 있었다:게임은 너무 복잡해지고 어려워진 나머지, 초심자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구조로 변하고 말았다. 그렇기에 스플린터 셀 시리즈는 카오스 이론의 시스템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거기서 벗어나서 진입장벽을 낮추려는 시도한다. 이중간첩 이후에 나온 다섯번째 작품 컨빅션은 그런 실험의 극단적인 연장선상에 있었던 작품이었다. 복잡한 잠입 시스템은 제거되고 게이머는 어둠속에 있으면 은신한 것으로 간주된다. 빛에 노출되지 않으면 화면이 흑백조로 바뀌며 적들은 플래이어를 '거의' 탐지하지 못한다.[각주:2] 이러한 잠입 기제와 다층적인 스테이지 구조가 적들을 마킹하고 한꺼번에 제거하는 지정&수행의 추가 등과 맞물리면서 게임은 잠입게임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숨바꼭질 '학살' 게임이 되었다. 게임은 개성넘치고 재밌는 지점이 많았지만, 긴 개발기간에 비하면 너무나 짧았으며[각주:3] 동시에 최고 난이도에 맞춰놓고 플래이를 해도 쉬울 정도였고, 무엇보다 플래이는 전략적인 선택이 없는 직선형의 구조였다. 여기서 스플린터 셀:블랙리스트는 컨빅션의 직관적이며 쉬운 잠입을 끌고오면서 동시에 기존의 시리즈의 다양한 전략적 움직임을 게임에 도입하는 등 전통과 혁신 사이에서 조화를 꾀한다.  


게임은 컨빅션과 같은 그림자를 이용한 잠입기제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컨빅션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다. 그림자에 숨으면 눈 앞에 있어도 눈치 못채던 극단적인 컨빅션과는 다르다:기본적으로 그림자는 내가 발각될 '가능성'을 줄여주는 기제에 불과하다. 어둠 속에 숨어있어도 적들은 피셔를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이번작에서는 그림자를 꿰뚫어볼 수 있는 적들을 하나의 정식 카테고리로 추가하고[각주:4] 적들이 색적 범위가 늘어나는 등 그림자는 더이상 만능의 잠입 기제가 아니다. 그리고 전작의 지정&수행이 한번에 다섯명의 적을 처형해서 일방적 학살을 방조하였다면, 이번작의 지정&수행은 최대 3명까지만 처형할 수 있으며 심지어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제한적으로 처형을 막는 적들[각주:5]이 뻔질나게 등장한다. 이러한 변화점들은 컨빅션에 대한 일종의 반성이라 볼 수 있는데, 컨빅션에서 플래이어를 너무 강력하게 만든 나머지 게임이 쉬워졌던 지점들을 모두 정리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신에 게임은 플래이어에게 다양한 도구와 장비, 그리고 무기를 주고 게임을 풀어나갈 수 있는 선택지들을 부여한다. 컨빅션에서는 5개의 가제트를 모두 들고다니면서 화려하게 무쌍을 펼쳤다면, 블랙리스트는 자신의 게임 플래이 스타일, 미션과 스테이지 상황에 따라서 장비와 무기를 바꿔가면서 플래이를 해야한다. 게임은 이러한 플래이 성향을 3가지 카테고리로 정리한다:비살상 은신 잠입 위주의 고스트 스타일, 살상 잠입 위주의 팬서 스타일, 잠입하지 않고 학살 닥돌 위주의 어설트 스타일[각주:6]. 그리고 전작의 처형 시스템을 개편해서,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처형을 채울수 있게 바꾸고[각주:7], 달리면서 처형을 할 수 있는 등 3가지로 세분화된 시스템에 맞게 기본적인 동작들도 조정되었다.  그리고 기존의 시리즈가 잠입을 강제하는 쪽에 가까웠다면, 블랙리스트가 보여주는 미덕은 이 다양한 스타일 모두를 포용하고 존중한다는 것이다.


이런 존중은 게임 스타일 자체에 효율에 차등을 두지않는 점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물론 게임 내에서 꼭 고스트-어썰트 스타일로 플래이 해야하는 지점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게임은 기본적으로 스테이지를 어떻게 플래이할건가에 대해서 강제하지 않는다. 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지점이 바로 '점수 계산법'이다. 게이머가 행한 스타일에 따라서 게임은 점수를 계산하는데, 어떤 플래이 스타일로 하든 감점 없이 오로지 게이머가 한 행위를 합산하고 그것이 얼마나 효율적이었는가를 보여줌으로서 마치 게임은 '나는 네가 어떤 방식으로 게임을 하더라도 그것을 존중한다'라고 이야기하는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블랙리스트가 다른 시리즈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이러한 점수 계산 시스템 때문일 것이다. 이로인해 게이머는 다양한 방식을 실험하고자 하는 의욕, 좀더 효율적으로 게임을 풀어나가고자 하는 의욕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각각의 플래이 스타일에 걸맞는 첨단 장비들을 제공함으로서 그것을 조합해서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에 대한 플래이어의 머리굴림을 요구하는 지점들이 있다.


게임은 기본적으로 블랙리스트 스토리를 다루는 싱글 미션 이외에 12개의 코옵/싱글 부가미션을 탑재하고 있다. 전작이 분량 부족으로 많은 욕을 들어먹은 것에 대한 반성이라도 되는 듯이, 12개의 코옵/싱글 부가미션은 모두 합치면 상당한 분량을 자랑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각 미션들(스토리/부가미션)의 스테이지의 구성은 기본적으로 일직선 진행에 숨바꼭질을 할 수 있는 아레나 형식의 스테이지를 던져주는 하지만, 컨빅션에 비교하면 다양한 클리어 조건과 스테이지 구성을 보여주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스토리는 일반적인 밀리터리 슈터물의 그것이라고 볼 수 있다:미국의 적이 있고, 미국은 그 적에 무력하게 당할 뿐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홀로 분연히 떨쳐 일어나서 미국의 적들을 박살낸다. 하지만 블랙리스트는 이러한 과정을 상당히 리드미컬하고 급박하게 그려낸다. 주인공들보다 한발 앞서있는 적들을 쫒기 위해서 무모한 도박을 하고, 전쟁의 위협을 무릅쓰고 적진에 뛰어드는 등 급박한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하지만 이것들이 단순히 스팩타클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야기가 구성되는, 역전된 인과를 보여주는 콜옵/배필식의 이야기와 다르게 블랙리스트는 짜임새가 있으며 이야기 자체로도 흥미진진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스토리의 모든 장점들은 마지막 F벙커에서 일어나는 이벤트들, 특히 이 게임의 슬로건이자 핵심 키워드인 '다섯번째 자유'에 대한 QTE는 게이머를 맥빠지게 함을 넘어서 게임이 게이머가 여태까지 경험했던 모든 경험을 게이머 눈 앞에서 정면으로 부정하는 듯한 느낌마저 만들어낸다. 다른 자유를 지키기 위한 '다섯번째 자유'의 존재는 여태까지 기존의 밀리터리 슈터류들이 숨기거나 무시하고 있었던 행동의 원동력을 정면으로 끄집어내서 정식화시킨 하나의 기제화 시킨 무언가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다섯번째 자유의 존재가 없었더라도 이야기는 진행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개념의 존재로 인해서, 게임의 스토리는 확고한 행위의 원천과 뭔가 멋들어지는 지지 기반을 갖게 된다고 할 수 있다.[각주:8] 하지만 F벙커에서 벌어지는 '다섯번째 자유를 행사하십시오'라는 버튼 액션은, 다섯번째 '자유'라는 것은 고작 버튼 누르는 자유에 불과한가? 그리고 그런 도를 지나친 과격함을 보여주고서는 그것을 다섯번째 자유로 포장하는 지점이 과연 스토리에 있어서 필요했는가? 싶은 그런 느낌과, 마지막 엔딩영상에서 보여주는 다섯번째 자유의 껄끄러운 지점들은 게임에 대한 좋은 인상을 망치기에 충분했다.[각주:9]


결론적으로 블랙리스트는 재밌는 게임이며, 제값은 하는 게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스토리의 결론은 황당함을 넘어서 아방가르드적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또한 기존의 올드 시리즈 팬들, 카오스 이론을 사랑하는 팬들에게 있어서는 블랙리스트는 뭔가 어중간한 무언가로 비쳐질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런 지점들에 대해서 좀더 너그러워진다면, 스플린터 셀 블랙리스트는 잠입 액션 게임으로서 매력적인 작품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1. 씨프에서 화살로 불을 꺼서 그림자를 만들고 그속으로 숨어들어가는 것처럼, 스플린터 셀에서도 조명을 총으로 쏴서 그림자 속에 숨어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잠입 기제이다. [본문으로]
  2. 플래이어가 노출되는 지점은 바로 빛에 노출되거나 소나고글을 가진 적에게 노출당하는 것 두가지 밖에 없다. [본문으로]
  3. 이는 컨빅션이 한번 엎어진 프로젝트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4. 컨빅션에서 소나고글을 쓰는 적들이 희귀하게 나온데 반해서, 블랙리스트에서는 야간 투시경을 쓴 적들이 진짜 징그러울 정도로 많이 나온다. [본문으로]
  5. 헬멧을 쓴다던가, 중장비를 입고 나온다던가. [본문으로]
  6. 물론 학살-닥돌이라고는 하지만, 블랙리스트의 전투는 정면 돌파라기 보다는 측면 공략의 성격이 강하다. [본문으로]
  7. 네개의 충전 게이지를 주고, 암살은 4개를 한꺼번에, 헤드샷은 2개를, 일반 킬은 1개를 채우는 식으로해서 총 4개를 다 채울 경우 지정&수행을 할 수 있게 바뀌었다. [본문으로]
  8. 예를 들어, 다른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법, 절차, 심지어는 그 권한을 준 대통령마저도 쌩까버리는 강력한 자유를, 단지 주인공들의 감과 과감함이 아닌 그보다 '상위'의 무언가에 주는 그런 지점들이 있다. [본문으로]
  9. 다섯번쨰 자유와 주권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호모 사케르와 연관지어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중이며, 앞으로 블랙리스트 자체는 논하지 않더라도 '다섯번째 자유'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꾸준히 언급할만한 지점이 있다고 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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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스포일러 있습니다.



열네 살 소년, 살인자 ‘머드’를 만나다! 14살 소년 ‘엘리스’는 절친 ‘넥본’과 함께 미시시피강 하류 무인도에서 나무 위, 놀라운 모습으로 걸려있는 보트를 발견한다. 아지트가 생겼다고 좋아하는 것도 잠시, 십자가가 박힌 구두를 신고 낡은 셔츠를 입은 채 팔에 뱀 문신을 한, 검게 그을린 ‘머드’가 소년들 앞에 나타난다. 사랑하는 여자 ‘주니퍼’를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 중인 ‘머드’는 ‘엘리스’와 ‘넥본’에게 도와줄 것을 요청하고, ‘엘리스’는 서로 사랑하는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하는데…


테이크 쉘터 감독인 제프 니콜스의 신작 머드는, 참으로 클리셰스럽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를 은유나 비유가 아닌,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서 한 소년이 성장하는 과정과 사랑의 이야기를 다루고자 한다. 그러나 주제와 이야기를 뻔히 드러냄에도 불구하고, 머드는 정말로 찬란하게 빛나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머드는 사랑의 다양한 형태(순애보에서부터 비뚤어진 자식/형제 사랑까지)를 공평하게 다루고, 이 다양한 모습을 지닌 사랑의 소우주들을 한 아이의 성장 과정속으로 압축하여서 서술하기 때문이다.


머드의 이야기는 전적으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는 끊임없이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제시하고, 그리고 모든 케릭터들의 동인을 사랑으로 설정하는 등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제시한다. 하지만, 영화는 대중매체가 흔히 보여주는 사랑만능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머드의 시작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리라고 생각했던 커뮤니티인 가족을 붕괴시키면서 시작한다. 부모가 이혼하면서, 주인공인 앨리스는 자신의 세계를 구성하는 대부분을 잃어버리고 가치관에 혼란을 느낀다. 그리고 붕괴하는 그의 작은 세계속에서 앨리스는 진정한 사랑에 목말라하며 그것을 갈구한다. 자신이 믿고 의지했던 세계가 무너지면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중심축을 찾아야하기 때문이다. 머드가 자신의 진정한 사랑 주니퍼를 만나기 위해 숨어있다는 것을 안 앨리스가 그를 적극적으로 돕는 것도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칸소 촌뜨기이자 인디언과 미신을 자신의 행동근거로 인용하는 머드란 케릭터는 미시시피 강의 끝에서, 앨리스의 세계가 끝나는 지점에서 만난 기이한 인연이다. 나무에 걸린 보트처럼, 그리고 영화는 영화속 대사처럼 '어떻게 나무위에 보트가 걸리게 되었을까'라는 신비한 인연과 미시시피 강 하구 아칸소 주가 보여주는 독특한 자연경관이 맞물려 들어가면서 앨리스의 개인적인 성장통을 신비한 체험으로 다룬다. 이는 마이애미 주 끝자락에서 문명에 저항하며 쓰래기들을 모으고 자연적인 힘의 위력을 보여주었던 비스트 오브 서던 와일드와 유사한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비스트가 허시퍼피라는 인물이 홍수와 파괴라는 세계의 양측면을 보고 세계를 극복할 힘을 얻어내는 과정이었다면, 머드는 앨리스와 머드의 만남, 그리고 머드에게 매료되었다가 그에게 실망하고, 다시 화해하는 과정을 통해서 소년이 성장하고 세계를 재발견하며 이해하는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앨리스가 머드를 통해 보는 것, 그것은 주술과 미신, 그리고 진정한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신비로운 인간을 통해서 기존의 가치질서들, 붕괴하는 자신의 세계를 회복할 수 있는 원동력을 발견한다:그것은 바로 지고지순한 사랑이다. 자신이 뱀이라는 악운에게 당한 것을 주니퍼가 구해주고, 그로 인해서 주니퍼에게 평생 빠졌으며 진정한 사랑을 위해서 헌신한다고 이야기한 머드는 주니퍼를 자신의 행운의 새라고 지칭한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한명의 남자가 한명의 여자에게 영원불멸한 사랑에 빠지는 평범한 러브스토리를 주술적인 세계관으로 재구성한 것일지도 모른다(그리고 이 지점이 앨리스가 처음 믿은 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주니퍼와 머드의 사랑은 앨리스가 생각한것처럼 지고지순하지 않았다:자신에게 문제가 생길 때만 머드에게로 돌아가고 다시 떠나는 일을 반복하는 주니퍼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보같이 그녀를 위해서 헌신하고 끝내 살인까지 저지르는 머드. 뒤집어서 본다면, 뱀에게 물림으로서 주니퍼를 만나게 된 머드는 역설적이게도 주니퍼라는 뱀을 만난 셈이기도 한 것이었다. 그런 그가 앨리스와 넥본의 도움을 받아 나무에 걸린 보트를 내려서 물위에 띄우고자 하는 것, 다시 한번 주니퍼와 잘되기를 기원하지만 동시에 스스로 나서지 못하고 섬안에 틀어박힌체로 어린 아이들 뒤에 비겁하게 숨는(주니퍼를 직접만나지 않고 쪽지를 보내는 것) 것은 오히려 지고지순한 사랑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현실도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어찌보면 이는 처음부터 은유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신비한 이야기꾼은 자신이 있는 섬에서 떠나지 않고 세계와 마주하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머드는 그런 자기 자신의 비겁함을 아이들이나 믿을법한 다양한 주술과 미신의 형태 뒤에 숨기고 있었던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부모가 없었던 머드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였던 톰은 머드를 믿지 말라고 경고한다:그는 타고난 '거짓말쟁이'라고. 그러면 이 모든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거짓일까? 앨리스와 넥본이 허클배리 핀 마냥 미시시피 강을 뒤지면서 벌였던 지고지순의 사랑이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한 모험은 모두 의미가 없던 것이었을까? 여기서 먼저 짚고 넘어가야하는 점은, 톰의 머드에 대한 지적은 반절만 맞았다는 점이다:머드는 거짓말쟁이나 사기꾼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이야기꾼'에 가깝다. 톰에 대해서 암살자이자 CIA 출신이라고 이야기하는 지점들(사실 톰은 해병대 저격수 출신이었다)이나 그가 자신이 믿는 미신과 주니퍼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지점들에서 머드의 모습은 전형적이며 탁월한 이야기꾼의 그것이라고 볼 수 있다:그리고 이야기꾼의 이야기에는 극적 재미를 위한 '허풍'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아이인 앨리스는 그러한 허풍이 드러나는 지점, 머드가 현실도피하고 어린아이들 뒤에 숨는 비겁자적인 모습을 발견하고 그에게 큰 실망을 하게 된다. 하지만 유념해야하는 점은, 이야기에 허풍과 과장이 섞여들어가게 되더라도 그 속에는 '진실'이 내포되어있기 마련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 머드는 여느 다른 성장물과 차별적인 지점을 드러낸다. 앨리스와 넥본이 머드를 도우면서 보고 듣고 경험했던 그 모든 것들, 영원한 사랑을 위한 일종의 주술은 실패했지만 동시에 사랑이라는 가치를 재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는 이 사랑을 차별없이, 그리고 평등하게 다루어낸다. 현실을 직시한 머드가 주니퍼에게 작별을 고하자 홀로 방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주니퍼, 아버지 같이 머드를 꾸짖지만 머드에게 도움을 주는 톰, 부모 없는 넥본을 자식처럼 키우는 갈렌, 앨리스가 착각했던 첫사랑 메이, 심지어는 이혼하는 부모와 머드를 죽이려드는 킹과 그 부하들까지. 이렇게 가족의 사랑에서부터 사랑인것처럼 보였던 사랑, 그리고 뒤틀린 사랑까지 영화 속에서 다양한 사랑은 앨리스가 머드를 도우면서 만나게 되며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그 무언가이다. 즉, 무너지는 세계 속에서 사랑의 가치관을 재확인하려는 앨리스는 머드의 허풍과 이야기 속에서 다양한 사랑의 형태와 조우하면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앨리스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원하는 주술행위와 머드의 허풍 섞인 이야기를 완성시키는 지점은 앨리스가 웅덩이에 빠져 뱀에 물린 것을 머드가 구해주는 것이다. 이 때, 앨리스는 사랑이 오로지 한사람을 향한, 지고지순의 사랑이 아닌 서로 다른 형태의 사랑들이 존재함을 깨닫게 된다:자신을 걱정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부모에게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는 지점 등에서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뱀이라는 악운을 통해서 사랑이라는 행운을 재확인하는 지점에서 영화에서의 사랑은 양가적인 속성으로 드러난다. 만나고(앨리스-머드) 해어지며(머드-주니퍼), 사랑을 떠나보내고(앨리스의 부모) 동시에 새로운 사랑을 맞이하는 지점들(톰-머드)을 통해서 영화는 사랑의 이야기를 완성시킨다.


영화 머드는 아칸소 주의 이국적인 풍경과 함께(비스트 오브 서던 와일드에서 보여주는 기묘한 미국의 이미지와는 또 다른), 신비로운 이야기꾼과 사랑의 이야기를 매력적으로 다룬다. 어찌보면 마크 트웨인의 허클배리 핀의 모험과 같은 성장물의 연보에서 같이 놓고 볼 수 있는 새로운 고전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스쳐지나갈 정도로 영화는 인상적이며 훌륭하다. 꼭 기회가 된다면 보시길.





게임 이야기



사실 글쓰다가 맨붕와서 땜빵 포스팅으로 때운다고는 말 못하구요(.....)








아마도 구매당일 살거 같은...배틀필드 4 영상


일단 돈을 모아두고 구매까지는 거의 확실한데, 

문제는 물량.


일단 오프라인 몇군데 통화해서 알아본 결과,

상점별로 물량을 한정되게 푸는 그런 스멜적 스멜이 나는 겁니다...

아침부터 죽치고 있다가 아침 10시되면 득달같이 달려가서 물건 살거 같긴 한데

이쯤되면 이렇게 물건을 적게 푸는 소니가 마음에 안든다고 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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