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이야기




*사진과 본문은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https://medium.com/p/57019c0bb7be를 블로그에 맞게 편집한 글입니다.



게임/영화/음악/드라마 등의 대중문화의 개략적인 반응이 어떠한가를 판단할 때, 메타크리틱이나 게임랭킹스 같은 사이트들은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개념은 대단히 간단하다:각종 미디어들의 작품에 대한 수치화된 평가, 즉 평점을 모아서 평균을 낸다. 대단히 단순하면서 강력한 원칙이다. 그리고 이 평점을 모아 평균을 내는 행위는, 즉각적이고 빠르며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였고, 정보 파급력이 강력한 인터넷 시대와 맞물리게 되면서 하나의 거대한 권력이 되었다. 메타크리틱이란 사이트는 이제 그 사이트만의 의미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되었다.


게이머들은 이제 게임을 평가할 때, 그 게임의 메타 점수가 어떠한지를 주요한 기준으로 제시한다. 심지어 스퀘어에닉스 주주총회에서는 간접적으로 게임의 메타크리틱의 평균 평점을 기반으로 판매량을 예측하는 뉘앙스를 보이는등, 메타크리틱은 단순하게 게임 비평 점수를 평균내어 보여주는 편의적인 사이트를 뛰어넘어, 하나의 ‘비평권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하지만, 메타크리틱으로 대변되는 이 비평권력은, 단순하게 권위있는 비평가들의 그들만의 리그나, 이를 통해서 구성되는 ‘카르텔’적인 비평권력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메타크리틱, 평점의 평균이 만들어내는 비평권력의 지점은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장 보들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은 현대 대중문화가 만들어내는 종말론에 대한 이야기다. 보들리야르는 원형으로부터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과 별개로, 이미지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지점에 주목했다. 이미지에서부터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이미지가 더이상 원형을 필요로 하지않을 때, 진실은 함열(수축하여 쪼그라들어서 사라짐) 사라지고 파생실재들만이 재생산되게 된다. 이러한 이미지들의 자가 재생산 상태를 보들리야르는 시뮬라시옹이라 규정했다. 그리고 보들리야르는 대중문화의 본질은 이와같은 파생실재들이 스스로 자가생산하고 그 속에서 진실이 사라지는 것이라 보았다.


이러한 시뮬라시옹의 예시로 보들리야르는 정신분석학에서의 무의식을 예로 들었다. 정신분석학의 경우, 어떤 행위의 분석으로서 ‘무의식’을 지적하는 것을 보들리야르는 정신분석학의 시뮬라시옹을 형성하는 지점이라 분석했다. 어떤 행위의 근거로 무의식을 지적한다면, 그렇다면 그 무의식은 어디서 생성되는가? 무의식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면, 무의식은 인지되는 순간 더이상 무의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지할 수 없는 영역으로 무의식, 하지만 동시에 가장 강력한 행위분석의 틀로서의 무의식은 그 근원(무의식의 원형)에 도달하기를 거부함으로써 하나의 시뮬라시옹을 완성한다:행위-무의식-행위-무의식-행위…즉, 행위를 함으로써 무의식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며, 무의식이라는 이미지는 동시에 행위를 재정의한다. 이미지가 서로 물고 물리는 순환논증적인 관계, 거대한 우로보로스적인 관계, 이것이 바로 시뮬라시옹이다.


(물론 정신분석학이 전적으로 허구는 아니다. 오히려 이런 시뮬라시옹의 우로보로스를 넘어서서 다양한 형태의 정신분석이 실존함을 알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무의식을 행동의 기저 요인으로 분석하는 것과 시뮬라시옹의 위험성 사이의 관계이다.)


시뮬라시옹의 또다른 주요 기제는 ‘은폐’이다. 보들리야르는 닉슨 워터게이트의 보도 행태를 예로 들어서 ‘그것이 정치의 본질(워터게이트)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처단하고 깨끗한 정치가 가능하다는 뉘앙스를 보여줌으로서 정치의 이미지 세탁, 즉 시뮬라시옹을 구축한다’라고 이야기했었다. 즉, 시뮬라시옹의 본질은 ‘아닌 것을 아닌 것처럼 하는’(워터게이트가 상시 일어나는 일반 상황임을 부정함으로서, 정치의 부정적 뉘앙스-정치의 본질이란 이런 것이다-를 부정하여 긍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이중부정을 통해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지점들에서 비춰보았을 때, 메타크리틱이 만들어내는 ‘비평’의 지점들은 완벽하게 시뮬라시옹에 맞아떨어진다. 메타크리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리뷰 그 자체가 아닌, 100분위 점수로 환산 가능한 리뷰의 ‘평점’과 그것의 뉘앙스를 자의적으로 분류(빨간-노랑-초록)하는 것이다. 재밌는 점은, 메타크리틱에서 인용하는 것은 게임 리뷰는 게임 리뷰의 전문이 아니라 그러한 평점을 지지해주는 듯한 최소한의 몇문장 뿐이라는 것이다:리뷰라는 문화 비평 행태가 비평이 아닌 게임을 판촉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는 경향이 강하더라도,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제시하는 근거들과 논리의 흐름들, 그러한 과정 중에서 드러나는 글쓴이의 사고 흐름 등이 존재한다. 즉, 아무리 그 리뷰라는 글이 판촉을 위한 마케팅 의도가 다분한 글이라도, 그 글은 어떤 개성이 있고 특질이 있으며, 게임을 플래이한 행위자/감상자 마다 공유할 수 있는 포인트가 존재한다:오히려 게이머들이 이를 읽고 이것이 자신에게 맞는가, 혹은 맞지 않는가를 판단할 수 있는 여부는 바로 리뷰의 ‘이러한 지점들’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메타크리틱은 오로지 이미지와 뉘앙스만 만들어내기 위해 바로 리뷰의 가장 중요한 지점들을 거세해버린다.


하지만 이는 메타크리틱의 최악의 기만이 아니다. 오히려 메타크리틱이라는 사이트의 최악의 허구이자 최대의 기만은, 바로 모든 평점 시스템을 백분위 단위로 환산해서 동렬에 놓는다는 것이다. 평점은 긴 글을 잘 읽지 않는 이 시대에 있어서 대단히 편의주의적인 발상이긴하다:글을 읽지 않는 대신에 점수만 확인함으로서 이 리뷰의 결론을 파악할 수 있다라는 기제. 하지만, 각기 다른 평점 시스템들, 예를 들어, 어떤 웹진은 10점 만점 단위로 계산을 하고, 어떤 웹진은 별 다섯개 기준으로 평점을 매긴다던가, 혹은 10점 만점에 0.5점 단위로, 0.1점 단위로 나눈다던가, 웹진/리뷰어 등 사이에서 서로 천차만별로 존재하는 평가 시스템들은 웹진/리뷰어들이 인지하는 작품과 그에 대한 해석, 리뷰를 통해서 내린 그들의 논리와 결론,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응축한 하나의 소우주적인 개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메타크리틱은 이 소우주를 백분위라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평준화시킨다;평점이라는 소우주는 도륙나서 서로 동질화될 수 없는 점수들과 나란히 놓이게 된다.


이러한 기만은 백분률, ‘점수’라는 수량적이며 통계적이며,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이미지에 기초한다. 비동질적인 것들이 동질적으로 보게 만드는 것은, 즉 점수화된 수치를 평균낼 수 있다는 자연스러운 사고의 흐름에 기초한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자세하게 살펴보면 그 점수화된 수치마저도 서로 다른 절대적 기준(5점 만점, 10점 만점, 100점 만점 등등)에 의해서 정의된다. 그렇기에 이러한 각기 다른 절대적 기준이 백분율 기준 환산이라는 ‘상대적이면서 절대적인’ 기준으로 통합되는 것은 아주 교묘한 기만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숨어있다:그렇다면 메타크리틱에 등재되는 리뷰 사이트들은 어떤 기준 하에서 등재되는가? 과연 메타크리틱에서 평균을 내는 웹진들이 공정하게, 혹은 모든 사이트들이 다같은 기준에서 등재되는가? 물론 메타크리틱이 주요 웹진들(IGN, 게임스팟, 엣지, 폴리곤 같은)의 대부분을 평균-평점을 내는데 인용하고, ‘거의 대부분’의 웹진들의 리뷰를 평균을 내는데 사용하기는 하나, 그러한 ‘절대적 기준’을 내기 위해서 선정하는 웹진 선정의 기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렇기에 메타크리틱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은 메타(Meta)적인 비평, 비평과 비평이 만나서 물리적-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는게 아니다:메타크리틱에서 일어나는 것은 전적으로 비평의 거세이며, 숫자라는 절대적인 기준의 환상을 이용해서 만들어내는 문화 도축의 현장이다. 그리고 이 문화 도축의 현장에서 메타크리틱은 거대한 권력을 얻어낸다. ‘평점’과 ‘숫자의 절대적 공정함’이라는 이미지를 이용해서 거기서 일어나는 행위들(비동질적인 것을 동질화 시키는)을 은폐하고, ‘모든 리뷰를 합쳐서 제시하는 공정한 평점-평균의 사이트’라는 이미지를 구축한다. 그렇기에 위에서 링크로 제시한 스퀘어에닉스가 ‘우리 게임은 메타 크리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습니다’라고 메타크리틱을 재인용하는 부분, 즉 메타크리틱의 공정함이라는 이미지를 통해서 자신들의 게임을 우수하게 포장하는 지점들, 동시에 그런 메타크리틱이라는 사이트가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리뷰어들과 평점을 ‘은폐’함으로서 이미지의 원형(리뷰와 평점)이 아닌 ‘평균-평점’이 리뷰의 모든 것을 대체하는 듯한 뉘앙스를 만들어낸다. 더 심각한 것은, 이 평균-평점의 시뮬라시옹이 역으로 리뷰와 평점에 대한 산업적인 압박을 넣어서, 게임 평점의 대부분이 8~9점에서 머무는 리뷰 점수의 심각한 상향 평준화를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메타크리틱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를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점에 있어서는 시뮬라시옹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고 소리쳤던 보들리야르의 주장이 맞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적어도 이러한 거대한 흐름을 우회할 수는 있다. 메타크리틱에 우리가 어떤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 것, 혹은 자신과 성향이 맞는 리뷰 웹진들을 찾아서 그것을 읽고 생각하고 자신의 경험과 대비해서 움직이는 것, 이런 흐름을 거스르는 행위를 통해서 우리는 소소하게 이런 거대한 평균-평점의 흐름을 거부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동시에 점점 8~9점 대에서 머물렀던 리뷰 점수가 새로운 형태로 요동치는(고스트 75점이라던가) 현재의 상황, 즉 리뷰 웹진들의 ‘반란’과 평균-평점, 메타크리틱에 대한 과도한 권력이 부여되고 있다는 지적들을 통해 보았을 때, 과연 메타크리틱이 앞으로도 지속가능한 형태의 사이트인가는 다소 어느정도 의문이 든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