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이야기








게임은 예술인가?


*미디엄 계정에 올린 것(https://medium.com/p/632994689ba6)을 블로그에 맞게 수정한 글입니다.



이 질문은 마법의 질문이다;수많은 게이머들은 이 ‘예술’이란 직함이 게임에도 달리기를 간절하게 학수고대하고 있다. 마치 그것이 게임이 받고 있는 현재의 수모와 저평가들, 그리고 덤으로 자신들 역시 ‘고급문화’를 향유하는 일원으로서 취급받을 수 있는 ‘특권의식’을 향한 의식이 깔려있다. 하지만 이 질문은 난제다;유명한 영화 평론가 로저 이버트는 게임은 예술이 될 수 없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어떤 게이머는 로저 이버트의 주장은 틀렸으며 게임은 처음부터 예술이었다고 주장한다. 게임이 예술인가, 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논쟁들은 지난 몇년 동안 첨예한 반론과 반론을 거듭하면서 해답이나 합의를 향해 도달하는 것이 아닌 무의미한 논쟁과 특권의식, 그리고 허위의식의 발로에 불과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들은 아주 중요한 명제를 간과하고 있다;게임이 예술이기를 물어보기 전에, ‘예술’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물어봤어야 했다는 것이다. 예술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는 지난 수천년 동안 수많은 이들을 해매게 만든 질문이었다. 플라톤에게 예술은 이데아의 거짓된 환상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예술론을 극복하여서 예술의 존재 가치를 정립하였다. 헤겔은 예술이란 절대이성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자 방법이라고 했다. 이와같이 미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예술에 대한 수많은 담론들, 주로 미학의 형태로 이를 다루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게임이 예술이 될 수 있다/없다라는 것을 판단하기에 앞서서 과연 어떠한 예술 개념을 들고 올 것인지, 그리고 이에 맞춰서 이를 판단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봐야할 것이다.


게임이란, ‘산업화된’ 대중문화이다. 물론 인디 게임 등등 예외들은 충분히 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보통 ‘예술’이라고 할 때 떠올리는 이미지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고급’문화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마련이며 대중문화와는 대치되며 서로 범접할 수 없는 경계, 또는 어떠한 ‘아우라’를 만들어내는듯 하다. 그렇다면 대량생산된, 산업화된 문화가 어떻게 고급예술의 범주에 들어설 수 있는가? 이렇게 본다면 게임과 예술은 서로 어떠한 접점 자체가 없을 수 있다.


이런 지점에서 들여 오고자 하는 논의는 발터 벤야민이 쓴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등등에서 드러나는 대중문화 미학이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이런 서술을 한 적이 있다;일찍이 사람들은 사진이 예술이냐는 물음에 많은 통찰력을 쓸데없이 쏟아 부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이에 선행되어야 할 물음, 즉 사진의 발명으로 인해 예술의 성격 전체가 바뀐 것이 아닐까 하는 물음은 제기하지 않았다. 벤야민의 서술은 축약하자면 이렇다;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예술이란 개념이 산업혁명과 함께 ‘변화’하였다.


기존의 예술은 그 예술 작품과 ‘같은 공간에 있을 때만 갖는 특별한 기질’이 있었다. 벤야민은 이를 아우라라 지칭하였다. 그리고 이 아우라는 진품에만 깃들어 있으며, 동시에 과거의 조악한 복제기술로는 이를 복제해낼 수 없었기에 복제와 진품 사이의 괴리를 만들어냈다. 소위 ‘순수예술’이란, 이런 ‘진품’에 대한 작품이 숭배되고 숨겨져서 갖게 되는 ‘제의가치’에 기초하고 있으며 사진기술의 등장으로인해 진품과 복제품 사이의 구분이 불분명해지면서 이러한 제의가치로부터 예술작품들이 해방되고 예술은 본질적으로 변화하였다는 것, 그것이 벤야민이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 즉 ‘대중문화’에 대해서 판단한 것이다.


현대에는 어떠한가? 현대에 있어서 고급 예술, 순수 예술의 개념은 희박해졌다. 대중들은 피카소나 살바도르 달리는 안다. 하지만 현대예술가 중에서 가장 ‘핫’하다고 할 수 있는 현대의 피카소 데미안 허스트는 알까? 그가 어떤 작품을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가 어떠한 흐름을 선도하고 있는지는? 현대예술과 고급 예술의 개념은 철저하게 대중으로부터 유리되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박물관에서 흔하게 일어나고 있는 현대예술 전시회는 ‘일종의 장례식’이다. 보들리야르가 퐁피두 센터에 대해서 평한 것처럼, 전적으로 무해한 ‘시체’들을 걸어넣고 ‘이들은 전적으로 위험하지 않습니다’라고 광고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한때 선망의 대상이자 숭배의 대상이었던 순수예술이 영향력을 잃고 대중 앞에서 장례식을 치루는 것, 그것을 보들리야르는 현대예술이 종말하는 지점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현대의 예술은 어딨을까? 그것은 전적으로 박물관에 붙잡혀 있지 않는다;박물관에 붙잡혀서 가만히 있는 것, 벤야민은 그것을 가리켜 죽은 문화라고 칭하였다.(수집가로서 에두아르트 푹스) 진정으로 살아서 움직이는 문화란 박물관에 잡아가둘 수 없다. 그것은 살아서 움직이며 우리와 함께 숨쉬고 있다;대량복제 기술을 통해서 만들어지고 복제되며 파생되는 이미지들 그 자체를 통해서. 반 고흐의 아름다운 그림들이 단순히 미술관에 걸려서 멈춰있지 않고 지금 현재에도 다양한 파생된 바리에이션들과 이미지의 인용, 변화를 통해서 재생산되고 죽지 않는 것처럼 살아있는 문화란 우리 사이를 숨쉬며 같이 활개친다. 기술복제는 이러한 이미지를 박물관, 미술관, 개인의 소장품 등등으로부터 해방하여 부활시켰다.


(물론, 이것이 항상 좋은 결과를 불러일으킨 것은 아니다;보들리야르의 시뮬라시옹, 미디어와 대중문화에 의해서 이미지가 이미지를 만들어내며 진실은 함열되어 사라지는 지점들, 아닌 것을 숨김으로서 긍정하는 지점들. 그리고 아도르노가 지적한 계몽의 변증법, 그리고 대중문화의 파멸적이고 속물적인 속성들 등등. 하지만 여기서는 시뮬라시옹이나 대중문화의 부정적인 부분에 대해서 다루지는 않겠다. 이는 복잡하고 어려운 논의가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고전적인 예술 개념은 소멸하였다. 하지만 헤겔이 완전한 이성상태에 도달하면 이성을 설파하기 위한 도구적 예술개념도 소멸하리라 주장한 것이 역설적이게도 ‘예술의 목적’ 자체를 해방한것처럼 예술은 더이상 순수예술이라는 틀에 얽메일 필요가 없어졌다. 그렇기에 게임이 (고전적인 개념의)예술이냐라는 논의 자체는 대단히 의미없는 논의다. 이미 순수 예술 자체는 사라지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듀나는 ‘게임이 예술일 필요가 있나요? 이미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을 하고 있는데 말이죠’라고 서술했다;이것이 정답이다. 게임은 예술이라는 개념 자체에 얽메일 필요 없이 충분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그것은 순수예술담론보다 더욱 가치가 있는 지점들이다.


그렇기에 게임이 예술이 될 수 있는가? 라는 담론보다는 게임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게임의 본질이 무엇인가? 라는 지점을 우리는 더 집중적으로 파고들어야한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파고들어야하는가?



엠파이어지가 라스트 오브 어스의 최초 리뷰를 냈을 때, 엠파이어지는 라스트 오브 어스를 영화의 영원한 명작 시민 케인과 비교하면서 라스트 오브 어스를 극찬하였다. 이때부터 게이머들은 기고만장하기 시작해지면서 게임이 영화와 동급에 놓이게 되었다고 자화자찬하기 시작하였다.


라스트 오브 어스가 과연 시민 캐인에 비교할만한 걸작이란 말인가? 애시당초에 서로 다른 두 장르의 작품을 1:1로 비교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보자;게임에 있어서 라스트 오브 어스가 영화에 있어서 시민 케인에 대응될 수 있는가?


하지만 유념해야하는 점이 있다;시민 케인은 처음부터 위대한 영화가 아니었었다. 시민 케인은 허먼 멜빌의 백경처럼 ‘발굴’된 영화였다. 개봉 당시에는 모델이 되었던 랜돌프 허스트의 공작으로 인해서 흥행이나 평에 있어서 썩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시민 케인 이후로도 오손 웰즈의 천재성이 빛을 발했으며 1960년대 들어 평론가들이 시민 케인을 재발견하면서 20세기의 영원한 명작으로 평가받게 된 것이다.


시민 케인이라는 작품은 갑자기 툭튀어나온 작품이 아니다. 그리고 동시에 시민 케인이라는 영화를 기점으로 영화가 ‘예술’로서 인정받게 된 것도 아니다. 영화의 인식이 높아지게 된 것은 영화를 작품으로서 만들려는 수많은 사람들(감독에서 엑스트라까지)과 이를 해석하고 의미를 찾아내려는 비평가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라스트 오브 어스는 어떠한가? 라스트 오브 어스가 그러한 빛나는 지점으로서 가치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분명한 점은 라스트 오브 어스는 기술적으로 놀라운 성취다. 그래픽 기술적으로도 놀라운 성취일 뿐만 아니라 UI나 스토리 지점이나 드라마 등등 ‘기술적’으로 다듬어진 작품이라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어떤 패러다임 전환을 불러일으켰다고 하기는 힘들다. 오히려 라스트 오브 어스는 철저하게 잘만들어졌을 뿐이지 여전히 현재의 태두리 안에서 안주하는 안전한 작품에 불과하다.


오히려 라스트 오브 어스 작품 자체보다 더 걱정인 것은, 라스트 오브 어스를 띄워주는 리뷰어들과 게이머들의 무사안일한 태도들이다. 라스트 오브 어스는 분명 뛰어난 게임이 맞다. 하지만, 그들이 이를 게임계의 시민 케인이라 칭송하며 띄워주기 바쁜 것은 어떠한 새로운 비평담론을 만들어내거나, 혹은 새로운 방향전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현재에 취해서 앞을 보고 있지 못하고 있다. 라스트 오브 어스의 한계를 논하고 비평하고 페러다임을 바꿀 작품을 수용할 준비를 하는 것, 대중문화에 있어서 명작은 작품만으로 이뤄질 수 없다. 수용자의 준비와 사고 역시도 필요한 것이다.


(덧:이는 실험적인 논의다. 이런 저런 사고를 해보는 것이 이 글의 핵심이며 어떠한 단정적인 결론은 내리고 싶지 않다. 물론 본인이 인용한 저서들에 대한 오독이 있을 수 있기에 오류도 많을 것이다. 이런점을 충분히 숙지하고 비판적으로 읽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