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이야기





*본문과 사진은 하등의 관계도 없습니다.

*https://medium.com/p/5f817707938f 에 올린글을 블로그에 맞게 재편집 및 내용 추가한 글입니다.



한국에서는 게임 중독에 대한 논의가 진행중이다, 아니 ‘마녀사냥’이 한창진행중이다. 게임 ‘중독’ 담론이란 규제를 행하는 행위자나 그 규제를 받는 대상이나 하나같이 똑같은 방식으로 경기를 일으키는 거대한 히스테리에 불과하다. 게임은 영유아나 하는 것이라면서 진심어린 헛소리가 소위 입법전의 방청회에서 열리는가 한편, 게임을 마약물질로 규정하려면 게임 만드는 단계에서부터 우리를 잡아가라는 히스테리성 일갈이 개발자 사이에서 튀어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양극론-게임은 중독물질이다, 아니다- 사이에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의문은 제기되고 있지않다;게임 중독 상태란 무엇인가?


우리가 ‘중독’을 언급할 때는 마약류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마약의 중독이란 본질적으로 가역적이면서 수학적이며 완벽하게 논리적이다;마약을 복용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은 마약 중독 상태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게임 ‘중독’은 어떠한가? 게임을 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게임 중독 상태에 빠지는가? 아니다. 게임 중독의 문제는 개개인마다, 그리고 게임마다 그 편차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온라인 게임 중독 문제 기사는 많이 봤지만, 정작 윈도우에 기본적으로 설치되어 있는 지뢰찾기에 중독되서 인생을 망쳤다고 서술하는 기사나 이야기는 보지 못했다. 게임마다 중독이 되고 안되고의 극명한 결과가 생기는 것, 모든 게이머들이 모든 게임중독자가 아니라는 지점들. 그렇기에 소위 게임 중독 상태는 전적으로 비가역적이며, 마약류의 중독 상태와 1:1로 놓고 비교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기본적으로 게임 ‘중독’의 허구성을 역설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무시못하는 지점들은 분명히 존재한다;게임 때문에 일상생활을 망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보통의 게이머들 또는 게임 중독 반대론자들은 이들을 가리켜 ‘개인의 조절 실패’ 상태로 아주 쉽게 정의하는 경향이 있다. 이 정의가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게임과 일상생활 사이를 조절 못하는 것은 개인의 통제력 문제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식으로 게임에 과도하게 빠지는 상태를 개인의 통제력 상태로 규정하는 것은 그 기저에 ‘게임은 게임일 뿐이며, 인간이 과몰입할만한 기저 시스템을 갖고 있지 않다’ 라는 태도들, 게임을 ‘무고한’ 또는 ‘무죄’의 존재로 만들려는 시도들은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정말로 게임은 게임 ‘중독’ 상태에 대해서 무죄인 것일까?


과거에 서술한 게임 노동의 담론( http://leviathan.tistory.com/1798 )에서, 본인은 소위 이야기하는 엔드 컨텐츠들의 문제에 대해서 역설한 지점이 있다;성과와 목표를 무한히 던져주며 무한하게 거기 빠져드는 상태, 결국 게임의 구조 자체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니 ‘인간’이라는 요소를 끌여들인 ‘멀티플래이’로 게임을 계속 붙잡게 만드는 지점들. 한병철의 피로사회에서 지적을 하였듯이 사회 자체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다’라는 명제의 과잉으로 인간을 정신적 소진 상태로 몰고 가듯이, 게임 자체도 이야기가 끝나고 모든 것이 끝나도 과제와 목표를 지속적으로 갱신하고 계속되는 지점들을 통해서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다’의 과잉으로 인간을 소진상태로 몰고간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보통 한국 언론에서 게임 중독을 야기하는 게임이라 지목되는 게임들의 특징을 잘 살펴보자. 타인과의 경쟁이 기반에 깔려있는 게임들, MMORPG의 경우, 리니지와 피씨방에서 사는 아저씨들의 결합인 린저씨의 존재라던가, 수많은 온라인 게임 폐인들의 존재, 최근에는 하나의 광풍처럼 한국 게임계와 소비자층을 강타하고 있는 AOS와 LOL의 존재 등등…고발의 대상이 되는 게임들은 대부분 ‘인간과의 경쟁’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게임들이다. 그렇기에 언론의 마녀사냥적 고발이 아주 최소한의 진실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이들 게임들은 끝나지 않는 게임들, 성과를 위한 노동이 되는 지점을 가진 게임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많은 것을 설명한다. 게임 중독 상태가 왜 중독이라는 물리적이며 가역적인 상태에 도달하지 못하는지, 왜 게임이 사람마다 다양한 형태의 비가역적인 반응을 도출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게임 중독이라 일컬어지는 상태란, 게임 내에서 성과를 도출하기 위해서 빠져드는 ‘강박’(불합리하다고 자각하면서 어떤 관념이나 행위에 사로잡혀 억제할 수 없는 일)상태라고 볼 수 있다. 특정 행위에 대한 강박증이란 논리적인 행위가 아니며, 그 강박증에 걸린 행위는 스스로 비논리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또는 인지하지 못하면서도) 끊임없이 그러한 행위를 지속적으로 반복-확대-재생산하게 된다. 소위 게임 중독이라는 이 강박증 상태도 유사하다;게임 내에서 타인보다 강해지기/타인을 제압하기 위해서 과도하게 몰입하는 것, 게임을 하는 행위 자체를 반복-확대-재생산 하며 ‘현실’과 동떨어진 비논리적인 결론을 도출하는것까지 말이다.


강박 자체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일 수 있다. 그 상황에 빠져드는 동력, 개인적인 원인, 심지어는 강박증이 행해지는 지점들마저도 개개인마다 다 다르게 발현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 있다;한국 게임들은 그 강박증을 유발하는 시스템을 게임에 집어넣어서 수익을 내고 있다는 것이다.


강박증을 유발하는 시스템, 메카니즘은 보통 IAP(In App Purchase)의 형태로 구현된다;이제 게이머는 게임을 사고 플래이하는데 들어간 비용들(돈, 시간 등등)과 별개로, 강해지는데 또 돈을 지불해야 한다. 기존의 게임들이 인간과 인간의 경쟁을 통해서 ‘끝없는 목표’와 성과를 향한 게임 노동의 개념을 제시하였다면, 이 강박증 구현 기제들은 그 목표에 대한 ‘지름길’을 제공하면서 게이머를 끝없이 유혹한다. 그리고 이러한 IAP의 족쇄는 게이머가 게임을 그만두지 못하게 만드는 족쇄로서 작용한다.(내가 투자한게 얼마인데, 들어간 가치와 비용에 대한 안타까움)


물론 게임 자체에 IAP 개념을 집어넣지 않은 게임이 존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MMORPG들에게는 자체적인 IAP 개념만 존재하지 않을 뿐이지, ‘현질’이라는 외부적인 요소가 존재한다. 게임 내 화폐를 만들어서 파는 장사꾼들은 충실하게 게임 회사가 IAP로 하는 일을 행한다. 결과적으로 현질이라는 시스템을 본질적으로 막지 못한다면 IAP가 있나 없나는 부차적인 문제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넥슨의 던전 앤 파이터를 예를 들어보자. 던전 앤 파이터는 게임의 재미와 완성도와 별개로 위에서 이야기한 IAP 개념과 현질의 개념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최악의 사례이자 현재의 한국 게임들이 처한 대표적인 상황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던파는 ‘무료’ 게임이다;하지만 그 말은 아무도 안 믿는다. 게임은 기본적으로 아바타/앰블럼 기능을 통해서 그것이 있는 게이머와 없는 게이머의 차이를 분명하게 만들어놓는다. 게이머가 아바타를 사서 플래이하는 것은 자유의 탈을 쓴 ‘강요’이다. 아바타를 사지 않고 플래이하는 게이머를 게임은 다양한 방식으로(모양세나 이런 저런 지점들에서) 차별하며, 심지어는 다른 게이머들이 그 게이머를 차별하는 기제로서 작용되기도 한다.


현질이란 기본적으로 게임 내의 희귀한 아이템에 대해서 현실의 가치를 들이는 것이라면, 던파는 끝없이 희귀한, 동시에 ‘꼭 필요한’ 아이템을 만들어낸다;그것은 바로 강화 요소다. 이 강화 요소의 악랄한 지점은, 장비를 강력하게 만드는 도중에 장비가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이며 더 악랄한 것은 이 장비는 강하면 강해질수록 더 파괴되기 쉬워진다는 것이다.(물론 지금은 이런저런 파괴에 대한 대비가 되었지만, 과거의 경우에는 악랄하기 그지없었다) 이렇게 희소한 장비/재원이 꼭 필요한 게임 클래스들이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어떠한 보험 요소가 존재하지 않은 점에서 이 고강화 장비에 대한 게임 내 수요는 아이템에 ‘필요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기에 이른다. 던파의 현질은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나지만, 이 고강화 장비에 대한 현질이야말로 던파 현질 문제의 최고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한번 게임내에 강박증이 퍼지기 시작하면, 이 강박증은 막을 수 없게 된다. 이런 게임들의 기본 베이스는 ‘경쟁’이다;내가 남보다 더 잘나야 하는 것.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내가 들인 노력에 비해서 더 손쉽게(돈을 써서) 자신의 성과에 도달하고 이로 자신을 이겼다고 가정해보자.(그것이 실제적인 승리든, 아니면 과시적인 지점이든 간에) 그렇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자신도 돈을 써서 더 쉽고 빠른 성과를 도출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전염병처럼, 하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게이머들 사이에 퍼지게 된다;마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리치왕의 분노 말기에 소위 십자군 쇼핑을 발판으로 레이드를 가는것이 자연스러워지고 이 쇼핑에 들어갈 돈을 현질로 사거나 많은 시간을 들여서 확보하는 지점들처럼 말이다. 누군가 경쟁에 뛰어들기 위해서는 돈 또는 그 곱절의 시간을 투입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지는 지점들. 이러한 열기가 가열되고 가열되면, 자연스럽게 게임에 처음 제작자들이 의도했던 것보다(혹은 역으로 '의도했거나') 그 이상의 가치를 투여하고 몰입하는 강박증세를 가진 사람들이 등장하게 된다.


만약 진정으로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게임 중독의 담론을 박살내려 한다면, 게임 자체가 현제의 모습을 벗어나 새로운 모습에 도달해야한다;이러한 논쟁 자체를 어불성설로 만드는 문화와 환경, 그리고 모두가 게임을 즐기는 상태로 말이다. 하지만 한국의 게임들은 여태까지 너무나 무사안일한 태도로 일관하여 왔다. 물론 이것은 개발자들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회사를 운영하는 주체들의 속물적인 사고들, 문제가 일어나기 전까지 최대한 돈을 벌고 내빼면 그만(일본으로?)이라는 무사안일한 태도가 더 큰 문제로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게임업계는 이미셧다운제에서부터 비정상적인 침묵을 지켜왔고, 게임중독 법안에 있어서도 히스테릭한 반응 이상으로 어떠한 반응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를 통해 주장하고 싶은것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 현재 중독의 프레임을 벗어나서 게임을 문화로 보고 그것이 갖는 의의와 영향력에 대해서 담론을 전개하는 방식의 방향전환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중독이다, 중독이 아니다의 문제는 게임의 본질에 대해서 제대로 접근하고 있지 못하며 영원히 끝없는 소모전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안 담론으로서 과몰입 역시 반대한다:무엇이 '과하다'에 대한 자의적 기준 제시에 따라서 과몰입 담론은 오히려 현재의 중독 담론보다 심각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게임을 무죄로 만들려는 시도들, 게임이 게이머에게 그 어떠한 영향을 끼치지 않고 현실로부터 유리된 무언가로 만들려는 시도 자체에 반대한다. 게임이 문화고 인간 생활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려면 그것을 토론의 대상으로 드러내고 논의를 통해서 문제가 무엇인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하는지를 다루어야 한다. 현재 일반적인 게임 중독 반대론의 근거는 소위 게임 '중독'의 원인을 개인-가족-집단의 개별적 실패로 끌고 가는 경향이 강하게 두드러지는데, 그런 실패상황을 전제한다손 치더라도 현재 논의들은 과도하게 그러한 원인에 천착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논의에 반대해서 다른 논의들이 대두되고는 있지만, 이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위 게이머들이 보여주는 입장들, 마치 주먹속에 중요한 것을 숨겨두고는 '네가 내 편이 된다면 이 숨겨놓은 무언가를 공유해주겠다'라는 일종의 종교적인(게임 숭배?) 태도들은 상황을 오히려 악화시키고 있다.


세번째, 현재 게임 중독 담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찬성론쪽이 과학적 인식이나 어떤 문화적인 통찰력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닌 전적으로 혐오와 편견, 미개하다 할 수 있는 원초적 증오에 밑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며 이것을 뒤집을 수 있는 근원적인 동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중독 담론의 주춧돌인 중독의 기제를 부정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게임이 하나의 문화이며 진정으로 공유할 수 있는 속성의 것이라면 그것을 '공유함'으로서 모두가 그것을 즐길 수 있음을 증명하고 그것에 대한 이해(단순히 읽고 앎을 통하는 것이 아닌 공유 및 행위를 통해서 이해하는것) 한다. 물론 이러한 논의는 이미 외국에서 몇몇 저널리스트들에 의해서 전개되고 있는 담론이기도 하며, 그다지 새로운 담론이 아니기도 하다(주류는 아니지만 여성이 게임을 하는, 여성의 시각에서 게임 문화를 재조명하는 페미니즘적인 작업 등등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담론이 한국에서는 전혀 낮설고 새로운, 혹은 전혀 이야기되지 않은 담론의 형태로 보인다는 것, 바로 이게 가장 위험한 지점이다;한국의 세대간의 괴리와 갈등이 강하기는 하지만, 세대를 뛰어넘는 문화 공유에 대한 저널리즘이나 문화 비평, 작업들, 심지어는 시도조차도 전무하다는 것이다. 물론 스마트폰 게임이 메인스트림으로 떠오르면서 노인-어른이 하는 게임들이라는 새로운 테제, 모두의 게임이라는 테제가 생겨나기는 했지만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쥐고 흔드는건지 그에 대한 분석은 전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 게임제작 풍토에 대한 반성이다. 월드 오브 탱크의 제작사 워게이밍의 사장이 올해 지스타에서 한 발언은 상당히 인상적이다:한국은 세계적으로 온라인 게임 종주국으로 알려져 있으며, 한국에서 게임을 규제한다는 것은 프랑스에서 치즈를 규제하겠다는 말과 똑같은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한국 내에서 LOL과 월오탱의 성공들, 기존의 MMO와 다른 새로운 형태의 MMO 게임들이 득세하는 것에 대해서 한국 게임계는 무기력하게 현상황을 좌시하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오히려 소위 게임 웹진에서 주로 써먹는 외산 게임 vs 국산 게임의 대결구도 프레임들은 결국은 한국 게임들의 절대적인 매너리즘과 후퇴에 빠져서 아무것도 못하는 상황 자체를 스스로 드러내는 부분이다. 오히려 본인이 강력하게 비판한 넥슨과 그 휘하의 회사들은 '그나마' 나은 상황인데, LOL의 새로운 IAP 개념(Purchase to Win이 아닌 Purchase to Play)을 들고 온 것에 뒤늦게나마 게임에 적용하려는 시도들(물론 그것이 '착한'의 개념을 들고 오거나 많은 부족함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나마' 새로운 게임들을 '그나마' 계속 시도하고 있는 점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다른 게임 회사와 게임들, 더이상 광고할 것이 없어서 '국산'의 마케팅 프레임을 들고오는 게임들의 경우에는 사정은 심각하다 못해 비참하다. 게임 강박을 유도하는 기제들, 그러한 게임 강박 기제로부터 돈을 뜯어내고는 나몰라라 하고 서비스하고 수익이 나면 무책임하게 서비스를 종료해버리는 게임들에서 무슨 문화를 찾아낼 것이며, 어떤 유희와 의미를 찾아낼 수 있겠는가? 몽둥이로 두드려맞는 사람에게 '그러게 진작 잘하지 그랬어'라는 발언이 직접적인 폭력과 맞먹을 수준의 숨어있는 폭력이나, 한국 게임업계가 보여주는 일확천금의 한탕주의, 천민자본주의적 기제들에 비추어봤을 때, 그리고 이들이 지금까지 걸어온 행보에 비추어 보았을 때 본인은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을 꾹 참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이미 때는 늦어서 한국 게임 제작, 거기에 덤으로 한국 게임 문화 자체는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을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먼훗날, 또는 먼나라의 누군가가 이러한 끔찍한 상황에서 어떠한 교훈을 얻어서 더이상 이런 과오가 되풀이 되지 않게 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담아 이 글을 마친다.


(이 글에서는 IAP나 부분유료화에 대해서 대단히 부정적으로 썼지만, 본인은 이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오히려 게임에 대한 큰 비용 없이 게임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점에서 새로운 형태의 비지니스, 또는 새로운 형태의 게임 문화가 될 수 있을거라고 본다. 하지만 현재 대부분의 IAP나 부분유료화는 게이머를 강박증으로, 그리고 끝나지 않는 경쟁으로 몰아넣어서 거기서 게이머를 착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첨언으로 던파의 피로도 시스템을 게임 중독의 방지책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진정한 기만이다;던파의 피로도 시스템은 전적으로 한 케릭터에서 다른 케릭터로 육성하게 만들기 위한 기제이다. 기본적으로 게임이 빠른 패이스로 진행되기에 한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는데 몇분 남짓 걸리는 게임에서 게이머의 컨탠츠 소모 속도를 의도적으로 줄이기 위한 제한이자, ‘기본적으로’ 무료 게임인 던파에서 가장 확정적인 수익을 내는 지점은 바로 게임 케릭터의 능력을 올려주는 필수 아이템인 ‘아바타’를 판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 케릭터만 줄창 파는 것은 회사에게 손해일 수 밖에 없다. 만약 피로도 시스템이 게임 중독에 대한 방지책이었다면, 한 케릭터에서 다른 케릭터로 갈아타는 것 자체도 같이 막혔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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