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만화, 영화 이야기







*미디엄에 쓴 글을 옮긴 것입니다.(https://medium.com/korean-medium-post/1a030169c4cc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죽일 수는 있지만, 희생 제물은 될 수 없는)를 법의 문법으로 보았다:그리고 이러한 기저에는 그리스 폴리스의 삶의 양식 조에(단순하게 살아있음)와 비오스(의미있는 삶)의 분리가 깔려있다고 아감벤은 자신의 저서 호모 사케르를 통해서 주장한다. 조에란 자연에서 단순히 태어나고 죽고 하는 것은 어떠한 가치 판단의 기준도 아닌, 단순하게 거기 있다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의미있는 삶, 비오스란, 그것의 태어남과 삶에 의미가 존재하고 동시에 중요하게 여겨진다. 아감벤은 폴리스에 있어서 시민과 함께 조에, 의미없는 삶들이 함께 살았음에 주목하였다. 아감벤은 즉, 비오스란 조에라는 ‘예외상황’을 통해서 규정된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외상황을 통한 자신의 규정’은 호모 사케르-맘대로 죽일 수 있지만, 희생물로 바쳐질 수 없는-의 법의 문법을 통해 실현된다:예를 들어보자. 사형의 경우, 사형수는 국가에 의해서 죽음을 선언받은 자들이다. 이들은 국가의 처분에 따라서 마음대로 죽임당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어떠한 숭고한 가치를 위한’희생물’은 될 수 없다. 그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헌법과 가치질서의 예외에 속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예외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헌법적 가치질서이자 주권권력의 결정을 ‘재확립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이러한 문법은 법 바깥의 대중문화에서도 발견되는 문법이며, 역설적이게도 이는 호모 사케르의 문법이 법을 넘어서 대중문화 전반에, 즉 대중들이 공통으로 향유하고 있는 인식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이후로 대중문화 코드에 있어서 중요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좀비물은 호모 사케르의 문법과 많은 부분 유사점을 드러낸다:좀비는 ‘언제, 어디서,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이들은 어떠한 대의명분을 위해서 희생되는 존재는 아니다. 그들은 생존자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이기에 제거되어야 하며, 동시에 생존자들은 좀비 대재앙(그것이 소규모든 전지구적인 규모든) 속에서 ‘마지막 남은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서 좀비를 제거하고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좀비에게 감염되어 인간성을 상실하게 될 위기가 되면, ‘인간다운’ 최후를 맞이하길 원한다. 그리고 좀비와 구분되어, ‘살아갈 지어다’라는 주권적인 명령 하에서, 예외와 같은 동등한 상황(좀비)에 처하게 된다면 인간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자살할 것을 강요 ‘하는듯이’ 보여지는 지점이 있다.


(이는 ‘좀비와 함께살기’라는 명제가 좀비 코드에서는 ‘당연스럽게’ 거부당하는 것을 통해 드러난다. 좀비가 한때 인간이었으며, 우리는 그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이들과 함께 같이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작품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


그렇기에 좀비들은 좀비 아포칼립스에서 ‘인간’을 규정하는 외부이자 경계영역, 동시에 호모 사케르이며 산업사회에서의 대중의 등장과 대중에 대한 혐오와 공포를 묘사하는 지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썩어가는 육체라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육화된다. 또한 좀비가 되는 순간 인간은 그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것을 박탈당하게 된다:한때 누군가의 연인이었고, 가족이었고, 친구였던 존재는 좀비가 됨으로서 그런 존재의 모든것을 박탈당하고 마음껏 총으로 쏴죽일 수 있는 무언가가 된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서 끊임없이 죽여야 하는 외부, 살아있는 것도 아니지만 동시에 죽은 것도 아닌 죽지못한 육체들(Undead)이 바로 좀비인 것이다.


물론 좀비는 사람을 죽이고, 동시에 사람을 죽여서 자신을 증식시킨다:좀비는 일방적으로 죽일 수 있는 존재라고 보기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뒤집어서 생각하면, 좀비에게 있어서 인간 역시 ‘호모 사케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좀비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간을 죽여야 한다. 아니면 인간이 좀비를 모두 죽여버릴테니까. 하지만 동시에, 만약 좀비가 지구상 최후의 인간까지 죽어버린다면, 더이상 인간을 인간으로 규정하는 살아있는 지표가 남지 않게 된다면 좀비 역시도 더이상 ‘좀비’가 아니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좀비가 좀비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살아있는 인간’을 전제해야 한다. 이는 일종의 원환이다:서로가 서로를 규정하며 정의한다. 좀비는 인간을, 인간은 좀비를 죽임으로서 서로의 존재를 규정하고 확인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호모 사케르적 관계는 ‘쌍방향적’이다.


(물론 이 호모 사케르적인 관계를 거부하는 영화도 존재한다:새벽의 황당한 저주에서 주인공은 좀비가 되어가는 자신의 어머니를 좀비라고 부르길 ‘거부’한다. 우리가 좀비물의 장르 공식에 몰입해서 쉽게 잊어버리는 지점, 즉, 좀비로 변한 그들이 우리에게 있어서 형제고 가족이며 친구였음을 영화는 꿰뚫어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마지막에 좀비가 된 친구와 함께 살아가기를 선택함으로서, 원환을 꿰뚫어 보고 파괴하는 동력을 얻기를 원한다. 그렇기에 새벽의 황당한 저주는 장르에 대한 애정과 가장 날카로운 시선을 동시에 보내는, 정말로 ‘위대한’ 좀비 영화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다루고자 하는 스튜어트 고든 감독, 브라이언 유즈나 제작, 러브크래프트 원작의 1984년작 좀비오, 원제 리-애니메이터(되살리는 자, 시체소생자)는 이러한 좀비 장르의 공식을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영화에서 좀비는 더이상 감염-확산을 통해 대중을 구축하지 않는다. 오히려 혈청이라는 특수한 약물을 통해서 제한적으로나마 재생산되는 것이 좀비이며,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는 ‘좀비’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시체 소생자에서 중요한 것은 시체가 만들어내는 재앙이 아니라 시체를 소생시키는 자들(주인공과 허버트 웨스트)에 초점을 맞춘다.


원작을 쓴 H.P. 러브크래프트는 이 소설 원작을 통해서 그의 과학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는데 초점을 맞추었다:허버트 웨스트는 생물이란 어떤 존엄이 깃들지 않은 하나의 기계이며, 일정한 조건 하에서 되살릴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는 17년에 걸쳐 화자인 ‘나’와 함께 소생실험을 하기 위해, 동물에서 시체로, 시체에서 신선한 시체를 얻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심지어 1차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시체를 대량확보하려고 하는 등 온갖 미친짓을 감행한 끝에 결국 허버트 웨스트는 자신이 소생한 시체들에게 뜯겨져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끝없는 웨스트의 실험과 광기는 러브크래프트가 니알라토텝을 통해서 드러낸 과학에 대한 불신과 파괴적 속성의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 있다.


스튜어트 고든과 브라이언 유즈나는 이러한 러브크래프트의 원작을 B급 테이스트로 살려내는데 성공한다. 영화는 전적으로 저예산이긴 하지만, 허버트 웨스트 역을 맡은 제프리 콤즈의 명연과 시의적절한 음악, 그리고 리드미컬하고 그로테스크하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밌고 유쾌하게 영상을 구성하는데 성공한다.


기계적 신체와 계속 약물을 주입해서 되살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의학자(라기 보다는 미친놈)의 이야기를 쓴 러브크래프트의 광기들린 편견은, 위에서 이야기한 썩어가는 신체이자 인간을 위협하며 규정하는 호모 사케르로서의 좀비와 정반대이기는 하지만 맥락상 유사한 지점을 만들어낸다. 인트로에서 원작 소설에서 나에 해당되는 주인공이 죽은 환자를 두고 살려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부분, 허버트 웨스트가 죽은 고양이를 살려내는 것을 보고 그의 혈청에 매료되는 부분, 허버트 웨스트가 뇌사와 죽음의 경계를 두고 계속 끊임없이 죽음이라는 경계를 재규정하려는 부분, 마지막에 죽어버린 여주인공을 소름끼치는 미소와 함께 혈청으로 다시 살려내는 부분(동시에 이는 처음 주인공이 나온 시퀸스의 반복이자 변용이다)까지, 영화는 기존의 좀비영화의 문법과 다른 지점을 끊임없이 만들어냄으로서 기존의 좀비영화와 다른 ‘무언가’가 된다.


이러한 기묘한 지점들은 한병철이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를 비판한 지점과 맞물려 들어가면서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한병철은 조르조 아감벤이 모티브를 두고 있는 푸코의 생명정치를 ‘부정적’(제거, 살해, 학살 등등)인 부분에만 방점을 찍었다고 비판한다. 한병철의 문제의식은 ‘피로사회’나 ‘권력이란 무엇인가’에서도 드러나듯이, 기본적으로 개인과 사회를 움직이는 외부동력이 아닌 스스로 움직이는 ‘내부의 동력’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근대사회의 변화와 함께 후기-근대(Post-Modern), 성과 사회가 등장하게 되면서 외부적 가치를 내제화하고 그 내부동력들이 브레이크 없이 무한하게 폭주하는 상황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그렇기에 한병철은 이렇게 선언한다:현대사회는 조르조 아감벤이 선언한 절대적으로 죽일 수 있는 호모 사케르로 구성되는게 아니라, 절대적으로 ‘살아야 하는’ 호모 사케르의 존재가 지배하고 있다고. 이 절대적으로 살아야함은 죽음이 거세되고 끝없는 자기계발, 끝없는 건강, 끝없는 행복 등등의 무한히 팽창하는 동력과 가치관 속에서 인간 스스로를 끝없이 소모하다 못해 영혼의 무기력증, 우울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다시 시체 소생자들로 돌아와보자:그들이 시체를 살리려는 것은 ‘의미없는’ 죽음을 거부하고, 그 자리에 ‘의미있는 삶’을 채우고자 하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허버트 웨스트가 죽음의 경계를 끝없이 확장하고 옅게 만들려는 시도 또한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소생실험은 끝없이 실패하면서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소생실험의 피험자들은 폭력적이며, 계속 새로운 시체들을 만들어낼 뿐이다. 그렇기에 시체소생자들에 있어서 ‘좀비’란(누차 이야기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좀비라는 개념이 나오지 않는다) 절대적으로 살아야하는 존재인 호모 사케르이자, 죽은 것도 아니지만 동시에 살아 있는 것도 아닌 살지 못하는(Un-Life) 존재로서 육체이자 인간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폭력적인가? 이는 단순하게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으며 신체의 죽음과 함께 영혼은 떠나고 신체를 되살리는 작업과 과학 자체를 비웃으려는 러브크래프트의 허무주의적인 시선이 깔려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다른 작품 ‘바탈리언’이라는 B급 작품에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해보고자 한다:죽은 것이 살아있다는 것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근육과 각종 장기들이 뻣뻣하게 굳었은 상태에서, 그것을 ‘강제로’ 소생시켜 움직인다는 것은 그로테스크함을 넘어서 그 상태에 처한 피해자에게 있어 엄청난 고문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러한 고통은 자연스럽게 ‘타인’의 존재를 향한 분노와 파괴로 표출되게 된다. 영화 바탈리언에서 끝없이 타인의 신체와 피를 갈구하는 형태로 말이다.


그렇기에 시체소생자들은 일종의 ‘과잉생명’에 대한 이야기이자 과잉생명이 불러일으키는 재앙에 대한 이야기이다:한번 죽은 고양이를 다시 죽였는데 약물을 투입해서 또 살리거나, 참수한 시체를 머리 따로 몸통 따로 살려내며, 심지어는 약물을 과다투여해서 내장만 따로 살아움직이기는 극한의 그로테스크를 통해서, 죽음이라는 ‘정지’를 부정하였을 때 불러일으키는 재앙적 상황에 대한 일종의 경고로 바라볼 수도 있다. 또한, 끝없이 살아서 움직여야 하는 인간이 불러오게 되는 파괴적인 속성에 대한 경고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