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이야기




사진과 본문은 하등 관계가 없습니다.


*https://medium.com/p/467f2b80f83a 미디엄 노트를 블로그에 맞게 편집한 글입니다.



어째서 게이머는 게임에서 대부분 ‘반영구적인 컨탠츠’를 찾는가, 그리고 이에 대해서 게이머들이 상당히 무비판적이며 무사고적인 담론을 보여주는가는 상당히 흥미로운 소재이다. 모든 게임들의 컨텐츠 분량이 적정한가의 논란에서, 상당수의 반론들은 이런 게임들이 수백~수천시간을 플래이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으로 귀결된다는 것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어떤 게임은 수시간만의 경험만으로 수많은 게이머들을 매료시킨다. 어떤 게임은 수백, 심지어는 수천시간의 경험을 통해서만 그 가치를 증명하는 게임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게이머들은 ‘질=양’이라는 공식으로 게임을 판단하려 한다.


이들이 잘못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게임은 기본적으로 상품이다. 자신이 투자한 만큼, 그만큼의 효율과 지속성을 거두고 싶은 것이 게이머들에게 있어서 인지상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0~20시간의 훌륭하고 아름다운 경험보다는 반영구적인 경험을 선호하는 게이머들의 양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들은 상당히 인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문제제기는, 게임의 엔딩 이후에도 게임의 경험을 지속할 수 있게 만드는 소위 ‘엔드 컨탠츠’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어지게 된다. 결국은 게임이 어떻게 계속 지속되며 소비되게 되는가,그리고 게이머들은 왜 그런 수백-수천 시간을 소비할 수 있는 것에 매료되는가, 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라프 코스타는 게임의 재미를 ‘구조의 학습’이라 보았으며, 루돌로지는 게임이 재미를 통해서 정의된다고, 네러톨로지는 게임의 서사 속에서 얻는 카타르시스가 게임을 하게 만드는 내재원인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게임들’(콜옵 시리즈, 몬스터 헌터 시리즈, 문명 시리즈, 포켓몬스터 시리즈 등등)은 수백-수천시간을 했다는 증언과 혹은 다른 게이머들 역시 그렇게 즐겼을 것 같은 가능성을 엿보여주면서 기존의 논지들을 살짝 벗어난듯한 인상을 준다. 어떻게 이야기가 끝나는 이후의 지점에서 게임이 지속되며(네러톨로지), 어떻게 더이상 구조를 학습할 수 없는 지점(모든 패턴과 특징을 다 외워버리는)에서 게임이 지속될 수 있는가?(루돌로지와 재미 이론) 그리고 여기서 피로사회의 담론을 살짝 끌여들여보고자 한다.


한병철의 피로 사회는, 기본적으로 사회가 무한 긍정의 사회로 접어들면서 생기는 ‘피로’가 사회문제의 근저에 깔려있다고 지적한다. 피로사회의 기본은, 세계가 네가 할 것이 무엇인지를 규율하는 것이 아닌, 네가 세계에 대해서 어떤 성과를 거둘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 즉 성과 중심의 성과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긍정의 메카니즘이란 더이상 멈추지 않고 계속됨을 의미하며, 이러한 긍정의 메카니즘 속에서 인간은 성과를 내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소진하고, 그 과정에서 피로와 우울에 사로잡히게 된다.또한 성과사회는 극도의 나르시즘 사회인데, 모든 외부의 소멸과 외부적 예외들이 모두 내재화되면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다.’라는 명제에 대한 극한의 추구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한병철은 이를 ‘팽창한 자아’라고 이야기하였다.


즉, 수백-수천시간이 지속될 수 있는, 소위 엔드 컨탠츠들의 구조란, 게이머에게 재미가 아닌 ‘성과’를 제시하면서 게이머들을 유혹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게임은 더이상 놀이가 아닌, 성과를 위한 노동이 된다. 게이머는 계속해서 더 강해지기 위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게임을 플래이하고 게임 역시 게이머들에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피드백한다. 그리고 게이머가 이를 통해서 경험하는 것은 '자아의 무한한 팽창'인 것이다. 물론 게임이 끝난 이후에도 게임이 지속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엔드 컨텐츠 말고도, 기본적인 게임의 내부에도 ‘성과’의 매커니즘은 들어가있다. 현세대 이후로 일반화된 트로피/도전과제 시스템과 게이머들이 이를 달성하기 위한 행위를 ‘작업’이라 부르는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게임에는 ‘끝’이 있다. 대부분의 게임들과 게임 구조는 ‘서사’에 의존하고 있으며, 굳이 ‘서사’를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하나의 게임이 보여줄 수 있는 구조에는 ‘한계’가 있으며, 도전과제 역시 그러하다. 디스가이아 시리즈를 예로 들어보자. 분명하게 디스가이아 시리즈 전체에는 ‘바알’이라는 숨겨진 끝이 있다. 거기까지 도달하는데 몇백시간이 걸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노동인 동시에 하나의 끝을 위한 준비이며, 결국에 게이머는 거기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본질적으로 게임 내부적 관점에서는 엔드 컨탠츠란 끝이 있을 수 밖에 없는 무언가이다. 반영구적 혹은 영구적인 개념으로서의 엔드 컨탠츠는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한병철이 지적한 바대로, ‘나르시즘’의 문화로서 성과사회는 게임과 엔드 컨탠츠에 100% 부합하는 설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도전과제 ‘작업’에 있어서 다른 타자의 도움이 존재할 수는 있지만, 그 도전과제를 달성한 자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스가이아 처럼 내부적인 요소만으로 수백시간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게임은 극히 드물다. 여기서 게임의 ‘엔드 컨탠츠’는 ‘게임의 끝’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게임 구조 외부의 것을 끌어들인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라는 변수다. 대부분의 게이머들이 ‘게임이 지속가능한가?’, '혹은 게임이 오랫동안 플래이 가능한가?'의 여부를 멀티플래이의 유무로 판가름한다는 것은 많은 커뮤니티들의 글이나 댓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들이다.


게임을 반영구적인 무언가로 만들 수 있는 ‘인간’이란 변수는 게임이 제시할 수 있는 최고의 성과(타인의 정복)이다. 인간은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학습할 수 없다. 물론 게임의 구조 내에서 구조를 더 잘 파악한 인간이 유리한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철권 시리즈 처럼 ‘칼같은 법칙’(프레임 단위의 공방, 손실과 이득)이 지배하는 구조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타자와의 경쟁에서 구조의 학습은 상대인간을 넘어서기 위한 어드밴티지에 불과하다. 더 잘 알고 있으면, 상대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존재할 뿐이다. 구조의 학습과 내가 그 구조를 학습하기에 오는 재미는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중요한 것은 상대-인간을 쓰러뜨리는 것이며, 그것이 성과화 되는 게임의 구조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경쟁상대로서의 인간은 게이머에게 있어 ‘철저한 타자’이며 이는 게이머의 나르시즘을 강화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할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멀티플래이는(주로 콜옵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타자와의 경쟁을 유도하고, 그에 대한 ‘긍정적’인 피드백과 함께 게이머를 ‘나르시즘’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콜옵 멀티의 전통인 명성모드와 총기 스킨 작업을 보자. 게이머는 오로지 ‘자신만이 볼 수 있는’ 총기 스킨을 위해서 게임이 요구하는 온갖 어려운 행위들(헤드샷 몇번, 근접킬 몇번 등등)을 충족시킨다. 이는 심지어 타자에 대한 과시일수도 없다. 킬캠에서 몇번 보여지는 한정 스킨들은 타인에게 있어서 짜증의 요소와 조롱의 요소(저 인간은 게임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아부은거냐)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대부분의 엔드 컨탠츠-멀티 플래이의 본질이다. 게이머는 인간을 쓰러뜨리기 위한(정복하기 위한, 혹은 이기기 위한) 성과를 위해서 경쟁한다. 그리고 게임은 이에 대한 긍정적인 피드백들을 제공한다. 그리고 멀티플래이는 일종의 영원히 끝나지 않는 ‘노동’이 된다. 플래이어가 소진되기 전까지, 멈출 수 없고 끝도 없는 게임 노동, 그 자체다.


게이머의 나르시즘을 충족하기 위한 게임 노동의 최첨단을 달리는 분야는 바로 AOS 장르다. AOS 장르는 상당히 독특한 게임 흐름을 보여준다. 먼저 게이머들은 케릭터를 고른다. 그리고 이들은 매번 게임마다 ‘똑같은 라인에서 출발한다.’ 게임을 오래동안 한 사람이 어드벤티지를 얻지 않으며, 게임을 막 시작한 사람이 불리한 지점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기존의 게임들이 수십시간에 걸쳐서 쌓아올리는 ‘플래이어가 강해지는 과정’을 단 30분~40분 만에 수행한다. 모두가 평등한 출발선에서 시작하는 평등함, 그리고 강렬하면서 짧은 자극. AOS의 매력은 ‘마약’에 비견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동시에 게임은 게이머에게 ‘기계’가 될 것을 강요한다. 기존의 게임에서 일, 시간 단위로 이루어졌던 일들은 이제 초단위로 이루어진다. 롤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롤에서는 20분간 한 라인에서 대략 200마리의 미니언이 생성된다. 프로의 경우, 20분대의 CS(미니언 킬 스코어) 200, 심지어는 200을 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일반적인 게이머의 20분대 CS는 100마리 전후, 즉 게이머는 1분에 미니언의 깨알 같은 체력을 보고 판단하며 막타를 쳐야하는 고도의 정밀한 행위를 ‘12초 마다 한번씩’ 해야한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각 라인마다 맡아야하는 역할들, 미드 로밍, 정글 갱킹, 봇 서포터의 역할이 있다. 게이머는 CS를 관리하면서 각 역할에 맞는 행위를 해야한다.


그렇기에, 5명이 모여서 팀플을 강조하는 게임의 모토와 다르게, 게임의 대부분이 결정되는 20분 동안은 오히려 ‘극한의 싱글 게임’에 가깝다. 각각의 게이머들은 각기 자신의 역할을 기계적으로 수행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그렇기에 게임은 5 대 5 팀싸움이 아닌 1:9의 싸움의 양상을 띈다. ‘내가 이기고 싶으면’, 타인과 협력을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지 감시'해야한다. 롤을 내 잘못을 타인에게 전가시키는 정치에 빗대는 비유는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닌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나르시즘을 위해서 만인에 만인에 의한 투쟁을 벌이는 게임, 그것이 바로 AOS인 것이다.


이렇게 성과를 강조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게 끊임없이 유혹하는 것이 과연 나쁜 일일까? 물론 '성과'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한병철이 피로사회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는 점은,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 성과가 끝없이 성과를 불러일으키는 '긍정의 매카니즘' 자체이다. 심지어 한병철은 성과를 거부하고 아무것도 안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 역시 아무것도 안하는 것에 대한 '긍정 행위'로 간주하였다. 한병철이 제시하는 대안은 '되돌아보는 것', '멈추는 것'에 대한 추구였다. 물론 이 담론을 게임 시스템에 적용시키기에는 여러가지 무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AOS 장르와 같은 한없는 긍정, 한없는 소진, 한없는 기계화와 밀실화에 대한 저항, 그리고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게임과 경험'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흐름이 아닌 다양한 방식의 실험과 탐구가 일어나야 할 것이다.



덧.


이 글을 마치면서 한병철의 피로사회라는 상당히 복잡하고 어려운 저서를 들고와서 논지를 전개한 점, 그리고 피로사회가 현대 성과사회 전반을 공격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일부를 긍정하고 일부를 부정하는데 쓰는 다소 편의주의적인 해석을 하지 않았나 라는 반성이 든다.